속이 좀 편해지고 나니 머리를 잔뜩 지배하던 본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도, 도망치고 싶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집니다. 순간의 격통을 이기지 못함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싶은 생각을 뒤로하고 살갗에 닿는 기운이 낯설다는 걸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닌 이방인의 기운. 그럼에도 네 그 기운을 경계하냐면 아닙니다. 아예 낯선 만남. 어차피 인간들은 신에 대해 알지도 못하며 알아채지도 못할 테니 지금은 인간의 몸 껍질 뒤집어쓰고 인간 놀이를 할 시간 아니덥니까.
공물도, 신격도 모두 모르는 척. 춘유록빛 눈 덮은 눈꺼풀에 담기는 공허함 모르는 척. 인간들을 흉내 내어 새로운 연을 만나 교류하고, 옅게 만나고, 누군가의 감정 쏟는 일을 듣고, 흥미를 채우면 그렇게 흐려지고. 늘 있던 일. 네 절대 깊게 발 담그지 아니하며 오로지 흥미 본위로 이루어지는 일. 잘 하는 일.
"정말 없으신가요..?"
네 나지막이 묻고는 행색을 살펴보자 한 손을 입가로 올립니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는 듯하는 것은 행색 살피는 것에 수줍은 모습 보이는 것 같으나 기실은 네 수백 년간 다져진 버릇입니다. 손바닥에 눈이 박혀있으니, 상대를 쳐다보고자 할 때 자연스레 손 올라가던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신경 써준 것이 선행이 아니면 무엇이겠나요?"
운이 좋은 것인지 네 유카타요 하오리는 깨끗하며, 안색은 아직 창백하나 아까처럼 죽을 것 같지는 않더랍니다. 마주함. 그리고 시선의 회피. 그럼에도 네 어떤 기색 보이지 아니하며 손을 내리니, 잔잔한 미소 보이는 겁니다.
"맛집이라 하면.."
알고 있는 곳은 많지요. 정갈한 곳을 네 제법 알고 있으니. 점심으로 무엇이 좋을까요, 나폴리탄? 초밥? 라멘? 네 메이드 카페가 무엇인지 고개를 기울입니다. 그게 뭐하는 곳이지, 떠올리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가요.
"사랑이 가득한 곳은 나도 좋아하지 않아요. 혹시 그대,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요?"
대답한다면 네 은은히 두 손 모으며 웃을 겁니다. "나는 제법 숨은 곳을 잘 알아요." 하며.
시이의 손에 핸드폰이 놓인다. 순간, 스즈라는 계집이 조금 가엾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순박한 애였다. 시이가 하는 말은 단순한 가스등 조절에 불과했다. 어두운 사실을 두고 여전히 밝다고 하는 단순한 것이다. 거기에 자극적인 맛소금을 살짝 뿌려줄 뿐. 건강하다면 걸려들 일이 없다.
아둔해보이는 피싱이 왜 횡행하는지 아는가? 아둔한 사람들이 걸려서다. 아둔함을 가장하여, 거기에 속아넘어갈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착취한다.
시이는 그걸 사랑으로 한다. 끔찍한 계집애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런 인간상을 오래도 보았다.
싸워서 녹초가 된 사람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걸 선뜻 권유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했던 말이다.
권하는 사람도, 응하는 사람도, 병들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일.
그러므로 스즈란 애는 정말, 순박하면서도 분명히 어딘가 병들어 있다. 나는 알아본다. 시이도 알아본다. 갤러리를 열어보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결핍. 시이와 너는 어딘가 맞닿아 있구나.
그리고, 방울소리.
시이는 사진을 지우고, 라인 방의 사진도 지우고 나서야 폰을 돌려주었다. 그 얼굴은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여자아이 무리의 갈등이 조용히 봉합된 이후의 불길함을 담고.
"응응! 이거로 OK인 거네. 나,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좋아해. 스즈쨩은 역시 좋은 아이구나. 아까 것도 분명 장난이었던 거지. 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지. 하지만 이해해줘, 나 스트리머니까. 알잖아. 요즈음 세상에 믿을 사람이 많이 없는 거 말야. 다들 좋아한다고 했다가 흠 하나만 보이면 바로 돌아서니까 말이야."
스즈의 머리를 토닥이는 손.
"스즈쨩은 나랑 약속했으니까, 안 그럴 거지? 약속의 증명으로 우리 사진 찍을까? 나, 귀여운 인형이라던지 있으니까. 엉망이 된 얼굴쯤은 예쁘게 편집해줄 테니까 안심, 안심☆ 이 사진 찍고나면 스키야키 먹구, 스키야키도 잔뜩 찍자. 분명 사진 잘 나올 거라구."
"진짜? 진짜 사과하는 거지? 아, 정말 귀찮은 여자애네. 딱히 미안하지 않지만 지금만 사과해서 모면하자, 하는 사과 아닌 거지?"
시이는 사과한다는 말을 듣곤, 창틀에 걸처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헤헤, 나두 미안해... 키모오타라던지는 역시 너무 심했지. 부힛하면서 웃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너무 심한 말을 했다구 생각했어. 그치만 역시 머리는 좀 더 손질하는 게 좋을 거 같다구 생각해..."
사과하는데 건방지게 그런 쿠사리 놓지 말란 말이다. 시이는 사과를 받고 나니 금세 기분이 좋아진듯이 다시 킹받게 창가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일단 나, 오타쿠는 맞지만 그렇게까지 오타쿠인 건 아니야. 페그오라던가두 안 하고(돈이 없으니까...) 혼자서 밥도 잘 차려먹고(혼자 사니까...) 방송 하는 거 빼고는 그렇게 오타쿠들이랑 접점 있는 것두 아냐.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은 기쁘지만 좀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구(너무하네...)"
그리고 해맑게 진심을 말했다.
"그래도 오타쿠 지식은 있는 편인데, TRPG라던지는 전혀 모르겠어. 남들 보면 맨날 음침하게 주사위 굴리면서 웃구 그러던데 너도 그러는 거야?"
요조라와 헤어지고 마츠리에서 가보지 못한 곳을 여기저기 둘러보자 슬슬 노점들도 하나씩 문을 닫고 있었다. 마츠리가 하루만에 끝나는 것은 아니니 내일도 같은 자리에 노점은 생기겠지만 일단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얄밉게 사진까지 보내놓은 내 여동생 또한 슬슬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 같이 집에 갈까하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딱 한명이 나를 부르는 애칭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새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쌍둥이 아니랄까봐 나와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을만큼 노을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손을 붕붕 휘둘러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 그러다 다 떨어지겠다. 떨어지면 또 시무룩하게 있을꺼면서. "
손에 있던 링고아메, 어깨에 멘 가방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린다. 빠르게 다가간 나는 손을 뻗어서 어깨에 있는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두개나 들려있는 링고아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는 나 주려고 산건가?
" 같이 먹으려고 화과자 좀 샀는데. 이건 집에 가서 먹고 링고아메부터 먹어야겠네. "
축제에선 가장 흔한 간식이라 자주 먹는 것이지만 또 아는 맛이 무섭다고 달달한 링고아메를 생각하니 침이 절로 나온다. 철수하는 노점을 양쪽에 두고 걸어가며 리리를 향해 물었다.
누구나 바람을 갖고 소원을 갖고 살아간다. 대단해지고 싶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 기억되고 싶다. 이루고 싶다. 멋진 세계를 만들고 싶다. 나에게 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 마음껏 행복해지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지켜내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 하다못해 정 그런 것마저 없다면, 무언가 바랄 것을 찾아내고 싶다. 마치 색색깔로 화려하게 피어나는 수면을 유영하는 연등들처럼.
그러나 그 중에는 불이 꺼지고, 두 번 다시 불을 붙일 수도 없게끔 일그러지고 찌그러져 누군가의 정교한 손길이 없다면 다시는 못 쓰게 되어버린 그런 연등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지 않는가? 그런 것들을 수면 아래로 거두어가는 게 무조카게레의 일이니까.
한낱 망가진 연등이 자신을 거두어가는 손을 알아채고 반항하거나 얌전히 순응하고 가라앉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코앞의 이 소원을 잃은 소녀도 마찬가지다. 손을 뻗으면 시니카는 쉽게 수확될 것이다. 다만 망가지고 불까지 잃었음에도 아직 가라앉지는 않았을 뿐.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가, 커다란 구식 카세트플레이어 같은 것에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달린 원통 같은 게 끼워진 기계를 꺼내서는, 원통 끄트머리에 달린 입으로 무는 팁을 물고는 버튼을 누른다. 스으읍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그녀가 내쉬는 숨이 투명하고 따뜻하지 않고 하얀 김이 서린 차가운 것이 된다.
나 같은 사람의 숨결은 차가운 게 어울린다.
히키에게 닿지 않도록 입김을 후 불어낼 때에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 옅은 망고스틴 향이 한 가득 걸렸다. 시니카가 근처에 맛집이 있냐고 물은 것은, 그 이국의 과일향의 차가운 숨을 한번 내뱉은 뒤였다. 그리고 "그 정도네요." 하고 덧붙였다.
"소화하기 편한 게 좋지 않을까요. 당신, 속이 아직 불편할 테고."
좋아하는 음식이라느니 하는 것을 꼽는 것도 시니카에게는 고역이다. 오늘 먹은 야미나베처럼 불시의 지뢰가 입안에서 터지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히 음식이라 해줄 만한 것이라면 그녀는 별 투정을 하지 않고 먹어넘기곤 하니까. 시니카는 방금 야미나베를 나누어주었던 천막을 뚜렷한 불신이 담긴 못마땅한 눈길로 한번 힐끗 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