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이의 근간은 인간이다. 먼 옛날, 쇼군에게 이름을 하사받은 여걸의 망념이 핵이 되어, 방울소리 울리는 복도의 폭풍을 맞으며 만들어진 유령이다. 유령은 괴담을 먹고 자라 신이 되었다.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다 소문이고 풍문이다.
그러므로 시이는 과하게 인간답다. 평생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어졌으며,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의지해버리고, 배신당하면 깊게 원한을 품는. 인간된 신이다.
그러므로 반쯤 인간인 자손을 둔 후미카가 시이를 자식처럼 대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처럼 대해주는 후미카를 시이가 졸졸 따라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고.
"에헤, 에헤헤... 뱃놀이 할 수 있는 거야? 시이는 오리배보다 나룻배가 더 좋아. 오리배는 지붕이 있어서 하늘이 안 보이잖아. 꽃놀이에는 하늘이 있어야 하는걸..."
교토 풍의 화려한 꽃놀이는 정말로 보기 즐거웠었다. 시이는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바보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재잘대다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번민했다.
후미카가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몇 초간, 타임세일에서 나물을 앞에 두고 집어가느냐 마느냐의 고민처럼, 시이는 고민했다. 그리고 본인의 카드를 꺼낼까 말까 하는 속물의 싸움에서 졌다.
꺼내지 않았다.
그래, 돈 없단 말이야!
나, 나는 과일도 타임세일이 아니면 먹지 못한다구-
신인데도 궁상맞은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이 사람도 아닌 녀석들아!
아무도 질타하지 않았는데 속으로 변명을 바락바락 외치며, 시이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아... 아, 나는 트로피칼후르츠 맛이야. 괜찮다면 나눠먹지 않을래? 나, 초코도 말차도 전부 좋아하니까. 싫으면은 어쩔 수 없지만-"
흥미롭다는 말에 렌은 뺨을 긁적였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듣고 싶다는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나쁜 짓을 하여 지옥에 가는 사람을 세상이 없어질 때까지 수용해둔다면 말이지. 가장 첫번째로 지옥으로 들어간 사람이 가장 불리하고 제일 마지막에 태어난 영혼이 가장 유리한 구조이잖아. 그렇다면 그건 불공평한 처우가 아닐까... 지옥에 갈 정도를 정하는 것도 애매하다고 생각되고.”
렌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다가 뺨을 긁적였다.
“뭐, 그냥 내 생각일 뿐이니까. 지옥보다는 윤회 쪽이 취향이기도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렌은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 질문에 작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여름. 여름이 좋아. 덥고 습하고 해도… 바다도 가고 계곡도 가고, 차갑고 시원한 것도 많이 먹고. 아, 나 그리고 수영부거든. 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렌은 아미카가 승낙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자 그새 또 몸 위에 올라앉아있던 벚꽃잎이 툭툭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그렇긴 하죠. 처음 지옥에 간 사람만큼 억울한 사람이 없겠네요. 그리고 지옥에 갈 기준이 애매한 것도 맞고요.."
그저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마지막 인류가 나올때까지 고통받아야 한다니,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영원히라는 개념으로 이를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생각해보면 불공정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죄의 기준은 늘 바뀌는데 과거엔 죄였던게 지금은 죄가 아니라면 그 죄로 지옥에 간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저언... 죽으면 그저 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마치 컴퓨터처럼 완전히 끝나는거죠. 물론 사람과 컴퓨터를 비교하는건 아니지마안.."
어쩌다보니 삶과 죽음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되었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아미카에게 죽음은 그저 끝, 영원한 깊은 잠 같은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래서 아미카가 죽음을 숭상하는 건 아니었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잠은 지금밖에 못 잘태니 오히려 더 자두자,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수영부라, 확실히 여름을 좋아할만 하네요..! 전 물이랑 엄청 친한 편은 아니라 딱 빠져 죽지만 않을 수준인데에.. 멋지네요!"
렌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미카도 자리에서 일어나 렌 선배와 같이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벚꽃을 지나며 아미카는 나중에 또 벚꽃을 보러 올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누구랑 보러 올까..? 그건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아키라의 인사에도 요조라는 숨은 그대로 눈만 깜빡였다. 그런 모습은 그냥 보면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빛은 오히려 관찰하는 기색이었다. 강아지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낯은 가리지만 그래도 관심은 보이는 그런 종류랄까. 어머니인 그녀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아키라의 말에 난처해하지 않고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낯을 가리는 건 맞지만 경계하는건 아닐거랍니다. 무심한 면이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아키라에게서 체크카드를 받아 계산을 마쳤다. 요조라는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둔 건 아니라서, 그가 뒷목을 매만지다 손을 내리는 모습도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키라에게 카드를 돌려주는 것도 보고 있다가 이름에 대한 물음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대답은 그녀가 했지만.
"네. 애칭이에요. 요조라(밤하늘)이니까 요루(밤), 이 애의 오빠는 마히루(한낮)이라서 히루(낮)이라고 부르고 있죠. 아, 그 쿠키와 초콜릿은 히루의 작품이에요. 그 애는 쇼콜라티에와 파티시에를 겸하고 있어서 올해부터 종종 가게에 나올 예정이랍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이전날 매장에 있던 과자와 초콜릿 진열장도 히루의 작품이라고 한다. 호시즈키당을 이을 때까진 독자적인 상품들을 내놓거나 가게를 확장해 따로 코너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여느 어머니들이 그렇듯 잔수다를 떨던 그녀는 요조라가 소매를 꾹 잡자 어머, 하고 수다를 멈췄다.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도련님. 애들 얘기만 하면 말이 많아져서, 실례했네요. 호호..."
다시금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한 그녀는 원래 했던 부탁이 떠올라 맞다, 라며 말을 이었다.
"참, 요루의 축제 구경을 부탁하는 얘기를 했었죠. 으음. 요루, 안 갈 거니? 아빠랑 히루는 언제 올지 모른단다. 엄마는 자리 못 비우고." "아빠, 더 늦는대... 문자 왔어..." "어머 그렇니?" "그러니까... 갔다올래..."
가겠다고 말한 요조라는 어머니의 뒤에서 나와 들고 있던 작은 스케치북을 맡겼다. 그녀는 스케치북을 받고 한 손으로 딸아이의 머리와 옷깃을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용돈이 든 작은 주머니가방을 손에 쥐어주고서 노점 너머로 내보내주었다. 유카타에 샌들 차림을 한 요조라가 아키라가 있는 쪽으로 나와서 아키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활짝 핀 아이의 낯을 보자, 문득 이 모든 것이 지금에 와선 부질없는 일이란 사실이 새삼스레 상기되었다. 울고 있는 어린 신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고 싶어서 달래주어야겠다는 생각, 이런 마음을 먹어봤자 후나가츠히메의 아들은 이미 천수를 다해 세상을 뜬지 오래다. 생전의 본인에게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선의를 그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타인에게 주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한순간 자조가 스쳤으나 번민은 없다. 올바른 사리에 맞고 맞지 않기를 논하기에는, 이 모든 일의 첫머리부터 지독하리만치 단단한 합리에서 비롯된 행각이 아닌가. 들려온 말에 후미카는 고개 들어 어린 신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걸친 모정이니 무엇이니 해도 결국은 겉으로 보아 제 쪽이 한 뼘은 넘게 더 작으니 그 꼴은 조금은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시이니?"
그리고 동시에 지금까지 서로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이야기가 어찌저찌 흐르다 보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후미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뱃놀이 이야기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나는 후나가츠히메라고 불린단다. 이름의 첫 글자는 船자를 쓰지. 이름대로 배와 어업에 관한 일을 맡고 있단다. 이곳에서는 토미나가 성의 후미카라 하고 말이야."
그러며 후미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지갑을 꺼내 계산을 마쳐버렸다. 시이 내면의 속물적 번민에 흔들릴 시간은 주지 않겠다는 듯 신속한 행동이었다. 풍어신은 신앙이 풍족했으니 지갑 사정도 넉넉하다. 현대에 와서도 수산업의 위상은 시들지 않았으며, 외려 산업의 규모만을 따지면 과거보다 다방면으로 증진되었다. 그에 대한 안전까지 덤으로 맡는 데다, 평상시에 사적으로 돈 쓰는 일이 드문 그로서는 계산할 상황이 생기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꽃구경은 우선 먹고 난 뒤에 갈 생각이니?"
라고 말하며 제 몫의 아이스크림에 숟가락을 꽂아 넣는다. 후미카가 고른 맛은 마침 시이가 언급한 말차맛이다. 그는 멀뚱히 제게로 다가오는 숟가락을 바라보다, 머리카락을 흐르지 않도록 넘기고선 한 입 받아먹는다. 알알이 언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녹아가며 뒤섞였다. 트로피칼 후르츠라면서 사실은 과일맛보다는 감미료의 맛이 난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자."
후미카도 아직 먹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퍼서 시이에게로 내밀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라는 듯, 별다른 말도 없이 건네주는 태도가 영 심심하다.
애초에 한 번 봤는데 이렇게 낯을 가리는 것을 보면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때 본 것은 정말로 짧은 순간이었으니 기억에 안 남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도 만났던 모든 이들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녀의 존재도 호시즈미당이라는 매개체가 있었기에 기억이 가능한거였고. 어떻게 보면 그녀의 입장에선 자신은 기억 속에서 애매한 존재. 딱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아키라는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카드를 돌려받으며 그는 카드를 다시 지갑 속에 쏙 집어넣었다. 요조라니까 요루. 마히루니까 히루. 참으로 직설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외우기는 쉽겠다고 생각하던 아키라는 자신이 받은 봉투를 바라봤다.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 호시즈미당의 차기 사장이 되는 것일까.
"그렇군요. 그럼 맛있게 먹도록 할게요. 다음에 가게에 들렸을 때 계시면 한번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학생회에서 먹을 간식을 사기 위해서 자주 갈 것 같거든요. 늘 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 그리고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나 어머니도 제 이야기를 할 땐 대충 그런 느낌이어서. 충분히 이해해요."
결국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물론 모든 부모가 그러진 않을지도 모르지만 호시즈미당의 사장에게 있어서 자식들은 매우 소중한 보물임에는 분명해보였다. 사랑받으면서 자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다 모녀의 대화 끝에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말이 들려오자 아키라의 시선은 자연히 요조라에게 향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 역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뭔가 상당히 어색한 느낌이 아닐 수 없었다. 데리고 둘러보라고 해도 말이지. 그래도 일단 부탁받은 거니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을 하며 아키라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소개를 했다.
"일단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호시즈미 씨. 시미즈 아키라에요. 음. 일단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을까요? 저는 그냥 일단 전체적으로 둘러보면서 꽃이나 구경할까 하거든요. 벚꽃이 이렇게 떨어지고 있으니 안 보면 손해기도 하고요."
자신의 원래 플랜을 이야기하며 아키라는 요조라에게 보고 싶은 곳이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어쨌든 데리고 다니기로 했으니 하루는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