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즈미에는 사쿠라마츠리라는 봄 축제가 열린다. 렌도 초등학생 때부터 가미즈미에서 살았던 만큼 이 축제가 열리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기도 하고 자주 놀러가기도 했었다.
오늘은 벚꽃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공기는 덥지 않게 적당히 따스하고, 햇볕은 부드럽고.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 것이 벚꽃잎을 살며시 떨어뜨려 분홍색 눈이 내리는 것을 감상하기에도 적당했다.
렌은 가볍게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산책을 나왔다. 이런 날에 집에만 있으면 손해를 보는 느낌이었으니까. 북적거리는 벚나무 거리를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활기찬 거리의 분위기를 느끼다 이내 벤치에 앉아 좋은 날씨와 떨어지는 벚꽃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빈 자리가 나 앉은 벤치 맞은편에도 벤치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 여자애가 누워서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렌은 자신이 신경쓸 필요 없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맞은 편 벤치라 계속해서 시야에 잡히는 데에다가 길거리에서 저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어있다가 어떤 나쁜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신경이 쓰이는 상태였다. 예를 들어 지갑을 훔쳐간다거나 추행을 한다거나, 벤치 팔걸이에 머리를 부딪힌다거…나…?
렌은 딱! 소리가 크게 나게 머리를 부딪히는 여자애의 모습에 놀라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지랖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쪽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며 물었다.
“괜찮아? 방금, 머리 엄청 세게 부딪힌 것 같던데…”
말이 편하게 나온 것은 그 여자애가 중학생 정도의 나이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벚꽃 아래에 오래 앉아있었기 때문일까, 렌의 머리카락에는 벚꽃잎 몇 장이 곱슬한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걸려 있었다.
얹은 손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토끼눈. 히로는 그 모습을 잠깐 감상하다 이내 헝클이듯 손을 떼었다. 잠자는 사자 어쩌고, 그런 흉내를 내는 줄 알고 적당히 어울려주었더니 그게 또 아니라 한다. 그녀의 도리질에 그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조금전부터 꿈이나 잠 따위의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보니 그녀의 실루엣도 어느정도 선명해지는 것 같다. 꿈꾸는 걸 그닥 좋아하진 않는데. 탁한 빛은 몽상가와 거리가 멀다. 결국 깨어나면 모두 녹고마는 게 싫다. 그녀의 나른한 웃음에도 히로는 별달리 입을 열지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로 낮게 내리깔린 눈꺼풀을 두어 번 정도 깜박인다. 뭐가 그리 좋을까. 히로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넌 토끼잖아.'
간신히 목구멍으로 집어 넣었다. 생김새나 하는 짓이나 영락없는 까만 토끼면서. 히로는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사자는 뭐든 잘 먹어야 돼." 하고 상냥한 어조로 뱉었다. 마치 그래도 괜찮냐는 듯이. 이렇게보면 히로도 참 유치하지 않냐고, 그깟 동물 덩어리들이 뭐라고 당근을 들먹이고 사자를 포기하게 만드는지. 히로는 자신의 유치함에 눈이 가늘어졌다.
히로가 잠들고 말 것이라는 신호는 충분히 주었으니 서로에게 부담을 덜고자 히로의 몸이 다시 그녀가 아닌 바깥쪽 방향으로 향한다. 애도 아니고. 마주보고 잘 순 없는 노릇이다. 돌아누운 채로 팔을 접어 머리를 베었다.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취향에 맞지 않는 행동이나 손을 뿌리 칠 만큼 매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아내었다. 포근한 단내와 아이들의 소란, 그녀의 사근한 목소리가 울렁인다. 느려지는 숨소리를 따라 의식은 아득해져 가고. 그러고보니 이름도 묻지 않았네. 잠이 든 히로의 웅얼거림이 조그맣다.
*
잠들었던 자세 그대로 요지부동이었던 히로의 졸린 눈이 희미하게 뜨였다 다시 스르륵 감긴다. 얼마나 지난거지? 체감 상 3교시 정도는 거뜬히 건너 뛴 것 같다. 잔소리 들으려나. 너무 깊이 잠들었다. 아마 그 잠토끼 탓이겠다. 고맙게 여겨야 할 지. 먼저 가고 텅 비어있을 옆자리로 몸을 돌렸다. 그럼 뜻 밖의 새근새근 잠든 그녀가 눈 안에 가득하다. 히로는 잠깐 눈을 부볐다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긁적였다. 왜 아직도 곁에 있는 건지.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얼굴로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이 지나치게 가깝다. 그녀의 가느다란 속눈썹이라던가 분홍 빛의 뺨을 물끄러미 감상하다 점점 소란스러운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다. 방과후 활동인가? 벌써? 그럴 리 없다. 그럼 아직 체육 시간이 덜 끝났을 가능성은?
그 순간 창고문이 갑작스레 벌컥 열리고, 히로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힘껏 굴려 매트아래로 쿵 떨어졌다. 머리부터 제일 먼저 떨어져 박았더니 이마가 쓰라리지만 히로는 어엿한 신이므로 고개만 고꾸라질 뿐 아무런 입을 꽉 다물었다. 이 아이와 이상한 소문에 휘말리기엔 서로 타격이 크다. 빨리 숨어야... ....라기엔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밝은 불빛이 창고 안을 가득 메우고, 바닥에 멍청하게 얼굴을 박고 누워있는 히로의 모습과 매트리스 위에 있는 여자아이란. 평소라면 수업이 끝나기 전에 창고 안에 올 리가 없었을 텐데. 히로는 꼬여가는 일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368 벚꽃, 봄을 상징하는 꽃. 아미카에게 벚꽃 축제란 무엇일까? 당연히 즐기는 것이다. 자면서 말이다. 오늘 아미카는 벚꽃을 즐기며 벤치에 걸터 앉아 자고 있었다.
"...위민스 챔피언십 매치입니다! 아, 이때 말씀드리는 순간 아미카 드롭킥!"
꿈속에서 아미카는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경기답게 전력을 다하던 아미카는 상대 선수에게 드롭킥을 날려 링 코너로 몰고 단숨에 크로스라인을 날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때, 선수는 앨보우로 반격..!
"딱!"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미카는 벤치 팔걸이에 머리를 부딪힌 뒤였다. 가끔 밖에서 아슬아슬하게 자다 어디 부딪히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오늘 또 이럴줄이야. 바깥에서 이랬다는 부끄러움도 없진 않았지만, 그것보단 아픈게 좀 더 심했다. 이때, 앞에서 보던 여자가 다가오더니 괜찮냐고 물었다. 아미카는 막 일어나 힘없는 목소리로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여자애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혹시 자고 있었던 것도 몸이 안 좋아서 졸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렌은 조금 더 걱정이 된 표정으로 바뀌었다. 물론 아미카는 원래 잠을 자는 것이 취미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처음보는 렌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잠깐만.”
렌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마를 살짝 덮고 있는 앞머리를 걷어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었다. 만약 밀어내지 않는다면 혹시 열이 있는 것은 아닐지 손등을 이마에 대어 체크하려 했을 것이었고.
“다행히 피는 안 나는데, 약간 혹이 난 것 같기도 하고.”
렌은 담백하게 손을 거두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음, 왜 졸고 있었던 거야? 혼자 왔어? 어디 아프다거나 하면 도와줄까?”
말을 뱉고 나니 괜한 물음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조금 멋쩍었지만 그래도 그냥 두고 가면 두고두고 신경이 쓰일 것 같기도 했다.
/여자라고 적은 것은 아미카가 착각한 것이려나? 전에 시이주에게서 렌이 여고의 왕자님 이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있어서, 혹시 시트에 여성이라고 잘못 썼나 확인하고 왔어 ㅋㅋㅋㅋ
괜찮은 것 같다는 말에 아미카는 잠시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찢어지거나 하는 꽤 큰 부상이었으면 괜히 부모님만 걱정시키고 본인도 좋을게 하나도 없으니까. 물론 겨우 자다가 부딪힌 것 가지고 그렇게 큰 부상이 생기는게 더 이상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 호들갑 떠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다행이네요.. 크게 다친거면 어쩌나 했어요..워낙 잠이 많은 성격이라아.."
아미카는 상대의 질문에 여전히 아픈 듯 머리에 난 혹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중간에 잠을 깨서 그런지, 여전히 평소보다도 피곤한 상태로 말이다.
"혼자 와서 자고 있었어요.. 아까 말했듯 잠이 많아서 어디서든 잘 자니까요.. 오늘은 벚꽃 축제를 느끼려고 혼자 와봤는데.."
아미카는 질문하려고 했지만 왠지 아닌 것 같아 말 끝을 흐렸다. 혼자 왔는데 잠들었고 위험할 수도 있다라.. 분실도 있고 추행도 있을 수 있고, 그런거엔 염두를 두지 않았던 아미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물론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뻔뻔하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가요? 전 나름대로 신경쓰이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에.. 별로 생각을 하지 않았네요.."
아미카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느끼고 고개를 잠시 숙였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적한 곳을 알려주냐는 제안에 아미카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이렇게 따라가는 것도 괜찮을까? 그래도 아까 그런말까지 했는데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이 가장 강했기에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겨울은 그에게 각별한 계절이지만, 언제까지나 애상에 잠겨 드리워 오는 볕뉘를 모르는 척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날씨는 맑고 따스하게 드는 햇살이 온화했다. 만사에 별다른 감흥 없는 풍어신조차도 밖을 나돌게끔 하는 여일(麗日)이니 다른 이들에게는 오죽할까. 흥성이는 거리에 나선 사람들의 면면은 모두 즐거움에 차있다. 하지만 신의 힘으로 만발한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마저도 누군가의 만성적이고 변덕적인 우울을 물리쳐주진 못하는 모양이다. 봄볕을 맞으며 거리를 걷던 후미카는, 어느 벤치 앞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었다.
"왜 울고 있니?"
담담한 목소리가 우는 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든다면 묵묵한 태도로 물어오는, 저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누군가가 보일 테다. 그에게는 길거리에서 눈물짓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일 선의는 있지만, 부드러운 낯으로부터 마음 깊이 우러나는 염려의 기색은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행동으로부터 가식적인 욕망은 묻어나지 않았다. 신은 그저 차분하고 평온한 눈으로 울먹이는 여자아이를 바라볼 뿐이다. 그 시선이 잠시 위를 향하더니, 후미카는 천천히 손을 뻗어 손바닥을 위로 펼쳐보였다. 흐린 날 비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늠하는 사람처럼 예사로운 행동이었다.
"날이 좋은데 말이야."
펼친 손바닥 안에는 떨어진 꽃잎 두어 장이 잡혀 있었다. 봄볕을 받아 따스한 생기와 온기 담긴 손이 우는 아이에게로 내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