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서 안 나오는 것이 나오거나 하진 않아요. 그건 연금술의 영역이잖아요."
끼기만 해도 건강이 좋아지는 팔찌라니. 정말로 그게 나오면 그 사람은 노벨상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아키라는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모를 뿐,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아키라는 그런 팔찌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광고로는 그런 효능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기도 하고. 그 사실이 불만족스러운걸까. 방금과는 다르게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미즈미를 바라보며 아키라는 괜히 고개를 도리도리 양옆으로 휘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1학년생 중에서 엄청 사랑에 관심이 많아보이는 애가 있어서. 어쩌면 그 애만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분위기를 보면 정말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였거든요. ...뭐, 누군가는 이미 사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도 그렇지 않은가. 봄은 사랑의 계절이라는 말도 있었다. 자신이 모를 뿐이지. 어쩌면 학교 뒷뜰에서 누군가는 벌써부터 고백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연인이 탄생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급생, 혹은 선후배. 참으로 다양한 조합이 이뤄질 것을 생각하며 아키라는 자연히 교내 연애를 허락할지, 막아야할지를 고민하다 자신이 너무 막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별 말 없이 넘기기로 마음 먹었다.
"어쨌든 2학년은 그럭저럭 평화롭다는 이야기로군요. 3학년은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애들은 많아요. 물론 수험 때문에 다들 바빠서 힘들어하는 것 같지만 어떤 애들은 올해야말로 후배를 꼭 꼬셔서 연인으로 삼고 말겠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사이카와 씨도."
혹여나 여자면 아무나 상관없다. 라고 생각을 하는 선배진들에게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그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물론 딱히 그녀가 지금 생각하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라 일반론적으로 선배에게 잘못 걸리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아키라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103 와아~ 미즈미주다! 별다른 건 아니고, 렌의 어머니가 500세 정도 되는 신인데, 태어나길 흐르는 강물에서 자연발생한 물의 신이고, 그 강을 다스리는 강의 신의 권속이었다가 독립했다는 설정이 있거든. 혹시 미즈미주만 괜찮다면 그 강의 신으로 선관을 짤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어서! 물론 거절해도 괜찮음!
>>106 허거덩 그런 설정이 있었구나?? 나는 좋아! 와! 권속 생겼다! 그런데 렌주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잘 모르겠네? 일단 임시스레에서 이야기 하고 렌주의 결정에 맡겨봐도 될까? 내가 지금 일상중이라 좀 걸릴 것 같은데 시트에 안 써진 설정이랑 어떤 성격인지 대충 정리해서 갱신해둘게~!
시이는 얌전했다. 눈물댐을 열고 나니 발악할 기운도 없는 듯이 잠자코 코세이를 따라갔고, 앞치마는 계속 잡고 있는 채였다. 코를 훌쩍거리며 울먹거리는 꼴은 분명 인간이면 인간이었지 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청자들도 쾌락신이란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겠지. 보이지 않을 때는 멋대로 믿다가, 보이고 나면, 신의 실체를 보여주고 나면 믿지 않는 것들이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곱절로 억울해져서 시이는 울컥, 입술을 앙다물었다.
"사람들 눈에 띄어서 일단 여기로 데려왔어요."
이 종업원도 분명 날 바보로 생각할 거야. 젠장, 오늘은 정말 정말 기분 좋은 최고의 하루였는데... 낭패야 낭패. 이렇게 만들어진 머리가 나도 싫어... 그렇게 생각하며 훌쩍거리는 소리가 커질 무렵. 종업원이 의외인 말을 건넨다.
"당신, 신이죠?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익숙해서."
카페에서 냅다 울어버리다니, 당신 상식이 있는 겁니까? 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분명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고개를 들면 보이는 얼굴은 분명 웃고 있다... 뭐, 뭐야 이 사람. 아니, 이 신! 신이 아니라 천사 아냐? 어쩌고엘 하는 이름을 갖고 있는 거 아냐? 팔백만의 신이 있다면 팔백만의 엔젤도 분명 가능하니까?!
"갑자기 일하는 곳에서 이런 해프닝이 발생해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뭐 큰 소동은 아니었으니까 딱히 신경은 안써도 괜찮아요. 서로 상부상조하는게 좋잖아요? 그래서 이름이 뭐에요? "
신이라고 인정해줬어... 시이는 금세 마음이 풀려선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나, 나 그러니까... 아메이로누시라구 해. 사탕의 아메여도 좋구, 비의 아메여도 좋아. 아메리카노의 아메도 좋고... 헤헤... 아, 아니. 이런 걸 물어본 게 아니구나! 그러니까 말이지, 난 아타마오카 시이. 헤, 외우기 쉽지? 직업은 쾌락신이야..."
미즈미는 모르쇠 일관했다. 아니 연금술도 그렇게 치면 화학의 영역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미즈미는 눈치 좋게 입을 다물었다. 오랜 시간 침묵하며 살아왔기에 힘든 일은 아니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해보니까 신 입장에서 무슨 건강을 신경쓴다고 열 올렸나 모르겠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생명의 염원이었으니 어쩌면 미즈미도 그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미즈미는 금세 무던해졌다.
"아하. 사랑꾼인가봐요- 사실 제 나이대 동년배들은 다 사랑에 심취해있을 시기잖아요. 안 그래요? 선배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연애에 몰두한 적이 있지 않나요?"
보통의 고등학생은 동년배라는 말을 잘 쓰지 않지만... 미즈미는 그걸 몰랐다. 직감적으로 그 아이가 신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즈미는 거기다 대고 '아 별 건 아니고 신들이 인간 좀 꼬셔야해서요'라고 말할 순 없었다. 눈 하나 깜빡 안하고 거짓말 하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게다가 미즈미가 본 드라마에 따르면 고등학생들은 죄다 사랑에 미쳐있었으므로 퍽 괜찮은 변명이었다 사랑을 위해 사람도 때리고 학교도 째고 집도 나가고 그랬다. 사실 미즈미가 주로 보는 장르 태그가 #로맨스 #고등학생 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니 잠시 넘어가자.
"부럽네요- 저도 사랑을 하고 싶은데 말이죠. 그렇지만 선배의 말대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있다면 저도 가능성 있겠죠?"
와하하, 분위기 심각한 줄 모르고 미즈미가 웃는다. 저 태연한 낯짝 보라니. 뭘 캐내려한듯 웃음으로 슬쩍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엇, 정말요? 그것 참 좋은 소식이네요. 개이ㄷ, 네? 왜 조심해야해요? 연애하면 좋은 거 아닌가요?"
미즈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길다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흩어졌다. 연애를 한다 => 나를 사랑한다 => 무사히 결혼 골인 => 상급신이 된다 여자면 아무나 상관없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미즈미는 인간이면 아무나 상관 없었다. 자기가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게 좀 걸리지만 뭐 어떤가. 천천히 노력해보면 될 일이다. ...인간이 늙어 죽지만 않는다면. 아차. 생각해보니 상대는 인간이었다. 미즈미는 잠시 웃고는 검지를 올렸다. "농담이었어요." 저 뻔뻔한 얼굴을 보니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모를 일이다.
"네! 최종적으로 짝, 아니 결혼을 목표로 하고 있답니다. 선배도 사랑에 관심 있으신가요?"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고 아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아애로 푹 숙였다. 그와 동시에 역시 알게 모르게 학교 내부에서 연애 관련으로 뭔가 이야기가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아키라는 생각했다. 그때 그 1학년도 그렇고, 지금이 2학년도 그렇고. 다음에 3학년을 만났는데 연애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하고 합리적 의심을 해보기도 하며, 다음에 3학년을 따로 만날 일이 있으면 연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아키라는 다짐했다. 만약 거기서도 연애 이야기가 나와버리면 학생회장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조금 고민해볼 필요가 그에겐 있었다.
"가능성이야 있겠죠. 사이카와 씨를 좋아하는 이도 분명히 있을테고 말이에요. 네? 아뇨. 아뇨. 아뇨. 아뇨!! 안 좋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와 연애는 안되죠!! 물론 하던지 말던지는 자유롭지만, 그런 이들이 사이카와 씨를 진심으로 좋아할리가 없잖아요!"
이 후배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아키라는 다급하게 두 손을 휘젓고 고개도 빠르게 양옆으로 휘저었다. 잘못하면 진짜 못된 마음을 품고 있는 이에게 잘못 걸려서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선도부에게 당분간 순찰을 더 빡세게 돌도록 지시를 내려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농담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와중, 아키라는 자신에게 온 물음에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역시 학교에 무슨 연애 관련 이야기가 퍼진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며 아키라는 일단 날아온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이 있냐, 없냐로 물으면 관심이야 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시작할 생각은 없지만요. 시미즈 가문의 사람으로서, 신중하게 하고 싶거든요. 무엇보다... 저보다는 상대 쪽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고... 그건 싫거든요. 네. 그것만큼은 정말로 싫어요."
중학생때의 일을 떠올리며 아키라는 괜히 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좋건 싫건 그건 자신에게 채워진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고 끊어서도 안되는 자신의 족쇄를 떠올리며 그는 애써 다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사이카와 씨는 왜 그렇게 연애를 하고 싶으신건가요? 그러니까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냥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니 괜히 궁금해서요. 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고요."
스즈의 이름을 작게 되아리며 중얼거린다. 외기 어려운 이름도 아니건만. 헌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녀는 어딘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검도부란 다들 이런 것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이내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하는 스즈덕에 잠겨있던 생각 속에서 깨어난 시로하는 잘 부탁한다, 라며 그것을 받아준다.
"으음... 하지만 곤란하구나. 견학이라고는 해도 보다시피 현재 검도부는 나를 제외하고 텅 비어있는 상태이니 말이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이 공간을 압도하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은 둘째치더라도 여기에 있는 것은 정작 스즈의 앞에 서있는 그녀, 시로하뿐이었으니 검도부 감독사범으로서의 그녀를 1:1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래서야 확실히 견학은 어떠려나... 그런 그 때에 시로하는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듯 그렇지, 라고 말하며 고개를 틀어 스즈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행히 따라가자는 말을 했을때는 얌전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어린애 마냥 떼쓰면서 난리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도 이 소녀가 일말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한다. 휴게실에 데려오니 아직도 울음의 잔재가 남아있는지 표정도 울상이었다.
" 아메이로누시라 ... 처음 들어보네요. 그래도 웬만한 신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언제 울었냐는듯 울상이었던 표정에 금세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웃어버린다. 감정의 진폭이 이렇게나 큰 사람이 있을수가 있나, 싶을때 소녀의 이름이 들려왔다. 아메이로누시, 아타마오카 시이 ... 아마도 전자가 신일때의 이름일테고 후자가 인간계에서의 이름이겠지. 들어보지 못한 신이라서 비교적 최근에 신이 된걸까 싶었지만 그런게 중요한건 아니다.
" 아타마오카 시이 ... 그럼 아타마오카 양이라고 부를께요. 내 이름은 이자요이 코세이에요. 부르는건 크게 신경쓰지 않으니까 편하게 불러도 좋아요. "
여동생의 존재 때문에 이자요이 군이라고 보통 많이 부르곤 하지만. 내 성만 오롯이 부르면 그게 날 부르는건지 내 여동생을 부르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주변에 그렇게 불러달라고 부탁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를 어떻게 부르던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다.
" 그리고 나는 ... 밤하늘의 별들을 관장하는 신이랍니다. 혹여 밤하늘에 관심이 있나요? "
하, 오늘은 정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날이네. 금방 기분이 좋아진것 같아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여전히 미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인간계에서 방송하는 쾌락신님이라니 ... 컨셉은 정말 잘 잡긴했지만 본인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긴하다.
처음 들어본다는 말에는 자연스레 노 코멘트였다. 시이는 신당도 신관도 새전함도 없는 아주 어린 신이다. 물론 그가 자란 곳이 곳이니만큼 어디가서 으름장으로는 지지 않았지만, 시이는 존재도 흐리며 쌓인 시간도 적어 결국 늙은 신들 앞에서는 맹렬히 짖는 강아지 정도로 하찮다. 아직 눈앞의 존재가 어떤 급인지 몰라서 시이는 건방지게 이름부터 불렀지만.
"아, 코세이 군이구나. 맘대로 불러도 된다니까, 나는 코-쨩이라고 불러도 되지? 응? 싫다면은, 코세이라구 부르겠지만. 그건 좀 아쉬워서."
겁먹은 개가 짖는 것과 똑같은 이유이기에 더 했다. 늙은 신들은 번듯한 신당도 있거니와 신관들도 여럿 데리고 있고, 새전함에는 언제나 쩔렁거리는 소리가 멎질 않으니까. 그들이 압박하려 하지 않아도 자의식과잉인 시이는 이미 눌려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하늘의 별들을 관장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헤벌쭉 웃던 얼굴이 굳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목에 소름이 끼치고 얼굴색이 웃는 그대로 창백해진다. 밤하늘? 그거 쾌락이랑은 비교도 안 되지 않아요? 물론 고댓적에도 하렘은 존재했지만 일본에서 완전히 정립된 건 최근의 일이니까요? 저기, 체급이 안 맞지 않아? 전산 실수하지 않았어? 왜 그정도 신이면서 알바나 하고 있는 거냐고-
어이-
"에..."
시이는 헤벌쭉 웃던 그대로 다시 후둑후둑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지, 짓,지금 그거, 죽기 전에 목을 베어줄 무사의 이름을 알고 가라는 그거?"
이래서 쇼군체제에 머리가 절어버린 녀석은 안된다. 가선 36인의 목을 벤다거나, 할복이 점잖은 처사인 에도에서는 무례를 끼치면... 그런 결말이니까.
네 대답 어찌 보면 타인에게는 안도할 기회였던 것인지, 발맞춰 걷는 것은 네 쪽에서 보폭 작은 탓도 있겠지요. 다만 네 보폭 늦추는 연유는 초대하는 사람이 당신이 아니거니와, 어린 인간 가는 길 모르기 때문이렵니다.
"…초대하는 것 자체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렌 군의 집이 어떠한들 내게도 기쁘고 좋은 곳입니다."
네 손 모으며 차분히 답합니다. 아무렴 네 웃지는 않았으나, 네 입에서 기쁨 소리가 나올 정도면 감정을 제법 표현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 공허라는 존재가 그만큼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을 알기나 할지는 차치하고, 짐승 된 감으로 말하자면 무리에게 인정받았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을 텝니다. 언젠가는 당신도 집에 초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당신의 집은 신사요 네 기거하는 곳은 재앙신의 진노로 저주받았기에 금줄에 둘러둔 나무 아니덥니까. 아마 안 될 겁니다.
"돼지고기, 쪽파 한 줌, 숙주나물 한 봉지.."
네 되뇌며 마트에 들어섭니다. 고기는 잘 모르겠으나 쪽파나 숙주나물 담긴 봉지 찾는 것은 쉽기에, 네 썩어버린 것 찾는 재주 역으로 이용하여 신선한 것을 쉬이 집어와 바구니에 넣는 것 돕습니다. 고기는 죄 신선하기에 고르는 것 어린 인간에게 맡기듯 하며 적긴 하지만 오늘의 저녁 재료로는 알맞게 채워진 장바구니를 한 번, 어린 인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옅은 미소 얼굴에 덧그립니다.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요리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안심하고 평소대로 만들어도 좋을 테지요."
아무렴 진실이렵디다. 네 먹는 것에 가림 없기에. 네 교복 위에 걸친 하오리의 소맷단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작은 지갑이요, 계산대로 향하면 뭐라 할 새도 없이 네가 계산하려 했을 겝니다.
관서의 풍어신 말인가. 그 이름 참 오랜만에 듣네그려. 아암, 그와 인연이 있기로는 나만한 신이 없으니 그에 관해 물으려 내게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일세. 그자는 해안을 따라 제 태어난 일대의 바다를 두루 총괄하고, 나는 그 인근에 자리잡은 지방을 지키는 신이었으니 예로부터 그와 나는 면당하는 일이 잦았다네.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었고 말이야. 내가 아주 원초적인 의미의 씨신氏神이었을 적부터 나를 보아왔고 나도 그가 미숙했던 시절을 아니 서로 부끄러운 꼴 아닌 꼴 다 보며 산 셈이라네. 연이 꽤 깊었다 할 수 있지. 예전엔 귀찮을 정도로 부대끼면서 지냈지만 말이야, 내가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하고 그에게 어느 사정이 생긴 뒤로부터는 자주 만나지 않았으니 어느새 안부 묻지 않은지가 천추는 된 듯하군.
……아, 이런. 나도 모르게 딴소리를 하고 말았네그려. 반가운 이름을 들으니 말이 새는 것이 참, 나도 그사이 늙은 것 같아. 아무튼간에 이야기를 계속하겠네. 자네는 아직 젊으니 잘 모르겠지만 서쪽에 사는 이들, 그중에서도 바다에 접한 지역의 사람들이라면 그곳의 신인 후나가츠히메를 모르는 이 드물다네. 이언하여 나는 그와의 친분이라면 자랑할 만치는 있다 호언하는데, 우선 이야기 하기에 앞서 내가 그 후나가츠히메 신을 업다시피 해가며 키운 신이라는 사실을 짚어두어야 하네. 자네는 알까 모르는데― 그 신은 성격이 참 특이해. 지금이야 그도 나이를 먹었으니 전만큼은 못하겠지만, 예전에 비하자면 사람이 된 것이나 다름없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 ………………. ……………….
……내가 아까는 그자 얘기를 하니 반갑다고 했었나? 그 말 다시 주워 담아야겠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이 기억 난 참일세. 그 녀석 아주 망나니였어! 하이고, 망나니가 뭔가. 아주 멧돼지였지! 첫낯에 대뜸 주먹질을 해대는데 양반이 될 리가 있나! …하여튼,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말했었지? 그래, 성격. 뭐, 이렇게 말했어도 지금에 와선 그리 험한 성정이 아닐 테니 걱정할 것 없네. 오히려 자네가 부러 무례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웬만한 실수는 눈감아줄 걸세. 워낙에 무던하니 말이야. ……무던하다는 이에게 왜 맞았느냐고? 예끼, 늙은이 부끄러운 일을 구태 들춰 봐야 하는감? 이리 끝내려니 선겁긴 하니…… 좋아, 내 옛이야기 하나 해줌세.
과경에 말하였듯 내가 젊은 신이었을 적의 이야기라네. 그때 내 신위는 지금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 스스로 이르기 민연하게도 가진 힘 역시 약했어. 그때만 해도 그 땅 일대는 벽지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네. 그런즉 나는 그때에…… 속되게 말해, 큼, 쪼들리고 있었다는 뜻일세. 믿는 사람 하나하나의 머릿수 지키기만 해도 고달픈데, 어느날부턴가 믿음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 직감했지. 아, 인간들이 다른 신을 믿고 있는 게로구나! 우리네 일이 그리 딱딱 정확히 나뉘어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나와 다른 신을 동시에 섬겼더라면 다른 신앙 쯤이야 있더라도 무방했겠지만 어째서인지 인간들은 나를 내팽개치고선 다른 신을 찾아가더군. 남의 신자를 뺏어가는 신에게 고까운 마음도 드는 한편, 그 얼굴도 모를 신이 얼마나 영검하기에 이 외진 곳에까지 명이 전해지는가 하여 나는 그자를 찾아가기로 하였네. 그래, 그 신이 바로 후나가츠히메였다네.
멱거하는 길에 인언 들어보자니 그 신 참 어진 성정일레. 뭇사람을 지키고 주리지 않게끔 먹이는 신이라면 내 딱한 사정을 애련히 여겨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런가? 그런 기대가 없었다 하면 가짓불이겠지. 참, 그때는 나도 생각이 짧았어. 막상 대담하게 된 그는 내 짐작과는 딴판으로 달랐다네. 인사치레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날 바라보기만 하는데……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서도 그 눈빛이 죽일 듯 살벌하더군.
단지 이야기를 나누러 왔을 뿐인데도 그리 나오면 나로서도 기분이 좋을 수 없지. 한 일이라고는 짧은 말 몇 마디를 나눈 게 전부였건만 정말 급시에 화가 치솟더군. 내가 점차로 언성이 높아질 때에도 그는 여일하게 처음과 같은 태도였지만 말이야. 눈조차 깜짝이지 않고 묵묵하게 바라보기만 하던 그 모습이 어찌나 사늘하던지, 그때 그에게서 매정을 느낀 것이 아니라 내가 일시에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면 믿겠는가?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물었네. "네 말인즉 지금 나와 싸우겠단 뜻인가?"라 하였고, 나는 평소대로였담 그것은 아니라 점잖게 타일렀겠으나 그만 노한 결에 그렇다 답했다네. 그때는 나 역시 한창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였으니 얼결에 외치고 만 게지. ……그때 그렇게 말해선 아니되었던 걸세.
그렇게 되니 그 신은…… 정말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한 치 주저함 없이 주먹을 들더군. 나는 정말로, 하늘에 맹세코 신으로 태어난 이래 그렇게나 우악스럽고 난폭한 짓거리를 본 적이 없었어……. 부끄럽게도 그 시절의 나는 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어디에서나 극진하게 모심 받는 신이었으니, 스스로 주먹 들어보기는 커녕 발치에 머리 굽히기 바쁜 인간들만 보아온 애송이에 불과했다네. 즉시에 달려들어 마구 패대는 주먹질이며 발길질 하고, 패대기로 집어던지는 싸움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아아, 괴로워 더는 말 못하겠구먼……. 참 아팠어…….
……흠, 흠. 여하간 자초지종은 이렇게 된 것이고, 어찌저찌 진정시키는 데 성공하여 대화란 것을 해보니, 알고보니 후나가츠히메라는 자가 성미 고약하여 그리 군 게 아니라 많은 일에 무지하여 그따위로, 아니,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더구먼. 그에 나는 그가 터득하지 못한 세상의 아주 많은 지식을 알려주기로 하여 이후로는 자주 보는 사이가 되었어. 그러한 연유로 내가 후나가츠히메와 지구간이 되었다는 이야길세. 신이 나 떠들어대었지만 그다지 재미난 일문은 아니지? 그래도 자네 덕에 그리운 이 추억하려니 흔연하군그래.
과연 미운정이란 게 있기는 한가 보구먼. 내가 좀 전에 그 녀석 몹쓸 자식이다, 아주 망나니 녀석이다― 그런 소릴 하긴 했어도 격조한지 오래라 때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가르친 친구인 데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아차, 사설이 길었어. 아무튼 그 친구, 요즘엔 잘 지내는지 몰라. 혹시라도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대신하여 안부 전해줄 수 있겠는가? 아, 물론 농으로라도 그 양반한테 싸우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