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줬어! 따라 해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 해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코로리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였다가, 반갑단 듯 화색을 띄운다. 웃으면서 활짝 핀 쪽은 토와보다 코로리였지만, 옅은 미소만으로도 상했다는 말은 충분히 취소 가능했다. 볼을 찔러 올렸던 손가락을 내리고도 생글생글거린다. 즐거운 목소리에 음 높낮이가 실려 흥얼거리듯하다.
"이제 안 상한 풋사과씨야."
코로리는 고개를 꾸닥거리면서 펜을 쥐었다. 계기가 무엇이냐고 하면 토와씨가 풋사과씨라서 사과를 만들어! 라고 밖에 답하지 못 하기 때문에 보고서에 관해서 도움될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름은 적을 수 있다! 실의 종류와 색상도 상세하게 적을 수 있다! 공부는 안 하지만 글씨는 단정하고 조그맣게 적힌다.
"자전거를 3으로 타?"
잠과 관련된 이야기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잠의 신님! 어젯밤도 달이 뜨든 별이 지든 밤에 잠을 안 자던 인간들 재우겠다고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 꽃단내 맡을 일이 머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고양이에게 음식 이름을 붙이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었던가. 그 사실을 떠올리며 리코는 머릿 속으로 딸기와 망고, 포도 같은 과일 몇 가지를 떠올렸다. 이름을 과일 시리즈로 붙일 걸 그랬나? 나비나 용용이도 나쁜 이름은 아니지만. 유치한 작명 센스로 최대한 노력해낸 결과였다. 안타깝게도, 남들에게는 그저 단 몇 초만에 지어낸 이름으로 보일테다.
" 역사 좋아하시나봐요. 네로가 여기 대장 고양이거든요. 성격이 나쁘진 않지만! "
그리곤, 저 두툼한 볼살을 보라는 듯 작게 웃었다. 고양이들은 볼살이 많으면 많을 수록, 즉 쉽게 이야기해 얼굴이 크면 클 수록 그들의 세계에선 잘생기고 서열이 높은 개체라고 한다. 따지자면 근육 많은 마초맨 느낌이랄까. 아마 네로는... 최고의 꽃미남이겠지. 테스토스테론이 많이 분비될 수록 볼살이 통통히 올라 왕대두가 된다던데. 어디서 알았냐고? 미안하게도... 심심할 때 툭하면 만져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었다.
" 아, 네에. 그 편이 낫겠네요. 방해 없이 먹을 수 있어 애들도 편할테고. "
무엇보다 사람들 눈에 많이 띄어 좋을 것도 없으니. 오늘처럼 낯선 누군가의 방문을 맞이할 확률도 줄어든다. 뒷편에서 먹이를 챙겨준다면 그릇을 챙기고 치우기도 수월하고 말야. 리코는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먹이를 챙겨주는 장소를 바꾸면 아이들이 혼란스러워 할테니, 당분간은 이 근처를 떠나진 못하겠지만... 멋쩍어라. 혹시나 제 앞의 남학생과 또 다시 어색한 조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 동아리 사람들에게는 조금 소란스러웠을지도 모르겠네요. "
미안함이 내비친다. 먹이를 먹다보면 고양이들이 보채며 울어댈 때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여태껏 아무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일까?
사실 미즈미는 쇼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신경줄이 몹시 굵은 이 여자는 누군가 제게 패드립을 날린다 해도 하하 웃을 성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무신경한 여자도 야쿠자는 좀 곤란하게 다가왔다. 대충 인간 생활 몇개월하며 몸소 느낀건데, 정장을 빼입고 문신도 잔뜩 한 성인 남성은 건드리면 일이 좋지 않게 끝나곤 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현대의 사무라이 같은 개념이다. 이런 부류는 신랑감으로도 적합하지 않았을 뿐어러... 뭐랄까... 그래, 많이 귀찮았다.
"참 사람 쑥쓰럽게- 친구 사이에 이정도는 해줄 수 있죠."
귀찮은 상황에 봉착한 것과 별개로 감사 인사는 착실하게 받을 줄 알아야한다. 사소한 것도 하나하나 신경써줘야 인간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법. 암암. 설마 쇼가 자신을 비꼰 것이라고 차마 생각하지 못한 미즈미였다.
"이크. 실례할게요."
아무튼 언제까지 미적거릴 순 없었다. 인간 사회에 내려와서 괜히 인간에게 해 끼치기도 싫고, 잘못돼서 신 자격 박탈되는 것도 싫었다. 미즈미는 쇼의 팔목을 덥석 잡고는 미즈미가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평소 굼뜬 것과 달리 도망갈 때는 또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것 같다. 미즈미는 헉헉거렸다. 인간의 몸으로는 이정도 뛰어도 숨이 금방 차고 심장도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잠깐. 이거 사랑 아닌가? 제가 본 로맨스 소설에서는 사랑에 빠지면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도 두근거린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미즈미는 인간과 손도 잡았고(지 멋대로 잡았지만) 도키도키한 상황(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리긴 했다)도 연출했다. 게다가 제게 손 잡힌 이 인간도 숨을 헉헉거리고 얼굴이 붉은 걸 보아하니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진 미즈미가 빙글 돌아 쇼에게 말했다. 검지 손가락을 쓰윽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토와가 잠시 바라보는 것을 작더라도 웃음꽃을 피웠으니 꽃으로 불러달라는 항의 정도로 받아들였다. 코로리는 보고서에 대고서 무언가 적고 있으면서도 시선이 느껴져 답할 수 있었다. 나 애벌레라고 한 것 치고는 개미잖아! 꿀벌이야! 정작 아직은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다 중간고사를 대체하는 짝지어 하는 과제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뿌듯함을 즐기는 중이라서 목소리가 상냥했다. 별명을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풋사과를 사과꽃으로 바꿔줄 수 있단 작디 작은 아량을 베푼다!
"잠? 자장자장 잘 자라ねんねんころり 하는 그 잠?!"
지금 잠의 신 앞에서 잠을 줄이겠다고 한거야?! 착하고 예쁘고 좋은 풋사과씨라고 해줬더니 왜 못난 양귀비 하려는 거야ー! 순식간이다! 눈 깜빡하는 사이 표정이 참으로 불퉁스러워졌다.
"나 방과 후에는 개미야. 꿀벌이야. 오늘도 바쁠거야."
아르바이트 갔다가, 아르바이트 끝나면 그때가 정말로 본격적인 일의 시작이다. 자라고 해도 안 자는 인간들을 재우러 다니는게 주된 일인데 조만간 일하다가 토와를 보게 될 예정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토와를 지그시 쳐다보는게 불만 가득하다. 사과꽃이나 피우지!
"....그냥 토와라고만 불러도 괜찮아요." 물론 어떻게 부른다고 해도 토와는 포기한 헛헛한 웃음을 짓겠지만요. 보고서는 여러가지 잘 적어지고 있습니다. 캔버스 크기를 적는 칸에서 살짝 머뭇거립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빠르게 일을 해결해야 잠을 줄이는 날이 줄어들죠." 대체 왜 불퉁한 건가. 싶은 토와였지만.. 음. 잠이라는 말에 그렇게 되었다면... 잠의 신님같은 존재인가? 같은 우스개소리가 생각나는 토와입니다. 진짜인지 의심은 진짜라는 걸 알게 되는 일이 생기기라도? 가 귀찮아서라도 하지 않겠지만.
"방과후에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시간이 늘어지는 것도 감안하면.. 미대생들이 하는 것처럼 야작(=밤샘)을 할 수 밖에 없겠네요." 뭔가.. 채찍과 당근 전법처럼도 보이는데...?
그런데 가판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여학생이 쇼의 손목을 휙 낚아챘다. 뭐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쇼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그녀의 뜀박질을 따라가야만 했다. 슬슬 숨이 한계치로 차오르는데 이 여자는 멈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느정도 달려서 시내의 한복판으로 나와서야 여학생은 뛰는 걸 멈췄다. 그제서야 쇼는 그 자리에서 다리를 짚고 숨을 고른다. 얼굴도 새빨갛고 심장도 터질 듯이 아팠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메론빵은, 무슨, 얼어죽을…"
예민해진 탓에 날선 말이 튀어나왔다. 야쿠자 사기꾼(아니다)한테서 도망쳤는데 갑자기 메론빵을 먹으러 가자고? 빌드업이 뭔가 이상하잖아. 얘는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든 거냐!
"혼자서 실컷 드세요…"
대충 쏘아붙이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친다. 저질체력 탓에 아직도 헉헉대고 있는 쇼. 설마 이 기회를 틈타서 억지로 끌고 가진 않겠지, 생각했지만 상대의 의중은 모르는 법이다. 만약 정말로 그러면 저항도 못하고 질질 끌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