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릇파릇하고 열의가 있는 1학년이 와야할텐데, 그러니까 나 같은 애들 말고. 홍보지가 필요하다해서 임시로 서점 포스터를 만들던 기억을 되살려 꽤 모양새는 갖춘 전단지를 이곳저곳에 붙여놓았다. 가미즈미 동아리의 꽃(이건 사실 거짓말이다. 허위광고로 신고가 들어올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다.)! 청춘남녀의 로망! 심신단련! 검도부로 오세요! 그리고 대강 멋지게 나온 대련 사진. 덕분인지, 혹은 우연인지 홍보지를 붙인 이후로 구경하러 오거나 입부서를 내려는 1학년 두세명이 방문을 했다. 오늘은 시로하씨가 아직 오지 않았기에, 마찬가지로 2학년인 검도부원 한명을 붙잡고 대강 시범 경기를 보여주던 참이었다.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1학년일까. 나는 잠시, 하고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호면을 벗은 뒤, 땀이 나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대강 쓱쓱 치웠다. 호면을 바닥에 잠시 내려놓고, 목검을 어깨 위에 올린 뒤, 부실의 나무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가 났다.
" 안녕, 너도 1학년.. 아, 안녕하세요. 회장님. "
1학년으로 착각하고 말을 건네다, 회장 특유의 회색빛 머리로 상대방을 인식하자 재빠르게 인사를 했다. 검사를 온 모양이었다. '검사'라는 말이 붙으니 잘못한 것은 없는데 역시 움츠러들게 되었기에, 괜히 갑을 입은 가슴팍을 더 당당하게 폈다.
돌을 두고 말을 옮기고 그리하여 이기고 지는 놀이 그뿐이라 여겨질지 몰라도, 대국이란 실상 상대와의 소리 없은 대화이다. 매 순간 최선의 수를 모색하며, 때로는 후차를 바라보고 멀리 돌아가기도 하며 의외의 수를 둬 상대를 떠보기도 한다. 하물며 한 발 물러나 상대가 스스로 깨닫도록 지도하는 수를 두기도 하니. 승패만이 목적이 아니다. TRPG가 행동을 정하여 결과와 과정을 즐기는 놀이라고 하면 쇼기도 바둑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음은 그래서다......... 네, 다음 고리짝 사고.
"..독특하네. 들은바 후지모리 씨가 그러한 세상 속 세상을 창조하였고, 위화 없도록 관리하는 것이지? 이 책상 위에서."
일컫는 말 거창할지 몰라도, 말이란 힘이 실리는 것이다. 몰입이 중요한 놀이로 보이는즉 이 정도쯤은 말해둬야 도움이 될 성싶었다. 마치 여럿이서 소설을 써내려가는 일과 같구나.... 담담히 책상 위를 내려다본 마츠루는 손을 그러쥐더니 방금 전에 문을 두드린 것과 같이 손마디로 똑, 똑, 책상 위를 두드렸다. 딱딱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비뚤비뚤 모나기도 하지. 돌은 아니다. 유리라기엔 묵직하고. 단조롭게 울리는 소리로 헤아리건대.
"주사위......... 써?"
가볍게 인상을 찡그리다가 말한 물건의 이름은 여태의 맥락만 보아서는 뜬금없는 면이 있다. 그러나 RPG의 일종이라는 말로도 들으면 주사위도 생각보다 일리가 있는 것이지 않을까. 마츠루는 제 직감을 알았다.
"아. 굳이 활동을 중지할 건 없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나요? 그래도 양해부탁드릴게요. 미리 공지를 하면 다들 미리 준비를 해버리기 때문에 순수하게 활동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거든요. 아오키 씨."
그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미즈미 서점은 자신도 꽤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으니까. 당연히 그의 존재는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의 눈동자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일단 분위기적으로는 착실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에 굳이 걱정할 건 없어보였으나 그것으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활동은 착실하게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장부나 그런 것이 있으면 보여줄 수 있을까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내일까지 제출해주셔도 괜찮아요. 올해 예산이나 그런 것을 정할 때 필요하거든요."
정말로 꼼꼼하게 체크를 하겠다는 듯이 말을 끝낸 그의 안경알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일단 자신이 받아야 할 서류는 그 정도였고 남은 것은 회계쪽에서 체크를 하고 자신에게 또 보고를 할테니 굳이 그는 더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조금 흥미가 있는지 그는 근처에 있는 죽도를 바라봤다. 남아있는 물품인걸까.
"그리고 김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저도 잠깐 해봐도 괜찮을까요? 물론 잘하는 것은 아니라서 초보 실력이긴 하지만요."
겸손이 아니었다. 검도는 어릴 때 잠깐 해본 이후로 한번도 경험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회장을 두들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검도를 잘 하지 못했다.
도서관의 푹신한 의자에서 잡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잡지에 있는 구독자 퍼즐은 눈으로 까닥까닥하는 것만으로 풀어버리고는 다른 읽을거리는 없나 하고 잡지를 뒤적이는 사이에 옆에서 약간 멍한 듯한 여학생..(2학년으로 보인다)이 갑자기 자신에게 기댔습니다.
"???" 몸이 굳은 채로 고개만 돌려서 여학생을 보니. 잘 자고 있습니다. 토와는 으음.. 하는 표정으로 적절히 기댈 거면 조금은 편하게 그냥 무릎베개를 해주는 게 어떨까.. 싶어하기도..? 슬쩍 움직여서 굴러가게 해서 결국엔 무릎베개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냥 기댄 채가 될 수도 있고?
"..." 기댄 건 기댄 거고. 토와는 손이 닿는 곳의 잡지의 구독자 문제를 풀어보기로 결정하고는 그냥 내버려두려 합니다.
" 괜찮아요, 슬슬 끝나가는 중이었거든요. 절대 제가 질 것 같아서 멈추자한건 아니고. "
물론 내가 미세하게 이기고 있었지만,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1학년생들은 전교회장을 처음으로 본 것이었는지 다들 놀란 눈으로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속닥이고 있었다. 나는 이미 몇 번 본 사이라 엄청나게 신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미즈씨는 이 지역 유지의 아들로, 온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서점과 온천이 꽤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온천의 유카타를 입은 손님들이 서점을 방문한적도 있었다.
" 그게, 장부는 제가 아니라 3학년 선배들이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따 찾으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내일. "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아직 3학년은 수업이 끝나지 않은 반도 몇몇 있었는지 장부 담당 선배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회장의 시선이 죽도 쪽으로 향하는 것을 캐치해냈다.
" 그렇다면... 일단 제가 머리 공격을 할께요. "
아침에 닦아놓고 아직 누가 쓰지 않은 면갑을 간단히 회장에게 씌워주었다. 미리 공격할 부위를 알려주고, 목검에 힘을 주지 않고 면갑에 살짝 닿았을 때 손목에 힘을 주어 검을 멈추면 되겠지. 보통 초심자가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 멘(面)! "
기합은 크게, 속도는 조금 느리게 하여 공격을 시도했다.
/츠무기 (은)는 목검박치기를 시도했다! 결과 .dice 1 2. = 2 1이 나오면 막기 성공, 2가 나오면 막기 실패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말자는 뜻으로 사용하는 제스처와 단어, 잠을 잘 때나 누군가 잠에 들었을 때 곧잘 사용된다. 코로리는 그래서 입술 앞으로 손가락 하나만 올리는 것과 쉬잇ー 하는 작은 소리를 좋아했고, 그대로 하면서 빙글빙글 웃었다. 창 밖 저녁놀과 닮은 눈이 눈꺼풀 아래로 자취를 감춘다.
"그럼 다 나았어?"
코로리는 등 뒤로 넘겨버린 파이프를 고쳐 쥐면서 만지작거렸다. 예비 캐모마일 씨? 캐모마일 연습생 씨? 가 입었다는 상처가 나았느냐 물어보는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예쁘지 않느냐고 물어본 질문에 코로리가 웃어버려서 상처입었다고 했던 흐름을 떠올려냈다. 코로리는 상처가 낫지 않았더라도, 얼른 나으라며 예쁘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 양귀비한테 예쁘다고 말한다니, 오늘 밤은 다들 잘 때 양 세지 말고 늑대 세야겠어. 양을 세면 잠이 오니까, 양을 잡아먹는 늑대를 세면 그 반대로 잠이 달아난다! 코로리는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밤은 잠을 달아나게 할 늑대를 세야 잠을 잘 수 있으리라 말할 정도로 양귀비를 예쁘다고 할 일 없었다는 것이었다.
"캐모마일 씨 예쁘니까 빨리 나아ー"
삼천포로 빠진 시점이야, 코로리는 몰랐다. 잘 대화하고 있었을 뿐이라 고개만 옆으로 뉘이며 갸웃거렸다.
"꽃잎이 없어지면 슬프니까, 잘 데리고 있을게!"
공짜를 좋아하면 머리 벗겨진다는 말에 빗대어, 하얀 캐모마일, 똑같은 색 머리카락은 꽃잎이지ー. 파이프가 마법의 댓가였나보다! 마법도 걸어주었고, 파이프도 압수했으니 코로리가 할 일은 다 끝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녁놀은 밤의 시작을 알린다. 본격적으로 일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의자 끄는 소리가 난다.
"꼭 진짜로 돌려줄테니까, 잘 자ー"
붉은 리본이 뜻하는 3학년, 긴 흑색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는 명찰. 못난 양귀비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코로리라서 눈 앞에 가미즈미 고교의 탐정님이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 했지만, 아무래도 탐정님답게 파이프를 돌려받으려면 추리와 수사에 착수해야할 듯 싶다. 운이 좋다면 3학년 층을 한 번 쑥 훑어보거든 한 교실에서 바로 범인을 찾아내고 말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적어도 자신은 타협은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조금 단호하게 아키라는 이야기했다. 학생회로서 그런 부정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설사 이 동아리가 자신이 아는 이가 있는 이라고 할지라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아키라는 자신의 말을 츠무기가 승낙하자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름대로 준비했다.
면갑을 도움을 받아 낀 후에 머리 공격을 하겠다는 그 말을 들으며 아키라는 나름대로 자세를 잡았다. 허나 이게 무슨 일인지. 검도를 정말로 오랜만에 하고 목검을 오랜만에 잡아서 그런지 참으로 자세가 엉성했다. 애써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며 아키라는 나름대로 방어를 하기 위해 머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허나 이게 무슨 일인가. 아키라의 움직임은 츠무기의 움직임보다 늦었다. 목검이 닿을 타이밍에 팔을 올려서 막으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인 아키라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얼굴이 가려져서 다행인 것일까.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아키라는 헛기침을 내뱉었고 이어 이번엔 자신이 해보겠다는 듯이 츠무기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제, 제법이군요. 아오키 씨. 그, 그렇다면 이번엔 제가. 마찬가지로 머리를."
조건을 동일하게. 그렇게 미리 예고를 하며 아키라는 자신이 공격을 시도했다. 가만히 자세를 잡다가 기합을 크게 하며 그는 목검으로 준비가 끝난 상대의 머리를 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