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친해지지 않은 새학기의 교실은 조금 숨이 막혔다. 물론 아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다들 아직까지는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양새였다. 인간관계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친구와 함께인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점심시간, 평소같으면 친구들과 같이 장난을 치며 먹어야 정상이었지만.. 괜시리 선생님의 눈에 띄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죄로, 교무실로 선생님의 노트북이 담긴 가방을 옮겨 주는 심부름을 하고 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늦게 밥을 먹게 되었다. 아직 점심시간은 느긋하게 남아 있었지만, 이미 아이들이 치열하게 밥을 다 먹은듯 했다.
매점에서 간단하게 컵누들을 사온 뒤, 먹을만한 장소를 찾다, 반가운 뒤통수를 발견한다. 길고, 머릿결이 그닥 좋진 않은 금색의 머리. 작년 같은 반이었던, 경음악부의 오토하 쇼였다. 엄청 친해~ 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느 정도 말을 하고 있는 사이.
때는 점심시간. 학생들이 가장 활기를 되찾는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수업 내내 책상에 퍼질러서 자는 쇼도 이때만큼은 정신을 차린다. 배고프면 움직일 힘도 없다. 그러므로 밥은 제때제때 먹어줘야 한다.
학생들이 바글바글 몰린 매점을 뚫고, 도시락 하나를 겨우 건져서 나온 쇼. 교내 식당으로 가 한 구석 남은 빈 자리를 차지한다. 식당은 한참 시끌벅적한 때라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오늘의 식사는 새우튀김과 돈가스, 기타 반찬들이 올라간 매점 도시락. 밥을 한 술 크게 뜨고, 자른 돈가스를 콕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특별히 맛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먹을 만은 하다.
도시락 판을 반쯤 비웠을 때, 옆에서 어떤 인기척이 느껴졌다. 젓가락으로 샐러드 반찬을 뒤적거리던 쇼가 고개를 돌린다. 낯익은 학생이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아오키 츠무기였나? 그렇게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름 정도는 기억할 줄 안다.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데, 시이가 날카롭게 던져오는 책망에도 불구하고 류카의 대답은 나긋나긋했다. 소녀의 손은 물러나는 일 없이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소녀의 뺨과 눈가에 남은 흔적을 슥슥 닦아내어 주었다. 머리 위로 기울인 투명한 비닐우산 너머로 먹구름이 가실 기색이 없는 야속한 담천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대를 놀리는 이는 없으니 안심하여라."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소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 온 얼굴에 번진 화장을 두고 짤을 찍거나 움짤을 따거나 하는 막돼먹은 시청자는 없다. 하굣길에는 우산을 푹 눌러쓰고 자기 발 딛는 곳을 바라보며 빗길을 가기 바쁜 아이들이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으며, 그 중 시이에게 눈을 두고 있는 것은 지금 시이의 앞에 다가와서는 얼굴에 번진 화장을 닦아주는, 키 작은 2학년생 하나뿐이다. 새하얀 수건에 화장품 얼룩이 묻어났지만 이 이름 모를 2학년생은 딱히 개의치 않는 듯했다. 왼쪽 가슴팍을 보면 아메미야雨宮라는 성씨가 새겨져있는 명찰이 달려 있다... 지금 시이를 이 꼬락서니로 만든 게 비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 야속한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나 최악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게지. 화내도 슬퍼해도 좋으니라. 이 또한 지나갈 테니."
그래도 이 이름모를 신이 대충 어떤 부류인지는 알 것 같다. 한껏 느긋하고 태평하기 그지없는, 산 같거나 구름 같거나 하여튼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이런 태도는 시이가 흔히 틀딱 신들이라고 부르는 족속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눈가에 번진 얼룩들이 다 닦이자, 하얀 머리카락을 후드 사이로 늘어뜨린 신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폭 집어넣었다. 그러나 시이의 머리 위에 기울어진 우산은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살짝 앙탈을 부리는듯한 말투로 농담을 했다. 어쨌든 같이 밥을 먹을 녀석을 구해서 참 다행이다. 무심한 말투지만, 원래도 무덤덤한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했으므로 내 동석이 달갑지 못한 눈치는 아닐 것이다.
" 그럼 사양않고 앉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앉아있긴 하지만. 사실, 같이 먹을 녀석을 구하기 어려워서 진땀뺐어. "
나는 미리 뜨거운 물을 넣어둔 컵누들의 뚜껑 비닐을 벗겼다. 돈에 비하여 가성비 있기로 유명한 컵누들이었다. 무엇보다 면이 많고, 나루토 어묵도 간간히 들어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간은 조금 내 입맛에 비하여 밍밍했지만, 소스를 넣어 먹으면 괜찮았다.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소스를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 오. 오토하의 도시락, 꽤나 알찬데? 부지런하게 매점에 다녀왔나 봐. "
돈까스, 새우튀김, 샐러드. 다음 점심 시간에 저걸 먹어야겠다고 미리 마음속으로 찜을 해두었다. 많이 먹어야겠지~ 자라나는 고등학교 2학년의 검도부원과 보컬이라면.
츠무기의 말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이번 점심시간은 좀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항상 혼자인 식사 시간에 누군가가 끼어들었으니. 그래도 꺼려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좋은 건 아니지만.
"네 친구는 다 어디 갔길래."
츠무기의 말에 쇼가 의문을 표한다. 아오키처럼 교우관계가 원만한 학생이라면, 원래 밥 같이 먹을 친구 정도는 있겠지. 근데 지금은 어쩌다 따로 떨어져선…
하나 남은 새우튀김을 마저 입으로 가져가 꼬리는 떼고, 오물오물 씹는다. 그와 동시에 츠무기의 컵누들 뚜껑이 열리며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겨나온다. 쇼는 슬그머니 고개를 그쪽으로 돌린다. 여전히 무심해보이는 눈빛을 하고서. 맑은 국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보니… 갑자기 뜨끈하고 기름진 국물이 마시고 싶다. 저녁에 라멘집을 들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도시락으로 시선을 옮기는 쇼다.
"굶으면 안 되니까."
먹던 새우튀김을 삼키며 쇼가 대꾸한다. 굶거나 평소보다 적게 먹으면 속이 허하다. 그러면 목소리도 잘 안 나오고, 여러모로 불편하니까. 그래서 점심시간엔 꼭 빠지지 않고 밥을 챙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