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어쩌면, 당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당신을 깨물되 해치지 않고 핥되 잡아먹지 않는 짐승. 어떤 비바람도 잔물결 하나 일으키지 못하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호수 표면과도 같은 당신의 삶인데, 그 짐승이 닿은 곳마다 조금씩조금씩 녹아내린다. 당신은 그것을 그 짐승의 탓으로 돌렸다. 틀린 말도 아니고, 그녀 역시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지금 당신에게 그러고 있듯이, 당신이 자신의 품 안을 마음껏 독점할 수 있도록 당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아줄 뿐이다. 치사해, 하고 당신이 꺼낸 말에, 당신의 머리에 닿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이 좀 더 머문다. "알아." 심지어 안단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페로사는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고 허리를 조금 숙인다. 이번에도 당신을 번쩍 들어안아주려나 보다. 품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당신을 옮기려면 아무래도 이 방식이 가장 편하니까. 이것도 익숙해지려면 익숙해질 수 있겠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기로 했지 않은가. 그 온기처럼, 그 품처럼, 그 나른한 미소처럼, 지금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둘만의 사치스러운 평온함처럼.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을 통틀어, 이 바텐더에게서만, 오직 당신만 누릴 수 있는 서비스처럼.
그녀는 당신을 번쩍 들어안았고, 다시 한 번 당신의 발 아래 존재하던 세상이 그녀의 품 안으로 기우뚱 기운다. 다시 의자에 앉혀놓고, 아무래도 당신을 끌어안은 채로 칵테일까지 만드는 것은 조금 무리였기에, 그녀는 당신을 안았던 팔을 뗀다. 당신이 옹알거리듯 하던 모양새가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는 당신을 품에서 놓아주면서 당신의 입술 위에 얕은 입맞춤을 한 번 남긴다. 그리곤 조금 머뭇거린다. 당신이 그 정도로 괜찮다고 하면 다시 주방으로 향했을 것이다.
팝콘 한 봉지를 전자레인지에 돌려놓고, 아까 싱크대에 담궈두었던 마티니 잔을 꺼내서 바에서 하듯 빠르게 설거지하고 물기를 닦아낸 다음에 쿠키 하나를 부드럽게 부수고는 마티니 모서리에 보드카를 살짝 발라 쿠키 부스러기를 묻힌다. 은색 기사가 그려진 보드카 병과, 피스타치오와 올리브를 섞어놓은 것 같은 과일-아몬드를 한가득 맺은 아몬드나무가 그려진 병. 아마레또 2온스, 보드카 1온스, 얼음 한 컵, 설탕 한 티스푼, 바닐라 에센스 두세 방울, 바닐라 아이스크림 반 컵, 그리고 딸기 한 컵 가득을 믹서기에 집어넣고는 덩어리가 없을 때까지 간다.
마티니 잔에 3분의 2쯤 따르고는, 남은 것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니쉬로 반으로 자른 딸기를 가니쉬픽에 꽂아올려서 마무리. "기분이 엄청 나쁘거나, 기분이 엄청 좋을 때 집에서 해먹는 레시피야. 어디선가 배워서, 나 혼자 먹던 레시피인데..."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다 튀겨진 팝콘 봉지와 마티니 글라스 두 잔을 쟁반 위에 올려두면, 오늘의 식후주 겸 디저트 마련이 끝난다. "누군가한테 대접해주긴 처음이네." 그녀는 쟁반을 들고 당신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넷플릭스 보러 갈까." 웃는 게 좀 짓궂다.
찝찝해...... (기지개 쭉쭉) (얼굴에 코 들이대고 킁킁킁) (다시 몸 둥글게 말고 골골골이) 아니, 오늘 현생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어. 그러니 너무 걱정은 말기. 에만주랑 같이 있으면 기분 좋아지니ㄲ(털뭉치 상태에서 키스연타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되지?) (원래대로 돌아오면 되나?)
가득한 온기. 품을 독점하듯 파고들며 머리에도 와닿는 온기를 놓칠세라 손에 고개를 비빈다. 안다는 말에 제법 심통이 났는지 눈을 삐죽하게 치켜떴으나 가만히 노려보듯 하다 아랫입술만 툭 내밀고 다시 품에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그렇지만 이대로라면 하루가 의미 없이 지나갈 것 같기에, 품에서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다른 품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그 짧은 시간에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 느긋하게 떨어진 면도 없잖아 있다. 어린 여우는 제법 영악했다.
고작 두세 번 안겼는데, 안기는 과정 자체만은 수년 동안 안겨본 사람처럼 익숙하다. 그 이후는 익숙하지 않아 여전히 쭈뼛대며 어색하게 품 속에서 고개를 비벼본다. 따뜻한 온기와 나른한 미소가 공기를 따스하게 달군다. 평온한 하루 벽난로 근처에 있듯 따스하다.
오로지 당신에게서만 받을 수 있고, 페로사라는 바텐더에게서 독점하는 서비스와도 같다. 이 서비스가 당연히 자신만을 위해 주는 것이 되었으면 하는 오만한 욕심이 치민다.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나를 내어준다면, 당신은 온전한 나의 것이 될까. 의자에 앉고 품에 떨어질 적, 입술에 내려앉는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머뭇거리는 모양새를 봤기에.
"얼마 만나지 않은 상대인데, 너무 무른 것 같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에만은 팔을 쭉 뻗어 페로사의 양 뺨을 잡아보곤, 다시금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가볍게 입술을 이마에 대었다 뗀다. 짤막한 버드키스를 뒤로 떨어질 적 말간 눈웃음이 스친다. 이마로는 모자랐는지 입술에 기어이 한 번 더, 쪽 소리가 난다. 그리고 주방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마법을 바라본다.
달콤한 쿠키, 없으면 안 될 설탕, 사랑스러운 딸기와 빠지면 섭섭한 아이스크림. 온통 달고 보드라운 것들만 가득하며 짭조름한 팝콘까지 준비된다.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싶어 눈이 생기로 제법 차오른다. 분명 마티니를 선호하던 것 같더니만, 이런 면에선 제법 아이 같은 입맛을 가진 듯싶다. 고개를 들어 페로사를 빤히 바라보던 에만이 조근조근 묻는다. "그럼 지금은.. 기분이 아주 좋은 거야..?" 짧은 질문을 뒤로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다. 넷플릭스라 말하는 것이 짓궂기 때문이다. 툴툴대듯 "치사해.." 하고 우물댄 뒤로 의자에서 내려와 옆에 착 달라붙는다. 소파로 간다면 여지없이 옆에 또 달라붙어 앉을 것이다. 온기 찾는 병아리마냥.
"자기." 입을 맞추기 전 잠깐 멈추어선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며 나직이 속삭이는 말이 들큰한 향내를 싣고 당신의 입술에 날아든다. "그런 거 따지기엔 우리 너무 멀리 왔잖아."
그러고서야, 당신의 입술 위에 다시 한 번 더 잊기 힘들 따뜻한 흔적 하나가 뭉근하게 남는다. 호수 표면이 또 조금 더 녹았다. 한 번 더 녹았다. 두 번의 입맞춤을 나누고서야 그녀는 당신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바에서는 쓰는 모습을 본 적 없던 블렌더를 꺼낸다. 그녀가 원체 블렌더를 사용한 레시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는데, 블렌더를 사용하는 레시피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이것이었다. 가장 먼저 와닿는 딸기향, 밸런스잡힌 바닐라향과 아몬드향, 그 사이에서 흐려지지 않고 또렷하게 알코올향을 유지하는 슬러시. 보통은 혼자 마시는 잔이지만, 오늘은 누군가 이것을 같이 마셔줄 사람이 있다.
"딸기 숏케익 마티니래. 이름 재밌지." 용케도 그것이 마티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기에, 다행히 그것이 아무리 달고 부드럽더라도 마티니 애호가라는 당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당신이 치사해, 하고 톡 투덜대자, 페로사는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를 한 번 헝크러뜨리듯 쓰다듬고는 다시 원래 모양대로 정성스레 머리를 빗어주었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서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어온다.
"치사하지." 하면서 그녀는 당신에게 입맞춤을 해왔다. 좀더 탐욕스러운 그 입맞춤은 아까의 그것과도 비슷했고, 어쩌면 오늘 점심때 그녀를 만난 그 때, 그녀의 입에서 피냄새를 훔치고 자신이 묻혀온 피냄새를 먹여준 그 입맞춤과도 닮았을지 모르겠다. 피비린내는, 이제 혀끝에는 흔적도 없는데. "네가 오늘 나한테 처음으로 한 입맞춤만큼이나." 하고 그녀는 눈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 언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어긋남들이 이렇게 쌓여온 걸까.
아직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마음이 흘러넘칠 것 같다. 그저 지금은 이 순간이 이렇게 계속 이어지기를 원할 뿐이다. 계속 이런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어쩌면 너라면, 나는 이런 하루를 기꺼이 너와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비어있던 퍼즐조각과 같은 자신의 마음이, 맞추어질지도 모르겠다고. 그것은 아직 구체화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공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 하고 옆에 달라붙는 당신의 어깨를 페로사는 꼭 끌어안을 뿐이다. 나머지 한 손에는 쟁반을 쥐었다. 가죽이 아니라 천으로 피막을 씌운 소파는 푹신하니 몸을 기대기 딱 좋았다. 침실이 갑갑한 날이면 침대로 써도 되겠다. 그녀는 디저트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비스듬히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그리곤 자기 무릎 위를 톡톡 두들겨온다. 여기 앉으라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페로사주가 주는 답레는 여기까지..! 에만주는 답레 쓰지 말고 이제 눕자! (번쩍 들어안음)
페로사: 응. (품에 꼭 안아줌) 페로사: ...내 입으로 말할 땐 몰랐는데, 네가 말하는 걸 들으니까... 좀 낯간지럽네. (뒷머리 집어다가 끌어올려 자기 얼굴을 반쯤 가림) (귀가 빨개졌음) 페로사: 그래서 좋아. 페로사: 흠, 자기 말고 허니라고 부를까? (낯간지러움을 가리려는 듯 장난스런 웃음)
멀리 왔다고 해도 따질 것이 생긴 것 같다. 말해버릴까 고민하던 찰나 입에 뭉근하게 닿는 감촉에 고민도 생각도 사르르 녹아버린다. 안타깝게도 지금 따질 기회는 없을 것 같다. 녹아버린만치 보드라운 시선으로 블렌더를 바라보자니 앨리스의 의견이 치고 들어온다. 아.. 설거지 거리가 늘었다. 셰이크 시키는 사람은 고문 받아 마땅하며 쿠키나 초코가 들어가는 메뉴는 그 자리에서 사형 시켜도 옳다는데 너는 설탕과 딸기까지 넣게 만들었구나.. 넌 진짜 양심도 없.. 아, 우리 다 양심 없지. 에만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쓸모도 없고 의미도 없는 생각이다. 대신 잔을 동그란 눈으로 하릴없이 쳐다보기로 했다.
"응.. 신기해. 얘도 마티니라는 거잖아."
가만히 바라보자니 딸기향은 물론이요 바닐라, 아몬드, 알코올의 내음이 코를 찌른다. 온갖 호화로운 것이요 노동력 투성이인 특별한 잔을 오늘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바라보자니 딸기향은 물론이요 바닐라, 아몬드, 알코올의 내음이 코를 찌르는 것 같다. 그렇다고 투덜거림이 잦아드나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좋은 향이 난다 해서 넷플릭스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으."
머리를 헝클듯 쓸 때는 외마디 단말마를 뱉는다. 가느다란 모발은 정성껏 쓸어준다 해도 정전기 때문에 복슬복슬하게 뜨고 말았다. 눈높이를 맞출 적의 시선이 더 불만스럽더니, 입맞춤엔 아예 눈을 꾹 감아버렸다. 여전히 누군가의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거야..?"
입술이 떨어질 적에, 이 간지러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단 생각에 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순간. 특별한 만남, 별것 없지만 이 도시에서는 제법 특이한 하루, 하루를 마무리하는 특별한 잔.. 아, 특별한 거. 덕분에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고야 만다. 착 붙을 적 눈이 제법 모나다. 할 말을 고르듯 잠시 고민하더니 욕심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는지 끌어안는 손길처럼 허리를 폭 안는다. 툴툴거리기론 이 도시에서 따라올 사람 없다는 양, 모난 눈으로 묻는다.
"아까 자기라는 거. 다른 사람한테도 다 그렇게 불러..?"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부리기엔 지나친 욕심이라지만 이 도시에서 욕심 없는 사람을 찾느니 날개 달리고 머리에 뿔이 달린 말을 찾는 게 더 빠른 일이다. 폭신한 소파, 옆에 착 달라붙기가 무섭게 무릎을 두들기는 시선을 본다. 눈이 동그래지곤 한 번 무릎을, 그리고 페로사를 올려다본다.
"나.. 무거울 텐데."
진짜 앉아도 되는 건지 되묻고는 허락이 떨어진다면 아마 짧은 시간 수십수백 번을 고민하다 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멋쩍은지 괜히 품에 기대려 하며 고개를 푹 파묻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