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한 마디가 더 따라 붙는다면, 그러니까 난 괜찮아- 정도였겠다. 자리에 가만 앉아서 책을 보고, 노트를 펼치고, 무언가 적어내려가고, 밑줄을 긋고 별 모양을 그린다. 나는 공부라도 잘 해야 해- 필사적이지 않지만 필사적이었다. 공부조차 못 한다면, 쉬는 공간이 아니라 머무르는 공간이 되어버린 그곳에조차도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봐 필사적이었다. 필사적이지 않은 이유는 너였다. 내가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너는 그러지 않을 거지- 하고 믿음을 가장한 바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랑은 그래서 쉬지 않아도 좋았지만, 네 걱정 어린 잔소리는 달게만 느껴져서- 네 말대로 쉬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오늘 하루 너와 쉬는 것이었다.
"응, 귀여워-"
빨갛다는 답이 랑을 보고서 하는 말인줄 모르고서, 랑은 네 얼굴이 빨갛다는 답이라고 이해했다. 빨갛다고 답하는 네가 귀엽다는 마음을 오롯이 얼굴에도 녹여냈다. 네가 귀여워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빤 바라보고 있자니 뺨에 네 손이 와 닿는다. 조금의 당황으로 눈을 두어번 빠르게 꿈뻑거리니, 네가 랑도 빨갛다고 일러준다. 랑은 갖고 있는 색처럼이나 연하고 부드러워서 뺨도 그랬고, 네가 손장난을 치면 그 안에서 말랑거리고 있는게 느껴졌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뺨을 만지는지 모르지만, 랑은 그 이유가 귀여워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냥 좋았다.
"그럼 나도 귀여워?"
그래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나는 네가 빨간게 귀여워, 그럼 나도 귀여워-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배사과라고 불린들 네가 귀엽다고 해준다면야 딸기도 되고 체리도 되겠다. 이전에 네게 말해주었던 온갖 붉은색 과일들을 랑과 나눌 수 있다. 네가 무슨 답을 해줄까, 기대를 많이한 듯 빛나는 눈길로 너를 보던 랑은 네 움직임에 시선이 쫓아간다. 네 손이 폰을 내려놓고 찬장으로 간다. 방금 널 어떻게 저장하는게 좋았을까- 생각했던 탓에 너도 날 어떻게 저장했을지 궁금해진 랑은 쪼르르 네 폰 앞으로 갔다. 너에게로 카톡 하나, 사과 이모티콘을 보낸다. 빨갛게 익은 예쁜 사과가 네 폰에도 나타나면, 랑을 저장한 이름도 떠오를테니 바로 네 폰을 바라본다.
너는 몸과 머리 양쪽을 말한 것이었고 현민도 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아들었으나, 현민은 네 말뜻을 조금 바꿨다. 자신은 양쪽으로 70 30씩 피로가 누적된다고 한다면 너는 단일종목에 100씩의 피로가 누적될 정도로 매진하고 있었으니까. 현민은 이른바 나무꾼 이야기(두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데, 나무꾼 A는 쉴새없이 나무를 했고 나무꾼 B는 중간중간 쉬면서 나무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 B가 나무를 더 많이 했더라는 이야기. A가 비결을 물었더니 B는 쉬면서 도끼날을 갈았다나)의 신봉자였고, 그래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성취를 이루어내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너도─"
─나무꾼 이야기 들어보... 랑의 뺨을 조물거리며 자신의 신념을 네게 설파하려던 현민은, 한 박자 빨리 나와버린 네 질문에 눈을 깜빡이다가 잠깐 시선을 피한다. 빨개졌던 뺨이 조금 더 빨개진다. 채잔소리꾼이니 뭐니 해도 채부끄럼쟁이가 맞나 보다. 현민은 잠깐 돌렸던 시선을 네게 맞추면서, 대답했다.
"...귀여워. 예쁘고. 사랑스러워. 세상 예쁜 말이란 예쁜 말은 다 너한테 갖다붙이고 싶은데 아는 말이 별로 없어서 그게 안되네."
현민은 네 뺨을 조금 더 조물거린 뒤 놓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은 뒤에서야 다시 찬장에 손을 뻗을 수 있었다. 핸드폰에서 자그맣게 진동음이 울린다. 마침 그 타이밍에 현민이 두부과자를 대접에 따르면서 과자가 부딪히는 소리가 핸드폰 진동음을 묻어버려 현민은 핸드폰 진동음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화면에 조그맣게 떠오르는 메시지 창.
[❤: 🍎]
처음에는 배하랑이라 단순히 저장했으나, 현민에게 있어 배하랑이라는 세 글자는 이제 더 이상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더 커다란 의미가 있는 무언가였다. 뭐라 예쁘게 저장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른다. 그는 그의 말마따나 어휘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했고, 너를 어떤 이름으로 저장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그냥 가장 솔직하고 투박한 방식으로 당신을 저장해놓기로 했던 모양이다.
시선을 돌린 너를 가만 보고 있으면 다시 너는 랑에게로 돌아와서 눈을 맞춰주었다. 세상 예쁜 말이란 예쁜 말, 랑은 언젠가 국어 선생님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뺨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볼을 조금 드밀면서 반가움을 표하고, 볼살이 밀려올라와 눈을 깜빡 감았다가 다시 뜨일 때 너와 눈을 맞추었다.
"현민아, '사랑하다'라는 말은 옛날에 '괴다'라고 했대."
내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너인데 네가 이미 나한테 써버렸으니까- 랑은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는다.
"그 '괴다'는 '고이다'랑 같은 말이고, '고이다'의 뜻은 '생각하다'래."
누군가를 품어서 계속 떠올리고 그리며 생각하는 것 중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막상 선생님이 이야기해줄 때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들려서 그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필기하기 바빴었다. 지금은 뜻을 헤아리다 못해 온몸으로 실천 중에 있었다. 네가 뺨을 만지는 손길에 발음이 조금 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마음만큼은 온전히 너에게로 닿았을 것이다. 문장이 완성되어 있지 않다면 문장을 옮기는 목소리에, 목소리가 곱지 못하다면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면 뺨의 발간 물로 너를 향하는 마음을 전한다. 무엇보다서로 사랑에 빠져 너를 바라보며 짓는 웃음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더욱이 너에게 예쁘게 울릴테니까 개의치 않고 전했다.
"나는 네가 많이 고여서 그곳에 빠져있어."
쓰다듬까지 받고 나면, 네가 안닿은 곳이 없어졌다. 백허그 하며 꼭 파묻었을 때부터 이미 네가 닿지 못한 곳이 없었지만- 랑이 너를 묻히는 것보단 네가 랑에게 묻히는 것이 좋았다. 향기가 되었든 온기가 되었든, 네게서 받는게 더 좋았다.
하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을 때, 랑은 알람을 손가락으로 쇽 밀어서 지워버렸다. 안 지웠어야 들키지 않기에 쉬웠을 거라는 건 이미 알람이 지워진 후에야 드는 생각이었다. 사과를 언제 왜 보냈는지 물어보면 이실직고 밖에 못할 것 같아서, 알람을 지우자고 생각했는데- 지운적 없는 알람이 사라져있다면 그게 더 의심스러울 것 같았다. 그렇게 크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닌데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웃, ~."
그러다 혀를 잘못 씹어버려서, 우유라고 답하려다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소리 없이 끄응 앓는다.
괴다- 네 마음속에 고여있던 말 한 마디가 문득 떠올라 그를 향했다. 품안에 한아름 안긴 따스한 온기의 모습을 하고, 발그레 상기된 뺨의 모습을 하고, 그 뺨에 한가득 걸린 미소의 모습을 하고, 곱게 눈웃음짓는 푸른 눈동자의 모습을 하고. 현민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나도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구나. 네가 그에게 빠졌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네가 담겨있었다. 방향은 반대였지만, 그것은 서로가 마주보고 있어서였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현민은 너를 꼭 안고 있으면서 생각했다. 자신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친해진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소년의 마음에 굳게 끼어있던 껍질을 깨어부수었다.
"너한테 공부 가르쳐달라고 할 때는, 이런 것까지 배우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사실이었다. 네가 그의 가슴팍으로 쾅 떨어졌을 때 단단한 껍질 안에 갇혀있던 그의 마음이 움찔 하고 놀랐으나, 그저 껍데기에 생긴 아주 작은 틈으로 널 내어다보기만 할 뿐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껍데기에 난 구멍은 다시 메워질 것이고, 나는 네게 기말고사 공부만 조금 배우게 될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너는 두 가지의 예상을 전부 다 깨버렸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소년에게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었고, 공부는- 어쩌다 보니 1학년 기말고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너와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2학년 1학기 중간고사까지 그 이후로도 너와 계속 이렇게 함께하고 있게 됐다.
자신의 가슴팍에 떨어진 너는 구름이었지만 소년에게는 달이었다. 품안에서 행복하게 꼭 파묻혀있는 너를 놓기가 싫을 정도였다. 간식 준비는 빨리빨리 하자고 소년은 생각했다.
잠식되어도 괜찮다고 바랐다. 너도 그러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 네가 나도 그렇다고 말해서 랑은 배시시 웃었다. 때로는 덜익은 딸기처럼 시큼할 때도 있겠지만 마침내 달게 익으면 그건 우리의 것이니까 그때까지 같이 있을 것이다. 서투르더라도 너에게서 배우고, 또 때로는 랑이 알려줄 때도 있을테니까 둘이 나란히 걷는 여행길은 방향도 쉼도 걸음걸이도 함께 마음대로 정하면 된다. 랑은 네가 쫓아와줘서 기뻤다. 조금 늦었지만 네 옆에 설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거, 전부 너가 알려준건데~."
네가 그랬듯이, 나도 혼자가 편하고 익숙하다고 믿었으니까- 랑이 이렇게까지 너를 욕심내는 것은 전부 네 탓이다. 네가 랑을 이렇게 바꿔놓았고, 그저 학교 공부를 가르쳐주는 것 외의 많은 의미를 갖게 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둔 귀에 피어싱을 뚫은게 랑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의 너는 몰랐겠지만- 아물지도 않아 덧난 피어싱이 선생님 눈에 들까봐 전전긍긍하던 걸 도와준 답례에서 시작한 만남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네가 기다려주어서였다. 언제나 같은 마음을 보여주면서 랑을 바라봐주어서다.
"갠찬하."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찔끔 달렸다. 혀를 씹었지만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쿡 물어버린 통증이 아렸다. 발음이 이상했지만 깜짝 놀란 너를 보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답했다. 혀를 내밀어보라는 말에는 멈칫거렸다. 의식하면 안 돼, 넌 그냥 걱정해주는 건데- 라고 생각하면 이미 늦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혀를 살짝 베- 내밀지만 부끄러워하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감아버린다.
현민이 더이상 누군가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은 배신당한 우정으로 인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일부나마 맡길 수 없다고 단정짓게 되었기 때문이다. 뿌리깊은 인간불신. 마음 속에서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실격시켜 버린 그 마음이 현민의 껍질이었다. 그런데 그 껍질에 너에게 딱 맞는 네 모양의 네 구멍이 뚫렸고, 그것은 그 안에 있던 소년의 가슴에 너에게 꼭 맞는 모양의 자국을 남긴 것과는 별개로 조금씩 더 허물어져, 친구 몇몇 정도는 데면데면하게 대해줄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그리고 현민은 자신의 껍질을 깨어준 너를 쫓아왔다. 끈질기게 함께했고, 옆에서 기다렸다. 그가 한끼 밥 사달라거나 매점에서 간식 사달라거나 하고 한 번 만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보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부탁을 한 것은, 어쩌면 그 역시도 네 껍질을 일부나마 부수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기에게 꼭 맞아, 자기만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우선. 네가 언젠가 네 껍질을 좀더 깨어내고 싶어하면 언제든지 네 껍질을 부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도록. 그래서 현민은, 너도 나오면 안 돼- 하고 네가 욕심스레 꺼낸 말에, 기쁘게 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난 너 못 내보내."
자신이 네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해서.
늦은들 어떠랴. 지금 같이 있지 않은가.
현민은 아무 생각 없이, 순수히 네 혓바닥이 어떤지가 걱정되어 거기부터 눈이 갔다. 다행히 상처까지 나진 않은 듯했다. 다만... 온통 빨개져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네 얼굴이 보였을 뿐이다. 네가 무엇 때문에 혓바닥 내보여주는 것 갖고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알 것도 같아서, 현민도 덩달아 얼굴이 홍시색이 됐다. 현민은 얼굴 빨갛게 한 대가라는 느낌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네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을 남겼다.
"응, 안 다쳐서 다행이네."
하는 말은 네 이마 위에 얹혔다. 그는 간식 담은 그릇을 집어들려다 아직 비어있는 잔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