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 Picrewの「랭구포」でつくったよ! https://picrew.me/share?cd=R2z8KXnFhF #Picrew #랭구포 꽤 가무잡잡해서 색에 무게감이 있는 아이- 그러나 정확히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채도가 높다기보다는 명도가 낮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새까만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색이지만 머리카락은 곱슬기가 좀 심해서 나름대로 신경쓰고 있는 부분. 가지런히 선이 곧은 이목구비를 갖고 있고, 속쌍꺼풀이 있는데 눈을 크게 치뜨거나 뭘 잘못 먹고 자서 얼굴이 부은 게 아니면 잘 안 보인다. 그 외에 얼굴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왼눈에 찍힌 눈물점과, 후술할 피어싱 자국. 몸은 운동부라는 이름값을 하는 건지 잘 관리되어 있고, 근육 비율이 높은 신체형상은 전체적으로 날렵하면서도 어깨도 충분히 넓어 옷발이 좋은 스타일. 키는 184센티미터. 한쪽 귀에는 아웃컨츠와 스너그를 따라, 반대쪽 귀에는 귓바퀴를 따라 피어싱 자국이 줄줄이 나 있다. 왼어깨에는 기계로 된 심장 문신이 새겨져 있다. 여러모로 '학생의 방정한 품행과 단정한 용모' 같은 것과는 담 쌓은 듯한 모습이지만, 그나마 평소에 교복은 그럭저럭 잘 차려입고 다니고 있으며 학교에서는 피어싱도 끼지 않는다. 악세사리는 보통 피어싱만 끼고 다니지만, 최근에는 은으로 만든 여우꼬리 모양의 펜던트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운동할 때나 학교에서는 목 안에 집어넣지만, 하교할 때부터는 목 밖으로 꺼내놓는다.
성격 / 해야 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이외의 쓸데없는 일은 피한다는 본인의 주관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해 살아가는 말수 적고 무뚝뚝한 소년. 그러나 천성 자체는 상냥해서, 지금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같은 게 있다면 외면하지 못하고 도와주게 된다. 그 찢어진 눈과 짙은 눈썹, 딱벌어진 어깨에서는 쉽사리 연상할 수 없지만 쑥스러움을 매우 많이 타기에, 무뚝뚝한 얼굴 뒤에 쑥스러움을 숨겨놓고 인간관계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기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정말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꽤 경계가 풀어져 그 나잇대 소년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해야 되는 일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주의이기에 다른 사람과 협동을 해야 하는 의무적 활동, 특히 축구부 활동 같은 것에서는 충분히 훌륭한 노력과 협동심을 보여준다. 또한 탐미적인 기질이 있어 본인이 한번 마음에 든 것은 손에 넣고야 마는 성격인데, 귀의 피어싱이라던가 문신 역시도 그런 기질의 일환인 모양이다. 교칙에 대해서는 본인 멋대로의 합리주의에 입각해, 범죄 안 저지르고 소동 안 일으키고 다른 사람 학교생활 방해만 안 하면 되지- 하는 입장이다. 그래, 아직 인간미를 어설프게 덜 버린 그런 아이였다. 오지랖을 부리던 버릇이 서서히 흐려져가던 아이였다. 사람을 미워하는 연습을 차곡차곡 해나가며, 삶의 의미를 덜어내가던 아이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소년의 가슴팍에 쾅 떨어지면서 그 모든 게 어긋났다.
기타 / * 기타? 상당히 잘 친다. 밴ㄷ 어쩌고 하다가 말 돌린 것을 기억하는가? * 정확히는 축구부라는 듯하다. 팀에서는 에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팀의 주축 중 하나라고 한다. * 발이 매우 빠르다. 교내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 공부를 배우고 싶다고 한 이유는,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특히 유별난 이유는 아니다. * 위로 나이터울이 꽤 있는 친형이 하나 있다. * 종종 일일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일 아르바이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일정 선택이 자유로운데다, 일당으로 받기에 월급이 떼일 일이 없어서라고 한다. * 가족이 집에 모이는 게 드문 일이다. 아버지는 외지에서 근무하고, 형은 독립했으며, 어머니도 야근이 잦다. 그나마 형과는 자주 만나는 편이다. * 어머니 명의로 된 혼다 줌머가 있는데, 현민 본인도 이륜원동기 면허가 있어서 종종 타고 다닌다. 아르바이트 갈 때 요긴하게 쓴다고 한다. 형이 두고 간 커다란 바이크가 있지만, 2종 소형 면허가 필요하기에 내년에 취득할 예정... 이었으나 지금은 좀 고민중이다. * 2월 24일부터, 같은 학급의 어느 여자애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외모 / https://picrew.me/share?cd=ATuZWBp2Cz 유달리 색이 연했다. 흰 물감을 섞어 연해진 것이 아니라, 맑았다. 검은 머리칼도 새카맣지를 않았고, 하늘색의 눈동자는 저 멀리 푸른 것을 투명한 물방울로 비춰보는 듯했다. 노을지는 하늘 아래 서 있으면 주홍빛으로 물들고, 아이가 보는 풍경은 거울에 비춘듯 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크게 구불거리는 반곱슬은 가슴 아래까지 닿는다. 숱이 많아 복슬복슬해보인다. 꽤나 두꺼운 눈썹이 살짝 보일 정도로 단정히 내려온 앞머리 옆으로, 왼쪽 귓가의 옆머리는 굵게 땋아 귀를 드러냈다. 오른쪽 귀에는 뚫은지 얼마 안된 피어싱이 세개. 귓볼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한다. 키는 아직 크고 있는 중으로 157cm. 몸무게는 평균.
성격 / 구름 같다. 머리 위 하늘에서 동실동실 떠 있는 구름처럼 그저 있을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겉돌지는 않았지만 혼자였다. 조용하고 묵묵히 자리에 머물고 있다가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짓는다. 다가갈 거리를 내어주지는 않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다가와 있고는 했다.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 볼 수 있는 구름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듯이. 쉽게 호의에 가득찬 말을 건넸고, 짓궂은 장난을 치고, 보드라운 미소가 상냥했다. 구김없고 밝은 아이라는 건 대화 몇 번으로 알아챌 수 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다. 정말 특별하게도 어느 남자아이에게만 구름 속에 숨겨둔 모습을 온전히 보였다. 언젠가 구름이 걷힐지도.
기타 / · 쉽게 넘어진다. 무릎과 손바닥에 반창고가 없는 날이 드물 정도. · 걸음 속도가 느린 편. · 갑자기 나는 큰 소리에 약하다. 화들짝 놀란다. · 비 오는 날, 비 구경, 장마철을 좋아한다. 비 맞는 것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듯. · 눈물은 적은 편. · 학교랑 집은 매우 가깝다. 등교는 아침 일찍, 하교는 밤 늦게 한다. · 귀에 뚫은 피어싱 셋 중 하나만 범고래 모양 피어싱을 하고 다니며 남은 둘은 다 투명이다. 교칙이 신경쓰여서. · 열일곱의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늘 하고다니는 고래 지느러미 장식의 목걸이가 있다. 학교에서도 셔츠 아래 하고 다닌다. · 특별한 그 남자아이와 절찬리 연애 중. 2월 24일이 기념일이다.
제민: 이게 뭐 어때서 임마. 내 결혼식은 이거 입고 올렸는데. 현민: 그건 형이 형이니까 그런 거고. 제민: 네 머릿속에서 형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좀 비뚤어진 거 같은데 기분 탓이냐? 현민: 그 기분이 괜히 든 건 아닐 거야. 제민: 너 진짜 형한테 왜그르냐 현민: 글쎄 왜일까
손이 이끌려 올라가면 랑은 눈을 깜빡거린다. 손을 잡는게 아니라 다른 무엇이 할게 있나- 하는 찰나 네 가슴팍 위에 손이 얹혀졌다. 손바닥 아래로 박동이 느껴진다. 네 품에 덜컥 빠질 때마다 느꼈고, 네게 처음 고백하던 날에도 네 품 속에서 들었던 그 심박의 울림- 그 모든 때와 변함없는 박동에 랑은 배시시 웃었다. 놀랐다가 웃으며 짓는 모양이 꼭 꽃봉오리를 톡 건드렸더니 슬그머니 피어나는 것만 같다. 랑은 네 손길 하나로 피고 지고 하니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 방법도, 네 심박과 같은 심박으로 두근거리게 된 것도 전부 너로부터 비롯되었다.
"나 힘 세다-"
식판을 받아들고서 까르륵 웃는다. 원래도 미소를 그리는 표정이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네 앞에서 좀 더 웃음이 잦아진 것 같다. 잘 짓곤 하는 미소와는 다른, 언제나 설렘이 섞여 들어가있어 너에게만 보여주는 특별한 그 웃음. 좋아하는 아이 앞에서 그렇지 않는게 더 어렵다.
"응, 같이 푹 쉬자. 뭐하면서 쉴까~."
너도 랑도 잠이 부족한 것 같으니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나란히 서로에게 기대고 앉아 영화를 한 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랑이 둘 중에 하나 고르자면, 오후 훈련까지 끝내고 나면 넌 더 피곤해할테니까 이불 폭 덮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3월 모의고사가 뭐가 중요할까- 쉬자고 정했으니 쉬는 것도 제대로 해내면 된다.
"앞에!"
마주 앉는게 닿을 수 있기는 쉬웠지만 랑은 언제나 작은 문제와 함께하기 때문에 마주 앉는 걸 쉽게 골랐다. 언제나 느린 걸음으로 발을 떼는 이유와 같았다. 급식실은 다른 학생들도 많고 그만큼 다른 소리도 많기 때문에 네 소리를 놓치기 쉬웠다. 독순을 연습한 이유가 이것말고 뭐가 더 있을까. 물론 그것말고도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마주보고 있으면, 고개만 들고 있는다면 네 얼굴을 계속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랑도 네가 발견했던 창가 쪽 빈 자리를 보았는지, 걸음이 그 쪽으로 향해 이내 자리에 잡고 앉았다.
달맞이꽃과 해바라기 같았다. 누가 달맞이꽃이고 누가 해바라기인지는 모르겠다. 누군가의 눈빛은 누군가만을 쫓고 있었고, 누군가의 손길은 누군가를 톡 피어나게 했다. 어쩌면 구분할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맞이꽃이면서 동시에 해바라기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가슴속에 이런 심장박동을 품게 될 줄도 몰랐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을 새까만 눈동자에 누군가의 모습을 이렇게 선명하게 담아놓게 될 줄도 몰랐다. 모두, 네가 있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다. 이 모든 것을 네가 피웠다.
"그러네, 배하랑. 너 세구나."
하고 현민은 웃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네게는 물리적인 힘 그 이상의 힘이 있었다. 현민에게만 통하는, 현민에게만 전해지는 어떤 힘이. 그래서 현민은 너를 보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새 학기 들어서, 현민이 사람이 꽤 변했다는 평판은 널리 퍼져 있었다. 반 아이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고, 축구부원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예전에는 어떤 일이건 그가 노력과는 별개로 의욕이 없어 보인다거나, 인간관계에 딱히 큰 관심이 없어보인다거나 하는 말이 전부였는데... 언제부턴가, 그 아이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덜 차갑고, 더 풍부해졌다고. 축구부 주장은 그가 기계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민과 이야기하는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현민이 이렇게 곱게 핀 붉은 뺨을 보여주는 것은 너에게뿐이었다.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과 나누는 무언가. 네게도 있고, 그에게도 있는 그것. 네가 꽃피운 그것.
"뭘 해도 좋은데. 둘이 붙어앉아서 영화를 본다던가, 간식이라도 좀 먹거나, 그냥 자도 좋고..."
하면서, 현민은 네 말대로 네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당신을 따라 "잘 먹겠습니다-" 하고 자리에 앉은 현민은, 첫 밥숟가락을 뜨고 입안에 밀어넣고 조금 우물거리다가 대뜸 너의 식판에서 돈가스 한 조각을 쏙 빼앗아 자신의 입에 집어넣었다. 어? 하고 당황해서 현민을 바라보면, 그는 자기 식판에서 돈가스 한 조각을 집어서 당신에게 내밀고 있다. 얼굴엔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린 채다.
셋 다 해버리면 되잖아- 랑은 현답을 내놓았다고 뿌듯하게 웃는다. 무슨 영화를 보는게 좋을지 벌써부터 고민했다. 둘 다 보다가 까무룩 잠들어버릴 거라면 편안하게 보기 좋은 영화가 좋을 것 같았다. 간식은 뭐려나- 오늘 네가 준비한 그 간식을 그때까지 남겨둘 수 있을 자신은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난기 전에 홀라당 다 먹어버릴 것 같다. 영화보면서 먹는 간식이라고 하면 보통 팝콘이나 나쵸가 떠오른다. 과자 여러 봉지 사서 까놓고 먹는 것도 좋을 거 같았는데, 과자를 사러갔다가 이것저것 과자봉지를 다 골라오니 네가 몇 봉지는 다시 진열대로 돌려보내는 게 자연스레 그려졌다. 랑이 하는 상상에서 이제 너는 빠질 수 없는 등장인물이고 주연이다.
"와앙~."
쏙 빼앗기는 돈가스 조각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널 바라보면, 장난스레 웃으며 다른 돈가스 조각을 내밀고 있다. 랑은 소리죽여 까르륵 웃었고 돈가스를 받아먹는가 싶더니- 네 젓가락을 콕 물었다. 네가 손을 뒤로 빼려고 하면 젓가락을 물고 있다는게 느껴졌을 것이다. 네가 한번 손을 뒤로 물리려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그때서야 놓아주었다. 장난에 장난으로 응수하고는 만족스럽게 돈가스를 오물거린다. 양이 줄기는 했어도 운동도 하지 않는 조그만 체구에 비하면 양이 많았다.
"이따- 훈련 끝나는 거 맞춰서 나갈까?"
이제는 훈련이 끝난 것 같아도 축구장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완전히 흩어지면 모를까, 작년에 배운 교훈이다.
@@..... 오늘 병원 갔다왔어 어제 오한이랑 구토감에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잔거였는데 오늘 일어나니 두통이 심해서.... 혹시 몰라서 신속항원검사도 했고..... 물론 음성이었어 ㅎ.ㅎ 열이 37.9도... 로 좀 있었더라 약 먹고 쉬어서 지금은 좀 괜찮아 뭘 먹어도 배탈나서 죽 해먹었다 @@.......
하며 킥킥 웃던 현민은, 네가 돈가스를 받아먹으면서 젓가락까지 통째로 합 물어버리자 그대로 멈췄다. 빼지도 들이밀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모양새다. 뭔가가 콕 무는 걸 잡아당기기 전에 이미 손가락에 쥐고 있던 감촉으로 알아챈 듯하다. 그는 너를 바라보며 걱정 반 잔소리 반으로 말했다.
"야, 배하랑, 이거 쇠젓가락이잖아. 이빨 상해."
현민은 네 이빨이 젓가락을 놔주고서야 젓가락을 뒤로 물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담이었지만, 현민은 어렸을 적 멋도 모르고 쇠로 된 식기를 씹었다가 앞니가 나간 적이 있어서 더 조심스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영구치가 아니라 유치여서 천만 다행이었지. 네가 젓가락을 놔주자, 현민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좀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화이트데이.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면서 보낼 수도 있겠지만, 네 말대로 집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보내도 좋을 성싶다. 체육특기생 특성상 현민은 꽤 활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게 활동적인 삶을 선호한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았기에 내심 어딘가 멋진 곳으로 가서 데이트를 하며 보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내년 화이트데이는 고3이니까, 이렇게 마음 편하게 데이트를 갈까 집에서 쉴까 고민할 틈도 없을 테고. 하지만 올해는 아직 놀러나갈 빌미를 잡을 기념일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어린이날, 여름방학, 추석, 크리스마스... 다, 너와 정식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할 그런 나날들이다.
문득 그게 행복해서, 현민은 자기도 모르게 밥을 먹으면서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띄웠다. 오늘따라 쌀알 한 톨까지 맛있는 것 같았다.
"그래, 훈련 끝나면 연락할게. 같이 가자." 하다가 현민은 덧붙였다. "축구부 동기들이 니 마누라랑 싸웠냐더라." 실없는 소리를 하고, 쿡쿡 웃고는 다시 밥을 입안에 밀어넣는다.
서로 마주앉아서 밥을 먹고, 이따금 반찬 한 쪽씩을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빨리도 끝났다. 현민도 당신 못잖은 먹보였기에.
딱딱한 걸 잘못 물어 찌르르 올라오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잘못하면 이가 상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슴없이 이런 장난을 친건 그만큼 너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과 잔소리가 섞인 네 말이 그렇게 듣기 좋았다. 좋아하는 아이에게 일부러 장난을 치고 관심을 끄는 못된 심보를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네가 빨갛게 물드는 이유는 내가 좋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랑은 네 뺨에 열이 오를 때마다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가, 내가 좋기 때문에 빨갛게 물든대- 짓궂은 장난은 여태까지도 많이 쳤다.
"응- 이따 많이 안고 있어야겠다."
훈련 후에 네가 땀냄새를 신경쓰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랑은 네 품에 부빗거리는 걸 좋아했는데, 때때로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네가 너무 좋아서 부리는 애교일 때도 있었고, 부끄러움에 사무쳐서 바르작거리는 것이기도 했으며- 잠시 떨어져있느라 흐릿해진 네 향기나 온기 등을 다시 충전하는 것이기도 했다. 훈련 끝난 후에는 보통 세번째 의미가 제일 컸는데, 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네가 계속 신경쓴다면- 참아야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미리 충전해두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싸울 마누라도 없는 것들이 뭐라냐?'라고 하자~."
쿡쿡 웃는 소리는 두 명의 것이 되었다. 랑은 스스로를 네 마누라라고 칭하는 것에 걸림돌이 없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게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게 드러난다.
"마누라 있다고 하면 나 불러. 안 싸웠다고 꼭 안아줄게!"
-그렇게 끝나버린 점심 식사 후에는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후식 시간이다. 랑은 네 물음에 기다렸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채 홍조가 지워지지 않은 뺨을 하고 현민은 눈을 깜박였다. 말마따나 그는 자신의 체취에 꽤 예민한 편이었다. 운동하고 난 직후에는 더 신경이 쓰였다. 데오도란트를 쓰더라도 흐를 땀은 흐르고, 그렇게 되면 체취가 강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현민은 한동안은 훈련 끝난 직후에는 너를 포옹해주는 데에 조금 소극적이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것도 없어졌다. 네 포옹에 여러 가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안겨올 때의 태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최근 현민에게는 훈련 동안 잠깐의 쉬는 시간에 틈틈이, 훈련이 끝난 직후에 몸에 난 땀을 마르기 전에 후딱 스포츠타올로 닦아내는 버릇이 생겼다. 신경이 쓰이더라도 네가 품에 안겨오는 걸 주저하게 되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사소한 잡설은 뒤로하고- 현민은 밥을 먹다가, 자신이 꺼낸 이야기긴 하지만 새삼스레 자신을 마누라라고 툭 확정해버리는 랑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그... 그러면 되겠네."
애써 태연하게 말은 했으나, 결국 식사를 끝마칠 때쯤에 현민의 양뺨에는 진달래꽃이 한가득 피어나 버리고 말았다. -너도 한 번씩 과시해보는 건 어떨까?
보통 후식을 먹자고 하면 그는 너와 함께 매점에를 가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코스가 조금 달랐다. 매점에 가는 게 아니라 네 손을 잡고 곧장 교실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는 것이다.
"오늘 간식은 내가 준비해왔어."
현민은 그 말이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서, 너한테 특별히 무언가 해주고 싶은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오늘따라 자신이 간식을 준비해오고 싶어서 준비해온 것처럼 들렸으면 했다. 그래서 최대한 무던하게 들리도록 말하려 노력했고,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렇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을 것이, 그 이전부터 이미 다 눈치채지 않았는가. 너도, 그도. 간식을 챙겨온 반합 뚜껑을 열 때까지 그걸 바로 입밖으로 꺼내는 것을 수줍어하고 있을 뿐이다. 현민은 네 손을 잡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게 된, 아직 조금 낯선 2학년 교실 앞에서 멈춰선 현민은 너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과후에는 바로 훈련을 하러 갈테고, 수업시간에 널 안고 있을 수도 없고, 쉬는 시간은 너무 짧다. 남은 건 점심 시간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도 너무 짧은 것 같지만, 훈련하는 동안만 참아낼 만큼 충전하면 된다. 그래도 요즈음에 들어서는 네가 저번들보다 덜 주저하는 것 같아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랑은 좋았다. 너를 잔뜩 느끼면서 동시에 네게 자신을 남기는게 좋았다. 잠시 후면 다가올 후식 시간이 이렇게까지 기대된다. 선물 상자는 원래 열기 직전이 제일 설레고 들뜨는 법이다.
"왜 이렇게 빨개요, 서방님~."
식사가 끝날 때 쯤, 랑은 네 양빰을 보고서 툭 네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까르륵 웃으면서 가볍게 발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조심하고는 했었지만, 네 손도 꼭 잡고 있고- 방금 너를 서방님이라고 칭한게 네게 큰 파문을 일도록 할 것 같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걸음이 들떴다. 랑은 네 손을 잡고서 총총 몇 걸음을 떼다가 지금쯤이면 새빨개졌을까- 하고서 너를 잠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엄청 기대중인걸-"
사탕일까, 아니면 사탕처럼 달콤한 다른 디저트들일까- 뭐든 상관없다. 네가 준비한 간식이라면 맛있게 다 먹을 자신이 있었다.
"얌전히 기다릴게, 다녀와-"
랑은 반 앞의 복도에서 네게 다녀오란 듯이 손을 흔들었다. 교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잠깐 후에도, 똑같이 미소 지으면서 웃고 있을 것이다.
굳이 현민의 얼굴을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잖아도 따뜻한 편이던 그의 손이 갑자기 확 따뜻해졌으니까. 돌아보면 봄인데 홍시가 풍년인 게 아주 볼만하다. 이런저런 봄꽃에 비유하긴 했지만, 역시 그의 가무잡잡한 피부 아래로 올라오는 혈색은 홍시에 빗대는 게 가장 비슷할 것 같다. 여기서 더 진해지면 토마토 정도 되려나. "긋." 덕분에 네 손을 잡고 교실에 돌아가는 현민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현민은 너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는 케익상자보다 조금 작아보이는 상자같은 게 담긴 봉투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 상자 하나를 채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인터넷에서 여자가 화이트데이에 받고 싶어하는 선물을 검색해봤다가 가장 받기 싫은 선물 1위가 사탕이라는 말을 듣고 기가 죽기도 했고, 푸딩은 과하게 익어 굳어버리고, 초콜릿은 녹고, 쿠키반죽은 타버리고... 세 번째의 마카롱 머랭을 실패하고 나서, 나 제과학원 등록할 거야! 하고 울분을 토했다가 옆에서 도와주시던 어머니한테 대입 치르고 나서 배워! 하는 핀잔과 함께 딱밤까지 맞아가며 노력한 끝에 겨우겨우 잘 만들어진 것들로 채운 상자였다.
네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앞서 인터넷에서 봤던 말이 불안했다. 네가 먹을 걸 아주 좋아하는 먹깨비라는 건 알고 있었고, 오늘 간식 준비해왔다는 말에 환해지는 네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 아직 떨치지 못한 불안감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실을 나왔을 때 그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덜어져 있었고, 조금 초조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처음으로 내어놓는 화이트데이 선물을 손에 쥐고 불안해하는 청춘 아닐까.
현민은 남은 손을 네게 내밀었다. 여전히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너와 눈을 마주치면,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초조한 기색이 한결 덜어지는 게 보인다.
"많이 기다렸지, 가자."
옥상에 도착해서 문을 달칵 열면, 옥상 위로 환히 트인 하늘과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한바탕 봄비가 지나간 덕에 따뜻해지나 싶었던 날씨가 조금 차가워졌지만, 춘추복에 외투를 입고 있는 차림이라면 옥상에서 간식시간을 가지기 싫을 정도로 차갑진 않다. 봄비가 끝나고 나면 봄이 찾아온다. 현민은 플라스틱 캐노피 아래에 마련돼 있는 벤치로 너를 이끌었고, 테이블에 반합을 올려둔 뒤 반합을 열어보였다.
그것은 명백히, 화이트데이 선물이었다.
앙증맞은 스푼이 옆에 놓여서 마개 씌워진 유리병에 들어있는 푸딩과 캐러멜 소스,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구워낸 초콜릿 쿠키와 아몬드 쿠키, 초콜릿을 입힌 딸기에, 과일 젤리며, 조각케이크(이건 기성품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금 못생긴 모양으로 울퉁불퉁하게 구워진 마카롱들까지. 서툰 솜씨로나마 잘 만들어진 게 나올 때까지 노력해서, 네게 먹여주고 싶은 것들로 채운 간식 도시락이었다. 가장 커다란 하트 모양 쿠키에는 happy white day라고 하얀 아이싱으로 삐뚤삐뚤하게 쓴 글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쿠키에는, 조그맣게 i love you라고 쓰여 있었고.
더 사랑받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상상조차 과분하다고 랑은 선을 그었다. 오늘 아침 대화 도중에 나왔던, 등수가 오르면 선물을 받느냐고 물었을 때 네가 해줄 수 있는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답했었다. 랑은 그래서, 받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정말 최악의 욕심이라고, 그래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던 것이다. 지금은 비밀이라고 둘러대고, 정말로 등수가 오르게 되면 그때가서나 말해보자고 결론지었다. 랑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은 너는 매일같이 해낸다. 오늘도 그랬다. 네가 뭘 준비했을까 기대하기는 했지만, 화이트데이니까- 사탕은 수제로 만들기도 어려운 거니까 랑도 모르게 사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기는-"
네가 기다린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현민아- 랑은 좋아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겪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라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설레여 했다. 네가 초조한 기색을 얼굴에 품고서 나오면 그러지 말란 듯이 더 방긋 웃었다. 네가 옆에 있어주는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던게 전부 너 덕분이고, 지금도 계속 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랑은 네 손을 잡았다. 이전에도 바랐지만 오늘도 바란다. 네 손을 잡는 마지막 손이 나의 손이길, 랑은 빌었다.
울지 않는 법을 왜 익혔냐면 약해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랑은 이미 이 사회 속에서 약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기 때문에 눈물까지 보여서는 안 됐다. 그 정도 시선, 그 정도 말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다고 시위하는 것이었다. 또 두번째 이유는 괜찮다고 속이기 위해서였다. 눈물은 주로 괴로움, 슬픔, 힘듦 등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어서- 눈물을 보면 괜찮지 않다는 반증이 되어버린다. 랑은 필사적으로 괜찮다고 해야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이유들도 잊은 채 눈물을 참는게 익숙해졌다. 버릇처럼 눈물이 나려고 하면 참아냈다. 지금도 그랬다.
"네 여보가 아침에 했던 말 기억 나?"
너무 예쁜 선물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푸딩, 초콜릿 쿠키, 아몬드 쿠키, 초콜릿 퐁듀 딸기, 과일 젤리, 조각케이크, 마카롱, 그리고 커다란 하트 모양 쿠키에 적힌 글자와, 그 옆 작은 쿠키에 적힌 글자들까지. 조각케이크는 기성품이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랑은 무언가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네가 너무 좋아서 벅찰 때도 울렁거리고는 했는데, 지금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네 사랑이 너무 달아서 한 입 머금었다가 녹아버리고 눈물샘도 같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얼굴을 붉힌다고 하면 늘 뺨만 발갛게 피우더니, 지금은 눈가 근처가 붉게 물들어간다. 이렇게 정성어린 선물을 받을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맛도, 모양도, 과분한 거니까, 나는 너를 오래 기다리게 했고- 너는 언제나 나를 바라봐줬고- 난 그럴 자격 없으니까- 랑은 울지 않는다. 옥상의 꽃샘추위 어린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등수 오르면 너한테 받고 싶다던 거."
삐뚤빼뚤하게 적힌 글자가 이렇게나 사랑스럽다. 랑은 'i love you'라고 적힌 쿠키를 손에 들었다.
"네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듣고 싶어. 그게 나한테는 정말- 정말 엄청 큰 선물이야."
랑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차오르면 고개를 든다던데, 랑은 울음을 참는 표정을 숨기고 싶어서 그 반대였다. 울음을 참아낸 것 같다고 느끼면 그제서야 너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고마워."
예쁘다고 하기에는 조금 일그러졌다. 울음을 참느라 발간 눈가나 찌푸려진 눈썹 때문이었다. 그래도 랑은 최대한 활짝 웃었다. 웃을 수 있었다. 해피 화이트데이, 네가 말한대로, 네가 쿠키에 적어준 대로- 네 덕분에 평생 중에 제일 행복한 날이 되어버렸기에.
현민은 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등수 오르면 선물로 해줄 것에 대한 이야기. 현민은 특별히 네게 뭘 해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었다. 그야, 네게 하고 싶은 일들, 네게 해주고 싶은 일들... 그런 것에 네 등수 같은 조건을 걸면, 오히려 자신이 해주지 못해 안달이 날 것 같아서. 무엇이건 함께 하고 싶었고, 무엇이건 나누고 싶었기에. 너를 좋아하고 있고, 네게 사랑에 빠졌으니까. 작년 11월의 너처럼 얄궂게 잡힐 듯 말 듯 살랑거리며 조건을 걸고 내어주는 일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너는 말했다. 자신에게 받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다고. 그 대답은 생각보다 너무 간단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수학에 있어서의 사칙연산만큼이나.
"......"
현민은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 눈가가 발개진 것을, 울음을 참느라 네 미소가 조금 일그러진 것을 현민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왜 울려고 그래, 하면서 도닥여주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모르게, 너를 울먹이게 만드는 그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 네가 그랬듯이 이 소년도 차가운 눈보라 속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황랑한 바람에 꽁꽁 얼어붙어서 마음 속에 퇴적되어 있던 것들에 따스한 봄바람이 닿아버린 것이다. 문득 자신의 눈가도 찡해오는 것 같았다.
강자도 약해보여선 안 된다. 약자도 약해보여선 안 된다. 차가운 세상의 바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엄정한 경쟁이 학생 때부터 인생 전체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이 사회에서 그 금언은 더욱 차갑게 아이들의 심장에 아로새겨지기 마련이다. 더러는 다른 아이들과의 우정이나 연대를 통해 해소하곤 했지만, 그나 너처럼 인간에 단단히 환멸한 이들에게는 그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 이 순간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너와 이 소년의 역학관계는 강자도 약자도 아니고,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년과 사랑에 빠진 소녀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괜찮아."
그래서 현민은 팔을 뻗어서, 네 손에 들린 쿠키가 부스러지지 않도록 널 조심스레 품 안에 꼭 끌어안고 토닥여주려 했다. 그것은 일종의 대답이었다. 고마워, 하는 네 말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고, 울음을 억지로 눌러참고 있는 네 감정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나야말로, 이렇게 날 소중하게 여겨줘서 고마워."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그도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잘 알고 있기에, 마음속에 차갑게 얼어붙은 그게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기에. 그러니 현민은 이제 네가 그것을 기쁘게 놓아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자신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랐다.
"많이 외롭고 힘들었지... 이젠 너랑 나랑 둘이 있으면 되니까, 그러니까 이제 울어도 괜찮아."
자신도 그러려고 했으니, 네가 허락한다면 자신도 네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그는 네 말에 마저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랑아."
그리고 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게 네게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문득, 네가 성적 등수를 조건으로 내걸려 했던 말을 지금이 아니라도 그 동안 네게 많이 했다는 게 떠올랐다. 그걸 채워줄까 해서, 현민은 다시 입을 뗐다. 그러나 역시 성적 등수까지 내걸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는 어정쩡한 조건을 내어놓았다.
괜찮아- 한 마디에 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랑은 네가 품에 꼭 끌어안아 토닥여주면 그게 그렇게 서러워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음 귀가 들리지 않게 됐던 그날에서부터 줄곧 듣고 싶었던 말은 괜찮다는 말이었다. 너무 늦게, 이제서 너에게야 듣게 된 말이 아렸다. 이번에도 너는 아무렇지 않게 랑이 기대조차 하지 못하겠다고 선 그어놨던 걸 먼저 해주었다. 랑은 네 품 속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너는 랑에게 있어서 처음 찾은 자리였다. 어딜가도 불청객만 같았던 랑에게 여긴 내 자리가 맞구나- 하고 느끼는 곳이 한 군데 있다면 너의 옆자리였다. 그런 네 품에 안겨서 토닥이는 네 손길을 받으면, 애써 울음을 참아낸게 의미없는 행동이 되어간다.
"네가 날 그렇게 여겨줘서, 난 따라한 거 밖에 안 돼."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다시 사람한테 상처입는게 더 무서워서, 그게 더 아프고 힘들어서 택한 선택지였고- 보다 낫다고 여겼다. 기댈 사람, 의지할 사람 같은 헛된 희망은 품지도 않았다. 하지만 랑이 덜컥 네 품에 굴러떨어지던 순간,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는 계속 랑을 쫓아와주었고 기다려주었다. 네 옆자리가 내 자리라면, 내 옆 자리는 네 자리인거야- 랑은 차마 얼굴을 묻을 수는 없었다.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방울은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뚝 떨어졌다.
"고마워-"
울음을 계속해서 참아버릇하면 언젠가 우는 방법도 모르게 된다. 랑도 그 난간에 걸친 상태라서 울음소리를 내지 못 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질 때까지 눈물 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가 뚝 떨어진다. 네가 사랑해- 하고 입맞춰주었을 때부터 랑은 눈물을 참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참지 않아도 서투르게 울고 있는 이유였다. 물기어린 목소리가 떨린다는 걸 안 랑은, 커플링 하자는 네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한 번 훔쳤다. 왼손을 네게 뻗었다. 네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눈물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도 굴뚝같아서 네 손을 잡고 싶다고 먼저 손을 내민다. 왼손을 내민 이유는, 네가 커플링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반지는 왼손 약지에 끼는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이."
그러면서 랑은 쥐고 있던 쿠키를 다시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먹깨비가 먹는 걸 망설였다. 네가 만든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다양하고- 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하고 예쁜, 귀엽고 사랑스러운 간식들. 아직 물기어려있던 눈가에 다시 물방울이 맺히나 싶더니, 랑은 간식들을 보다가 또 울컥해서 와앙 눈물을 흘린다. 뿌엥 하고 터졌다.
현민은 너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네게 말도 없이 마음을 기대어왔으니, 네가 기대고 싶다면 마음껏 기대어도 좋다고 말하는 대신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서 네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다 떨어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엄지손가락이 뻗어나오기 시작하는 그 부분으로, 그의 손에서 가장 굳은살이 덜한 부분으로 문질러 닦아주었다. 그리고 네가 내미는 왼손을 꼭 잡는다.
"...나도, 날 받아줘서 고마워."
그것은 사실이었다.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눈짓, 손짓, 말 한 마디, 까르륵 웃는 웃음 한 조각, 살랑살랑 흔들리듯 멀어졌다 다가오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전부 현민에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의미였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너였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어."
인간불신의 눈안개 속에서 헤매이고 있던 그에게, 오직 너만이 현민에게 선명한 의미를 남겼다. 아마 그 깊이는 다를지언정 현민과 네가 품고 있던 외로움의 색깔이 너무도 비슷해서가 아니었을까. 한 번 손으로 닦아주는 걸로는 모자랄 정도로 네가 소리내어 울어버리자, 현민은 널 다시 꼭 끌어안고는 네 어깨를 부드럽게 톡톡 두드려주었다. 눈물자국이 남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너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 가슴팍에 남은 네 눈물자국은 단순한 얼룩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비어있던 부분들 중 하나가 채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계속 네 옆에서, 네가 그것을 자신에게 덜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먹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네 안에 남는 거지."
네 눈물이 조금 진정될 때까지 널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면서, 현민은 나직하게- 그러나 네게 충분히 들릴 만한 톤으로, 이젠 꽤 익숙해진 음량으로 네게 말을 건네어왔다.
"받아줄래. 내 화이트데이 선물. 나, 너랑 이거 나눠먹고 싶어서 만들어왔거든. 그... 내가 제과제빵이라던가 손재주라던가 하는 게 없어서, 맛은 레시피 따라하니까 그럴싸하게 되던데 모양은 영 별로지만 그래도."
랑은 울고 있어서, 때문에 조금 더 말랑하고 조금 더 따뜻했다. 소리없이 딸꾹거리느라 몸이 움찔거렸다. 그래도 네 손길에 꼭 뺨을 묻었다. 눈물을 닦아주느라 문질러주는 손길이 아쉬웠다. 눈을 깜빡이면 한가득 맺혔다 툭 떨어지는 눈물이 떨어지지 못하고 네 손길에 묻어 사라진다. 랑은 네가 마주잡아주는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랑은 키도, 몸집도, 손도, 전부 너보다 이만큼 작았지만 그래도 하나 견줄 수 있는 크기가 있다면, 네가 날 좋아하고 아껴주는 만큼 나도 그만큼 커다랗게 너를 좋아하고 아낀다고- 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일지도 모른다. 감히 너에게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랑은 정말로, 온 마음 온 몸 다 바쳐 너를 좋아하고 있다.
"으응."
고마워할 일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가 조금 부끄러워 고갯짓을 한다. 전부 네가 주었다. 사랑받는 것도 서툴러하던 아이를 이렇게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도 너인데- 랑이 어떻게 너한테 감사인사를 받을 수 있을지, 랑은 너무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였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다는 건 랑이 해야하는 말 같았다. 랑이 네 품에 처음 굴러떨어졌던 날, 랑은 너를 보고서 친절하고 상냥하고 배려심 깊고 마음씀씀이 넓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칭했다. 그건 지금도 같았다. 늘어났다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았다. 언제나 랑은 그늘 속에 숨어있으려고 했는데- 네가 햇살의 따스함을 알려주고 말았다. 내가 너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면- 랑은 더 그렇게 느끼고 만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은, 여전히 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나아질 것이다. 지금도 너를 따라 열심히 걷고 있는 중이니까.
랑은 네가 꼭 끌어안아주면 응당 그렇게 해야된다는 듯이 너에게 바로 기댔다가- 퍼뜩 눈물자국 생각에 꾸욱 너를 조금 밀어내려고 했다. 조금만, 네 품에 완전히 얼굴을 묻지 못할 정도 만큼의 거리를 벌리려는 노력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도 되고, 그냥 조금만 떨어져서 눈물을 툭툭 떨구어도 되니까-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만으로도 랑은 고마워서- 그렇지만 네가 우뚝 버티고 선다면 밀릴 리가 없다. 이 선택은 네 몫이었다. 이제 더이상 눈물은 안 날 때까지 네 품에서 울었다. 진정되어도 여전히 눈가는 발갛고(남은 점심시간은 너와 보낼 거라 아픈 줄도 모르다가, 5교시가 시작하거든 머리랑 눈이 아프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말랑하고 따뜻했다. 여태 떨군 눈물방울과 닮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다. 랑은 네 품에서 나오기 전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쪽 입 맞추는 소리는 네 입술 위에서부터 들려온다.
"정말로 많이 사랑해."
목소리도 물기 어렸다. 그래도 이제 눈물은 더 안 흘린다는 듯이 늘 네게 지어보이던 눈웃음과 함께- 평소보다 더 헤실헤실 풀려있는 말랑말랑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나 진짜 아까워서- 사진도 못 찍고."
보석함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랑에게는 보석보다 더 귀했다. 푸딩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손 끝으로 건들여보았다. 울퉁불퉁한 마카롱도 귀여웠고, 삐뚤빼뚤한 네 아이싱도 귀여웠고, 모양이 별로라고 하는 네 말은 듣지도 않은 것처럼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이래서야는 네가 먹여주지 않는 이상은 절대 손에 들지도 않게 생겼다.
이 소년만이 네 인간불신의 벽을 깨고 네 유일한 사랑이 되지 않았는가. 너 역시도 이 소년의 인간불신의 벽을 깨고 그의 유일한 사랑이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크더라도 작더라도 그것은 같은 사랑일 것이다. 그가 온 몸과 온 마음을 다 바쳤듯이 너도 그러했으니까. 사랑이 공정하거나 불공정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특히나 너와 이 소년이 맺은 관계에는 더더욱. 그러니 근심하지 않아도 좋다. 그도 근심하지 않고 있으니까. 마음에 근심이 담길 자리가 있다면 거기에 네 사랑을-너를 향한 사랑과 네가 준 사랑 양쪽 모두- 담기도 바쁘다. 현민은 네가 자신의 품에서 마음껏 울도록 해주었다. 사랑 때문에 온기를 자신의 품에서 찾았으니 슬픔도 자신한테 내려놓았으면 했다. 지금 당장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조금씩 차근차근, 너와 삶의 궤적을 더 겹쳐나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네 마음 깊은 곳에 깔린 자갈들이 발에 밟혀 아플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것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너만큼은 아니라도 그도 꽤 차돌같이 단단히 여문 아이니까. 너에게는 퍽 말랑하긴 하지만, 말랑하다는 말이 연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현민은 네 눈물이 어느 정도 잦아들 즈음 되어서야 너를 품에서 살며시 놓아주었다. 네가 물기어린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볼 때 네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항상 그랬듯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고는 네 마음에서 넘쳐나온 사랑 한 방울을 쪽 하고 입술로 받아냈다. 문득 어느 겨울날 밤 아직 우리가 낯설었을 때 자신이 이랬더니 네가 석고상이라도 된 마냥 소년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게 생각난다.
문득 현민은 간식이 가득 든 반합통을 떠올렸다. 모양이 흐트러질세라 안에서 뒤섞일세라 오늘 학교로 오는 동안 가방을 조심조심 다루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와 아침을 나눠먹고, 오전훈련 가기 전에 잽싸게 사물함에 옮겨담아 놓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너를 향한 마음은, 그것보다 더 오랜 세월, 더 조심스럽게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었다. 힘들었냐고 하면 힘들지 않았다고 대답할 수 없을 만큼은 힘들었다.
자신도 그런데, 너는 자신보다 두어 발짝 앞으로 걸어가면서, 혼자 쓸쓸한 눈안개를 맞으며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 많이 힘들었겠구나. 많이 힘냈구나. 해서, 너를 품에서 놓아주고 네 입맞춤을 받아줄 때에는 너를 눈동자에 가만히 담고 있는 소년의 눈시울 역시 붉어져 있었다.
"나도 많이 사랑해."
너는 자신이 이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지금은 직접 해주지 못하는 말을, 은유적으로 담아서.
"사진은- 찍어줄까?"
현민은 반합통을 바라보았다. 겨우 쿠키 하나가 네 손에 들려있을 뿐, 네가 다시 반합통에 그걸 내려놓으면 반합통을 연 직후와 별다를 것 없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가만, 핸드폰은 다 걷어가지 않았던가? ─네가 사진을 찍거나 아니면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면, 그제서야 현민은 네가 가장 먼저 집어들었던 그 쿠키를 집어들어 네 입에 내밀어줄 것이다. "아아─" 하면서.
이것까지는 물들지 않아도 괜찮은데- 랑은 네가 눈시울을 붉힌 것을 보았다. 눈물도 전염이 된다더니 네게 옮아간 모양이다. 무엇이 옮아갔는지 랑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 말고도, 너에게 해야할 이야기도 들어야할 이야기가 앞으로 많았다.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사랑한다고 표현하는게 우선이었다. 많이 사랑한다고 답해준 너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에 랑은 몇 번 더 네게 입맞추었다. 입술에 맞추고 나서 뺨에 남고, 뺨에 남거든 다시 입술에 쪽 소리를 낸다. 사랑에 빠진 얼굴이나 눈빛은, 네가 랑을 바라볼 때의 것밖에 몰랐지만 지금 랑도 충분히 그랬다. 지금 얼굴을 본다면 랑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응?"
사진을 찍어줄까 물어보니 랑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방금까지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었어서, 속눈썹도 촉촉히 젖어있고 눈망울도 울망지다. 휴대폰은 아침에 다 걷어갈텐데- 꿈뻑거리는 눈이 궁금증을 가득 품고 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게 랑은 얼마나 모범생인지- 네가 카메라를 들고 왔나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무튼 사진 해프닝이 지나고, 랑은 네가 쿠키를 내미는 것에 우물쭈물거렸다. 몸을 조금 뒤로 빼면서 쿠키를 절대 입에 넣을 생각이 없다고 버티는 것 같더니, 너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눈을 질끈 감더니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나쁜짓도 아닌데 나쁜짓하는 것 같은 기분이 완연해서 쿠키를 받아물고도 느릿하게 오물거렸다. 먹깨비가 오래 참았다. 입에 먹을 것이 들어올 때까지 참은 것이다.
와삭와삭 쿠키 먹는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긴다. 눈을 반짝이는 랑은 어서 너도 하나 먹어보라고- 쿠키를 하나 집어서 너와 똑같이 내밀어준다.
어쩌면 이 수업은, 현민이 네게 가르쳐달라 했던 것은, 네가 여태까지 현민에게 가르쳐오고 있었던 것은, 현민과 네가 나누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공부라던가, 함께하는 시간이라던가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너와 그는 서로에게 조금씩 조금씩 감정을 느끼는 법을 가르치고 나누어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알 수 있었다. 네 얼굴에 가득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현민은 느낄 수 있었다.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네 입맞춤을 받았다. 입술과 뺨, 입술을 오가는 가슴에서 넘쳐나온 사랑을 현민은 기꺼이 받아주었다. 아니 세 번째 입맞춤은 그가 먼저 네게 다가온 것 같기까지 했다. 현민은 잠깐 손을 들어 네 뺨을 쓸어보았다. 그때 그의 입에서 사진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어쩌면 지금 네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굳이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현민에게 잊혀지지도 않을 것 같았지만.
이 소년의 삶은, 당신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다.
현민은 손을 뻗어, 아직도 네 눈가에 촉촉히 묻어있는 물기를 마저 닦아주려 했다. 그러다가 당신의 반문에 오히려 응? 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곧 ◑◑ 하고 옆으로 눈을 시선을 피한다. 강아지나 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 때 시선을 이렇게 피하지 않던가? 현민은 주머니를 뒤적여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다시 네게 시선을 맞추며 멋적게 웃었다.
"너한테만 말해주는 건데... 나 핸드폰 거두어갈 때 공기계 내거든."
아르바이트라던가, 형에게서의 연락이라던가 현민의 삶에는 사소한 돌발변수가 조금씩 있었다. 그 외에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잠은 안 올 때면 여러 가지로 요긴하게 써먹곤 했다. 이쯤에서 다시 말하지만, 현민은 교칙에 대해서는 본인 멋대로의 합리주의에 입각해, 범죄 안 저지르고 소동 안 일으키고 다른 사람 학교생활 방해만 안 하면 되지- 하는 입장이다.
뺨에 닿은 네 손도 따뜻했고, 랑의 뺨도 따뜻했다. 랑은 뺨 위로 네 손이 닿았을 때 뺨을 꾹 디밀었다. 네 손길을 좋아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았고, 손을 잡아주는 것도 좋았고, 어깨를 안아주는 것도 좋았고- 뺨을 마음껏 주물거리는 것도 좋아한다. 뺨을 쓸고지나갈 때 너를 깜빡깜빡 올려다본 것은, 더 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네게 애정어린 행동을 보이는 방법을 이제는 알고 있다. 방금도 세번 연달아 입맞추었다. 그때, 네가 뺨에 입 맞추었던 것을 모른 척하고 말았을 때-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랑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너 그러다 걸리면 어쩌려고-"
시선을 피하고 돌아왔을 때 랑의 표정은 궁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너를 빠안히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어물쩍 시선을 피하던 때에 이미 네가 폰을 내지 않았구나-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는 랑이 네가 휴대폰을 안 냈다는 걸 모를 정도면 정말 필요할 때만 휴대폰을 사용했다는 거라는 것이기에 더 잔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네가 멋적게 웃으며 이실직고를 끝낼 때까지는 계속 가늘게 뜨고서 보고 있었다.
"오늘은 공범이니까."
곧 표정은 풀어지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사진은 찍어야겠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선물을 어떻게 사진이라는 간단한 흔적도 못남기고 홀랑 먹어치울 수 있을런지, 먹깨비도 한 수 접었다. 랑은 네가 잠금을 풀고 폰을 넘겨준다면, 생각보다 엄청 열심히 사진을 찍을 것이다. 위에서 정면으로도 찍어보고, 살짝 각도를 내려 옆에서도 찍어보고, 가로로 담아서도 찍어보고, 그러다가는 너도 화면에 담아보더니 까르륵 웃는다.
"현민아, 브이~."
네 휴대폰을 쥐고 있는 너머로 보이는 랑의 표정이 개구지게 밝았다. 안 찍어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찍으면 안 되느냐고 앙탈부리는 눈길은 못 피할 성 싶다.
@@...... 늦게까지 하지 말구 일찍 자.... 아픈데 낮밤도 바뀌면 어떡해 같이 있어준다고 해도 인터넷상인걸 @@..... 그것도 위로가 된다는 건 알지만..... 음 난 11시에 약속이 있어서 아마 곧 자야할 거 같아 @@...... 나도 약 먹는 중이기도 하고....
걸리면 어쩌려고- 하고 쪼는 네 목소리와 눈빛에 현민은 또다시 시선을 어물쩍 ◐◐ 하고 돌렸다.
"아르바이트라거나 하는 걸 알아볼 때도 있고... 요즘은 너랑 공부하느라 잘 안 알아보지만, 그거 빼고라도 형 전화는 안 받으면 형이 학교로 쳐들어온단 말야."
형도 이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날 핑계로 아마 여기 놀러오는 기분으로 쳐들어오는 거 아닐까,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 학기, 네가 아직 현민과 별다른 연이 없었을 때, 학교에 인디밴드 스타가 왔다고 와글와글 시끄러웠던 게 두 번인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으로는 설득의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그는 아직도 쭈뼛거리다가.. 널 바라보고는 무리수를 뒀다.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한 번만 봐주라."
덕분에 오늘 사진도 찍을 수 있잖아- 하고 손가락을 세워보인다. 무리수가 잘 먹혀들어갔는지 네가 오늘은 공범이니까, 하는 말로 그를 용서해주자, 그는 이내 안도한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몰려오는 자괴감으로 얼굴이 찌글해졌다. 네가 신나게 간식 도시락을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하는 동안에도 현민의 얼굴은 수치스러운 자괴감에서 쉬이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러다 랑이 이쪽을 카메라로 비추자, 현민은 눈을 깜빡이며 표정을 풀고 바라봐온다. 네가 이 쪽을 렌즈로 겨누어오며 브이- 하자, 현민은 웃지는 못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대로 브이 포즈는 취해준다.
찰칵 하고 촬영음이 나자, 현민은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네가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내밀어 핸드폰을 받아든다. 그리곤 네 옆에 나란히 붙어앉는다.
"그러면 이제 같이 찍자. 자, 웃어봐..."
생각해보니, 지금껏 그와 같이 붙어서 셀카를 찍은 적은 없었지.
"전부터 꼭 한번 이렇게 찍어보고 싶었거든."
하고 그는 너를 바라보며 얼굴에 순진한 웃음을 쑥스럽게 짓는다. 아- 지금 손을 뻗어서 버튼을 누르면 샷이 잘 나오겠다.
# 현민이 형이 현랑고에 갑툭튀한 게 아마 장기하가 고등학교에 갑툭튀했다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원래부터 귀여운 걸 좋아했는지 랑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너는 무리수라고 생각하며 한 행동이 귀여워서 깜빡 넘어가고 말았다. 깐쵸를 처음 만났을 때 쓰다듬는 걸 허락해주거나, 머리를 다리에 디밀어 부빗거릴 때도 귀엽다고 느꼈지만- 지금 느끼는 만큼 귀엽지는 않았다. 심장이 쿵 하고 멈췄다가 갑자기 빨리 뛰는 느낌이 생소했다. 분명 잔소리해야하는 상황도 맞고, 방금까지도 너를 흘겨볼 수 있었는데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표정 관리를 실패하기 전에 사진을 찍으며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간식들을 찍을 때도 네게는 온전히 촬영에만 집중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머릿속에서는 윙크를 하면 어떻게 안 넘어가- 하면서 너 모를 억울함을 쏟고 있었다.
"왜 안 웃어줘-"
브이- 하고 입모양만 흉내내도 입꼬리는 미소짓는 흉내는 가능한데, 정말 손가락 두개만 브이 모양을 그리며 웃지 못하는 네 표정에 부우 볼을 부풀렸다. 휴대폰 화면에 담긴 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안 웃어도 귀엽고 사랑스럽고 이쁘고 잘생기고 가슴 한가득 설레와서 계속 볼을 부풀리고 있지도 못했다. 브이라고 하니까 브이를 그려준게 얼마나 귀여워- 하고 있자니 네가 폰을 다시 받아갔다. 그러더니 옆으로 붙어앉았고, 랑은 너를 올려다본다.
"응?"
랑은 순식간에 얼굴 위로 나 방금까지 울었는데- 라는 말을 써붙였다. 눈이 부었다거나, 아직도 빨갛게 올라와있을텐데- 눈물자국이 남아있으면 그건 또 어쩌면 좋겠냐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너와 사진을 찍는게 싫은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랑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이른바 첫 커플 사진인데 반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쁘게 찍고 싶어서 우물쭈물거린다. 너는 예쁘게 웃고 있는데, 랑은 울고나서 못난 모습일 거란 직감이 불안해서- 일단 얼굴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게 네 품속으로 폭 안겨 들어간다.
왜 안 웃어줘- 하고 네가 투덜거리면 현민은 어떻게든 얼굴에 웃는 모습은 띄워보지만, 역시 쑥스러움에 절어있어서 그런가 영 쑥스러워하는 웃음이 나온다.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호응해준 것이고 이것도 나름대로 한때의 귀여운 추억으로 담아둘 수 있겠지만, 활짝 웃는 얼굴을 원한다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 현민이 붙어앉았을 때 그의 말에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당혹스럽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에는 현민이 오히려 놀랐다. 그야, 눈시울에 아직도 혈색이 올라와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예쁜데."
어디까지나 현민은 네게 사랑에 빠져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품안에 몸을 푹 던져들어오는 너를 받아안고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다,
"별로 티도 안 나고... 나도 조금..." 울었다는 말은 못하고, "좀 그랬고..." 하다가, 현민은 네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카메라를 피해 네 품 속에 폭 안겨들었던 랑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너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랑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던 너와 시선이 딱 마주친다. 너와 눈이 마주치니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야, 넌 나 좋아하잖아- 이토록 뻔뻔한 말을 불쑥 내뱉을 뻔 했다. 화르륵 금방 다시 붉게 물든 얼굴은, 아까처럼 눈물짓다 오른 열기가 아니라 순수하게 설렘과 부끄러움을 담아 타올랐다. 금방 다시 네 품 속에 폭 얼굴을 묻는다. 랑은 예쁜 아이가 맞았고,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있지만 네가 말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너는 나 좋아하니까 그- 객관적인 평가가 안 되잖아."
이번에도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는데, 부끄러워한다기보다는 볼멘 소리였다. 랑은 네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다시 너를 바라본다.
"..."
이내 고민을 끝낸 듯 비장하게 입을 열었는데, 부끄럼쟁이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비장해 보이지도 않았다.
"너만 본다고 약속해."
아쉬워하는 너를 보니 마음이 갈대마냥 흔들리고 만다. 울고나서 찍는 사진은 많이 부끄럽지만, 너도 조금 울었다고 차마 말하지도 못하면서 저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말하는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좋아하는 아이가 갖고 싶다 하는데- 갈대여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뻔뻔한 말이다. 정답이기도 하다. 네가 그를 그렇게 여기듯이 그도 너를 그렇게 여기고 있다. 너도 알다시피, 너보다 먼저. 그렇지만 괜찮다. 십대의 사랑인데 조금 뻔뻔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그는 너를 눈뿐만 아니라 마음으로까지 담아놓고서 너를 예쁘다고 하고 있으니 너 못잖게 뻔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뻔뻔한 소년의 눈에도 네 얼굴에 올라오는 발간 기색이 예뻤다. 문득 현민은 너한테 퉁명스레 너 지금 나한테 작업 거냐고 투덜거렸을 때를 떠올렸다. 객관적인 평가가 안 되잖아- 하고 네가 볼멘소리를 하자, 현민은 너를 바라보며 질문해왔다.
"너 그거 기억해? 내가 너한테 지금 나한테 작업거냐고 하니까, 걸렸다면 죄송하다고 네가 대답했던 거."
벌써 그것도 몇 달 전의 일이다. 그러나 현민에게는, 네가 가슴에 쾅 떨어지던 순간과, 너와 함께 보내왔던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엊그제 같은 일이다.
"그래, 제대로 걸렸어. 그러니까 책임져."
하며 그는 네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네가 대답으로 들려준 너만 본다고 약속하라는 말에, 현민은 대답 대신에 네 앞머리를 살며시 헤치더니 네 이마 위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고서는 다시 손으로 네 앞머리를 원래대로 가다듬어주었다. 부끄럼쟁이같은 얼굴이 귀여워서, 현민은 손을 뻗어 네 뺨을 한번 매만져보고는 놓아주었다.
"당연하잖아."
그러면서 현민은 핸드폰 카메라를 다시 켜면서 네 옆으로 착 다가붙어왔다. 둘이서 한 사진에 같이 나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직 초봄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옥상, 하늘은 파아랗고 랑은 마냥 꽃분홍색이다. 꽃샘추위에 봄꽃은 정작 피지도 못했는데 랑만 피었다. 아니, 너도 같이 피었다. 너에게 폭 안겨서 맞닿은 감각이나 코끝에 걸리는 향기가 익숙하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듯하면서도 온몸을 울리게 하는 너와 내 심박,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언젠가부터 계속 함께하고 있는 네 모습이 담긴다.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나뭇잎 스삭이며 지나는 바람 소리가 랑에게 닿지 않았지만, 머리카락과 목덜미, 뺨 위로 간지러운 시원함이 살랑거린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어떻게 잊어."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도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빨리 어른돼야 겠네."
무슨 의미일런지는 해석하는 너의 몫으로 넘긴다. 네가 작업거느냐고 물었던 귀에 네가 뚫은 모양처럼 타투를 하겠다는 말을 지키겠다는 건지, 어른이 되어서도 너를 책임지겠다는- 그러니까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한 뜻으로 이것이 답이다 고르기에는 해석의 여지가 넓었다. 하지만 랑은 네가 어떻게 받아들여도 상관없었다. 네 입맞춤을 받으며 말갛게 웃고, 뺨을 만지는 손길에 눈을 휘어보인다.
"깐쵸한테도 비밀이야-"
정말로, 너만- 깐쵸한테 보여준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랑은 개구지게 농담을 하고, 착 다가와 붙은 너를 본다. 랑도 네 옆으로 조금 더 다가붙고, 네게 팔짱을 낀다. 찰칼, 사진을 찍으면 방긋 웃을 준비를 끝냈다.
어두운 하늘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발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모래요, 눈에 걸리는 것은 황량한 눈안개뿐이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너와 함께 걷는 이 길의 하늘에 아름다운 별자리들이 가득 떠 있고, 색색깔의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다. 별가루가 날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겨우 봄이다. 너와 보내는 여름과 가을은 어떨까. 다시 겨울이 찾아오더라도 너와 함께 맞이하는 겨울은 마냥 삭막하지 않고 포근하고 따스할 것 같다. 계속 같이 있는 것. 이 나날들을 언제까지고 너와 나누고 싶었다.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더 많이 쌓아나가고 싶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표현이 거칠어도 참 그 말대로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아도 좋겠다. 그는 이미 너와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네 말대로, 어떻게 받아들여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응. 너랑 나만 아는 거야."
하며 현민은 너와 함께 다가붙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킨 다음에 셀프 카메라 모드를 하고는, 너와 그가 함께 화이트데이 선물까지 앵글이 잡히도록 각도를 잡는다.
"셋 세고 찍을게. 셋, 둘, 하나─"
현민의 얼굴에, 그제서야 이른 봄꽃이 쑥쓰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수줍어도 활짝, 곱게도 피어난다. 찰칵, 하고 사진 찍히는 소리가 난다.
"잘 찍혔어?"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이 지은 웃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는 듯, 현민은 웃음을 거두며 네게 핸드폰을 내민다. 얼굴에 웃음이 거두어졌다 하더라도, 네가 처음 그의 모습을 기억하던 그 무표정과 똑같은 표정이더라도 처음의 그 무심하고 까칠한 모습에 비하면 그는 많이 생기있어지고 활기차졌다. 무표정인데 무표정이 아니었다. 너를 바라보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 주변으로 꽃이 한두 송이씩 퐁퐁 피어나는 것 같다.
네가 예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사랑스럽다고 쳐다봐주던 그 눈길을, 랑도 이제는 고스란히 네가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바라본다. 그야 네가 랑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손길, 들려주는 말 하나부터 열까지가 이렇게 예쁜데, 견디는게 더 대단하다고 랑은 느꼈다. 이어서는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는 말이 떠오른다. 랑은 그 말을 곱씹어보았고, 네가 다가올 때마다 밀어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밀어내지 않을텐데, 네가 괜찮다고 한다면 다가갈텐데, 그럼 지금 다가가도 괜찮지 않을까- 까지 생각이 뻗는다. 네가 하려고 했던 거면 해도 괜찮을 거라고 조금 다가가본다.
말랑.
랑이 네 뺨을 뿌닛 밀어냈던 그 감각이랑 조금 비슷한데, 그것보다는 많이 말랑했다. 확 닿아오는 온기나, 손보다는 조금 더 느껴지는 무게감, 그리고 네가 만져본 기억이 있는 촉감- 랑은 너와 뺨을 맞닿게 하고서 사진을 찍었다. 셋, 둘, 하나-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몸을 조금 일으켜서 뺨끼리 쿡, 그리고 방긋 웃으면서 브이도 그렸다.
"응, 누구 남친인데."
잘 찍혔냐는 말에 사진을 보지도 않고 답을 했다. 답을 먼저 하고 사진을 보는데, 랑이 네게 했던 말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널 좋아하니까 아마 어떤 사진을 보아도 귀엽다고, 예쁘다고- 잘 찍었다고 답하고 말 것이다. 사진을 본 후에도 답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랑은 행복에 퐁당 빠져서 즐거운 웃음을 띄더니, 그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네게 다시 휴대폰 화면을 보여준다. 네 얼굴만 확대해 화면에 가득 담아놓았다.
요즘 오전에 오는 이유가 일찍 일해도 밤에 바쁘니 시간을 좀 늦췄어.... 그리고 이번주는 말했었지만 금토일 여행이야 @@.... 일은 괜찮아 아직 비밀인 소식이지만 ㅎ.ㅎ 사정이 있어서, 올해까지만 다니고 퇴사하기로 했거든 우다다 이야기만 했네 음 그래도 매일 올 수는 있으니까 ㅎ.ㅎ! 어제 가족이 특별한 날을 맞았구나 잘 보냈으면 좋겠다
네 말에는 주어가 없었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현민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어가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한두 마디 단어를 갖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너와 함께해온 시간들, 네게 내미는 손길, 붉어지는 얼굴... 그 모든 것들을 품은 너를 향한 마음. 그런데, 그걸 어디서 배워왔는지는 한 글자로 네게 대답해줄 수 있었다.
"너."
이 마음은 전부 너로부터 시작했다. 아무리 네 마음 어디를 훑어보아도 그렇게 예쁜 것을 피워낼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너라는 대답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너로부터 시작해서, 너를 통해서, 너를 피웠다. 그의 마음은 그랬다. 꾸욱 하고 와닿는 그의 뺨이 따뜻하다. 찰칵. 잘 찍혔어? 하는 질문을 할 때, 그는 네 뺨이 닿았던 자리를 어루만졌다. 따뜻하고 말랑해서 기분이 좋았다.
네가 내미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 현민의 얼굴이 빨개졌다. 원래 자기 사진을 찍어놓고 보면 거울을 볼 때와는 다른 어색함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주 엉망진창으로 나온 것 같지는 않아서 조금은 마음이 편하다. 대신 현민은 네가 확대해놓은 스크린에 손가락을 올리곤 옆으로 쓱 밀었다. 네 얼굴이 나온다. 엄청 잘 나왔지- 하는 질문에는, 그제서야 대답한다. 사진에 담긴 것보다는 한결 옅은, 그러나 사진에 담긴 것과 똑같은 웃음을 머금고.
"응, 잘 나왔네."
하고 너를 바라보며 덧붙인다.
"예쁘다."
그리고서 현민은 네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들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사진은 너한테 보내줄게... 그러면 이제 간식 먹자."
그러고 보니 애초에 여기엔 간식 먹으러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럼 이제 먹자... 오늘은 너를 위해 준비된 화이트 데이니까. 이것은 너를 위한 행복이니까. 그의 몫은 걱정하지 말자. 너를 위한 행복이라는 말이 너만을 위한 행복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니까.
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네 시선 끝은 나를 향해 있어서, 언제든 널 바라보면 눈이 마주칠 수 있다. 넘어질 걱정을 하지 않고 네게로 뛰어갈 수 있다. 날 뒤쫓아 헤매이던 너와 나란히 섰다. 네가 해줘서 좋았던 것을 고스란히 너에게로 해보았더니, 너는 그 모든 것들을 랑에게서 배웠다고 답한다. 나는 너에게서 보고 배운 것들 밖에 없는데- 그래서야는 네가 원래 예쁘다는 것 밖에 되질 않는다. 랑은 알았다. 지금 나는 너한테 배웠다고 답한다면, 도돌이표가 찍힌 문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다른 답을 하였다.
"우리 닮았을까?"
결이 비슷하느냐는 물음을 답으로 하였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답한다면 서로 닮았기 때문일거야-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너와 날 보고 닮았다고 느껴준다면- 그렇다면 좋겠다. 랑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네가 사랑스러운 만큼만 너에게 사랑스럽고 싶기 때문이었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아서 네가 조바심낼 일 도 없고, 부담스럽지도 않을 만큼이면 좋겠다.
"너 말한건데 나 보면서 그러면 내가 잘 나온 거 같잖아."
쿡쿡 웃는 소리가 나며 랑도 너처럼 빨개진다. 너와 뺨을 꼭 맞대며 조금 밀린 볼살이나, 누가봐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얼굴이 웃음이 났다. 너랑 있을 때 이렇게 웃고 있는구나, 랑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늘 뜬구름 붙잡듯 웃어보이더니 이렇게 햇살처럼 웃을 줄 알았구나- 하고서 놀라고도 남을 것이다. 이미 랑에 옆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눈치를 챘을 지도 모른다.
"응, 네가."
네가 예쁘다- 하고 랑은 개구지게 웃는다.
"으응. 아- 하면 돼?"
프로필 사진으로 띄워버리면 어떨려나, 생각하던 랑은 간식 이야기에 고개를 꾸닥거린다. 네가 그러면 된다고 답하거든 랑은 얌전히 아- 하고서 기다릴 수 있다.
하고 그는 웃었다. 더 따지지는 않는다. 먼저 사랑에 빠진 쪽은 역시나 그였지만, 지금은 누가 누구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는지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도돌이표가 찍힌 관계가 되었다. 그 도돌이표마저 소중하고 어여뻤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닮았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그는 너를 사랑했다. 어떤 적당한 수치가 있어서 그것을 넘거나 그것보다 낮거나 하지 않고 그 적당한 수치에 꼭 맞는 만큼 너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Yes 아니면 No였는데, 세상 모든 사람에게 No였으되 너한테는 Yes일 뿐이었다. 그러니 네가 이 소년을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누구의 사랑이 더하고 못하고 저울 눈금을 보며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현민이 이 세상에서 연심을 품게 한 사람, 연심을 품고 싶은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잘 나왔는데."
애인을 보는 눈이야 당연히 사랑이 끼어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아니더라도 이 사진을 보고 누가 네 눈시위에 묻은 따뜻한 색깔을 울어서 물든 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보더라도 만면에 피어난 행복한 웃음꽃에 따라 핀 연연한 꽃분홍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와 약속을 했으니 애초에 '누가 보더라도' 같은 명제는 의미가 없지만. 물론 너만 아니라 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년의 필요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필요한 일이라면 최대한의 효율로 확실히- 같은 시니컬한 삶의 슬로건을 걸어놓고 무표정하게 살아가던 현민의 얼굴에 이런 행복한 웃음이 걸릴 날이 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가, 하고 목적어를 쏙 되돌려버린 너를 현민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하고 웃었다.
"그래. 너한테 예쁘면 됐어."
하며 그는 쿠키 하나를 집어들었다. "자, 아-" 그의 손끝에서 받아먹은, 당신이 고등학교에서 맞이한 두 번째 화이트데이는 달짝지근했다.
밤은 안 샜어, 5시에 잤어... 쪽잠 ㅎ.ㅠ 답레 확인했지만 여행 중에 써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답레로도 충분한걸.... 현민이한테 하는 말 현민주 몫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오늘도 고맙고 좋아해 ㅎ.ㅎ 랑이가 갖고 있는 일종 보답해야한단 심리를 현민이가 파훼하는거 너무 좋아 오늘 무탈한 하루 보내
하고 너를 따라서 랑은 웃었다. 네 자기소개여도 내 자기소개여도 상관없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못났다 하더라도 네가 예쁘다 해주면 다른 사람이 무어라하든 신경쓰일 새도 없을 것만 같다. 랑은 자신의 턱없이 작은 세상에 놀러와 손을 잡아준 신기루가 신기루가 아님에 감사한다. 신기루라고 해도 행복할 일이었을테니까, 너의 실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응, 그러게. 바보 같았다."
있는 마음껏 너를 사랑하면 될 뿐인데, 랑은 너를 욕심내면서 그러면 안 된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너에게 보답해야만 한다고, 네가 사랑스러워했던 아이가 아니게 되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랑도 모르게 뿌리깊이 새겨져있었다. 네 옆에 있으면 분명 나아질 것이다. 지금처럼 하나씩 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랑해도 된다고 허락하고 싶잖아-"
랑은 네가 콩깍지가 제대로 씌인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말해주는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너에게 콩깍지 씌였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알고 있을 사람은 다 알고 있을 사이, 조금 부끄럽지만- 울고나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도 민망하지만 누군가에게 너의 여자친구라고 소개된다는 건 정말로 기쁠 거라서. 네가 좋아하는 아이가 바로 나라고, 그럼 랑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는 너라고 화답할 수 있다는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다. 당사자인 너를 두고서 그런 상상을 해버린게 낯부끄러워 뺨이 식을 새가 없다.
"예쁘기만 할까봐."
툭 돌려준 답 이후에 랑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네가 들어올린 쿠키를 입으로 받아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랑은 쿠키를 살짝 물고만 있을 뿐 먹지를 않는다. 얌전히 쿠키를 입술로 앙 다물어 물고 있는 채, 너를 물끄러미 바라봐본다. 고개를 일부러 너를 향해 들었다는 건, 너도 이 쿠키를 반입 깨물어 먹으라는 뜻이었는데- 네가 알아봐줄 지를 몰라 조금 우물쭈물거리는 기색도 보이는 동그란 눈이 깜빡거린다.
작은 세상이어도 상관없었다. 그 곳엔 발 디딜 땅이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있었다. 너와 현민 사이에 피운 꽃과 잔디가 잔뜩 자라나 있었고, 그리고 네가 있었다. 작은 세상이라 하면, 자신 말고 다른 사람 자리는 없을 테니 자리 빼앗길 걱정은 없겠다. 못된 심보다.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만을 이렇게 걱정없이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 한켠에 이리도 뿌듯했다.
"같이 찍은 첫 사진이잖아..."
그래서 현민은 너랑 나만 보겠다고 부러 뾰루퉁하게 말했다. 그는 네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이제 간식 먹어야지. 현민은 비스켓을 네 입에 물려주면서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자랑할 사진은 나중에 따로 찍자."
그런데 네가 쿠키를 입술로 반쯤만 꼭 문 채로 씹어삼키지는 않고 조금 부끄러워하며 파르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현민은 핸드폰을 집어넣다가 네가 하는 양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네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2~3초 정도의 정적이 필요했다. 그 잠깐의 정적 동안 한움큼의 봄바람이 너와 소년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봄바람이 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며 무표정을 벗겨낸 걸까 미소를 한가득 칠해준 걸까 그의 얼굴에 한바탕 벚꽃이 웃음처럼 피고 만다.
"너랑 같이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네, 정말."
그리고 현민은, 네가 입술로 내밀어오는 쿠키 반쪽을 덥석 받아물었다. 그의 입술에 꾸욱 하고 네 입술도 살짝 물어버리는 통에 네 입술 표면에 조금 거칠고 질기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여과없이 와서 닿는다. 간식을 나눠먹는 건지 뽀뽀를 하는 건지 모르게 됐다. 쿠키 반쪽을 베어물고는, 그는 웃었다.
"바보라도 좋아."
나도 너와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은걸. 그렇지만 그래도 좋아. 네가 바보건, 내가 바보건, 우리 둘 다 바보건... 내가 좋아하는 건 너고, 네가 좋아하는 건 나니까.
벌써 빈사면 안돼요 여름에 여행도 가고 수영장도 놀러가고 해수욕장도 가고 (코로나때문에 못한거 여기서 다하려듬) 원정경기 응원도 가고 장맛비 속에서 비 맞은 채로 처마 아래서 멀거니 하늘바라기하고 있는 현민이 손도 잡아주고 어 이거 빗속감성모먼트인데 왜 갑자기 랑이 도도도 뛰어오는거 생각하니까 햇살힐링이죠?
2초에서 3초, 짧디 짧은 눈 깜빡 남짓하는 시간 동안 랑은 그 정적이 길게도 느껴졌다. 네가 눈치를 챘구나-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화사히 웃음꽃을 피웠을 때서야 시간이 제대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랑은 네가 말하는, 너랑 같이 있면 바보가 되는 것 같다는 그 말에 나도 그렇다고 답하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띄웠다. 입에 쿠키를 물고 있느라 예쁘게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네가 쿠키를 받아물었을 때도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네가 쿠키만 물지 않았다는 걸 느끼면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가 끝만 마주 물고서 뚝 쿠키를 부러뜨려 갈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랑은 여전히 식을 새 없다.
"나도 바보잖아."
네가 물어가고 남은 만큼의 쿠키를 오물거리는데 이 단 맛이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먹깨비의 자아는 부끄럼을 느끼지 못하는지, 랑은 발갛게 달은 뺨을 하고서도 푸딩이 담긴 유리병을 쥐었다. 마개가 퐁 소리를 내면서 빠진다. 그 옆에 놓여있던 앙증맞은 스푼을 쥐고 한 숟가락 떠올려본다.
"내가 먼저 안 먹으면 안 먹을거지."
떠올린 푸딩을 한 입 와앙 입에 물고, 눈을 반짝거린다. 서로 좋아하고 있는 애틋한 아이가 기념일이라며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만들어준 디저트는 맛의 유무와 관계없이 너무 달았다. 랑은 입에 물었던 숟가락을 빼어 다시 새로 한 숟가락을 뜨더니 네게 건넨다. 오물거리고 있는 볼을 보아하니 아직 입에 있는 것이 있어서 말을 못하는 것이고, 하늘빛을 따온 눈이 말하는 걸 보자니 엄청 맛있으니까 어서 너도 한 입 먹어야한다고 하고 있었다.
그저 너와 그렇게 약속했을 뿐이다. 네가 품 속에서 흘린 눈물의 흔적이 아직 네 뺨에 붉게 피어있었고, 그 상태로 찍은 사진인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깐쵸한테도 안 보여주고 너와 그 단 둘이서만 보기로 약속했으니. 그래, 바보다- 오래전부터 바보같았다. 그날 네가 품속에 쾅 떨어지기 전에도 자신은 바보같은 삶을 살았으며, 너를 마음에 담은 이후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바보같은 삶을 살았다. 그것이 현민의 행복이었다. 너와 함께하는.
"나, 이래봬도 지금 이대로 운동장에다 대고 나 배하랑이랑 사귄다고... 24일, 28일..."
쿠키 조각을 우물거리며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현민은 고개를 들고 네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뚱하니 삐진 눈빛이다. 그런데 전혀 너한테 섭섭하거나 속상해보이지는 않는다. 양뺨에 빨갛게 핀 꽃 때문이겠지. 너와 함께 있을 때면, 가무잡잡하기보단 칙칙한 그의 피부에 항상 화사한 혈색이 돌았다.
"배하랑이랑 사귀기 시작한 지 2주하고도 4일째라고 있는 대로 소리지르고 싶은 거 참고 있거든."
현민이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가며 만들어 온 그 간식들은, 모양새는 그렇게 완벽하지 않았지만-개중에는 비뚤게 튄 것도 있었고, 굽다가 뭘 했나 한쪽 벽면에 쏠렸는지 유리창에 뺨 찌부낸 것마냥 한켠이 납작한 것도 있었고, 마카롱들은 가뭄에 논바닥 갈라진 것처럼 표면이 갈라져 있었다- 분명히 달콤하고 맛있었다. 그 소년에 대한 네 마음이 감미료가 된 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달고 맛있었을 테지만, 입안에 몽글몽글하게 퍼지는 부드러운 우유향과 바닐라향에는 그 소년의 마음이 담겨 네게 더욱 맛있었다. 푸딩 병을 퐁 하고 따면서 네가 건네는 말에 현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야 너랑 같이 먹으려고─"
그러다 네가 쑥 내민 숟가락을 보고 현민의 말문이 끊겼다. 눈을 깜빡이다가, 받아먹는다.
'...간접키스잖아, 이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이미 뽀뽀까지 다 한 사인데 이제 와서 쑥쓰러워하면서 머뭇거리기엔 네가 한 숟가락 퍼서 건네어주는 네 마음이 네가 그에게서 느낀 것만큼 달았다.
싫어할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조차 너에게 실례겠지- 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달갑지 않은 생각이 들 때마다 너는 그렇지 않다고 쳐낸다. 남들이 랑의 귀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랑이 더 많이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고, 괜찮게 행동하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반대로 제일 파먹고 있고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랑이었다. 아이러니하다. 너를 떠올리면서 너는 그렇지 않다고 되뇌인다.
"...2년 더 참을 수 있지?"
자랑이라고 해도 친구, 가족- 그 정도만 생각했지 운동장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이제 2학년 1학기 시작한지 2주 남짓인데, 졸업할 때까지 뻔뻔하게 다닐 자신 없다면 네가 계속 참아줘야 한다. 랑은 진담일지 농담일지 모르는 네 말에 설마 진짜겠어- 하는 반신반의하듯 답하고 나서 까르륵 웃는다. 뚱한 네 시선을 보고는 손을 올려 너의 뺨을 부드럽게 두어번 도닥이듯 쓰다듬는다. 쿠키를 먹고 있는데 입 맞출 수야는 없으니 나름의 대책 방안이었다.
"그치. 맛있지!"
앙증맞은 숟가락으로 최대한 크게 푸딩을 떠낸다. 숟가락을 입에 합 물면 맛있어하는 콧소리까지 난다. 카툰의 한 컷처럼 이 장면을 옮겨담는다면, 분명 랑의 옆에는 방긋 웃으면서 피어난 꽃 몇 송이와 즐거워하느라 울리는 음표 몇 개가 동실거리고 있을 법 했다. 아까워서 못 먹겠다고 하던 것 치고는 푸딩이 점점 줄어들어간다. 랑은 네가 한 입 먹으면 같이 한 입 떠 먹었고, 또 네게 한 입 떠주고를 계속 반복했을 것이었다. 네가 거절하면 유리병에 담긴 높이가 낮아진다.
"이제 다른 푸딩은 못 먹을지도 몰라. 다른 쿠키랑 다른 마카롱도."
편식이라고는 하질 않는데 네가 해준 이 디저트들이 너무 좋아서, 너무 맛있어서 다른 건 먹지도 못하게 될 것 같다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목소리 냈지만 표정은 어쩐지 행복해보이기만 한다. 입 안에서 계속 단 맛이 맴돈다.
네 말에 현민은 빙그레 웃었다. 딱히 소리지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학기초부터 벚꽃잎 화사하게 흩날리는 꽁냥꽁냥 라이프를 보낸 덕에, 굳이 현민이 옥상에서 운동장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지 않아도 반 아이들이나 축구부 부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현민과 랑의 관계에 대해서 수군거릴 필요성마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 쟤네 부부구나- 하는 느낌의 인식이 퍼져있기는 했다. 빙그레 웃는 웃음- 두 번 다시는 이렇게 웃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때 웃음을 잃었던 소년의 웃음짓는 뺨이 네 손에 부드럽게 잡혔다. 도닥도닥, 하고 매만져보면 따뜻하다. 햇살을 오래 받은 너럭바위 같다.
너를 힘들게 하는 요소를 이기적으로 그것까지도 사랑한다고 멋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보라는 어리석은 말을 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너를 사랑하는 데에 어떤 장애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되었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네가 귀가 조금 아픈 것은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 하고 말로 하기엔 불충분해서, 그래서 현민은 그것을 가능한 한 오래오래 너와 함께 있으면서 전해주고 싶었다.
"아, 그러면 곤란한데. 매일마다 이런 걸 만들어오려면 나 전공 바꿔야 된다고."
하고 그는 키득키득 웃는다. 이걸 만들면서 제과전공으로 바꾸겠다고 투덜댔다가 엄마한테 맞은 등짝이 새삼 아픈 것 같아 웃겼다. 랑이 퍼주는 대로 현민은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이미 이런 걸 이제 와서 꺼려하기엔 너와 보내는 시간이, 이런 것들도 빠짐없이 모두 행복했다. 숟가락질 한 번에 꽃 한 송이가 더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자기 몫으로 챙겨온 숟가락은 못 쓰게 됐는데 유리병에 담긴 푸딩은 두 배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러다 오늘 간식은 내 손으로 집어서 입에 넣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현민은 생각했다.
"어떤 영화 좋아해?"
푸딩을 꿀꺽 넘기고 현민은 질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방과후는 오래간만에 느긋하게 휴식일을 갖기로 했었지. 그와 둘이서.
입김 서리는 겨울, 졸업장과 꽃다발을 안고서 너와 같이 서 있다가- 네가 대뜸 운동장에 2년째라고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까르륵 웃음을 터트린다. 추워서 빨갛게 시렸던 뺨이 분명 부끄러워서 새로 물들테고, 그래도 너와 그러는게 즐거워서 분명 졸업식에서 눈물 한 방울 없이 웃고 있을 것 같다. 졸업식이라는게 랑에게는 드디어 떠날 수 있다는 해방감 정도였는데, 이번 고등학교 졸업식은 다를 것 같았다. 대학교도 같이 가서, 대학교 졸업식도 너와 함께 할 수 있을까-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게 이렇게 쉽고 익숙하다.
"매일 만들어주기까지 하게? 가끔 한 번으로도 좋은데."
유리병과 숟가락이 잘그락 부딪힌다. 푸딩이 다 사라져서 안이 투명하게 비쳐보인다. 랑은 쿠키를 하나 집어서 입에 쏙 넣었고, 이번에는 마카롱을 들어서 네 입가로 가져간다. 네가 한 입에 삼켜버리면 랑은 새로 마카롱을 들 것이고, 네가 반입만 먹는다면 남은 반쪽 마카롱은 랑이 먹어버릴 것이었다.
"영화?"
랑이 좋아하던 영화는 뮤지컬 영화였다. 지금은 자막이 있기 때문에 외국영화를 좋아한다. 사실은 그렇게 영화를 자주 보지도 않았다. 시내를 잘 가지 않으니 영화관에 갈 일도 없고, OTT 플랫폼이 무수히 쏟아져도 영화 한 편 볼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다. 랑은 영화 취향이 이렇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나- 베시시 웃었다.
네가 알던 것들의 의미가 하나씩 하나씩 바뀌어간다. 등교길, 하교길, 공부 시간, 간식 시간, 데오도란트... 졸업식의 의미도 바뀌었다. 이 학교에서 떠나간다는 해방의 의미에서, 이 소년과 함께 맞이하는 또다른 기념일이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무심하고 무뚝뚝하던 그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심하지 않았다. 그는 너를 보면서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네가 그의 삶을 어떻게 꾸며주었을까.
"다른 건 못 먹겠다며. 우리 간식타임 어떡하냐."
이것은 처음에 많이 먹고 많이 크고 힘내야지! 하던 말에 너무 많이 먹어도 곤란하다고 대답했던 운동부 녀석이 하는 말이 맞다. 덕분에,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끼니 때 먹는 양이 눈에 띄게 줄었던 참이다. 현민은 네가 내미는 마카롱을 보다가, 반만 덥석 깨물어먹는다. 한 입에 다 삼킬 수 있을 만한 크기인데도 굳이 반만 먹는다,
"응, 영화. 외국 영화로..."
하던 현민은, 네가 좋아하는 걸 보겠다는 말에 눈을 깜빡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뭐라도 보자. 뭐라도 볼만한 게 있겠지.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좋고. 잠 잘 오게 잔잔한 걸로..."
하며, 그는 너를 따라 함초롬히 웃는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꽤 생동감있는 표정이 걸리게 되었다.
이미 네가 귀여운데 귀엽게 봐주고 말고 할게 없지- 랑은 네가 반입 먹고 남은 반쪽짜리 마카롱을 입에 쏙 넣었다. 톡 꺼낸 말은 시간을 흘러보내기 위해 하는 사소한 잡담처럼 쉽게도 나왔다. 그만큼 당연한 이야기라서, 굳이 숨을 쉬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이미 너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만 남은 마카롱을 오물거리느라 볼이 움직인다.
"...반강제 다이어트?"
그러면서 마카롱을 반 입 깨물어 볼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다이어트라고 말한 것 치고는 네가 만들어준 간식들을 너무 맛있게 먹고 있는데다가, 이번에는 랑이 먼저 깨문 반쪽짜리 마카롱을 네게로 내민다. 랑이 말해놓고도 다이어트랑은 영 거리가 먼 것만 같아 개구지게 쿡쿡 웃어버린다. 다이어트라고 한들 너는 이미 운동도 하고 있고 식단도 제대로 챙기고 있으니, 하게 될 사람은 랑밖에 없는데- 매일 공부하면서 다람쥐가 볼주머니에 도토리 채우듯 간식을 까먹는 랑이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응, 너 푹 자려면- 역사 다큐 볼까? 시험범위 안에 있는거로."
이러다간 쉬려고 보던 거였는데, 무슨 장면이 나올 때마다 랑이 한마디 두마디 툭툭 거들지도 모르겠다. 저거 어제 말해줬었던 부분이랑 관련있는 거야- 하고서 영화 시간이 또 다른 공부가 될 수도 있겠다. 물론 장난이어서, 랑은 금방 다시 말을 덧붙인다.
"잔잔해도, 로맨스는 집중 안 될 거 같아-"
옆에 네가 있을테니까, 이미 네가 랑이 살아가는 인생을 영화라고 할 때 로맨스 장르를 추가해줬기 때문이다.
랑이 : 나도 처음인걸. 랑이 : 그리고 마지막일거야. (방긋) 랑이 : (쓰담쓰담) 랑이 : 난 네가 좋아해주는 거 좋아- 랑이 : 빨개지는 것도 좋아하고, 랑이 : 부끄러워도 뽀뽀 많이 해주는 것도 좋아. 랑이 : 안아주는 것도 좋아하고, 네가 해주는 말도 다 좋아. 랑이 : (현민이 품에 쏙)
네 체중이 불어난다고 너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거나 하진 않겠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사람의 건강에 대한 걱정도 따라오는 법이다. 네가 쿡쿡 웃어버리자, 현민도 웃는다.
"걱정 마. 혹시 필요하게 되면 내가 책임지고 다이어트 도와줄게. 너는 내 공부 도와주고, 나는 네 건강 챙겨주고."
다만 그 웃음이 조금 꿍꿍이 있는 의뭉스러운 웃음인 건 짚고 넘어갈 여지가 있다. 이건 꼭 네가 현민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문제를 어떻게 짜줘야 할까 고민할 때 짓는 그런 미소가 아닌가. 그러면서, 계약 내용이 슬그머니 바뀐다. 너를 한번 선생님에게서 감춰주는 대가로 너와 공부를 하게 됐는데, 한 번 도와준 것치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헸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너무 가까이 닿아버린 것은,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도 너를 사랑해주고 있으니 별개 이야기로 두고 말이다.
"아니, 네가 계속 뭐라고 말하면 못 잘 것 같은데. 네 목소리 듣느라."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초콜릿 쿠키 하나를 자기 입에 집어넣고는 네 입가에도 내밀어주었다.
"나도 로맨스 영화는 별로야."
봐도 별 감흥을 못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부터 로맨스라는 장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네가 그의 가슴팍에 떨어지기 전에는 저건 나와 먼, 아무 상관없는, 아무 부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너와 가까워지고 나서는 네가 안겨주는 뿌듯한 감정 이상의 감흥을 자신에게 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의 커플들의 상황을 보고 지금의 서로에게 대입해보는 재미 정도는 있을까.
"만화영화라도 볼까. 디즈니나 지브리 같은 거."
간식이라고 또 엄청 많이 준비해온 것은 아니고 딱 평범하게 2인분으로 준비해 온지라, 간식 도시락은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랑은 자신의 키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높은 곳에 손이 안 닿거나, 같은 옷을 사도 길이가 남들보다 남는다거나 하는 일든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다리를 타든 발받침대나 의자를 타고 올라가면 손이 닿고, 남아도는 길이는 접어버리거나 수선을 하면 된다. 랑이 이제서야 키에 대해 조금 불만을 품게 된 건 오롯이 너의 몫이었다. 생길지도 몰랐던 애인과 머리 크기 하나 넘도록 키 차이가 날 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뽀뽀하고 싶을 때 못 한다는게 불만이고, 쓰다듬지 못하는 것도 싫었다. 네가 곧잘 눈높이를 맞춰주고는 했지만 그래서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네가 전혀 모르고 있을 때 쪽 입 맞추고 싶은데- 랑은 물끄러미 너를 바라본다. 앉아있을 때도 올려다보는 키차이, 네게 폭 안길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멋대로 뽀뽀하고 싶단 욕심을 덜어낼 수가 없다.
"그건 안 되는데. 그럼 역사 다큐랑 로맨스는 패스-"
초콜릿 쿠키를 쏙 받아먹더니 네 손가락 끝에 장난치듯 쪽 입맞추었다. 입술로 네 손가락 끝부분을 물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랑은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아무짓도 안했단듯 쿠키를 오물거린다. 꼭 뽀뽀를 뺨이랑 입에만 해야한다는 규칙은 없으니까- 눈이라도 마주치면 한껏 장난기 어린 눈웃음을 보여줄 것이다.
난데없이 키를 요구하는 말에 현민은 시선을 옆으로 쏙 피했다. 그야, 키야 정신차려 보니 이렇게 크고 있었고, 형은 나보다 키가 크고, 아버지는 형보다 키가 큰 상당한 거인이라. ...그래서 현민은 눈을 피한 채로 눈꺼풀을 꿈뻑이다가 말했다.
"키는 자연히 크는 거라, 아마 더 자라겠지만.. 우리 엄마랑 아빠도 너랑 나보다 키 차이가 큰데 잘 지내시고,"
하다가, 품 안에 쏙 안겨있는 너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려 바라보고는 조금 생각하다가, 아까보다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 정도 키면 나쁘지 않은데..."
꼭 안으면 가슴팍에 파묻혀 어깨에 기대어오는 그 순간이 퍽 좋았고, 네가 부르면 고개나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퍽 좋아했다. 네가 170센티미터가 넘게 자라도 너는 물론 자신에게 예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며, 10센티미터가 안 되는 키 차이에서 나오는 순간들도 새로이 사랑하게 되겠지만, 지금의 너도 그만큼이나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했다. 쪽, 하고 과자를 받아먹는 동작이라기보단 지극히 애정표현에 가까운 동작을 보고 현민은 너와 눈을 가만히 마주치고 있다가, 네가 장난스레 눈웃음을 짓자 작은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자기 입가에 가져가면서 네가 물었던 그 손가락 끝을 한 번 수줍게 물었다. ...자기가 해놓고도 부끄러웠는지 귓가가 달아오른다.
그마저도 너는 교복을 입는 날이 드물어서 명찰보다야 바람막이에 입맞추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삐죽거리며 입술을 내밀었다가 네 품 속에 안겨있는 그대로 머리를 톡 기댔다. 뺨과 머리카락을 맘껏 부빗거렸고 흐트러진다.
"싫어하지는 않아."
눈물자국을 남겼던 곳에서 입맞추는 소리가 난다. 소리만 낸 것 뿐이라 감촉은 없었다. 아까 고백한 것처럼 랑은 네게 사랑받는게 제일 큰 욕심이었다. 네게 마음껏 스킨쉽으로 애정표현하고 싶다는 건 그 다음가는 욕심이겠고, 그렇다면 랑은 제일 커다란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다른 욕심은 참을 수 있었다. 말했듯 싫은 것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폭 파묻혀있는 것도 좋아하고, 내가 바랄 때마다 눈높이를 맞춰주는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너는 모르겠지만 랑은 매순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네가 말을 돌리게 가만두지 않았다. 랑이 입맞췄던 네 손가락 끝에 네 입술이 닿았는데, 실수나 우연이라기에는 네 귓가가 고의라고 자백하고 있다. 주제를 바꾸고 다른 말을 하는 너를 가만 바라보던 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
볼멘소리였다. 손가락 말고 나한테 뽀뽀해줘- 하는 뜻을 네가 못 알아들을 리도 없고, 랑도 귓가며 뺨이며 화끈 달아올랐다.
시선을 맞추어주는 것 이야기일 것이다. 시선을 맞춰서, 네게 입맞춰주는 것. 그가 자주 하는 일이었다. 물론 굳이 손짓으로 예고 같은 것 하지 않고 깜짝 뽀뽀 같은 것을 날리거나 쓰다듬어주려면 이렇게 현민과 머리높이가 비슷해질 수 있게 그와 나란히(혹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있을 때라거나, 현민이 앉아있을 때 같은 제약이 따랐으니까. 명찰에 뽀뽀해버릴 수는 없다는 네 말에, 네가 무엇 때문에 키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챈 현민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내 키를 줄일 수도 없고."
키가 줄어든다는 것은 다리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보폭이 좁아져 스프린트 속도가 줄어든다는 말이니까. 축구의 볼 경합 상황에서 다리가 길다는 것은 무시 못할 어드밴티지였다. 그러나 그가 시무룩해하는 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입에 쿠키 하나를 집어넣었다가 자신의 빨간 귀를 보더니 대뜸 네가 보여온 제스쳐 때문에, 귀에 피어났던 혈색이 뺨으로 와르르 쏟아진 까닭이다. 좋아한다. 행복하다. 그렇지만 아직 그게 쑥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병을 앓는 것 같았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앓으려나 보다, 하고, 현민은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가볍게 손짓만 해도 알아듣는데도 네가 키 탓을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현민은 네 손짓에 반응해버리고 만다. 너를 달래어주는 것도 달래어주는 것이지만, 이런 스킨쉽을 그라고 싫어하거나 꺼려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너만큼은 좋아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질긴 입술이 따뜻하게 네 입술 위에 조심스레 와닿았다. 아즉 수줍고 아직 서툴지만, 그래도 그 온기는 진짜였다.
토라졌나 싶은 목소리였지만 너와 같이 키득거리다 옅게 띈 웃음이 삐지지 않았다는 걸 알려준다. 눈높이가 맞는다면 랑도 네게 마음껏 닿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하는 스킨쉽도 너와 닮아가고 있어서 대뜸 뽀뽀 세례 당할 날이 잦아질 지도 모르겠다.
"그럼 들키잖아."
그리고 금방, 랑의 말 뜻이 무엇인지 이해한 건지 네가 시무룩해진다. 랑은 지금의 기회를 적극 활용해서 네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앉아있을 때만큼 제약이 없으니 마음껏 쓰다듬을 수 있다. 사락사락,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소리 말고도 랑의 손이 네 머리카락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다가도 쓰다듬는 소리가 섞였다. 장난스럽기도 했고 상냥하기도 한 그 손길은 어떻든간에 네게 애정을 담고 있었다. 시무룩해하지 말라고 열심히 쓰다듬던 손길은 너와 입 맞추기 전 쯤 멈추었다.
"그래도."
네 입술이 와닿았을 때 랑은 입술을 떨어트렸다. 코 앞, 그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마주친 검은 눈망울을 바로 본다.
"나도 너 놀라게 하고 싶으니까."
예상 못한 스킨쉽에 간질거리고 들떠 설레서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할지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그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라버리는 느낌을 랑은 좋아했다. 부끄럽기도 부끄러웠지만 갑자기 너는 사랑받고 있다고, 널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랑은 답을 이어서 한 후에야 네 입술 위에 다시 입 맞춘다. 지긋이 꾸욱 누르듯 하더니 쪽 소리를 내었다.
"그럼 드림웍스 보고, 조금은 눈 붙일 수 있을거야."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 이전에 울리는 예비종이 아직 울리지 않았으니 적어도 5분 이상의 시간은 남아있을 것이다. 랑은 네가 말을 돌렸던 그 주제로 대답한다.
바쁜 거 같단 생각은 했는데 술이었구나 @@ 걱정말고 무사귀가 해 근데 나 내일 약속 있어서 응 현민주가 답레 줘도 자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힘내 @@.... 내가 힘들 때마다 현민주는 늘 언제나 힘이 되주었는데 난 그러질 못하는 거 같네 속상할 일 없으면 좋겠다
입맞춤이 끝나자,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의 고개는 살짝 뒤로 물러섰을지언정 평소의 네가 닿기 힘든 높이로까지 다시 올라가지 않고, 그 높이에서 그대로 너와 눈을 마주친 채로 너와 시선을 마주쳐오고 있었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직구가 날아왔다. 너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조금 젖은 것처럼 되어 있었다. 바둑알같이 새카만 눈동자에는 빛무리도 그렇게 많이 어리지 않았는데, 너와 눈을 마주칠 때면 그의 눈동자는 그렇게 조금 젖어 있었다. 눅눅하게 자신을 축여오는 낯설고 달가운 감정에, 마치 얼음이 녹은 물이라도 흐르는 것처럼 그는 너를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곤 하는 것이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확인받고 싶었다. 네게 세상 제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면 했다.
지금껏 네가 계속 사랑해주고, 그의 사랑을 받아주고, 충분히 애정표현을 해주고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원했다.
그러겠다는 대답은 이전과 똑같은 입맞춤이었다. 빼앗아달라는 말, 주어도 목적어도 아무것도 없지만 랑은 어떻게 해야할지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바라보는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다가 쪽 하는 소리가 남았고, 내리깔아 살며시 뜨였던 눈은 다시 감겼다. 새카맣기에 비추고 있던 하늘, 또는 물빛 눈은 감겼다. 긍정의 답이기도 했고 예고이기도 했으며, 무언가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울 준비, 서투르더라도 조심스럽고 예쁘게 남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다시 입맞추었을 때는 분명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크리스마스에 뺏으려던 첫 뽀뽀를 빼앗겼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 빼앗아버릴 심보를 갖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덜컥 겁도 났다. 그래서 너를 꼭 붙잡고 놓지를 못 했다. 네 옷자락은 구겨졌을테고, 너와 나의 숨이 구분없이 경계없이 섞여 누구의 숨으로 숨을 쉬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종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잘 모르겠지만 왜 달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가끔씩 네게 길게 입맞출때, 꾸욱 도장을 찍듯이 할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이 감각이 흐릿했다. 햇살 소리나 바람 향기도 느껴지질 않고 초점이 너에게 고정된 채 고장난 카메라와 같이 너만 알겠어서 모든게 이상했다.
너와 떨어지고 나서 숨을 고를 때 무슨 말을 꺼내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얼굴도 숨도 달떠서 널 바라보기가 크게 부끄러웠다. 겨우 너를 바라보았지만 역시 목소리를 내는게 어려웠다. 사랑해, 좋아해- 뺨에 작은 입맞춤을 남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여적까지도 랑은 두 손 모두 너를 꼭 붙들고서 놓지 못 하고 있었다.
얼마가 된다고 하더라도 기다릴 수 있었으나, 문득 자신같은 녀석을 처음으로 삼아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당연히 현민에게는 행복이고 축복이었으되, 훗날 네가 이 순간을 돌이켜봤을 때 너는 이것을 행복한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랑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거머쥐며 천천히 한 발짝 다가올 준비를 하는 만큼이나, 현민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네게 지금 이것이 행복이라면, 같이 나누기로 하자고.
그래서 현민은 너를 꼭 끌어안고, 네가 풀어내는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냈다. 서로 아직 어설프고 어린 애정이라, 풋풋한 소꿉놀이 수준의 입맞춤이었지만 그래서 그것은 있는 그대로 서로에게 솔직했다. 양치를 한 흔적이 남은 민트향과 지금껏 나눠먹은 간식들의 냄새,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명하고 뚜렷한 온기가 옷은커녕 피부마저 거치지 않고 네게 여과없이 쏟아졌다. 그에게도 이렇게 여린 부분이 존재했구나 싶을 정도로 말랑하고 따뜻했다.
잔뜩 달떠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뺨에 남기는 작은 입맞춤으로 말을 대신하는 너를, 현민은 한 팔을 뻗어서 꼭 끌어안았다. 그의 팔도 조금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붙들고 있어도 괜찮다는 듯이, 현민은 다른 손으로 자신을 꼭 쥐고 있는 네 손을 부드럽게 마주쥐어 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을 남겼다.
아프지는 않은데 지독한 열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체해버린 걸지도 몰라- 꼭 끌어안주는 팔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하지 못하도록 한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폐주머니가 보다 더 잔잔히 부풀고 가라앉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도 떨고 있는데 나는- 눈을 길게 맞추지 못하고 금방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네가 쪽 입맞춤을 남기며 들려준 목소리에 반응했다. 꼭 쥐고만 있던 손이 움직인다. 꽉 마주안아주는 팔에 평소보다도 더 힘이 실려있다.
"응, 많이 사랑해."
너를 곧게 바라보고, 정확한 발음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네게 좋은 애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무더운 여름에 피어날 해바라기가 웃음꽃으로 일찍 피었다. 랑은 네 품에 머리를 뉘이고서, 한 팔만 너를 계속 안고 있도록 남기고 다른 손은 위로 올렸다. 쓰다듬어주면 네가 곧잘 머리를 기대오는 걸 알아서, 랑은 네가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제일 좋아하는 스킨쉽일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함께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아까 전에 이야기하던 키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도 너처럼 너를 품에 폭 끌어안고 실컷 쓰다듬어줄 수 있다면 좋겠어- 손가락에 감겼다 풀려나는 구불진 머리카락이 간지럽다.
"많이 좋아하고 많이 사랑해."
사랑을 계속 속삭이기에는 점심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너랑 나, 둘만 두고서 시간이 멈춘다면 어떨까- 랑은 점심시간이 끝나는 타종이 울리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민은 꽤 오래 전부터 너를 앓았다. 이제는 네가 이 소년을 앓게 됐다. 현민은 너를 꼭 안았다. 너를 이렇게까지 만들어버린 것도 그인데, 지금 네가 숨을 돌리고 쉴 수 있는 곳도 그의 품밖에 없다. 지금은. 더 긴 말은 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현민은 그저 네가 내밀어오는 손길에 머리를 푹 파묻듯이 기대고는 부벼올 뿐이다. 그가 쓰는 샴푸의 흐릿한 민트향과 숲향기가 네 손끝에 묻어나왔다.
그를 끌어안는 것- 물리적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현민은 운동특기생이고, 상체의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는지라 널찍한 대흉근이나 광배근, 품에 파묻힐 때마다 선명히 느껴지는 복근 외에도 코어근육까지 탄탄히 잡혀 있어서 네가 팔을 벌려도 한 번에 끌어안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아무래도 체구로만 따지면 네가 휠씬 작았다. 그렇지만 네 마음으로는, 너는 그를 충분히 대등하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끌어안아줄 수 있었다. 그는 네게 흠뻑 빠져있지 않은가. 그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 품안에 네 몸뚱이를 안아주는 것도, 네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입맞추어주거나 오늘같은 하루를 기꺼이 연인으로서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것도 모두 그가 당신에게 빠져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네가 날 사랑하는 만큼 널 사랑해."
그 이상으로 적합한 표현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말했다. 말했듯 그의 사랑은 사랑하는가 아닌가였고 그것은 오로지 너 하나만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충분했기에.
말로 다 담을 수 없다. 형용할 수 없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어떤 말을 하려고 해도 널 사랑하는 이 마음을 담아 전하기에는 부족했다. 너도 나도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말만 주고 받다가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방과후까지도 두 마리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 같았다. 랑은 너를 앓고 있다고 숨을 죽였다.
"그때 넘어져서 다행이다."
하필 그때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너와 이렇게 만나지도 못 했을 것 같았다. 졸업할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축구부의 남자아이 정도가 네 모든 인상이 되어버렸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없을 모습이기 때문에, 랑은 지금도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무릎이면서 넘어진 걸 행운으로 여겼다. 아무에게도 남지 않는 구름, 언제나 있고 없어도 큰일 아닌 구름과 같은 삶을 원했는데 이제는 그 정반대를 원한다. 누구에게나 남는 건 바라지 않지만, 너에게는 짙게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너도 네게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래도 상관없다- 가 아니라 그러길 바란다. 그러니 잘 모르고 서툴러도 실컷 사랑한다.
"응, 깨워줄게."
예비종 울릴 때까지만, 말 그대로 조금이겠지만 눈 붙일 시간은 되어줄 것이다. 랑은 쓰다듬던 손을 내려서 토닥토닥 너를 보듬는다. 머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무게감과 온기에 안정감을 느꼈다. 잘못하면 랑도 잠들까봐 정신을 다 잡는다.
"네 덕분이야."
나직한 목소리에 크기를 줄이고 속살거렸다. 예비종이 울리고 네가 그 소리에 깨지 않는다면 랑은 2분 정도 조금 더 지난 후에 너를 깨우려고 한다.
감겨가던 현민의 눈꺼풀이 뜨였다. 봄날의 졸음이 한 두껍 묻은 새까만 눈동자가 너를 뚜하니 바라본다. 생각하기도 싫은 모양이다. 너를 만나지 못한 자신과, 너를 만나지 못한 채로 맞이했을 화이트데이가 아닌 보통의 3월 14일을, 평소와 같은 졸음으로 보내는 공부시간과 지겨운 훈련으로 점철된 평이한 하루를. 그런 가정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금 이외의 다른 것은 필요없다고 그 눈빛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눈빛이 구름을 땅으로 끌어내려 여우로 만들었다. 구름도 여우도 언제나 있고 없어도 큰 일이 아니다. 그래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하나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면, 여우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려 끌어내려와보니 새까만 북슬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지금은 너를 뾰루퉁하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그 녀석은, 너를 바라보다가 네 뺨에 쪽 하고 입맞춤을 남겨버린다. 그리고 너를 좀더 꼭 끌어안고, 벤치에 등을 기댄 채로 품에 편하게 기대누울 수 있도록 해준다. 너도 같이 자자는 투다. 점심시간 예비종 정도면 충분한 알람이 되어주리라 생각했다.
"...행복해."
그뿐이었다. 그가 잠들기 전에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마침내 도달한 봄날. 너와 함께 맞이한 화이트데이는 그랬다. 그는 푹 잠들기로 했다. 그렇게 오래 잠들지는 못하겠지만, 너와 함께라면 이런 짧은 잠도 얼마든지 달게 잘 수 있었다.
없을 일이 된 가정이다. 네가 뾰루퉁 바라보니 세상에서 제일 무해하게 보이려는 것처럼 순하게 웃었다. 졸려보이는 눈으로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처럼 하더니, 내가 한 말이 얼마나 바보같은지 눈 뜨게 해버렸네- 랑은 웃음으로 답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테니까, 다시 눈 감고 잠을 청해도 괜찮다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면 네가 랑을 좀 더 꼭 끌어안고 벤치로 몸을 기댄다. 네 품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랑은 굿나잇 키스를 뺨에 쪽 하고 받아버린 채, 네가 벤치에 기댄 만큼 네 품으로 스러졌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점심시간 예비종 소리에 퍼뜩 일어나서 5교시가 시작하기 전, 아슬하게 교실로 되돌아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종례를 할 때까지, 종례를 하고 네 오후 훈련이 끝나길 기다리는 지금도 점심시간 끄트머리에 잠깐 빠졌던 잠이 독이 되었다. 3모가 끝나면 중간고사 기간, 그런 일정 속에서 공부만 하던 랑도 잠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잠깐의 잠이 더 많은 잠을 바라게했고, 수업시간에 자본 적이라고는 없어서 잠들지 않고 버텨야 했는데- 랑은 자지 않고 버텨냈지만 수업을 제대로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너로 인한 후폭풍이 거셌기 때문이다. 상상도 하지 못 했던, 너무나도 달콤했던 화이트데이였기 때문에- 오후 시간 내내 졸려하다가 네 덕에 불타고, 다시 졸려하고, 또 얼굴에 열 오르는 것의 반복이었다. 방과후에는 그러다 놓친 부분들을 뒤쫓았지만, 네 훈련이 끝날 때 쯤이 되면 깔끔하게 책을 덮어버렸다. 현민이한테 가야지- 잠을 쫓아내려고 고개를 휙휙 저은 랑은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현민아-"
한 쪽은 펜스가 확 트여있는 축구장으로 너를 찾아내려왔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걸어 들어가지 않았지만, 축구부 학생들의 짓궂은 놀림없이도 벌써부터 얼굴에 벌써 열이 올라있다. 널 볼 때마다, 널 생각할 때마다 점심시간이 떠올라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하루로 끝난다면 다행인데, 이것 때문에 네게 어색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랑은 축구장 안 쪽에 있을 너를 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으며 손을 내린다.
네 순진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말간 봄날 하늘과 겹쳐본 것이, 짧은 낮잠을 갖기 전 소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날 오후 훈련은 아무 문제 없었다. 부쩍 성장한 현민의 윙어로써의 기량에 축구부 코치는 많이 흡족해했다. 다만 달리기를 하면서 문득 네가 있을 창가를 올려다보다 자빠져버리는 사소한 사고가 있었다. 별로 크게 상처는 안 났고, 2학년 들어서 교실이 한층 내려왔다 하더라도 그 각도상 창가에서 바로 내다보일 만한 위치는 아니었기에 너한테 넘어지는 장면을 들키지는 않았겠지만, 현민은 걱정스레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어찌됐건 까슬까슬한 바닥에 쓸리는 통에 손바닥에 피를 볼 정도로는 흉이 졌고, 상처를 씻고 소독하고 연고 도포에 거즈까지 발랐지만 어찌됐건 손바닥 한 면에 나 다쳤소- 하고 커다란 거즈가 떡하니 붙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샤워실에서 땀을 씻으면서 손바닥에 붙어있던 거즈를 떼어보니 피는 한참 전에 멎었고, 그렇게 크지도 않은 상처는 분홍색이 되어 내일이면 나을 것 같았기에 그는 대수롭잖게 교복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축구장에 집합해서 코치의 오늘자 훈시와 함께 하교하라는 명령을 받고 더플백을 집어들었다. 상처가 그렇게 따끔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야, 네 와이프 왔다." 하면서 킥킥대며 옆구리를 찌르는 친구의 장난스런 웃음에 화들짝 놀라버린 건 어째서일까?
멀리서 보면, 그는 너를 등지고 더플백을 집어드느라 너를 보지 못하고, 먼저 일어서던 현민의 축구부 친구가 현민의 옆구리를 찌르는데 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제서야 현민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너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환히 빛나고 있다.
그리고 멀리서도 들리는 얼레리꼴레리 합창단 모여ㄹ 하는 장난스러운 구령. ㄹ까지만 쓴 것은 현민이 장난스레 그 구령을 외치던 친구의 정수리를 손날로 내리치는 바람에 그 친구가 혀를 씹었기 때문이다. 현민은 축구장 펜스 출구로 후다다닥 달려나와서는 냉큼 네 앞으로 달려와서 멈추어섰다. ...비밀 연애지만 역시나 너와 그 사이에서만 비밀인 모양이다.
"─응, 배하랑."
그는 다른 친구들이 눈앞에 있을 때면 항상 네 이름을 다 불렀다. 그리고 속삭이며 덧붙였다.
앗 그렇다면 좋아 답레에서 현민이 팔짱 꼭 끼고 축구부한테 메롱할거야 축구부들 벙찌게 만들고 싶은데 오히려 더 놀리려나...... 그래도 메롱한다니까 이제 난 랑이 못 말려 ㅋㅋㅋㅋㅋ 공식부부 너무 귀여워 학교 홍보모델 같은거 하면 좋겠다 축구명문고에서 축구부 현민이 그리고 성적우수 랑이 고등학교 홍보책자에 실리는 학생들 같은거....
아직 열여덟 아이들로 이런 상상하면 지옥갈 거 같지만 이미 지옥행 확정일 거 같으니까 립 번지거나 지워지는 거............. 역시 지옥문이 활짝 열렸다
무슨 말하려다가 까먹었는데 기억났어 현민이랑 랑이 롤이 바뀐게 문득 보고 싶었다 운동부 랑이랑 모범생 현민이 랑이가 운동한다면 생각나는게 별로 없지만 현밍이가 축구로 하계 쪽이니까 랑이는 동계 쪽 생각나기는 했어 피겨가 점프할때 키 작은게 유리하다던거 같기도 하고 스포츠 잘 몰라서 조심스럽지만
랑은, 네가 랑이라고 불러주는걸 정말이지 좋아했다. 배하랑이라고 불러도 네 목소리니까 좋았지만, 랑이라고 부르면 좋다고 말로만 하기에는 부족했다. 심지어 방과후에 네가 훈련하는 내내 못 봤으니까 더욱이 반가웠다. 간질간질 미소가 차오르다가 결국 네 품에 폭 얼굴을 묻어버린다. 두 팔로 너를 꼭 끌어안고 부빗거리면서 앞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네 품이니만큼 너의 향기도 나고, 랑의 향기도 머리카락이 뻗치면서 묻어나는게 좋았다. 네 향에 섞이는 자신의 향이 충분하다 느껴질 때쯤 다시 네 품에서 살짝 떨어져 나왔다. 헤실헤실, 따뜻하게 덥혀진 햇살이 녹인 웃음이 행복함을 완연하게 드러낸다.
"이제 끝난 거 맞지?"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기울이면 네 뒤로 축구부 학생들이 보였다. 개 중에는 네게 방금 정수리를 얻어 맞은 친구도 있었을테고, 저번에 축구장에 발을 들였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널 놀리느라 짓궂은 학생들도 있다. 랑은 가만 그들을 바라보다가 혀를 내밀었다. 샐쭉이는 미소가 랑이 얄밉게 굴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낸다. 그리고는 다시 네게로 돌아와 손을 내민다. 이제 집 가자고 너와 손을 꼭 잡으려고 했는데, 네 손에 상처가 난게 보였다. 반창고도 없이 드러나 있는 상처는 바로 랑이 짓고 있는 표정을 삐죽이게 만들었다.
"...쓰리겠다."
상처가 남은 네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어올렸다. 상처를 바라보는 속눈썹이 내리깔려 깜빡인다.
"밴드 안 붙여도 돼?"
밴드라면야 랑의 가방에도 꽤 많이 있으니까 붙여줄 수 있다. 훈련이 끝나고 씻기 전까지만 해도 거즈가 붙어있었단 사실을 모르니, 설마 훈련 내내 이러고 있었을까- 소독이나 연고는 제대로 발랐는지도 모르다보니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품에 푹 파묻히면 그의 품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뒤에서 워어어어어 하는 환호성이 배경음으로 따라붙었다. 네 향이 그의 품에 한가득 남았고, 상쾌한 바디워시 향과 섬유유연제, 숲 향기, 데오드란트 향기가 네 머리와 뺨에, 그에게 파묻힌 부분에 남았다. 고개를 올려다보면 어느덧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봄날 초저녁의 석양이 그의 얼굴에 곱게 아롱아롱 물들어 있었다. 조금 쑥쓰러운지 옆으로 돌리던 까만 눈은 곧 다시 너를 마주 바라봐오고, 3학년 선배들은 짜아식들 좋을 때다 하는 흐뭇한 눈으로 삼삼오오 흩어져가고, 예전부터 호흡을 맞췄던 2학년 친구들과 그새 친해진 1학년 후배들이 환호성 메들리에 이어 얼레리꼴레리 메들리를 시작했다. 그래서 너는 그들에게 앨랠래를 시전한 뒤에 잽싸게 현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민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가, 네 손을 맞잡으려다가- 평소의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을 내밀어 잡았다. 그리곤 후다닥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일단 너와 함께 피할 것도 있었고, 너한테 감출 것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역시 후자는 좀 늦었나, 네 얼굴이 삐죽이는 표정이 되는 걸 보고 현민은 에이 걸렸네, 하는 얼굴이 됐다.
"이 정도로 뭘."
하고 현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사실 피도 멎고 아물기 시작한 상처다.
"부상 입는 빈도라면 오히려 네가 더 높은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네 무릎에는 네가 갖고 다니는 밴드-종종 깜찍한 캐릭터 밴드-가 붙는 일이 많았지만, 종종 좀더 투박하고 칙칙한 의료용 밴드가 붙는 일도 잦았다. 네 부상을 네가 먼저 발견하느냐 현민이 먼저 발견하느냐의 차이였다. 너를 만나고 나서, 현민이 가방에 늘 챙기고 다니는 작은 구급낭에서 밴드와 소독솜, 연고가 소모되는 일이 조금 잦아졌다.
"소독도 했고 연고도 발랐고... 씻느라 떨어져나가긴 했는데, 아까까진 거즈도 붙이고 있었어."
우연이지만, 그의 대답은 네가 찜찜해하던 부분을 모두 속시원히 긁어 주었다. -사실, 씻고 나와서 자신의 손으로 밴드나 거즈를 새로 붙여도 되긴 했다. 의료용 밴드도 테이프도 거즈도 가위도 다 구급낭 안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을 붙이면 일차적으로 네 눈에 잘 띌 테니 그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그 일차적 핑계는 소용없게 됐다.
"괜찮으면 붙여줄래?"
두 번째이자 진짜 속마음은, 사실은 네가 밴드를 붙여줬으면 해서였다. 그래서 속마음을 내보이는 두 번째 질문은 조금 조심스럽다. 그는 덧붙였다.
랑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가락 사이로 가다듬었다. 그럼 랑이 쓰는 샴푸향, 원래 랑이 품고 있던 따뜻하고 가벼운 비누향 외에도 너의 향이 머리카락에서부터 톡 코 끝에 떨어진다. 네게도 묻혔지만 랑에게도 묻었다. 랑은 까르르 웃으면서 너를 바라보았고, 초저녁의 노을이 푸른 눈을 물들이면서 비춘다. 갖고 있는 색이 여리고 흐린 랑은 주변 색에 곧잘 물들었는데, 너의 색으로 그림자까지 칠해졌다. 축구부원들이 놀리든 말든, 랑은 더 부끄러운 짓도 했거든- 하고 메롱 놀리기도 했겠다, 집에 가서 너와 느긋하게 영화를 보면서 쉴 생각이 가득했다. 너의 상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빈도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상처를 가만 내려다보던 눈이 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랑은 언제나 누구에게 곧잘 웃어주었고, 너에게는 유달리 더 화사하고 예쁘게 웃고는 했는데 그 눈이 책망하듯이 얇게 뜨였다. 내가 가끔 다치면 걱정 안 할거야- 하고 물어보는 눈이다. 물론 랑은 지금도 무릎에 반창고가 붙어있고, 무릎이 까지는걸 피해보겠다고 손을 짚었다가 손바닥을 까먹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걱정에 있어서 빈도는 중요치 않다고, 심지어 네가 숨기려다가 걸린 얼굴을 해버렸으니- 말이 톡 쏜다.
"다시 붙였어야지, 나한테는 맨날 붙여주면서."
입술을 내밀고서 삐죽인다. 붙여줄래, 하고 물어보면 랑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치지 않은 손을 꼭 쥐고는 네가 말한대로 저어-기 있는 벤치를 향해 먼저 걸음을 뗀다. 이미 랑의 머릿속에는 네 가방 속에 있을 의료용 반창고를 붙여주는게 나을지, 아니면 랑이 갖고 다니는 귀여운 디자인 반창고를 붙여주는게 나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무릎에 붙어있는 반창고가 캐릭터 반창고라서, 네게 같은 반창고를 붙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도 네 상처가 빨리 아무는게 더 중요하니까 금방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의료용이라고 해도, 접착력에서 근소한 차이가 나는 정도다. 접착력이 강하면 접착부에 접착제가 남아서 시커멓게 되기도 하고. 그러니 오늘 네 무릎에 뭐가 붙었는지에 따라서 붙여주는 건 어떨까 싶다. 그리고 커플 반창고라고 놀려먹어 보자. ...그렇지만 일단은 놀려먹어야 할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네가 뚜하니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현민은 이내 야단맞은 개마냥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군다. 꼬리라도 달려 있었으면 축 처졌겠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탓이다.
"미안해."
하며 현민은 너를 따라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코너를 돌아서서, 교사 뒷편에 마련된 정자로 가자 축구부 친구들의 시선도 잦아들던 얼레리꼴레리 송도 모서리 너머로 사라진다. 상관없다- 축구부 친구들은 너와 그 소년이 무슨 짓까지 해봤는지 알 수 없을 테니까. 네가 축구부에 속한 다른 친구가 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애정관계가 발각된 커플이 늘 받곤 하는 질문인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 하는 질문에 현민은 여지껏 "안알랴줌" 이라는 대답 하나로 일관하고 있었기도 했다. 연애사실 자체는 들통이 났더라도, 아직까지는 너와 단 둘이서만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독점욕이랄까, 집착이랄까. 새끼 고양이만큼이나 유치한 방식으로 발현되는. ...그렇지만 일단은 그런 독점욕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게 있다.
"다음번에는 내가 알아서 붙일게."
현민은 네 자리를 한번 손으로 쓸어주고는, 자기 자리도 한번 쓸어보고 앉는다. 네 손은 여전히 꼭 쥔 채다. 좀 쑥스럽기도 한 것이, 새로 생긴 상처를 보여주는 건 보통 너였는데 이번에는 역할이 영 반대로 돼버린 것이다.
사과를 거절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계속 기죽어있는 건 더욱 싫었다. 랑은 네 사과를 받았고, 축구장에서부터 들리는 소리가 너보다 더 빨리 흩어졌기 때문에 조금 더 이르게 네게 닿을 수 있었다. 정자로 향하다 갑자기 맞잡고 있는 손이 위로 향하나 싶으면, 랑이 네 손등에 쪽 입 맞추었다. 같은 실수를 한 번 더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격려와 네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온기를 품은 입맞춤이었다.
"싫어."
그렇지만 아직도 뚱했다. 알아서 붙이겠다는 말이 왠지 불만이었다. 다시 붙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알아서 혼자 다 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네게 변덕부리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랑은 여지껏 입술을 삐죽거린다.
"나 있을 때는 내가 해줄래."
랑이 네 옆에 없을 때도 상처를 방치했다가는 오늘과 같은 일을 또 겪게 될 것이다. 랑은 네가 다쳤던 손을 조심스럽게 꼭 잡았다. 피는 멎었다지만 그래도 분홍빛 상처가 마음이 쓰여서 랑은 가방을 뒤적거려 랑의 무릎에 곧잘 쓰이던 조그만 파우치를 꺼냈다. 반창고와 소독약, 면봉과 연고가 들어있다. 까인 피부에 소독약이 닿아 네가 움찔거려도 랑은 아랑곳않고 연고와 반창고까지 야무지게 발라줄 것이다. 반창고 두개가 필요하다면 나란히 두개까지 예쁘게- 랑의 무릎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붙여줄 것이다.
"이제 나랑 똑같아."
네가 무릎에 있는 반창고 모양을 기억할까- 랑은 치마를 조금 걷어올린다. 네 손바닥에 붙은 것과 똑같은 깜찍한 캐릭터 반창고가 두 무릎에 나란하다.
다행히도, 안 그러면 되니까- 하는 용서가 현민에게 효과가 있는 건지 그는 시무룩한 기색을 조금 덜어내었다. 그러나 너는 조금 덜어지는 것 정도로는 용서할 수 없었던 걸까 대뜸 그의 손등에 쪽 입을 맞춰버렸고, 남아있던 시무룩한 기색이 일거에 확 날아갔다.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 색만 빨개졌다. 그는 정말이지,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고마워."
사과보다는 감사가 더 낫다고 판단했는지, 내가 해줄래- 하는 너의 욕심 그득한 말에 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론 아직 미안했고, 한편으론 기뻤다. 왜인지, 자신이 네 소유라는 것을, 네 사랑이라는 것을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확인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독약이 닿을 때도, 꽤 따가울 텐데 현민은 눈을 깜짝하기는커녕 손끝에도 별 미동이 없이 네가 해주는 처치를 다 받았다. 그러다 네가 꺼낸 말에,
"똑같─"
네가 치맛자락에 손을 대자, 아무 생각없이 방심하고 있던 현민이 화들짝 놀랐다. 네 시선 안에 그가 있었다면 그가 움찔하면서 머리카락도 흔들리고 시선도 흔들리는 게 게 다 보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더라도 너와 붙어앉아 있던 그의 몸이 팍 하고 한번 경련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얼굴에 가득 든 토마토색에, 한 박자 늦게야 네 무릎에 붙어있는 반창고가 눈에 들어서, 그것이 자신의 손에 붙어있는 것과 같은 반창고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에 서린 붉은색에 분홍색이 슬며시 섞여들어간다. 커플반창고네. 하는 말이 머릿속에 불쑥 튀어나와서, 현민은 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푹 가렸다.
# 답레 쓰다가 워드패드에서 컨트롤+X로 잘라내기한 것까진 좋은데 무심결에 스레 주소까지 복사해버리는 바람에 클립보드에 저장돼있던 게 달아나서 다시 썼어 ( x x)
커플반창고네- 같은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던 랑은 네 반응이 없자 그제서야 너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반창고를 붙이고 있으면 귀여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싶어서 조금은 늦게서야 시선이 너를 향한다. 그렇지만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네가 얼굴을 양손으로 폭 가리고서 있으니까 눈이 마주칠 수가 없다. 랑은 커플 반창고를 한게 그렇게 부끄러운가- 생각하다 문득, 방금 치맛자락을 걷어낼 때 옆에서 네가 흠칫거렸던게 생각났다. 분명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 야, 치맛자락을 그렇게 함부로... - 누가 보면 아예 걷어버린 줄 알겠다!
작년, 너에게 넘어지며 처음 만났던 그 다음날- 등교길에서 깐쵸를 쫓아가다 너와 함께하게 된 등교길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랑은 그때 생각이 나서 까르륵 웃어버렸다.
"나 반바지 입으면 아예 못 보겠다~."
쿡쿡 놀리는 소리가 짓궂었는데 그러면서 랑은 움직였다. 바로 옆에 앉아있으니 보지 않더라도 랑이 움직이는걸 기척으로 느껴진다. 얼굴을 덮은 손을 코앞에 둘만큼 가깝게 다가가서, 쪽 그 손등 위로 입맞추었다.
"아까 고맙다며- 밴드 붙여줘서 고마우면 얼굴 가리는 거야?"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가깝다. 랑은 네가 손을 거두기를 기다리는 듯 좁힌 거리를 다시 벌리지 않았다. 네가 손을 거두면, 그때서야 원래 있던 거리만큼으로 돌아가서 방긋 웃어주겠다.
으악, 잔소리이이. 하고 놀리듯 질색하는 시늉을 내는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한 것 같았다. 문득 작년 늦가을, 너와 함께 걸었던 그 등교길이 새삼 생각나서 현민은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따뜻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얼굴 말고는 스스로의 체온을 실감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왜인지 가슴 속이 따뜻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실감이 난다. 그리고 자신이 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얼굴을 가려버렸는지도 조금 알 것 같다.
물론 그런 마음은 아랑곳없이 너는 반바지 입으면 아예 못 보겠다며 까르륵 웃기에 바쁘다.
"그게 반바지랑 같냐." 현민은 궁시렁댔다. 확 내가 치마를 입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손에 얼굴을 파묻고 궁시렁대느라 현민은 네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야 이 부시럭대는 소리가 너무 가깝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눈치챘을 때는 이미 네 입술이 그의 손등 위에 따뜻한 흔적을 남긴 뒤였다. "......"
소근소근 장난스레 추근대는 목소리가 물러나지 않고 있다. 현민은 손가락을 삭 벌려 너와 눈을 마주쳤다. 네 푸르른 눈과, 손가락 사이로 그의 까만 눈이 보인다. 그러다 그는 불시에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렇지만 그 손은 천만뜬금없이도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네 양 볼로 쑥 뻗어왔다. 그의 오른손이 감싸안은 네 뺨에서 네가 붙여준 반창고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아예 못 보는 거 아냐- 하고 말했던 랑은 고개를 갸웃였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이는 것도 잠시뿐이었고, 네게 쪽 입 맞추고서는 너와 눈을 맞추며 웃는다. 쪽 하고 네게 노크를 한 것처럼, 네가 손가락 사이를 벌려 눈을 마주쳐오니 랑은 곱게 눈웃음지었다. 일부러 활짝 웃음짓지는 않고, 생글생글 너의 검은 눈을 조금 비치도록 남겨둔 호선 눈매가 초승달을 대신에 밤하늘에 떠올라도 될 것 같았다.
"잠-"
잠깐만- 전부 말하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았다. 랑은 네가 두 뺨을 쥐었을 때 점심시간의 일을 떠올렸고, 설마 하는 생각에 네가 가까이 다가올 때 눈을 꼭 감아버리고 말았다. 조금 몸을 떨었을지도 모르고 그만큼이나 긴장해버린 것이다. 너와 어색하게 굴고 싶지 않아서 다름없게 행동하지만 의식해버리면 순식간이었다. 다행이라고 해도 될지, 랑이 상상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칫국 엄청 마셨잖아- 하고 랑은 새빨갛게 변했다. 물든다거나 번진다는 표현을 갖다붙이기에는 불타오르듯 화르륵 빨갛게 열이 올라버렸다. 이번에는 랑의 얼굴이 손 아래로 숨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 손과 얼굴색의 대비가 너무 뚜렷했다. 얼굴은 너무 뜨겁고 손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얼굴을 가리는 걸로도 모자른지 랑의 등이 동그랗게 굽는다. 고개를 떨구면서 어디에 숨고 싶은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럼 계속 참았어야지~."
랑이 먼저 네가 가리고 있는 얼굴 위로 입맞추어서 일어난 일인데도, 그런 오해를 해버린게 부끄럽고 민망해서 랑은 괜히 네게로 원망 아닌 원망을 한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해주길 기대했다거나, 또 하고 싶었다거나, 사랑하는 기분이 사랑받는 기분이 좋았다거나 그럴듯한 이유를 머릿속에서 늘어놓고 찾아보지만 역효과였다. 이러다가는 머리에 열이 너무 올라 쓰러질지도 모를 것 같아진다.
길이의 차이가 아니라 형상의 차이다만 현민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말하기로 했더라도 말을 이을 수 있었을지는 불명이다. 네 눈웃음에 정신이 팔려버렸기 때문이다. 손가락 너머로 보이는 네 푸르른 눈동자가 곱게 눈웃음지어지니 포름했다. 떴을 땐 하늘이더니 살짝 감기니 달이다. 새삼, 생각했다. 예쁘구나, 너. 어쩌면 그가 얼굴에서 손을 치웠을 때 대뜸 네게 입을 맞춰버린 건 반격의 의미뿐만 아니라 새삼 다시 느낀 너에 대한 애정이 마음 속에서 넘쳐나온 걸 너한테 안겨주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너 예쁘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하늘같은데 눈웃음을 지으니까 초승달 같아... 같은 말을 하는 낯간지러운 재주는 현민에게 없었으니까.
대신에 그는 팔을 벌렸다. 이번엔 자기 차례라는 듯 손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참았어야지, 하고 툴툴대는 네 어깨를 감싸안아 품 안에 기대어누이려 한다. 어디에 숨고 싶어하는 너를 위해 너에겐 항상 숨을 곳이 있었다. 다만 그 숨을 곳이 이번에 너를 숨고 싶게 만들어버렸다는 게 문제겠다. 현민은 나무꾼처럼 널 숨겨주려 했다. 숨을 곳이 수풀이 아니라 그의 품이고, 네가 사슴이 아니라 선녀였다는 게 동화와는 조금 다르지만. 네가 안겨들어온다면 현민은 널 품에 마음껏 기대게 두고 벤치에 기대었겠다.
"미안. 못 참았어."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전에는 이렇게 자신이 내어놓는 반격에 네가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면 이쪽도 한방 먹였다는 통쾌함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보다는 그런 네가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역시 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 평생을 걸려도 낫지 않을 병에 걸렸다.
네 손길에 이끌려서 랑은 네 품으로 폭 빠졌다. 너를 마주 끌어안아주지 못할만큼 부끄러워서, 랑은 네게 꼭 기대기만 한다. 네가 말한 집에 갈 준비는 얼굴을 가릴 만큼 열이 올라버린게 어느정도 가라앉으면 알려달라는 것일텐데, 금방 가라앉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처음이라는 건 쉽사리 소중하고 애틋하게 여겨졌고, 랑도 그랬다. 이미 너이기 때문에 잊을 수 없을 일인데, 너와 함께 하는 처음은 너무나도 많았고 오늘도 새로운 처음을 하나 새겼다. 그 때문에 발갛게 익어있자니 네가 안아주었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고, 지금 네가 안아주는 것이 그때와 흐름이 똑같아서 더 똑똑히 기억나고 만다. 맞닿아서 느껴지는 랑의 심박이 너무 빨랐다. 손은 얼굴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고, 대답도 전부 고갯짓으로 대신했다. 그나마도 한번 뿐이었다. 집에 갈 준비 되면 말해달라니 끄덕거린 한 번이 전부였다.
"현민아."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었을텐데, 랑은 네게 오랫동안 기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손에 느껴지는 뺨의 온기는 뜨겁고, 심장은 쿵쿵 울리고 있어서 너를 살며시 불렀다.
"나, 준비가 안 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목소리가 작았다. 나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네가 편하게 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돼- 어떡하지- 네가 전부 말하진 못한 문장들이 애가 타서 발음이 또렷하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목소리들 사이로 집에 가고 싶은데- 하는 말이 들렸다. 너희 집에 가고 싶은데, 라고 말했는데 너희라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걸까, 아니면 어느샌가 우리 집이 너희 집보다 더 중요한 의미로 너에게 남겨져버리고 만 걸까. 집이나 가족 이야기를 꺼내면 네 민둥민둥 해맑게 웃는 미소가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것을 현민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집보다 더 집같은 존재가 된 것인지, 아니면 랑의 집이 자신보다도 덜 집같은 존재인 건지. 아니 어쩌면 둘 다일까.
"응."
그러나 그걸 굳이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직 네게 아픈 상처다. 무릎에 아직도 자잘히 남아있는 상처나 자신의 손에 난 잔 상처보다도 훨씬 아프고 깊은 상처다. 괜히 건드렸다가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혼자서는 너의 그 상처에 닿지 못한다. 그저, 준비가 안돼, 하고 허둥지둥하는 너의 목소리에 널 끌어안은 채로 어깨를 두드려줄 뿐이다.
house와 home이 갖는 차이점이 있었다. 랑에게 hom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너였고, 그래서 네 옆자리, 네가 사는 집- 너의 방을 더 편안하게 여겼다. 쉴 수 있는 곳, 돌아가야하는 곳에 랑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게 랑의 자리는 네 옆자리라고 생각했다. 의식하고서 생각하는게 아니어서 그저 랑은 네 토닥임에 드디어 손을 내렸다. 여전히 좀 따뜻하긴 하지만, 네가 얼마나 졸려했는지 알고 있고- 너무 유난떠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에 비해 너무 심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거나, 연인끼리 할 수도 있는 애정행각인데- 이제서 너를 마주 안았다.
"응."
꾸욱- 하고 지그시 말랑거린다. 한 번 꼭 마주 안았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이제 우리 집 가자."
우리가 we로 쓰였는지, our로 쓰였는지는 미지수다.
"영화 볼 시간도 없겠다-"
오늘 방과후는 너와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버리면 잠들어버리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까, 랑은 너와 눈을 맞추고 배시시 웃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제 가자- 하고 말하는 대신이었다. 가방을 다시 메고, 너와 손을 잡고, 교문을 벗어나 걸어가다보면 깐쵸가 어슬렁거리고, 랑이 집으로 돌아가는 하교길 풍경은 언젠가부터 그렇게 바뀌었다.
현민은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정확히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자신이 최고의 행복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렇게 되었지만, 유일한 행복은 아니었으면 했다. 너를 네 집에 바래다줄 때 네 표정이 좀더 밝기를 바랐고,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친구들과 수다떠는 시간이 더 길었으면 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양보해줄 수 있었다. 물론 자신같이 작년까지만 해도 고요한 인간혐오에 사로잡혀 차근차근 스스로를 고립해가던 녀석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너는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네가 땅에서 무엇에 쫓겼길래 땅에서 발을 떼고 구름처럼 하늘에 둥둥 떠 있었던 걸까. 자신이 다 쫓아내주고 혼내줄 수 있을 텐데. 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현민은 과욕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만족하기로 했다.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이 행복을 나누는 것.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품을 내어주는 것. 네가 우선적으로 원하는 것. 그것만으로 행복하기엔 충분하니까. 네가 자신에게 그렇게 되어주었듯이 자신도 네게 충분한 행복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은 못내 다행스럽고 행복했다. 품 안에 말랑말랑 와닿는 네 뺨이 따뜻해서 현민은 풀어진 웃음을 느슨하게 지었다.
"─그래, 우리 집에 가야지."
현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 영어시간에 중의적 표현에 대해서 배웠었던가. 현민은 너와 마찬가지로 we인지 our인지 분명하지 않은 대답을 함으로써, 너를 몸뿐만이 아니라 말로도 꼭 끌어안아 주었다. 다 괜찮다고.
"뭘, 아직 해도 다 안 졌는데."
하며 그는 너를 따라 벤치에서 일어섰다. 봄에 접어들며 해가 길어졌다. 하굣길의 태양이 이제서야 어물쩍거리며 간을 보고 있는 정도였으니. 어느덧 너와 함께 돌아가는 이 하굣길도 너무 익숙해져서, 어느덧 그것마저 자신의 일부가 되어있어서 현민은 조금 웃었다. 웃으며 깐쵸를 안아들어 어깨에 태웠다. 깐쵸는 이따금 네 어깨로 옮겨 올라타곤 했다. 하굣길의 끝에 너와 그를 반기는 건 항상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붉은 벽돌로 지은 꽤 클래식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베드타운이었다. 집 앞 사거리 마트 앞에서 깐쵸를 배웅해주고, 현민은 언제나 그렇듯 익숙한 손길로 패드락 번호를 눌렀다. 이젠 너도 현민의 집의 패드락 번호를 알고 있을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집이 너의 집보다 더 집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가 거기에 있고 네가 하굣길마다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서일 뿐은 아닌 것도 같았다. 그의 집의 인테리어는 대단히 안락한 편이었으니까. 기울어지는 햇살이 헤링본 패턴으로 시공된 나무 마룻바닥과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양탄자는 언제나 그렇듯 그 모양 그대로 어린 두 여행자를 반기고 있었다.
"간식이라도 좀 가져올까? 두부과자 어때."
너와 함께 간식을 먹을 때면 그는 운동특기생의 본분을 종종 망각하곤 했지만, 오늘 점심에 먹부림을 하도 화려하게 부린지라 오늘은 좀 자중하려는 모양이다.
랑은 행복하다. 너로 인해 더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랑에게는 네가 행복이었고, 아무런 행복도 쥐지 않고 있을 때 다가와준 너만으로 충분했다. 너를 욕심내는 것만으로도 과욕이라서, 랑은 다른 행복은 바라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는 이상 떠나지 않을테니까, 랑은 네 손을 쥐고 있는 것으로 괜찮았다. 네게 해줘야할 이야기들을 지금처럼 묻어버린 채, 모른 척 너하고만 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아, 너 하나밖에 없어- 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건 입이 썼다. 가시공을 삼키는 기분이다. 말해야 하는데, 알려줘야 하는데- 지금 이렇게 행복하니까 조금만 더 나중에 말하자고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모른 척 묻어두고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겁쟁이었다. 굳이 힘들고 아파서 묻었던 이야기를 들추고 싶지 않았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너에게 알려줘야만 하는 이야기라는게 괴롭다.
깐쵸가 어깨로 넘어탈 때마다 몸이 굳는다. 어깨에서 미끄러질까봐 겁이 나서, 어깨의 무게감에 놀라서 멈칫거리며 너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어서 길어진 그림자로 땅에 비추는 너와 랑의 모습 속에 고양이 그림자가 무사히 올라와있는지 확인한다. 네 손을 잡고 있으니까 넘어지더라도 랑은 네가 붙잡아주겠지만, 깐쵸까지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전에 폴짝 뛰어 내려간다면 다행이겠다. 긴장한듯해도 즐거웠다. 이 하교길이 즐겁다.
"응, 좋아-"
꽃샘추위가 남아있어도 봄이었고, 길어진 해가 따뜻하게 내려서 랑은 눈을 꾸욱 깜빡인다. 평소에는 공부하는 시간대인데도 유달리 졸려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자도 된다고 붙잡고 있던 자제력의 마지막 밧줄을 놓았기 때문이다. 영화 볼 시간도 없겠다는 말은 랑이 스스로에게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너의 집에 발을 들였을 때처럼 신발 뒷축을 구겨 벗은 랑은 고개를 휙휙 젓는다. 그래도 영화는 봐야하니까 지금은 졸려하면 안 돼- 하고 두 손으로 두 뺨을 꾸욱 누른다.
"오늘 처음으로 간식 남길지도 몰라."
다 못 먹고 잠들 것 같았다. 랑은 간식을 가지러 갔을 네 뒤로 종종 쫓아가서 뒤에서 꼭 끌어안는다. 이유는 없고, 그냥 하고 싶었다.
아무 문제 없다. 이야기를 하면 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대로 그는 너와 함께 있어줄 테니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면 시간을 들여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와 함께 있는데 그것을 해결할 필요가 없기도 하하다. 그는 너와의 사랑을 이미 이루었고, 너의 삶에 묶여있는 그 매듭들은 그를 사랑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도, 그가 너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그의 사랑과는 별개로 네 삶에 남아있는 흔적들일 뿐이었다.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것을 풀어내야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가 네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혼자서 바라고 있을 뿐이다.
어차피, 이 하교길을 같이 공유하는 데에 그런 것은 중요치 않으니까. 현민은 네 손을 꼭 잡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하교길을 함께했다. 네가 균형을 잃을라 치면 붙들어줄 테고, 깐쵸도 네가 넘어진다 싶으면 알아서 뛰어내리겠지. 그도 그럴 것이 고양이니까. 그래도 결국 깐쵸가 네 어깨에서 내려갈 일은 없었다. 현민은 이 하굣길을 좋아했다.
"너도 되게 피곤해보인다."
현민이 그런 말을 한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현민은 자신이 피로하면 피로하다고 그때그때 어필하는 타입이었고, 오늘 휴식시간을 갖기로 한 것도 현민의 주장으로 악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민은 너를 보며 한 마디 한다. 네 꾸욱 감기는 눈꺼풀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있었던 탓이다. 평온하고 잔잔한 영화를 보자고 생각하면서 현민은 간식을 가지러 가려 했으나-
백허그를 당했다.
차마 몸을 뒤로 돌리지도 못하고, 현민은 팔만을 뒤로 돌려 네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의 울퉁불퉁한 등에서 따뜻하게 그의 체온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시선을 들어보면 귀가 조금 빨개져 있고. 심은 지는 3개월이 훌쩍 넘었고 꽃을 피운 지는 이제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수줍고 풋풋하다.
공부 밖에 안하는데- 공부는 랑에게 있어서 가치 증명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공부로 인한 피로를 신경써야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저 꼭 너를 안는다. 따뜻해- 너를 뒤에서 안은 적보다 마주보고 안은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품에 안겼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면서도 똑같았다. 똑같이 따뜻했고, 네 향기가 나고 있고, 언제나 그랬듯이 다정하다. 서서 잠들 수도 있겠구나 싶어져서 랑은 또 고개를 휙휙 저었다. 방금 잠이 달아나라고 고개를 저은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너를 꼭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저은거라 부빗거리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점이었다. 이어서 두 손으로 뺨을 누르는 대신에 한쪽 뺨을 네 등에 맞대고서 꾸욱 디민다. 말랑했고, 어쩐지 랑은 잠이 더 오는 것만 같았다. 포근하기만 해서 잠을 쫓아내려고 한 행동인데 의미가 없어졌다.
"귀 빨개졌어, 채부끄럼쟁이씨~."
쿡쿡 웃는 소리가 나면서 너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보면 랑은 네 전화번호를 채부끄럼쟁이라고 저장해두었다. 연인이 된 이후로 바꿔서 저장해보려고도 했지만 남자친구니, 하트 모양 이모티콘을 붙이느니 하기에는 손가락 움직이기가 그렇게 무거웠다. 네게 연락이 올때마다 알림창에 그렇게 보이게 될텐데, 전화가 오든 문자가 오든 카톡이 오든 이름란에 그렇게 적혀있을텐데- 연락도 제대로 못하게 될 것 같았다. 휴대폰 붙잡고 앓는게 더 잦아질텐데, 감당불가였다. 그래서 여전히 채부끄럼쟁이로 저장되어 있는데, 그게 지금 보니 바꾸지 않은게 맞는 것도 같았다. 마냥 부끄럼쟁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더 부끄러운 짓도 서슴없이 하고는 했던 너라서 알쏭달쏭하기는 하지만, 귀여운 별명이라고 생각하니까 일단은 고정이다.
"얼굴은 안 빨개?"
짓궂게도 뒤에서 네 옆으로 다가와 선다. 네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머리카락이 흔들리면, 머리카락 너머 귓가에서 범고래가 수영하고 있고 언제 셔츠 안에서 도망나왔는지 고래 지느러미가 살랑거린다. 네가 남을수록 연하게 말갛던 뺨이 상기되어서, 랑도 지금 뺨에 떨어지는 노을빛을 칠한 것만 같았는데 그걸 모르고서 네게 묻는 말이 그랬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네가 훨씬 잘 알고, 너와 현민 두 사람 중 누가 더 똑똑한지를 물으라면 당연히 너겠지만, 자기증명을 위한 자기계발과 휴식 간의 중요성에 대해서만큼은 현민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체육특기생이고, 그 분야는 무리하면 즉각 몸에 피드백이 오는데다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휴식을 통한 몸 관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결코 남의 생활에 이 정도의 간섭을 한 적이 없었다. 해봐야 운동부 후배에게 한두 마디씩 지나가는 말로 해주는 정도였나. 그러나 네가 첫 예외였다. 현민은 너와 몇 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까지 사랑에 깊이 빠지는 데에는 이례적으로 짧은 시간이었으나, 네가 스스로를 상당히 혹사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제 네가 공부하자고 잔소리를 하면, 현민은 네게 쉬자고 잔소리를 할 생각이었다. 평일에 하루 정도는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게 좋다는 것이 현민의 지론이었다. 그러니 이젠 채잔소리꾼이라고 불러고 될 것 같다. 물론 배잔소리꾼이라는 반격이 돌아오겠지만.
"...빨간데."
후디를 벗어던지고 티셔츠 바람이 된 현민의 가슴팍에는 새하얀 여우 꼬리가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하얀 목걸이와 까만 셔츠, 붉은 기가 올라온 까만 피부가 더해져 묘한 트리콜로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현민의 빨간데, 하는 주어 없는 대답은 네 얼굴을 보고 나온 말이다. 그러다 역시 주어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현민은 손을 뻗어서 미간을 찌푸리며 네 뺨을 쪼물딱거렸다.
"너도 빨개, 배사과."
? 이름이 과일 조합이 되어버렸다? 뺨을 가볍게 쪼물쪼물거리고 나서, 현민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올려놓고는 간식을 꺼내려 찬장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면 현민은 널 핸드폰에 뭐라고 저장해놓았을까? 배하랑? 랑이? 아니면...?
뒤에 한 마디가 더 따라 붙는다면, 그러니까 난 괜찮아- 정도였겠다. 자리에 가만 앉아서 책을 보고, 노트를 펼치고, 무언가 적어내려가고, 밑줄을 긋고 별 모양을 그린다. 나는 공부라도 잘 해야 해- 필사적이지 않지만 필사적이었다. 공부조차 못 한다면, 쉬는 공간이 아니라 머무르는 공간이 되어버린 그곳에조차도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봐 필사적이었다. 필사적이지 않은 이유는 너였다. 내가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너는 그러지 않을 거지- 하고 믿음을 가장한 바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랑은 그래서 쉬지 않아도 좋았지만, 네 걱정 어린 잔소리는 달게만 느껴져서- 네 말대로 쉬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오늘 하루 너와 쉬는 것이었다.
"응, 귀여워-"
빨갛다는 답이 랑을 보고서 하는 말인줄 모르고서, 랑은 네 얼굴이 빨갛다는 답이라고 이해했다. 빨갛다고 답하는 네가 귀엽다는 마음을 오롯이 얼굴에도 녹여냈다. 네가 귀여워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빤 바라보고 있자니 뺨에 네 손이 와 닿는다. 조금의 당황으로 눈을 두어번 빠르게 꿈뻑거리니, 네가 랑도 빨갛다고 일러준다. 랑은 갖고 있는 색처럼이나 연하고 부드러워서 뺨도 그랬고, 네가 손장난을 치면 그 안에서 말랑거리고 있는게 느껴졌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뺨을 만지는지 모르지만, 랑은 그 이유가 귀여워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냥 좋았다.
"그럼 나도 귀여워?"
그래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나는 네가 빨간게 귀여워, 그럼 나도 귀여워-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배사과라고 불린들 네가 귀엽다고 해준다면야 딸기도 되고 체리도 되겠다. 이전에 네게 말해주었던 온갖 붉은색 과일들을 랑과 나눌 수 있다. 네가 무슨 답을 해줄까, 기대를 많이한 듯 빛나는 눈길로 너를 보던 랑은 네 움직임에 시선이 쫓아간다. 네 손이 폰을 내려놓고 찬장으로 간다. 방금 널 어떻게 저장하는게 좋았을까- 생각했던 탓에 너도 날 어떻게 저장했을지 궁금해진 랑은 쪼르르 네 폰 앞으로 갔다. 너에게로 카톡 하나, 사과 이모티콘을 보낸다. 빨갛게 익은 예쁜 사과가 네 폰에도 나타나면, 랑을 저장한 이름도 떠오를테니 바로 네 폰을 바라본다.
너는 몸과 머리 양쪽을 말한 것이었고 현민도 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아들었으나, 현민은 네 말뜻을 조금 바꿨다. 자신은 양쪽으로 70 30씩 피로가 누적된다고 한다면 너는 단일종목에 100씩의 피로가 누적될 정도로 매진하고 있었으니까. 현민은 이른바 나무꾼 이야기(두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데, 나무꾼 A는 쉴새없이 나무를 했고 나무꾼 B는 중간중간 쉬면서 나무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 B가 나무를 더 많이 했더라는 이야기. A가 비결을 물었더니 B는 쉬면서 도끼날을 갈았다나)의 신봉자였고, 그래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성취를 이루어내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너도─"
─나무꾼 이야기 들어보... 랑의 뺨을 조물거리며 자신의 신념을 네게 설파하려던 현민은, 한 박자 빨리 나와버린 네 질문에 눈을 깜빡이다가 잠깐 시선을 피한다. 빨개졌던 뺨이 조금 더 빨개진다. 채잔소리꾼이니 뭐니 해도 채부끄럼쟁이가 맞나 보다. 현민은 잠깐 돌렸던 시선을 네게 맞추면서, 대답했다.
"...귀여워. 예쁘고. 사랑스러워. 세상 예쁜 말이란 예쁜 말은 다 너한테 갖다붙이고 싶은데 아는 말이 별로 없어서 그게 안되네."
현민은 네 뺨을 조금 더 조물거린 뒤 놓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은 뒤에서야 다시 찬장에 손을 뻗을 수 있었다. 핸드폰에서 자그맣게 진동음이 울린다. 마침 그 타이밍에 현민이 두부과자를 대접에 따르면서 과자가 부딪히는 소리가 핸드폰 진동음을 묻어버려 현민은 핸드폰 진동음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화면에 조그맣게 떠오르는 메시지 창.
[❤: 🍎]
처음에는 배하랑이라 단순히 저장했으나, 현민에게 있어 배하랑이라는 세 글자는 이제 더 이상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더 커다란 의미가 있는 무언가였다. 뭐라 예쁘게 저장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른다. 그는 그의 말마따나 어휘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했고, 너를 어떤 이름으로 저장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그냥 가장 솔직하고 투박한 방식으로 당신을 저장해놓기로 했던 모양이다.
시선을 돌린 너를 가만 보고 있으면 다시 너는 랑에게로 돌아와서 눈을 맞춰주었다. 세상 예쁜 말이란 예쁜 말, 랑은 언젠가 국어 선생님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뺨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볼을 조금 드밀면서 반가움을 표하고, 볼살이 밀려올라와 눈을 깜빡 감았다가 다시 뜨일 때 너와 눈을 맞추었다.
"현민아, '사랑하다'라는 말은 옛날에 '괴다'라고 했대."
내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너인데 네가 이미 나한테 써버렸으니까- 랑은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는다.
"그 '괴다'는 '고이다'랑 같은 말이고, '고이다'의 뜻은 '생각하다'래."
누군가를 품어서 계속 떠올리고 그리며 생각하는 것 중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막상 선생님이 이야기해줄 때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들려서 그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필기하기 바빴었다. 지금은 뜻을 헤아리다 못해 온몸으로 실천 중에 있었다. 네가 뺨을 만지는 손길에 발음이 조금 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마음만큼은 온전히 너에게로 닿았을 것이다. 문장이 완성되어 있지 않다면 문장을 옮기는 목소리에, 목소리가 곱지 못하다면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면 뺨의 발간 물로 너를 향하는 마음을 전한다. 무엇보다서로 사랑에 빠져 너를 바라보며 짓는 웃음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더욱이 너에게 예쁘게 울릴테니까 개의치 않고 전했다.
"나는 네가 많이 고여서 그곳에 빠져있어."
쓰다듬까지 받고 나면, 네가 안닿은 곳이 없어졌다. 백허그 하며 꼭 파묻었을 때부터 이미 네가 닿지 못한 곳이 없었지만- 랑이 너를 묻히는 것보단 네가 랑에게 묻히는 것이 좋았다. 향기가 되었든 온기가 되었든, 네게서 받는게 더 좋았다.
하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을 때, 랑은 알람을 손가락으로 쇽 밀어서 지워버렸다. 안 지웠어야 들키지 않기에 쉬웠을 거라는 건 이미 알람이 지워진 후에야 드는 생각이었다. 사과를 언제 왜 보냈는지 물어보면 이실직고 밖에 못할 것 같아서, 알람을 지우자고 생각했는데- 지운적 없는 알람이 사라져있다면 그게 더 의심스러울 것 같았다. 그렇게 크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닌데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웃, ~."
그러다 혀를 잘못 씹어버려서, 우유라고 답하려다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소리 없이 끄응 앓는다.
괴다- 네 마음속에 고여있던 말 한 마디가 문득 떠올라 그를 향했다. 품안에 한아름 안긴 따스한 온기의 모습을 하고, 발그레 상기된 뺨의 모습을 하고, 그 뺨에 한가득 걸린 미소의 모습을 하고, 곱게 눈웃음짓는 푸른 눈동자의 모습을 하고. 현민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나도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구나. 네가 그에게 빠졌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네가 담겨있었다. 방향은 반대였지만, 그것은 서로가 마주보고 있어서였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현민은 너를 꼭 안고 있으면서 생각했다. 자신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친해진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소년의 마음에 굳게 끼어있던 껍질을 깨어부수었다.
"너한테 공부 가르쳐달라고 할 때는, 이런 것까지 배우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사실이었다. 네가 그의 가슴팍으로 쾅 떨어졌을 때 단단한 껍질 안에 갇혀있던 그의 마음이 움찔 하고 놀랐으나, 그저 껍데기에 생긴 아주 작은 틈으로 널 내어다보기만 할 뿐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껍데기에 난 구멍은 다시 메워질 것이고, 나는 네게 기말고사 공부만 조금 배우게 될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너는 두 가지의 예상을 전부 다 깨버렸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소년에게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었고, 공부는- 어쩌다 보니 1학년 기말고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너와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2학년 1학기 중간고사까지 그 이후로도 너와 계속 이렇게 함께하고 있게 됐다.
자신의 가슴팍에 떨어진 너는 구름이었지만 소년에게는 달이었다. 품안에서 행복하게 꼭 파묻혀있는 너를 놓기가 싫을 정도였다. 간식 준비는 빨리빨리 하자고 소년은 생각했다.
잠식되어도 괜찮다고 바랐다. 너도 그러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 네가 나도 그렇다고 말해서 랑은 배시시 웃었다. 때로는 덜익은 딸기처럼 시큼할 때도 있겠지만 마침내 달게 익으면 그건 우리의 것이니까 그때까지 같이 있을 것이다. 서투르더라도 너에게서 배우고, 또 때로는 랑이 알려줄 때도 있을테니까 둘이 나란히 걷는 여행길은 방향도 쉼도 걸음걸이도 함께 마음대로 정하면 된다. 랑은 네가 쫓아와줘서 기뻤다. 조금 늦었지만 네 옆에 설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거, 전부 너가 알려준건데~."
네가 그랬듯이, 나도 혼자가 편하고 익숙하다고 믿었으니까- 랑이 이렇게까지 너를 욕심내는 것은 전부 네 탓이다. 네가 랑을 이렇게 바꿔놓았고, 그저 학교 공부를 가르쳐주는 것 외의 많은 의미를 갖게 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둔 귀에 피어싱을 뚫은게 랑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의 너는 몰랐겠지만- 아물지도 않아 덧난 피어싱이 선생님 눈에 들까봐 전전긍긍하던 걸 도와준 답례에서 시작한 만남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네가 기다려주어서였다. 언제나 같은 마음을 보여주면서 랑을 바라봐주어서다.
"갠찬하."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찔끔 달렸다. 혀를 씹었지만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쿡 물어버린 통증이 아렸다. 발음이 이상했지만 깜짝 놀란 너를 보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답했다. 혀를 내밀어보라는 말에는 멈칫거렸다. 의식하면 안 돼, 넌 그냥 걱정해주는 건데- 라고 생각하면 이미 늦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혀를 살짝 베- 내밀지만 부끄러워하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감아버린다.
현민이 더이상 누군가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은 배신당한 우정으로 인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일부나마 맡길 수 없다고 단정짓게 되었기 때문이다. 뿌리깊은 인간불신. 마음 속에서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실격시켜 버린 그 마음이 현민의 껍질이었다. 그런데 그 껍질에 너에게 딱 맞는 네 모양의 네 구멍이 뚫렸고, 그것은 그 안에 있던 소년의 가슴에 너에게 꼭 맞는 모양의 자국을 남긴 것과는 별개로 조금씩 더 허물어져, 친구 몇몇 정도는 데면데면하게 대해줄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그리고 현민은 자신의 껍질을 깨어준 너를 쫓아왔다. 끈질기게 함께했고, 옆에서 기다렸다. 그가 한끼 밥 사달라거나 매점에서 간식 사달라거나 하고 한 번 만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보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부탁을 한 것은, 어쩌면 그 역시도 네 껍질을 일부나마 부수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기에게 꼭 맞아, 자기만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우선. 네가 언젠가 네 껍질을 좀더 깨어내고 싶어하면 언제든지 네 껍질을 부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도록. 그래서 현민은, 너도 나오면 안 돼- 하고 네가 욕심스레 꺼낸 말에, 기쁘게 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난 너 못 내보내."
자신이 네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해서.
늦은들 어떠랴. 지금 같이 있지 않은가.
현민은 아무 생각 없이, 순수히 네 혓바닥이 어떤지가 걱정되어 거기부터 눈이 갔다. 다행히 상처까지 나진 않은 듯했다. 다만... 온통 빨개져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네 얼굴이 보였을 뿐이다. 네가 무엇 때문에 혓바닥 내보여주는 것 갖고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알 것도 같아서, 현민도 덩달아 얼굴이 홍시색이 됐다. 현민은 얼굴 빨갛게 한 대가라는 느낌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네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을 남겼다.
"응, 안 다쳐서 다행이네."
하는 말은 네 이마 위에 얹혔다. 그는 간식 담은 그릇을 집어들려다 아직 비어있는 잔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