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며 킥킥 웃던 현민은, 네가 돈가스를 받아먹으면서 젓가락까지 통째로 합 물어버리자 그대로 멈췄다. 빼지도 들이밀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모양새다. 뭔가가 콕 무는 걸 잡아당기기 전에 이미 손가락에 쥐고 있던 감촉으로 알아챈 듯하다. 그는 너를 바라보며 걱정 반 잔소리 반으로 말했다.
"야, 배하랑, 이거 쇠젓가락이잖아. 이빨 상해."
현민은 네 이빨이 젓가락을 놔주고서야 젓가락을 뒤로 물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담이었지만, 현민은 어렸을 적 멋도 모르고 쇠로 된 식기를 씹었다가 앞니가 나간 적이 있어서 더 조심스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영구치가 아니라 유치여서 천만 다행이었지. 네가 젓가락을 놔주자, 현민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좀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화이트데이.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면서 보낼 수도 있겠지만, 네 말대로 집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보내도 좋을 성싶다. 체육특기생 특성상 현민은 꽤 활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게 활동적인 삶을 선호한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았기에 내심 어딘가 멋진 곳으로 가서 데이트를 하며 보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내년 화이트데이는 고3이니까, 이렇게 마음 편하게 데이트를 갈까 집에서 쉴까 고민할 틈도 없을 테고. 하지만 올해는 아직 놀러나갈 빌미를 잡을 기념일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어린이날, 여름방학, 추석, 크리스마스... 다, 너와 정식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할 그런 나날들이다.
문득 그게 행복해서, 현민은 자기도 모르게 밥을 먹으면서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띄웠다. 오늘따라 쌀알 한 톨까지 맛있는 것 같았다.
"그래, 훈련 끝나면 연락할게. 같이 가자." 하다가 현민은 덧붙였다. "축구부 동기들이 니 마누라랑 싸웠냐더라." 실없는 소리를 하고, 쿡쿡 웃고는 다시 밥을 입안에 밀어넣는다.
서로 마주앉아서 밥을 먹고, 이따금 반찬 한 쪽씩을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빨리도 끝났다. 현민도 당신 못잖은 먹보였기에.
딱딱한 걸 잘못 물어 찌르르 올라오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잘못하면 이가 상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슴없이 이런 장난을 친건 그만큼 너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과 잔소리가 섞인 네 말이 그렇게 듣기 좋았다. 좋아하는 아이에게 일부러 장난을 치고 관심을 끄는 못된 심보를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네가 빨갛게 물드는 이유는 내가 좋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랑은 네 뺨에 열이 오를 때마다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가, 내가 좋기 때문에 빨갛게 물든대- 짓궂은 장난은 여태까지도 많이 쳤다.
"응- 이따 많이 안고 있어야겠다."
훈련 후에 네가 땀냄새를 신경쓰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랑은 네 품에 부빗거리는 걸 좋아했는데, 때때로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네가 너무 좋아서 부리는 애교일 때도 있었고, 부끄러움에 사무쳐서 바르작거리는 것이기도 했으며- 잠시 떨어져있느라 흐릿해진 네 향기나 온기 등을 다시 충전하는 것이기도 했다. 훈련 끝난 후에는 보통 세번째 의미가 제일 컸는데, 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네가 계속 신경쓴다면- 참아야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미리 충전해두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싸울 마누라도 없는 것들이 뭐라냐?'라고 하자~."
쿡쿡 웃는 소리는 두 명의 것이 되었다. 랑은 스스로를 네 마누라라고 칭하는 것에 걸림돌이 없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게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게 드러난다.
"마누라 있다고 하면 나 불러. 안 싸웠다고 꼭 안아줄게!"
-그렇게 끝나버린 점심 식사 후에는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후식 시간이다. 랑은 네 물음에 기다렸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채 홍조가 지워지지 않은 뺨을 하고 현민은 눈을 깜박였다. 말마따나 그는 자신의 체취에 꽤 예민한 편이었다. 운동하고 난 직후에는 더 신경이 쓰였다. 데오도란트를 쓰더라도 흐를 땀은 흐르고, 그렇게 되면 체취가 강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현민은 한동안은 훈련 끝난 직후에는 너를 포옹해주는 데에 조금 소극적이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것도 없어졌다. 네 포옹에 여러 가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안겨올 때의 태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최근 현민에게는 훈련 동안 잠깐의 쉬는 시간에 틈틈이, 훈련이 끝난 직후에 몸에 난 땀을 마르기 전에 후딱 스포츠타올로 닦아내는 버릇이 생겼다. 신경이 쓰이더라도 네가 품에 안겨오는 걸 주저하게 되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사소한 잡설은 뒤로하고- 현민은 밥을 먹다가, 자신이 꺼낸 이야기긴 하지만 새삼스레 자신을 마누라라고 툭 확정해버리는 랑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그... 그러면 되겠네."
애써 태연하게 말은 했으나, 결국 식사를 끝마칠 때쯤에 현민의 양뺨에는 진달래꽃이 한가득 피어나 버리고 말았다. -너도 한 번씩 과시해보는 건 어떨까?
보통 후식을 먹자고 하면 그는 너와 함께 매점에를 가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코스가 조금 달랐다. 매점에 가는 게 아니라 네 손을 잡고 곧장 교실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는 것이다.
"오늘 간식은 내가 준비해왔어."
현민은 그 말이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서, 너한테 특별히 무언가 해주고 싶은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오늘따라 자신이 간식을 준비해오고 싶어서 준비해온 것처럼 들렸으면 했다. 그래서 최대한 무던하게 들리도록 말하려 노력했고,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렇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을 것이, 그 이전부터 이미 다 눈치채지 않았는가. 너도, 그도. 간식을 챙겨온 반합 뚜껑을 열 때까지 그걸 바로 입밖으로 꺼내는 것을 수줍어하고 있을 뿐이다. 현민은 네 손을 잡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게 된, 아직 조금 낯선 2학년 교실 앞에서 멈춰선 현민은 너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과후에는 바로 훈련을 하러 갈테고, 수업시간에 널 안고 있을 수도 없고, 쉬는 시간은 너무 짧다. 남은 건 점심 시간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도 너무 짧은 것 같지만, 훈련하는 동안만 참아낼 만큼 충전하면 된다. 그래도 요즈음에 들어서는 네가 저번들보다 덜 주저하는 것 같아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랑은 좋았다. 너를 잔뜩 느끼면서 동시에 네게 자신을 남기는게 좋았다. 잠시 후면 다가올 후식 시간이 이렇게까지 기대된다. 선물 상자는 원래 열기 직전이 제일 설레고 들뜨는 법이다.
"왜 이렇게 빨개요, 서방님~."
식사가 끝날 때 쯤, 랑은 네 양빰을 보고서 툭 네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까르륵 웃으면서 가볍게 발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조심하고는 했었지만, 네 손도 꼭 잡고 있고- 방금 너를 서방님이라고 칭한게 네게 큰 파문을 일도록 할 것 같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걸음이 들떴다. 랑은 네 손을 잡고서 총총 몇 걸음을 떼다가 지금쯤이면 새빨개졌을까- 하고서 너를 잠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엄청 기대중인걸-"
사탕일까, 아니면 사탕처럼 달콤한 다른 디저트들일까- 뭐든 상관없다. 네가 준비한 간식이라면 맛있게 다 먹을 자신이 있었다.
"얌전히 기다릴게, 다녀와-"
랑은 반 앞의 복도에서 네게 다녀오란 듯이 손을 흔들었다. 교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잠깐 후에도, 똑같이 미소 지으면서 웃고 있을 것이다.
굳이 현민의 얼굴을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잖아도 따뜻한 편이던 그의 손이 갑자기 확 따뜻해졌으니까. 돌아보면 봄인데 홍시가 풍년인 게 아주 볼만하다. 이런저런 봄꽃에 비유하긴 했지만, 역시 그의 가무잡잡한 피부 아래로 올라오는 혈색은 홍시에 빗대는 게 가장 비슷할 것 같다. 여기서 더 진해지면 토마토 정도 되려나. "긋." 덕분에 네 손을 잡고 교실에 돌아가는 현민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현민은 너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는 케익상자보다 조금 작아보이는 상자같은 게 담긴 봉투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 상자 하나를 채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인터넷에서 여자가 화이트데이에 받고 싶어하는 선물을 검색해봤다가 가장 받기 싫은 선물 1위가 사탕이라는 말을 듣고 기가 죽기도 했고, 푸딩은 과하게 익어 굳어버리고, 초콜릿은 녹고, 쿠키반죽은 타버리고... 세 번째의 마카롱 머랭을 실패하고 나서, 나 제과학원 등록할 거야! 하고 울분을 토했다가 옆에서 도와주시던 어머니한테 대입 치르고 나서 배워! 하는 핀잔과 함께 딱밤까지 맞아가며 노력한 끝에 겨우겨우 잘 만들어진 것들로 채운 상자였다.
네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앞서 인터넷에서 봤던 말이 불안했다. 네가 먹을 걸 아주 좋아하는 먹깨비라는 건 알고 있었고, 오늘 간식 준비해왔다는 말에 환해지는 네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 아직 떨치지 못한 불안감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실을 나왔을 때 그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덜어져 있었고, 조금 초조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처음으로 내어놓는 화이트데이 선물을 손에 쥐고 불안해하는 청춘 아닐까.
현민은 남은 손을 네게 내밀었다. 여전히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너와 눈을 마주치면,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초조한 기색이 한결 덜어지는 게 보인다.
"많이 기다렸지, 가자."
옥상에 도착해서 문을 달칵 열면, 옥상 위로 환히 트인 하늘과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한바탕 봄비가 지나간 덕에 따뜻해지나 싶었던 날씨가 조금 차가워졌지만, 춘추복에 외투를 입고 있는 차림이라면 옥상에서 간식시간을 가지기 싫을 정도로 차갑진 않다. 봄비가 끝나고 나면 봄이 찾아온다. 현민은 플라스틱 캐노피 아래에 마련돼 있는 벤치로 너를 이끌었고, 테이블에 반합을 올려둔 뒤 반합을 열어보였다.
그것은 명백히, 화이트데이 선물이었다.
앙증맞은 스푼이 옆에 놓여서 마개 씌워진 유리병에 들어있는 푸딩과 캐러멜 소스,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구워낸 초콜릿 쿠키와 아몬드 쿠키, 초콜릿을 입힌 딸기에, 과일 젤리며, 조각케이크(이건 기성품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금 못생긴 모양으로 울퉁불퉁하게 구워진 마카롱들까지. 서툰 솜씨로나마 잘 만들어진 게 나올 때까지 노력해서, 네게 먹여주고 싶은 것들로 채운 간식 도시락이었다. 가장 커다란 하트 모양 쿠키에는 happy white day라고 하얀 아이싱으로 삐뚤삐뚤하게 쓴 글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쿠키에는, 조그맣게 i love you라고 쓰여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