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년만이 네 인간불신의 벽을 깨고 네 유일한 사랑이 되지 않았는가. 너 역시도 이 소년의 인간불신의 벽을 깨고 그의 유일한 사랑이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크더라도 작더라도 그것은 같은 사랑일 것이다. 그가 온 몸과 온 마음을 다 바쳤듯이 너도 그러했으니까. 사랑이 공정하거나 불공정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특히나 너와 이 소년이 맺은 관계에는 더더욱. 그러니 근심하지 않아도 좋다. 그도 근심하지 않고 있으니까. 마음에 근심이 담길 자리가 있다면 거기에 네 사랑을-너를 향한 사랑과 네가 준 사랑 양쪽 모두- 담기도 바쁘다. 현민은 네가 자신의 품에서 마음껏 울도록 해주었다. 사랑 때문에 온기를 자신의 품에서 찾았으니 슬픔도 자신한테 내려놓았으면 했다. 지금 당장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조금씩 차근차근, 너와 삶의 궤적을 더 겹쳐나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네 마음 깊은 곳에 깔린 자갈들이 발에 밟혀 아플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것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너만큼은 아니라도 그도 꽤 차돌같이 단단히 여문 아이니까. 너에게는 퍽 말랑하긴 하지만, 말랑하다는 말이 연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현민은 네 눈물이 어느 정도 잦아들 즈음 되어서야 너를 품에서 살며시 놓아주었다. 네가 물기어린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볼 때 네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항상 그랬듯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고는 네 마음에서 넘쳐나온 사랑 한 방울을 쪽 하고 입술로 받아냈다. 문득 어느 겨울날 밤 아직 우리가 낯설었을 때 자신이 이랬더니 네가 석고상이라도 된 마냥 소년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게 생각난다.
문득 현민은 간식이 가득 든 반합통을 떠올렸다. 모양이 흐트러질세라 안에서 뒤섞일세라 오늘 학교로 오는 동안 가방을 조심조심 다루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와 아침을 나눠먹고, 오전훈련 가기 전에 잽싸게 사물함에 옮겨담아 놓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너를 향한 마음은, 그것보다 더 오랜 세월, 더 조심스럽게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었다. 힘들었냐고 하면 힘들지 않았다고 대답할 수 없을 만큼은 힘들었다.
자신도 그런데, 너는 자신보다 두어 발짝 앞으로 걸어가면서, 혼자 쓸쓸한 눈안개를 맞으며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 많이 힘들었겠구나. 많이 힘냈구나. 해서, 너를 품에서 놓아주고 네 입맞춤을 받아줄 때에는 너를 눈동자에 가만히 담고 있는 소년의 눈시울 역시 붉어져 있었다.
"나도 많이 사랑해."
너는 자신이 이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지금은 직접 해주지 못하는 말을, 은유적으로 담아서.
"사진은- 찍어줄까?"
현민은 반합통을 바라보았다. 겨우 쿠키 하나가 네 손에 들려있을 뿐, 네가 다시 반합통에 그걸 내려놓으면 반합통을 연 직후와 별다를 것 없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가만, 핸드폰은 다 걷어가지 않았던가? ─네가 사진을 찍거나 아니면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면, 그제서야 현민은 네가 가장 먼저 집어들었던 그 쿠키를 집어들어 네 입에 내밀어줄 것이다. "아아─" 하면서.
이것까지는 물들지 않아도 괜찮은데- 랑은 네가 눈시울을 붉힌 것을 보았다. 눈물도 전염이 된다더니 네게 옮아간 모양이다. 무엇이 옮아갔는지 랑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 말고도, 너에게 해야할 이야기도 들어야할 이야기가 앞으로 많았다.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사랑한다고 표현하는게 우선이었다. 많이 사랑한다고 답해준 너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에 랑은 몇 번 더 네게 입맞추었다. 입술에 맞추고 나서 뺨에 남고, 뺨에 남거든 다시 입술에 쪽 소리를 낸다. 사랑에 빠진 얼굴이나 눈빛은, 네가 랑을 바라볼 때의 것밖에 몰랐지만 지금 랑도 충분히 그랬다. 지금 얼굴을 본다면 랑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응?"
사진을 찍어줄까 물어보니 랑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방금까지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었어서, 속눈썹도 촉촉히 젖어있고 눈망울도 울망지다. 휴대폰은 아침에 다 걷어갈텐데- 꿈뻑거리는 눈이 궁금증을 가득 품고 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게 랑은 얼마나 모범생인지- 네가 카메라를 들고 왔나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무튼 사진 해프닝이 지나고, 랑은 네가 쿠키를 내미는 것에 우물쭈물거렸다. 몸을 조금 뒤로 빼면서 쿠키를 절대 입에 넣을 생각이 없다고 버티는 것 같더니, 너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눈을 질끈 감더니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나쁜짓도 아닌데 나쁜짓하는 것 같은 기분이 완연해서 쿠키를 받아물고도 느릿하게 오물거렸다. 먹깨비가 오래 참았다. 입에 먹을 것이 들어올 때까지 참은 것이다.
와삭와삭 쿠키 먹는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긴다. 눈을 반짝이는 랑은 어서 너도 하나 먹어보라고- 쿠키를 하나 집어서 너와 똑같이 내밀어준다.
어쩌면 이 수업은, 현민이 네게 가르쳐달라 했던 것은, 네가 여태까지 현민에게 가르쳐오고 있었던 것은, 현민과 네가 나누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공부라던가, 함께하는 시간이라던가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너와 그는 서로에게 조금씩 조금씩 감정을 느끼는 법을 가르치고 나누어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알 수 있었다. 네 얼굴에 가득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현민은 느낄 수 있었다.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네 입맞춤을 받았다. 입술과 뺨, 입술을 오가는 가슴에서 넘쳐나온 사랑을 현민은 기꺼이 받아주었다. 아니 세 번째 입맞춤은 그가 먼저 네게 다가온 것 같기까지 했다. 현민은 잠깐 손을 들어 네 뺨을 쓸어보았다. 그때 그의 입에서 사진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어쩌면 지금 네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굳이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현민에게 잊혀지지도 않을 것 같았지만.
이 소년의 삶은, 당신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다.
현민은 손을 뻗어, 아직도 네 눈가에 촉촉히 묻어있는 물기를 마저 닦아주려 했다. 그러다가 당신의 반문에 오히려 응? 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곧 ◑◑ 하고 옆으로 눈을 시선을 피한다. 강아지나 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 때 시선을 이렇게 피하지 않던가? 현민은 주머니를 뒤적여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다시 네게 시선을 맞추며 멋적게 웃었다.
"너한테만 말해주는 건데... 나 핸드폰 거두어갈 때 공기계 내거든."
아르바이트라던가, 형에게서의 연락이라던가 현민의 삶에는 사소한 돌발변수가 조금씩 있었다. 그 외에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잠은 안 올 때면 여러 가지로 요긴하게 써먹곤 했다. 이쯤에서 다시 말하지만, 현민은 교칙에 대해서는 본인 멋대로의 합리주의에 입각해, 범죄 안 저지르고 소동 안 일으키고 다른 사람 학교생활 방해만 안 하면 되지- 하는 입장이다.
뺨에 닿은 네 손도 따뜻했고, 랑의 뺨도 따뜻했다. 랑은 뺨 위로 네 손이 닿았을 때 뺨을 꾹 디밀었다. 네 손길을 좋아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았고, 손을 잡아주는 것도 좋았고, 어깨를 안아주는 것도 좋았고- 뺨을 마음껏 주물거리는 것도 좋아한다. 뺨을 쓸고지나갈 때 너를 깜빡깜빡 올려다본 것은, 더 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네게 애정어린 행동을 보이는 방법을 이제는 알고 있다. 방금도 세번 연달아 입맞추었다. 그때, 네가 뺨에 입 맞추었던 것을 모른 척하고 말았을 때-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랑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너 그러다 걸리면 어쩌려고-"
시선을 피하고 돌아왔을 때 랑의 표정은 궁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너를 빠안히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어물쩍 시선을 피하던 때에 이미 네가 폰을 내지 않았구나-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는 랑이 네가 휴대폰을 안 냈다는 걸 모를 정도면 정말 필요할 때만 휴대폰을 사용했다는 거라는 것이기에 더 잔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네가 멋적게 웃으며 이실직고를 끝낼 때까지는 계속 가늘게 뜨고서 보고 있었다.
"오늘은 공범이니까."
곧 표정은 풀어지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사진은 찍어야겠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선물을 어떻게 사진이라는 간단한 흔적도 못남기고 홀랑 먹어치울 수 있을런지, 먹깨비도 한 수 접었다. 랑은 네가 잠금을 풀고 폰을 넘겨준다면, 생각보다 엄청 열심히 사진을 찍을 것이다. 위에서 정면으로도 찍어보고, 살짝 각도를 내려 옆에서도 찍어보고, 가로로 담아서도 찍어보고, 그러다가는 너도 화면에 담아보더니 까르륵 웃는다.
"현민아, 브이~."
네 휴대폰을 쥐고 있는 너머로 보이는 랑의 표정이 개구지게 밝았다. 안 찍어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찍으면 안 되느냐고 앙탈부리는 눈길은 못 피할 성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