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사며 군것질거리를 사기엔 우리는 너무 늦어버렸다. 중의적인 말이다. 이 도시에서 그나마 즐길 수 있는 풋풋하고 어린 시기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순간도. 놓치고 늦어버린 지 오래다. 페로사의 눈에 회한이 걸렸을 때, 에만의 눈에는 짧게나마 조소가 스쳤다. 새삼 늦었다는 사실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날 적부터 사람답게 살 수 있음을 포기해야 했는데 어떻게 늦고 빠름을 정할 수 있으랴. 아마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에만은 창백한 연기를 입에서 뭉글뭉글 쏟아지게 두려다, 이내 날숨과 함께 뱉어버렸다.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차라리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저건 새일까, 쥐일까? 박쥐는 어디에도 낄 수 없었듯 에만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 그림자 속에서 우위에 있음은 확실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천사처럼 웃을 여유가 있었다.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손에 쥘 수 있게끔 끌고 오는 재주가 에만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에만은 시선을 맞추자 들었던 눈동자를 마찬가지로 맞췄다. 바다처럼, 하늘처럼 푸르른 눈을 마주했다.
에만이 손을 뻗고자 하는 여성이 침묵 끝에 입을 연다. 인간이라기엔 비정상적으로 날카로운 치열 사이로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개가 새어 나왔다. 아무리 향으로 가려본다 한들 그 안의 피비린내를 에만이 모를까. 말라붙기 시작해 점점 더 그 비린내가 강해지는 걸 모른다고 하기엔 이 도시에 너무 깊이 발 들였고, 당신에게도 너무 가까이 와버렸다. 죄악을 한가득 머금은, 인간이라기엔 괴물에 가까운 미소에 에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고민하듯,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듯 수줍게 시선을 내리깔다 들어 올린다.
"나는..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원하는 건 아주 적어."
어쩌면 가장 클지도 모르는 것. 에만은 잠시 눈을 흘겼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 라고 말하기엔 조금의 욕심이 더 있었고, 당신을 휘두르고 싶어. 라고 말하기엔 그 욕심이 더 심하다. 자각하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기에, 짧은 침묵만 오갈 뿐이다.
도톰한 입술이 다시금 가까이 다가온다. 그때와도 같은 감각이다. 숨결이 손에 잡힐 듯한 거리. 인간이 아닌 것 같은 피비린내와 날선 치열을 뒤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냐는 듯. 그리고 짧게 입을 맞췄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그때처럼, 아이가 부모에게 입을 맞추듯 가볍게 말랑한 감촉만 남겼다. 에만은 고개를 잠깐 뒤로 물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에게도 피 냄새가 나."
에만의 손에서 힘이 풀린다.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틈새에 걸쳐있던 반쯤 피운 연초가 바닥에 허망하게 떨어진다. 천천히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가볍게 양손으로 감싸쥐려 했다.
"나도 그런데."
우린 닮은 점이 참 많은 것 같아. 에만은 다시금 말랑한 감촉을 입술 위로 남겼다. 짧지만은 않은, 버드키스라고 하기엔 긴 무언가. 탐하지 아니하고 고작 입술 겹치는 것을 오랜 시간 하였을 뿐인데도, 욕망을 담되 담지 않았다. 지나치게 순수하고, 그로 인해 안달이 나게끔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다만 이로 인하여 확실시되었을 것이다. 이 아이의 입술에서도 피비린내가 난다. 무엇을 잡아먹었을지, 아니면 물어뜯었을지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술을 떼며 바스스 웃었다.
한 발짝 내닿아 입술 끝에 톡 하고 달라붙은 온기가, 마치 바닥에 고여 있던 기름에 튄 한 점 불똥과도 같이 그녀에게 튀었다. 기름과 같이 바닥에 고여있던 탐욕에 후르르 불길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자신을 치우고 있던 비린내가 숨막히는 장미향에 흐려져 있는 사이에 당신의 냄새가 코끝에 걸린다. 피비린내를 전혀 떠올릴 수 없지만, 피비린내와 마찬가지인 또다른 냄새를 싣고. 무게감이라곤 전혀 없는 버드키스일 뿐인데, 마치 불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두 번째의 키스는 당신이 다가와서 한 것인지, 그녀가 당신에게 다가온 것인지 모르게 되었다. 불타지 말았으면 했던 것들이 불길에 휩쓸려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다. 아찔하게 기울어지고,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며칠 전의 작별 때, 어딘가로 미세하게 기운 공전축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저 서로의 입술이 마주닿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내가," 입술이 떨어져나가고, 당신의 입가에서 싫지 않다는 말이 흘러나올 때 여인은 허탈하게 말했다. 원하는 건 아주 적다더니. "탐나는구나."
마치 이제야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한 새삼스러운 말이다. 무언가를 탐하고 무언가에 탐해지기엔, 너무도 결함투성이의 삶인데. 결함을 메꾸느라 급급하게 꾸며내어 덮어둔 것들도 이제 모두 불길에 이들이들 휘말려 사라져가고 있는데. 페로사는 웃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사가 저렇게 말한다고 거창한 데 데려갈 필요도 없어. 에만이 가려고 했던 곳에 데려다가 무릎베개를 시키고 같이 잠드는 것만으로도 페로사는 좋아할 테니. 낮잠 좀 잤다가 가볍게 저녁 외출이라던가. 예를 들어 에만이 저녁 먹겠다고 인스턴트를 뒤적이는 걸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페로사가 에만 데리고 마트에서 장을 봐와서 저녁밥을 해먹인다던가.. (일상마)
구글에 abandoned house inside로 검색하니까 이것저것 많이 나오네. https://www.google.com/search?q=abandoned+house+inside&tbm=isch&ved=2ahUKEwj2l7-_usr2AhXiz4sBHR0PCCkQ2-cCegQIABAA&oq=abandoned+house&gs_lcp=CgNpbWcQARgBMgcIIxDvAxAnMgUIABCABDIGCAAQBxAeMgYIABAHEB4yBggAEAcQHjIGCAAQBxAeMgYIABAHEB4yBggAEAcQHjIGCAAQBxAeMgYIABAHEB5QAFgAYKAOaABwAHgAgAF2iAF2kgEDMC4xmAEAqgELZ3dzLXdpei1pbWfAAQE&sclient=img&ei=hsAxYva8DOKfr7wPnZ6gyAI&bih=950&biw=1920&rlz=1C1CHZL_koKR712KR712
환락의 도시에서 입맞춤은 흔하지만 순수한 입맞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누군가의 생명을 뺏어놓고 순수하게 입 맞추는 것은 더욱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게감이라곤 일절 없으며, 피비린내를 머금고, 백합 한 송이를 입술에 얹은 듯 순수한 입맞춤. 에만에게 있어 가벼운 것이었건만 눈앞의 여성은 흔들리고 무너진 듯싶다. 입술을 떼고 뺨을 천천히 쓸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지만 서늘하다. 꼭 모든 것을 쥐어봤으니 수틀리면 뒤엎어 깨트릴 것만 같다. 에만은 페로사가 허탈하게 말할 적,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엄지로 뺨을 곱게 눌러본다. 생경한 눈빛이었다.
"조금 달라."
피곤한 탓이다. 피곤한 탓에 이 작은 천사는 제정신보다 살짝 어긋난 상태였다. 평소에도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조금 더 미쳐있었다. 작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게… 탐나는 걸까. 아니야. 그랬더라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탐나는 건 다 부서졌거든. 내 손에. 에만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엄지로 한 번 볼을 쓸어 보이고 천천히 떨어지는 손길이 자못 서늘했지만, 페로사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깊은 탄식과 회한이 담겨있었다. 어쩌면 지독한 한이 담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만은 이미 바닥에 굴러 꺼져버린 연초를 발로 비비듯 밟았다.
"탐내면 안 되는 이유가 뭐야..?"
역시 부서지니까 그런 걸까. 자못 쓸쓸하게 중얼거리다 작게 실소했다. 힘없는 웃음이 흘렀다. 나도 참 피곤한가 봐, 그래서는 안 되는데. 천천히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넘기며 숨을 고른다. 전부 피곤해서 그렇다.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에만이 겨우 정신을 차리듯 속삭였다.
"난 또.. 페로사.. 여기 사람들은.. 전부 그런 걸. 당신도 다를 바 없는 바빌론의 사람인 거야.."
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가면을 쓰지 않고 손에 툭 떨어트리고 그대로 밟아 깨트렸다. 순간의 일이었다.
"괜찮은 곳은 몰라. 조용한 곳밖에 알지 못해. 그래도.. 따라올 거야?"
담배를 파는 가게니 뭐니 했는데, 훨씬 무드 없는 데이트네. 에만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탐낼 것들을 잃어버린 아이와, 탐내는 마음을 잊어버린 여인이 있었다. 불타지 말았으면 했던 것들이 불길에 휩쓸려 사라지자, 비어 있는 것들이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뺨에 와닿는 손길이 서늘했다. 손끝에 닿는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한 여인의 뺨이 따스했다. 그녀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뺨에 서린 온기는 당신을 다시 한 번 더, 하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맘껏 움켜보렴.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졌는데 더 부서질 데가 어딨다고 두려워할까.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온기와는 달리 뭔가 조금 어긋난 것 같다, 고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에게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 자신이 어긋나버린 것 같다고 새삼스레 느끼는 것이다. 아까 자신이 저지른, 자신이 평범한 사람과는 한참을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그 일을 포함해서, 그 일을 준비하느라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서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고, 하필이면 그 일 직후에 당신을 마주친 것과, 당신과 함께 나누는 낯선 향기, 뭐라 형용하지 못할 서늘함이 어려 있는 당신의 손길, 그리고, 이게 탐나는 것은 아니라는 당신의 말까지. 어쩌면 지금 탐을 내는 마음을 품은 건 당신이 아니라 그저 자신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씁쓸했다. 기적적으로 서로의 빈 부분이 서로와 꼭 같은 줄로만 알았는데 군데군데 어긋난 틈새들이 새삼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바빌론 사람. 당신이 웃으며 꺼내는 말이 그걸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입을 맞출 때 당신의 회한이 그녀의 입가에 옮아간 걸까.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꼬마야... 나는 사람조차도 되지 못해."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조금 놀란 표정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가면을 땅바닥에 내던지는 소리와, 그게 당신의 발끝에서 짓이겨지는 소리. 그녀는 부서진 가면과 당신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얼굴에 한결 가벼운 미소를 띄었다.
"이 도시에서 조용한 곳이면, 아주 괜찮은 곳이잖아?"
그래, 됐어. 네가 그러겠다면... 골치아픈 자책 따위, 잠깐 미뤄두자.
"네가 나를 데려갈 거면."
여인은 말했다. 조금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고 내 모가지에 남아있는 목줄, 내 몸 전체에 얽혀있는 이 개줄을 너와 같이 있으면 조금 잊을 수 있겠다고.
애초에 당신의 손길이 닿지 않았더라도 부서져있기에, 이젠 더 이상 부숴도 의미가 없는 부숴진 여인. 그녀는 당신에게 자신의 하루를 맡기기로 했다. 같이 가자면 같이 갈 것이요, 꺼지라면 물러나겠다.
"후회하지 마.. 나는 욕심이 많거든." "오늘 내게 시간을 내어준댔으니까.. 이제 내 곁에 떨어져서는 안 돼.." "가면이 없는 나는.. 나를 노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쫓기고 말 거야. 혼자 있는 낮은 상처가 나서 아파. 밤이 되면 벌어져서 피가 뚝뚝 흐르겠지. 아침은 영영 찾아오지 않을 거야." "네가 떠나면 난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건 네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거야. 오늘은 내 곁에 있어."
응, 생활패턴 항상성 유지는 중요하지... 잘 생각했어. 응, 이제 같이 자려구. 오늘도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잠... 문제는 이제 누워볼 생각이긴 한데, 잠이 다 깨서 다시 잠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 그래도 에만주랑 에만 생각하면서, 일단 누워서 눈 감아보려구. 에만주도 고생 많았어. 푹 쉬고, 잘 자. 😊 (쪽)
모래알을 움켜쥐면 다시 부서질 일은 없다. 그렇지만 손아귀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흘러내리고 떨어져 백사장 위로 쌓여버리면 다시는 그 모래알을 완벽하게, 온전히,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쥘 수 없다. 에만은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쥐면 전부 부서지고 망가진다. 인생이 그랬고, 가족이 그랬으며, 그 이후의 삶도 그랬다. 모조리 부서지고 망가지며 에만을 떠났다.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유혹하는 듯 따스한 온기를 한 담아 쓸어내며 멈춘 것은 그 탓이다.
애당초 이건 탐욕과 달랐다. 직고하기 부끄러운 일이나 조금 더 짙고 깊다. 부끄러울 것 하나 없는 이 도시의 사람인데도 드러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아 감추게 만든다. 이것이 무엇인지 감히 정의를 내릴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지켜보게만 된다. 명칭을 정하기에는 거창한 것이요, 그렇다고 입다물기엔 안달이 나는 감정을 도통 모른다. 때문에 에만은 침묵한다.
쓴 미소를 마주하며 에만이 가면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다. 얼굴을 가리던 가면을 바닥에 떨군 척,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발 내디뎌 부서지게끔. 금이 절묘하게 갔기 때문인지 발이 누를 적 두 동강이 나더니 재주 좋게 파사삭 소리를 내며 여러 조각이 나버린다. 마치 에만의 자아와도 같다.
"사람이든 아니든.. 후회하지 마."
나는 욕심이 아주 많거든. 새하얀 눈동자가 페로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용한 곳은 괜찮다며 미소를 그리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물러난 만큼, 다시 가까이.
"오늘 내게 시간을 내어준 댔으니까.. 이제 내 곁에 떨어져서는 안 돼.."
손을 뻗어 당신의 가슴팍 위, 쇄골에 얹고 천천히 몸을 기울이려 했다. 눈을 가련하게 내리깔며 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가면이 없는 나는.. 나를 노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쫓기고 말 거야.. 혼자 있게 되는 낮은.. 상처가 나서 아플 거야. 밤이 되면 그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뚝뚝 흐르겠지.. 그리고 아침은 영영 찾아오지 않을 거야."
가면을 깨버린 것은 이 도시로 치면 무언의 협박이었으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는 신뢰의 표시였다. 당신의 무른 행동이 날 죽일 거야. 뺨을 툭 기댔다 느릿하게 떼며 스치듯 지나가려 했다. 어서 따라오라는 듯.
"네가 떠나면 난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건 네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거야. 협박일지도 몰라.. 오늘은 내 곁에 있어줘."
그렇게 에만은 골목 깊숙하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체가 있었어야 할 깔끔한 장소를 지나고, 그 안의 골목에서 또 세부적인 곳으로 들어간다. 이내 반 년 전 뉴 고모라의 지하를 지배하던 누군가 목을 매달고 죽었다는 소문이 도는 허름하고 낡아빠진, 황폐한 도시의 잔해로 들어갔다. 아마 이곳은, 한때 무엇보다 찬란했거나, 지금의 엘리시온이 있는 호텔에 준하는 곳이었던 것 같다. 이젠 갱이 한 번 지배해 보려고 방탕하게 휩쓸었다 피바다가 되고, 집 없는 자들이 잠깐씩 묵고 가려다 또 죽임 당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을씨년스럽고 허름하지만 방마다 그 흔적이 남아있다. 어린 자녀와 장성한 자녀가 각 하나씩 있었는지 어느 방에는 갱단이 심심풀이 삼아 쏟은 총알 세례에 솜이 죄 터져 속을 드러내는 인형이 있었고, 어느 방에는 깨진 모니터가 여러 대 있었다. 하나씩 지나치며 에만은 그나마 온전한 문을 열었다.
햇빛이 찬란하게 안을 비추는 곳이 있다. 전 지배자가 여러 사람을 끼고 놀았을, 총알이 박힌 고급 소파, 고작 반 년 사이 피가 굳고 썩은 뒤, 마침내 짓밟혀 가루가 되어 희미한 흔적만 남긴 러그와 카펫, 박살 나 한구석에 치운 테이블, 창문 가까이로 누군가 삶을 비관하며 매달렸을 매듭진 밧줄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유리가 반쯤 깨진 진열대에는 분명 비쌌겠지만 이젠 깨져 내용물도 남지 않은 술병과 누군가 구비해둔 과자 따위가 들어있다. 먼지가 햇빛을 타고 흐르는 것이 보이고, 가장 환한 빛은 안락해 보이는 침대를 비춘다. 그나마 신경을 썼는지 침대만은 새 커버다.
"조용하지.. 아무도 안 올 테니까.. 편히 있어."
에만은 페로사를 돌아보며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 작은 여우는 이 자리에 앉는 것이 익숙해 보인다. ..에만으로 살면서 처음 얻은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이내 작게 흥얼거렸다. my bitterish, very bitterish home.. 본디 my sweet home일 텐데도. 이곳도 여우에게 안식처는 못 되는 것 같다.
페로사: 074 여행해본 나라는? "다 기억하진 못해." "바텐더 일을 시작하고 나선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을 많이 찾네."
232 히어로or빌런 "아. 어느 쪽도 아냐. 난 평범한 바텐더야."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줘."
323 연상과 연하 중 더 편하게 대하는 쪽은? "어느 쪽이건 괜찮아. 신사적인 사람이기만 하다면."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는 연하가 좀 더 많은 편이네. 뭐.. 애초에 내가 발 담근 판이 다들 평균 연령대가 어린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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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면 안 돼!" 페로사(동료가 어디선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뭐야, 누가 엘리시온에서 싸움박질을 하려는 거야? 페로사(동료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싸우다니 무슨 소리야. 손님한테 나가는 길을 정중히 안내해드리는 것뿐이야. 페로사(???): ...자기. 물러서 있어.
"배우고 싶은 외국어 있어?" 페로사: 지금으로선 딱히? 페로사: 아시아권 언어 하나를 배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있지만, 생각일 뿐이야.
"샤워 시간은 어느 정도?" 페로사: 아, 머리카락 때문에 말이지. 좀 오래 잡아먹어. 페로사: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지?
"후회라면... 어떤 후회?"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런데 동시에 낯익기도 했다.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무언가 많이 잘못되고, 비틀린 것 같다. 자신이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긋나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싫지는 않았다. 한 칸 비뚤어지게 다물던 턱을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맞추어 다문 것만 같은 묘한 안도감이 있었다. 그래서, 몸을 기울여오는 당신을 품에 받아안으며 페로사는 대답했다. "됐어, 상관없어. 네가 내 후회를 잊게 해준다면."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린다. 당신이 손을 얹으며 기대어오자 당신과 옷가지 위로 끼이는 하네스의 감촉이 껄끄럽다. 적당한 때에 벗어야겠다, 하고 페로사는 생각했다.
품에 푹 기대면, 따스한 온기가 치밀어온다. 몸을 묶고 있는 하네스 사이로 느껴지는, 당신은 편안히 받아안아주는 그녀의 근육으로 들어찬 살갗에서 흐릿한 피냄새를 뚫고 코끝에 걸리는 시트러스향, 데킬라 향기... 그리고 여인의 살냄새. 아직도 나는 흐릿한 피냄새는 그녀가 당신과 같은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으되, 그럼에도 아직도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여인의 냄새는 당신이 누구의 품에 기대어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품에 기댄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에게 다양한 형태로 원해져본 적은 많았으나, 벌써부터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의 빛나는 것처럼 투명하게 하얀 눈동자가 그런 순간들을 덧칠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하루를 부스스하게 요구해오는 당신의 모습에, 뭐라 딱 꼬집어말할 수 없는 낯선 충족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싫지 않다. 떨어져서는 안돼, 하는 순진무구한 욕심에, 페로사는 대답 대신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뉴 고모라의 뒷골목에서 보기에는 퍽 낯선 장면이었다.
"욕심이 많네." 상처도, 밤도 자신에게 기대어오는 당신의 말에, 페로사는 푸르른 눈으로 자신의 품에 기댄 당신 옅게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의 상처를 핥아주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외로워하는 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도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 익숙하던 일들이 조금 낯선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페로사는 그것이─ "싫지 않아." 그녀는 당신의 어깨를 놓아주고 당신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한때 뉴 고모라의 중심가로 통했던 곳이 있다. 화이트 나이트 호텔이 있는 체스보드 광장에 비해서 대단히 구석진 곳에 있었지만, 한때는 이 곳이 뉴 고모라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한 군데였던 곳이라는 것을 페로사는 떠올렸다. 찬란한 흔적만 남긴 채 옛날 사진처럼 을씨년스레 쇠락해버린 풍경들을 페로사는 가로질렀다. 당신은 이 곳을 거처로 삼고 있는 걸까.
페로사의 눈이 술병을 한 번 바라보다 저런 아까울 데가 있나 하듯 눈살을 찌푸렸다가, 그 옆에 구비되어 있는 과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항상 지내는 건 아니지?" 가벼운 질문과 함께 그녀는 당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제대로 쓰인 흔적이 있는 것이라곤 침대뿐이다. 침대 머리맡에 대충 코트를 얹어두고는, 그녀는 찰칵찰칵 하고 몸에 채워져있던 하네스를 벗어내리기 시작했다. 벨트가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생소한 느낌이다. 그게 벗겨져봤자 그 너머에 남는 것은 단순히 셔츠에 바지 차림인데. "─피곤하면, 지금 여기서 잠깐 눈 좀 붙였다가 내 집에 갈래?"
비틀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후회해서는 안 된다.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위험한 일을 하다 온 바텐더를 모른척하며 함께하는 것도, 대체 뭘 하다 온 건지 피를 묻혀 돌아온 아이에게 삼켜질 듯한 것도. 에만은 품에 기대며 이 어긋난 만남에 대해 생각했다. 손 뻗으면 쥘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잘 안된다. 대체 이 감정이 뭔지도 모르겠고, 안다고 해도 인정할 수 있을지 막상 겁이 났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도시의 그림자가 두려워하는 것이라. 역설적인 자신이 우스웠는지 속으로 차게 웃었다.
품에 기댄 에만은 차갑다. 성격이 아닌 체온을 일컫는 말이다. 페로사의 품에 온전히 기댈 적, 따스한 몸에 한기가 스몄다. 마치 몸을 조이는 하네스를 처음 착용할 적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과도 같았다. 사람이라기엔 눈사람에 가깝고, 스네구로치카와도 같았다. 조금의 온기가 이 몸을 흩어지게 만들고, 끝내 연기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에만은 사라지지 않고 눈을 잠깐 감았다. 흐릿한 피 냄새가 났지만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그것이 어찌나 부럽던지. 아무리 포근한 냄새가 난다 해도 자신은 자신으로 남을 수가 없는데. 그렇지만 이 온기와 페로사라는 사람에게서만 나는 이 냄새가 자신을 굳게 남게끔 하는 착각이 든다.
"..나는 욕심이 많은 이 도시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야."
그렇게 에만은 안식처로 떠났다. 혼자가 아닌, 처음으로 누군가를 데리고. 쇠락, 그리고 몰락한 현장이었다. 고작 반 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 폐병원이나 폐교와 같은 오래된 묵은 때와 낡아빠진 음산함으로 비롯되는 공포는 없었다. 그저 지나치게 조용하고, 벽에 이따금 튄 피의 흔적이나 구석에 모아둔 빈 탄피, 빈 방 속의 흔적 같은 것이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다른 공포를 심었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이 제법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 작은 아이가 있다. 이 장소가 죽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찾지 않는 것이라면 횡재한 것이나, 이 장소를 죽여서라도 지킨 사람이 아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어느 쪽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으니 상상은 자유다. 침대는 답지 않게 푹신하고, 베개는 새것이다. 피가 아직 지워지지 않고 스민 가구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침대는 누가 쓰긴 했어도 아주 상태가 좋은 것이다. 에만이 고개를 돌려 페로사를 쳐다봤다.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있어.. 여기는 밤에도 아주 조용하고.. 안전하고.. 눈을 붙이고 싶을 때면 여기서 자고 가거든.."
과연 안전할지는.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에만은 하네스를 벗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셔츠, 그다음은 하네스, 어째 밖에서 볼 때마다 이 여인은.. 에만의 생각이 멈췄다. 눈이 둥글게 뜨이며 눈만 도르륵 굴러간다.
"..네 집..?"
누군가의 집. 앨리스도 친구의 집에 잘 가지 않는데, 에만이라고 갈까? 잠시 경계하듯 둥글게 뜨인 눈이 가늘어진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집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게 된 지 오래인데도, 당신의 집은 어쩐지 안락한 발음이다. 에만은 잠깐 고민하다, 그 이전의 문장을 떠올렸다. 눈을 붙이면 많은 것이 사라진다. 집에 가자고 해놓고 자신을 버리고 가버리면 어쩌지, 상반된 생각은 피해 망상이다. 장례식 예절이니 뭐니 꼰대들 말 싸가지 하고는.. 피곤하지? 한숨 자렴, 미카엘. 일단 집에 가서 기다리면 네 아버지도 곧 오실 거야.
"잠깐 눈을 붙이면.. 떠날 것 같아."
에만은 천천히 손을 뻗는다. 셔츠 자락을 잡기도 애매해 어딜 잡아야 할지 머뭇거리다 당신의 새끼손가락을 감싸 쥔다.
에만: 249 욕구를 잘 참나요? > "..잘 참아." "나는 인내심이 아주 깊거든." "...아마도."
012 혈액형성격론, 별자리별 성격 같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 "안 믿어. 그런 거.. 비효율적이야."
339 기습적으로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 (에만은 표정을 찡그렸다)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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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어떻게 할래?" 에만: 아. 조졌다.. 에만: 출석 안 해서 F라고..? 에만: ...출석 했는데.. 교수님께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메일이라도 보내봐야지..
"용건이 있는데, 시간 있어?" 에만: 있어도.. 안 내주겠지. (의뢰인이 사적인 용건을 언급할 경우.) 에만: ..무얼 바라? (의뢰인이 공적인 용건을 언급할 경우) 에만: 응? 미안! 교수님이 부르셔서.. 그래도 디엠 하면 들어줄 수 있으니까 연락해!(앨리스의 모습) 에만: 없는 거 알면서 시비를 털어..(용왕)(용왕: 싸~가지 없는 쉐리...) 에만: ...네게 줄 시간은 이 우주만큼 많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
버려진 안식처. 치워지지 않은 채로, 황폐하고 조용한. 저 피들은 이 곳을 남긴 이들의 것일까, 이 곳을 빼앗긴 이들의 것일까... 혹은 이 곳을 빼앗거나 되찾거나 멋모르고 헤매어들어온 이들의 것일까. 묻지 않는다. 페로사는 거기까지 캐묻고 싶지 않았다. 본디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녀 역시도 반 년 전에 있었던 일들은 딱히 떠올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지금 당신과 자신이 이 곳에 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기로 했다. 그래서 당신의 안전하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노라면, 자신이 이 집의 이 침대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칠지에 대한 방법이 잠깐 동안에도 십여 가지는 간단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귀가 맛이 갔거나 무언가 착각했거나 못 써먹을 정도로 늙어버린 게 아니라면, 딱히 이 집에 별다른 장치가 되어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확실히 조용하긴 조용하네."
페로사는 침대에 앉은 채로 한쪽 다리를 들어, 허벅지를 꽉 조이고 있던 하네스를 끌러 풀어냈다. 나머지 다리를 들어 반대쪽도 풀어내자, 그녀의 몸에서 하네스가 전부 떨어져나왔다. 옷에 몇 군데 구겨진 주름이 남았을 뿐, 그녀는 평소의 그녀다운 평범한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 되었다. 흡사 케블러 벨트 몇 개를 기괴하게 뭉쳐놓은 것 같은 하네스 뭉치를 아까 올려둔 코트 위에 올려두고, 페로사는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로 양팔을 쭉 뻗어 으으으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네 집? 하는 방문에 기지개를 풀며 당신에게로 시선을 돌려 푸르른 눈을 맞추어온다. "그래, 내 집. 그렇게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말야." 하고 페로사는 버려진 안식처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화로웠을 정경을 돌아보았다.
새끼손가락을 쥐어오는 당신의 손길에 페로사는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대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 새삼 방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눈이 부시기라도 했던 걸까? 눈을 감고, 입술을 얇게 벌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다기보단 숨을 고르는 것 같은 호흡. 그리고 눈을 다시 뜨고는 당신을 보며 웃는다. 당신에게 익숙한 미소를. "그건 걱정 마... 난 버리는 쪽이 아니라, 버림받는 쪽이니까." 그녀의 손이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아왔다.
그러다 그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반대쪽 손을 뻗어서 당신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긴다. "그러면 이렇게 해." 그녀가 어깨를 잡아당기는 대로 딸려가면, 당신의 몸이 옆으로 뉘어져서 그녀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좀 자고 가자고 했던가... 그래, 그래도 상관없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침대에 있는 사람을 해치는 방법들 중에서, 그 사람과 자신이 함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