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여인은 고개를 푹 떨군다. "그렇지만 꼬맹아, 내 사랑은 널 다치게 할 거야..." 쏟아지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린다. 머리카락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게 하나 굴러떨어진다. 목소리가 떨린다. "괴물의 사랑 같은 걸 누군가한테 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페로사의 오늘 풀 해시는 자캐가_겪은_최악의_경험 "하하하... 글쎄. 최악이 아닌 걸 세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최악의 어린 시절.. 최악의 성장기... 최악의 성년기. 이제는 그 최악의 과거로부터 도망치려고, 최악의 인생을 살고 있네." "누가, 제발 나를 구해줘..."
에만은 독심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페로사의 속을 완벽하게 읽어볼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은 눈빛과 몸짓, 어조와 시선으로 지금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초조한 손짓도, 굳어버린 표정도. 많이 봐왔고 많이 만들어본 모습이기 때문에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익숙하다. 하네스가 목줄이라도 된 것마냥 벗어내려 안달이 난 몸짓은 매무새를 고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마 마음을 진정시키려 한 행동 같았다. 에만은 가면 속에서 흥미로운지 눈웃음을 친다.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는 안다. 하지만 에만이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 도시에서 사람 죽이는 일이 대수라고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쩔쩔매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처럼 정체가 들키면 곤란한 입장이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고작 이런 무방비한 꼬마에게도 숨길 정도인 걸까? 들켜봤자 죽였다고 말하고 일상을 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이 도시에 섞이고 싶지 않아 발악하는 것일까. 에만은 굳이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골목 안으로 피비린내는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코 끝으로 걸리는 미묘한 철 같은 서늘한 비린내는 분명 피 냄새다. 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 에만은 곁눈질로 쓰레기통을 한 번 쳐다보고, 페로사를 쳐다보다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봐야지. 그 이유는 순전히 지금은 피곤하지만, 일단 재밌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정쩡한 미소를 못 본 척하며 화제에 순순히 응했다. 앞서 서술하였듯 피곤하기 때문이다. 휴식처. 참 우스운 얘기다. 사람을 숨길 것이면 차라리 사람 사이에 숨는 것이 낫지, 어둠 속이나 다름없는 이런 뒷골목 근처에 안전한 곳이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에만은 손을 천천히 앞으로 모은다. 가면을 벗기 위함이다. 가면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이 제일 안전할 때가 있거든..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고.."
여기는 너무 시끄러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인 에만은 후드의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Malice Rose. 처음 보는 상표의 담뱃갑은 검붉은 장미가 새겨져있다. 저번에 피울 때는 이게 아니었는데. 금세 취향이 바뀐 건지, 아니면 선물 받은 건지, 그마저도 아니면 실제로 피우는 것이 이건지 알 수 없다. 툭 손목을 흔들자 한 개비가 털리듯 나온다. 검은 담뱃대와 어두운 선홍색 필터. 에만은 갑을 입가로 가져다 대 하나를 입에 물더니 손목을 터는 행위를 반복했다.
"어차피.. 나도 한 대 태울 생각이었어."
이번엔 상황이 반대인 것 같다. 에만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조적인 웃음에 부스스 웃었다. "다음엔... 둘 다 없을지도 몰라." 하고는 한 걸음 페로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방비하고, 지나치게 순진했다. 아까 전의 표정을 다 봤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속이 좋은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지도 모를 지경이다. 에만은 입에 문 것 자세 그대로, 손만 들어 손가락 사이에 궐련을 끼웠다. 그리고 빛이 눈에 익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짧은 발돋움도 같이.
물론 그녀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당신이 고작 술 한 잔보다 훨씬 거창한 용무가 있는 손님들을 받는 사람이고, 업계에서는 유명해 누군가가 저격수를 고용해 노려올 정도까지, 당신이 바빌론 시티의 그늘 속에서는 거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가슴으로는, 당신은 그저 외로이 떨어져 누군가와 함께 술 한 잔을 나눌 시간을 원하는 손님이었으며, 또한 애껏 힘들여 잠재웠다고 생각했던 탐욕을 자기도 모르게 동해버리게 만든, 무엇이라 한 마디로 규정하지 못할 수수께끼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처지로는 넘볼 수도 없고 넘봐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무엇이 자신의 탐욕을 동하게 만들었는지 당신과 함께 알아가는 것 같은 호사는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당신에게 좋은 바텐더로 남았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아니 최소한, 자신의 처지를 자신에게 가장 확실히 실감시켜 주는 끔찍한 행위를 하고 난 모습만큼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다는 말에 애써 태연하게 "내가 방해했어?" 하고 말하는 모습도 당신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구멍을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 당신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받아드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래서, 당신이 부주의하게도- 어쩌면 의도가 다분하게도 한 발짝을 내딛어오는 순간, 페로사가 애써 얼굴에 감은 자조적인 미소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데킬라 냄새는 어디로 씻겨가버리고, 파르르 발버둥치는 시트러스향 사이로 혈향이 조금 더 분명해진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내비치고 있는 죄의식과 공포는, 단지 당신에 대해 가슴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미지 때문도 아니었고, 이 도시에 섞이고 싶지 않아하는 이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가 여기기에 이 도시에서마저 섞이지 못하게 될 짓을 저지른 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잠깐 이 상황을 제쳐두고 이 도시의 심연으로 들어가면 그녀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자들도 있다. 탐욕스런 아귀같은 작자들도 있고, 미식가라도 되는 마냥 사람과 부위를 골라서 우아하게 냅킨을 두르고 품평을 하는 작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광기의 도시의 그늘에 잠식될 대로 잠식되어 뒤틀려버린 자들의 말로이다. 그런 극단의 말로에나 치달아 도달할 끔찍한 그것을, 그녀는 저주받은 본성처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앞서 말한 뒤틀려버린 자들에겐 없는 것이 남아 있었다. 사람으로서의 양심과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들이다. 이 도시의 광기에 뒤틀려버린 자들은 그런 말로로 치닫는 동안 그런 것들을 잃거나, 아니면 성품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광기에 오염되어버리거나 해서 그런 것들이 그런 행동에 전혀 방해되지 않을 테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온전히 보존한 채로 저주와도 같은 괴물의 본성을 품고 있기에 광기 어린 본성과 아직 사람이고자 싶어하는 성품이 충돌하여 이러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에 스스로 그렇게도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괴물이 되길 선택한 이들과 반대로, 괴물로 태어나 사람이고 싶어하기에.
더더군다나, 굳이 그런 짓을 할 것도 없이 충분한 식사를 배불리 하는 것만으로 그녀의 괴물의 본성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식탐 정도는 잠재울 수 있는데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죽을 때까지 멀쩡히 사람인 척하며 일생을 살다가 죽고 나서까지 사람인 척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 텐데도,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덮고 이 도시에서나마 살아가기 위한 조건으로 이런 끔찍한 일을 주기적으로 강요받고 있는 것이었다.
(# 회색으로 쓰인 문단의 내용은 이번 일상 이후, 에만이 페로사의 프로필의 검열된 부분을 조회할 시 그녀의 심리 프로파일링 결과에서 세계관 내의 인물에게 맞게 가공된 형태로 확인할 수 있다. 혹은, 아래에 제공되는 '세계관 중간 변화 특전'을 통해 지금 이 일상에서 이미 해당 내용을 확인했다고 해도 된다.)
어차피 나도 한 대 태울 생각이었어, 하는 말에, 그녀의 얼굴에 걸린 웃음에 힘이 풀렸다. 자조적인 미소에서 자포자기한 미소가 되었다. 차라리 조금 자포자기하고 나니 오히려 이 상황이 우스워서, 페로사는 담뱃대를 문 채로 후후후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이빨로 담뱃대를 물고 입술을 벌렸다. "뭐, 다음번에 둘 다 없으면... 그러면 담배가게에 데이트나 하러 갈래?" 하고 장난스레 덧붙이고는, 데이트 코스치곤 최악인데, 하는 자학개그를 덧붙이면서 성냥갑에서 성냥을 꺼내 칙 하고 성냥갑에 그슬러 불을 피웠다. 당신이 입에 문 담배 끝에 조심스레 붙여주고는, 그녀는 성냥을 자신이 물고 있는 꽁초로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담배 끝에 성냥불을 붙이려 할 때, 인이 다 타버렸는지 성냥불이 팩 꺼졌다.
그녀는 잠깐 주저하다가, "잠깐만." 하고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당신이 물고 있는 담배의 끄트머리에 당신에게서 받은 담배를 가져다대려 했다.
<메인 캐릭터의 러닝 도중의 설정 변경을 감안하여, 캐릭터 간의 서술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특전입니다. 해당 특전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저번 에피소드 선택지에서 습득한 권한 있는 계정의 보안작업을 소실하는 조건으로, 다음 두 가지 정보 중 하나를 이번 일상 이후에 행동력 소모 없이 접할 수 있다. 혹은 원한다면, 이번 일상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정보를 접했다고 할 수도 있다.
1. 페로사의 프로필에서 검열되어 있던 '뉴 에덴'과 '심리 프로파일링' 부분. 2. 페로사의 프로필에서 검열되어 있던 '늑대인간'과 '심리 프로파일링' 부분.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 넘길 적, 에만은 고개를 기울였다. 방해했냐 묻는 말은 배려 같지가 않았지만, 괜히 왜 그러냐 물었다가 페로사의 깊은 속내를 건드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자중하기로 했다. 대신 에만은 처음 보는 연초를 꺼내주며 침묵했다. 단 향과 장미 향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꽤 고급진 취향의 것이지만 에만은 이 연초를 한 번도 피운 적이 없다. 페로사가 담배를 받아들일 때, 에만은 천사처럼 눈을 휘어 웃었다. 오늘의 전리품을 당당히 꺼내 남에게 공유한 것이 나름 뿌듯했던 것이다.
한 걸음. 에만은 미소가 흔들리는 걸 보며 발돋움을 한다. 발꿈치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피비린내가 코에 물씬 끼쳤다.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당신의 데킬라 냄새는 어디 있을까? 아무리 시트러스 향이 발버둥 쳐봤자 이 영악한 여우의 코는 당신에게서 나는 기이한 냄새를 맡은지 오래다. 죄의식과 공포가 꼭 소리로 들려오는 것 같다. 어쩌면 교향곡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감정이 섞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이 도시에서 섞이지 않으려 든다 한들 이미 당신은 그것보다 더한 일을 한 것 같은데. 듣기 좋다. 당신의 감정을 더 들어보고 싶어졌다.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자포자기한 미소와 대비되는 천사 같은 미소는 이제 입매까지 끌어당긴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데이트라기엔.. 무드가 없는걸.."
에만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다. 잠시 말의 이상함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되묻는다. "…그런데, 데이트..?" 에만의 눈길이 페로사를 잠시 빤히 쳐다본다. 동글동글한 눈동자 사이의 길쭉하게 뻗은 동공이 빤히 페로사를 쳐다보다, 이내 눈을 천천히 내리 감는다. 긴 속눈썹이 눈을 덮어 가린다. 불을 붙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진한 장미 향이 난다. 발꿈치를 내릴까 하다, 가늘게 뜬 눈 틈새로 성냥불이 꺼지는 걸 바라본다. 잠시 숨을 들이마시려다 멈춘다. 당신이 다가와 담배의 끝이 서로 맞닿았을 때 불을 붙이기 수월하도록 숨을 짧게 들이마신다. 창백한 연기가 아릿하게 피어오를 적, 페로사의 눈에는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예민한 후각이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닦아낸다 한들 드러나는 것이 있다. 에만의 얼굴이 새하얗기 때문에 더욱.
붉은 피가 튀었을 것이 분명한 흔적이 턱과 뺨 가장자리에 선을 긋듯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아마 거칠게 닦아냈으나 되레 번진 흔적일 것이다. 이 아이는 모르는 것 같다. 에만은 천천히 발꿈치를 바닥에 대며 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쪽 아래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무것도 없을 곳을 쳐다보며 남몰래 혀를 찼다. 이런 쓰레기 같은 걸 잘도 피웠구나. 에만에게 이 담배는 제법 독했다.
당신의 세로로 죽 찢어진 동공과 곱게 피어난 웃음에는 마치 만찬을 눈앞에 둔 미식가나, 좋은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사색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탐미하는 품평가의 그것과도 같은 빛이 있었다. 그것 역시도 페로사를 크게 뒤흔드는 데에 한 몫을 했다. 너마저도 그들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구나. 그리고 그것은 페로사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툭 분질러져버리는 데에 더 큰 몫을 했다. 물론이지- 이제 와서 뭐가 다를까. 페로사는 실소를 흘리면서 당신이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고 입에 물었다.
"그런가?" 하고 담배를 문 채로 대답하면서, 차라리 자포자기하니 덜 초조해보이고 좋다는 생각을 하며 페로사는 불이 꺼진 성냥을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넣었다. 고급 담뱃잎에 구아버향을 섞어 장미향과 어울리는 단맛을 첨가한 고급스런 연초. 입에 무는 것뿐만으로 퍽 독하다. 문득 네가 좋아할 것 같기에는 너무 간드러진 취향인데- 하고 그녀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머리 속에서 밀려났다. 담배 끄트머리와 불똥이 맞닿는 순간, 후각과 미각을 씻어내리듯 입 안으로 새로이 쇄도하는 낯선 향기가 일깨워준,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냄새가 그녀의 코끝에 걸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전까지 그녀의 온 입과 코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그 첨예한 감각마저 기진맥진하게 만든 그 냄새였다. 그것을 낯선 담배향기가 잠깐 환기시킨 탓에, 다시 그 냄새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굳이 냄새로 느낄 필요가 있었을까. 당신의 뺨 한 쪽에 그 궤적이 마치 화장처럼 은은히 남아있는데.
페로사는 당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킥킥대고 웃었다. 오, 나 설마 방금, 안심한 건가? 안심? 안심이라니... 무엇을 두고 안심을 한 걸까? 이 짧은 순간에 한때 자신의 탐욕이 그렸던, 자신이 절대 닿을 수 없는 고운 빛깔의 어떤 순간들이 산산이 무너져버린 것 같아서? 그것들은 겨우 허상이었을 뿐이라고, 네게 주어진 현실은 이 정도라고,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그 말이 안심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향한 샤덴프로이데. 그 느낌이, 견딜 수 없는 실소를 그녀의 입가에 치밀게 만들었다.
더 우스운 사실은, 자신의 환상이 무너진 순간에 오히려 당신에게 며칠 전 바에서 같이 보냈던 그 밤에 느낀 그 감정이 다시 동했다는 사실이다. 이따금 갖고 싶은 것이 눈앞에 보이면 자신의 처지마저 잊어버리도록 만드는 어지러운 탐욕. 니코틴도 알코올도 이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약을 가져와도 전혀 취하지 않을 정도로 발달한 내부순환계와 신경계에 담긴 정신마저 취하도록 만드는 이 탐욕. 오오, 너도 결국에 그 정도라면... 적어도 그 정도에는, 내가 손을 뻗어볼 수 있지 않을까?
페로사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입가로 치미는 실소를 그저 얼굴에 칠칠맞게 뭘 묻히고 다니는 아는 동생을 본 연상의 여인다운 미소로 꾸며 자신의 얼굴에 걸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얼굴에 이건 뭐야... 토마토주스?" 하며 떠는 능청은, 나 이거 뭔지 알지만 뭔지는 말 안 할게, 라는 말에 더 가깝게 들렸다. 그녀는 손수건을 들어 당신의 뺨을 문질러닦아주며 말했다. "네 친구도 이게 금방 질렸나 보네." 담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디까지나.
아저씨나 아줌마는 완곡히 돌려 말하면서도, 에만은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미소를 유지했다. 고급 담뱃잎, 장미향과 잘 어울리는 단맛은 물론이요 독하기 그지없음에도 표정에는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둘 중 하나였다. 독한 것도 잘 받아들이거나, 이 정도도 쉽게 감수하는 연기력을 가졌거나.
어찌 되었든 이 작은 여우는 자신의 얼굴에 남은 흔적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멍한 시선에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고 까치발을 내렸다. 킥킥 웃을 적에는 천천히 연기를 뱉으며 커다란 눈망울만 깜빡 감았다 뜰 뿐이었다. 천사는 실존한다. 어느 도시에나 천사가 있다. 아름다움으로 천사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품성으로 천사가 된 사람이 있다. 무한한 선의, 자애, 용맹함, 순수함,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구원과도 같은 행보.
에만도 천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착각하는 점이 있다면, 에만은 바깥의 천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작은 아이는 이 도시에서 보일 수 있는 무한한 선의와 자애를 비롯한 구원을 보였다. 바깥의 따스함을 기대하였다 한들 허상이고, 차갑고 날선 선의는 남의 목을 서늘하게 죄며 바깥만치나 순수하게 웃었다.
에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독한 연초를 입에서 떼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었다. 다른 팔은 팔짱을 끼듯 상박에 손을 올려둔, 제법 권태로운 모양새였다. 담배를 잘못 샀다. 그래놓고 몇 개비는 피운 흔적이 있는 담뱃갑을 꺼내며 피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손님을 상대하는 창부로 보였으나 이젠 뺨에 피가 묻어있다. 저격을 페로사의 것으로 착각하였으나 본인을 향한 저격이었다. 순수한 모습을 보이나 타인을 아래에 두는 그림자의 거장巨匠과 상하의 관계가 없이 지내는 사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를 사람이었다. 어쩌면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청부업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그러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청부업자라면 이 피도, 가면도, 모든 것이 퍼즐이 들어맞듯 딱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연기를 뱉던 와중 손수건을 꺼내는 모습에 에만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연상의 여인과도 같은 미소에 눈을 깜빡인다. 뺨을 닦아주며 떠는 능청에 세로로 죽 찢어진 동공이 점점 작아졌다. 작게 벌린 입이, 설마 했더니 진짜 흔적이 남았겠거니 하던 표정이다. 다른 점이라면 들키고 싶지 않았음은 페로사와 같으나, 죄의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요리를 배우는 중이라.."
결국에는. 이어지는 말에 에만의 눈이 반으로 접히고 입술이 길고 매끈한 호선을 그었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우라기엔 뱀인, 사람이라기엔 그것이라 불러야 할 것이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미소를 낯짝에 그렸다. 더없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말갛다. 그럼에도 달콤한 목소리보다 쉭쉭대는 소리가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그것이 이 도시의 천사가 낼 소리에 걸맞기 때문이었다. "페로사." 하는 소리는 뱀의 소리보다 바깥의 달콤한 어조였다. 사탕처럼 단 목소리가 아이의 입을 타고 흘렀다. 이곳의 천사로서, 지나치게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저번처럼 입 맞춰주지 않을래…?"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중략)…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그러면 생각이 정리가 될 것 같거든.. 친구가 질린 이유를..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응?"
"하긴 구멍가게에서 담배도 사고 싸구려 군것질거리도 사고 하는 걸 데이트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지." 하며 페로사는 그 달면서도 차갑고 독한 연기를 쉬이 머금고 길게 내뿜었다. 그녀의 파르란 눈에 회한이 걸렸다. 조용히 사람으로 살아가다 사람으로 죽고 싶었으나, 그 조건으로 괴물의 행동을 할 것을 강요받는 삶 끝에, 시선 너머에서 너무도 뽀얗고 맑게 웃고 있는 네 얼굴에 눈이 멎어서는. 그녀의 푸르른 눈이 넋을 놓고 당신을 담았다. 니코틴의 진정효과 따위는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창부나 다름없이 요염했고, 살인자나 다름없이 냉혹했으며, 천사와 다름없이 순수했고, 사람과 다름없이 탐욕스러웠다. 그런데도 눈앞에 놓인 당신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하는 자신과 같이. 그런데 그런 모습을 하고서는, 너는 내게 뭘 바라고 그렇게 아름답고 무섭게 웃고 있는 거니. 꺼내지 못한 질문에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그녀는 느릿하게 허리를 숙여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며, 깊게 숨을 들이쉴 뿐이다. 두꺼운 입술 사이에 물린 새까만 담뱃대가 지지직 타들어간다.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비정상적으로 깔쭉깔쭉한 치열 사이로 창백한 안개가 물컥물컥, 장미 향과 담배 향, 그리고 그것으로도 쉬이 감출 수 없는 비릿한 악취를 품고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면 꼬맹아,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니." 천사처럼 순수한 당신의 것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한 채로 입안에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한가득 머금은 괴물의 미소였다. 자신에게로 서서히 채워져오는 두 번째의 목줄을 보는 것만 같은.
여인은 고개를 더 숙였다. 그녀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 목전까지 다가왔다. 입안에 실려 흘러나오는 꺼림칙한 안개가 당신의 입술에 닿을 정도로까지 가까이 다가가서, 인간의 것이라기엔 비정상적으로 뾰죽뾰죽한 치열 사이로 연기를 흘리며 그녀는 당신에게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어?"
아니라고 말해. 냄새난다고 밀어내줘... 너도 이 냄새가 뭔지 알잖아. 맡을 수 있잖아. 하다못해, 리스테린으로 가글이라도 좀 하고 오라고 당신이 면박을 주기를 바랐다. 원한다고 말해. 내게 탐욕을 부려줘. 내가 네게서 맡은 냄새가 틀리지 않다고 해줘. 나를 받아줘.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결국 이런 것들뿐이야.. 하고 당신이 입맞추어 주기를 바랐다.
밀쳐내거나 멀어지거나, 허락하거나 다가가거나.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당신의 욕망이 그렇게나 확고하다면 결국에 결말은 하나일 텐데.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페로사는 직감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들과 고통스러운 일들을 딛고 적어도 인간 가죽을 뒤집어쓰고 인간인 척하면서라도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삶이, 당신이 맞추어온 균형보다 훨씬 소박하고 보잘것없고 아슬아슬한 자신이 맞추어온 균형이 지금 이 순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려 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