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느껴진다니 다행이다. 😊 나도 선택지 짜는 게 묘하게 즐겁기도..? (?) 썰풀이를 하다 보면 오너한테만 정보가 제공되고 캐릭터한테는 정보가 잘 안 전해지는 게 좀 그랬는데, 이건 캐릭터한테도 정보를 전해줄 수 있어서 괜찮은 것 같아. 그리고 에만같은 갓캐를 만든 에만주도 천재야. (쓰담담) 나도 에만주랑 같이 돌릴 수 있어서 행복해.
에만이 빌런이라는 건 일상 밖에서 페로사가 알아채고(+자신의 뒤를 캐이고 있었다는 것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로 에만을 찾아와서 넌 누구야? 하고 따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에......... (본스레에선 이루지 못했던) 그렇지만 에만주가 그걸 해보고 싶다면 그것도 좋겠다고 생각해.
그 외에는 위에서 말했던 >>805 상황이라거나, 아니면 전에 말했던 비 오는 가운데 마주친 페로사라거나...?
눈은 하늘을 담고 있었으되, 발은 그림자에 얽매여 하염없이 땅을 딛는다. 저벅, 저벅, 그림자에 잠긴 뒷골목이 마치 이 그늘을 두고, 네가 저지른 짓들을 두고 어디로 가려느냐고 조소하는 것 같았다. 발이 무거웠다. 술기운에 취해 자신의 주제에도 닿지 않는 머나먼 높은 곳을 잠깐 올려다보았으나,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천사가 사라지자 그녀는 높은 곳에서부터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까지 비참하게 추락했다. 그것은 물리적 충격이 아니었으며,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 효과적이었다.
저녁의 찬바람이 술기운을 쓸어냈을 때, 페로사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뒤늦게 기억해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녀의 처지를 확실하게 기억나게 해 줄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마치 일순간 자신의 처지를 잊고 온기에 취한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자신에게 떨어진 지엄한 경고... 네가 그 도시 출신이라는 것을 감춰준 게 누구지? 네 옛날 이름을 감춰준 것은 누구고? 하는 말이 귓가에 쟁쟁했다.
그래, 삶을 보장받는 대가로, 그녀는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죄인에게 구원은 없다.
온 벽을 피로 물들인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노인이 저주처럼 남긴 유언. 그 말대로였어, 하고 페로사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 출근하지 않았다. 오늘은 비번이다. ...또한, 달리 해야 할 일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녀의 바텐더 출근 시간표를 생각해보면 오늘 해두지 않으면 기간을 맞출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은 그 일을 마저 끝내고 돌아나오는 길이기도 하다.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하는 처절한 단말마가 아직도 고막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강한 빛을 띈 물체를 잘못 바라보면 눈가에 그 물체의 상이 한동안 남아있는 것처럼. 페로사는 어두운 골목을 가로지르며, 무심히 생각했다. 무사할 리 없지. 잘 알아. 하고. 문득 이 그늘이 드리운 골목길이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은 그럴지언정, 물리적으로 현실에 실존하고 있는 건축물이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어느덧 그녀의 발걸음은 골목길이 끝나는 모퉁이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가, 햇살이 눈부셔서 눈을 찌푸렸다. 젠장맞게도 날씨가 좋았다.
페로사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박의 절반 정도를 덮을 만큼 소매가 길게 나와있는 축축하게 젖어있는 가죽장갑. 마침 모퉁이의 쓰레기통이 눈에 띄었기에, 그녀는 장갑을 벗으려고 했다. 잘 벗겨지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운명에 달라붙은 자신의 죄악처럼. 페로사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억지로 힘을 주어서 장갑을 벗어냈다. 거의 찢어지다시피 벗어낸 장갑 한 켤레를 쓰레기통에 대충 처박아버렸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얇은 루즈핏 레인코트도 성가셨다. 그녀는 그걸 어깨에서 벗겨 대충 구겨버리고는 옆구리에 꼈다. 청바지와 셔츠 차림. 그리고 그 위를 마치 구속구처럼 덮고 있는 하네스의 벨트들. 허리춤의 벨트에는 레펠 밧줄을 이용하기 위한 고리와, 권총 탄창 홀스터와 권총 홀스터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하네스도 벗어버릴까 했으나 이걸 벗는 것도 퍽 성가신 일이 될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라도 한 대 필 심산이었다. 구깃구깃 구겨진 담배 팩이 하나 딸려나온다. 안에 든 담배는 달랑 한 대. 그나마도 허리가 반으로 꺾여 있어, 이걸 과연 제대로 필 수 있을까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이거라도 피우고 싶어서, 그녀는 허리가 꺾인 담배를 팩에서 뽑아 입에 꼬나물고는 다시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이덴티티가 여러 개라는 것은 그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한다는 것과 같다. 앨리스는 도시의 가장 밝은 빛인 대학생활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고, 에만은 가장 어두운 그림자에서 암약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개처럼 공부하고 몰두한 결과 앨리스는 곧 120학점을 이수한다는 것이었고, 5월에 있을 졸업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란 점이었다. 앨리스는 당분간, 그나마 에만에게 시간을 넘겨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문제는 에만이었다.
"균형이 깨졌네."
뉴 고모라 지하, 인외마경이나 다름없는 블랙 존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 온정을 나누느라 균형을 잡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균열은 이전부터 존재했고, 물갈이를 할 시간이 왔을 뿐이다. 저격수의 일을 뒤집어 씌우며 지금 머리가 되는 존재를 쳐낼 명분을 만드는 일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앨리스가 아무리 시간을 준다 한들 에만에겐 제법 빠듯한 시간이었다. 머리의 목숨은 타인을 써서 거두고 싶었으나 그럴 인력이 없기에 직접 나섰다.
네가 이런다 해도 내 뜻을 이을 자는 많다. 멍청한 지껄임은 친히 모습을 드러내 물어뜯는 걸로 보내주었다. 거대한 악어는 한때 뉴 고모라의 지하에 군림한 왕을 두 동강 냈고, 새 균형의 추가 올라섰다. 이번 왕은 에만이 양성한 빌런이자 좋은 꼭두각시다. 지하에서 올라오던 에만은 잠시 멈춰 기지개를 켰다. 온기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도 못할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오랜 기간이 걸렸던 만큼 바에 가지도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늘도 가기는 글렀다. 술로 달래기엔 너무나도 지쳤고, 피곤했다. 그나마, 아주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오늘은 공강이요, 내일은 교수님께서 세미나에 가셔야 할 일이 생겨 휴강이라는 것이다. 만약 앨리스의 삶까지 살았더라면 에만의 닳고 닳은 체력은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지하에서 올라오면 맞은편에 다른 골목이 있다. 그쪽을 통해 가로지르고, 복잡한 건물 틈 골목으로 다시금 들어가면 에만이 가끔 쉬는 장소가 나온다. 아무도 찾지 않는 폐건물이나 다름없으나 오늘은 그 장소에서 하루 종일 잘 예정이다. 지하는 새로운 블랙 존의 지배자 얘기로 시끄럽고, 앨리스가 사는 다운타운은 지나치게 활기차다. 그렇다고 아르카디아로 가기엔 피곤했다. 살랑대며 마지막 계단을 오를 적 한기가 스몄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치즈 고양이는 가면 쓴 사람이 되어 지상에 발을 디뎠다. 이제 맞은편 골목으로 가기 위해 햇빛을 넘었을 무렵이었다.
"..아."
마주한 것은 익숙한 얼굴이다.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에만의 향을 기억하던 여인이고, 온기를 자각하게 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바텐더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가졌던 무의식적인 행동이 무엇인지도 까먹어 새로운 것을 만들던 에만이건만, 용케 그 이름을 까먹지 않았다. 페로사다. 본디 성인 몬테까를로라 불렀으나 본인이 이름으로 불러달라 하였다. 에만은 가만히 멈춰 선다. 대략 네댓 걸음 정도의 거리를 뒤로하며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인다. 오늘은 여성의 옷차림이 좀 다르다. 이 바텐더의 이중생활을 아는 에만이지만 제법 새롭다.
"또 만나네.."
에만은 가면을 벗지 않고 뒷짐을 진다. 손을 뒤로 모으고 고개를 기울인 모습이 마냥 순진했다. 기운이 없어 보였고, 목소리도 힘이라곤 일절 없었다. 첫 만남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욱 그랬다. 그런 에만이 갈 곳은 저 골목 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공간인 듯싶었다. 미리 막지 않는다면 대화가 끝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에만은 입에 물린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직이 물었다.
바텐더의 일과도 꽤 녹록찮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혹은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3시까지- 9시간의 근무와 7시간의 취침을 상정하면 6시간이라는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영위할 만한 시간이 있다. 요 며칠 동안, 페로사는 그 순간을 자신의 '아르바이트'를 위해 투자했다. 계획을 짜고, 동선을 파악하고, 타겟을 꾀어낼 그럴싸한 미끼와 뒷처리를 맡길 인원을 섭외하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비번 날, 페로사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24시간 이상의 넉넉한 시간을 정했으나, 페로사가 짜둔 계획은 한 치 틀림없이 들어맞았고, 실행에 옮기는 순간부터 일을 마무리하고 뒷골목으로 걸어나오기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댓가로 그녀는 이 도시의 불안한 균형에 기반한 평화로운 생활을 얼마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회의감이 든다.
이렇게 살아봤자 이렇게 살 가치나 있는 걸까.
결국 손끝에 피가 마르지 않는 삶. 평생을 죄악에 발목을 잡혀 살아가는 삶. 그래서 그 무엇에도 함부로 손을 뻗을 수 없는 삶. 허리가 반쯤 분질러진 담배의 몰골이 오히려 자신보다 나아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페로사는 착잡했다. 문득 며칠 전에 바에서 만났던 어느 고객이 생각났다. 자신에게 뜯어져나가 결핍된 부분을 모아놓은 것 같이 순수히 웃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어찌나 선명히 떠올랐는지 저 지하도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마치 그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
당신의 눈에 비친 여인의 차림은 퍽 낯설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곱슬곱슬한 금발을 뒤통수 높이 올려 묶은 그 머리고, 그 푸르른 눈이고, 그 우뚝한 콧대와 두터운 입술에, NOSTALGA TROPIC에, 거친 면직 셔츠. 그러나 청바지며 워커화는 처음 보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온몸을 구속구처럼 감싸고 있는 하네스, 그리고 하네스에 주렁주렁 매달린 권총 탄창집이며 권총집은 당신의-머리로는 알고 있었을지언정- 육안에는 상당히 생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생경한 것은 그녀의 얼굴에 걸린 표정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을 들킨 사람 특유의 흠칫 놀라 굳어버린 표정. 그것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켰을 때의 경악과 죄책감. 입에 꼬나물고 있던 접질린 담뱃대를 툭 떨어뜨리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였다.
차라리 당신처럼 여러 얼굴, 하다 못해 여러 자아라도 있었다면, 하다못해 레인코트에 달린 후드를 덮어쓰고 있기라도 했더라면 이 상황을 훨씬 더 가볍게 넘길 수 있었을 텐데. 페로사는 어디까지나 페로사 몬테까를로 그녀 혼자였다. 그녀는 날씨가 좀 후덥지근하다고 레인코트를 후떡 벗어버린 자신을 원망했다. 지금 그녀가 쓸 수 있는 가면은 평소의 느긋하게 웃는 얼굴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못해, 그녀의 얼굴에 씌워진 것은 결국 자조적인 씁쓸한 미소가 될 뿐이었다. "그러게. 별난 데서 만나네."
그녀는 담뱃불도 채 붙이지 못한 채로, 당신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골목길을 힐끔 돌아보았다. 주문받은 것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타겟을 처리하는 것. 그 작업은 이미 끝났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향하려고 하는 이 골목길은, 이 뉴 고모라의 흔하디 흔한 아무것도 없는 그늘에 잠긴 뒷골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당신을 걱정하기엔 충분했다. 저번의 그 저격수, 당신을 노리고 있던 게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뉴 고모라의 골목길인데, 당신은 누군가에게 돈으로 저격수를 사서 보낼 정도로 누군가와 내막 모를 원한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목소리에 걱정이 어린다. "어디 가던 길이야?" 하면서 그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레인코트를 뒤적였다. 주머니에 성냥갑이 없으면 거기 있겠지. 그런데 그 서슬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담뱃대 반쪽이 결국 똑 분질러져서 땅바닥으로 툭 떨어져버렸다. "하, 젠장."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반은 무슨. 반 갑은 피고 싶은데. 아- 돛대였는데 오늘 참 재수가 없네." 비단 돛대가 부러진 것뿐 아니라, 여러 의미로 재수 없는 하루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자신처럼 여인도 제법 낯선 모습이다. 기억하고 있는 모습은 같지만 옷차림이 달랐다고 해야겠다. 가령 지금의 에만에게 있어 페로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텐더들의 지정 복장, 셰이커와 콘콥 파이프였으나, 지금 두르고 있는 것은 하네스와 권총 탄창집, 그리고 권총집이었다. 그렇지만 시선을 올렸을 때, 여인의 표정은 에만이 아주 잘 아는 표정이었다.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들켰을 때의 얼굴이다. 에만은 저 얼굴을 아주 많이 봤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며 경악하고 죄책감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에만은 그러니까 내게 들키지 말았어야지, 하고 속삭이며 비웃는 부류의 사람이었으나 흥미를 가진 사람에게 그리 박하지는 않았다. 에만은 손을 뒤로 모으고 아이처럼 고개를 느릿하게 갸웃 기울일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
별난 데서 만난다는 말에 주변을 둘러보고는 쓴웃음을 발견해 묻는 모습이 자못 순수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면서도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모르는 척은 에만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골목길을 흘끔 바라보자 발걸음을 멈춘다. 우리는 이런 곳에서도 다르다. 에만은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앨리스가 꼴 보기 싫다 했기 때문에 에만이 대신 처리해 준 바텐더는 벽은 고사하고 튀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곳에도 피가 튈 정도였다. 앨리스는 치워버리면 된다 했지만 에만은 절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그 반면 당신은 제법 명령대로, 깔끔하게 처리하는 편이었다. 에만은 질문에 천천히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나..? 쉴까 해서.. 여기 근처의 휴식처로 들어가는 길이었어. 시끄러운 곳은 질색이거든.."
걱정 어린 목소리와 달리 에만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어차피 이 부근에서는 후드 입은 꼬맹이의 뒤통수만 보일 것이니 가면을 벗으려다 멈칫한다. 피, 닦았나? 닦았던 걸로 기억한다. 윗입술 가장자리를 슥 찍어보듯 혀로 살짝 훑어본다. 비린 맛이 안 나는 걸 보니 닦은 것 같다. 방금 전까지 한 마리의 악어가 되어 말 그대로 사람을 두 동강 내고 오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에만은 가면을 벗었다. 머리는 늘 그렇듯 부스스하고, 눈은 겨울 색 그대로나 평소보다 그 밑 그늘이 짙고 가뜩이나 희던 얼굴은 창백하다. 잠을 며칠은 고사하고 만난 뒤 한숨도 못 잔 사람의 모양새다. 잠시 그늘 너머로 들어오는 볕도 따가운지 손을 들어 눈 주변을 덮어 가리다, 아예 시선을 내리 깐다. 타이밍 좋게 떨어지는 담뱃대와 짧은 욕짓거리, 그리고 코웃음 소리에 에만은 손으로 만든 그림자 속에서 빛이 눈에 익을 때까지, 눈만 슬쩍 드는 걸로 시선처리를 대신했다.
(쓰담담) 늦을 수도 있지. 어서와. 늑대인간으로 바꾸면 이런저런 전개의 빈 부분이 다 깔끔하게 채워지는 것도 있고... 나 욕심이 너무 많다고, 사람 거죽을 쓴 괴물이라고, 네가 너무 예뻐서 잊고 있었다고, 내 욕심이 널 다치게 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미안하다고, 나는 괴물이니까 너도 날 싫어할 거라고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올 수 있을 것도 같다는 페로사주의 뒤틀린 욕망도 있어서... 👀 무언가 아주 잘못돼버린 빨간 망토 이야기 느낌으로.
사실, 경악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 곳에 나타난 것이 정말로 당신이라는 것을 안 순간, 페로사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심장을 전력으로 꽉 죄여드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이게 왜 진짜야,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네가, 왜 하필 여기.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가장 추했던 모습이 당신에게 들켜버릴까 봐 온 몸을 죄여드는 공포가 엄습했다. 다행히도 방금 한가득 끔찍한 식탐을 충족한 무시무시한 괴물이 당신의 앞에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이 예측불허의 괴물이 문득 변덕을 부릴까 두려웠다. 당신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웃음에마저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초조한 손짓으로 몸통에 씌워진 하네스를 매만져보았다. 그걸 벗어내고 싶어 안달하는 움직임 같았지만, 그 손짓은 결국 조금 쏠린 하네스를 고쳐매는 동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확실히, 그 골목 너머에서는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코끝에는 명백히, 옅고 희미하지만 피비린내가 걸려 있었다. 예컨대 그녀의 옆에 자리도 좋게 놓여있는 쓰레기통에서라던가... 어쩌면, 그녀의 숨결에서도. 당신의 힘없는 웃음에 맞춰, 페로사 역시도 최대한 평범한 미소를 띄워보려고 노력했지만 어정쩡한 웃음이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화제를 돌리기로 택했다. "휴식처?" 다행히도 그 화제는 충분히 페로사가 조마조마한 두려움에서 고개를 돌릴 만큼 집중을 할 수 있는 종류의 화제였다. 세이프하우스를 만들어놓기에는 나름대로 좋은 장소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 사이에 숨기라지만, 뉴 고모라 뒷골목이라니. "이 근처에?"
하고 되물으면서, 말 몇 마디를 더 덧붙이려던 그녀는 당신이 가면을 벗자 말을 멈췄다.
다시 그 가면 아래서 드러나는 얼굴. 피로에 한가득 절어 있는 그 모습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퇴폐미가 느껴져, 페로사는 하려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뒤적거리다 만 코트 주머니를 마저 뒤적거렸을 뿐이다. 그 동안, 당신은 페로사에게 자신이 하나 주겠다는 제안을 건넬 수 있었다. 당신을 바라보다가 쓰게 대답했다. "괜찮겠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던 손이 뽑혀나온다. 그녀의 손끝에는 예의 그 성냥갑이 들려있었다. "아니, 불은 괜찮아..." 그러다 그녀는 "나참." 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얼굴에 띄었다. "너랑 담배를 필 때는 꼭 담배나 불 중에 하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