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네가 품에 쾅 떨어진 것은 겨우 11월이었고, 이제 12월과 1월을 지나 2월이 반쯤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그래, 현민이 그것을 깨달은 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짝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스스로 품은 마음의 가치며, 무게며, 열기를 아직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가늠을 해보기엔 너무도 귀중했고 너무도 무거웠으며 너무도 뜨거웠다. 그래서 현민은 그것을 고요히 눌러담았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네게 사흘 하고도 한나절이 더 되는 시간 동안의 공백을 선언했다. 네가 그것을 너무도 쉽게 답삭 받아들이고 가볍게 말하는 것을 보고, 현민은 자각했다. 자신에게 네가 갖는 의미와, 너에게 자신이 갖는 의미가 같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와닿는 느낌은 달랐다.
내색하지는 않았다. 합법적으로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기쁜 날에, 간식을 나누어먹으면서 한껏 기분좋아하고 있는 네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너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은 잊어버리고 있던 일이었지만, 현민은 스스로의 감정을 감추는 데에 능숙했다. 에너지 절약주의적 생활양식. 해야 하는 일은 최대한의 효율로 빨리 끝내고,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다. 이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일은 불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하지 않는다. 조용히 삭인다. 혼자서 삼켜 없애 심장 속에서 녹여버린다.
그렇게 현민은, 잊어버릴 뻔했던 옛 습관을 상기하면서 너와 함께 7일을 더 보냈다.
-합숙훈련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혼자 남은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곰인형을 끌어안으며 별이 뜨문뜨문 떠 있는 밤하늘을 창밖으로 내어다보는 건 현민에게 있어 꽤 오랫동안 해온 일이었다. 네 집에 너를 바래다주고 아파트 단지 현관으로 돌아나오면서도 네가 들어간 엘리베이터 문을 한 번 힐끔 돌아다보고, 현관을 떠나 아파트 단지 공터를 가로지르다 말고 멈춰서서 네 집이 있는 층을, 아무도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거나 하지 않을 베란다를 한 번 올려다보고, 그렇게 밤하늘 아래 멈춰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기고... 가슴 속에 응어리진 열기가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을 가슴속으로 가만히 삭이는 것도 현민에게는 익숙했다. 마음은 보답받지 못한다- 그에게는 담담하게 당연한, 참인 명제였다.
그래서, 그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찌됐건 해야만 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는 충실했고 효율적이었기에, 그는 착실히 훈련을 받았다. 새로운 후배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고, 손발을 맞추어보았다. 다만 둘쨋날, 스몰사이드 게임을 해보고 있던 와중에 현민의 눈에 문득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 중에 마치 구름 위에 서있는 새하얀 북극여우 같은 구름이 살랑살랑 지나가는 게 있었다. 측면으로 파고들어 포지셔닝을 하다 말고 구름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현민은 아직 패스가 익숙지 않은 후배가 너무 높게 띄워 보내준 패스에 그만 얼굴 정면 클린히트를 허용할 뻔했다.
현민은 실감했다. 이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하지 못하겠다고. 이 마음이 보답받지 못한다고 생각해도 거두지 못하리라고. 아마 나는 평생을 너를 앓다 죽겠다고. 생애를 지독한 병에 걸려버렸다고.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는가. 옷을 갈아입으려, 양치를 치려 짐에 손을 댈라손 치면, 그 짐은 네가 사준 범고래 색깔의 더플백 안에 들어있다. 씻을라 치면 가슴팍에서 여우꼬리 모양의 펜던트가 달랑거리고 있다. 네 향기가 남아있다. 자신의 삶에 네가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겨버렸다. 목에 걸려 있는 여우 꼬리 모양 펜던트를 움켜쥔 채로, 현민은 마지막까지 훈련을 이수했다. 여우 모양의 구름은 현민이 타고 학교로 복귀하는 관광버스의 차창 밖으로까지 그를 놓치지 않고 따라왔다. 문득 잠이 들었다 깨었을 때는, 멀리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여우를 쫓다가 감독 선생님의 다 왔다, 일어나라 하는 구령에 잠에서 깨었다.
그렇게 현민은 잠에서 덜 깬 머리를 버스 밖의 아직 차가운 초봄 공기로 씻으며, 오와 열을 맞추어 감독 선생님의 마지막 훈시를 듣고 다음 훈련일정과 개학에 따른 훈련일정을 공지받은 뒤에 삼삼오오 흩어져가는 축구부원들 사이로 더플백과 캐리어 하나 덜렁 든 채로 학교 운동장에 툭 버려졌다. 현민은 차디찬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여우 구름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어디 갔을까? 하고 그는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때, 그가 잠든 사이에 땅으로 폭 내려앉은 새하얀 북극여우가 현민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기도 모르게, 현민은 캐리어를 툭 떨어뜨리고는 네게로 달렸다. 네가 품 안에 그 몸을 거의 자빠지다시피 푹 엎어뜨리는 것을 품안에 받아서 마주 꼬옥 끌어안고 나서야 현민은 지금 네가 여기 이 곳에 자신을 맞이하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왔구나- 라고 네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네가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게 더 빨랐다. 입이 열릴 때,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힘들었지, 하는 말이 나오려니 했다.
그는 병을 안은 채로 너를 따라오고 있었다. 혼자서 떠돌면 방랑이지만 둘이서 떠돌면 여행이겠거니 했다. 네 뒤를 몇 발짝 떨어진 채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리킬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너의 뒷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설의 운무 속을 네 뒤를 따라 헤매었다. 아마도 앞으로 계속 이렇게 기약없이 헤메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너는, 전혀 다른 말을 그에게 꺼내어놓았다.
마침내, 네 몇 말짝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새까만 털복숭이를, 아무것도 모르고 이것이 좋아하는 마음인지도 모르다가 알게 되어도 모른 체하면서 너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이 소년을, 너는 돌아본 것이다.
"이제야."
현민의 얼굴에, 자신이 짓는지도 모르는 미소가 흐릿하게 피어올랐다. 이 웃음을 자아내는 감정을 무어라 한 마디로 꼭 집어 설명할 수가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열기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냥, 너를 꼭 끌어안은 채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랑은 네 두 뺨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네가 짓고 있는 표정은 분명 웃음이었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 떨어트릴 것만 같아서, 랑은, 랑도 눈가에 꽃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눈물 흘리는 일은 없었다. 단지 네가 얼마나 괴로웠을지를 이제야 알았기 때문에 그게 멍울졌다. 랑은 네가 고작 나흘 남짓 곁을 떠났을 뿐이었는데, 네게 랑은 언제나 곁에 있으면서도 너를 홀로 두었다. 너는 그걸 다 감내하고도 계속해서 랑의 곁에 머물러주었다. 지독한 짓을 해버렸다. 내가 입었던 상처를 핑계로 네게 그을림을 남겼다. 랑은 바랐다. 그 자국을 지우고 새로 칠할 수 있는 기회를 네가 허락해주면 좋겠다고- 그리고 너는 랑이 한 말과 같은 말로 답을 주었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랑은 네 두 뺨을 쥐고 있는 손을 천천히, 그리고 또 부드럽게 아래로 이끌었다. 그럼 너는 랑에게 눈높이를 맞춰줄 때 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줄테고- 그러면 랑은 네 이마에 톡 부닥친다. 이마가 닿아 정말로 코 앞보다 가까운 거리에 물빛 눈동자가 아지랑이 피어오르 듯 일렁인다. 너와 눈을 맞추면 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같아졌음을 알았다. 랑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쪽, 하고 떨어지는 입맞춤은 이전번처럼 가볍게 톡 남은 것이 아니었다. 꽃물로 색을 입힌 스탬프를 찍듯 조심스럽게, 하지만 제대로 자국이 남도록 지그시 꾸욱 머물렀다가 떨어진다. 스탬프는 네 입술 위에 남겼는데 어쩐지 그 자국은 랑에게도 남았다. 두 뺨이 상기된 색이 얼마나 고운 설렘의 빛을 띠는지 랑은 모르고 있었다. 이마를 맞대고서 있다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간지럼을 태우고도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네가 좋아하는 그 아이가 네게 툭 꺼내놓은 그 마음이 더욱더 순박하고 천진난만하게 반짝이는 것 같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배시시 웃으며 눈을 곱게 접어 찡긋거리더니, 곧 깜빡이며 눈을 뜬다. 랑은 여전히 네 두 뺨을 소중히 감싸쥐고 있었는데- 그렇게 너와 시선을 줄곧 맞추며 잠시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렷히 너를 눈에 담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동그랗게 뜬 눈은 집요하게 너를 쫓는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이유를 밝힌다.
"많이 보고 싶었어. 그래서 지금 봐도 봐도 모잘라-"
웃음 소리가 섞이며 흩어진 어미는 다른 것도 섞여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 것에 대한 어색함과 부끄러움, 민망함, 간지러움 등이 있었다. 랑은 구름처럼 구는게 편할 뿐더러 아플 일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네게도 줄곧 그렇게 굴었고, 그렇기 때문에 네게 있는 그대로의 것을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마음을 소리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이 소리 들려? 나 심장 엄청 빨리 뛰고 있어. "
내 귀에 들린다면 분명 네 귀에도 들리겠지- 랑은 애정을 늘어놓았다.
"너 생각하면 이래. 나 너 진짜 많이 좋아하나 봐, 이제 알았어. 나 이러다 네가 너무 좋아서 큰일날 것 같아-"
어린 아이가 보물 상자에 모아둔 것을 우르르 바닥에 쏟아놓고 자랑하는 것처럼 서투르고 중구난방이었지만, 한 가지, 행복해하고 있단 건 확실했다. 네가 랑에게 심어준 행복이 이렇게 한가득 피어서 드디어 너를 반긴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봄날 그림자 아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랑은 이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으면 네 두 뺨을 놓아줄 생각이었다.
"현민아."
네가 북극여우를 닮았다고 했었다. 네 목에 걸린 여우 꼬리, 이제는 품 속에서 그 꼬리가 살랑이는 것 같다.
네가 무엇을 하려는지 얼핏 알 것도 같았기에, 현민은 널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네게 반 발짝쯤의 간격을 내어주었다. 그 간격은 물러서거나 멀어지는 것과는 달랐다. 너를 안아주는 또다른 방법이었다.
뻗어가는 손끝에 닿는 초저녁의 공기가 못내 차다. 그러나 그 공기를 가로질러 현민의 뺨에 손을 얹었을 때, 그의 뺨은 항상 그렇듯 따뜻했다. 그의 뺨을 붉히는 것은 홍시가 아니라, 네가 시시때때로 너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흘렸던 꽃씨들이 초봄에 하나둘씩 톡톡 터뜨리는 꽃망울이었다. 황량한 대지에 뿌려진 재는 씨앗이 떡잎을 틔우고 나아가 꽃대를 올리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도, 너에게도. 네가 그의 뺨을 조심스레 쥐고 아래로 끌어당기면, 그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저항 없이 고개를 숙여 네게 눈높이를 맞추어준다.
"많이 기다렸어─"
하고, 그는 말했다. 뭔가 더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입을 네가 막았다. 현민의 눈에 끼어있는 속쌍꺼풀이 보일 정도로 그가 가까워졌다. 새까만 눈동자가 입술 위에 닿는 감촉에 그의 눈이 커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네가 눈을 감음과 동시에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이전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느껴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네가 입술 위에 남겨주는 감촉이 생전에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생경했고, 울렁거렸다.
림밥같은 것도 바르지 않는 그의 입술은 썩 부드럽지 않았다. 거칠다거나 버석버석하다거나 할 정도로까지 메말라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부드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입술은 따뜻했다. 네가 안겨주는 온기를 너무도 쉽게 머금었다. 그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네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네가 충분히 꾸욱, 하고, 네 마음을 그의 입술에 얹어놓고 물러서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도, 괜찮아."
하고, 현민은 배시시 웃는 너를 보곤 언제나 그렇듯 네 시선의 범위 안에서 손을 들어올려 네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가다듬었다. 문득, 새삼 현민은 네가 참 예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네 하늘빛의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이 운동장에 너와 자기 단 둘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동안 가슴 속에 있는데 혀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알아챈 말들을 재재 조잘조잘거리고 있는 네가 너무도 예쁘다. 네가 와르르 쏟아내는 그 반짝이는 말들이 너무 낯익고 너무 예쁘다. 나는 너를 앓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나 보다... 하고, 현민은 생각했다.
그러다, 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듯 던진 질문. 현민은 너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양 팔을 벌려서, 방금 내어준 반 발짝의 간격을 다시 좁히며 너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