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민이 그 말을 꺼낸 건 발렌타인 데이 저녁즈음이었다-로 시작해서 24일 복귀날 시점으로 써오면 되려나 장소는 어디? 현민이네 집? 아니면 현민이 복귀날에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려나? 아니면 합숙 버스가 학교 앞에 애들 내려줄 텐데 현민이 온다는 소식 듣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려나?
거기서부터 열흘 더 전인 14일, 그러니까 발렌타인 데이 날에 너와 함께 초콜릿을 갖고 이러니저러니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현민이 네게 불쑥 그렇게 말했다.
"야, 나 다음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부트캠프 합숙 훈련 있어..."
입학식을 치른 예비 축구부원들에게는 축구부 생활을 익히며 기존의 축구부원들과 손발을 맞추어나가는 축구부 생활의 시작이, 기존 축구부원들에게는 방학 연휴 동안 풀어진 기강과 느슨해진 팀워크를 다잡고 잠들어 있던 경기장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 훈련의 목적이라고 하던가. 겨울방학 기간에도 주기적으로 주에 2번씩은 훈련일정이 있긴 했지만, 부트캠프는 개학에 앞서 겨우내 잠든 감각을 깨우고 봄방학 기간 동안 축구부 시즌 일정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훈련이었다. 그래서 모든 축구부원들이 건강상 혹은 관혼상제상의 문제가 없으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만 하는, 3박 4일의 장기 훈련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마 다음주 월 화 수는 나 너 못 봐."
그 말이 네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무겁게 다가왔을까 아니면 가볍게 다가왔을까? 네가 준비되건 준비되지 않았건 시간은 흘렀다. 지난 학기의 가벼운 복습과 다음 학기의 예습, 영단어 암기와 문법, 종종 소꿉놀음 같은 스킨쉽과 같이 느긋하게 보내는 시간이 뒤섞인 일주일은 빠르게 지났고, 다음 주 월요일에 현민은 연락이 끊겼다.
합숙 훈련을 시작하면 핸드폰도 모두 거두어간다고 했던가. 가족에게의 연락도 축구부 학부모들을 모아둔 단톡방에 저녁 점호 때의 단체사진을 올리는 게 전부라고 현민의 어머니가 네게 말했었다. 그렇게, 그 소년이 없는 사흘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저녁 다섯 시다.
세 시쯤에 네게 연락이 왔었다. 이제 핸드폰 돌려받고 차에 탔노라고, 다섯 시쯤이면 버스가 우릴 학교 앞에 내려줄 것이라고.
그 말대로였다. 네가 도서관에서 일찍 나와 학교로 바삐 발걸음을 놀릴 때, 현랑고 축구부 합숙훈련이라는 플래카드가 차 앞뒤 유리창으로 걸려있는 관광버스 한 대가 한적한 도시의 도로를 가로질러 학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했을 때에는, 삼삼오오 흩어져가는 다른 축구부원 아이들 사이로 네게 너무도 익숙한 옷차림을 한, 익숙한 키에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보였다. 초봄의 짧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차가운 입김을 흘리며 초봄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네가 크리스마스에 선물해주었던 바로 그 더플백을 옆구리에 찬 채로 현랑고 축구부의 로고가 새겨진 캐리어를 옆에 끼고는 하늘로 두었던 시선을 내리며 누군가를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 살피기 시작했다.
월, 화, 수. 하루, 이틀, 사흘. 반나절 넘게 보지 못 하는 하루를 더해도 나흘, 고작 나흘이라고 생각했다. 잘 다녀오라고, 다치지 말라는 말이나 했었던 것 같다. 랑은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랑은 평소에도 네가 없으면 혼자였다. 어딜 가도 땅에 기우는 그림자는 한 사람 몫이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보다 혼자 있던 시간이 훨씬 길었다. 두배보다 길었고, 지구가 태양을 둘러 한 바퀴 빙 돌아도 부족했다. 랑은 자신이 있었다.
11월 초 즘이었겠다. 처음 너로 하루를 색칠하고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적막하고 삭막한 그 집의 공기가 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방문을 닫고서 괜히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너와 하루를 보내는게 익숙해지고, 내일에도 네가 있는게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질 때는 더 이상 공기가 무겁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깜빡 잠들기 전에 너와 보냈던 오늘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랑은 몰랐다. 네가 익숙해졌다는 걸 랑은 몰랐다. 깨닫게 됐을 때는 잠시 너의 부재가 찾아왔을 때였다.
주고 받았던 메세지 목록이 갱신되지 않는다. 24일에 보자고 보냈던 마지막 메시지 옆 읽지 않았다는 숫자 1이 얄미웠다. 앞으로 사흘 후까지 사라지지 않을 숫자인데, 랑은 괜히 그 1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는 걸 아는데, 이전에 주고 받았던 메세지를 곱씹어 읽었다. 메세지를 읽으면 네 목소리가 들린다. 옆에 있지 않아도 네 얼굴을 떠올릴 수 있고,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라고 랑은 생각했다. 훈련이 다 끝난 후에야 읽을 수 있겠지만 메세지를 보내보았다. 오늘이 훈련 첫 날이네, 새로 들어온 후배들이랑 인사는 해봤어? 나 보고 싶어도 힘내! 첫째날의 메세지는 역시 옆에 1이 붙어 있다. 나중에라도 보면 얼마나 응원했는지는 전해질거야- 랑은 내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째날로 메세지는 끝났다. 낯선 곳에서 훈련하고 자고해서 피곤하겠다, 밥은 맛있는 거 나와? 맛없어도 꼭꼭 먹어야 튼튼한 거 잘 알지! 그런 말들을 보내다가, 보고 싶다- 라는 네 글자를 입력했기 때문이다. 랑은 직접 톡톡 두드려 입력한 글자임에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용히 공부만 하던 도서관에서 폰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펜이 굴러 떨어졌다. 휴대폰부터 다시 주워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전송되지는 않았고 랑은 그 글자들을 지웠다. 채팅을 들어가지도 못했다. 무슨 말을 보낼지 겁났다. 그렇게 그 날의 공부도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책을 덮지는 않았는데 글자가 머리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진작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랑은 그 좋다라는 말이 네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건지를 하룻동안 고민했다. 필기를 하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네 이름을 적어놓았고, 축구공을 그려놓았고, 24를 끄적였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에도 네 생각이 쫓아다녔다. 집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춘 얼굴에 이른 봄꽃이 핀 것을 보고, 랑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다. 이불을 팡팡 걷어차는 소리가 났다.
셋째날, 랑은 느리게 깨달은 사실을 인정했다. 너를 좋아하는게 맞다고 받아들이자마자, 사무치기 시작했다. 고작 나흘이라고 생각했던 부재가 이렇게 커다랄 줄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앞이 아니라 네 집 앞에 와 있었다. 어떡하면 좋아- 랑은 밤길 한가운데 주저 앉았다. 도서관에서 나온 건 기억나는데,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 기억도 없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얼굴을 폭 감싸고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내일이면 네가 돌아오잖아- 생각하니 무언가 와닿았다. 너일리 없는데, 혹시나 하고 고개를 들어올린 랑의 뺨에는 밤길 골목 가로등 아래서도 또렷한 봄기운이 만연했다. 닿아온 것은 깐쵸였다. 네 어깨에 곧잘 올라가 앉아있던 고양이, 랑은 깐쵸에게 하소연을 했다. 네게 말못할 비밀이다. 깐쵸야아- 나 어떡하면 좋아- 울먹이는 것도 같은 목소리 때문인지 깐쵸는 랑이 안는 것을 허락했고, 랑은 깐쵸를 꼭 안고서 고개를 떨궜다. 나 현민이가 너무 많이 좋아, 너무 많이 좋아서 이상해- 큰일날 거 같아- 깐쵸에게 말할 뻔 했던 고백은 삼켜냈다. 고백한다면 네게 처음으로 말해야지, 랑은 고집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까지 시간이 흘렀다. 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하지에 대한 탐구가 오늘의 공부였다. 도서관을 가는 것치고는 예쁘장하게 차려입었다. 잊지 않고 네가 사주었던 머리끈으로 땋은 머리카락을 매듭지었다. 네게 어떻게 이 마음을 말해야할지 랑은 한참을 고민하고 또 앓았지만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이 드디어 네게 연락이 왔다. 5시까지 학교로 가야했고, 랑은 2시간이 그렇게 짧은 줄 처음 알았다.
"현민아-"
아직 학교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네가 타고 있을 버스가 휑하니 학교로 지나갔다.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어서 걸음을 재촉했고, 발을 디딜 때마다 혹시라도 넘어지지 않게 조심했다. 무릎에 생채기가 나면, 너는 상냥하고 따스한 아이니까 금방 눈치채고서 걱정할 지도 모르니까- 조금 빠른 속도를 냈을 뿐인데도 랑은 숨을 골랐다. 평소보다 빨리 걸어서가 아니라, 드디어 학교 앞에 흩어지는 다른 축구부원들 사이로 네가 보였기 때문이다. 랑은 네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를, 나를 찾던 네 눈을 마주치면 랑은 여지껏 조심하고 주의했던게 무의미하게 달음질을 쳤다. 다행히도 네 품으로 넘어졌다. 범고래 꼬리가 랑의 목에서 흔들렸다. 네가 괜찮냐고 물어보았어도 랑은 대답할 수 없었다. 온기, 향기, 심박, 랑은 너를 만끽했다.
훈련이 힘들지 않았는지, 지금 많이 피곤하지 않는지, 다친 곳은 없이 잘 다녀왔는지, 물어봐야할 게 많았다. 아까 도서관에서는 분명 훈련에 대해서 조금 운을 띄우고 나서 훈련하는 동안 그랬구나- 하고서 나는 네가 없는 동안 내 마음이 어땠다고 이야기해주면 그게 제일 낫겠다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처음 네게 하게 되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힘들었지, 그 무엇도 아니었다. 랑의 팔이 너를 꾹 안아온다. 애정어렸으면서도 네가 어딜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는 것도 같았다.
"좋아해."
어떤 꾸밈도 없이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제일 간단하고 쉬운 말, 그렇지만 여태 말하지를 않았던 말.
"좋아해, 현민아."
입김이 흩어지는 초봄의 초저녁인데 랑은 달뜬 뺨이- 머리에 열이 너무 올라 고장난 것 같았다.
"나 너를 좋아해."
입술이 달싹거린다. 세번이나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랑은 이 마음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