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빨간 빛이야 눈을 좀 가릴게, 자기야. 놀랄 것 없어 요즘에는 도무지 저것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어 이것은 그저 우리가 굴러떨어진 또다른 막장의 날일 뿐이야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1. 본 스레는 놀기위해 오는 거다 공부는 필요 없다. 2. 일상 중 불편하게 느낄 것 같은 사항이 있다면 사전 조율한다. 3. 본인이 뭐가 아니라고 느껴지면 웹박으로 쏘거나 넌지시 그리고 확실하게 상대에게 전달한다.
무대로 향하며. 그리고 무대에 서서 짧은 토크를 푸는 동안. 여인은 페로사와 제롬이 있는 쪽을 구태여 보지 않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시선을 조금만 돌렸으면 두 사람이 대화, 라기보다 페로사가 제롬에게 귀뜸해주는 장면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여인이 자리를 비우면 그러리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굳이 볼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페로사의 참견은 제롬에게 뿐만 아니라 여인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여인은 기만자이면서 잔인한 사람이었다. 제 약점은 교묘히 숨겨 놓은 채로 상대의 약점을 찾아 내어 쥐고 흔드는 건 기본이었고. 단지 후일이 궁금하다는 이유 만으로 타인의 속을 들쑤시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벌이라는 이름으로 괴로운 선택을 제롬에게 쥐어 준 것도 그 일부였다.
아마 이곳이 앤빌이 아니었다면. 페로사가 없었다면 여인은 그 이상의 것을 제롬에게 들이 밀었을 터였다. 더 아프고 괴로운 선택을 강요했겠지. 조언자도 중재자도 없는 자리에서 둘의 관계는 어쩌면 파탄 났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비틀어질 뻔 한 사이에 기꺼이 끼어들어 준 페로사에게 어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노래를 마치고 돌아 온 자리에서 여인은 다시금 그 기분을 느꼈다.
"음. 마시고 싶은게 생각나면 말할게."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술로 목을 축인 여인이 페로사를 보며 대답했다. 새 잔을 받기 전에 얘기를 들어야 했다. 이제부터 제롬이 하는 말을. 여인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줘. 라는 말로 시작된 제롬의 목소리에 여인은 귀를 기울였다. 여인의 뒤로 돌아와 안아오는 팔을 거부하지 않고. 가까이에서 먹먹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급하게 말하지 않아도 다 듣고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숨도 쉬지 않고 말한 탓에 가빠진 숨소리를 들으며 쿡, 하는 짧은 웃음이 새었다.
"정말, 기회는 한 번이면 되겠어? 그 한 번을 어기지 않으려다 망가지는 건 내가 곤란한데 말야."
짧은 웃음에 한기가 모두 가신 듯. 여인의 나긋한 목소리가 제롬에게 말을 걸어왔다. 따뜻하진 않지만 차갑지도 않은 여인의 손이 올라와 여인에게 기댄 제롬의 얼굴을 감쌌다. 돌아보면 희미하게 미소를 띈 여인의 얼굴이 제롬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말했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기 있을 테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하면 돼. 그것이 네 선택이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 들여 줄게. 네가 나를 필요로 하면 그만큼 나를 내어 줄 거고. 기회도 줄게. 몇 번이든."
나 역시 네가 필요하니까. 그게 나를 위해서든. 너를 위해서든.
어느새 평상시와 같은 웃음을 만면에 띄운 여인이 고개를 돌려 제롬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스쳤다. 정말 스친 정도로만 그래 놓고 제롬의 손을 잡아 다시 옆의 자리로 이끌어 앉혔다. 키득키득. 장난기 어린 웃음 소리가 짧게 지나갔다. 여인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바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페로사를 향해 말했다.
"아, 아. 롯시 앞에서 이런 추태 아닌 추태를 보였으니 당분간은 또 못 오겠는 걸. 그러니까, 꼭 다시 오고 싶어질 만큼 맛있는 걸로 한 잔 부탁할게. 롯시이."
일부러 늘이는 말투나 하는 말이 참 얄미웠겠다. 이제야 완전히 돌아 온 여인만의 분위기가 반가웠을 지도 모르고.
검붉게 타오르는 비명. 하늘을 반으로 쪼개는 섬광. 세상을 기울어뜨리는 진동. 영영 무너짐 없이 자신을 가둬놓으리라 생각했던 시설동의 천장이 무너지는 그 순간. 가축들이 인간을 상대로 반기를 든 그 날. 많은 피가 흘렀던 날.
검붉은 하늘을 기억한다. 온 사방에서 자신을 둘러싸는 굉음도, 그 모든 섬광도. 시간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자신에게 운명처럼 당도한 그 순간도.
그 모든 난리통 사이에서, 판옵티콘과 함께 마지막 층계가 무너지면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렸을 때. 그녀는 누군가를 가장 먼저 찾았다. 자신이 찾아서 데려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아니 찾아서 데려가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광란에 빠진 채로 지하에 난 구멍에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그녀는 미친 듯이 손을 뻗었다. 쳐내고, 밀치고, 헤치며, 악다구니를 써서 인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이 찾는 누군가가 제발 자신의 눈에 띄이길 바랐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애타게 찾아헤매던 아스라한 겨울색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빛을 잃고, 초점을 잃어버린.
경기장에 놓인 숱한 패자들과 다르지 않게 되어버린.
겨울색의 눈동자를 머금은 고운 머리는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고운 눈매 위로 그 빛깔을 잃은 금발들이 처덕처덕 늘어져 있었다. 그 가녀린 목은 누군가의 손에 그러쥐어져 검붉게 물들어서는 더 이상 그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목을 잡고 있는 누군가는 싸늘한 조소가 어린 회색의 눈동자로 그녀를 주시해오고 있었다. 마음껏 울부짖어라. 바뀌는 건 없을 테니.
'이 개자─'
있는 힘껏 내질렀다고 생각했는데 개미 짖는 소리만큼도 목소리가 안 나왔다. 페로사는 자신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장소에 자신이 놓여있다는 걸 눈치챘다. 편안한 안정감과 푹신한 감촉. 코끝에 부드럽게 와닿는 푹신한 향기. 자신의 방에 깔아둔 매트리스 커버와는 전혀 다른 순백색의 커버와, 새하얀 이불자락. 무엇보다, 품 안에 안겨 있는 자신의 것이 아닌 온기와 심박음.
페로사는 자신의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따로 닦거나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페로사는 지금 품 안에 기대어있는 이 소년/소녀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어느 쪽이 현실인지 가늠하기 위해 한번 조심스레 직전까지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지금 되짚어보면 꿈과 별로 차이가 없는 기억이긴 했다. 두려운 조마조마함을 안고 극단적인 초조함에 시달리면서 붉은 하늘 아래서 미친 듯이 자신이 원하는 그 사람을 찾아헤메는 기억이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비극적인 종말과 극적인 재회 중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인가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페로사는 손을 내밀어 품 안에 기대누워 있는 이의 머리를 쓸어보았다. 붉은 빛이 섞여있는 투명한 백금발을 조심스럽게. 그 아이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비록 목둘레에 멍이 조금 들었지만.
확실히 아까의 그것은 악몽일 뿐이다. 악몽과 현실은 엄격하고도 간단하게 구분되었다. 페로사는 악몽과는 다른 현실에 도달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지금 이 아이가 자신의 품 안에서 평안히 잠들어있는 지금 이 순간이 명백한 현실이었다.
페로사는 잠들어 있는 아이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자기처럼 나쁜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은가, 숨은 잘 쉬고 있나 하는 조바심이 들었던 것이다. 오, 그 조바심이 어찌나 소소하게 느껴지던지... 페로사는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너와 나라면, 어떤 하늘 아래에서라도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러나 문득 페로사를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이다.
아마 또 다시 그런 악몽을 꾸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또다시 그를 찾아 갈팡질팡할 때도 있을 테고, 어느 날에는 두려움에 빠지고 어느 날에는 슬픔이나 분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날 무너지는 전당에 모두 가지런히 버려두고 왔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감정들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녀를 옥죄어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페로사는 본인이 또다시 헤어날 길 없는 저주에 걸려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저주를 그 어떤 축복보다도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것이 두려워서 포기하기에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 컸다. 자신의 하늘이 되어주마고 맹세한, 자신이 본 적 없는 색깔의 말간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녀는 이것에, 비탄의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미친 짓에, 뉴 베르셰바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사치에 기꺼이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녀는 잠든 아이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잠이 들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그녀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딱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서 그녀는 오늘의 일정을 한 번 다시 머릿속으로 점검해보았다. 오늘은 꼭 몇 군데 들러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회색 눈동자를 마냥 두려워하기엔 그녀는 이미 나이를 충분히 먹었고 다 컸으며 철도 들었다. 이제 나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려줄 수 있을 만큼.
그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상황이었다. 신체의 어느 부위건 내 몸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육성해나갔다. 그것도 누군가의 아주 주도면밀한 계획 속에서, 내가 만일 그것을 알아차리지 않고 계속 흘러가기만 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 남자의 꼭두각시로서 살아가고 있었겠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가장 강해지거든. 너는 그 결과에 가장 부흥하는 성공작이지. 동시에 가장 최고의 실패작이기도 하지만.』
그 인간의 조건에 맞게 성장한 소녀병 중 생존자는 나였기에 가장 부흥하는 성공작이었다. 그 인간에게 종언을 선고하고 끝냈던 것도 나였기에 가장 최고의 실패작이었다. 나는 이름조차도 없으며 마녀라고 불리우고 종언의 종소리를 선고하는 인간의 탈을 쓴 병기.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어디선가 부터 되찾았을 뿐.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나는 그런 존재니까.
"전자 제품은 물리적으로 좀 때려주면 멀쩡해진다던데."
아무렴 어떠랴.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도 자유고 살아있다면 굳이 폄하할 이유는 없다. 단지 긍정적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하늘이 사람을 돕는다는 구원적인 이야기를 논한다면 나는 신이 없다고 장담할 인간이다. 이 세상에는 구원같은 것은 없으니까.
"샛길은 험할수록 빠른 법이다."
나는 좀더 속력을 내서 이곳저곳의 샛길을 통해 카페로 향했다. 일반적인 루트에 비해 약 3-4분정도의 절약일까.
A-13 구역 카지노, 도원향은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에만은 적당히 즐길 만큼 즐기며 웃고 떠들다 가는 사람을 지나치고, 파산 직전에 몰려 불안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사람을 지나, 경호인력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에 한 발 내디뎠다. 그런 에만과 달리 용왕은 알현실 안에서 캐노피 달린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 거만하고 고압적인 고대 귀족 같은 태도를 고수하는 실루엣만 이따금씩 비칠 뿐, 얼굴과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침대 앞으로 한 남성이 연 씨에게 제압당해 강제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용왕이 듣기 좋고 기교있는 어조의 바리톤으로 말했다.
"형제의 죄가 제법 깊어. 감히 내 영역에서 내 비호를 받는 사람을 해친 점, 타 구획의 사람까지 휘말리게 해 분쟁을 일으킨 점, 반성하지 않고 타 조직과 손잡아 나를 치려는 계획을 세운 점. 이 모든 것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손실을 봤는지 아는가?"
대답이 없었다. 허튼 단어라도 뱉었다간 혀가 잘릴지도 모를뿐더러, 연 씨가 말을 하지 못하게끔 머리를 짓밟은 탓도 있다. 용왕은 그런 남성을 바라보다 불현듯 상반신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변을 죽 둘러보더니 허공에 코를 세웠다. 꼭 짐승이나 늑대가 보이는 행동 같기도 했다. 다시금 몸을 뉘자 반투명한 베일 너머의 인영이 일렁였다. 그 잠시간의 침묵 뒤로 손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자비로운 처사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형제여, 감히 반역을 도모한 것은 그 자체로 죄가 깊으나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살려주도록 하지." "밖으로..?" "그래. 내 진심이야. 대신.. 마오, 이리 온."
대리석 짙은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무언가를 질질 끌며 걸어왔다. 검은 머리를 양 갈래로 쪽지고, 모란 장식을 한 여성의 인영이 드러나자 연 씨는 제압을 풀고 용왕의 침소 근처로 걸어가 뒷짐을 지고 섰다. 기껏 시체 처리 조직을 불렀는데 오늘 또 부르게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양껏 도망 쳐봐. 날 즐겁게 하면 더 좋고."
란 자매의 손에 들린 기다란 봉 끝에 매달린 철로 된 추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있었다. 마오라 불린 여성이 묵직한 철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 뒤 겨우내 양손으로 봉을 잡아내는 모양새에, 남성은 천천히 뒤로 기듯 움직이다 이내 엉거주춤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다. 저 무기를 끌고 오는 것도 무거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어떻게 쫓아오겠는가? 이대로 밖으로 나서면 바로 조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본 용왕의 모습을 낱낱이 고하고, 안토니에게… 문고리를 턱 붙잡은 남성이 문고리를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들었다. 문이 잠겼다. 용왕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기 위해 뒤로 돌았던 남성은 어느새 란 자매가 쫓아오자 욕과 고성을 내뱉으며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던 용왕이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된 양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다 고개를 돌렸다.
"연 형제. 근래 날 적대하는 세력이 늘었어. 왜라고 생각하나?" "……자업자득이라 생각하셔야지요. 따거의 싹수가 바가지인 걸 셰바 사람들이 모를 것 같나요?"
한쪽 공막을 검게 물들인 연 씨가 쫓고 쫓기는 모습을 구경하며 넌지시 말하기가 무섭게 딱 소리가 나며 연 씨의 고개가 좌측으로 툭 꺾였다. 미술용 지우개가 대리석 바닥에 퉁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용왕이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 씨는 아프지 않지만 손을 들어 오른쪽 관자놀이를 문지르더니, 이내 엄살을 피웠다.
"아야." "내가 이래서 연 형제랑 대화하기가 싫은 거야." "쓴 소리를 듣기 싫은 거겠죠." "나가." "설마 저도 란 사매와 같이 1층이나 경비하라 그 소리인지?" "무슨 소리야. 피갈이 준비나 하라는 뜻이지." "미쳤어요? 이번 상품 배팅 금액이 8천만 벅이 넘었는데 무슨 피갈이를 하신단 말입니까. 차라리 계단 경비를 시켜주시면 안 되나요?"
마침 란 자매가 소파 밑으로 기어 숨어들려는 남성을 붙잡으려 하던 참이었다. 언제 철퇴가 스쳤는지 한쪽 팔의 살점이 뜯겨나간 남성을 보며 연 씨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소파도 청소하려면 돈 깨나 들겠다. 8천만 벅, 2천만 벅.. 상품 말고 청소는 얼마가 들더라. 우리 청소도 값이 만만찮을 거고.. 용왕은 그러든 말든 여유롭게 받아쳤다.
"자업자득이지. 형제의 싹수가 바가지인 걸 원망하게." "하아.. 절대 한 번을 안 넘어가지요." "아무렴, 하극상은 처음부터 짓밟아야 하는 법이지." "그럼 첫 숙청 때 저도 보냈어야지요." "흠.. 글쎄.. 자네는.. 아, 마침 문이 열리겠군." "말 돌리지 마시지요." "형제, 내가 왜 고양이를 기르는 지 아는가?"
용왕의 촉은 귀신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다. 밖에서 잠긴 문이 잠깐 달각거리며 열렸고, 남성이 마지막 젖 먹던 힘을 쥐어짜 뛰어가던 순간 운이 좋게도 문이 활짝 열렸다. 나쁜 점이라면 그 앞에 서있는 것이 미네르바의 부엉이었다는 점이다. 에만은 눈앞으로 달려드는 남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대로 굳었고, 용왕은 연필을 쥔 주먹을 까딱였다. 베일 너머의 인영이 얄밉게 손을 까딱이는 광경이 훤했다.
"쥐를 잘 잡기 때문이지. 야옹!"
란 자매는 언제 굼뜬 모습을 보였냐는 양 한 손으로 철퇴를 쥐고 호랑이처럼 성큼 뛰어가더니 그대로 있는 힘껏 남성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부엉이의 바로 앞에서 남성의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피벼락을 맞은 에만은 가면에 튄 피와 함께 쌍욕을 내갈겼다. "씨발, 뭐야!" 남성이 털썩 쓰러지고 란 자매는 에만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철퇴를 내려놓았다. 묵직한 쿵 소리를 뒤로 란 자매는 팔을 벌리더니, 그대로 에만을 품에 양껏 안으며 볼을 부벼댔다.
"악마 같은 부엉이 안녀엉! 오랜만이야! 초콜릿 엄-청 맛있었어! 사실 마오, 화 내려다가 초콜릿 더 먹고 풀었다? 잘했지! 브라우니도 엄-청 맛있었어! 꾸덕꾸덕하고.. 부드럽고.. 또.." "..그래, 안녕.. 답답하니까 놔주지 않을래.." "꼴이 말이 아니구나, 내 사랑스러운 조카." "조카는 무슨, 좆까는 소리 하고 있네.. 나 이거 오늘 새로 산 옷인데, 세탁비 청구하면 되는 거지..?" "저번 간식값이라 생각하지 그러니." "뒤끝 하고는!" "마오, 손님께서 불편해하지 않더니. 죽은 손님을 배웅해주고 오거라."
란 자매는 잔뜩 고양된 표정으로 에만에게서 떨어지고 죽은 남성의 머리를 한 팔에 안고, 다른 손으로는 발목을 덥석 쥐며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 작은 콧노래 소리가 울렸다. 아마 계단 밑으로 시체를 떨구고, 그다음에 머리를 발로 걷어차 구르도록 둘 것이다. 에만은 안으로 들어서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괜히 왔지. 용왕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니?"
손에 쥔 연필을 내려놓으며 제 조카가 있을 방향을 바라본다. 용왕이 그린 그림은 그림자 때문에 보이지 않았으나, 우리에 갇힌 동물을 그린 것은 확실했다. 미카엘이 가면을 벗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락 넣어서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바라." "일상을 영위할 줄 알았지." "이미 목까지 졸린 이상 어쩔 수 없잖아. 엿이라도 한 번 먹여줘야지." "그래, 그렇다면.. 내 하나 묻자꾸나. 이 도시에서 누가 상처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지?"
용왕이 느릿느릿 베일 너머로 몸을 드러낸다. 긴 한푸 자락과 더불어 곱게 땋아내린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살랑였다. 발걸음의 보폭은 규칙적이고,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훤칠하고 영준한 모습이 우아했다. 용왕은 에만의 앞에 서 뒷짐을 졌다. 키 차이가 확실했다. 그렇지만 용왕은 에만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오로지 앞의 웅장한 문을 쳐다볼 뿐이었고, 그 사실이 에만을 불편하게 했다. 앞만 보는 사람 같았다. 아니면.. 용왕이 알현실 문을 한 손으로 짚어 밀기 전 잠시 손잡이를 매만지며 멈춰 섰다. 미카엘은 그런 용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상처를 가릴 수 있는 사람과 상처를 내보이고도 당당한 사람으로 나뉠 뿐이지. 가해자와 피해자도 없어, 가해자만 존재하는 도시에서 뭐가 잘났다고 피해자를 운운하겠나.. 사랑하는 조카야, 우리는 태생부터 다르단다."
용왕이 그제야 고개를 내렸다. 내리감긴 눈은 미소 짓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용왕이 문고리에 손을 떼더니 문 자체에 손을 짚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땋아내린 긴 머리가 뱀처럼 불쑥 쏟아지고는, 그렇게 에만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눈을 가늘게 떠 시선을 마주했다.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상 선택권 따위 없지. 죽거나, 죽이거나.. 타협할 수 있는 바깥과는 다르다 그 말이란다. 우리가 무얼 선택한들 바깥의 사람처럼 나은 결정지가 있을 거라 보더니?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들 타인이 그 희생 고결하다 하지 않고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았다며 짓밟고 올라설 것이며 타인을 희생시키면 주변이 분개해 칼과 총을 들고 쫓아오는 것이 셰바인데, 붉은 핏자국을 암만 가려본다 한들 지워질 것 같더냐."
미카엘은 침묵했다. 미카엘이 윈터본의 피를 물려받았다 한들 세월의 격차는 달랐고, 한때 '흰 이리'라 불리던 늙은 노괴는 아이를 몇 문장으로 순식간에 제압하며 분위기를 압도하기 충분했다. 노괴가, 용왕이 낮게 속삭였다. 울림 좋던 바리톤의 음색이 삽시간에 짐승이 그르렁대듯 낮게 울렸다.
"그렇기에 바깥에서 아무리 우리를 짐승이라 취급한들 우리는 바깥을 천하다 생각하는 게야.. 규칙에 굴종하며 바닥을 기는 것이 행복인 줄 아는 바깥의 멍청한 것들과 우리는 피부터 다르기에. 아예 사는 세계가 다르단 말이다. 이곳에서 어지간한 바깥의 도덕은 통하지 않지. 하나 남은 양심? 남아있는 이성? 모두 무슨 소용이더니. 건드리면 이곳의 질서가 바뀌며 정부가 세워지며 악이 처단되며 면죄부가 생길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 악이 처단되면 우린 다 죽는다. 때문에 선심 쓴다며 천한 것들이 짐승 새끼들에게 면죄부 주어봤자 그 목 물어뜯고 살점 뜯을 생각 만연할 뿐이란 말이다. 난 그깟 면죄부도 필요가 없다. 더 짓밟고 더 먹어치우고 더 올라갈 생각이지. 내 비록 언젠가 이 몸 산 채로 포 뜨이며 죽더라도, 그 이전에 죽일 만큼 죽이고, 가질 만큼 가지고, 누릴 만큼 누리며 화려한 삶을 살고 죽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가, 이 제안을 한 걸.. 후회하는 거야?"
용왕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용왕이 문을 짚지 않은 손을 들어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피 묻은 손이 아님에도 붉은 궤적을 남기듯 스산했다. 용왕은 더듬거리며 입을 떼는 미카엘을 내려다보며 가늘고 긴 미소를 지었다. 지레 겁먹은 표정임에도 할 말은 다 뱉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아가, 아무리 후회한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상 광인인 법. 그런 광인을 어설프게 다루려면 내가 아주 잠시나마.. 정상인의 감상을 느낄 시간을 주었겠지. 그랬다면 내가 네 제안을 거절하고 요 1년간 은거하며 재판만 하던 용궁의 왕이 직접 나설 일이 없었을 텐데.. 요 기특한 것. 너도 결국 셰바다. 네 결단력은 누이를 방불케 할 정도로 잔악하기 짝이 없구나. 지금 넌 내가 날뛸 기회를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용왕의 미소를 마주한 미카엘의 표정이 일순 공포에 젖었다. 잘못 건드린 것 아닐까, 날뛰고 팽하겠단 뜻인가, 설마 어머니와의 맹약을 그리 깨는 것인가? 지금까지의 언사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린 것 같았다.
"적이 많을수록 이 오라비는, 이 외숙부는 기쁘기 한량없으며 널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뜻이다. 내게 즐거움과 부를, 그리고 악명을 떨칠 기회를 주는구나. 참으로 대단한 아이야.. 네 아만이라 부르지 아니하려 했거늘 그 담대한 태도가 아만과도 같다. 그래, 조만간 사람을 부르거라. 내 친히 당도할 터이니. ..오, 아가, 더 얘기하고 싶으나 이만 난 가야겠구나." "ㅇ, 어디.. 가는데..?" "연옥. 오래간만에 피갈이를 할 생각인데, 구경 올 테니? VIP석에 앉혀주마." "..잠깐 대화만 하고." "아무렴, 원껏 하다 오거라. 셰바에 온 걸 환영한단다, 미카엘."
용왕은 망설임 없이 문을 밀어 젖혔다. 그리고 옥좌에 앉아 가만히 카지노를 내려다봤다. 곧 주변의 풍경이 눈에 익으면 일어나 시체의 피로 얼룩진 계단을 내려가고, 피 묻은 발로 건물 지하까지 갈 것이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다. 알현실 문틈에서 미카엘은 가면을 만지작대며 그대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용왕을 기어이 포섭하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지지하는 것은 부엉이 하나뿐이니 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미카엘은 낭자한 피를 보며 청소 업체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던 연 씨를 쳐다봤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느낀 연 씨가 고개를 들었다.
"따거께서 오늘 좀 험악하셨죠. 다만 드린 정보가 민감했던 사실은 변함이 없네요. 그래서, 제겐 무슨 볼일이신가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떤 말씀이신지.."
제법 섬뜩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곧 이 도시에선 '오떻게든 목숨을 연명하는 방법'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물론 이곳에 사는 모두가 누군가를 해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힘이 없기에 물건을 팔아 목숨을 부지하고, 누군가는 도굴을 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도시의 밝은 면을 연기하며 제법 평범한 일들을 이어나가곤 했다.
단지 그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악인이었다.
한껏 순화시켜 말해봤자 '죄인'을 벗어나지 못하는...
"별다를게 없답니다. 그저 살아가는 거죠. 아무리 밑바닥 인생이라도, 그것마저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그녀가 비록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채 살아간다 한들 머릿속까지 꽃밭인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을 위하는 이타적인 성격이나 누구보다 시니컬한 태도를 종종 보였고, 오히려 타인보다 더 냉정했으며 추상보단 논리를 따졌고, 신보다는 자신을 만든 과학에 더 치중했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성스러운 의미로 신을 찬미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상스러운 의미로 받아들이지나 않으면 그나마 나을 정도일 것이다.
혹자는 그녀야말로 신의 대리인이자 분신이라 칭하기도 했으나, 다음날 그 소문을 퍼뜨린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곳은 그런 도시였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이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딱히 어떠한 비밀이 있어 입을 다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침묵을 유지함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서니까,
"전 전자 제품 아니니까요~ 전자기 펄스로 정지되지도 않구요~ 너무 사람 취급 안하시고 그러면 저, 속상해할 거랍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사람 역시 전기신호로 반응하기 때문에 영향을 아얘 안받을 수는 없을 테지만, 무엇보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면 인간이라도 제 명에 못살겠지만... 애초에 그런 과학적 군사장비가 베르셰바에 제대로 남아있기나 할런지, 물론 전자 제품은 아닐지언정 맞으면 간혹 정신을 차리기도 하는게 곧 인간이었다. 굳이 그녀라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을까?
"그럼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주시라구요~ 앗차, 속았구나. 같은 생각이라도 안하도록 말예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뒤쳐지지는 않는, 오히려 당신의 페이스에 점점 맞춰가는 그녀였다. 당신도 그렇고, 길거리의 사람들도 그렇고... 대체 이 도시 사람들은 샛길을 왜 그리 좋아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