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걸려서 뭔가 답을 찾은 거 같은데 2초만에 까먹어버렸지 뭐야 내 인생이 그렇지 뭐 이따 보자고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1. 본 스레는 놀기위해 오는 거다 공부는 필요 없다. 2. 일상 중 불편하게 느낄 것 같은 사항이 있다면 사전 조율한다. 3. 본인이 뭐가 아니라고 느껴지면 웹박으로 쏘거나 넌지시 그리고 확실하게 상대에게 전달한다.
포레 성격이었다면, 제롬이 발과 손을 들이밀었어도 문을 닫아서 내쫓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안쪽에서 누군가에게 문자를 하던 로노브가 고갯짓으로 하지 말라 신호했다. 그래서 제롬은 고개를 들이미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터였다. 단지, 그 이후가 좀 거칠어졌지만.
"애X끼가 주제도 모르고."
여인의 안부를 묻는 제롬을 보고 포레가 내뱉은 말이었다. 제롬의 걱정이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순수한 분노 만으로 제롬을 대하고 있었다. 포레는 대답 대신 제롬의 멱살을 잡아 안으로 잡아 끌었다. 문에 치이던가 말던가 어거지로 끌어 들여 팽개치듯 놓은 뒤 잡화점의 문을 닫았다. 쾅. 하고 문 닫히는 소리 뒤로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이어졌다.
"내가 먼저 물었지.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찾아와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냐고. 주둥이가 있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냐. 귓구멍이 막혔어? 일단 뚫어주면 대답할까. 어?"
낮게 씹어뱉은 말들과 함께 성큼 제롬에게 다가간 포레가 다시 제롬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막 손을 들은 순간, 약간 떨어져 있던 로노브가 빠르게 다가와 포레를 제지했다. 한 팔로 포레를 막아 선 로노브가 그대로 제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전 스쳐지나갔을 때 보였던 그 적개심 가득한 금빛 눈이었다.
"보시다시피. 현재 보스는 출타 중이십니다. 미스터 커넥션. 용건이 있으면 추후에 다시 찾아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시선과 달리 로노브는 매우 정중한 말투로 제롬에게 말했다. 로노브의 행동을 보고 포레는 한발 물러서며 혀를 찼다. 더 막을 필요가 없어진 팔을 내리고 자세를 가지런히 한 로노브가 말을 덧붙였다.
"가능하면 이후에는 안 오셨으면 합니다."
또다시 내려진 축객령은 닿으면 얼어 부서지지 않을까 싶은 한기가 담겨 있었다. 차라리 포레의 불 같은 분노가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페로사]
평소였다면 이런 모습으로 와서도 능청을 떨고 페로사의 부축을 받으며 되도 않는 수작질 비슷한 걸 했을 터였다. 조금은 짖궂은 장난을 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페로사의 부축에도 여인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흔한 고맙다는 말도 없이 걸어가 스툴에 겨우 몸을 올렸을 뿐이었다.
"음... 아냐. 잘 어울려. 그러길래, 전부터 그런 옷도 좀 입고 하라니까..."
여인 역시 예전 생각이 안 난 건 아니지만. 그걸 말로 꺼내기엔 말 하는 것이 힘들었다. 언제나 잘도 움직여대던 혀가 오늘은 왜 이리도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지. 앞에 놓인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면 나아질까 싶어 잔에 손을 올렸다가, 희미하게 잔이 떨리는 걸 보고 손을 거뒀다. 그리고 몇마디 중얼대다가 얼굴을 가려버린 것이었다.
얼굴을 가린 손 너머에서는 숨소리도 새지 않았다. 스스로 눌러 숨을 막은 것처럼. 참 꼼꼼하게도 가린 덕에 표정도 기색도 어느 것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앞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부축까지 해 준 페로사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으로나마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제법 한참이 지나서였다. 여인의 얼굴에서 손이 내려가 눈가 만이라도 슬며시 드러나게 된 때는. 분명 가리기 전에는 창백하던 얼굴이었건만. 반쯤 내려간 손이 내보인 얼굴, 그 눈가는 선명히 붉어져 있었다. 얼마를 마셔도 얼굴이 붉어진 적이 없었던 여인이 아직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눈가부터 붉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 전에, 여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심히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로시. 나, 있잖아... ...또, 버림 받았나 봐..."
띄엄띄엄 나온 말은 고작 그것 뿐이었다. 말은 짧았으나 함축된 의미는 너무나도 컸다. 여인은 여전히 눈가 만을 내놓은 채 시선을 들어 페로사를 바라보았다. 꾹꾹 눌러 참듯이 눈웃음을 지으려는 시도가 선명히 보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건 혀 만이 아니었다. 눈웃음은 금새 일그러졌고. 눈가엔 물방울이 금새 차올랐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엔 가는 소리와 함께 짤막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어떡하지..."
엎드릴 듯이 숙여진 고개 아래로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이 쏟아졌다. 그 탓에 드러난 어깨가 한기라도 맞은 듯 떨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페로사의 폰에 문자연락 한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라 베르토의 로노브. 혹시 거기에 여인이 갔는지, 갔다면 이 연락에 대해 말하지 말고 붙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제롬: 아스타로테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화려한 사람 곁에 내가 있는게 문제지... 제롬: ...아, 인생. 차라리 마음이 안 넘어갔다면 더 편했을텐데 말이야.
페로사: 아스타로테가 과연 자기만큼 화려한 사람을 바라서 너한테 다가왔겠냐, 요녀석아. 페로사: 술병보단 술맛이지. 술병까지 예쁘면 좋기야 한데, 안 예뻐도 그만이잖아?
제롬: ...페로사, 기운 빠지는 소리해서 미안하지만, 난 술 맛도 좋지 않은, 싸구려 럼주 같은 사람이야 제롬: 아스타로테가 내게서 뭘 보고 다가왔는진 모르겠지만... 제롬: 아마도 그건, 착각이겠지...
페로사: 로테 그 기집애가 나한테 삐져있지만 않았어도 정수리에 혹 하나 큰 걸로 만들어주는 건데 쓰읍. 페로사: 잘 들어. 누군가에게서 소중하게 여겨진 순간부터 그건 싸구려가 아니야. 페로사: 분명 본인 스스로 보기엔 어 아닌데? 완전 아닌데? 난 싸구련데? 하는 생각- 들 수 있어! 이해해, 응! 페로사: 그런데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는 시각은 굉장히 양극단이라는 거. 과한 자아도취 혹은 과한 자아비판 들 중 하나야. 페로사: 로테는 말이지, '그때의 너'를 원했어. '지금의 너'와 똑같은. 그걸 명심해. 스스로가 불쌍하게 생각될 수는 있는데, 스스로를 잃어버리진 마.
제롬: 하, 제발 그런 이야기좀 하지마.. 제롬: 그런 이야기 하니까, 스스로를 나은 사람이라 착각하게 되잖아... 제롬: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혼란스러워서... 제롬: ...미안해. 그냥 방금 이야기는 잊어줘. 제롬: 네 말은 고맙지만 난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지도 몰라.
페로사: 그래. 모든 것에는 준비가 필요하지. 페로사: 당장 눈앞에 놓인 단서는 적어. 조금 더 시일을 두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페로사: 이 도시가 워낙에 빌어먹을 곳이라 시간이 없을 거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을 거라고. 페로사: 자- 이건 바텐더가 서비스로 주는 한 잔이야. 시원하게 마시고 머리 좀 식히라구.
하는 이야기를 제롬주랑 잡담하면서 나눈 적이 있었는데 (몇 스레인지는 기억 안 남) 당시에 페로사주가 이것도 있었던 대화로 할래? 라고 했었다가 제롬주가 이 대화는 앤빌에 직접 찾아가서 해보고 싶다고 하길래 일단 묻어두자고 했었지. 지금이라도 이런 대화를 나눈 적 있다고 해둘래?
손은 제2의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손을 보면, 얼굴 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그 삶의 흔적의 일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당신의 차가워 보이는 손은 희었고, 섬세해 보였으며, 힘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신의 자리와는 부조화한 그런 손이었다. 가죽 장갑 아래로 숨겨진 당신의 손이 이렇게 여렸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마주하며 얽혔던 시선을 당신이 먼저 피한 것을, 시안은 놓치지 않는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물기 없이 마른 싱크대는,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별하는 당신처럼 인간미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냥 주고 싶으니까...."
당신의 물음에 시안은 비교적 선명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리고 당신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작은 호의나마 이미 제게 베푼 것이 있는걸요." 하며 덧붙여 말한다. 왜냐는 당신의 되물음 뒤에 이어지는 한숨 소리를 듣고서 시안은 제 손을 꼼지락 거린다. 괜한 소리를 했을까. 그냥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그런 평범한 멘트나 했으면 좋았을 것을. 변명하듯 시안은 당신의 물음에 답한다.
그냥 주고 싶었다는 당신의 말을 듣고 다른 방향으로 돌렸던 브리엘의 구리색 눈동자가 힐끗, 곁눈질로나마 당신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나른한 기색이 있는 눈매를 접어내리면서 브리엘은 싱크대 위에 손을 올리고는 일정하게 검지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리는 검지 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감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전혀 모르겠네. 내가 당신한테 호의를 베푼 적이 있다고?"
하- 하고 브리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처럼 짧게 숨을 내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컵 하나를 더 가져와서 물을 담아서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마도 첫방문 때 물을 찾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곧 다시 크리스탈 잔에 위스키를 채워넣었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다고? 시안의 말처럼 기억을 더듬어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브리엘은 치켜올렸던 눈썹을 내려서 찡그리며 잔을 들어올려서 아직 남아있는 위스키 향을 덧씌웠다. 얼음을 넣지 않아서 온더락보다는 스트레이트에 가까운 맛이 혀를 지나서 속을 적시는 걸 고스란히 느꼈다.
"잊었을지도 모르지. 이 도시가 마음놓고 웃기에 좋은 동네는 아니잖아."
그러고보니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브리엘은 무감한 표정을 조금 찌푸리면서 느릿하게 답문을 내놓았을 것이다. 어느새 위스키가 담긴 잔을 놓고 오른손으로 왼손목을 감싸듯 매만지며 당신을 응시하는 구리색 눈동자에 무감한 빛이 감돌았다.
평소였다면, 여기에서 조금은 물러났을 것이다. 순수한 분노에 분노로 답할 정도로 그는 어린 사람이 아니었다.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고자, 조금이라도 상대의 기분에 맞춰 행동했겠지. 문제는 지금 그는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수없이 한 연락을 받지 않았던 자신, 그리고 연락했으나 받지 않는 아스타로테. 이 일련의 상황은 그의 불안에 부채질을 했고, 망상이나 다름없는 그 생각은 가속화한다.
"아스타로테는, 어디 있냐고."
씹어뱉는 말에 제롬은 포레를 노려보며 낮게 뱉어낸다. 그러던 찰나, 로노브가 제지하자 제롬은 로노브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가. 금빛 시선. 기억에 있다. 분명 저번에 마주친 적 있었지.
"좋아. 그럼 나도 하나만 물어보고, 여기서 사라져줄게."
얼음처럼 차가운 축객령에도, 제롬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한다. 방금처럼 감정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저쪽도 자신을 고깝게 생각하는 듯 싶었으니까. 제롬의 안에서, 눈 앞의 사내들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아스타로테의 위치. 알고 있어?"
알고 있다. 이 둘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아스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도, 어느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기회가 있기를 그는 바랄 뿐이었던가.
"......" 아스타로테가 얼굴을 파묻은 손에서 간신히 얼굴을 들었을 때, 아스타로테의 얼굴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공기의 온도가 바뀌고 있었다. 마치 활활 타오르던 아궁이의 문이 갑자기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용광로를 목전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공기가 훅 끼쳐오는 것을 아스타로테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열기가 뻗쳐오는 쪽은, 아스타로테의 친구가 있는 곳이다. 눈을 들어보면 페로사가 있다.
그녀가 저렇게까지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새파란 화염 같았다. 격앙된 얼굴에는 힘줄이 와락 솟아올랐고, 힘이 들어간 미간은 나찰의 그것으로 변했다. 더 이상 평범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입술 사이로 내보이는 깔쭉깔쭉한 이빨들은 그녀가 한때 즐겨 착용했던 도깨비 마스크의 그것보다도 더 험상궂었고, 마치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처럼 나부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페로사가 한숨을 후, 하고 내쉬자, 그 모든 것이 일거에 가라앉았다. 작렬하는 감정이 한 순간에 소강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새하얀 재 같은 걱정만이 남았다. 주머니 한켠에서 위잉 하고 메시지가 오는 진동이 오는 것 같았지만, 페로사는 그것을 묵살했다. 지금은 뭔지도 모르는 메시지를 확인하기보다는 친구를 달래주는 게 급선무였다. 페로사는 위스키 병을 덜컥 하고 바 위에 내려놓고는, 서두르는 걸음으로 바 옆을 돌아나왔다. 그리고는 잘게 떨기 시작한 아스타로테의 어깨를, 팔을 뻗어서 꼭 감싸안아 주었다. 페로사의 손바닥이 어깨 한 켠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게 느껴졌다.
그와는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일순간 그 뺀질이의 답잖은 자기혐오가 기어이? 하고 치솟아오른 감정을 꺼뜨리고 나자, 그 뒤에 많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얼마 전에 제롬이 와서 아스타로테에 대해 이런저런 착잡한 푸념을 한 것과, 자신이 제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스타로테의 사람 대하는 습성들이 있었다. 페로사는 그것들을 차분히 대조해보았다. 그렇지만 역시 아직 수많은 경우들 중에서 하나를 확정짓기에는 단서가 모자라다. 아스타로테의 어깨를 끌어안고 도닥여주며, 페로사는 아스타로테의 감정의 격류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아스타로테가 푸념처럼 던진 어떡하지 하는 질문에 페로사는 조금 늦게 대답해야만 했다.
곁눈질로 보면 시안은 자못,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니 그 모습은, 진지해 보이려 노력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다.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의 냉담한 말, 그 한숨 같은 숨소리는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로 자신에게 날아온다. 마음속까지 번지는 차가운 통증을 느낀다.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일까. 당신은 저번의 제 답을 기억하고 있는 듯. 이런 방식으로 제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짐짓, 평이한 표정을 지으려 하며, 시안은 놓인 물 잔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훑는다. 그리고서 느리게 제 고개를 끄덕인다. 한 모금 물을 마셔 넘기며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작은 부분으로요. 그리고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금방 취하겠어요."
그렇게 살짝 걱정을 내비친 시안은 찌푸린 당신의 표정을 본다. 한없이 차갑거나, 구겨지기만 하는 표정을. 그 말을 생각하면 정말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일까.
로노브와 포레에게 제롬은 아직 정수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였다. 어찌어찌 이 도시에 적응하여 살고는 있으나 아직은 핏덩어리나 다름 없다고 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문답무용으로 내쫓아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을 어린애였으나. 이 애 하나 때문에 여인의 상태가 어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둘 모두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아무리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제롬이 재차 묻는 말에 포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스듬히 돌아 서서 제롬을 흘겨보고 또 혀를 차기만 했다. 그리고 제롬과 로노브가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않은 것은 로노브도 마찬가지였다. 곱슬거리는 적발 사이로 시린 금빛 눈을 가늘게 뜬 로노브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했다.
"그것을 당신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는 저에게 없습니다만."
두 사람은 지극히 감정적이었지만 그 감정으로 벽을 쌓은 것처럼 단단하기도 했다. 절제된 감정의 표현이란 그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로노브는 조용히 팔을 뒤로 넘겨 뒷짐을 졌다. 명백히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
"문턱이 닿도록 출입하실 적은 언제고. 연락도 없이 발길을 끊으셨다가 이제와 찾으시는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의 로노브의 말이 이어지던 중. 포레가 걸어간 쪽에서 덜걱대는 소리가 나는 듯 했다. 포레의 뒷모습에 가려 정확히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로노브는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손에 든 핸드폰을 한번 확인한 후 다시 제롬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제와서 당신의 우행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을거라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요."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내리쏘는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페로사]
눈물로 인해 흐려진 시야를 잠시 드러내었을 때. 여인에게 보인 것은 작렬하는 화마와 같은 페로사였다. 페로사는 화를 숨길 기색도 없이 표정과 기운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주한 여인을 향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지만. 페로사가 여인을 아는 만큼 여인도 페로사를 알았다. 페로사의 화가 무엇에 향해 있는 건지 알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흑. 하는 가는 울음 소리가 흘러 나온 건 그 직후였다.
"로시..."
어깨를 감싸며 참을 필요 없다고, 마음껏 울라는 페로사의 말에 여인은 숨 죽여 울었다. 머리는 무거웠고. 어깨는 사정없이 떨렸으며. 겉옷도 없이 밤거리를 달리고 헤매이다 온 몸은 울음에 무너질 것만 같았다. 옆에 페로사가 없었다면 당장 바닥에 쓰러지고도 남았다. 그리고 과거 그 날처럼 손톱이 뜯어져라 주먹을 쥐고 처절하게 울었겠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을 지켜주는 벗의 기척과 어깨를 도닥이는 손길 덕분에 여인은 전처럼 무너지지는 않을 거 같았다.
페로사가 되묻고 얼마 지나서 여인이 조금 진정한 듯 고개를 반쯤 들었다. 꽤 지쳤는지 그리 오래 울지 않았음에도 숨에서 시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손만 뻗어 냅킨을 집어왔다. 그걸로 조금 얼굴 정리를 하는가 싶더니. 먹먹함이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이라는 거 보니까. 알고 있구나... 됐어. 지금은, 그런 거 다 의미 없어..."
흐. 하고 짧게 나오는 소리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여인은 바에 팔을 올려 몸을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저번에, 너한테 그러고나서.. 그런 생각을 했어. 한번만 더 잡아보자고. 어떻게 해도 후회할 거면... 해보고 나서 후회하자고. 응. 그래서 그 애한테 고백하고. 그랬는데. 잘 될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이어진 얘기는 대강 요약하면 이랬다.
제롬과 우여곡절 끝에 성사는 됐지만 어느날 갑자기 연락도 만남도 끊겼다. 먼저 연락을 해도 받지 않고, 목격 소식도 없었다. 그게 일주일 정도 이어졌는데, 알고보니 연락이 끊긴 날, 제롬과 르메인 배틀리언과 모종의 만남이 있었고 그 뒤로 연락이 끊긴 것이었다. 이걸 로노브와 포레가 감춘 탓에 오늘에서야 알았는데. 르메인과 뭔가 있었다면 더 좋은 조건인 그쪽으로 갈아탄 거 아니냐. 거기엔 더 가깝게 지내던 여자애도 있었다더라.
어찌보면 억측 같은 얘기였지만 여긴 셰바였다. 이 도시라면, 이라는 가정 하나로 억측조차 진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아니면 이렇게 사라질 이유가 없잖아... 이렇게 갑자기, 나를 죄다 부숴놓고..."
얘기를 하다보니 감정이 북받치는지 멎었던 울음이 다시 이어졌다. 여인의 원피스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진지해보이려하는 어린아이같은 모습에 브리엘은 느리게 눈을 한차례 감았다가 떴다. 그것이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리엘은 눈을 한차례 감았다가 뜨는 짧은 찰나,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 제의한 것들 중 시안이 택했던 물을 담아서 내려놓은 이유는 정말로, 희미하게 남아있는 희미한 인간성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호의일지도 모르고. 어느쪽이든, 브리엘은 이미 물을 건넸고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미약한 무언가의 흔적처럼 보이는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브리엘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런 걸 신경쓸 정도로 당신과의 사이가 가깝지는 않지 않아? 그러니까 내버려둬. 신경쓰지마."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무감한 목소리로 시니컬하게 말을 내뱉고는 브리엘은 머리를 쓸어넘겼던 손으로 잔을 다시 집어들었다. 머그컵 속의 커피는 분명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을테다. 아예 웃을 일이 없는 도시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신경질적인 웃음을 짧게 터트리며 잔을 비워낸 브리엘은 잔을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을 것이다. 신경질적인 웃음은 역시나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한숨으로 바뀐다.
"그런거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거라고 생각해? 왜, 기억도 안난다고 하면 당신이 이제부터 날 웃을 수 있게 해줄려고?"
비어있는 크리스탈잔의 겉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브리엘은 노려보는 것처럼 당신을 바라보다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포레의 행동을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경쓸 여유가 없는 것인지, 로노브를 향해 고정되어있던 시선은 그의 말에 잠깐 흔들렸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로노브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아스타로테를 위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아스타로테의 위치를 알려달라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요구에 불과했다.
사무적인 말이 이어지자 그는 말없이 소매와 앞머리를 걷는다. 총상 몇개와 자상의 상처들, 그리고 붕대를 감은 상태인 이마. 그는 그것을 로노브에게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길게 설명하긴 어렵다. 네가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애초에 그게 이유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일주일간 의식이 없어 연락이 불가능한 상태였어. 발길은 커녕 의식조차 없었지. 그렇게 된 건 내 탓이 맞지만, 연락도 발길도 끊긴 건 의도한게 아니었어."
제롬은 자신의 단말기를 흘긋 보았다. 갱신된 연락은 없었다. 분명 병원에서 했던 연락을, 지금쯤 아스타로테가 확인했을텐데. 아니, 확인하지 못 한 걸까. 이미 늦은 걸까. 초조함에 입술을 씹고는 다시 로노브의 시선을 응시했다.
"만약 아스타로테가 내게 기회를 준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지."
그러니 아스타로테에게, 물을 수라도 있게 해주지 않겠어? 제롬의 중얼거림이 작게 로노브에게 향했을까.
페로사는 냅킨이 담긴 통을 쥐어서 아스타로테의 손이 닿는 데까지 드르륵 끌어다 주었다. 그리곤 샷 글라스를 꺼내서 아까 바 위에 올려두었던 위스키 병을 열어 한 잔을 따라 아스타로테의 앞에 놓아주었다. 마시건 말건 아스타로테의 자유다.
스트레이트 글라스를 쥐고 입안에 위스키를 탁 털어넣는다면, 네가 마시고 있는 게 위스키라고 혓바닥에 써주기라도 하듯 하는 묵직한 알코올향이 가장 먼저 입안에 스파이스하게 번진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희미한 피트향과 함께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나무 향기가 화끈한 열기를 뒷받침해주어, 마치 정말로 타오르는 모닥불을 잔에 담아 삼키기라도 한 듯한 온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몸에 번져나갈 것이다.
아스타로테가 마시면 마시는 대로, 그냥 두면 그냥 두는 대로 페로사는 아스타로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무겁고, 차갑다. 무너질 것 같아서, 페로사는 아스타로테가 무너지지 않도록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그녀의 어깨를 뚜덕여주었다. 다 괜찮다는 듯이. 그러다 아스타로테의 이야기가 더 이상 입에서 나오지 않고 눈물이 되어 후두둑 굴러떨어지자, 페로사는 황급히 아스타로테의 머리를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 원피스 자락에 흘리지 말고 자기 셔츠 자락에 흘리라는 듯이.
"내가 그때 왜 너한테 그렇게 무모한 말을 대단한 확신이라도 있다는 듯 말해줬었는지 알아?" 그녀의 질문이었다. "걔도 앤빌에 자주 오는 건 알지? ─그래, 걔가 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그 녀석 말이지. 네 이야길 하면서... 괴로워하더라고. 너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충만한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그래서 혼란스럽다고. 자신 같은 사람이 너와 가까이 지내는 게 분수에 맞는 일일까, 하고. 그렇지만 말이야,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보통 자신이 원하는 사람 옆에 자신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기에 그런 것에 마음아파하고 신경을 쓰게 되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녀석에게는 아스타로테가 원했던 것은 결국 제롬이니 이제 네 가치는 네 스스로 매기는 것뿐 아니라 아스타로테가 매긴 가치 또한 있다고 말해줬고, 네게는 다트를 던지지 않고 버려버리느니 맞건 말건 던져나 보라고 말해줬었지.
아스타로테, 그 녀석은 너한테 진심이었어." 인정하긴 싫지만. 하고 페로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 일주일간이나 연락이 두절된다는 것은 페로사에게는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장 자신도 자신의 연인에게서 연락이 두절되자 바이크를 끌고 나가서 온 베르셰바를 휘젓고 다니며 찾아다녔고 마지막에는 분기탱천해서 부엉이 둥지에 쳐들어가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연인 역시도 어떤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연락을 끊은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와 연락이 닿는 주변인이 고약한 변덕으로 페로사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해서 부추긴 점도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제롬의 마음을 지나치게 고평가한 게 아니라면) 제롬이 아스타로테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음에도 제롬이 일주일간이나 연락이 두절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게 페로사의 생각이었다. 페로사는 적어도 제롬을 믿고 있었다. 르메인 배틀리언과 관련되었다던가, 친밀해 보인다는 여자애의 이야기까지 나왔음에도, 그것이 결코 바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뉴 베르셰바의 폭풍에 휘말리다 보면 같이 일하게 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너도 그런 거 꽤 자주 하잖아. 상대의 걱정을 사기 싫어서 자신한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대한테 감추는 거." 그래서 페로사는 제롬을 변호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너한테는 힘들고 잔인한 말이겠지만,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러. 네가 한계인 것은 알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네가 좀더 기다릴 수 있도록 내가 같이 기다려줄게. 물론, 더 기다려보고, 만일 내 말이 틀렸다면... 내 말이 전부 다 헛소리가 되어버린다면 말야."
페로사의 눈에 다시 한 줌 불길이 왈칵 일었다. "내가 너한테 헛소리를 한 책임을 지고 그 놈 ─검열삭제─을 뽑아올 테니까."
>>199 끝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지.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끝내고 잘 살아갈 거야. 누군가는 우리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캡틴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있잖아. 전문 작가들이 앞뒤 줄거리를 짜맞춰 써낸 잘 써진 시나리오에 비하면 좀 중구난방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이야기가.
제롬의 생각은 정확했다. 제롬이 옷과 머리를 걷아 부상의 흔적을 보여준다 한들 로노브가, 포레가 그걸로 납득 해줄 리가 없었다. 실제로 로노브는 더 차가운 시선으로 부상들을 훑어보기만 했다. 그것들로 인해 의식이 없어서 연락도 방문도 하지 못 했다는 설명을 들어도. 로노브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응대했다.
"그러십니까. 그래서. 이번엔 무슨 말로 그녀를 구워 삶을 셈이지?"
목소리에 한기는 그대로 였지만 정중하던 말투가 싹 사라졌다. 더 이상 같잖은 말은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듯. 날카로운 말들이 제롬에게 향했다.
"너는 말했었지.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거고. 말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될 거라고 생각했나? 그녀가 매일 이곳에 앉아있기만 하니 말하지 않으면 모를 거라 자만했나?"
"이래서 우리는 어린 애를 싫어 해. 상대를 같은 수준 혹은 그렇게 여기며 행동하는 꼴이 아주 같잖지. 자신의 기준과 가치를 들이밀어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생떼를 쓰고 억지를 부려. 그걸 맞춰 주기 위해 상대가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르는지 모르고. 안다 해도 눈을 돌리지. 넌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로노브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기다렸단 듯 포레가 제법 큰 상자를 들고 와 셋 모두가 볼 수 있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말이 내려 놓은 거지 거의 던지다시피 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지는 소리도 났다. 안을 가득 채운 빈 술병들이 깨지는 소리가. 그걸 다시 발끝으로 걷어 찬 포레가 목을 긁는 듯이 내뱉었다.
"이거 보이냐? 네 놈이 숱하게 다쳐 들어올 때 부터 그녀가 혼자 처마신 양이다. 아예 안 보이게 된 후에는 거의 하루에 병 하나씩 비워댔어. 밖에 처나가지도 않고 매일 밤마다 위에서 술 처마시며 혼자 청승 떨어대고 있었다고. 그렇게 만든 원인이 뭐? 기회를 준다면 바로잡아? 개소리 집어쳐. 기회는 네 놈이 던진거나 마찬가지야."
포레의 윽박 다음은 로노브의 한기였다.
"그녀는 네가 말하지 않은 것들도 다수 알고 있다. 네가 언제 어디서 누구랑 노닥거렸는지. 어느 조직과 접촉이 있었는지. 너 뿐만 아니라 보이는 수준의 도시 상황은 대부분 알고 있어. 여기에 허투로 앉아있는게 아니란 거다. 넌 그런 그녀에게 말만 안 하면 될 거란 마음으로 그딴 헛소리를 지껄였고. 결국 사태를 이 지경을 만들었다. 지난 일주일간 만 해도 그녀가 어떤 상태로 있었는지 아는 상황에서 그게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면. 우리는 널 용인할 수 없어. 죽여서라도 그녀에게서 떼어낼 거다."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니까.
"알아들었으면 꺼져."
금빛 눈 한 쌍과 붉은 눈 한 쌍이 적개심과 살기로 일렁이는 시선을 제롬에게 향했다.
[페로사]
냅킨을 뽑아오며 흐린 시야에 술이 찬 슬잔이 보였지만 차마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울기 전이었으면 모를까. 여인에게 술은 눈물이 나오기 전에 함께 삼키는 것이지 눈물을 머금은 채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잔에는 손끝도 대지 않고 냅킨만 끌어다 조용히 얼굴을 닦았더란다.
여인이 겨우 겨우 얘기를 꺼내 놓고 다시 눈물을 터뜨리자 페로사의 팔이 여인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모처럼 입은 옷이 여인의 눈물로 얼룩질 텐데. 생각은 들지만 울음을 멈추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기에. 당장에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염치없게 페로사의 셔츠를 적시며 페로사가 해주는 말을 들었다.
제롬이 했다는 고민. 페로사가 생각하는 제롬에 대한 것. 그리고 변호. 듣다보니 문득 웃고 싶어졌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여인이 할 수 있는 건 울음을 추스르고 목소리를 짜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애, 너한테는, 얘기를 했구나..."
울음과 잠긴 목으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은 다 꺼냈었는데. 이래도 후회하지 않을 거냐고. 밑바닥까지 드러냈었는데. 중요한 얘기를 또 남에게 전해 듣게 만들었다. 그것이 서럽고. 그것이 비참했다. 왜, 자꾸 누군가의 입으로 네 얘기를 들어야 해?
여인은 다시 냅킨을 몇장 뜯어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이제 됐다는 듯 페로사에게서 몸을 떼고 바에 기대었다. 잠시 기대어 있다가 고개를 들고 잔을 들어 술을 탁 털어넣었다. 그대로 식도를 녹여버렸으면 하는 알콜의 향과 맛이 한 차례 지나간 뒤에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대강 쓸어넘겼다. 붉게 부은 눈가와 지친 보라색 눈이 페로사를 보았다.
"로시. 내가, 남의 입으로 그 애 얘기를 듣는게, 몇 번 째인지 알아?"
킥. 비틀린 웃음이 붉어진 얼굴에 떠올랐다.
"내가 그 애 앞에서 엉망진창으로 고백 했던 날. 걔가 그러더라. 자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을 거고 말 하지 않을 거라고. 로시. 나는 그 전 부터 참고 있었어. 그 전. 한참 전부터. 한 동안 안 보이다가 약 냄새 풀풀 풍기면서 나타나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거. 그런 꼴로 오면서 날 걱정 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안 할 거래. 그런데 어떡하지. 난 다 알 수 밖에 없는데. 이번 일도 똑같아. 내가 생각한 그게 아니라고 해도. 사실은 아니라고 해도 걔는 또 아무 것도 말 안 해주겠지. 어딘가 잔뜩 다쳐와서. 그걸 보는 내 마음은 생각도 안 해주고."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아랫입술이 찢겼다. 너무 세게 문 탓이었다.
"너는 참을 수 있어? 너는, 네 연인이 다쳐 왔는데 아무 말도 안 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있어? 사실은 아는데 미움 받을까 봐 캐묻지도 못 하고. 그래 나도 숨기는게 있으니까 라며 넘길 수 있겠어? 난, 난 말야. 그 날, 최소한 내가 왜 고민하고 뭐 때문에 고민하는지 직접 얘기했어. 걔가 나한텐 말 안 하고 너한텐 얘기한 것처럼이 아니라."
"나는. 걔가 다른 사람에게 갔다는 것보다. 그게 더 비참해. 나는 모르는 걔에 대한 걸 남에게 듣는게."
차라리 바람인게 나을 만큼. 거기까지 말하고 여인은 빈 잔을 페로사 쪽으로 밀어놓았다. 한 잔 더 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나는 안 참았어." 페로사는 바의 서랍을 뒤적여 납작한 원통형 용기 안에 담겨있는 립밤을 꺼내서 그것을 아스타로테의 앞에 툭 놓아주었다. "발라둬." 페로사는 아스타로테의 옆에 있는 스툴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난 걔를 찾아나섰어." 레이스 호텔에는 초대받아서 가고 싶었는데─ 하고 페로사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이해해, 그 비참한 감정. 정말 그게 어떤 감정인지 완전히 잘 알고 있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보고 싸늘하게 대하는, 가면 쓴 그 아이의 목둘레에 남아있던 손아귀 자국을 봤을 때 느껴지는 충격과 좌절감이 얼마나 아득했던 것인지 페로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일이고, 굳이 꺼내놓을 필요 없는 이야기지만, 며칠 전에는 그로스만의 사생아가 그 손아귀로 죽어버린 에만의 목을 거머쥐고 낄낄 웃고 있는 꿈까지 꾸었더랬다.
"그거 참 어렵지. 손을 맞잡고 눈 안에 두고 있지 않으면 어느샌가 손을 풀고 빠져나가서 어딘가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는데, 내가 둘도 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선가 상처를 입어버리는데... 어디로 갔을까 찾아내고, 품 안에 움켜안고, 또 어디에서 다치는 일 없을지 보살피려다 보면 속박해버리는 게 되어버리니까. 어디까지가 방임이고 어디까지가 속박인지 적정선을 잘 맞춰서, 아무 일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알아둔 채로 걱정 없이 사랑하면 좋겠는데, 그게 이 도시에선 젠장맞게 힘들지." 페로사는 아스타로테를 위한 두 번째 잔을 따랐다. "특히나 이 빌어먹을 도시는 균형을 잃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의 수준이 차원이 다르잖아." 그리고 바 너머로 손을 뻗어서는 랙에 걸려 있던 데킬라를 꺼내곤, 자신도 니트 글라스에 데킬라를 뚜르륵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스타로테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페로사도 새삼 울화통이 났기 때문이다.
"젠장, 선을 맞추기 어렵긴 무슨, 전부 다 말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어떤어떤 일이 있어서 한동안 연락이 안 될 것이다, 사전연락이 안 될 일이었다면 연락이 닿자마자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연락이 안 됐다- 적당히 둘러대기만 해줘도 기다리는 사람 마음이 훨씬 편해질 텐데 그것도 안 해주고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인형처럼 그대로 있으라니. 걱정을 시키기 싫으면 걱정 안 할 정도로까진 말해줘야 할 거 아냐. 말 안해주면 걱정을 안 한다니, 그건 쌩판 얼굴도 모르는 남일 때나 그러는 거지..." 페로사의 목소리에 점점 감정이 실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바에 붙어앉은 바텐더와 손님은 갓 스무 살의 연하 애인의 연락두절 때문에 속을 썩여본/실시간으로 썩이고 있는 20대 후반의 여인이라는 매우 많은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아스타로테의 고통이 페로사에게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져서 페로사 역시도 그 감정에 어렵잖게 동조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두 잔째의 데킬라를 들이마셨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행복하려고 최선을 다하는데, 그놈의 최선이 필요할 때 똑바로 되어먹는 일이 없다니깐. 정말-" 하고 짜증에 가득찬 한숨을 쉰 페로사는 서버를 손으로 불러, 자기 일당에서 계산하라고 하고는 커다란 폭찹을 주문서에 휘갈겨서 쥐어주었다.
"특히나 제롬 그 녀석은 쓰잘데기없이 과하게 좋은 녀석이라, 자기 마음을 남한테 섬뻑섬뻑 퍼주고 다니니까 정작 자길 위한 마음을 남겨놓지를 않는다고. 그래서 남을 더 걱정시키게 된다는 건데, 마음을 퍼주어놓고는 그 뒷책임은 생각을 안 하니..." 페로사는 세 잔째의 데킬라를 잔이 거의 넘치도록 따르고는, 그걸 들이키기 전에 아스타로테를 바라보았다.
"아스타로테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을게. 포기하던가, 아니면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고 희망을 거머쥐고 있던가... 어느 쪽이든 이제 더 이상 '똑똑한' 선택지는 남아있지 않아. 골치아프지. 그러니까 결정을 내릴 땐 내리더라도, 적어도 여기서 이대로 끝내진 마. 기다리던가 찾아가던가 해서 제롬을 만나고, 제롬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롬의 입으로 들어봐야 돼. 그리고 네가 섭섭하고 서운했던 건 다 말해야 돼. 이미 말했다면 한 번 더 말해야 돼. 완전히 잘라내거나, 다시 이어가거나... 그러려면 결국에는 대면할 용기가 필요해." 이번의 사건은, 페로사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제롬의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그러나 제롬은 이번 건 외에도 아스타로테에게 많은 것을 침묵해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침묵으로는 틀어막지 못할 지경까지 되었다.
"일단은... 정히 아파서 못 견디겠거든, 그거라도 한 잔 마시자고." 페로사는 건배라도 하자는 듯 데킬라가 가득 찬 잔을 아스타로테에게 내밀었다.
"...나는...벨라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지. 그래. 네 말마따나, 나는 자만했다."
로노브의 말에, 제롬은 입을 꽉 다물었다. 틀린 말은... 없다. 벨라가 그 말로 얼마나 힘들지 몰랐다. 아니, 어렴풋하게 알았지만, 눈을 돌렸던 건지도. 아스타로테를 위한 말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을 위하는 의도가 숨어져 있었으니까.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니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기적인 말을 해버렸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직접 눈에 때려박아주는 듯한 술병의 개수가 제롬을 더 괴롭게 만들었을까. 하나같이 도수가 높은 술들 뿐이다. 매일 밤 자신을 기다리며 일주일 내내 술을 마셨을 아스타로테가 그려졌는지 그의 눈가가 살짝 떨린다. 차라리 그 때 말해주기로 했다면.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기회는 자신이 던진 거라는 포레의 말이 제롬을 아프게 찔러왔다. 술병들에게 가있던 시선을 잠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온갖 감정이 스쳤다. 자책과, 미안함, 그로 인해 파생되는 괴로움. 아스타로테를 향한 감정들이었다.
그래, 그 감정들은 여인을 위한 것이었다.
"기회를 던진게 나라면, 수습해야 하는 것도 나야. 내가 이 모든 일을 만들었지. 일주일간 없었던 건 내 의지가 아니니, 어쩌니 해도 결국 시작점은 내 말이니까. 아스타로테의 능력을 얕본 것도 나니까. 마음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도 나니까."
그는 괴로워하듯 그 말들을 쉬지 않고 뱉어내었다. 그 순간, 단말기에서 울린 알림에 그의 시선이 잠깐 돌아간다.
-타겟 위치 확인 -조금 전 앤빌로 그녀가 찍힌 CCTV 영상을 찾았다. 아직 그 안에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난 아스타로테를 만나야해. 결국, 내가 잘못한 상대는 그 사람이니까. 마지막으로 판단하는 것도, 그 사람이 되어야겠지. 난 그 전까진 내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할 뿐이야."
기회가 이미 없다는 말도, 바로잡고자 한다는 말도, 여인 앞에서 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 여기에서 아무리 해봤자 소용 없는 것. 남성들의 말은 분명히 틀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자신은 여인을 만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여기에서 앞으로는 더이상 기회가 없다 체념해봤자 뭐가 남겠는가. 꺼지라는 말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걸음은 곧 뜀박질로 바뀌며,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은 잡화점에서 점점 멀어졌을 것이다.
잡화점에서 로노브와 포레는 제롬이 하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었고 할 말은 다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은 건, 분하지만 제롬과 여인이 만나야 하는 일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돌아서는 제롬을 잡지 않았다. 멀어지는 제롬의 뒷모습을 보며 짧게 주고 받은 말만 있었을 뿐.
"제대로 보내도 되냐." "안 보내면 어쩔 건데. 죽여?" "마음 같아서는 문 연 순간에 쐈지. 그런데..." "알면서 뭘 물어. 가서 해장국이나 끓여." "옘병."
그렇게 후일은 제롬에게 맡기고 돌아서는 로노브와 포레였으나. 당분간 제롬을 향한 칼날은 반쯤 뽑힌 채로 지낼 것은 분명했다.
-
찢겨진 입술에서 비릿한 피의 맛이 입 안으로 흘러 들어 왔다. 입술이 상할까 봐 세게 무는 것도 자제 했었는데. 최근엔 전혀 그런게 되어지질 않았다. 한심한 일이었다. 정말로 여인 답지 않았다. 그 애, 제롬만 엮였다 하면.
페로사가 꺼내 준 립밤을 손에 쥐었지만 바를 생각은 들지 않아서 그냥 쥐고만 있었다. 손아귀에 쥔 립밤을 보면서 들려오는 페로사의 말에 신경을 기울였다. 나는 안 참았다는 말로 시작된 페로사의 얘기는 여인의 마음과 몹시 흡사했다. 이해한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 어린 말로 들려서 조금은 웃음이 샐 것도 같았다. 차근차근 이어지는 말들에 감정이 섞여 들어 가는 것도 느꼈다. 그러다 결국은 데킬라 병을 꺼내 한 잔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가 조금은 움직인 것도 같았다.
"...설마, 로시랑 이런 일로 공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야."
정말로. 과거에도 그렇고 페로사에게 연인이 생겼음을 알았을 때도 그렇고. 페로사라면 이런 고민이나 힘듬은 겪지 않을 것만 같았었다. 여인이 봐 온 페로사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잠시 잊고 있었다. 이런 페로사도 휘청일 때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떠오른 그 시절에 여인은 미안함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여인은 립밤을 놓고 잔을 들어 페로사가 내민 잔에 부딪혔다. 그리고 단숨에 쭉 넘겼다. 두 번째 잔은 처음만큼의 향이나 열기는 없었으나 특유의 맛을 즐길 여유가 있었다. 입가심 대신 얼음이 다 녹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울 만큼 울고, 넘치는 만큼은 쏟아내어 조금은 편안해진 상태로 페로사에게 툭 기대려 했다. 그리고 나오는 말들을 있는 그대로 흘렸다.
"로시. 이 관계의 끝을 정하는 건 내가 아냐. 표면적으로 보면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끝을 내든 이어가든 할 수 있는 건 그 애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으니까. 다시 말 할 것도 없이 그 애는 잘 알 거 거든. 내가 그 애의 말에, 행동에,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 그러는 거. 어린 애들이란 그런 법이잖아."
창백한 손이 쥔 빈 잔으로 톡톡 두드리고 그걸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어린 애로 대하면 안 될 테지.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려고. 음. 맞아. 사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 애에 대한 걸 또 그런 식으로 들으니까 이성이 나가버려서 말야. 나 정말 뭐한 거람. 아. 진짜 쪽 팔린 짓만 하네. 또 당분간 여기 못 오겠는 걸."
그런 말들을 이어가던 도중이었다. 뒤에서 앤빌의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여인이 힐끗 시선을 돌려 본 건. 거기 서 있는 제롬을 보고 눈빛이 한 번 흔들렸다가 이내 평소 같은 얼굴로 생긋 웃으면서 말했겠지만.
"어머. 이런 데서 다 보네. 오랜 만이야."
아직 가라 앉지 않은 눈물의 흔적이나 붉은 얼굴이 평소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을 터였다. 같이 있을 페로사의 반응은, 가히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그래서 난 걔를 찾아갔고, 있는 대로 다 말했어. 나한테 있어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런 네가 갑자기 사라지면, 납치되면, 죽어버리면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잠깐, 이 기집애, 그거 무슨 의미야." 로시와 이런 일로 공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말이 와 너도 연애라는 걸 다 하네? 비슷한 논조로 들리는 건 뒤늦게 깨달은 페로사가 눈을 치뜨고 장난스레 화난 척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페로사는 곧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착잡한 회상을 하는 것 같은 눈빛이 되었다. "그 모든 난장판을 뚫고 겨우 건진 삶인데, 그 삶에 의미가 없었어... 내게도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줄 누군가는 필요하다구." 하다가, 페로사는 옛날부터 그래왔듯이 다시 어깨에 기대어오는 아스타로테의 머리를, 그녀가 흘려내는 말들을 받쳐주었다.
"제롬이 자기 마음을 너무 헤프게 쓴다면 말야, 넌 네 마음을 너무 인색하게 써." 한숨을 팩 쉰 페로사의 말이었다. "그래, 걔도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성인이지만, 너도 성인이잖아. 훈계를 하라는 게 아니야. 입장을 조율하는 거지. 네가 담아만 놓고 있으니까 쟤가 저렇게 아 그래도 되는갑다~ 하고 칠렐레팔렐레하잖냐..." 하고 아스타로테의 어깨를 토닥여주던 페로사는, 씨익 웃으며 농담을 한 마디 덧붙였다. "아, 로테, 자꾸 왜 섭섭하게 굴어. 요 몇 주간 앤빌이 얼마나 허전했는지 알아? 저번에 건 내가 말이 너무 심했으니까 화 좀 풀라구."
그때, 앤빌의 도어벨이 딸랑거리며 울렸다.
이젠 제법 낯익은 광경이다. 저 벽에 고스란히 드러난 벽돌들도. 페인트칠이 벗겨져가는 바닥도. 식당 전체를 가로지르는, 이 곳이 한때 공장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 같은 트러스 구조물들도. 트러스에 매달려 안락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나무 타일과, 바 안의 공기를 아늑하게 감싸안는 조명과, 따뜻한 바람, 술 향기와 음식 냄새, 그리고 음악...
그 한가운데에, 바텐더와 함께 제롬이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 제롬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타로테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옆쪽에서 잘 닫혀있던 용광로의 화구가 다시 열린 것만 같은 열기가 뿜어지는 것을 느꼈다. 옆을 보지 않아도, 페로사의 얼굴표정이 지금 어떨지는 짐작할 만했다.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에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빠져나온 불길과 같은 모습이겠지. 세차게 뿜어져나오는 화염에서 나는 작열음을 연상케 하는 어조의 따뜻한 환영인사가 제롬에게 건네어져왔다.
"이게, 누 구 신 가?" 페로사는 아까 재떨이에 불을 붙이자마자 꺼뜨려놨던 장초를 다시 꼬나들고 불을 붙이고는 입에 물었다. 푸들푸들 떨리는 들숨에 장초가 거의 절반 넘게 까스러지고, 그녀의 입에서 열대과일 향이 서린 맵고 달콤한 연기가 푹 쏟아져나왔다. "우리 플레이보이. 로테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페로사는 재떨이에 대고 재를 툭툭 털었다. 재를 털어내는 페로사의 얼굴은 여전히 노기등등할지언정, 앤빌로 들어오는 제롬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처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모습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걸 애써 눌러참는 얼굴이라고 하면 될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로노브가 알려주거나 했겠지. 여하튼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 여기에 온 거지? 내가 아니라─" 페로사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스타로테를 곁눈질했다. "얘한테." 그리고 그녀는 스툴에서 내려선 뒤에, 다시 바 옆을 휙 돌아서 바 너머 바텐더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뭐, 좋아. 이제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눠보셔." 페로사는 남아있는 꽁초로 숨을 다시 들이켰다. 바지직 하고 꽁초가 빨리도 타들어간다. "이야기 나누면서 뭐라도 마실래?"
일이 비는 날은 제법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 날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보통은 개인실에서의 책읽기다. 책이라는 것은 보통 쓴 사람의 성격이 어디에서든 나오기에 흥미롭게 생각한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읽고있으면 다른 생각을 하지않고 책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다만 책장에 있던 책들을 보고있자니 벌써 다 읽은 것들만이 빼곡히 차있었다. 하기야 슬슬 새로살 리스트를 찾아놓기도 했고, 행동지침을 외출로 변경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가볍게 허리춤에 권총 홀스터를 차고 활동하기 좋은 복장으로 외출준비를 마친다.
"기상상태 양호."
바깥을 나가보자니 햇볕이 적당히 구름에 가려진 흐린 날씨였다.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말그대로 매우 양호한 날씨였다. 강한 햇볕은 오히려 거슬리니까. 따로 우산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으니 그대로 거리에서 가장 최단거리로 서점으로 가는 루트를 머리 속으로 그려놓고는 그것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누가본다면 이런 샛길로 왜 다니나 싶을 정도로 거리단축에만 최적화된 이동을 통해 도달한 서점은 이곳에 정착하고부터 이용을 시작했고 지금은 단골이었다. 추천 리스트의 경우도 서점의 점장을 통해 권해받은 것 중에 조사해보고 추려내서 만든다.
"해당 호칭거절."
서점에 들어서자니 주름살이 특징인 늙은 점장이 꼬마아가씨 또 왔구만하고 반기자, 나는 곧바로 그렇게 대답했다. 여전히 말투는 그대로구만하는 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들은 채하고 빼곡히 꽂힌 높은 책장에서 리스트의 서적들을 찾아나간다.
"점장. 사다리 대여."
다만 문제가 하나있었다. 도저히 내키로는 안되는 곳에 한 책이 꽂혀져 있었다. 그래서 점장에게 이야기하고는 들고와 그것을 가까운 곳에 설치하고는 타고 올라가서 책을 빼낸다.
"...."
이 신장은 가끔 이런 상황에 있어서 불편함을 야기한다. 적당한 신체였으면 좀 더 편리한 부분이 있었을텐데 하고 생각하자니 뒤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앤빌로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멀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억누르며, 이제는 꽤나 자주 드나들었다고 생각한 문을 열어젖히자 익숙한 광경이 펼쳐진다. 앤빌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그것을 자아내는 조명과 인테리어, 술과 음식의 냄새,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나는 바닥의 소리,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두 명의 여인들.
"...오랜만이야, 벨라."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제롬은, 차마 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나. 분명 여기까지 오면서 하고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마주치면 분명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렇게 바로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일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인의 얼굴을 보자 자신이 하려던 말이 전부 머릿속에서 사라졌을까. 가라앉지 않은 눈물의 흔적, 붉은 얼굴, 살짝이지만 촉촉한 눈. 자신이 오기 전까지 울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들이 그저 변명처럼 느껴질 뿐이었겠지.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던 찰나, 오랜만에 보는 페로사의 모습에(그것도 무척이나 화나보이는) 그는 순간이지만 몸이 굳어버렸을까. 곧 그녀가 화를 억누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겠지만.
"네가... 왜 화났는지는 알 것 같네. 설마 너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될 줄은."
미안해. 라며 페로사에겐, 비교적 간단한 사과를 건넸다. 그녀의 말처럼 중요한 건, 아스타로테였으니... 페로사에게 사과하는 것은, 아스타로테에게 사과하는 것보단 간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까. 두 사람에게 지은 죄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위스키 한잔만 줄래? 온더락으로." 뭐라도 마시겠냐는 페로사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답한 그는 얌전히 두 여성에게 다가와 아스타로테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 자신을 찌르는 듯 한 자리에. 그것은 필시 제 옆에 있는 애인에 대한 죄책감이었겠지.
"벨...라."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뭐부터 사과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페로사를 바라보고 있던 고개는, 살짝 돌아가며 여인을 바라본다. 그의 눈이 반쯤 감긴채 여인을 마주보았다.
"...오는동안 조금 생각해봤어. 만약, 네게 일주일이나 연락이 끊어질 일이 생겼다면, 그래서 네 소식을 내 정보망으로나 겨우 알고, 정작, 그런 일이 있어도 네게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다면...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
"괴롭더라. 네게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한데, 난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고, 그냥 지켜봐야만 한다고 생각하니까."
하나하나, 생각했던 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좀처럼 여인의 시선을 마주치지는 못 했을까. 그것을 마주하기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미안한 감정이 앞서버려서.
"그리고 난, 네가 그런 기분이 들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다만 무시했을 뿐이지. 널 위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사실, 그건 널 위한게 아닌데도."
자신을 위한 행동을, 선의로 포장해 타인을 위한 것이라 외치는 행동. 그것이야말로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인지하지 못 한 것은... ...그게 자신의 진심이었기 때문이었지.
"미안해. 내가, 너무 나만을 생각했나봐. 널 생각하지 못하고 상처입힐 말을 해버렸어.. 정작 널 생각했다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걸 알았는데도 말이야."
아마 위스키가 나왔다면, 그것을 한 모금 머금고는 말을 끝마쳤을 것이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제롬은 여인의 눈치만을 살필 뿐, 아무말 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여인의 답을 기다리려는 듯.
누군가가 그랬다. '이 도시에선 정상적인 예술활동을 하는 이들이 없다.'고... 또한 그것에 이렇다 할 반론을 내세울 수도 없음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한 폭 그림도 그렇거니와 한 권의 책에도 그것을 달라지지 않을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창조해내냐를 문제로 삼을게 아니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조금 더 본질적인 의미, '그렇게 무언가라고 쓰고 그려서 남기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포괄적으로 생각하다보면 제 아무리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작품들일지라도 어느 누군가의 예술행위 중 하나리라.
더욱이 그럴만한 시간도 없거니와 그럴 의사조차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퍽이나 여유롭고 한가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일반적인 동물은 죽어서 가죽과 고기, 뼈를 남기겠지만 어떠한 경우는... 특히 사람은 이름을 남기기도 하고 업적을 남기기도 하며, 때로는 어떠한 개념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기록들을 보관하는 이들도 어딘가엔 존재하는 법이다. 이젠 나이를 지긋이 먹은 사람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디지털화 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기록과 정보를 공유하고, 거래하는 행위 또한 어찌보면 숭고한 직업정신이었을테다.
모든 것이 얊디 얊은 숫자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살아간다 해도, 책이란 것을 굳이 손에 들고 보지 않아도 된다 할지라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서점을 꽤나 좋아했었다.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무언가를 남기는건 인간, 혹은 그에 준하는 고등생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니까. 어쩌면 그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품고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렴, 자신 또한 그런 인간이 만들어낸 죄의 산물이니.
"......?"
차가운 것일지, 아니면 그저 지나치게 정형화된 탓인지, 제 머리카락만큼이나 밝게 희어있는 무감정한 하얀 소녀가 사다리를 올라 책을 꺼내는 것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부정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다면, 그녀는 그냥 지나쳐도 될 그 인물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바라보고 있었단 것이다. 상대방이 제 뒤에서 전해지는 시선을 느낄수 있을만큼,
"아,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혹시라도 도와드릴건 없나 싶어서 말이죠~"
누구에게나, 누구나 할법한 오지랖 넖은 헛소리였다.
딱히 사다리에 부정함이 담겼단 생각을 품는건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어느쪽이든 쉽게 향할 수 있도록 조금 물러났던 그녀는 제 품 아래 층을 이루고 있는 책 몇권 사이에 책장에서 빼낸 또 다른 하나를 더 얹어두었다.
쥬는 약간~~ 동공과 홍채의 경계가 오묘한 느낌이네~ 마치 물감 번진 것처럼~ 그리고 종종 언급하는 것처럼 안개낀듯 흐릿하고~~ 네, 보라색으로 썩은 동태눈깔입니다. (?) 초기안엔 누가 먹물 쪽 빨아먹은 것마냥 터진듯한 모양이라서 감춘단 느낌으로 실눈캐 하려고 했다가 그랬다간 정말 롸벗인증이니 비교적 평범하게 바꿨습니다~
당신에게는 불필요한 관심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마음은 어쩔 수 없을까. 신경 쓰지 말라는 당신의 말에 시안은 더 뒷말을 내놓지 못한 채, 하지 못한 말을 그저 삼켜 넘긴다. 당신의 말처럼 어디까지나 당신과 자신은 그저 거래라는 계약으로 이루어진,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관계. 타인인 것이다. 그러니 당신과의 그 거리를 함부로 좁히며, 선을 넘으려 하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냉기 가득한 그 쌀쌀한 말에도, 결국 내뱉지 못한 그 말은 목에 메어버리고. 여전히 걱정의 감정이 담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볼 수 밖에 없을까. 시안은 잔에 남은 술을 비워내는 당신을 보며, 그런 선물을, 그런 말을 꺼내어 지금에 이르게 된 자신의 선택에 조금은 후회의 감정을 느낀다. 이어지는 살벌한 웃음에 시안은 어깨를 움츠린다. 전의 만남처럼, 저를 미워하게 된 것은 아닌지. 작은 불안으로 시작된 생각은 점점 커져가며 제 마음을 가득 채우며, 무겁게 자리 잡는다. 칼날같이 날카롭게 다가온 시선에 시안은 살짝 떨지만, 그 청록의 눈동자는 당신을 피하지 않은 채 여전히 당신에게 향해있다.
"당신이 원한다면요."
제멋대로 굴며 관계를 망치는 것은 원하지 않기에. 마치 허락을 구하듯, 시안은 그리 말한다.
툭 하니 기대는 머리를 받쳐주고 필터 없이 흘리는 말들을 그저 들어주는 페로사가 없었다면. 여인의 인생이 지금에 이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아마 무엇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고. 감정의 씨앗은 발아하는 일 없이 영원토록 메마른 채 여인과 함께 스러졌을 터였다. 어쩌면 그 편이 여인에게는 형편 좋은 일이었을 지도 몰랐다. 라 베르토의 수장에 걸맞은 인물상으로서. 이상적, 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이상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상이었다. 현실은 눈 깜빡임 한 번만으로도 바뀌곤 했다.
"누가 자꾸 섭섭하게 굴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나 하나 없다고 허전하면 뭐 얼마나 허전하다고. 흥이다..."
제법 기분이 풀려 말의 무게가 슬슬 가벼워지고 있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여인은 힐끔 보고 웃음 지었지만 페로사는 아니었다. 끓는 용암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열기가 기댄 쪽으로부터 끼쳐와 여인은 슬금 몸을 떼었다. 기댔던 몸을 바로앉기만 할 뿐. 말리거나 진정시키지는 않았다. 남은 물을 한 모금 머금다가 페로사가 자리를 뜨자 그 쪽을 슬쩍 보고. 제롬이 옆에 앉았을 때도 눈길 한 번 주는게 고작이었다.
"음. 독한 걸로 시작했더니 좀 가벼운게 끌리네. 많이 달지 않은 걸로 부탁해."
뭐라도 마시겠느냐 묻는 페로사를 향해 오랜만에 주문 다운 주문을 부탁하고 거의 다 마신 물잔과 스트레이트 잔을 밀어두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롬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그 쪽을 보지 않았다. 고개는 비스듬히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맞지 않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얘기를 들었고. 다 듣고 조금 후에 여인의 입이 움직였다. 여전히 시선이 어긋난 채로.
"이제라도 알았으면 잘 해, 라고 해야 할 지. 됐으니까 이제 그만 하자, 라고 해야 할 지. 둘 중 하나를 고민 중이고 내가 뭐라고 해줬으면 하는지 네가 고르라고 하면. 넌 뭘 고를래?"
눈동자가 구르는 것엔 소리가 없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짙은 보라색과 흐린 보라색의 눈이 휘익 올라와 제롬의 시선을 찌르듯 마주했다. 마주치는 순간에만 찌릿하고 곧 덤덤해지긴 했다. 언뜻, 여인의 집에서 봤던 그 분위기처럼.
"이미 다 아는 사실에 말을 더 얹는 건 하기 싫네. 그렇다고 지금을 유야무야 흘려보내는 것도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내가, 그 선택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하나 싶은 기분이야. 나는 최소한 나에 대한 건 네게 다 털어놓았는데. 넌 그마저도 내가 아닌 사람에게 털어놓았잖아."
로시한테 다 들었어, 라고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너 오기 전에 로시랑 한 얘기지만. 난 지금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아무 것도. 너한테 책임을 묻지도 않을 거고. 널 내치지도 않을 거야. 나는 그저 같은 자리에 있을 뿐이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지금까지 처럼."
앞서 페로사와 얘기하며 마음을 너무 인색하게 쓴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여인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을 셈인 듯 보였다. 술을 기다리며 혹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고개를 슬쩍 앞으로 돌리기만 했다.
닳고 닳아빠진 잊어버리고 싶던 자신의 인간성을 건드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브리엘은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듯이 덮으며 신경질적이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예민함이 담긴 목소리를 탄식하듯 씹어뱉었다. 허락된 곳은 여기까지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이 이상 사적인 공간에 침범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것도 같은 목소리였다. 계약. 혹은 거래라는 공적인 관계로도 충분하잖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얼굴을 덮고 있던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왜 다들 날 내버려두지 못해서 안달이지. 그냥 내버려두면 되잖아.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은 내버려두면 그만인데 왜 자꾸 건드려대고 사적인 곳까지 허락도 없이 들어오려는 건데.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감정은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불특성 다수에게 향할 게 분명해서 브리엘은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브리엘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피하지 않는다면 시안의 어깨 근처의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고 자신이 서있는 방향으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내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거야? 그럼 나한테 지금, 키스할 수 있겠어?"
얇고 가느다란 검푸른 머리카락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브리엘의 평소보다 더 창백해보이는 얼굴을 절반쯤 가려서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에서, 구리색 눈동자만은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무감하게 다물려있던 얇은 입술을 늘어트려 희미하게 조소하며 브리엘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듯 돌아온 냉정한 한마디에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던 그녀는 책을 안고 있던 한 손을 들어 옆머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버릇 때문에 제 머리칼도 자연스레 굽이친 것이 아닐까 싶을만큼,
애초에 그녀가 도울만한 일이 있다 해도 상대가 거절하면 그만인 정도였으며 무엇보다 이러나 저러나 초면이니 피차 도움을 줘야 할 이유도, 도움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입장이었다. 상대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진 알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는 거절하는 대상에게 구태여 끈덕지게 늘어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양보라는 이름의 포기가 더 빠른 편일까?
그렇게 슬쩍 자리를 비켜서야 할까를 생각하던 그녀에게 다시금 시선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그녀의 몸쪽에, 더 세밀하게는 그녀가 들고 있는 책 일부일까?
"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그런데도 그 필요없는 오지랖이 다시금 빼꼼하며 고개를 내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천성이었다.
자신을 불러세우던 이가 사다리를 마저 내려오고서 점장에게 무언가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그녀가 들고 있던 것중 상대가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점포정책이든, 단순히 희귀한 서적이든, 어떤 이유건간에 단 한권만 있는 책이라던가 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지만 상대방이 찾는 것이 어떤 책인지 몰랐던 당신은 자신이 들고있는 책의 라벨을 하나하나 살펴봤지만 품에 안겨있는 것은 마치 도서관의 카테고리 하나씩을 꺼낸듯한 집합이었기에 이렇다 할 무언가가 떠오르진 않았다.
혼자 할 수 있는건 혼자할테니. 선의는 마음으로만 받겠다는 뜻이었다. 그냥 문장으로 말하는게 낫지않았나 싶을 정도 였지만. 무안한 기분의 상대 표정이 읽혔기에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그리 덧붙인것이다. 다만 지금은 목적하고자 하는 리스트에 적힌 책 중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가 상대의 품 속에 있던게 문제였다.
"양보협상제안."
팔린 책은 또 들여놓는 가게니 이번에 얻을 수 있으면 이번에 얻는게 좋았다. 외출은 한꺼번에 처리하는게 나는 편했기에 두번에 나눠서 또 방문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시계태엽 오렌지."
해당 책같은 경우는 이미 큐브릭의 영화로도 보기는 했지만 결말이 다르다는 정보가 흥미로워 리스트에 추가한 책이었다. 순순히 양보를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조금 아쉽기는 했다. 외출이라는 계획이 한번 더 필요했으니까.
역시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으레 그런 법일까? 라고 해도 그녀 또한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대방의 어법은 꽤나 간단명료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해석하느냐의 문제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그녀도 얼추 알수 있었다. 제 아무리 베르셰바라 한들... 세상은 넖고 사람은 다양한 법이니까.
다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 역시나 그녀가 들고 있던 책 중 상대방이 찾는 것이 있던 모양인지 그것을 양보 해줄 수 있겠냐는 협상제안이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양보하는 것이야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닐 뿐더러 그것으로 상대방의 수고로움이 덜어진다면 오히려 다행이었겠지만,
"시계태엽 오렌지라~
...아, 여깄네요~"
탑처럼 쌓아 움직이지 않게 품고 있던 책들을 한팔에 주욱 늘어놓아 표지를 찾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접시를 끌어안고 서빙하는 웨이터처럼 보여 이질감이 들것 같은 찰나, 상대가 부탁하는 책을 찾은 그녀는 그것을 순순히 넘겨주려 하다가 무슨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손을 되돌려 제 가슴 위에 얹으며 가느다란 눈매와 함께 웃어보였다.
패션브랜드? 페로사랑? 어........ (매칭이 잘 안됨) 러프+캐주얼 느낌의 브랜드가 페로사랑 잘 어울릴 텐데 그런 느낌의 브랜드에는 뭐가 있으려나... 페로사주는 명품관에는 눈길 한 번 줘본 적 없고, 브랜드 옷이라고 뭔가 제대로 돈 주고 사입어본 건 아이더 야상이나 알파 인더스트리밖에 없는 패레기인걸.
상처받을 가능성. 그렇기에 버릇처럼 관자놀이를 짚는 당신의 표정을 헤아리게 될 수밖에 없다. 극도로 예민해진 당신이 쏘아붙이는 말은 날카로운 파편 같다. 손을 가져다 대면 베일 것만 같은, 그 조각의 파편에 둘러싸인다. 시안은 당신이 세운 벽을 넘지 않는다. 부러 무언가 더 하려 하지도 않으며, 그저 소극적인 행위로 건너다보는 것이다. 당신에 대한 관심은 '연민'의 감정에서 출발했던 것일까. 단지 연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신이 제게 베풀었던 선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남아있던 인간성의 그 작은 베풂을 알아보는 순간. 당신이라는 존재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음을. 당신이 어깨를 힘껏 잡아 가까이 당기면, 시안은 불에 덴 듯 깜짝 놀라며 물러나려 한다. 그렇지만 당신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끌려온다. 숨소리 들릴 듯,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당신의 얼굴이 낯설다. 시안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라 귀밑까지 붉어지고, 빠르게 뛰는 맥박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운다. 시안의 숨소리는 커져 있다. 숨결을 따라 그 가슴이 오르내린다.
어린 미카엘은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겼다. 부들부들 떨며 결국 손에 든 칼을 떨어트렸다. 한때 숨을 쉬며 꿈을 꾸고, 소망하며, 기회를 품었을 존재가 지금은 한낱 고깃덩어리로 전락했다. 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겨도 다시 앞머리가 우수수 쏟아졌다. 스치고 간 손바닥에서 끈끈한 비린내가 났다. 붉은 머리의 매력적인 여성이 걸어와 아이를 마주 보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몇 점이에요..?" "아가, 부엉아.. 헨젤. 점수에 연연하지 말거라. 참 잘했단다, 고생이 많았어.. 이제 푹 쉬렴." "오늘은 같이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이지. 네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 "퀸."
검은 고양이 가면을 쓴 여성이 다급하게 걸어오더니 로즈밀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미카엘은 로즈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걸 보고 직감했다. 오늘도 같이 있기는 글렀다. 이젠 익숙한 일이다. 같이 있고 싶지만 어머니는 늘 바쁘셨다. 아마 오늘도 이권 다툼을 정리하러 가실 것이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로즈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일이 또 생겨버렸으니.. 하트, 아이를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자리를 떠나는 로즈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카엘은 로즈밀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침묵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대체 뭘까?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치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모두 이 도시에서 헛된 희망이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자신을 잃어버린 분이셨다. 무슨 말을 해도 겉포장된 예쁜 미소로 괜찮을 거라 말씀하시고는 크게 다쳐서 돌아오시곤 했다. 나서지 않아야 할 일에도 직접 나서 꼭 피를 보고 오셨다.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 같은 양초와도 같은 분이셨다. 결국 오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아아, 얼굴을 덮어 가리고 깊은 한숨을 뱉자 미카엘을 지켜보던 킬러 부서의 새로운 팀장이자 하트로 불리던 여성이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가, 쉴래?" "몇 점이에요..?" "..그게 궁금해?" "퀸께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그래, 네가 바란다면.. 어디 보자.."
80점?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미카엘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확실하게 공포에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 미카엘이 나이프를 그대로 치켜들었다. 그대로 경동맥을 향할 줄 알았건만 볼을 파고들고 비트는 모습에 하트는 가면 속 눈동자를 찌푸렸다. 급소를 피하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피거품을 무는 비명소리는 비참한 생이 마침내 끝나버릴 순간까지 끝나지 않았고, 미카엘은 나이프를 손에서 내팽개치며 피범벅이 된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 누락된 부분 추가본..🤦♀️ 80점?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미카엘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하트의 같은 팀원이자, 이제 막 들어온 신참이었다. 단숨에 제압당한 것도 그렇지만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가면 너머로 확실하게 당황했으며, 공포에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 미카엘이 나이프를 그대로 치켜들었다. 하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대로 경동맥을 향할 줄 알았건만 가면을 넘어 볼을 파고들고 비트는 모습에 가면 속 눈동자를 찌푸렸다. 미카엘은 급소를 피하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반항을 하면 할수록 머리채를 더 깊게 휘어잡았고, 손을 뻗어 반격하려 하면 하트가 나서 그 손을 짓밟았다. 피거품을 무는 비명소리는 비참한 생이 마침내 끝나버릴 순간까지 끝나지 않았고, 미카엘은 나이프를 손에서 내팽개치며 피범벅이 된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쥐어서 끌어당겼을 때 뒤로 물러나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기어코 끌려오는 모습을 보며 브리엘은 처음 소리도 없이 입안으로 조소를 굴리고는 그대로 집어삼켰다. 물러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당기다보니 잡고 있는 오른손이 언뜻 잠깐 떨려왔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서 브리엘은 시안의 얼굴색이 천천히 변하는 걸 바라볼 수 있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을텐데. 자신의 힘이 세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뿌리친다면 놓아줄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자신보다 작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늘어트리듯 희미하게 조소를 짓고 있던 브리엘은 시안의 말에 하- 하고 한숨처럼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짧게 흘리고는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더니 싱크대를 짚었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손을 떼어내는 것으로 다시 물러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내가 놀릴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난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브리엘은 조소를 거두고는 숨소리도, 목소리도 떨리는 시안을 향해 무감한 목소리로 담담하고 조용하게 진실을 고했다. 떨리는 입술에서 떨어졌던 구리색 눈동자가 시안의 눈동자를 흘끗 바라보다가 나른한 기색이 드러나도록 반쯤 가늘게 떠진다. 브리엘은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던 고개를 조금 더 숙였냈다.
빚이라던가. 청산이라던가. 그런 게 뭔지 모르겠다.
"당신이 나한테 진 빚이 뭔지 모르겠지만 청산할 필요는 없어."
브리엘은 그렇게 조용하게 속삭이고는 조금만 더 움직이면 진짜로 닿았을지도 몰랐을 거리까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 요건 덤으로 쓰다 보니 마음에 들어서... :3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있었네."
캐리어를 정리하던 미카엘은, 유달리 큰 캐리어 하나를 혼자 차지한 무언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자신의 키 반절을 훌쩍 넘는 커다란 토끼 인형, '화이트' 씨다. 고운 원단으로 만들어진 정장을 입은 화이트 씨의 허리춤에는 푹신푹신한 솜으로 만들어진 회중시계가 있었다. 미카엘은 분홍색 단추 눈을 톡톡 건드려보고 품에 가득 안아봤다.
"오랜만이야, 화이트 씨."
비록 7층 소회의실에서 장난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 인형만큼은 절대 함부로 두지 않았다. 어머니와 용왕이 자신을 위해 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으면 화이트 씨를 가득 품에 안고는 했다. 외로울 때도. 레이스 호텔에 숙박하면서 이 존재를 잊고 있었다! 미카엘은 여전히 푹신한 감촉에 눈을 내리감았다. 포근했다. 5년이나 까먹다니, 정신이 없어도 한참 없었나 보다. 캐리어 구석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니까 너도 함께 가자. 입술을 달싹이던 미카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만 노트북을 저 캐리어에 넣는다 치면 화이트 씨가 들어갈 곳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진 고민하던 미카엘은 푹신한 토끼 귀를 손으로 잼잼 쥐었다. 역시 품에 안고 가는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인데 인형을 들고 간다니. 조금 부끄러운 일인 것 같아 괜히 아무도 없는 객실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뭐, 괜찮겠지. 미카엘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화이트 씨가 아플 때마다 솜씨 좋은 인형 병원 조직에 보내 낡거나 헤진 구석은 없지만, 오래간 캐리어 구석에 처박혀서 그런지 먼지 냄새가 났다. 미카엘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웃었다. "음.. 일단 씻자. 이대로면 먼지 나라에서 온 줄 알겠어."
인형을 씻겨본 적은 없는데, 어떻게 해야하지? 미카엘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호텔 직원을 부르기로 했다.
>>818 !!!!!!!!!!!!!!!!!!!!!!!!!!!!!!!!!!!!!!!!!!!!!!! (머리위로 운석 하나 내리꽂힌 충격) 그 래 서 였 구 나 . . . . . . . (무한점) 아 이거 생각보다 훨씬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문제였었구나... 88 알려줘서 고마워
페로사의 진노에서 로노브와 포레가 보였던 것과 같은 모습이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방금 전에 잡화점에서 제롬을 향해 신랄한 감정을 드러낸 로노브와 포레- 라 베르토의 창설 때부터 아스타로테와 함께한 두 명의 창립 멤버를 제외한다고 하면, 아스타로테와 같은 세대의 사람 중에 아스타로테와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다섯 명을 뽑아보라면 그 중에 페로사가 들어갈 정도로 그녀 역시도 만만찮은 세월을 아스타로테의 친구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다만, 페로사가 자신의 감정을 있는 힘껏 참아누르고 제롬을 손님으로 맞아준 것은, 예전에 제롬과 나눈 이야기가 있었을 뿐더러, 페로사가 아스타로테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제롬의 친구이기도 해서였다.
"조금 기다리셔."
그래서 페로사는 제롬의 주문을 받았다. 그녀는 냉장고 위에 수건으로 싸서 올려놓은 얼음을 끌로 찍어서 쪼개고는, 나이프로 능숙하게 삭삭 깎아서 말끔한 구형 얼음을 만들어 온더락 글라스에 담았다. 그리고 그녀는 선반을 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창문가의 줄리엣을 올려다보는 로미오를 그린 것이 분명한 라벨이 새겨진 위스키 병을 꺼냈다. 글라스에 또르륵 따라지는 그것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선율 같았다. 거기에, 그녀는 냉장고를 열어서 웬 요일별로 약 나눠담는 약통을 꺼냈다. 약통에는 약 대신 이름모를 꽃들이 저마다의 모양과 색으로 칸마다 한 송이씩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 꽃 하나를 꺼내서 마무리 가니쉬로 올린 다음에, 제롬의 앞에 코스터와 함께 온더락 글라스를 소리없이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은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한 모금 머금어보면, 뚜껑을 열었을 때 느껴지던 선율과도 같은 캐러멜향과 깊이있는 씁쓸함, 헤이즐넛을 연상시키는 견과류의 향이 애잔하게 입 안에 흐른다. 코끝으로 와닿는 이국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꽃향기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도 같다.
"'비르투오소' 온더락 나왔습니다. 천천히 마셔."
바텐더는 손을 멈추지 않고 라임 하나를 꺼내서 반으로 자르고, 반쪽을 똑똑똑 썰어서 구리 머그잔에 던져넣고는 머들러로 툭툭 찍어으깨고는 그 안에다 보드카를 쭈르륵 따랐다. 그리고 잔에 자갈얼음을 몇 스쿱 퍼넣고, 잔의 남은 공간을 진저비어로 가득 채우고는 바스푼으로 가볍게 위아래로 저어주었다. 라임웨지 하나를 가니쉬로 올린 그녀는, 제롬에게 꽃을 꺼내준 약통의 다른 칸에서 연보랏빛의 꽃 한 송이를 꺼내 마무리 가니쉬로 올려서 아스타로테에게 내어주었다.
"달지 않고 가볍고 시원한 거. 모스코 뮬 나왔습니다."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생강향과 알코올 기운, 상쾌한 탄산, 상큼한 시트러스의 맛이 혀 위로 올라오면서, 가니쉬로 올린 꽃의 상쾌한 애플민트 같은 향과 섞이며 신선한 청량함이 되어 목구멍을 넘어간다. 아릴 정도로 차갑지는 않지만, 그것은 풍부하면서도 가벼웠다.
페로사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테나 제롬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대답해주겠지만, 로테와 제롬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대화에는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제롬은 가니쉬가 얹어진 온더락 글라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향은, 좋았다. 좋은 위스키를 사용한 것일까. 얼음이 녹으며 향이 옅어질 것을 감안해도, 이렇게 진하고 달콤한 향이라면, 오랫동안 즐기기 좋을 것임이 분명했다. 입 안에 머금어보니 제롬의 예상은 정확했다. 달콤하고도 씁쓸한 향은 입 안 전체를 감돌았고 목구멍 너머로 내려가며 긴 여운을 남겼다. 알코올의 매운 맛과 뜨거운 감각을 마지막으로, 제롬은 작게 숨을 뱉어내었다. 비르투오소가 무엇인지, 알고 싶기는 했으나 당장은 질문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여인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날, 집에서 본 그 분위기에 가까웠다. 자신이 싫어하던 그 분위기 말이다. 저 모습을 또 한번 보게 될 거라고는... 제롬은 쓴 입맛을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키며 씻어냈다. 여인은 물었다. 뭘 고를 거냐고. 제롬은 그 말에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연다.
"...나는 차라리 선택하지 않을래."
고개를 돌리는 여인을 보며, 제롬은 나직히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은 꽤나 아프게 제롬을 찔러들어왔다. 여인도 정말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도, 그가 여인의 얼굴에 남은 흔적들을 보고도 이전과 같이 행동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을테니.
"네가 선택하지 않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 그러니 나는 네게,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선택을 미루고, 내 행동을 지켜본 다음, 그 때 선택해."
자신이 선택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대로 관계를 끝내는 것도, 이어나가는 것도. 둘 다, 여인이 원하는 것이 아닐텐데. 제롬에게, 아스타로테에게 있어 그것이 과연 옳은 결과일까?
그는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뻗어진 손은 여인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잠시라도, 자신을 돌아봐 주었으면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두면 여인이 자신의 곁을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여인을 마주하려 했다.
"...지금부터 말해줄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여인이 바라보았는지, 아니면 그저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입을 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페로사의 앞이었기에 밑바닥까지 드러내지는 못 했겠지만 그는 그가 숨겨왔던 것을, 아스타로테의 앞에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현재 라이벌 조직으로 추정되는 정체 모를 조직들에게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 이전에 다쳤던 것은 그 일 때문이라는 것. 그 일과, 자신의 친구이자 유명한 해커인 '에만'과 협력하기로 하여 당분간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는 것. 그러던 와중 르메인 배틀리언 소속 무라사키를 만나 친구가 되고, 그 일의 여파로 자신이 납치되어 고문받고, 그 일 때문에 의식을 잃어 일주일이나 연락도 못 받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까지. 여인이 보고로만 받았을 이야기가, 제롬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나는, 무서웠어. 네가 나를 떠날까봐. 이런 이야기들을 털어놓아봤자 널 피곤하게 할 뿐이라고, 네가 날 떠나는 계기만 될 뿐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더라."
숨기는 것이 오히려 여인을 괴롭게 만드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숨겼던 것은 단지, 그런 이유였을까.
"네게 숨긴 건 이게 끝...은 아니야. 나머지는 여기서 들려주긴 곤란해. 하지만, 내 밑바닥까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전부 말해줄게."
페로사를 흘긋 본 그는, 다시 여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을까. 조금 전과는 달리 여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려고 하면서.
비밀 많은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피해망상에 점철된 이의 눈에는 모두가 자신에게 거짓 고하고 비밀만을 속삭인다. 세상은 정말이지 무서운 곳임에 틀림없다. 모두가 늑대 꼴이다. 불행히도 프로스페로의 시선에는 제 앞 바텐더 또한 그렇게 보인다. 내가 당신을 어찌 믿지, 나는 내 목숨, 아니, 사소한 안위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당신 목을 조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우정이란 그리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그것 알고 있으니 저 믿는 사람들에게 죄책감 가지고 있다. 지금 페로사가 사내의 손이 비수 쥐여준 것은 죄책감을 더해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다는 공포를 조미료로 사용하였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은 모두 한여름 환상에 불과하기에 고마움은 찰나일 뿐이다.
"나는 당신이 바깥 사람 같으니까.. 나는 바깥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
우리의 손에선 피 냄새가 난다. 다만 당신의 손에는 갓 뜯어낸 살점이, 내 손에는 구더기 떼가 득시글거린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게 왜 잘못이 아니야?"
일순 목소리 가라앉는다. 삶은 원죄다. 우리가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동맥을 잘라왔는가?
"우리는 왜 악해야만 살지? 선과 악을 구분조차 못하는 게 자랑이랍시고 떠들고.."
양손으로 얼굴 파묻었다. 차라리 도덕을 모르던 어린 시절이 나았다. 빌어먹을 셰익스피어, 빌어먹을 활자들! 겉표면으로만 아는 도덕과 선성이 사내의 목을 옥죄었다. 강박을 이루었다. 당신은 이러한 감정-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니 곧 괴물과 다름없다 속삭인다. 두려움으로 숨을 쉬었다.
"여기가 투견 풀어놓은 도박장이랑 무엇이 다르니, 고깃덩이 하나에 목 물어뜯을 준비가 된 미치광이들만 모아놓았는데."
판돈은 목숨이다.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문제는 견뎌 내야 하는 나날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하는 것 뿐이라.*"
가까이에서 보면 그토록 하찮고, 작은 것이다. 한없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어떤 감정이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며 지나가며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당신의 얼굴에서 한 줌의 조소를 읽는다. 당신의 손을 힘껏 뿌리칠 수 있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치는 느낌이라. 그러지도 못한다. 긴장감에 경직된 건지 당신이 손을 놓아도 시안은 자리에 못 박힌 듯 물러나지 않는다. 잔뜩 붉어지고, 조금은 울상인 눈으로만 당신을 본다.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마치 귀를 가슴에 붙여놓은듯. 심장박동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 같다고. 그렇지만 움직이는 당신이 입술을 분명히 읽는다. 나직하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당신이 고개를 숙이면, 입욕제의 그 향이 코 끝을 스쳤을까. 시안은 놀라울 만큼 아주 가까이 있는 당신의 눈길을 마주한 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면 그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을 계속해서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리며. 그나마 최대한 똑바른 발음으로 말한다.
"당신이 제게 해준 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빚이니까요." "갚을 수 없는 빚이라면 목을 매고 죽겠어요."
당신에게는 어쩐지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이었고. 자신 같은 족속들은 그런 상태로는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고개를 뒤로 물러내면서, 싱크대를 짚은 채 머리를 쓸어올렸던 손으로 브리엘은 다시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며 지끈지끈 울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질러내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시안이 뒤로 물러나자 길게 한숨을 쉬며 싱크대에 올린 손으로 비어 있는 잔을 채웠다.
특유의 위스키 향이 잔잔하게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주방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아서 아스피린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브리엘의 신경성 두통을 가라앉히는 아스피린과 종종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우기 위한 위장약은 늘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주방만은 예외였으니까. 브리엘은 가득 위스키로 채워진 잔을 입술에 대고 기울여서 비워낸다. 고개를 돌리면서 비스듬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는 속도가 시안이 시선을 돌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키스라도 해줄거냐고 이야기를 했을 때 대답하지 않고,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위치까지 고개를 숙였을 때 피하지 않는 모습에 머리 한쪽에 머무르던 생각이 천천히 비집고 올라온다.
밖에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의사까지 해먹은 나이어린 여자의 뇌는 이 도시에 들어온 뒤로부터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모든 것이 무감하게 느껴지는 것과 똑같이.
"당신이 날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안할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금새 비워낸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우고 브리엘은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려했다. 언제 그런식으로 행동했냐는 듯, 브리엘의 모든 행동과 태도, 걸음걸이와 목소리까지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제롬의 일과는 별개로 여인은 앤빌의 바텐더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이 몹시 고팠었다. 못 해도 주에 한 잔은 꼬박꼬박 마시던 걸 몇 주나 끊었으니 나름의 금단 현상이 없었겠는가. 금주 아닌 금주를 끊게 해준 것에 대해서는 제롬에게 고마워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이 일이 없었으면 여인이 앤빌에 오게 되는게 언제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을 테니.
투박한 구리 머그잔에 담긴 술은 나오자마자 은근한 향으로 갈증을 불러 일으켰다. 얼른 들어서 몇 모금 들이키자 맛과 어우러진 향이 한층 더 신선했다. 적당한 청량감은 머릿속을 맑게 해주었고. 동시에 여즉 남아있던 울음의 흔적을 얼굴에서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만큼 조금 더 차가운 표정이 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잔을 내려놓고 습관적으로 손을 뻗던 여인은 목적지 잃은 손을 든 채로 페로사를 보며 말했다.
"롯시이. 오늘은 기본 안주 없는 날이야, 아니면 몇 주나 얼굴 안 비춘 친구한테는 안 주는 거야?"
톡톡. 하고 평소라면 접시가 있었을 자리를 두드리는 손짓과 히죽이는 표정, 평소처럼 돌아온 호칭이 페로사에게는 조금 얄미웠을 지도.
서로 술잔을 한 번씩 기울인 후에 여인과 제롬의 대화는 이어졌다. 페로사는 일단 관망할 생각인지 주문 받은 술을 내준 것 외엔 말이 없었다. 롯시는 그런 점이 참 좋아. 여인은 페로사를 보며 웃다가도 제롬을 향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게 식은 얼굴을 내보였다. 어느 쪽이 진심인지. 어느 쪽도 진심이 아닌지. 알기 어렵게.
"...같잖네."
무얼 고를래. 라는 물음에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겠다며 여인이 지켜보고 선택하라는 말에 툭 하니 흘러나온 말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시선만 옆으로 돌려 제롬을 보았다. 인형의 눈이 거기 있을 제롬을 비추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롬이 손을 잡으려 했을 때,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주 잡지도 않았다. 시선만큼이나 차가운 손은 그저 잡혀 있어 줄 뿐이었다.
길게 이어 진 얘기는 정말 듣고 싶은 것이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어째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걸까. 왜일까. 여인은 제롬의 얘기가 끝난 후에도 잠시간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술을 천천히 마셨다. 반쯤 빈 술잔을 코스터 위에 올려놓으며 여인이 말을 꺼냈다.
"내가 사람인 이상. 항상 똑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가능하면 내 철칙을 지키려 했어.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는 거. 그러니까 당장은 아니어도 네가 언젠가 너에 대한 걸 얘기 해줄 거라 어디선가 믿고 기다렸던 거야. 하지만 너는 그 믿음을 깼고. 나는 그것에 대해 화가 났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고서야 너한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거든."
여인은 제롬이 잡고 있던 손을 빼내어 제롬에게 뻗었다. 하얀 손이 손끝으로 제롬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가 싶더니 휙 내려가 제롬의 옷깃을 잡아 쥐었다. 손을 따라 천천히 돌아서 제롬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 날 나는 이미 준비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어. 네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감췄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어. 그런데 너는 그걸 네 생각만으로 망쳐버렸지. 앞서 말한 선택은 그런 널 위한 벌이야. 제제. 네 행동으로 인해 너와 내 관계가 무너지는, 아니, 네 손으로 무너지게 만드는 선택을 하는게. 내가 네게 주는 벌인 거야. 그것만큼 네게 괴로운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 그렇니."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잡을 때처럼 예고 없이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손을 올려 머리를 슥슥 빗어 정리하고 꺼진 폰 액정에 얼굴을 한번 비춰보고는 페로사를 보며 물었다.
"롯시. 무대, 지금 쓸 수 있어? 오랜 만에 왔으니 한 곡 뽑아 줘야지."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건지.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여인의 행동은 종 잡을 수 없었을 터였다.
시안의 뺨에는 그 홍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난 후에는 공허뿐이다. 제 감정이 어떠했는지도 모르겠고, 뒤늦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지쳐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는. 텅 빈 상태가 되어 버린다. 혼이 나간 듯 꼼짝하지 않은 채, 시안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을까.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힘에 겨운 탓인지 돌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당신의 목소리 밖에 듣지 못하는 거지만. 시안은 그런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돌아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느낀다. 처음부터 기대했던 건 없었겠지. 키스를 할 수 있겠냐는 당신의 말에 용기를 내어 답했던 건데. 이번에는 제 수치심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도망칠 생각을 한다.
"그래요. 이젠 안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 "그리고 진정 내게 아무것도 아닌 건 없는데. 그러길 바라는 거 같으니, 그렇게 생각할게요."
갈라지며,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
"그럼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데요?"
격한 감정을 느끼며 시안은 그렇게 말한다. 선물도, 어떠한 말도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할 수는 없다. 영영 당신의 웃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할 것 같다 생각한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보나, 재빨리 숙여낸다. 그리고 시안은 돌아서며 당신과 반대로 현관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