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을까. 밖에 매달고 다니면 때 타고 털 빠질 테니까... ...그렇게 되는 게 왠지 싫어서."
하며 현민은 네 손을 꼭 잡았다. 문득 네 옷차림이 정말로 폭실폭실한 털을 두른 북극여우 같아서 현민은 너를 한 번 끌어안아보고 싶어졌다. -아까도 끌어안고 있었는데 뭘. 같이 있어주겠다고 했는데 성급히 욕심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민은 네 손을 쥐며 덧붙였다.
"간식 가져오고 나면, 내 선물도 받아줄래."
너와의 시간을 만끽하느라, 현민은 그만 네 선물에 대한 생각을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어렵게 구한 것인데 네 마음에 들까는 모르겠다. 간식을 먹으면서 천천히 언박싱해도 될 것이다. 사실 오늘 포장해서 너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네가 찾아오겠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제대로 된 포장도 못한 게 마음에 많이 걸리긴 한다.
"오늘 포장해서 너 찾아가서 주려고 했는데... 네가 오는 게 더 빨랐네."
현민은 간식을 먹으면서 그 선물을 보여주려는 모양인데, 만일 선물을 지금 보고 싶다고 하면 그에게 요구해보자.
─이 밑은 그냥 간식을 가지러 내려갔을 때─
복도로 나와서, 나무로 된 나뭇바닥을 지나 계단을 내려간다. 한 발짝씩, 현민은 네 손을 꼭 잡고 조심스레 걸어내려갔다. 내려가 보면 동네 외출용의 가벼운 외투를 현관에서 탁탁 털고 있는 어머니가 보인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잠깐~"
현민의 질문에 현민의 어머니는 언제나의 그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크는 식탁에 잘라뒀고, 쿠키도 꺼내어뒀으니 필요한 만큼 접시에 담아가렴. 쿠키는 랑이가 선물로 준비해 온 거니까, 먹기 전에 고맙다고 말하고. 멋진 선물 고맙구나, 랑아."
그러니까 랑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선물이라는 것을 랑이 남에게 주지를 않아서도 그랬지만, 누군가에게 받지를 못해서도 있었다. 오늘 받은 선물들은 무엇이냐고 하면, 랑은 입고 있었던 겉옷이나 종이봉투에 담긴 것들을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죄책감과 미안함을 덜어내는 용도로 받은 것들을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이름만 선물일 뿐이다. 네가 주는 선물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래서 랑은 놀라서 반문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오늘 너와 만날 거라고도 생각치 못하고 있었고, 네가 준 머리끈 둘과 피어싱 하나, 네 방에 차지하고 있는 어항 속 하얀 물고기 한 마리까지 하면-
"나는 이미 많이 받은 거 같은데..."
내민 손을 잡아오는 너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너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또 받아도 되는거야? 지금도 랑의 귀에는 네가 골라준 범고래 피어싱이 달려있고, 머리끈도 주홍빛의 매듭끈으로 묶여있다. 우물쭈물거리는게, 아무래도 선물을 받기 망설여하고 있었다. 정말로, 랑은 너와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네게서 벽을 느끼고는 했다. 나는 너에게 너같은 아이가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는 벽을 견고히 했다. 네가 괜찮다고 말해줬는데도 이렇게 쉽게 겁을 먹었다. 랑은 조심스럽게 너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네 손가락 사이사이로 보다 작고 말랑한 손가락이 얇게 얽혔다.
"지금 받으면 안 돼?"
지금 그럴 마음이 든게, 네게 선물를 한 번 더 용기가 난게 사라져버리기 전에 붙잡고 싶었다.
깍지를 끼어오는 네 손을, 그의 거친 손이 부드럽게 맞깍지를 끼어온다. 거친데, 부드럽다. 그의 손은 항상 그랬다. 그리고 따뜻했다. 햇살을 오래 받은 바위 같은 따스함이 항상 그 손에 있었다. 너와 같이 있을수록 소년은 네게서 받는 것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너는 평소에도 나한테 많이 주니까. 그래서... 나도 줄 수 있을 때 주려고."
그래서 더 이상,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말해야 할 때는 말해야겠다고.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 내가 너한테 나이고, 너는 나한테 너이기만 하면 그걸로 괜찮으니까. 네가 나와 함께 있어주니까 너는 나와 같이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현민도 이따금 느낄 때가 있다. 네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고, 망설이고, 어려워하는. 마치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벽 바깥족은 부숴졌는데, 아직 벽의 안쪽 면은 네게 남아있는 것 같은. 그래서 현민은, 이 관계는 그렇게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고, 조금씩 너한테 알려주고 전해주고 싶다고, 너를 둘러싼 벽을 네가 허물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꼭 너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
아. 그렇지만 역시 이렇게 말하는 게 부끄러운 건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현민은 귓가가 따끈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간식 가지러 가기 전에 이것부터 보여줄게."
현민은 책상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서랍이 소리없이 스르륵 열린다. 새하얗고 길쭉한 상자 하나와, 네모낳고 납작한 상자가 하나 있다. 둘 다 너에게는 낯선 브랜드 이름과 로고가 인쇄되어 있다.
"어느 것 먼저 열어볼래?"
/ ( 3 3) 답레 쓰다가 졸았다 / 랑주도 이미 자러 간 것 같긴 한데 일단 답레는 올려둘게.. 좋은 꿈 꿔
너한테 무엇을 주었는지, 랑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별로 준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다 말고 말을 마무리했다. 네가 준 그 모든 것들이 불과 물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데, 그것들에 담긴 의미하며 소중하게 어려있는 마음들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같이 보내는 매순간 매초마다도 너는 늘 온몸으로- 시선 하나하나 마저도 랑을 향해 있다는 건 아무리 바보여도 알아챌 사실이었다. 언제나 나와 닿은 네 품은, 네 손끝은 따뜻하니까. 랑은 입을 다물어 끊겨버린 문장을 수습하지도 않았다. 수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던 척할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마땅히 적당한 것을 찾지 못했다.
"고마워."
아직 선물을 받지는 않았지만 받을 예정이기도 하고- 네 선물을 받기 망설일지 언정 받기 싫다고 끊어내지는 못하겠다. 랑은 살포시 웃으면서 답했고, 네가 뻗은 손을 바라보았다. 서랍에 있었던 상자를 깜빡 내려다본 랑은 우선 상자만 보고서 안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네가 주고 싶었을 크리스마스 선물. 랑은 공부를 많이 하니까 그런 쪽의 선물이 들어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길쭉한 상자에는 펜이 들어있으려나 싶었고, 네모낳고 납작한 상자는 스톱워치를 생각했다. 아니면 또 무엇일까.
끝맺지 못한 말 끄트머리를 현민이 살며시 깨문다. 내가 네게 준 모든 것은 네게서 받은 것으로부터 피워낸 거야, 어설프나마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닫혀있는 내 마음을 여는 것... 그냥 이대로 아무 변화도 없이 살아지는 삶을 살아가겠구나, 하던 내게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 그게 다 너인데. ─그러나 현민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네게 차근차근 알려주기로 했다. 네가 떠나지만 않는다면 시간은 많다.
"한꺼번에 다 열면 뭐가 좋고 뭐가 싫은지 헷갈리니까."
길쭉한 상자에는 확실히 펜이 들어있다고 생각할 법한 것이 딱 필기구가 들어가 있을 만한 사이즈였다. 애초에 상자에 새겨진 로고가 (매니아들 사이에서 인정받지만, 일반인은 오히려 잘 모를 수 있는)영국의 유서깊은 필기구 메이커 로고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작고 네모난 상자는 감이 안 잡힌다.
작은 오해가 있었다. 랑은 네가 주는 선물을 별로 받기 싫다고 말한게 아니라고 정정했는데, 너는 랑이 말하다 만 문장을 바로 이해하고서 되물은 것이었다. 동문서답, 하지만 랑은 몰라서 이 해명으로 대화의 주제를 끝내려고 했다. 더 이어져도 랑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었다. 또 구름처럼, 하염없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바람에 실려가는 것처럼 두루뭉실 숨어버리면 모를까.
"아."
그래서 서둘러서-그런 티를 내지 않는 데에는 도가 터서 네가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손에 쥐어준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손바닥보다 큰 상자 속에는 나란히 담겨있는 은빛의 꼬리 지느러미와 여우 꼬리가 있었다. 지느러미도 분명 범고래의 것이겠다. 스탑워치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던 랑은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다가 너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피어싱을 고르면서 랑이 고래 꼬리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며, 범고래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서 말했던 것을 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랑은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랑은 이어서 생각했다. 널 범고래라고 불렀는데- 너와 있고서부터 함께한 시간 중에 그렇지 않던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혼자 앉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원래는 아무도 없던 옆자리에 네가 앉아 문제를 푸는 것조차도 그랬다.
"난 당연히 이쪽."
랑은 너를 골랐다.
"괜찮으면 걸어줄래?"
네가 그러겠다며, 목걸이가 담긴 상자를 다시 받아들어준다면 랑은 너를 등지고 뒤돌아서 머리카락을 모두 오른쪽 어깨로 모아 앞으로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