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빠지면 자신이 어디까지 빠지는지 아니까 늦기 전에 돌이킬 수라도 있지. 모르는 새에 빠지면 정신 차리고 보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빠져있지 않은가. 현민이 그랬다. 싹도 알고 키우면 주의하고 관리하면서 조심조심 키워나가다 관두던가 때 되면 수확이라도 할 것을, 어느새 정신차려보면 싹이라 생각했던 것이 한가득 자라 네 정원을 다 뒤덮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드리 나무일까, 담쟁이 덩굴일까.
"채씨?"
하던 현민은, 곧 어- 하고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 사람의 표정이 되더니 또 >:( 표정이 된다. 그러나 뭐라 반론은 못하고(또 당할까 봐), 쿡쿡 웃는 너를 보고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다. 너와 그는 수족관을 나섰다.
"이 시간이면 버스 타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 앉아서 갈 수 있을 거야."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가벼운 이야기가 몇 마디 오갔다. 모평 시험범위라거나, 그러고 보니 시내에 아쿠아리움이 있었는데 다음에는 거길 가보자거나, 넌 어디 가보고 싶은 데 없냐거나... 그리고 언젠가 여름방학이 되면 너와 같이 여행을 가보고 싶다거나.
그의 말마따나, 버스정류장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되 서너 명 정도였다. 벤치 하나가 남아있기에 현민은 벤치까지 널 데려다 앉혔다. 손은 쥔 채로, 그리고 네 옆에 나란히 붙어앉는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버스 위치가 표시되는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몇 분 뒤면 버스가 오겠다. 현민은 문득 호오, 하고 입김을 불어보았다. 늦가을 밤하늘로 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솟아올라간다.
"공기가 차갑네."
하며 그는 조금 뒤척였다. 이미 네 옆에 딱 붙어있었기에 너와 그의 거리가 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네 >:(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방금은 진짜로 별 말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랑은 네 표정이 그렇게 된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웃는 걸 보고 고개까지 젓지 않나. 랑은 표정으로 물음표를 그리고 눈을 깜빡거렸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너에게 답을 보채지는 않았다.
"평일에도 그래?"
주말에야 도서관에서 집을 왔다갔다하니 버스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거기다 랑이 버스를 타는 시간은 아침과 밤. 그럴 수 밖에 없는 노선과 시간대였다. 조곤조곤 대화가 이어진다. 시험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고, 동네에 아쿠아리움이 있었냐며 눈을 반짝이다가- 가보고 싶은 데라면 방금 말한 아쿠아리움이 가고 싶다고. 여행 이야기에는 두리뭉실한 답을 했다. 갈 수 있으면 가자고, 랑은 부모님에게 여행 허락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호자 없이 여행이라니 아무래도 불안해하시고 만다. 그 이전에, 말을 걸 용기도 없다.
"조금- 바람 불면 다리 시려."
버스 정류장 벤치에 나라히 앉아서, 랑은 다리를 쭉 뻗어 보았다. 안 넘어졌다.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줄곧 너의 손을 잡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도 랑의 무릎에는 반창고 한두개가 붙어있으니까. 다리를 내리고서 랑은 네게 폭 기대었다. 랑의 머리가 네 어깨쯤에 닿을까, 그리고 오늘 하루종일 잡고 있었던 네 손을 두손으로 꼭 쥐어본다. 이런다고 따뜻해질지야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분명 따뜻할테니까.
글쎄 1학년 때는 우연히 경기일정이 겹쳐서 불참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현민이는 그때 오히려 좋아했어 현민이가 중학교 때 감쌌던 아이가 수련회 레크리에이션 시간에서 불쾌한 일을 당하는 걸 본 이후로, 그 아이와 관계는 어찌됐건 수련회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말야 현민이에게 여행은 랑이랑 같이 가서 맘껏 꽁냥댈 수 있는 걸로 충분해
현민의 추론은 그냥 단순히 '이 시간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으로 귀가했을 것'이라는 일차원적인 추론의 결과였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면 10시에 야근을 마친 지친 직장인들이 열너덧 명쯤 버스정거장으로 몰려올 거란 사실은, 조금 구슬픈데다 너와 이 소년의 이야기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니 제쳐두자.
너와 이야기를 나누며 현민은 네 두리뭉실한 대답에 담겨 있는 우물쭈물하는 기색에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예 숨길 수도 없고, 아예 눈치채지 못할 수도 없고, 아예 외면할 수도 없는 골치아픈 문제다. 그래서 언젠가는 대면해야 할 문제다. 그렇지만 그게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되지 않는가. 현민의 시선은 네 무릎으로 내려갔다. 네 무릎에 붙은 반창고가 많이 마음이 쓰이는지, 현민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릎보호대를 하나 사줘야 되나. 네 머리를 자신의 어깨로 받으면서, 팔과 몸통 사이의 틈새로 네 어깨를 안아주면서 현민은 네 손을 꼭 마주쥐어주었다. 너를 위해서 여전히 그 손은 따뜻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던 게, 너와 소년을 집으로 태워다 줄 버스가 얼마 안 가서 도착했기 때문이다. 현민은 "자..." 하고 너를 부르면서, 네 손을 꼭 잡고 네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네 손을 꼭 잡고 네가 버스에 다 오르기까지 도와주고 나서야, 현민은 교통비를 계산했다. 밤의 버스라, 승객이 많지 않고 한산하다.
뒤쪽을 보면 2인용 좌석이 많이 비어 있다. 다행히 조금 더 기대어있을 수 있겠다. 교통비를 계산한 현민은 네가 버스에 잘 올라왔는지 힐끗 돌아보더니, 네 손을 꼭 쥐고 버스 뒷칸의 2인용 좌석 쪽으로 네 손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네 손을 잡고 일어나서, 너를 따라서 버스에 올라탔다. 교통카드가 삐빅 소리를 내면서 태그되고, 랑은 자리가 많이 비어있는 버스 좌석을 보고- 2인용 좌석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바로 그곳에 앉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겠지, 하고 버스의 뒷쪽 2인용 좌석으로 향하려던 랑은 어딘가에 꽁 부딪혔다. 너였다. 아야, 조그만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감싸쥐던 랑은 너를 바라보았다. 넌 랑을 돌아다보고 있었고, 하필 그 타이밍에 랑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무슨 일로 돌아보고 있던 건지, 랑은 왜에, 하고 물어보듯이 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 손에 이끌려서 다시 벤치에서처럼- 서로 나란히 앉고 나면, 랑은 벤치에서와 똑같이 네게 톡 기댔다. 그러면 방금 꽁 박아버린게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아프다고도 못 하겠는- 애매한 통증을 남기고 있었다. 랑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네 어깨에 기대고 있다가 얼굴을 부빗거렸다. 아프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아파- 말하고 싶은, 나름대로 랑의 앙탈이었다.
"아."
네 어깨에 얼굴을 부빗거리다가, 랑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시내로 오던 버스에서는 네가 랑의 머리에 뺨을 부빗거렸었는데,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랑이 네 어깨에 뺨을 부빗거렸다. 그러다 네가 아까 정리해주었던 앞머리도 흐트려먹고, 하지만 그것까지 알아챌 만큼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랑이 제일 좋아하는 스킨쉽이 이것이었고, 그걸 별 생각도 아무 생각도 없이 네게 해버린 걸 알게되고, 네가 했었던 것까지 오버랩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때도 랑은 얼굴을 붉혔었는데, 직접 해버린 지금이 당연히 더 붉게 물들었으면 물들었다. 랑은 얼굴에 열이 점점 오르는 걸 느꼈지만 네게서 떨어지면- 그럼 얼굴이 더 잘 보일 것 같아 그러지도 못하고 네 어깨에 기댄 채로 굳어버린 것이다.
할 때는 이미 네가 툭 하고 어깨에 얼굴을 박았다. 얼굴을 싸쥐면서도 왜 그래? 하는 듯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랑을 현민은 걱정스럽게 살펴보았다. 우선 자리에 앉혀야겠다는 생각에 현민은 널 자리로 이끌었다. 발걸음 속도가 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걷는 느낌이 조금 서두르는 것 같다. 아까 벤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널 창가에 앉히고 현민이 그 옆에 앉는다. 너한테 뭔가 물어보려고 그는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이 딱 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순간이었다. 문득 자신의 어깨에 머릴 기대고 있는 모습에, 현민은 언어영역 공부를 하다가 지문으로 나왔던 어떤 글에 대한 생각이 들어서 말문이 막혔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현민은, 네가 그의 어깨에 네 부드러운 향기를 한 겹 더 잔뜩 묻혀버리는 모습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너를 가만히 보다가, 네 정수리 위에 자신의 뺨을 기댔다. 그리고 네가 방금 자신의 어깨에 그러했듯 부드럽게 부볐다. 숨길 것도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애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잠깐 들고 너를 내려다보았다. 늦가을에 갑자기 머릿속에 찾아온 여름의 페이소스에 떠밀려나갔던 질문을, 조금 늦게나마 지금이라도 꺼낼 수 있었다.
"너... 코 괜찮아?"
그리고 그제서야 현민은 네 얼굴에 온통 낯선 색이 피어있는 것을 깨달아버린다. 너한테는 익숙한 색일 텐데, 현민에게는 아직 낯설다. 네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현민은 후다닥 다시 자기 머리를 네 정수리 위에 조심스레 기댔다. 아아, 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지만, 그걸 입에 올려버리면 인어공주 이야기처럼 그것이 물거품같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 생각하는 것마저 조심스러워 현민은 눈을 꾹 감았다.
이건 그냥 아무 뜻 없이 이야기하는 잡지식이지만, 두피는 온도변화를 꽤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