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그림자 아래서도 너는 주홍빛으로 물든다. 그러니까 랑은, 이렇게까지 큰 파도가 칠 줄 몰랐다. 이번에는 일부러 너를 놀려먹으려고 한 말도 아니었거니와, 늘 그렇듯 사근거리는 말도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느껴서, 네가 웃음짓는게 예쁘기 때문에 말해보았는데-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너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느냐고 물어볼 뻔 했던 랑은 네가 해주었던 답이 떠올랐다. 싫은거면 얼굴이 빨개지는게 아니라 정색을 할 거라고 했었으니까- 좋아서 빨갛게 된거야. 이번에도 그런 거라면-
"나 주황색 많이 좋아질 거 같아."
난 너의 그 색이 많이 좋아. 네가 앞머리를 정리해주는 동안 랑은 네가 걸고 있는 목걸이 끝, 곰돌이 팬던트를 톡 건들여 본다. 장난치는 듯 한번의 건들임은 하필 주황색으로 칠해지고 있는 곰돌이 팬던트에 닿았다. 말을 끝맺을 때는 곰돌이에게서 네게로 랑의 시선이 올라갔다. 주황색, 주홍색- 네가 날 좋아해주는 색.
"이름은?"
네 말을 들고 있던 랑은 하얀 베타를 바라보았다. 이제 너 현민이 동생이네- 라고 생각하며, 으레 애완동물이 생길 때의 절차 중 하나가 떠올라서 물어보았다. 이름 지어주기. 그리고, 랑은 그만 네 옆에서 조금 떨어지고 말았다. 그도 그런게 다니는 곳만 다녀버릇하던 랑에게 수족관은 구경하고 싶을만한 장소였고, 가게 안은 그런 랑의 기대에 부응하듯 가득 채워져있었다. 바다에 사는 동물들만 있는 건 분명 아니겠지만- 랑은 이 곳이 꼭 작은 바닷속 같다고 생각했다. 파랗게 빛나는 건 수조의 물빛인지 랑의 눈빛인지 헷갈린다. 네가 설명을 듣는 시간은 10여 분 정도였다지만, 랑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잠깐새였다. 물 속에서 저렇게 자유롭게 헤엄치는 지느러미에 홀리지 않을 새가 없다. 랑은 너도 같이 구경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에 너를 돌아다 보았고, 그 사이 너는 박스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구경했나, 아니면 실제로도 시간이 짧았던 걸까- 랑은 알 수 없으니 걸음만 도도도 네게로 옮겼다. 나름대로 발걸음을 재촉해보았다가 네 옆에 서자마자 코트 자락을 꼭 잡았다. 이제 가는 거냐고 물어보듯 너와 시선을 맞춘다.
답레를 쓰고 싶긴 한데 사실 에너지드링크 마셨다는 건 뻥이고 내일 아침은 일찍 일어나서 세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이대로 누울 수밖에 없어 ( 8 8) (+ 물고기 이름 생각해야됨) 일단은, 오늘 하루도 같이 놀아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오늘 하루도 행복했어 시간이 늦었는데 랑주도 얼른 자러 가 새해날 좋은 꿈 꾸길 바래
네게 대답을 할 날이 조금씩 가까워오고는 있었지만, 아직 그 날이 되지는 않았는데. 네가 소년에게 들인 그 색깔이 숨길 수 없이 소년의 얼굴에 온통 핀다. 너에게도 없는 색이었건만 네 옅은 하늘색이 소년에게 닿았을 때 그것은 소년의 가무잡잡한 피부 위에 주홍색으로 남았다. 네가 갑자기 톡 내어놓은 진심에도 빠짐없이, 아니 오히려 그만큼 진하게 물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속일 수도 감출 재주도 없다. 그래서 현민은 시선을 더 맞추지 못하고, 비스듬히 피해버린다. 그러나 네가 목에 걸린 펜던트를 톡 만져보고 그의 얼굴로까지 시선을 끌어올렸을 때, 마침내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앞으로도 계속."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분명하게. "좋아한다고 말해줘."
그리곤 네 손을 맞잡은 손을 좀더 꾹 쥘 뿐이다.
언젠가 나중에 먼 미래가 된다 하더라도, 네가 계속 주홍색을 좋아한다면 나는 네 앞에서 이렇게 발개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미래를 속단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사실도 잠깐 잊을 정도였다.
"이름은─"
현민은 잠깐 생각했다. 음, 글러먹었다. 아직 2년쯤 전(중학교 2학년)의 감성의 잔재가 남아있는 현민의 머리에선 네게 꺼낼 만한 이름이 선뜻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그 시절 감성의 잔재가 없는 다른 이름을 생각해봐도, 역시나 네게 꺼낼 만한 이름은 아니다. 하얀 물고기한테 주홍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나중에, 얘가 우리 집에 적응하거든. 같이 짓자."
해서, 현민은 손에 스티로폼 상자를 든 채로 네게 조그만 유예 하나를 청했다. "그래줄래?" 네가 또르륵 다가와서 코트 자락을 꼭 잡을 때, 네가 마음놓고 기댈 수 있도록 네 옆에 반 발짝 더 다가붙으면서. 맞춰오는 시선에 현민도 눈길을 맞췄다. 여기에서 더 보고 싶은 게 있냐는 듯. 네가 딱히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면, 현민은 남은 손으로 네 손을 꼭 맞잡고는 수족관을 나서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얇은 미소와 함께 답하는 목소리는, 누군가 보기에는 성급했을 지도 모른다. 좋아한다고 말해달라는 그 말의 목적어가 주황색인지 너인지는, 말해준 너만 알겠지만- 랑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널 좋아할거야, 랑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겠다고 마음을 정해둘 수 있었던 걸까. 랑은 이미 마음이 네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게 분명했다. 너에게서 조금씩 배우고, 조금씩 닮으면서, 친구라는 이름을 붙인 너에게 랑은 간지러운 싹을 하나 틔우고 있었다.
"그래. 채씨라서 벌써 반은 예쁘다~."
랑이 네 이름 세글자를 조목조목 뜯어서 예쁘다니 귀엽다니 했던 것을 기억할까. 그때 했던 말도 빈 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랑은 비슷한 말을 했다. 채로 시작하면, 리라고 지으면 이름이 채리가 되고- 그러고보면 랑은 네게 온갖 붉은 과일을 붙여줬던게 생각났다. 분명 그중에 체리도 있었다. 그래서 랑은 혼자서 쿡쿡 소리죽여서 웃었다. 하얀 물고기라서 채리라고 지어버리면 안 어울릴 지도 모르지만- 네가 키우는 물고기라고 생각하면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나중에 얘기해봐야지- 랑은 이름 후보에 채리를 올렸다.
마주친 눈길에서, 너는 꼭 더 보고 싶은 게 있냐는 듯 묻는 것 같았고 랑은 이미 혼자서 실컷 구경을 해버렸다. 네가 구경할 생각이 없다면 랑은 더 보지 않아도 괜찮았고, 그렇게 버스를 타고 올 때처럼 똑같이- 네 손을 꼭 잡고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앉아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은 소모성 이야기를 건네기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