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은 네가 돌려준 대답에 무어라 답하지 않았다. 모른체하기에는 네 대답이 물어본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이란게 느껴졌고, 무어라 답하기에는 랑은 아직 느렸다. 그저 랑은 네게 기대고 있었다. 기대고 있는 머리를 조금 꾹 디민듯도 하다. 랑이 몸에서 힘을 빼고 온전히 너에게 의지하며 기댔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고갯짓에 힘을 실은건지 넌 알 수 없다. 랑만이 알테고, 랑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 응."
시내에 갈 때보다 돌아오는 버스에 타고 있던 시간이 조금 짧았던 것 같다고- 랑은 그렇게 느꼈다. 시내에 갈 때는 사람도 많은 버스 안에서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걸까. 아니, 아니다. 즐거웠던 시간을 보내고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아쉽고 짧게 느껴진다. 그런 이유에서 그렇게 느낀 것이지만, 랑은 짐작도 못하고서 네가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난다. 교통카드가 다시 삐빅 태그되고, 그래도 따스했던 버스에서 내린 직후 닿은 서늘함이 집에 갈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기 달 떴다."
문득 하늘을 바라본 랑의 시선에 달이 들어왔다. 차가운 밤공기 못지않게, 집에 가야할 시간이라고 일러주며 하늘에 떠 있다.
대답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조금 더 꾹 하고 다가오는 네 머리를 현민은 말없이 자신의 품에 받아주었을 뿐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족하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너와 보낼 수 있어서, 소년은 정말로 행복했다. 그저 여기서 다시 멀어지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까지 꿰매어진 나날들보다 앞으로 꿰메어져나갈 나날들이 더 많았으니까. 그렇기에 현민은 품안에 좀더 깊이 실려오는 무게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차가운 밤공기에 현민은 문득 네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서야 네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는 알고 있는 것 같다. 돟아오는 길이 왜 이리 짧았는지. 서늘한 밤공기와 차가운 달이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반감이었을까, 아쉬움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변덕이었을까. 너와 함께 달을 바라보던 소년은, 문득 너를 돌아다본다.
"달이 아름답네요."
하고 한 마디 톡 던지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네 손을 부드럽게 잡아끈다. 아까는 현민의 집 쪽에 가까운 다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내린 곳은-원래 너와 그가 버스를 잡아타려고 했던- 네 집에서 아주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다. 고개를 들면 바로 저만치에 너의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의 정문이 보이는. 현민은 너와 함께 걸었다.
네가 만류하거나 저지하는 게 아니라면, 그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긴 거리를 따라들어왔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입구가 아니라, 당신의 집이 있는 아파트 동의 현관까지.
달이 아름답다는 말이 언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하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랑이 얼핏 들어 알기로는 «I love you» 라는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할 때 «달이 아름답다» 라고 비유한 것에서부터 퍼져 나갔다는 것 뿐이다. 랑은 네가 직접 골라준 머리끈으로 조심스럽게도 땋아준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랑의 머리에는 햇살 조각과 하늘을 걸어놓고, 캄캄한 밤의 달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랑은 어떻게 답할지 고민했다. 답하지 않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나랑 같이 봐서 아름다운 거에요- 라고 답하려니 짓궂었다. 오늘 하루종일 네게 못되게 군 것 같은데, 지금은 데이트의 끝을 짓는 중인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달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은 아직, 아직 이른 것 같았다. 가까워지고 싶은 건 맞지만, 랑은 아직 너와 많은 발걸음이 차이난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섰을 때 하고 싶은 말이라서 두번째 말도 머릿속에서 지웠다. 달이 아름다워서 기쁘다고 말하면, 그게 제일 무난해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인데, 무언가 조금 아쉬웠다. 기쁘다고만 말하기에는 네가 랑에게 싹을 트고 말았다. 너에게 바라는 점 하나, 그걸 말하면 되겠다고 정해졌을 때는 아파트 단지 입구도 아니고, 아파트 동의 현관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놀라기 전에 고심한 말을 건넸다.
"달이 계속 아름다우면 좋겠어요-"
네가 날 계속 그렇게 바라봐주면 좋겠어요, 랑은 네게 생글생글 웃었다. 달빛 아래서 햇빛을 품고 피어난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것도 짓궂은 말이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처음 떠올렸던 말보다는 나은 것 같다. 열심히 고민한 끝에 나온 문장이라 만족스러웠다. 답을 돌려줄 때까지 걸린 시간이 길어서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을런지, 너도 만족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집의 코 앞까지 와버린 이상 인삿말을 건네야한다.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자연스럽게 너의 코트 주머니 속에서 손을 뺀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바로 집에 가- 짐도 있으면서."
베타가 들어있을 박스를 향해 슬쩍 눈짓하고는 줄곧 너와 잡고 있었던 손을 들어보였다. "잘 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네가 건넨 말에 현민은 너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그 순간, 현민의 마음에 달 하나가 새로 더 떴다. 현민의 머릿속에서 달은 지구의 위성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여전히 남아있었으나, 가슴속에서 현민의 달은 너와 함께한 시간과 네 함박웃음으로 대체되었다. 그러기로 했다. 그는 깔끔히 인정했다. 새삼스럽지만, 아무래도 나는 사랑에 빠져버린 게 맞는가 보다, 하고. 현민은 너를 바라보았다. 주머니 속에서 네 손이 빠져나갔지만 잡지 않았다. 현민도 알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은 이제 헤어져야 할 때라고.
그렇지만 이대로 그냥 헤어질 수는 없어서, 현민은 나름의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다. 현민은 나풀나풀 흔들리는 네 손을 살며시 잡았다.
"언제까지고 계속 함께 봐주세요."
그리고 네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사실 그의 입술 표면이 썩 부드럽지는 못했고, 아마 네 손등보다도 거칠 것이지만, 그래서인가 그 온기는 네 손등에 분명히 남았다. 다음에도 같이 해달라는 약속에 도장이라도 찍은 것처럼.
"-이 정도는 괜찮아."
자신이 아파트 단지에까지 들어왔다가 나갈 발걸음은 현민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냥 조금이라도 네 얼굴이 더 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헤어지고 싶었다- 그런 유치한 욕심을 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오늘 잠들어야 내일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니까.
"오늘 같이 보내줘서 고마워. 행복했어." 그는 나름의 작별인사를 마무리했다. "너도, 잘 있어."
/ 행복해줘서 고맙다는 말에 대답이 될까 싶어서 써온 찐막레입니다 / 랑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 그럼 이제 진짜 심부름갔다올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