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불쑥 내밀어져온 네 맹랑한 대답에 소년이 당황해서 >:( 모양의 표정을 짓는다. 그게 분명 화내는 표정은 맞는데 전혀 위협적이거나 적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이, 네가 잘 아는 그 발그레한 색깔이 으레 그렇듯 그의 양뺨에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그 성난 표정도 쭈그러들고, 그는 시선을 아래로 비스듬히 피하며 중얼거린다.
"공부하다 말고, 생각나 버리잖아......"
현민은 에이 몰라, 하고 투덜거리며 네 손을 꼭 잡았다. 그나마도 네 손은 꼬물거리면서 장난을 친다. 간지럽다. 손만 간지러운 게 아니라 마음도 간지러워서. 간지럽고 울렁거리는 게 늦가을인데 벌써 봄이 왔나 싶다.
소수라거나 약자라는 사실은 현민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너를 꺼려하거나 싫어할 이유도 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네게 끌리거나 어줍잖은 동정심을 느끼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귀가 조금 잘 안 들리는 것. 그에 대해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 현민이 지금까지 네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감상은 그 정도였다. 다만 언젠가 네가 그 귀 때문에 겪은 문제를 현민이 알게 된다면 네 상처를 보듬어주는 데에 단순한 배려만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다만, 현민은 배려 이상의 마음도 얼마든지 네게 줄 수 있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제 4의 벽 너머의 네게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기에, 네가 직접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이 올 테지만.
2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는 어항 속에서 새하얀 지느러미를 나풀거리며 그 물고기는 넋을 놓고 유영하고 있었고, 너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눈에 담았고, 현민도 넋을 잃었다. 네가 그 물고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수조 표면에 잔잔하게 이는 잔물결이 네 눈에도 이는 것 같아서. 물속에서 창백하게 잠겨 나직이 떠 있는 네 모습이 떠올라서. 현민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랑은 또 빨갛게 익은 너를 바라보았다. 너무 짓궂었나 싶은데, 랑은 네 이런 반응이 못내 좋았다. 랑은 내가 이렇게 못되게 굴어도 너는 날 좋아하는구나, 아무것도 아닌 내 목소리에 너는 이만큼이나 부끄러워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게 사랑받는 기분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분명, 복도에서 네 품에 들이박았을 때 넌 그렇게나 덤덤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네가 귀엽다고 느끼는 건 이런 부분 때문일거야.
"왜에, 그래도 너니까 그렇지~."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 랑은 네가 날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나한테 네가 특별하단 걸 알려주고 싶었다. 짓궂게 너를 빨갛게 익도록 만든 것에 대한 사과를 대신해서 하는 말이다. 너와 잡고 있는 손이 아닌 다른 손, 찬 바람에 온기가 조금 떠난 손. 네 뺨에 닿는다면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의 온도를 가진 랑의 손이 네 뺨을 감싸쥔다. 이러면 네 뺨에 오른 열이 좀 가라앉을까 싶다.
너는 어느걸 더 바랄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비밀을 남겨둔 채로 당장 네게 좋아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랄까, 더디고 느리더라도 너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랄까. 랑은 후자를 선택하고 있었지만, 너를 위한 선택은 어느쪽인지 모르겠다.
"응? 어디로?"
데려간다니, 랑은 눈을 깜빡거리며 너를 바라보았다. 너에게도 물그림자가 졌다. 랑이 너를 바라보았을 때 시선이 바로 마주쳤다. 바로 마주친 네 까만 눈동자에 파란 물결이 이는 랑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너는 이 하얀 물고기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랑은 어딘지 모르겠는 부근에서 간질거리는 걸 느꼈다.
그때는 너에게 그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무덤덤할 수 있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들이박히는 그 순간밖에 없었다. 차갑게 가지런히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삶에 어느 순간 조금씩 시작된 변화가, 아주 약간 틀어진 그 순간이 가지런히 도미노처럼 늘어놓아져 있던 현민의 단조로웠을 삶을 나비효과처럼 의도되지 않은 골드버그 장치처럼 순차적으로 톡톡톡 변화시켜나갔던 것이다. 관점에 따라선 어질러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민에게는 오히려 그 변화가 따스하고 아름다웠다. 네가 가져다준 그것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따스한 방식으로 체감시켜주는, 그런 변화였기에. 네 손이 뺨에 올라오자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늦가을 밤바람이 꽤 차구나.
"...고마워."
귀로는 잘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말이지만, 소년의 입은 분명히 고마워, 하는 모양으로 움직였다. 현민은 자신의 뺨에 올라앉은 네 손을 꼭 감싸쥐었다. 네 손끝에는 소년의 피부가 고스란히 와닿는다. 질긴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가무잡잡한 피부가 따뜻하게 와닿는다. 그리고 수조로 시선을 돌리는 널 바라본다. 정확히는 너와 물고기를, 네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 장면을.
이쪽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이는 네 모습에, 현민은 그만 자신이 말한 '데려간다'는 말의 목적어를 잠깐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도 좋았다. 서로에게 물그림자가 진 채로 이렇게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속에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가득찼던 것이다. 현민은 허리를 조금 숙이고는, 주머니 속에 넣어놓았던 네 손을 꺼내어 자기 뺨에 올려보았다. 이번에는 주머니 안에서 따뜻하게 있던 손이 뺨에 올라앉은 것이라, 밤바람을 맞은 뺨이 손끝에 시원하게 와닿는다.
네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든 좋았다. 네가 어떤 방향을 선택하든 좋았다. 네가 무엇을 바라건, 네가 원하는 게 나라면- 만일 내가 네게 행복이 될 수 있다면, 내게 있어 네가 갖는 의미와 똑같은 의미가 될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좋을 것 같았다.
조그맣게 웃음소리가 난다. 랑은 네 손 아래로 숨어버린 자신의 손을 보고 키들거린다. 자신보다 한참 큰 너는 분명 밀어내는 것도 당기는 것도 쉬울 것이다. 랑이 밀어내도, 랑이 어딘가로 쏙 숨으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게 다가가거나 붙잡을 수 있을텐데. 정말 많이 날 좋아해서, 그래서 배려하는 걸까- 랑은 생각했다. 내가 평범했더라면, 너한테 금방 사랑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고.
"내가 가고 싶은 곳?"
어려운 질문이었다. 가고 싶은 곳은 있었지만, 갈 수 없었다. 랑은 열이 펄펄 나며 아프던 그날, 그 날의 딱 하루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의 랑은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알았다. 어딜 가도 랑의 자리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도, 학교에도 랑의 자리는 없다고 느껴서- 랑은 랑이 있어야할 곳이, 있어도 되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불청객 같았다. 그래서, 랑에게 그런 질문을 한 네 두 뺨을 감싸고 있어서인지 문득 그렇게 말했다.
"너랑 있을래."
적어도 네 옆에 있을 때는 불청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오히려 너는 랑이랑 있는게 좋다고 몇번이고 말해주었다. 조곤조곤, 네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속삭이는 동안 뺨에 꽃물이 들었다. 꽃물 위로 호선 두개가 그어졌다. 너랑 있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아하 뭔가 목떡같은걸 구했나 했어 ( . .) 심술이라 귀엽겠네요 랑이가 프로포즈는 아직 이르다거나 하는 말 하면 현민이 아예 깊은 사색 모드가 될 것 같은데 미래의 비전이라거나 자신이 랑이에게 정말로 걸맞는 사람일지 랑이에게 언제까지고 만족스러운 사랑을 줄 수 있을지 진짜 진지하게 고민할 텐데 이걸 가만히 내버려두면 진짜 진지하게 결론을 내려버리고 프로포즈해버리니 대충 팔 붙들고 어디 끌고갑시다
랑이가 잘못했다고 해도 그러면 랑이의 잘못을 어떻게 대해야 했는가를 두고 반성회를 열 것 같지요 서로 토라져서 사이가 서먹해졌다면 크건 작건 결과적으로 양쪽에 다 잘못이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