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민의 대답이었다. 현민은 어린 나이에 걸맞잖게 구식인 면이 있었다. 예를 들면 행복에 대한 관점이라던가. 어디까지나 서로 행복해야 행복이라는, 그런 고리타분한 관점 같은 것들 말이다.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은 상대방에게 힘으로 뭔가 강요한다던가, 갑갑할 정도로 옭아맨다던가 하는 건 현민의 방식이 아니었다. 자신이 네게서 찾은 행복만큼 네가 자신에게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현민은 네 대답을 기다렸다.
"응."
하고. 그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나직이 내밀어지는 한 마디. 네 뺨에 피어오르는 고운 꽃물. 꽃물이 양 손을 타고 현민의 뺨에도 옮겨붙었나 현민의 뺨도 재차 붉어진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괜시리 눈을 돌린다거나 불퉁스레 퉁퉁거린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너를 가만히 마주본다. 왠지. 네 얼굴에 드는 꽃물이 쓸쓸해보였기에. 자신도 너와 같은 색으로 물들고 있다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전해주고 싶었던 탓이다. 내가 여기 있잖아. 하고. 곱게 눈으로 호선을 그리는 너를 보며 현민은 말했다.
"네가 나랑 같이 있어주면, 나도 너랑 같이 있어줄게."
그리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언제까지고. 그는 잠깐 고개를 숙여, 네 이마에 자기 이마를 기대려 했다. 기대게 두면 현민의 굽슬굽슬한 머리카락 너머로 그의 이마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올 테다. 그러나 금방 뗀다. 귀갓길에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현민은 다시 어항을 곁눈질했다.
랑은 그러고 싶어서- 그래서 노력하고 있었다. 네가 옆에 있는게 당연하고 익숙해지는 걸 받아들이려고, 그러니까 네가 랑과 있는 시간을 마냥 고마워만 하지는 않길 바랐다. 너한테도 옆에 랑이 있다는 게 당연하고 익숙해지길 바랐다. 고마움만큼 당연한 사람, 그만큼 서로에게 떠나지 않는다는 신뢰가 두터워야했다. 랑은 너를 믿고팠다.
"화장실까지 같이 다니면 안 된다?"
또 짓궂은 소리. 입모양을 읽는 건 랑에게 쉬운 일이었다. 너도 입모양을 읽을 수 있을까? 짓궂은 소리를 하고, 너와 맞댄 이마에서 네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웃어버리고- 그러고서 랑은 입모양으로 답했다. 고마워, 힘낼게. 너와 이마를 맞대며 조금 흐트러진 앞머리가 랑이 웃을때 어린 아이마냥 천진난만하게 보이도록 했다.
"키우려고?"
우리 집은, 안 되는데. 입에 담지 못했다. 집에 안 들어가니까, 안 들어가려고 하니까, 들어가기 싫으니까- 랑의 시선이 다시 물고기에게로 옮겨간다.
네 말에 담긴 의미. 굳이 풀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말이니 문장이니 글자니 하는 것을 넘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말을 한때는 믿지 않았고 유치하다며 비웃기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렇게 돌아오는 게 신기하다. 신기한 것을 넘어서, 뭉클했다. 네 이마에 자기 이마를 기댈 때에는 넘치는 감정을 기대고 싶은 마음뿐만 아니라, 네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받아주고 싶은 마음도 실렸다. 네가 나를 믿고 싶다면, 내가 먼저 너를 믿어줄게. 현민은 네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다 네가 갑자기 툭 꺼낸 소리에 그는 쿡쿡 웃다가 >:D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이상한 소릴."
하며, 이마를 뗀다. 소년의 눈은 네게서 떠날 줄 몰랐다. 그때 소리없이 움직이는 네 입. 소년은 네 입술을 바라보다가, 네가 물들여준 고운 빛을 한 얼굴에 그만 애틋한 웃음을 톡 피우고 만다. 그가 입술을 읽는 법을 알 리가 없을 텐데. 읽어버린 걸까. 네 말이 전해진 걸까. 현민은 이렇다저렇다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서 네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줄 뿐이었다. 이대로 살짝 흐트러져 있어도 여전히 귀엽다는 생각을 하면서.
"네가 좋아할까 해서. 너희 집에-" 거기까지 말하던 현민은 네가 너희 집을 언급할 때마다 항상 무언가 피하거나 물러서거나 우회하고 싶어하는 듯한 태도였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그는 말을 바꿨다. "-아니면 우리 집에 둬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