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말문이 막힌다. 끊긴 말은 이내 부스스 흩어져버리고 만다. 내가 술래고 너는 도망치는 쪽이었잖아. 네가 먼저 나한테 그렇게 굴어놓고는.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다. "그래... 그렇지." 도망치는 널 따라온 이유는, 내가 널 좋아하게 되어버려서였어. 그러니까, 너도 내게 그렇게 해주기로 했다면, 이제 네가 술래를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자. 살랑살랑거리며 눈웃음치는 너를 보고, 현민은 눈을 가늘게 뜬다. 일부러 정색하고 있는 것도 같은데, 아무리 봐도 네가 뺨에 한가득 피워준 붉은 홍조 때문에 널 미워한다거나 하는 느낌으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마치 네게 마주 눈웃음짓고 있는 것도 같다.
"어떨 것 같아?"
하며, 현민은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 널 가만히 바라본다. 까만 눈동자에 네 얼굴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러다 말고 현민은 후후 하고 웃어버리고 만다.
"싫을 리가."
이제 와서 부정할 리가 없다. 부정할 이유도 없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는 계속 너를 사랑하고 싶어했다. 좋아하고 싶어했고, 마음에 가까이 두고 싶어했고, 같이 있고 싶어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듯. 지금까지 모든 잘못이 너의 것이었다고 너를 몰아붙여온 시간들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너로 피어난 마음을 네게 나누어주고 싶어서.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하나가 네게 닿아버린 모양이다. 너한테 꽤 많은 질문을 받아서 답 하나에 다 걸어놓았는데, 네게 답을 전해줄 시간이 빨리 가까워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가자."
현민은 눈높이를 맞추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고, 사기로 결정한 피어싱을 트레이에 담았다.
# 랑이한테 달린 거라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이 기세면 아쿠아리움쯤에서 랑이한테 답을 주게 될 것 같기도 하고
랑의 목소리가 너의 목소리와 함께 겹쳐졌다. 싫을 리가 없다고, 그 반대로 좋다는 말을 너는 많이 해주어서 고작 사흘 동안 랑은 너에게서 무언가 배웠다. 네가 주는 좋아함을 받는 방법을 배웠다. 후후 웃는 너를 보면 랑은 눈을 깜빡이고서 웃었다. 너를 따라하면, 네가 주는 걸 따라 나도 네게 무언가 주게 되겠지- 라고 랑은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느리더라도 시간을 들여서, 너를 흉내내지 않고 랑의 방식대로, 랑의 마음을 주고팠다.
"으응- 이제 집 가?"
트레이에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피어싱이 하나 더 놓인다. 네가 랑에게 골라준 피어싱이었다. 랑은 아쉬운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네게 물어보았다. 왜 아쉬운지 랑도 모르겠다. 사람 많은 시내는 별로인데, 너와 같이 식사를 한 것도 맛있었고, 머리끈을 골라주고 묶어준 것도 즐거웠고, 피어싱을 고르는 시간까지도 그랬다. 그러니까 랑은 무심코, 본인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한다. 네가 계속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찜했으니까- 네가 내 거라고 말한 것처럼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네 목소리와 소년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순간 덕분에, 소년의 후후 하는 웃음은 조금 행복한 웃음소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같은 목소리를 하고 같은 길을 같은 간격으로 걸어가는, 가장 가까운 평행선에 놓여있는 너와 자신의 모습이 마냥 좋았기 때문이다. 이 좋아하는 감정에 무언가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심스러웠다. 소년으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이었으니까. 나중에는 마냥 똑같지 않고 너도 네 색을 되찾게 되겠지만, 그것은 또다른 더 큰 행복이 될 것이다. 색을 잃은 네게 새 색을 찾아주는 어떤 작은 재활훈련 캠프는, 너와 소년을 위해 늦가을에 시작됐다. 소년에게는 마음을 주는 법을, 네게는 마음을 받는 법을 가르치는.
"시간이 꽤 늦었으니까."
현민은 핸드폰을 뒤적여 꺼내어서는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벌써 아홉 시 남짓한 시간. 어찌됐건 너와 현민은 학생이었고,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게 그렇게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귀가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어딘가에 또 들러가기에는 이제 시간이 애매하지 않을까. 현민은 네 시야각에서 손이 벗어나지 않도록 손을 뻗어, 네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준다.
"오늘 돌아가도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그러나 현민은 잊지 않고, 네게 한 마디를 확인시켜주었다. "난 네 거잖아."
현민은 네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손을 잡는다면, 그는 트레이를 들고 계산을 하러 계산대로 갈 것이다.
시간이 꽤 늦었다는 답에 랑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떠진다. 아쉬운 이유는 너와 즐거웠기 때문만이 아니고,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것도 한 몫 하고 있음을 알았다. 너와 이렇게 웃다가 집에 들어가면, 랑은 분명 지독하게 고독해질 것 같았다. 집에 내 자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이 말하지 못 하는 이유 때문에 너를 언제까지고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을 수 있는 변명거리도 없다. 이런 시간에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하는 나이, 랑은 괜히 고집부리지 않는다. 티 내지도 않는다.
"놀면 시간이 빨리 가-"
부러 툴툴거린다. 이리 말하고 있으면 네 손이 쓰다듬어온다. 랑은 네가 꼭 시야를 거쳐 머리 위로 손을 올리는게 좋았다. 네가 그 작고 사소한 배려를 언제까지고 귀찮아하지 않으면, 번거로워하지 않으면 좋겠다.
"내일은 공부할 준비해~."
공부로 시작된 것치고는 공부한 시간보다 논 시간이 많은 것 같아. 학교든 도서관이든 10시까지 곧잘 남아있는 랑은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느꼈다. 요 며칠새 기억이 너로 또렷하다. 그리고 내일도 너를 본다. 나도 기꺼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말은 하지 못하고 랑은 네 손을 꼭 잡았다.
현민은 얼굴에 짐짓 뭔가 아주 떫은 걸 씹은 상태에서 웃는 것 같은 표정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현민의 웃는 얼굴은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
"너랑 있으면, 공부를 하더라도 좋아."
하고 그는 말한다. 괜시리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하기에는 오늘 하루 너와 나눈 것이 퍽 많아서. 지금이라면 부끄럼 같은 것은 접어놓고 조금 솔직해져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네가 손을 잡아올 때는, 그는 자신이 뱉은 부끄러운 말에 또다시 스스로가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소년은 부러 네 손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러면 어서 가자." 하고. 왠지 모르게 기분좋게 웃고 있는 사장님에게 트레이를 내밀고,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은) 피어싱 값을 낸 뒤에 악세사리 케이스에 담겨서 조그만 종이봉투에 넣어 건네어진 피어싱을 받아든다. 종이봉투를 손에 쥐고, 현민은 너와 함께 피어싱샵을 나섰다.
"차 타고 갈까, 걸어갈까."
어느덧 저녁 바람이 꽤 쌀쌀해졌다. 현민은 네 손을 꼭 쥔 채로 자기 코트 주머니에 쏙 끌어다넣는다. 시내의 야경. 환하게 켜진 가로등들과 반짝반짝 장식등들이 보이고, 광장에는 이제 겨우 11월인데 크리스마스 트리 구조물을 준비하려고 이런저런 준비가 한창이다. 차를 타고 갈 생각이건 걸어갈 생각이건 이 광장을 지나야 한다. 그때 현민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너는 그런 곳이 있을까? 오며가며 먼발치에서 이따금 한 번씩 눈길이 닿는데, 네 삶의 궤적과는 별 인연이 없어서 항상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만, 한 번쯤은 들러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어떤 곳이. 현민에게는 그런 곳이 있었다. 몇 번인가, 저녁쯤에 시내를 왔을 때 한 번쯤은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현민은 무심코 그 가게의 진열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민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면, 그 시선의 끝에는 조그만 수족관이 하나 있다. 길가 쪽으로 난 진열대에 커다란 수조 몇 개가 놓여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물고기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런 이야기는 많다. 이번에 몇 등을 하면 휴대폰을 바꿔주기로 했다거나, 우리 반 평균이 몇 점 이상이면 치킨을 사주겠다거나- 성적에 맞물려주는 대가, 랑도 무언가 주려는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라고 애매모호한 말을 하고서 생글생글 눈웃음지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올려다본 푸른 하늘빛, 그 색을 닮은 눈동자가 살짝 가려져 반달 모양이 된다. 예쁜 웃음이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그럼 공부 많이 시켜야지~."
일단 오늘 놀아서 못한 몫까지 해야 해. 랑은 덧붙였다. 그리고 피어싱들을 계산하고서 가게를 나섰다.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맞이한 늦저녁 바람이 차서 랑은 저도 모르게 읏, 하고 조그맣고도 짧게 떨었다. 바지를 입을 걸 그랬나 싶지만, 랑은 자주 넘어지는 이유로 바지가 잘 없었다. 바지 무릎을 찢어먹거나 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응?"
그래서 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너를 올려다보았다. 버스를 타고온 거리를 걸어가기에는, 추위도 그렇고- 랑이 잘 걸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걷는데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랑은 걷는 것조차 피곤해질 때가 있었다. "나랑 걸어가면 몇 시간 걸릴지도 몰라." 운동을 하는 너는, 이 정도 거리쯤은 거뜬하게 걸어다니는 걸까-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네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랑은 네 시선을 곧이 쫓아갔고, 그 끝에 수족관을 발견했다. 물고기! 길가로 진열되어 있는 커다란 수조에서 파란 물빛이 비치고, 그로부터 생긴 물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것에 랑도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랑이 물고기를 좋아한다는 걸, 너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까. 수족관을 보던 시선이 다시 네게로 돌아온다.
랑의 말에, 현민이 흥미를 보였다. 예전에 현민도 그런 제안을 몇 번인가 받은 적이 있었다. 숙제를 잘 하거나,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치면 무언가를 해주겠다는 흔한 거래들. 물론 그때의 현민은 딱히 공부에 흥미를 보인 적이 없었고, 따라서 그런 제안들이 실제로 성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현민에게 걸려있는 성적과 관련된 약속은 단 하나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네 마음대로 살고 싶으면, 수학능력시험 평균 4등급만 맞아와라.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과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도 모를, 조건보다는 당부에 가까운 애매모호하고 두리뭉실한 이야기. -그러나 그것 덕분에 지금 너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현민은, 잔망스레 고이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너를 바라보며 물어보는 것이다.
"어떤 선물인데?"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너는 항상 잔망스런 여우고,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옆에 붙어 있는 이 순간에도 모든 걸 다 이야기할 것 같지도 않았던데다, 내심으로는 지금 이 순간으로- 너와 같이 있는 이 순간만으로 충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찬바람에 네가 떨자, 현민은 네 옆에 좀더 바짝 다가붙었다. 보폭 맞추는 건 익숙했다. ...다만 맞추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자신이 시내로 나올 때 짧지 않은 길을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도 좋아하던 현민은, 몇 시간 걸릴지도 모른다는 네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이 돼서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 맞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거기까지 길이 얼만데 걸어간단 소릴 했네. 그러면 차를 타자..."
소년의 시선이 엉뚱한 데로 튄 것은 그 말을 끝맺은 직후였다. 저만치에 있는 진열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문득 옆에서 톡 들려오는 말소리에 널 바라보았다. 현민은 너를 한 번 보고 수족관을 한 번 바라보았다. 보고 갈래? 하는 네 말에 현민은 그러자,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너를 따라 수족관으로 향했다.
길가로 진열되어 있는 수조에는 온갖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금붕어며 구피, 시클리드, 네온테트라, 블루핀 노트... 그러나 그 중 작은 어항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는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항 하나에 단독으로 비추어지는 스포트라이트 가운데서 새하얀 지느러미를 나부끼며 수초 사이를 유영하는 흰색의 베타였다.
"너, 물고기 좋아했었지."
네 담요에 아몬드 모양 꼬랑지에 삼각형을 달아놓은 모양으로 단순히 도형화돼서 늘어서 있던 물고기들을 떠올리며, 현민은 질문보다는 회상에 가까운 말을 뇌까렸다.
곰곰 생각하듯이 고개를 갸웃인다. 시선이 잠깐 너를 떠났다가 다시 네게 돌아온다. 짓궂은 장난을 치려하는 눈빛이다.
"뽀뽀 같은 건 어때? 볼뽀뽀 말고."
방금 아까 네 뺨에 입맞췄다고,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다. 모든 말 하나하나가 불확실해서, 랑이 하는 말이 정말 지켜질지조차 모르겠다. 선물 줄 지도 모른다거나, 그런 건 어떻느냐고- 해준다는 말은 하지도 않는다. 랑은 네가 말한대로 치사하게 굴고 있었다. 네 손을 쥐고서 네 코트 주머니에 들어간 손을 꼬물거리면서 괜히 장난치는게, 그래, 랑은 스스로 여우랑 닮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응, 그러자."
랑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이 사회에서 소수이며 약자라는 점을, 평범함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이 쉽사리 걸어다니는 10분짜리 거리가 마라톤 경기 코스같이 느껴지는 랑은, 배려에 기대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지만- 네게 만큼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 머쓱하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너는 알까, 랑이 네 배려를 받겠다는 건 네 배려에 익숙해지는 각오를 한 것이라는 것을. 랑은 머쓱한 너를 보고서 오히려 방긋 웃었다. 어느새 옆으로 좀 더 다가와 서있는 네가 랑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얜 혼자 있네-"
나란히 수족관 앞에 섰다.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새하얀 지느러미가 나풀거린다. 랑의 말간 하늘빛 눈동자가 지금은 수조의 푸른빛을 담은 것 같다. "응, 좋아하지." 네 목소리에 랑의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물고기가 얼마나 좋으면, 대화를 할 때면- 누군가가 말을 할 때면 독순을 위해 꼭 시선을 맞추고는 하던 랑이 수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