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향수... 형이 (잠깐뜸들임) 향수 좀 뿌리고 다니랜다 악세사리 꾸미고 다닐거면 향기도 신경쓰래 같은 말로 (형의 직설적인 스피치는 좀 걸러서) 말해줄 현민이 질투상황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얘네는 서로가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자발적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걸 서로가 알아보고 있으니까 랑이가 질투할 상황은 잘 안 생기려나 현민이 다른 애들에게는 은근 철벽일 것 같지
이거 자주 생기는 상황이잖아 현민이가 잠깐 어디 갔다왔는데 그새 랑이가 넘어져서 다른 남자애한테 부축받고 있으면 현민이 그날 잠 못잔다 표현하면 랑이가 부담스러워하거나 서로에게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표현은 안 하겠지만 현민이 질투심이 엄청난 애라서 말야 아마 행동은 아무렁지 않게 하는데 어째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거나 하지 않을까
맛있어서 좋아하는 건 아닌데- 하면 수영 좋아해? 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다거나 아 그러고 보니 귀에 물 들어가는 거 무서워서 안한다고 했던가 요즘은 수영용 이어플러그 같은 좋은 것들이 있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랑이는 현민이가 봤다고도 생각못하고 넘어져서 받은 도움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현민이가 거리감 두면 혼란스럽기만 할거 같아
이어플러그를 하면 밖에서 소리가 안 들리고 귀에 물 들어가면 귀가 상할까 걱정되는 악순환이야 누가 같이 있다면 이어플러그도 괜찮지만 물 속에서는 누구나 소리가 잘 안 들린다는 점과 물 속에서는 누구나 몸 가누기 어렵다는 점이 물을 좋아하는 이유야 물에서 자유로운 동물(대표적으로 물고기)도 그래서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하얀 원피스 입고 푸른 물 속에서 파랗게 물든 랑이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해
거리감두는 것도 사실은 현민이가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거 랑이에게 티내게 될까 무서워서 마음 좀 가라앉히려고 간격 두는 건데 어쩌면 현민이가 마음 추스리고 돌아오면 랑이가 왜 그랬냐고 따져묻는다거나... 따져물으려나... 두 사람 다 솔직하지 못해서 큰일이다 이건 현민이 쪽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현민이가 했을 법한 두번째 선택지로 가서) '아까 걔 누구야?' 하고 얼굴에 나 질투나요 하는 표정 써놓고 랑이한테 물어봐야 빠른 해결이 가능하겠는걸
그렇지 물...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예쁜 모습일 텐데 랑이는 물을 두려워할 이유가 많잖아 그렇지만 물을 두려워하면서도 랑이가 한번 수영을 해보고 싶다고 용기를 낸다면 현민이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힘들었나 싫어졌나 생각만해<<< 괜찮아졌어? 하면 응 이제 괜찮아 하고 대답하고 평소보다 애정표현 좀 더 할텐데 크아아아악 크아아아악 혼자 뚱하게 삐져있지 않고 그냥 얌전히 물어보겠습니다 크아아아악 현민이가 좀더 소통할게요 크아아악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대답하면 아 그래? 하고는 평소처럼 데면데면하게 대하다가 갑자기 랑이뺨에 기습뽀뽀 날린다거나 할지도
네 목소리가 북극여우하고 울릴 때 랑의 머릿속에 북극여우 한 마리가 퐁 튀어나왔다. 하얀 눈밭에서 조금 커다란 하얀 눈뭉치같은 그 여우, 동글동글하게 생긴 부분이 닮았을 지도 몰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동글동글하게 생긴 동물은 많았다. 하필 여우인 이유를 고민하던 랑은 네게 늑대라고 말했던 걸 기억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랑은 네가 여우라고 하기에는 크고 단단하다고 생각해서 늑대라고 했었다. 너도 그런 여우라고 날 생각한 거라면, 랑은 짓궂었다.
"응, 그렇게."
귀에 올라가는 손을 보고서 조금 움찔했으나 너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쳤다.
"못되게 굴어도 된다며."
찜하고 싶어. 랑은 너를 따라하기로 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모른 척 한다면 그건 랑의 몫이겠지만, 랑은 네가 모른 척할 것 같지 않았다. 하늘빛 눈동자에 네가 담겨있었는데,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이 흘러갔다. 너와 친분이 있는 가게의 사장님이 무엇을 하고 있나 확인한 것이고,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는 않았나 둘러본 것이다. 누군가 보는데서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워서다.
몰래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 랑의 손이 널 아래로 내리려 했다. 눈높이가 맞는 순간에 너도, 랑도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조그맣게 귓가에 남는다. 쪽 하는 입맞춤 소리는 네 뺨 위에 올랐고, 랑은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는다고 행동으로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한테나 거리감없이 구는 랑이라고는 해도 나를 좋아한다는 애한테 입 맞추는것까지는 그렇지 않다. 뺨에 했다고는 해도, 아무리 그래도 수줍고 낯간지럽다. "찜했어." 입 맞추고나서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조그맣게 속삭이고, 혹시 너도 똑같이 뺨에 입 맞출까봐- 그래서 급하게 화제를 돌린다. 다시 피어싱들을 바라보는 랑은 "그게 제일 예뻐-" 하고 피어싱 이야기를 한다. 찜한다고 말로 해도 충분할텐데, 부끄러움을 무릎쓰고서 입맞춘 이유는 너를 따라한 것 말고도 또 있었다. 여우라고 불리니 더욱 그렇게 굴고 싶은 짓궂음이 있었다.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사장님도 딱히 이쪽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 순간 그 세상에 너와 이 소년 단 둘만이 남고 나머지 것들은 다 멈춰버린 것 같았다.
언제부터 네가 그 소년의 마음에 여우로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째서 여우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다가왔다 멀어졌다, 호기심 있다는 듯 다가오면서도 까르륵 멀어져가는 모습이, 거의 닿을 듯이 코끝을 들이밀다가도 손을 내밀어버리면 손을 내민 거리만큼 물러나서 터럭 끝 하나도 대어주지 않고 깡총깡총 노닐면서 그럼에도 결국 바이 멀어져가지는 않고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어느덧 현민의 가슴속에 그렇게 남았나 보다. 거기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구는 신기루처럼, 거기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구는 너를 따라 소년은 여기까지 쫄래쫄래 따라왔다. 언젠가는 자신이 손을 내밀고 네가 물러서지 않으면 네 마음을 쓰다듬어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갑자기 덥석 입을 맞추어왔다.
현민의 살갖은 따뜻했다. 쉽게 알 수 있었다. 아까 전부터 원래의 가무잡잡한 색보다 빨간색이 더 익숙한 줄 알았다. 네 입술이 닿자 그는 뚝 멈췄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현민까지 밀려나 굴러떨어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조금 삐걱이며, 네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네가 입맞춘 지점에 살짝 떨리는 손을 살며시 올려본다. 물론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봐야 넌 시치미를 뚝 떼며 피어싱 이야기로 넘어가버린 지 오래다. 그는 헛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는, 네게 한 마디 책망한다.
"진짜 치사하다."
네 모양. 네 발걸음. 네 소리. 네 온도. 네 숨결까지. 네가 아무 의미도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인데. 그도 그렇게 큰 의미까지 두어서 네 허락도 안 받고 널 마음 속에 묶어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언제는 병이 사람 허락 맡고 걸리던가. 아무래도 정말로 지독하게 사랑에 빠져버린 모양이다.
"그래, 나 네 거야."
짧은 헛웃음 뒤에 김 빠지듯 하는 열에 달뜬 나직한 말이 한 마디. 그리고 됐냐, 하고 툭툭거리는 한 마디. 그 뒤에는 짓궂은 발걸음으로 부끄러움 뒤로 쏙 도망간 너를 따라가는 한 마디.
랑은 아까 전 학교에 있을 때 네가 입 맞췄던 곳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우리 사이가 누구보다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어. 그렇다면 나도 너처럼 마음을, 정말 마음가는 대로 둘 수 있었을거야- 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랑이 생각하는 배하랑은 그다지 사랑스럽지도 귀엽지도 않은 속은 배배 꼬인 못난 아이라서 네가 과분했다. 랑이 이렇게나 짓궂은데도 쉽게 붉어지는 넌 사랑스럽고 귀엽기 그지없다. 내 옆에 있던 사람은 다 나 때문에 상처받고 견디지 못해 떠났는데 너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느냐고 생각하고 만다. 나같은 아이 때문에 그걸 견딜 가치가 너한테는 있는지, 분명 애정은 영원하지 않은데- 얼마나 겁쟁이인지 이제 시작하기로 마음먹어놓고 끝을 겁내 제대로 가지도 못한다.
"왜에, 싫어?"
툭툭거리는 네게 곱게 웃으며 살랑인다. 능청맞게도 랑은 난 좋은데- 하고 오히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네가 싫다고 하면 정말로 아플거야. 하지만 분명 랑이 널 더 아프게 했을테니까 이렇게 장난스럽게만 표현한다. 너를 닮아가다보면 랑도 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응. 이거말고는 다 투명으로 바꿔야겠다-"
쥐고있던 피어싱을 펼쳤다. 원래는 학교에서 눈치가 보여 다 투명으로 바꿀 생각이었지만, 너만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