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의 무릎에 반창고가 붙게 된 이유는 정확히 그랬다. 도움을 받는데 익숙해져있다가, 도움이 없어져서 서툰 것이다. 의지하는게 당연했다. 균형감각이 나쁜 것과는 다르다. 원래 귀가 들렸었고, 평행감각에 문제가 없었던 것과는 다르다. 이 두가지도 충분히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랑은 홀로서기가 늦었다. 처음부터 홀로 서봤어야 했다.
어느날 크게 열을 앓고 일어났더니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다. 어제만 해도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 몇 걸음 떼보니 방향이 틀어지고 이윽고 넘어지게 된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부모는 없다. 도왔다. 있는 힘껏 도왔다. 홀로 둘 수 없었을 뿐이다. 친구 또한 그랬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어버린 친구를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뻗었다.
"둘 다 잡을건데!"
이미 답은 정해져있었다. 대신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당신의 손을 잡지 않았다. 팔을 꼭 낀다. 그리고 버스 손잡이를 잡고서는 뿌듯하게 웃는다. 랑은 이 장난을 치려고 물어보았다. 장난의 성공을 예감한다. 그러다- 버스에 사람이 더 올라타면 랑은 부득이 당신에게 좀 더 붙어섰다.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지긴 싫다.
퉁명스런 표정을 지으며 태클을 걸려던 현민의 움직임이 팔에서 느껴지는 폭신한 따스함에 움찔 멈췄다. 가무잡잡하고 발간 뺨 위에 놓인 까만 눈동자가 랑을 한 번 흘겨보았다. 그리곤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 피한다. 그러나 시선은 피하면서, 팔과 몸은 랑에게로 조금 더 다가붙는다. 정말이지, 너한테 뭔가 말하려면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야 하는 점...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렇지만 현민은 작은 목소리로 도망치기는 싫었다.
"더."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현민은 랑에게 나직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더 꼭 잡아."
버스는 다시 시내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운전이 서투른 걸까, 버스가 낡은 걸까, 아니면 교통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걸까, 버스가 멈췄다 출발할 때나 가다 멈출 때 이상하게도 다른 버스보다 더 출렁이는 느낌이다. 현민은 손잡이를 쥔 채로 단단히 버텼다.
랑은 궁금했다. 당신의 부끄러움이 단순히 랑이 여자아이라서- 가 아니게 됐을 때가 언제일지 궁금했다. 언제부터 당신은 뺨에 입 맞출 수 있을 만큼 넘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건지 랑은 알 수 없다. 이런 짓궂은 장난을 계속 치면 당신의 마음을 희롱하는 것처럼 느껴질텐데- 장난을 치면서 모른체하지 않으면 당신의 옆에 있기 힘들어지고 만다. 당신에게 괴로운 악순환이다.
희롱하고 싶지 않다. 믿을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이 강렬하지 않더라도 오래 타오르는 불꽃같으면 좋겠다.
"더?"
당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랑은 더 단단히 팔짱을 낀다. 팔을 품에 안았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버스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내리더니, 팔짱을 끼고 있던 당신의 팔을 꼭 붙잡는다.
"이만큼?"
온전히 당신에게 의지하게 됐다. 버스가 흔들린다. 랑은 분명 버스에 있는 것은 불안한데, 당신과 함께 있으니 이 시간이 조금 길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불그스름한 얼굴로 현민은 투덜거린다. 간지러운 행복으로 가득찬 마음이 어설픈 필터를 지나면 툴툴대는 소리가 되어버린다. 현민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해- 하고 랑을 꼭 안아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조금씩 더 익숙해지고, 조금씩 더 분명해질 때까지. 살랑살랑 장난치며 재롱부리는 랑이 계속 지금처럼 함께 있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다고. 물론 이 말도 지금 당장은 입에 올리지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날을 생각하면, 이 기다림은 생각했던 것보다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응. 흔들려도 괜찮을 만큼."
어느덧 시내가 가까워지면서, 가다 서다 하는 차로 인해 자잘하게 요동치는 관성의 흐름은 랑이 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랑의 무게중심이 변할 때마다 랑의 품안에 안겨 있는 현민의 팔에 꾸욱 힘이 들어가고 풀어지는 것은 생생히 느낄 수 있었고, 그 팔의 온기도, 그의 몸에서 나는 옅은 숲 냄새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코트에 주름이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아마 개의치 않을 것이다.
조금 길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내는 가까워온다. 하지만 그는 랑이 버스에서 혼자 내리게 두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감각과, 하루 아침에 달라져버린 세상에 랑은 겁에 질려 있었다. 다름과 틀림이 같다고만 생각하게 되던 때, 그래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건 가족과 친구 덕분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들리지 않는 오른쪽 귀지만, 그때만 해도 어느 정도 소리가 들리기는 했었다. 보청기를 착용하면 귀를 막았지만 소리가 들리는 낯선 감각이 어색하기는 해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는 모르는게 많다. 그래서 궁금한게 많다. 그래서 꽤 잔인하기도 했다.
랑이 제일 끔찍했던 것은 사랑을 주고 받던 사람에게서 거듭하고 거듭해서 떠나버렸을 때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게 약점이 된다는 건 세번째에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세상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경험해버렸다. 랑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도, 딸이 그렇게 되어서 어떡하냐- 불쌍한 애니까 놀아주자- 엄마가 쟤 버리고 도망갔대- 섣부른 동정과 연민이 또렷하다. 행복한 기억은 아무리 다시 떠올리기 반복해도 잊혀져가는데, 괴로운 기억은 눈을 감으면 생생하다. 안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너무 싫다.
"안 힘들어? 무겁지는 않아?"
괜찮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가로등 아래에서 이런 건 못 한다고 했을 때,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랑도 꼬리를 잘라낸다. 랑은 당신이 옆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다짐했다. 둘 다 예쁘게 차려입고 놀러 가는 길이니까, 랑은 웃는다.
그러나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는 현민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관심을 갖고 정성껏 보살펴 준 아이에게 오히려 이용당하거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어린 날의 추억이 상대방에게는 바닷가의 돌멩이만큼이나 별 가치가 없는 일이었거나... 자신은 상대와 합이 잘 맞는 둘도 없음 콤비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현민을 향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곪아가고 있었던 것을 알았을 때에는 축구와 인간관계에 대한 의욕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정도였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현민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에코익 라이프' 라는 슬로건을 자신의 삶에 내건 것이.
그런데 어느 날 품속에 예고도 없이 쾅 떨어진 새하얀 여우 하나가 그걸 부쉈다.
현민은 그래서 자신만큼은 누군가에게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고 싶었다. 상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수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치욕이 되고 싶지 않았다. 불행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을 완벽히 피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각자가 돌이켜보았을 때 같이 있어서 서로 행복한 사이가 되었으면 했다. 오늘의 외출은 그 첫 걸음이었다.
"딱히?"
그렇기에 그는 솔직히 말했다. 랑 정도의 무게면 한 팔로 들어서 어깨에 태울 자신도 있었다. 어느덧 버스는 시내의 정류장으로 접근하고 있다. 지금 밀려있는 차들이 다음의 파란불을 받아서 빠지면,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랑의 힘내- 하는 말에, 현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여 뺨을 랑의 정수리에 기대고는 살짝 부볐다.
사람 한 명이 온전히 기대고 있는데 안 무거울 수가 있나- 랑은 고민해보지만 알 수 없다. 기대면 기대는 쪽이지, 누군가 랑에게 기대는 건 안 될 이유가 많다. 당신이 피곤해서 어쩌면 좋지- 오늘 데이트가 당신에게 만족스러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다.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과분해서, 랑은 이런 순간만으로도 즐겁다. 당신은 분명 랑의 옆에 있는 게 좋다고 말했지만-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건 랑의 몫이다. 당신에게도 약점이 될까, 족쇄처럼 느껴지게 될까 두렵다.
그런 생각 하지말자고 다짐한게 방금인데, 랑은 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멈춰야하는데- 생각이 멈춰졌다. 랑의 의지로 끊어낸 것이 아니다. 당신이 닿아와서 랑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뺨에 입맞췄을 때도 무던히 굴던 랑이 살짝 부벼오는 움직임에 발갛게 멈춘다. 랑이 제일 좋아하는 스킨쉽- 제일 애정감이 샘솟아 넘칠 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당신이 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행복하고, 정말로 기분이 좋을 때 랑은 그 상대에게 부빗거리고는 한다. 뺨을 기대든, 얼굴을 묻어버리든 부빗거리고서 앞머리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도 좋았다.
볼뽀뽀는 버거웠지만, 머리 위로 닿은 당신의 뺨이 부빗거린 것은 보다 가볍다. 겁먹고 도망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원래 제일 좋아하는 스킨쉽이었고, 과분히도 나를 좋아해주는 당신에게서 받아버렸다. 키가 조금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지금만큼은 키가 작아서 다행이다- 생각했다. 당신이 일부러 시야를 낮추고 표정을 살피지 않는 이상 랑의 표정을 볼 수는 없을테니 안심이다. 도망치지 못하고 받아버린 애정에 귀 끝과 뺨이 같은 색으로 열이 올랐다. 당신만큼이나 붉지는 못했어도, 랑에게는 얼마만인지 모를 화끈거림을 느꼈다. 눈이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이내 꼭 감아버린다. 당신의 팔을 안은 것과 마찬가지로 붙잡고 있었는데,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꼭 쥐어버렸는데 당신이 이를 눈치채질 못하라 바라지도 못했다. 손 끝에 힘이 들어간지도 몰랐다.
랑을 구해준 것은 목적지로 하던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였다.
"우리 내려야 돼, 그치."
팔을 안고 있던 자세를 풀고서 당신의 등을 떠민다. 뒤에 있어야 얼굴을 숨길 수 있을테니까, 한 손은 당신에게 자주 했던 행동을 취한다. 얼굴의 열기가 식으라고 하는 손 부채질이다.
아마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현민은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신경쓰지 말고 즐기라고. 자신도 신경쓰지 않고 즐길 테니. 적어도 지금 고개를 들어서 현민의 기색을 살펴보면, 그의 얼굴에 별로 피곤한 기색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의심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흘러가는 강 바닥에 놓인 돌멩이처럼, 그 날카로운 모서리도 둥글게 깎여나가게 되리라. 그러니까, 편히 마음먹기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이렇게 랑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강물처럼 흘려보내고 있으니까.
현민은 자신이 애초에 노리고 있었던 '랑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기' 에 본의아니게 성공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랑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신의 팔을 안은 랑의 팔에 힘이 꾹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랑을 돌아보다가 연연한 분홍색으로 열이 올라 있는 랑의 귀와 뺨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젠 딱히 맛이 어떠냐! 같은 의기양양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냥 왜인지 랑에게서 받은 것을 이제서야 조금씩 랑과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행복할 뿐이다. 그는 딱히 랑이 발개진 것을 가지고 놀리지 않았으나(그걸 갖고 뭐라 하기에는 버스간이 꽤 복닥복닥하기도 했다), 얼굴에 순박한 미소를 자그맣게 거는 것이다.
"응. 가자."
버스문이 열린다. 조그맣지만 다급한 랑의 손길에, 그리고 등 뒤에서 조그맣게 이는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산들바람에 떠밀린 현민은 "야야야..." 하고 된소리를 내면서도 인파를 헤치고 버스의 출구까지 랑을 데리고 나간다. 현민은 먼저 버스에서 내렸고, 뒤돌아서서 랑이 버스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