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늘상 같은 구름이지만, 제일 변화가 짙은 것도 구름이다. 시커먼 먹구름이 되든 간에 노을빛 지는 색에 물들어 분홍색이 되든간에 하얗고 몽실거리기만 하는 줄만 알았더니- 물들면 그 색이 원래 자신의 색이었단 듯이 머금고 있다. 지금 랑이 그랬다. 부끄럼을 쉽게 타지 않는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늘 웃는 낯으로 툭 다가왔다가 반대로 닿으려고 하면 멀어지고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반동이 심하다. 부끄럼도 부끄러워해본 사람이 금방 부끄러워하고 마나보다.
"어, 너 옷-"
먼저 버스에서 내려간 당신을 보던 랑은 꾸깃해진 옷이 눈에 들어왔다. 자켓 소매가 한쪽만 주름져있다. 왜 그럴까- 생각할 것도 없다. 랑이 잡고 있었던 쪽이니까 이유는 금방 찾았다. 랑이 부끄러워하다가, 흔들리는 버스에서 당신을 붙잡고만 있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사과해야 하는데- 아주 잠깐, 랑은 버스에서 내려오던 계단에서 멈칫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뒤에 내리려던 승객 한 명이 랑을 앞질러 내려가려고 했을 뿐이다. 랑이 조금만 걸음이 빨라 이미 버스에서 내렸었거나, 조금만 덜 부끄럼타고 있었으면 괜찮았을텐데- 우연이 겹쳐 첫만남을 재현한다. 앞질러 가려던 승객과 부딪힘이 있었던 랑은 그대로 앞으로- 당신의 품에 폭 빠졌다.
로맨스 장르의 창작물에서 나올 표현.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간다거나, 세상이 분홍빛으로 보인다거나, 오직 그대 한 사람만 회색 세상에서 알록달록 칠해져있다거나- 랑은 그중 하나를 경험했다. 넘어져서 당신의 품에 빠지기까지, 세상이 슬로우모션으로 흘러갔다. 다만 아직 랑은 로맨스 장르에 발을 들이밀지를 못하겠어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오로지 전부 갑자기 넘어져서 놀란 탓이라고 치부했다.
"... 또 너한테 넘어졌네-"
그래서 지금의 해프닝도 처음 만났던 그때와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분명 그때와 지금은 랑과 당신도, 둘의 관계도 무언가 달라지고 말았는데 그랬다. 랑은 아직도 분홍빛을 띄우고서 당신의 품에서 조금 떨어진다. 고개는 들지 못 했다.
코트 소매에 주름이 남은 줄 모르고 랑을 더러 손 잡으라고 손을 내뻗었을 때, 시간이 멋대로 멈췄다. 뒤에서 서둘러 내리는 승객분과, 툭 하고 기울어지는 랑의 무게중심. 느릿느릿하게 천천히 버스 계단에 그 날 학교의 계단이, 그 뒤편의 창문에 그날 보았던 노을이 겹쳐보이고. 그때 그 날처럼 한없이 느릿하게 이쪽으로 기울어져오는 소녀. 현민의 몸이, 멈춘 시간을 꿰뚫고 거의 척수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뻗어가던 한 손이 두 손이 되었고, 앞으로 고꾸라져오는 랑을 또 다시 자기 품으로 폭 받았다. 현민은 우선 랑이 어디 다친 데가 없나부터 살폈다. 살펴보기론 어딘가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지만, 현민은 랑을 받아안은 채로 걱정스레 질문했다.
"괜찮아?"
깜짝 놀라서 괜찮냐고 안절부절못하며 사과해오는 승객분께 괜찮다고 말씀을 드리고, 현민은 랑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고 손이 닿지 않을 곳에 하얗게 그 모양으로 걸려있을 줄로만 알았더니, 멀리서 부옇게 새하얗기에 구름 한 조각이었던 것이 품 속에 떨어지니 하얀 여우가 볼을 붉히고 있다. 버스가 멈추고 시내의 흥성거리는 백색 소음이 가득찼음에도, 문득 현민이 "똑같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랑의 귀에 분명히 와닿았다. 달라진 것도 많았지만, 똑같은 것도 많았다. 그때 그 날처럼 품 안에 넘어져서, 자신이 흔히 하는 것처럼 빨개진 모습.
품에서 톡 떨어져나온 채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현민은 손을 뻗어서 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랑에게 그동안 지겹도록 들어왔던 그 말... 어쩌면 실례일지도 몰라 하지 않고 있던 말, 자신보다는 당신에게 더 어울릴 그 말을 되돌려주었다.
응- 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지 않다면 넘어져서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품으로 빠질 때 어느것이 제일 많이 흔들렸는지 알기 때문이다. 흩날린 머리카락도, 대롱대롱 매고 있던 가방도 아니다. 랑의 마음이다. 아직 그 무엇도 이겨내지 못했는데 두근거린다. 아무리 놀란 탓이라고 진정하려고 해도 그런 한낱 속임수에 스스로를 속여 넘기진 못 했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되뇌인다.
속으로 안 된다 되뇌이는 랑의 머리 위에 당신의 손이 닿는다. 애정어린 손길이다. 한 번 삼켜버린 조각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보석을 모아놓고 구경하고만 있었는데, 한 번 그 마음에 녹아드니 탐내게 된다. 그럴 자격이 없는데, 랑은 하지 말아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동시에 그랬으면 하고 바랐다. 그 모순은 당신의 자켓 끝을 거머쥐는 걸로 표현된다. 쓰다듬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쓰다듬어주는게 좋다. 그래서 쓰다듬는 손을 끌어내지는 못 하고 다른 쪽의 자켓 끝만 꾹 움켜 쥔다.
"너- 너 검고 커다란 푸들 아냐."
당신보고 닮았다고 했는데, 취소해버린다.
"늑대지."
여우라기에는 당신은 좀 더 크고 단단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래서 나온 동물이다. 당신이 지금 랑에게 수작부린다, 작업건다, 꼬셔낸다- 그런 의미인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결론이 나온다. 수작부리는게, 작업건게, 꼬시는게 효과가 있었단 소리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굴 빛부터가 달랐겠다. 랑은 이제야 고개를 들고 부끄러움에 겨운채 당신을 늑대라고 부르며 올려다보았다. 싫은 기색이라기보다는, 정말로 부끄러움에 사무친 목소리다. 괜히 툴툴거리게 된 것이다. 그러다 아차- 붙잡고 있던 자켓을 놓는다.
첫 번째 충돌은 현민에게 흔적을 남겼다. 이제 두 번째 충돌의 흔적은 랑에게 생길 모양이다. 그것이 남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보다도 이 가무잡잡한 운동부 녀석은 랑의 복잡한 속을 알기나 할까.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마음과 밀어내고 싶어하는 머리가 다투고 있는데, 그 커다란 손은 눈치없이 따뜻하기만 하다. 그 충돌 이후부터, 그때 가로등 아래에서 네게로 달려가겠다고 약속한 이후부터 현민은 늘 이랬다.
불필요한 일이라면 하지 않는다. 필요한 일이라면 확실히 한다. 낯익으면서 낯선 마음을 끌어안고, 랑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그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일. 정확히는 그가 그 두 가지 철칙을 정하게 만든 그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세운 철칙이기에, 현민은 이번만큼은 예외를 두기로 했다.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은, 성미에 영 맞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요령도 없이 횃불을 들고 빙벽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성냥불이나 횃불이나 별다를 바 없을 것 같던 그 빙벽이 조금씩 투명하게 녹기 시작한 것 같다.
꾸욱, 하고 자켓을 움켜쥐며 고운 분홍색 물이 든 얼굴로 너 늑대지, 하고 뾰루퉁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원래라면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어야 되는데- 정말이지,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이 차올라서. 평소에 홍시처럼 발개지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얼굴에 온기가 올라오는 것을 현민은 느꼈다.
"푸들이건 늑대건 상관없어. 네가 같이 있어준다면."
현민은 랑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곤 허리를 살짝 기울여서는, 랑의 뺨에 가볍게 자기 뺨을 부비려 한다.
"푸들 쪽이 편하면 푸들처럼 굴어줄게."
랑이 접촉을 허락한다면, 접촉은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 잠깐 따스한 온기를 남겨두고, 떨어져나가는. 그리고 그제서야 랑의 황망한 인사에 대답한다.
"별말씀을."
그리 심하게 구겨진 것도 아니고. 현민은 옷에 주름이 지거나 하는 것에 그렇게 심하게 예민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이 한발짝 다가온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다. 랑은 당신이 뺨에 입맞췄을 때가 떠올랐다. 모른 척 해버리고 말았던 그때. 랑은 두 손을 들었다. 당신의 얼굴에 꾹 디민다.
"올라가!"
뭘 하려고 했든 상관없다. 랑은 아직 충돌하고 있는 이성과 마음을 중재하지 못했으니까, 더 혼란을 야기할 수는 없다. 푸들 쪽이 편하면 푸들처럼 굴어줄게- 하는 문장이 이미 랑에게는 늑대라고 이실직고하는 것 같았다. 좋은 쪽으로 굴어줄테니 같이 있어달라고 들렸다. 당신이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랑만 조금 더 부끄러워 했다.
"그만,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이제 데이트의 시작인데 랑은 벌써 진이 다 빠진 듯 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온힘을 다 써버린게 분명하다.
양손으로 쭉 밀어내자 얌전히 쭉 밀려올라간다. 랑의 손에 꾹 눌려 뿌닛 하고 밀려올라가는 얼굴 모양새가 인터넷에서 이따금 보는 얼굴 찌부된 개들 같다. 그러나 현민은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다만 왠지 많이 친해진 친구와 바보같은 장난을 하는 것 같은 즐거움에, 분홍색으로 피어버린 랑을 바라보며 킥킥 웃을 뿐이다. 어째서일까, 자신이 곤혹스럽게 빨개질 때마다 랑이 자신을 더러 귀엽다고 말하던 게 어떤 생각으로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래도 예쁘네."
하고 지나가듯 말하면서, 현민은 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랑이 지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갑도 끼지 않은 가무잡잡한 손이 오도카니 손바닥만 조금 하얗다.
"응. 밥 먹으러 가자... 내가 괜찮은 데 알아뒀는데 어떻게 할래."
반문에 별 뜻은 없다. 그저 더 괜찮은 장소를 알고 있나 해서, 하는 가벼운 질문. 그러고 보니, 아까도 자신이 식당은 알아봐두었다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이야기할 틈이 나지 않아서 말해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 '괜찮은 데'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어머니와 형한테 신나게 놀림당한 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