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알고 있어. 2번, 너한테 안 예쁘면 안 되잖아. 3번, 늑대 꼬리 코 앞까지 왔어. 랑은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어 침묵을 지켰다. 어느 답을 골라도 마뜩찮다. 알고 있다 답하자니 너무 뻔뻔하다. 너한테 안 예쁘면 안 된다 답하자니- 네가 날 좋아하니 콩깍지가 씌었을텐데 안 예쁠리가 없단 뜻인데, 네게 예쁘려고 한다 해석될 수고 있을 것 같다. 늑대 꼬리가 코 앞까지 왔다하자니 당신의 마음을 희롱하는 것 같다. 늑대라고 말해버렸긴 하지만 그때는 한순간 부끄러움을 견뎌내지 못한 결과다. 결국 답하지 못 하고 그게 답답해 끙 앓았다.
"아- 응. 거기로 좋아."
잊고 있었다. 가게 찾으려고 했었는데- 당신이 찾아두어서 다행이다. 작고 하얀 손이 당신의 손을 잡는다. 언제나 그렇듯 자연스럽다.
"가본 곳이야?"
가벼운 질문이다. 가는 길은 아는지, 당신의 입맛에 맛있는 메뉴가 있는지를 알기 위한 포석이 된다. 그리고 덧없이도- 랑의 분홍빛은 금방 옅어진다.
얼굴에 서리는 쩔쩔매는 빨간색.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딘가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현민의 머리를 스쳤다. 원래라면 이런 생각에 금새 불안해지고 마는 현민이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랑에게 이미 몇 차례고 대답을 들었으니까. 그 대신, 랑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다. 건네어져 오는 질문에 현민은 무심코,
"─어렸을 적에 생일날 한번 가본 적이 있어. 형 말로는 아직도 좋은 곳이라더라."
하고 대답했다. 단서 두 개가 건네진다. 형제의 존재(사실 단서랄 것도 없는 게, 현민의 프로필사진에 실려 있던 가족사진에, 현민의 아버지라기에는 현민과 나이차이가 그렇게까지 나보이지 않는 남자가 현민의 어머니와 같이 찍혀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사실을 형으로부터 들었다는 것.
"햄버그 스테이크가 되게 맛있었던 게 기억나네."
랑은 모르겠지만, 이게 현민의 입맛을 완전히 알 수 있을 만한 단서는 되지 못한다. 랑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입맛의 스트라이크존이 꽤 폭넓은 탓도 있고, 그가 거기서 먹어본 게 햄버그 스테이크 하나라 그것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민과 랑의 발걸음은 시내 번화가 중심이 아니라, 번화가의 변두리로 향한다. 번화가 변두리와 공원이 맞닿은 길을 조금 가다 보면, 흡사 호빗의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아담하고 야트막한 경양식당이 보인다. 현민이 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맛있는 향기가 섞인 바람이 두 사람을 감싼다. 따뜻한 조명이 들어찬 홀로 들어서자, 홀에서 대기하고 있던 말쑥하게 차려입은 홀 매니저가 다가와서는 현민과 랑에게 말을 걸어온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나요?"
예약이 안 되어있는 게 당연할 것이다- 랑은 오늘의 행선지가 이곳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고, 현민도 형에게 들어서 찾아온 게 전부일 테니. 그렇지만 현민의 거동이 좀 이상하다. 아니요, 라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매니저에게 뭐라 속삭이는 게 아닌가. 매니저는 조금 어리둥절하다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푸근한 언니미소를 온 얼굴에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에 그치지 않고, 매니저는 현민이 전혀 예상치 못한 한 방을 추가로 날렸다.
"그러면 두 분, 커플석으로 안내해드리면 될까요?"
채현민이 굳었다! 현민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냐는 투다. 생각같아서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고 싶은데, 랑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굴기도 싫었기에.
형이라고 하면 그 오른쪽에 있던 분일까- 랑은 생각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가족과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부단히 애썼다. 섣불리 가족에 대한 것을 추측하면 안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분명한 이유는 다른 것이다. 랑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랑이 집에 들어가려하지 않는 이유가 된 가족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특히 이런 날 이런 곳에서는 더욱이.
당신을 쫓아 발걸음을 나란히 옮긴다. 번화가의 중심으로 갈 줄로만 예상했던 랑은 눈을 깜빡였다. 완연한 밤이 찾아온 번화가는 불빛이 반짝거린다. 땅에 뜨느 별이 너무 밝아 하늘에 있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랑은 하늘에서 있다가 땅으로 내려온 기분이다. 그만큼 낯설고 설레는 기분이 울렁거린다. 그 기분을 딱히 억누르지는 않았다. 그러고 있다보면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식당이 나타났다. 당신이 열어준 문으로, 따뜻하고 맛있는 바람 속으로 들어섰다. 홀 매니저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방글 인사했다.
"커플석으로 안내해달라고 했어?"
랑에게는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추측이었다. 예약 여부를 묻는 매니저에게로 다가가 당신이 무언가 속삭이니, 매니저는 어리둥절해하다 따스한 미소와 함께 커플석 안내에 대해 물어본다. 랑은 당신이 자리를 커플석으로 요청했나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신이 굳어서 삐걱삐걱 움직여 랑을 바라보니 그것을 보고서 쿡쿡 웃고, 부끄러워 할까 조그맣게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랑은 방글방글 웃으면 흔쾌히 응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매니저에게 그저 예약한 이름을 댔을 뿐인데-그마저도 예약을 해놨다고 하면 기대한 게 들킬까 봐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귀엣말로- 커플석으로 안내해달라고 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은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랑의 방글방글 가볍고 여상스러운 질문에, 랑에게로 쭈뼛쭈뼛 시선을 돌린 현민은 잠깐 침묵하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떡할래?"
나는 그러고 싶어─ 하고 조급하게 튀어나오는 뒷말은... 삼킨다.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것은 좋았지만, 랑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말인가 싶어 조금 머뭇거리는 그 새에 랑이 선수를 쳐서 그렇게 해주세요, 하고 대답해버렸기 때문이다. 매니저의 얼굴에 걸려있는 미소가 영업용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흐뭇함이 담긴 미소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은 아니겠지. 현민은 매니저의 시선을 피한다. 그렇지만 시선을 피한 곳엔 잘했지, 하고 조곤조곤 물어오는 랑의 뿌듯한 미소가 있다. 현민의 얼굴이 다시 빨개진다.
"대답이라고 볼 부비부비하려면 너 또 밀어낼 거지."
-말인즉슨, 그러고 싶다는 모양이다. 애정표현일까. 그러고 싶어, 하는 말은 주저되지만 그건 괜찮은 걸까. 아까 뿌닛 하고 밀려올라간 걸 기억하고 있었는지 현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매니저는 현민과 랑을 칸막이가 쳐져 있는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군데군데 가로등이 켜져 있는 공원의 야경이 썩 잘 내다보이는 자리였다.
"감사합니다." 하고 매니저에게 인사를 건네어드리고는, 현민은 한쪽 소매에 살짝 주름이 간 코트 단추를 툭툭 풀어서 벗어내려서는 의자 등받이에 척 걸어둔 뒤에 앉는다. 그리고 갈색의 코트 아래에 가려져 있던, 온 몸의 실루엣이 적나라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드러나는 딱 붙는 까만 폴라티 차림이 드러난다. 현민은 자기 옷차림에 대해 별생각 없는지 메뉴판을 집어들고 펼쳐보았다.
당신은 랑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고, 랑은 그래서 자신의 추측이 정답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매니저에게는 답하지도 못하고 랑을 보더니 얼굴이 빨개지는 당신. 랑은 공공이용시설이라는 식당이라는 위치 때문에 조용히 소리죽여 웃었다. 근데, 그러다가도 당신의 말을 듣곤 일부러 표정을 꾸긴다.
"응. 이번에는 꼬집기도 할거야."
툭툭댄 랑은 먼저 매니저를 따라 안내하는 자리로 향한다. 작은 걸음과 느린 속도에 따라잡기야 어렵진 않겠다. 향기만 흘리고 뒷태를 보여버린게 매몰차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부담과 허용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건 랑에게 쉽게 지쳐버리고 말 일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당신을 오로지 친구라고만 생각하던 랑에게는 조금 급하다. 당신의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지금은 어렵다.
"커플석은 칸막이가 있나 봐-"
매니저가 떠나고서 한 말이다. 단순히 2인석이 아니라는게 조금 신기했고, 랑도 외투를 벗었다. 숏코트가 꽤 아방한 핏이었는데 때문인지 폴라티를 입은 랑의 몸이 평소보다 더 아담해 보인다. 당신만큼은 아니나 달라붙는 재질이라 몸의 선이 드러났다. 당신과는 확연히 다른 몸이다. 작고, 말랑하고, 곡선으로 이루어진 몸이란 태가 난다. 랑은 당신의 팔을 꾹 눌러버렸다. 전완근을 꾹. 운동한 사람의 단단한 몸에 호기심이 동한게 이유겠다.
현민이 궁시렁거렸다. 뒤에서 찌그락째그락대는 고등학생 둘이 귀여운지, 커플석을 안내해주고 돌아갈 때도 매니저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웃음소리는 죽였으되 죽일 수 없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참 곤란하다. 랑이 생각하고 있는 사이는 그런 사이가 아닐 텐데. 귀에 난 바늘자국으로부터 시작된 예기치 못한 나날들이 조금씩조금씩 랑에게 꿰메어지고 있다.
"그러면 나중에 하지 뭐."
그렇지만 아직은, 아직은 랑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 모양이다. 아직은 천천히 고민하고 생각해봐도 될 것 같다. 현민도 기다려주마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네."
외투를 벗던 현민이 방안을 한번 휘 둘러보며 대답한다. 난색의 벽지와 벽걸이등이 가져다주는 아늑함과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경치가 둘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서, 현민은 왠지 조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각종 운동으로 단련된 거친 굴곡이 가득한 몸 위에 손가락이 콕 닿을 때 움찔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꾹 눌러야 간신히 들어가는 그것은 매우 탄력있으면서도 단단했다. 현민은 눈을 깜빡이면서 랑이 찌른 곳과 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랑이 꺼낸 메뉴 이야기를 따라가기로 했다.
"햄버그스테이크는 먹어봤으니 난 다른 걸 먹어볼까. 돈가스도 맛있을 것 같았거든... 그러면 파스타는 두 종류를 시켜서 조금씩 갈라먹자."
다행히 경양식당이라 그런가, 파스타 메뉴가 그렇게 복잡하진 않았다. 토마토 볼로네제, 푸타네스카, 로제, 크림, 까르보나라, 알리오 올리오 등 양식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름이다. 이름 밑에 자그맣게 설명문도 한 줄씩 덧붙여져 있었고.
나중에도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지금 랑은 머리 한 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볼 부비부비말고, 당신이 하고 싶어할 만하면서도 랑이 해줄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 당신이 하고 싶은게, 적어도 하면 좋아할 것을 찾는 것부터 큰 벽에 가로막히고 말아 난항을 겪고 있는 중이다. 무튼 언젠가는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긍정적 가정이 있다.
"아파?"
랑이 찌른 곳과 랑을 번갈아보는 당신에, 랑도 그랬다. 당신과 찔렀던 곳을 번갈아 쳐다본다. 잘 안 눌리길래 꾹 누르려 힘을 주기는 했는데, 실수로 손톱에 찔려 아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힘을 덜 주어 꾹꾹거린다. 안 눌리는 거랑은 관계없이 꾹꾹.
"파스타 두개 밖에 안 시켜...?"
그러다 당신의 말에 꽤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토마토는 당신이 시켜줬으니, 로제, 크림, 까르보나라, 알리오 올리오로 선택지가 줄었다. 그리고 여기서 선택을 못 하고 있다. 알리오 올리오는 먹고 싶은데, 까르보나라도 먹고 싶다. 그렇다고 크림이 안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로제도 눈에 밟힌다. 메뉴판이랑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다.
현민은 역동적인 굴곡으로 가득한 팔뚝을 랑에게 내줬다. 랑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신체와는 퍽 많은 차이가 있는 감촉이다. 그가 놀랐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예기치 못해서였다. 생각해보면 랑과의 관계는 항상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득차 있었다. 랑에게 현민이 그랬던 것보다도 먼저, 현민에게 랑과의 나날들이 겪은 적 없던 예쁜 흔적으로 한땀한땀 수놓이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서로를 조금씩 수놓는 나날들이다. 더디고,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예쁘게.
"?"
두 개밖에 안 시켜? 라는 말에 현민은 호출벨을 누를 준비를 하다 말고 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점심을 좀 적게 먹었어?"
그러고 보니 현민은 지금까지 랑이 상당한 먹깨비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접해본 적이 없었다. 랑과 같이 식사해본 적이 없었고, 랑의 키나 덩치 등으로 미뤄봐서 그런 식성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쉬이 생각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진실의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