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랑은 당신의 팔을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어라- 이제보니 당신의 손이 랑의 뺨에 닿아 있다. 랑은 계속 팔을 갖고 장난을 치나 싶더니 곧 당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을 기억하려 본을 따는 것처럼 이렇게 손을 맞대보고, 저렇게 깍지를 껴보더니 이윽고 당신의 손을 끌어왔다. 랑은 당신의 손에 뺨을 꾹 디밀었다. 말랑하고 따뜻하다. 그러고 있다 당신과 눈이 마주치면 빤히 바라본다.
"지금도 아쉬워?"
랑은 볼 부비부비하려고 했던 당신을 한번 밀어냈었고, 이후에는 말로도 거절했다. 당신이 아쉽다고 해도 다른 무언갈 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지금의 랑이 해줄 수 있는 것을 고심한 결과다. 볼 부비부비를 하고 싶었던 듯 해보이니까, 볼끼리 맞닿지는 못해도 자신의 볼을 내어줄 수는 있다.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나오고, 늦게 들어가고- 아침과 저녁은 어쩔 수 없이 소홀해지고 말았다. 점심을 많이 먹게 됐고, 그러다보니 생긴 이상한 식습관. 랑이 먹깨비가 된 이유. 세끼를 골고루 챙겨도 한끼 먹는 양이 그 덩치에 비하면 많았지만, 아예 세끼를 한끼에 몰아먹게 되다보니 더 많았다.
가볍게 마주대보고, 깍지를 끼며 여우 노닐고 뒹굴듯이 자기 손을 가지고 장난치는 랑의 움직임과 거기에 실린 온기가 기꺼웠다. 그 온기에 마음이 느슨해져, 콕콕 찌르는 게 아니라 가볍게 끌어당기는 랑의 움직임에 의문은커녕 의식도 없다가, 손끝에 와닿는 따스하고 말랑한 것에 현민은 그제서야 자신의 팔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본다. 뭐라 놀라지도 못한다. 현민의 뺨 위에 불그레한 홍조가 피어오르는 게 랑의 눈에 보인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돼. 하루종일 아쉬워하고 있을 것도 아닌데. 이런저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이건 어떨까요? 하고 돌아다니지만, 현민은 모두 무시했다.
"─아니."
벽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아직은 잊지 않고 있다는 제스쳐가 선명했다. 현민은 손끝에 닿은 랑의 뺨을 살짝 조물거려 보았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현민의 머리에 와닿았다. 딱히 그들이 다니는 학교는 야간 자율학습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에, 석식은커녕 매점도 그때까지 문을 여는지 아닌지 모른다. 축구부 스케줄은 다섯 시나 여섯 시에 끝났고, 랑을 만나기 전까지 현민은 그때 칼하교했기에 그 이후에 학교에 남는 학생들의 생활은 모르고 있다.
늦게 알았나보다. 랑은 당신의 뺨이 슬그머니 빨갛게 오르는 것을 보고 쿡쿡 웃었다. 이상하다. 데이트 신청도, 먼저 뺨에 입 맞춘 것도, 볼을 부비고 싶다고 한 것도, 당신을 쓰다듬도록 머리 위에 손을 올린 것도, 하나하나 열거하자니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전부 당신이 먼저 그랬다. 랑도 당신을 덥썩 끌어안거나 손을 잡거나, 깍지를 끼고는 했지만- 당신이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손에 뺨이 닿은 것도 그렇다. 랑은 생각치도 못하게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모양이지만, 그것까지는 랑은 몰랐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아까는 어떻게 그랬대."
당신이 뺨을 살짝 조물거리면, 랑은 당신의 손을 놓았다. 이제 뺨을 디밀고 있지 않아도 당신이 더 장난을 치든 손을 거두든 하겠거니 싶다.
"평소에?"
에너지바, 초콜릿 몇 개, 작게 한 봉지씩 묶인 젤리, 사탕 몇 알. 그런 것이다. 입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공부하다 잠이 몰려오면 입에 집어넣는 군것질거리.
그렇게 부끄러워하느냐. 그러면서 아까는 어떻게 그랬느냐. 두 가지 모두, 한 가지 대답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말 안할래."
대답하지 않는다. 랑의 손이 떨어져나가고도, 현민의 손이 랑의 뺨에서 떠나는 동작은 느릿했다. 이 말을 하기에는, 너도, 나도, 준비가 안 됐다고 현민은 생각했다. 벽 앞에서 랑을 기다리는 것은 분명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기꺼이 자청했지만, 이따금 이게 아무리 함께 있더라도 이다지 쓸쓸한 일이라고 실감해버리는 순간이 있다. 현민은 시선을 피했다.
좋아하니까.
나답지 않게 과감하게 굴 수 있는 것도, 나답지 않게 우물거리는 것도, 다 널 좋아해서야, 랑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현민은 그것을 자신의 흉골 안쪽에 심박으로 새겨놓았다. 언젠가 랑에게 이 말을 전해줄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현민은 호출벨을 눌렀다.
"이야기하느라 호출벨 누르는 걸 잊고 있었네."
현민은 랑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입가심이라고 할 정도로 가볍게 먹는다는 소리일까, 진짜 말 그대로 입가심거리 간식 몇 개 먹고는 저녁이라고 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안 좋다.
"저녁 먹을 걸 점심에 몰아먹는 건 아니지? 영양균형에도 위장건강에도 안 좋아."
하면서, 현민은 호출벨을 누르고 나타난 매니저에게 주문을 전했다. 돈가스 하나랑, 햄버그 스테이크 하나랑, 볼로네제랑 까르보나라랑 알리오올리오요. 음료수로는,
"아, 음료수 안 정했다. 마시고 싶은 거 있어? 딱히 마시고 싶은 거 없으면 자몽에이드로 시킬까 싶은데."
자몽에이드, 샤인머스캣 에이드, 무알콜 모히또, 무알콜 피냐콜라다 등 선택의 폭은 꽤 넓었다.
감추는게 많은 랑이 어떻게 당신이 감춘다고 재촉하거나 요구할 수는 없다. 량은 당신이 이 기다림을 끝내고 싶다고, 하기 싫다고 할 때도 이렇게 답할까 생각했다. 답은 금방 도출된다. 아닐 것 같다. 아니다. 더디고 서툴러도 닿으려고 하고 있는데, 랑은 온전히 시작도 못 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하는 이유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생각하기조차 싫어 묻어놓은 비밀을 밖으로 내는 건, 좋아해주는 사람한테 말하는 건 겹겹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한 편으로 그런 생각도 하고 만다. 며칠 보지도 않은 사이, 서로 아는 것보다 모르는게 훨씬 더 많은 사이, 지금 이 순간마저도 신기루가 될 지도 모른다는 무례하고 오만한 생각. 랑은 모순덩어리다. 사랑이, 애정이 목마르지만 그만큼이나 애정에 겁낸다. 영원하고 무한할 것 같았던 애정이 사라진다는 것을 배웠고, 그럼에도 애정이 고파서 무한한 애정을 원했으며, 그런 것은 없으니 애초부터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을 그었다. 태어나서 제일 처음 느끼고 제일 기본적인 애정이 사라졌으니, 애정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 선을 그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왜-
아무것도 모르는 건, 바보는 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녁 먹을 시간에도 학교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호출벨이 울렸고, 매니저가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2인분은 아닌 듯한 주문이 매니저에게 전달된다.
"응, 자몽에이드로 해주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음료일까- 당신의 기호가 향한 음료가 그것이라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이유로 랑은 자몽에이드를 그대로 매니저에게 전달했다.
감추었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감춘다' 는 것이야말로 무언가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무언가의 실재를 역설적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마음. 랑의 성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할 수가 없어서, 현민에게는 너무 소중하고 따스하고 예뻐서... 꼭 보여주고 싶어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는 마음.
어떻게 피워낸 걸까. 어디서부터 날아와서 피어버린 걸까. 이유나 원인을... 찾을 수 없다. 그냥 갑자기 어느 날 가볍게 후 하고 살랑살랑 날아와서, 가슴팍에 박혀버렸는걸. 잘 안다. 자신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불일치할 때가 있다는 것을. 자신이 어떤 마음을 품건 상황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좋을 대로 배반해버리기 일쑤라는 것을. 자신의 마음에 눈이 멀어 상대를 상처입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단념해버렸는데. 누군가에게 딱히 사랑받거나 사랑할 것을 기대하지 않고, 살아지는 삶을 무심히 보내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 가슴에 네가 한가득 피어있었어.
"언젠가는 말해줄 거니까."
그래서 소년은, 약속 하나를 내밀었다. 이전에도 나눈 적 있던 약속이었던가? 그렇다면 이것은 그 약속을 상기시켜주는 말이 될 것이다.
"네, 그럼 자몽에이드로 해주세요."
주문을 접수한 서버를 보내드리고, 현민은 다시 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생각해보면 랑도 보통의 학생치고는 상당히 일찍 등교하는 편이 아니던가? 자신이야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꼬박꼬박 챙겨먹지만, 어쩌면 랑은 그러지 않을지도...?
멀지도 않다. 오늘 학교에서- 방과후에 교실에서 들었다. 랑의 머리를 잘만 쓰다듬어주던 당신이 빨갛게 변하길래, 그때 그 이유를 물었다가 들었다. 알게 되면 말해주겠다고, 언젠가는 꼭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다. 랑은 기억한다. 매니저는 주문을 받아 자리를 비웠고, 다시 둘만의 공간과 시간이 찾아온다.
"응, 거의? 과일같은 거 먹고 나올 때도 있고."
랑은 잘못된 식습관이라는 걸 알았지만 고칠 생각따위 없다. 랑이 집에서 일찍 나오고 늦게 들어가는 이유는 공부 때문은 아니고, 그 이유가 랑이 집에서 밥을 먹으려 하지 않는 이유와 같았다. 랑에게 집은 아늑하고 돌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혼자 가로등 켜진 골목길을 걷고,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 깔끔하기 때문에 더 외로워보이는 현관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랑은 그때마다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랑의 자리는 이곳에 없다고- 그래서 끼니를 제대로 못 챙기더라도 학교의 자리가 편했다.
그 모든 감춘 것들이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현민이 쉬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지금 랑에게 말하면 랑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현민은 이야기를 해줄 준비를 마쳤다. 이제 랑이 준비를 마칠 차례다. 둘만이 남은 칸막이 안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공기 때문에 현민은 조금 착잡함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 뒤, 현민은 다른 이유로 착잡함을 느껴야 했다.
"하루 세 끼를 점심에 몰아먹는다고?"
건강과 운동, 균형잡힌 생활로 갈고닦인 현민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식습관이었다. 현민이 랑의 생활패턴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만큼 모르는 것도 많았다. 새로이 알게 되는 것도 있었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현민은 그런 걸 쉽게 묻지 못했다. 서로의 차이라는 것은 민감한 일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런저런 배신을 겪어봤어도 그의 가정만큼은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현민에게, 그 마지막 가정까지도 보금자리로 여기지 못하게 된 랑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동감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침에 충분히 식사를 마치고 나올 여유시간이 있는데도 학교에 일찌감치 등교해버리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자신이 함부로 물어보기엔 민감한 이유일까 봐- 현민은 뭐라 말하지 못했다.
침묵을 깬 것은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매니저의 목소리였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뚜껑이 덮인 접시 몇 개가 담긴 카트가 들어온다. "아, 햄버그스테이크는 저쪽이요." 그리고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한 상 가득 차려지는 오늘의 저녁. 호빗의 집 같은 둥근 문을 열었을 때부터 풍기던 기분좋은 냄새가 실재감있는 비주얼과 함께 다가온다.
# 일단 출발하기 전에 후다닥 써왔어 ( + +) # 현민이가 아침에 도시락 싸온 일상도 돌려보고싶네..
당신이 정말 말할 수 있을 때가 올지가 중요했다. 그 언젠가는 분명 내가 만든 네 기다림이 끝날 때겠지- 그러니까 랑은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 가늠했다. 모르겠다. 왔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없는데, 랑은 행동이 두려워 발조차 떼지 못한다.
"응-"
랑이 청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12살이 되던 해의 겨울이다. 겨울 끝물, 느닷없이 앓고 일어난 랑은 한쪽 귀의 청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다른 쪽 귀도 조금은 들리지 않았다. 평형 감각도 이상해졌다. 보청기를 착용했다. 그렇게나 즐겁지 않은 겨울방학은 처음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귀가 작아서 귀걸이형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했다. 랑은 양쪽 귀에 생긴 조그만 장치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건 다른 아이들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행동이 먼저 앞서고 무지하기에 잔인한 어린 아이들은 랑에게 상처를 냈다. 보청기를 빼앗아 진짜 들리지 않냐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의 손에 사라지는 고장나는 보청기도 많았다. 결코 가벼운 가격은 아닌데도- 랑은 그 해 여름에 들어서며 보청기 착용을 거부했고, 여름방학에는 독순술을 연습했다. 어려웠다. 청력은 계속 나빠졌다. 독순술에 서툴러 학교에 나가기 위해서는 보청기를 착용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온 겨울, 랑은 1년만에 삐뚤어졌다. 가정의 불화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왔다~."
음식이 나오니 랑은 머리로 손을 올렸다. 로우 테일로 머리를 정리해서 묶으려 했다. 땋아서 끝만 묶고 넘겨두었던 옆머리가 머리끈이 되어준다. 로우 테일로 잡아두었던 머리카락 갈래를 땋은 머리카락으로 다 감을 때, 땋은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고무줄을 한번 전체를 묶으면 됐는데-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난다. 랑은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당신을 바라봤다. '나 머리끈 끊어진거야...?' 하고 조금 당황했다. 손에 끊어진 머리끈이 걸렸다. 곱슬이는 랑의 머리카락이 다시 풀어진다.
옷은 그래도 시간 많이 걸리니까 담에 날잡고 하는건 어때 애들 지금 밥먹으러 온거 8시쯤같고.. 겨울방학 끝날 즘에 옷 보러 간다거나~ 개인적으로 화사하고 예쁜 옷 많은건 봄옷이라고 생각하거든 놀러가기 좋은 날씨니까 그래도 아쉬울 것 같아서 머리끈 고르기 퀘스트를 내봣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