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싸움이다. 그 때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랑이 현민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끝나는 그 때를 이제는 자신이 마중하러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랑과, 그런 랑을 무던히 기다리고 있는 현민에게 그 때가 쉬이 가까워오지는 못할 듯하다. 그러나 현민은 랑을 위해 기다릴 수 있었고, 랑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현민도 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체조건- 가무잡잡한 피부색 때문에 곤혹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민은 칩칩스러운 동급생들의 유난을 철저히 무시했으며, 선을 넘는 철딱서니-보통 가족을 들먹이며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조롱을 내뱉는 고약한 놈들-가 있으면 얼굴을 코피범벅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의 부모님이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불려왔을 때, 현민의 어머니는 현민에게 까만 살갖을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했으나, 오히려 현민은 예쁜 피부색을 물려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것이 결손이 아닌 단순한 차이에 불과했기에 현민의 것이 받아들이기 더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나, 그 역시도 그런 조롱이 싫고 원망스러웠다. 내심 자신의 검은 피부는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걸까, 하는 마음에 원망스런 마음이 든 적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자신의 피부가 가무잡잡하다는 이유만으로 조롱거리가 된다는 게 불합리하다는 의식이 더 컸고,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입고 슬퍼하는 것을 가만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검은 피부를 자랑으로 여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의 고민이 랑에 비해서는 훨씬 더 쉬운 구석이 많았다. 우선 어릴 적부터 기골이 탄탄했기에 자신을 조롱하는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상징적인 측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힘이라는 해결수단을 갖고 있었고, 그 스스로부터가 겨우 피부색을 갖고 자신을 멀리할 사람이라면 애초에 교우를 맺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확고한 결론을 어린 나이에 내리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그가 진학한 중학교는 남중이었기에 애들이 여름만 되면 죄다 새까맣게 타서 현민과 피부 톤이 엇비슷해지는데다 아이들이 중학생쯤만 되어도 피부색을 갖고 가벼운 농담을 할지언정 그 이상으로 놀리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만큼은 머리가 굵게 되기에, 가무잡잡한 피부가 애로사항이 된 기간이 그렇게 길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랑에게 품고 있는 마음은 랑의 귀가 조금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흔들릴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랑의 귀에 남은 상처가 마음까지 뻗은 것을 안다면, 그는 그 상처를 꺼려하는 게 아니라 그 상처가 낫기를 기도해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대한 도와주리라는 것. 현민은 그런 소년이었다.
달칵, 달칵, 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상에 놓인다. 랑의 앞에 포크와 나이프와 함께 놓이는 것은, 따뜻한 김이 오르는 햄버그 스테이크 접시. 양송이와 양파를 썰어넣은 브라운 소스가 한가득 얹어져있고, 가니쉬로 토마토와 파프리카, 감자가 놓여있다.
"그렇잖아도 이거 먹고 나면, 악세서리 보러 가려고 했는데."
시내 번화가의 한쪽에는 각종 악세서리 가게들이 몰려있는 악세서리 골목이 있었고, 현민이 자주 가는 피어싱 샵이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거기가 랑이 처음으로 귀를 뚫은 그곳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가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근처에 머리끈을 들여놓는 가게도 있을 테고, 거기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예쁜 것들 중에서 마음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으리라. 목이 조금 말랐기에, 현민은 아무 생각 없이 음료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옆에 놓인 것을 발견한 현민이 덜컥 굳더니 얼굴이 다시 빨개지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서 돌아보면, 자몽에이드가 두 잔이 따로따로 나온 게 아니라 손잡이 달린 커다란 2인분 컵에 담겨 나왔는데... 거기에 대놓고 꽃분홍색의 하트 모양 빨대가 당당하게 꽂혀 있었던 것이다. 현민의 얼굴색에 딱 자몽에이드 색이 덧씌워졌다.
랑을 기다리고 랑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했으되, 예기치 못한 커플 취급에 민망해지는 얼굴은 별개다. 현민의 시선이 어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신나게 어깨춤을 추었다.
연말은 바쁘다고 말해줬던 거 기억하고 있어 ( + +)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꽤 바쁘네 그러니까, 답레는 쓰고 싶으면 써주면 좋지만, 바쁘거나 하면 나중에 가져와도 좋아 나도 마찬가지로 답레를 받아도 연말연초 동안에는 바로바로 답레 써주지 못할 것 같아서.. ( 3 3)
13살, 6학년의 랑은 독순술에 이어 수화를 공부했다. 반이 바뀌었으니까 6학년을 잘 지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순수했고, 아직은 인간관계에 있는 힘껏 부딪쳐보려고 했던 시절의 랑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대였다. 아이들은 랑의 보청기를 빼앗으면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6학년때만 해도, 지금은 들리지 않는 귀도 실청이 아니었다. 귓가에 고약한 소리를 속삭이고 가면 무시를 하려고 해도 몇 번이고 며칠이고 반복되면, 복도를 걷다말고 멈춰서게 됐다. 아이들이 뛰어 도망가도 쫓아가지 못한다. 몇 번은 쫓아 뛰어보려고 했으나 다치는 건 랑이었다. 집에서도 눈에 띄게 변화가 일었다. 가을에는 집 밖에서도 부부 싸움 소리가 들렸다. 랑은 머리카락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곱슬머리 정리가 번거로워 단발이었던 랑은 머리를 길렀고, 한동안 머리를 묶는 일이 사라졌다.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에는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교복을 입은 랑은, 한 번 더 기대를 했다. 귀에 대한 것을 비밀에 붙이고, 처음 보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힘들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청기도 좀 더 작고 귀 안으로 삽입해 착용하는 종류로 바꾸었다. 그리고 랑의 기대는 여름까지는 이어졌다. 2년을 노력하니 입술 모양을 보고서 어느 정도 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서 우르르 같은 중학교로 진학을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랑은 분명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 보는 남학생이 대뜸 귀가 안 들리냐고 물어왔다. 중학교 들어 처음으로 보청기가 고장났다. 랑은 이제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사춘기의 시작이 처음부터 너무 가파른 언덕이었다. 열심히 독순술을 연습한게 독이 됐다. 보청기를 빼앗겨도 대화를 할 수 있는 랑은, 들리는데 들리지 않는 척을 한다는 오해가 생겼다.
"아- 피어싱!"
랑이 귓가에 올라오는 손에 놀라는 건, 시야 밖에서의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귀를 만지는 손을 쳐다보지 못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가 크게 비중을 차지한다.
"둘 다 잘 어울리는 거로 잘 부탁할게-?"
피어싱을 사주려고 했다고 방과 후 교실에서 이야기했었다. 랑은 당신이 머리끈도 골라주겠다 하면, 당신의 흔적이 벌써 두개나 남게 된다. 그것도 늘 하고 다니는 물건으로만 두 가지라- 거울 볼때마다 의식치 않아도 당신 생각이 날 것 같다고 느꼈다.
"어. 하트~."
랑은 어쩔 줄 모르는 당신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이나 싶더니, 컵을 발견하고서는 까르륵 웃는다. 분홍색에, 하트 모양에 이 가게에서 단단히 커플로 보고 있는구나 싶다. 그렇다고 랑이 당신처럼 얼굴 붉히진 않았다. 오히려 보란듯이 빨대로 쪽 자몽에이드를 한 모금 마셔버린다. 아무것도 아니고 별 것도 아니란 듯이- 그냥 빨대일 뿐이라는 것처럼 마시는게 참 얄밉다. 랑은 자몽에이드를 맛있어하더니, 마셔보라며 커다란 컵을 당신의 쪽으로 살짝 밀어주기까지 한다. 보란듯이 마신 것은 당신을 놀리려고 한게 맞았지만, 자몽에이드를 권하는 행동은 먹깨비가 시킨 일이었다. 정말 맛있기 때문에 눈을 반짝이며 당신이 마셔보길 바랄 뿐이다.
그건 당연하지 ~.~ 랑이 입으로 현민이한테 말할 때까지 안 풀면 현민주도 지칠거 같아서.... 현민이는 아직 모르더라도 풀어봤어 가정불화는 학교 측만 묘사하느라 좀 부실해져서 쪼금 미리 말하자면 돈+랑이 학교에서 무슨 일 있는거 맞는데 말 안함+특수학급과 일반학급 결정을 두고서 의견차이 등으로 빚어졌어
불쌍한 아이는 불쌍한 시간을 보낸 만큼 행복해져야 한다-라는 바보같은 독선을, 어린 마음에 품었던 적이 있다. 적어도 중학교 3학년, 작년 초여름까지는 그랬다. 비실비실하고 약한 친구가 있었다. 집이 가난한지 행색이 지저분하고 핸드폰 하나 없었으며 지각도 하기 일쑤에 멋대로 조퇴해버리는 일도 있는 그 아이는 부모님이 야반도주하고 할머니와 같이 산다느니, 다리 아래에 움막을 치고 산다느니 하는 악의 어린 유언비어의 희생양이 되었고, 이내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려져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없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그 비슷한 것으로 전락해갔다. 그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현민과 같은 반이 되었다. 현민은 그 아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옆자리에 붙어서 말도 붙여주고, 조퇴하려 하면 설득했다. 밥도 같이 먹었고, 종종 핸드폰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다른 아이들이 있으면 '네가 얘보다 조금 더 형편이 낫다고 그게 얘를 괴롭힐 이유가 되는 거냐' 며 호통을 치며 막기도 했다. 그때에는 현민이 벌써 큰 키와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반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민과 종종 어울려다니던, 마찬가지로 반에서 높은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친구는 현민에게 '걔가 그냥 가난해서 그렇게 따돌려지는 게 아니다' 라고 충고했으나, 현민은 그 충고의 의미를 그 아이가 쉬는 시간마다 자신의 휴대폰을 자연스럽게 가져가고 방과후마다 자신에게 간식을 얻어먹는 게 당연시될 때까지도 몰랐다. 선생님이 이따금 현민을 불러, 수업에도 잘 임하지 않던 그 아이가 요즘 얼굴빛이 아주 좋아졌다며 현민에게 건넨 칭찬이 현민의 눈을 더 철저히 가렸다.
그러던 어느 날 현민은 교무실로 불려갔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고 불려간 현민은 교무실 문을 열고 담임의 자리에 서자마자 눈에 불이 번쩍할 정도로 세게 따귀를 맞았다. 그리고서는 그 아이를 두들겨팬 게 너냐고. 현민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캐묻는 것이다. 현민은 빨간 손자국이 어리둥절한 채로, 그냥 걔 부를 때 가볍게 어깨 몇 번 친 것 말고는 없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어깨 몇 번 친 걸로 피멍이 들어? 이거 순 약아빠진 악마 새끼였네─ 하는 폭언이 되돌아왔고, 현민은 영문도 모르고 양 뺨이 부어오르도록 따귀를 얻어맞았다.
사건의 내막은 양 뺨이 새빨갛게 퉁퉁 부은 현민의 몰골을 본 아버지가 노발대발해서 교무실로 찾아오고 나서야 밝혀졌다. 다른 못된 녀석에게 잘못 밉보여 심하게 두들겨맞은 그 아이가, 자신을 두들겨팬 녀석의 이름을 직접 말하면 앙갚음을 당할까 봐 두려워 현민의 이름을 대버린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성급한 손속을 사죄했고, 학폭위의 처벌은 현민이 아닌 주범에게 돌아갔으며, 선생도 정당한 징계를 받았으나, 한번 부서져버린 신념은 독선적으로 딱딱했던 만큼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현민의 마음에 쏟아졌다. 누구보다 너를 위해준 나를 너 좋자고 팔아넘겨? 하고 치를 떨고 있는 현민에게, 정학 처분을 받은 그 친구는 '걔가 가난해서 따돌림당하는 게 아니었다니까' 라며 현민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그제서야 현민은 알게 되었다. 약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선한 사람은 아니라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가엾은 아이는 가엾은 채로 살고, 못된 아이는 못된 대로 살고, 자신은 자신으로 살면 그만이라고. 함부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그 노력만큼 보답받지 못한다고.
...그러나, 그 바위만큼 굳세고 차가운 생각마저도 뛰어넘는 이끌림이 있을 것이라고는 현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컵에 꽂혀있는 빨대를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랑의 모습에, 현민은 약이 오른다기보단 조금 허탈해졌다.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별생각없이 이 커다란 자몽에이드 잔을 가벼운 오해로 치부하고 톡 떠밀어버리는 랑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분홍색으로 염색되어 득정 도안의 모양으로 꼬여있는 플라스틱 쪼가리에 그렇게나 동요하고 어쩔 줄 몰라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역시나, 상대방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과 같으리라는 법도 없고, 자신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해지리라는 법도, 온전히 전해진다손 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리라는 법도 없다는 사실을 현민은 다시 곱씹었다. 그래서, 현민은 얼굴이 더 빨개진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표정에 힘이 빠지며 시무룩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자신이 마음을 충분히 전하지 않았을 뿐이다! 현민은 시무룩한 표정을 추스렸다. 피어싱과 머리끈. 피어싱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끈은 자신의 삶과는 관련없는 물건이었지만 지나가면서 본 것만으로 색색깔 화려한 좌판이 예뻤다. 그 중에서 랑의 머리에 특출나게 예쁜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랑이 이쪽으로 컵을 밀어올 때, 현민은 살짝 웃어보였다.
상당히 나쁜 의미로 꼰대기도 했고... 진짜 범인을 밝히고 정의구현을 하기보단 일단 제시된 용의자를 범인으로 단정짓고 조진 뒤에 사건 종결하는 게 꼰대 입장에서 편한 일이기도 하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도 친구의 친구 썰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현민이한테 적용한 거라... 이 이야기는 원래 교권이란 게 지금보다 훨씬 지엄했고 교사가 학생을 매로써 체벌하는 게 당연했던 좀더 옛날의 이야기였을 거야 아마
그치만 현민주랑 있고 싶어 이잉 못된 아이들 중에서는 아마 랑이한테 사과하고 싶은 아이도 있을거고 여전히 장난이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을거고 친구따라 호기심에 무례를 저질렀던거라 잊은 아이도 있겠지 언젠가 어른이 되면 (단순히 사회활동 범위가 넘어져서) 만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랑이가 잘 놀라는 이유가 그저 들리지 않기 때뭄이 아니란걸 발ㄷ혀서 귀를 못 보는겅 밝혀서 만족합니다
랑은 삐뚤어졌어도 예쁜 아이었다. 비단 외모 뿐만 아니라- 성격이 모날래야 모나기 어려웠다. 랑이 어떻게 삐뚤어졌냐면, 속이 곪아 뒤틀렸다. 다른 아이들보다 평범한 생활에 노력이 배로 들어가게 된 딸이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부모가 궁금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늘 학교에서 어땠느냐, 괜찮았느냐, 아무 일도 없었느냐 물을 수 있다. 랑은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열심히 독순술을 연습해서 보청기만 끼지 않아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고, 하다못해 학년이 바뀌면, 중학교에 올라가면 바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늘 같은 답을 했다. 좋았다, 괜찮았다, 아무일도 없었다- 그러나 거짓말도 해본 사람이 할 줄 알아서 그때의 거짓말은 티가 났다. 랑이 진실을 말해주길 바라며 같은 질문은 이어졌고, 학교에서의 생활은 나빠지면 모를까 나아지질 않았다. 랑은 집에 들어오면 방으로 직진해 잘 나오지 않기 시작했고, 가끔은 그런게 왜 궁금하냐고 물어보았고, 나중에는 답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랑은 칭찬조차 곱게 듣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을 잘한다 하면, 귀도 나쁜데 그거라도 잘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 같을 지경이었다.
부모님은 방글방글 웃어주던 딸아이의 변화에 덜컥 겁이 났다. 너무 자주 고장나는 보청기가 의심스러웠다. 보청기는 절대 값싸지 않다. 딸아이는 점점 더 마음의 문을 닫아간다. 둘 다 딸아이를 걱정하는 것은 맞았으나 의견은 달랐다. 특수학교로 보내자 보내지 말자는 이야기로 시끄러워졌다. 특수학교에 가면 적어도 괴롭힘은 받지 않을 것이다, 랑이가 그 정도는 아닌데다 노력하고 있다, 보청기 비용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이의 의견이 중요하다, 애초에 당신이 잘 보살폈으면- 감정이 격해지며 나온 한 마디로 작은 틈이 생겼고, 틈을 비집는 말이 실수가 아니게 되었으며, 기어코 골은 깊어졌다. 깊어질수록 헤어나오기 어려워졌고 언젠가부터 집에 살얼음판이 깔렸다.
학교에서 랑이 들리는데 들리지 않는 척을 한다는 오해는, 점점 부풀고 커졌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었고, 집에서부터 지친 상태로 학교에 와있는 랑은 이제 아무런 기대도 노력도 하지 않기로 했다. 소문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2학년이 되면 새롭게 다시 잘 지내보자고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친구가 있었다. 랑이 아무 소리 하지 않아도 대신 목소리를 높여주고, 신고 있던 실내화 한짝이라도 벗어 도망가는 놈 뒷통수에 던져 맞춰버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랑은 괜찮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랑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 하나둘씩 랑에게서 흥미가 떨어졌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랑이 비밀로 하고 싶었던 걸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더 적기는 해도- 잔잔했다. 폭풍전야인 줄도 모르고 랑은 숨통이 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중학교 2학년의 가을, 엄마가 사라졌다.
이제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는데, 랑은 무작정 엄마에게 사과했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남겼다. 몇번이고 잘못했다고 가지 말아달라고, 여지껏 묻어두었던 감정을 쏟아냈다. 귀가 나빠서,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쌀쌀맞게 굴어서, 말대꾸해서, 온갖 것을 잘못했다고 죄송하다고 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랑은 그 사실이 견디기 너무 힘들어서 하나뿐인 친구에게 연락했고, 친구는 같이 울어주었다. 랑의 눈물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아무의 잘못도 없었다. 친구는 아이들이 그저 랑에게 흥미가 식은게 아니라,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랑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랑은 감정에 북받쳐 이 이야기는 비밀이라고 당부하지 않았다. 친구는 학교에서 랑에게 말을 걸곤 하는 같은 반 몇 아이들에게 랑이에게 그런 일이 있었으니 가족이나 엄마 관한 이야기는 조심하자고 말했을 뿐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 랑은 귀가 들리지 않아서 엄마가 버리고 도망간 불쌍한 아이가 되었다. 삐뚤어진 랑은 친구의 탓이 아님을 알아도 더 이상 친구와 웃고 지낼 수 없었다. 원망스러웠고 배신감이 사무쳤다. 아무 일도 없도록 혼자 있기로 했다. 마음을 주고받은 누군가 떠나는 일도, 누군가를 떠날 일도, 상처 주고 받을 일도 없는 혼자가 되기로 했다. 매사에 가볍게 거리를 두기로 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기로 한 랑에게 생긴 예외가 당신이다.
"그럼- 학교에서도 하고 다닐게."
땋아두었던 머리카락이 점점 풀린다. 랑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당신이 분명 시무룩해하는 표정을 보였던 걸 봤는데도 랑은 아무말 하지 못한다. 이 예외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랑은 모르겠다. 당신은 떠나지 않을까, 랑이 당신을 떠나지도 않을까, 당신에게 상처받은 적은 없지만- 그 짧은 새 상처준 적은 잦은데 왜 당신은 아직도 옆에 있는걸까 궁금하다. 마음으로 아픈게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으니까 더욱 궁금하다. 여전히 당신이 붉히는 얼굴색이 곱고 웃어주는 표정이 상냥한게 믿을 수 없다.
"그치~."
랑은 뒤늦게 앞에 놓인 햄버그 스테이크에 관심을 가졌다. 테이블위로 놓인 접시만 다섯이다. 제일 먼저 선택한 메뉴였던 햄버그 스테이크에 포크와 나이프로 한입 조각씩 자른다. 따뜻하게 모락모락 김이 피는게 먹깨비 센서가 반응한다. 랑은 두조각밖에 자르지 못 했는데 우선 한 입 먹어야겠다. 잘 먹겠습니다- 하는 인사 후 한 조각을 포크로 콕 집어서 입으로 넣었다. 몇 번 오물거리더니, 자몽에이드를 마셨을 때와 같은 반응이다. 눈을 반짝이더니 다시 포크로 다른 한 조각을 콕 집는다. 한 입에 두조각을 넣을 생각인가 싶냐 하면, 아니었다. 그 포크를 당신의 입가로 내밀었다. 빼빼로를 권할 때와 같다. 입에 물면 된다.
거리 두기. 랑이 원하는 거리를 도무지 지켜주지 않는 이 굳세고 고집있는 녀석은 도무지 밀어도 밀어도 밀려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해서? 그러면 그는 무엇을 바라고 있기에 랑과 그런 약속을 나눈 걸까? 그는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른다. 랑이 말해준 데까지밖에 모를 것이다. 그래서 랑이 일부러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는 까닭도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시무룩한 표정을 거두고 조금이나마 다시 상냥하게 웃고 있다. 그 무뚝뚝해서 표정 짓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생김으로. 글쎄, 아마 여기서 물어보면, 현민은 또 나중에 대답해주겠다고, '나중의 대답' 에 질문 하나를 더 매달아놓으리라.
"그래?"
학교에서도 하고 다니겠다는 말에 현민에게 문득 꽤 괜찮고 약간 장난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이건 어떨까, 하고 당장 입밖에 내는 게 아니라 피어싱샵에 가서 말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랑이 내미는 햄버그스테이크 조각을 한입에 텁 하고 시원스레 받아물고는 입을 우물거린다. 넘기고 나서, 그는 무언가 옛날 어렸을 때 추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린다.
"그래, 그 때도 딱 이렇게 맛있었는데."
하다가, 이번에는 현민이 자기 몫의 포크 커틀릿을 잘라서 내민다. 양식이라기보단 일식 스타일의, 두꺼운 고기에 입자 큰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돈가스 조각이 랑에게 답례처럼 내밀어진다. 그러고도 작기 접시 위에 놓인 것을 먹고, 파스타도 한 입씩 먹어가면서 그렇게 식사시간이 흘러간다. 기름진 볼로네제 파스타를 먹은 현민이 입안이 텁텁했는지 다시 자몽에이드 잔에 꽂혀있는 빨대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