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집 근처에 다 온 것 같아- 그런 연락을 하기 위해서 가방에서 폰을 꺼냈다. 붉은 벽돌 주택들이 즐비한 골목에서 당신의 집이 어느쪽인지 두리번거렸던 랑이다. 전교 20등 안에 드는 랑의 암기력은 굳이 설명하자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확신은 없었지만 정확하게 당신의 집 방향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폰을 꺼내드니 타이밍 좋게 알림창에 카톡이 떠오른다.
[ 이미 왔는데! ]
증거사진으로 주택가 골목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려 했는데, 카메라가 담은 풍경에서 어쩐지 당신이 보인다. 휴대폰을 내리니 랑은 당신과 눈이 마주쳤고, 보이려나- 싶어서 크게 손을 들고서 흔들었다. 헤실 웃으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당신이 얼굴을 감싸쥐니 까르륵 웃는다.
[ 괜찮아 ] [ 깐쵸있나 보고 있을게 ]
당신의 집이 그곳이라면, 깐쵸가 있는 곳은 금방 찾을 수 있다. 당신의 집으로부터 귀퉁이 반대편에 있는 슈퍼마켓, 그리고 깐쵸의 집. 랑은 그 가로등으로, 깐쵸의 집으로 향했다.
슈퍼마켓의 창고에는 여전히 그 깐쵸 상자가 놓여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상자 안은 비어있는 것 같다... 깐쵸는 지금 집 안에 있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 옆에서 액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담벼락 위를 걸어오던 고등어무늬의 털 긴 고양이가 랑을 발견하고는 아는 체를 해오는 것이다. 그 녀석은 늘어뜨리고 있던 털복숭이 꼬리를 다시 빳빳하게 세우면서, 그새 겨울준비를 한답시고 털이 더 쪄서는 랑의 옆으로 폴짝 뛰어내려와서는 랑의 발목께에 머리를 부비며 고양이털을 한가득 묻혔다.
고양이와 안부인사를 나누고 있노라면 옆에서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지도 못하고, 겨우 옷과 악세서리만 갖춰입고 나온 모양새다. 네이비색 슬랙스에 새까만 목티, 그리고 이런 옷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끔한 짧은 갈색 코트. 저번에 현민의 집에 놀러왔을 때 벽장에 걸려있던 외투들 중에서는 없던 외투다. 벽장 속에서 꺼낸 걸까. 저런 정갈한 옷도 있었나. 어깨에는 평소에 학교 다닐 때 차던 것보단 좀 덜 스포티하고 더 캐주얼한 까만 크로스백이 걸려 있었다.
목에는, 조그만 곰돌이 팬던트가 걸려있다. 그것은 주홍색 염료를 뒤집어쓴 것처럼 칠이 되어 있었는데, 아마 그가 자신의 악세서리들 중 그것을 고른 이유는 랑이 하늘색 폴라티를 고른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어싱은, 꽤 독특했다. 아웃컨츠를 따라 톱니바퀴 모양의 피어싱이 일정 간격으로 꽂혀 있었는데, 애초에 아웃컨츠에 피어싱을 할 때부터 그것들을 염두에 둔 것일까 아웃컨츠에 뚫은 슬롯에 끼워진 톱니바퀴들은 모두 이가 딱딱 잘 맞물려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반대쪽 피어싱으로... 엉뚱하게도, 웬 팩맨이 귓바퀴를 따라서 구슬들을 먹으며 행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깐쵸의 집, 깐쵸 상자가 비어있는 것 같아 랑은 돌아서려고 했다. 당신의 집 대문 앞에 서 있으려 했는데,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하면 반가운 고양이와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폴짝 뛰어내려와서 랑의 발목 즈음에서 깐쵸가 부빗거리면 간지러워하며 자리에 살포시 쭈그려 앉았다. 랑은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깐쵸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젯밤과 다른 것은, 오늘이 조금 더 이른 시간대라는 점과 랑의 복장 정도겠다.
"응? 아니-"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에 당신이겠다- 생각한 랑은 깐쵸와의 인사를 마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깐쵸는 아직 랑의 곁에서 머물렀지만, 랑은 당신을 향해 서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당신이 창문으로 내다보았을 때와 똑같이 헤실 웃으면서 당신에게 인사한다. 당신의 옷차림을 보았지만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자니 더가까이 다가가서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랑은 사뿐 당신에게로 한 걸음 내디뎠다. 제일 먼저 시선이 끌린 곳은 곰돌이 팬던트였다. 주홍색 물감에 퐁당 빠지던 걸 건져낸 듯 생긴 곰돌이를 보았다. 랑은 당신의 방안에 있던, 한 번 안아보았던 곰인형이 생각났다.
깐쵸는 랑의 쓰다듬는 손길을 받으며, 현민을 올려다보고 액옭 하고 아는 척을 해주었다. 현민도 가볍게 허리를 숙여 깐쵸를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허리를 든다. 목에서 목걸이가 반짝인다. 그가 그것을 고른 이유는, 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주홍색 악세서리 중에 그가 걸칠 만한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만...
"곰돌이? 어─"
랑의 말에 현민은 무언가 떠오른 듯 잠깐 회상하다가, 원래라면 랑이 보기 전에 기타보다도 더 먼저 숨겼어야 할 그 곰인형에 랑의 생각이 닿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만 또 얼굴에 빨간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랑이 팬던트를 만져보거나 하는 것을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하리보보다 약간 더 큰 곰인형은 현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 반짝인다.
"딱히 뭐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손 닿는 데 있었을 뿐이야."
현민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이러면, 다시 너희 집 쪽으로 해서 갈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 나가서 다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자."
랑은 배시시 웃으며 곰돌이를 톡 건들여보았다.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는 당신이 곰돌이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손 닿는 데 있었을 뿐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랑은 일부러 하늘색 목폴라티를 입었다. 주홍색 곰돌이 목걸이가 정말 손에 닿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랑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 다음은 흥미가 당신의 귓가로 올라간다. 랑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있는 당신의 귀를 보고서 신기해하다 반대편 팩맨을 보고서는 까륵 웃는다.
"이대로 가면 게임오버네."
팩맨은 유령과 닿으면 게임오버. 랑은 그렇게 피어싱으으구경했다. 그러고보니 이 데이트는 랑이 당신이 피어싱한 것을 보고 싶다- 말 했다 시작됐다. 당신이 눈을 마주치지 못 해도, 손부채질해도 아랑곳 않는다. 이번에는 곰돌이를 들어올려 당신의 얼굴가에 가져가 댄다.
"똑같아!"
랑은 당신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참으로 짓궂다. 하는 말, 하는 행동, 그 어느 하나 달가운 짓은 아닌데, 그렇게 즐겁다고 계절감을 상실토록 웃는 모습하며 들뜬 목소리에 실린 따스한 온기가 얄궂다. 그리고 당신의 말에 랑은 웃음기를 머금은채 고개를 끄덕인다.
많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선택지가 없었다면 일단 선택지를 고민해봤다는 말이고, 굳이 곰이라서 고른 게 아니라면 곰 모양이 아닌 다른 선택기준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랑이 이번에는 귓가를 보고 까르륵 웃자, 현민은 붉어진 얼굴로도 >:)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잘 보라구."
그 말대로 잘 보면, 팩맨과 유령 사이에 놓인 구슬 피어싱 하나가 조금 더 크다. 그런데 진짜 조-금 더 큰 거라서 눈썰미가 좋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만한 차이이긴 하다. 큰 구슬을 먹으면 팩맨은 잠깐 유령을 물리칠 수 있었던가? 의외로, 레트로한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귓불의 구멍은 비워둔 채다. 딱히 뭔가 마땅히 끼울 게 없었던 것일까. 현민은 피어싱을 흔들어보이다가... 랑이 아예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를 들어올려 똑같네- 하고 웃자 다시 >:( 표정이 되었다. 현민은 대답삼아서 양손을 뻗어 랑의 양뺨을 아프지 않게 꾸-욱 집었다. 잠깐 꾸욱 집어서 매만져보고는 놓아준 다음에, 손을 내민다.
"아무튼 이제 출발할까. 아니, 거기 말고- 이리로 가면 돼."
아예 정반대 방향은 아니지만,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 도로를 현민은 가리켰다. 그들이 떠나려는 것을 알았는지, 깐쵸도 액옭, 하는 소리를 배웅을 해주고는 자기 집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간다.
그를 따라가, 처음 보는 곳이지만 꽤 정취있는 골목길을 지나서 한 블럭을 지나가면, 차들이 바삐 오가는 6차선 왕복 도로가 펼쳐진다. 바로 저만치에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이 하나 보였다. 현민은 랑과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 랑을 벤치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몇 번 버스, 몇 번 버스가 이전 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하는 안내음성이 들린다. 현민은 전광판을 쳐다보고는 "1401번 버스를 타면 되는데, 7분 뒤에 온다고 돼 있네." 하고 랑에게 알려주었다.
랑은 여며져 있던 숏코트 한쪽을 열어 젖혔다. 목폴라이기 때문에 코트 위로 나온 목 쪽에서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아방한 핏을 가진 코트 아래로 살짝 타이트핏의 하늘색 목폴라가 보인다. 동이 터오는 어슴푸레한 새벽 하늘 색을 닮았다. 당신이 말한 그런 색이다. 같이 등교를 하는 이른 아침, 랑의 옅은 하늘빛 눈동자가 비추는 색. 선택지가 없었다는 말에 동의하며 옷 색을 보여준 랑은, 왜 이 옷을 골랐는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코트를 여민다.
"응?"
잘 보라니 가까이 다가간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당신의 앞에 서서 까치발을 디민다. 조-금 더 큰 차이를 보기 위해서 당신의 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드디어 그 차이를 알아챘다. 랑은 게임오버가 아니라 게임엔드였네- 하고 웃는다. 근데 웃다보니 양뺨에 무언가 느껴진다. 웃던 눈이 둥그렇게 떠진다. 당신이 꾸-욱 집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안 랑은 그래도 괜찮아- 라고 말하는 대신 다시 방글방글 웃었다.
"깐쵸, 또 봐-"
하나같이 자연스럽게 흐른 행동들을 나열해보자면, 우선은 당신이 내민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서 남은 손은 울음소리를 내는 깐쵸에게 흔들었다. 그리고 앞장서는 당신을 따라서 걷는다. 처음 보는 곳, 모르는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앉아갈 수 있을까-"
벤치에 앉아 안내음성이 들린 버스 정보 전광판을 올려다본다. '1401 7분'이라고 적힌 것을 확인하고,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앉을 자리가 없더라도 사림이 없으면,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넘어지더라도 혼자 넘어지고 말테니까 상관없다. 그런데 사람이 많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랑이 가만히 있더라도 부딪쳐 넘어질 수도 있고, 랑이 옆사람한테 부딪칠 수도 있다. 잘못하면 같이 넘어지는 상황까지 일어날 수 있다- 생각하니 랑은 잡고 있는 당신의 손을 한 번 고쳐 쥐었다. 데이트하는 동안 손 잡아줘야 해- 라고 말했던 이유를 그때의 당신은 몰랐겠지만 지금은 알 수 있겠다.
나도- 하고 따라붙는 말에 현민은 시선을 두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말부터 해주고 싶었는데, 랑이 먼저 나서서 자기 목걸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말을 꺼낼 틈을 놓쳤었다. 자신처럼 목에 새벽하늘을 두르고 있나 했더니, 어슴푸레한 가로등 등불 아래에서 풀어헤치는 코트 앞섶 사이로 파르랗게 먼동이 터 오는 하늘색이 연연하다. 현민은 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직도 발간 뺨으로 나직이 말했다.
"예쁘다."
......그리고 주어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입밖으로 꺼낸 말을 얼버무리려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랑의 양뺨을 꼬옥 집어볼 뿐이다. 만져보니 중독성있어서 잠깐 더 조물거리고 나서 랑의 뺨을 놓아주고 손을 쥔다. 꼬리를 흔들며 상자로 들어가는 깐쵸를 배웅해주고, 랑에게 손을 내민다.
예쁘다, 하는 그 목적어 없는 말이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랑이 어떻게 받아들이건, 현민은 이제 더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너에게로 가고 있다고, 네 마음이 내 마음과 닿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마치 횃불을 치켜들고 달리는 마냥 그런 말을 하기로 했으니까.
"앉아서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자신의 손을 한 번 조심스레 고쳐쥐는 랑의 손을 내려다보며 현민은 말했다. 이젠 잘 알고 있었다. 랑이 왜 그렇게 무릎에 반창고를 자주 붙이고 다니는지. 발걸음은 유달리 느린지. 그래서 현민은 랑을 꼭 붙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상황이라는 건 100% 마음대로 돌아가주지는 않는다. 몇 분쯤 정거장에서 나란히 앉아있었을까, 저만치에서 코너를 돌아오는 1401번 버스는 저 멀리서 봐도 안에 사람이 많이 타 있는 게 보인다. 아주 콩나물시루 수준까지는 아니되, 앉을 자리는 아무래도 없을 모양이다.
옷, 나, 일부러 그 옷을 입은 나. 주어로 올 수 있는 건 이 세가지 정도 쯤이겠다- 랑은 생각했다. 랑은 이 문제의 정답에는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하는게 포인트일 거라 짐작했다. 누군가 랑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버거운 것은 한결같다. 받아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눈송이보다 작고 반짝이는 결정으로 건네어주는 것은 소중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용기낼 수 있는 당신만큼이나 빛나는 보석이다. 랑의 뺨도 발간색으로 희미하게나마 올라온 것 같다면, 그건 추위 때문은 아니다. 짓궂은 말을 하지 못 하고 있다는게 증거가 된다. 가질래- 하고서 똑같이 주어를 없앤 채 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질 못 했다.
"응- 그래도 괜찮아!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랑은 고쳐쥐었던 당신의 손을 놓다 폈다 한다. 잼잼 다시 쥐었다 폈다하는 건 크게 걱정할 필요없단 신호였다. 시내까지 멀리 떨어져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 당신도 있다. 정 넘어질 것 같다면, 첫만남을 재현할 작정이다.
"아, 온다."
코너를 도는 1401번 버스를 발견했다. 주말에 도서관을 갈 때 타는 버스처럼 앉아갈 수는 없겠구나- 확인했다. 기사님이 운전을 부드럽게 하시는 분이라면 좋겠다 마지막 바람을 빌었다.
언젠가는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옷, 랑, 그 옷을 입은 랑 중에 무엇을 더러 예쁘다고 했느냐고. 가질래? 하고 되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랑이 현민에게 마련해준 대답이 그런 말을 할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 대답이라면. 랑이 어떤 대답을 내리게 될지를 알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현민도 잘 안다. 랑이 여러 차례 그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러주었으니까. 랑도 잘 알 것이다. 그는 반짝이는 마음을 한가득 거머쥐고서는, 헨젤과 그레텔이 남기는 조약돌 표식마냥 하나하나 랑에게 건네어주면서 기다릴 뿐이다.
"뭐 오래 걸리진 않기야 하지만- 아잇, 젠장."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버스 안의 상황이 현민에게도 보였는지 그의 입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곤 쥐었다 폈다 꼼지락대는 랑의 손을 꼭 거머쥐고는, 먼저 벤치에서 일어서서 랑이 쉽게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가볍게 잡아당겨준다.
"학생 둘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카드를 찍고, 랑이 가파른 버스 계단을 잘 올라올 수 있도록 손을 단단히 붙들어준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승객이 그와 그녀밖에 없었기에, 랑이 버스에 올라타서 손잡이를 잡으면 버스는 이내 부르릉, 하고 출발한다. 랑이 장난스레 물어오자, 현민은 뭘 당연한 소릴 하냐는 듯 대답했다.
"둘 다."
라고 대답은 했어도, 랑이 무엇을 잡건 현민은 랑이가 그러겠다면야, 하고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버스는 6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다음 정류장에 가까워지며, 정류장으로 접근할 준비를 하기 위해 차선을 바꾸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앞으로 K5 한 대가 불쑥 끼어들었다. 갑자기 버스가 덜컹 하고 급하게 멈춰선다. 랑의 몸의 무게균형이 흔들리는 그 순간, 현민의 손이 잽싸게 랑의 손에서 빠져나오더니 랑의 어깨를 감싸안고 꼭 붙들어왔다.
당신의 투덜거림을 듣고서는 웃는다. 여기에 랑이 없었다면 당신은 투덜거리지 않았을 것 같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볍게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랑은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두명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랑이 투덜거릴 차례다. 먼저 버스에 올라타더니 랑의 몫까지 버스비가 찍혔다. 돌아올 때는 선수치고 말겠다- 생각하는 랑은 입술을 내밀고서 삐진 티를 냈다. 당신이 잘 짓는 표정을 >:( 따라했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손은 꼭 붙잡고 계단을 올라왔지만-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랑은 그런 도움을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중학교 3학년때까지만 해도 랑의 비밀은 비밀이 아니었다.
"당연히 둘 중에 하나만! 이 조건이지~."
둘 다는 재미없잖아- 말과는 다르게 랑은 한 손은 당신에게, 한 손은 버스손잡이에게 내어주었다. 어쩔 수 없는 버스의 흔들거림은 버틸 수 있다. 시작이 순조로우니 이대로 잘 갈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버스 손잡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도 옆에 있는 특별한 날이니까- 안일한 생각이다. 다음 정류장 안내음이 들리고, 정류장으로 가까워질 때 버스가 급정거하였다. 균형감각이 떨어진다, 균형을 잡지 못 한다. 기울어져도 기우는 줄 모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미 늦었을 때에서나 알아채버리고 마는데, 오늘은 달랐다. 당신의 손이 떨어지고 다시 붙잡는게 빨랐다.
"와아- 엄청 빨라! 안 넘어졌다-"
방금 넘어질 뻔한 것 치고는 속없이 웃는다. 방글방글 웃으면서 당신에게 고맙다고 인사할 뿐이다.
랑이 삐죽대며 성내는 표정을 짓자, 마침내 뭔가 점수를 따냈다는 생각이 들어 현민은 장난스레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랑이 이런 도움에 꽤 익숙해보인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의 집에 놀러왔을 때 계단이 가파르다고 손을 잡아주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민은 지금까지 다른 누군가, 적어도 가족의 누군가가 랑이를 도와준 적이 있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할 뿐이다. 랑의 무릎에 유독 잦은 부상을 이 현상과 결부해서 '원래는 도움받는 데 익숙했으나 최근에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는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현민에게 단서가 아직 적었다. 만일 도출해낸다고 해도, 현민은 그것 역시 랑이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그 역시도 확실히 느낀 것이다. 랑이 대인관계에 둘러둔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을. 올해 들어 그 벽에 가장 강하게 정면충돌한 것이 바로 그이지 않은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둘 중에 하나만~ 하면서 내기라도 하듯이 태평하게 대답하는 랑에게 현민은 다시 >:(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하나만 잡을 거면 내 손 잡아, 라는 말을 하려 했다. 그때에 버스가 흔들렸고, 현민은 대답 대신 랑에게서 손을 빼서 랑의 어깨를 감싸안는 것을 택했다. 안 넘어졌다~ 하고 헤헤 웃는 랑에게, 현민은 그제서야 말을 마저 이을 수 있었다. 그는 랑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떼어서 랑에게 내밀며 말했다.
"─하나만 잡을 거면 내 손 잡아."
시선은, 창 밖으로 차가 또 흔들리지나 않는지 살피려는 듯 차의 앞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은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자니 간질간질하게 쑥스러워서 그런 것일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