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은 살포시 웃었다. 이 주제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온점을 찍었다. 사람이 많은 곳이 싫다는 건 지금 여기서 네게 말하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랑은 몇 년간 받아온 상처를 한 번에 털어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렇다는 것을 잘 알아서 누군가에게 기대기 겁났다. 매번 너는 나를 계속 좋아한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의심한다.
'공연 때', 보러갔다면 보러갔을 때라고 할텐데- 랑은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무슨 공연을 했을지 생각해보면 떠오른 것은 네 방에 있던 기타 뿐이었다. 랑은 그래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주제로 화제를 띄워서는 안 됐다. 분명 즐겁게 이야기할 수 없어지고 말거야- 랑은 초점을 해골 귀걸이에게 맞추고서 쿡쿡 웃는다.
"해골이 많이 불쌍해보이긴 했어."
그리고 랑은 절대 발 들이지 않을 줄 알았던 곳으로 들어갔다. 네가 열어준 문을 지나서 발을 디뎠다. 아무렇지 않은 척에는 도가 텄다.
"안녕하세요!"
익숙하고 친한 사이로 보이는 둘을 깜빡깜빡 쳐다보던 랑은, 네가 소개를 해주자 방글방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에는 충분히 밝고 명랑한 웃음, 그리고 목소리였다. 네가 소개해준 이름 두 글자는 혹시 모르니 기억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랑은 네 카톡 프로필 사진을 떠올렸다. "감사합니다아." 한 발짝 물러나주며 하는 말에도 감사 인사를 한 랑은 너를 바라본다. 피어싱을 사주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던 네가 데려온 피어싱샵, 골라둔 것이라도 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모르고 있는 걸까, 모르는 체하는 걸까. 현민은 절대 단서도 잡지 못한 일을 꼬치꼬치 캐묻거나, 입에 올리기도 싫어하는 일을 따져묻거나, 입 다문 이를 재촉하는 그런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공연 이야기와 기타 이야기에 흠칫해 해골로 화제를 돌린 것도 모른다. 그저 언제고 네 옆에 앉아서 네가 언젠가 이야기할 마음이 들기를, 자신에게 기대고 자신을 끌어안아줄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서로에게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네 손을 잡고 피어싱 샵 안으로 들어온 현민은, 너와 기꺼이 그만큼의 시간을 함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음-"
네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궁금증을 가지고 이쪽을 올려다보자, 현민은 네 손을 가볍게 이끌었다. "사실, 너랑 같이 피어싱을 골라보고 싶어서." 그러고 보면 팩맨이 쪼르륵 줄을 서 있는 쪽의 귓바퀴 구멍 중 하나는 아무 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그 다음 말을 그렇게 바로 내밀지 못하고, 좀 버벅거린다. 버벅거리다가 좀더 빨개진다. 같이 끼면 어울릴 것으로, 라는 말을 그만 입밖으로 꺼내버릴 뻔했다. 그는 급히 다른 말을 내밀었다. "다른 예쁜 걸로."
현민과 랑이 다다른 코너는 심플한 구형이나 송곳형, 고리형이나 큐빅이 박힌 것들뿐이었다. 그 옆 선반으로 시선을 돌리자, 조금 독특한 피어싱들이 있다. 동물 모양을 하고 있거나, 더러는 새 모양, 더러는 과일 모양이다.
가벼운 이끌림에 그만큼 발자국이 남았다. 피어싱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랑은 눈을 깜빡거렸다. 랑이 귀를 뚫은 이유는 오직 하나, 보기 좋게 꾸며두면 귀가 안 들린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겪은 모든 일로 짙어진 그림자들이 흐려질까봐- 였다. 피어싱을 고르는 안목같은 건 없었고, 네 취향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때 방에서 보여줬던 피어싱의 종류가 너무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랑은 같이 골라보고 싶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 앞에서부터 피어싱 하나가 끼워져있지 않은 것은 보았고, 그 하나를 고르는 건가보다- 랑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네가 빨개진게 랑이 고른 피어싱을 하고 싶다고 말해서 일 거라 짐작했다.
"너 범고래 닮았다고 해서?"
맑은 웃음소리가 피어싱샵을 조금 채우고서 사라진다. 랑의 눈 모양이 휘어져서 펴지질 않는다. 네 손에 들려있는 피어싱을 빼오더니 네 귓가에 올려본다. 랑은 당연히 이건 네 것을 고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앗............. 오늘은 일찍 왔었구나 하필이면 오늘 역대급 혐생 때문에 하루 종일 내내 바깥으로 돌다가 이제 집에 돌아왔는데 ( 8 8) >>753 >>740에서 >>739의 왼쪽 것으로 하자고 말했는데 이건 내가 표현을 애매하게 했네 이건 현민이가 착각했다고 하고 답레 써올게 ( 8 8)
현민은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긍정했다. 조금 그런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피어싱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으니, 네 귀에 자신의 흔적을 한 점 남겨놓고 싶어서였다. 네가 잘 안 들리는 귀 쪽에 범고래 모양 하나를 매달아놓으면, 귓가에 매달린 그 조그만 조각에서 자신을 보기를 바라는 조그만 욕심이 현민에게 있었다. 똑같은 피어싱 하나씩, 혹은 내가 골라준 거 네 귀에 하나, 네가 골라준 거 내 귀에 하나씩 해두면 서로 먼 거리에 있더라도 그것으로 서로를 떠올리면 서로에게 생각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어찌 보면 유치한 망상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욕심이었다. 너 범고래 닮았다고 해서? 하고 네가 되묻는 말이, 꼭 그 유치한 망상을 읽어버리곤 까르르 웃어버리는 소리 같아서 현민의 얼굴은 좀체 식지를 않았다. 현민은 손을 뻗어서 피어싱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랑이 자신의 손에서 피어싱을 쏙 빼갈 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피어싱과 조금 다르게 생긴 피어싱이 랑의 손에 들려있기에 현민은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한 번 진열장을 확인했다. 자신이 집어서 랑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범고래 모양 피어싱은 여전히 진열장에 그대로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다른 범고래 모양의 피어싱을 잘못 집은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네가 손에 들고 내밀고 있는 황동 피어싱도 꽤 예쁘게 생겼기에 바라보았는데, 네가 불쑥 던진 농담이 현민의 웃음코드를 우연히도 맞췄다. 드물게도, 현민은 풉킥 하고 웃음을 참는 얼굴이 됐다.
숨을 고르고 웃음을 흩어뜨리며, 현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네 손에서 그 피어싱을 다시 집어 네 귓가에 한번 가져다대어 보았다. 몸통을 이루는 고리만 넓적하고, 귀에 꽂는 바늘 부분은 다른 피어싱과 마찬가지로 가늘었으되 고리 부분이 너무 커서 랑의 귀에 채워도 귓가에 헐렁헐렁하니 남는 공간이 있을 것 같다.
"역시 네 귀에 뚫린 구멍에는 안 맞겠다. 그런데 내가 보여주려던 건 이게 아니고..."
현민은 다른 손으로, 원래 자신이 집어서 보여주려고 했던 범고래 모양 피어싱을 집어서 보여주었다. 귀에 가볍게 낄 수 있는 크기였다.
"이거."
이거면 너도 네 귓가에 가볍게, 조그만 이미지 하나를 심어둘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너에게 얼만큼의 의미로 남을지는 모르지만.
예쁘다고는 한 번 했었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칭찬이 네게 툭 건네진다. 드물게도 웃음을 참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걸 고개를 저으며 흩뜨리는 널 보고 있다가 랑은 덤덤하게도 말했다. 정말 그렇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너라면 그런 말을 많이 들어봤을 거라 짐작하기 때문에 그랬다. 뜬금없다 해도 랑은 원래 그런 아이라 되려 물흐르듯 지나간다. 넘실거리는 뭉게구름답게.
"으응. 그리고 커다라면 선생님들 눈에 잘 보일 거 같아-"
귓가에 대고 있는 동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서, 네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던 랑은 고개를 갸웃였다. 범고래 모양 피어싱이 랑의 것이라니, 네가 다른 모양을 가진 피어싱을 하나 더 보여줘서 그걸 보면 그것도 범고래였다. 네 손에 있는 조그만 피어싱을 보던 랑은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어버렸다. 랑이 너를 범고래라고 했는데, 너는 랑에게 범고래 모양 피어싱을 골라주고 있다. 랑은 꼭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네게 말한다.
"네꺼라고 찜하는 거 같아."
쿡쿡 웃음소리를 사그라뜨린다. 싫다는 눈치는 아니었고 오히려 조금 즐거워보였다. 랑은 네가 집어서 보여준 피어싱을 손에 쥐었다.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는 진열되어 있는 피어싱들로 눈길을 돌린다. "고래 꼬리는 행운을 가져다준대. 범고래도 그렇지 않을까?" 랑은 이것저것 꼬리 지느러미 모양 피어싱을 찾았다. 너도 하나 찾고, 랑도 하나 찾고서- 그러다 랑은 또 다른 모양의 피어싱에 한 눈을 판다. 네가 범고래 모양 피어싱을 랑에게 준다면, 랑은 너에게 무슨 모양 피어싱을 골라주어야할까 꽤 고민스럽다. 네게 랑은 무슨 모양을 닮았을지는 너만 알고 있을테니까. 범고래도 꼬리 지느러미도 아닌 다른 모양의 피어싱에 한눈 팔고 있는 걸 네가 눈치채도 상관없는 랑은 몰래 하려는 움직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