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럽다. 추악하다. 내게 붙은 평가들이었다. 하룻밤의 여흥으로, 불어터진 몸으로 내 몸을 깔아뭉개던 그들이 내게 잔에 담은 물을 얼굴에 부우며 했던 이야기들은 아직도 날 살아있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내 얼굴과, 몸을 보고, 터진 입술에 흐르는 피를 삼킬 즈음에는 난 그들에게 방긋 웃는 얼굴로 인사해야만 했다. 그게 내 역할이었다. 이름 없는, 단지 누군가에 의해 휘둘리는 인형. 죽는 것도 거부된, 그저 살아야만 하는 인형.
어머나... 음악계에서 유명하신 어머님께서 계시군요. 이미 하나의 재능을 갖고 계신 분께서 이리 반응하시니... 정말.. 뭐라 말을 해야 할까요? 저도 음악을 하시는 부모님이 계시긴 하지만, 유명한 분은 아니신데 말이죠. 훌륭한 부모님을 뒀다는 것이 때로는 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용하고자 한다면 그 어느때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잖아요? 아~ 이렇게 안 좋은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미간을 찌푸려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세계는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비참한 일이에요.
"..."
하지만 괜찮아요. 저에겐 뒤라님이 계시니까. 그래요, 그 분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큰 축복.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를 내고자 의념을 퍼트려요. 차가운 공기, 어색한 분위기, 단조로운 생각,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네, 맞아요. 하나하나가 서로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감미로운 연주처럼.
>>36 지난번에 빈센트가 증오에 관해 이야기하고, 라임은 빈센트의 궤변과 빈센트가 일으킨 참화를 보면서 빈센트에게 좀 인간적으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 같거든요. 그래서 빈센트와 이야기를 하다가, 빈센트에 대해서 우리 편에 선 악마라 생각하게 된다던지 하는 식으로...?
강산 씨가 앞에서 한 말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그보다... 뒤라님에 대한 걸 역시 말해야겠죠? 그다지 관심 없어 하시겠지만요. 뭐, 어때요. 누구든 관객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서커스의 규율이잖아요? 고개를 끄덕여요.
"어릿광대 뒤라를 들어보셨나요?"
그러고는 뒤라님께 받은 기적의 힘을 조금 선보여요. 조금 전 퍼트린 의념에 기적의 힘을 실어요. 그러자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작은 웃음이 들려와요. 잠시 후, 트럼펫 소리가 약하게 나기 시작했어요. 곧이어 박자에 맞춰 툭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자 여러 악기의 작은 소리가 흥겨운 공연을 시작하듯 들렸어요.
>>47 지난 일상에서는 빈센트를 인간적으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졌다기보단 좀 정신적으로 특이한 점이 있는 친구구나. 하는 인상이긴 했습니다. 일단은 같은 반 친구이자 동료이기도 하니 최대한 이해하고 그러려니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빈센트를 우리 편에 선 악마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강산은 유리아의 말에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유리아의 의념을 따라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자 놀라고 신기해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분명 학원에 비치된 악기들은 잠잠한데, 작게나마 여러 악기들의 소리가 들려오니 강산이 기적의 존재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들어본 적 없는 신이지만...신의 기적을 하사받은 사람...그렇다는 건 신을 대리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건가?"
강산은 눈을 빛내며 유리아를 보고 있었다.
"굉장하잖아."
역시 얘도 괜히 특별반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강산은 체감했다. 물론 별의별 것들이 다 있고 별별 일이 다 생기는 의념 시대이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신의 기적을 행한다는 것이라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었다.
"뒤라께서는 어떤 신이시지?"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는 묻는다. 물론 어릿광대라고 유리아가 말하긴 했지만... 그것만 봐서는 뒤라가 선신인지 악신인지, 뒤라교의 교리나 분위기가 어떠한지는 모르니 말이다.
뒤라교의 교리만 놓고 보면 강산이가 관심을 가질 법도 한데... 왠지 강산주피셜 강산이는 종교를 가질 녀석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쩌면 이건 오너가 종교계를 조오금 안좋게 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근데 그거랑 별개로 강산이는 아마...본인이 뒤라교를 믿지 않더라도 그 쪽에 우호적일 것 같습니다.
빈센트는 자신과 라임이 일으킨 결과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의뢰 내용은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를 통해 들어와 재산피해와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고블린들을 살해하는 것. 결과는? 대량 학살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인간들을 죽였을 고블린들은, 라임의 화살에 꼬챙이가 되어서 벽에 처박혔다. 그들 중 몇몇이 폭탄을 던지려 하기에, 빈센트가 그들에게 불을 질러서 끝을 냈다. 라임이 화살을 이용해 중요한 이들(고블린 샤먼, 고블린 족장)을 저격하는 동안, 빈센트는 위험도는 낮지만 수가 너무 많은 이들에게 불을 질렀다. 결과는 죽음의 빈익빈 부익부였다.
"..."
라임에게 죽은 계급이 높은 이들은 그래도 시체는 고사했지만, 빈센트에게 죽은 고블린들은, 불타죽은 것 답게 꼴이 말이 아니었다. 완전히 타버려서 형체만 남았지만, 그 형체는 분명 비명지르는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이번에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가, 어디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으으... 그으으으으..."
"아직 남아있었군."
빈센트는 그 고블린에게 가까이 갔다. 고블린은 공포에 질려 벗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빈센트는 그의 다리를 잡아서 거꾸로 들어올리고 한쪽 손바닥에 불을 지폈다.
"세상에는 다양한 신들이 있어요. 여기저기 게이트가 열리고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한는 세계니까요."
하지만 마이너 하다는 점은.. 어쩔 수 없네요. 저희 교단은 이제 막 없어지려는 것을 막아내고 신자를 하나 둘 모아가는 교단이니까요. 굉장하다는 그의 말에 웃어보이며 말해요. "아직 연습중이지만요." 라며 기적을 하사받은지 얼마 안됐다고요.
"웃음과 장난, 농담과 속임수, 음악과 경쾌함, 흥겨움과 같은 것들을 주관하고 계신 분이세요. 광대세요. 그리고, 우리들의 신이고요."
중요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위해 다시 입을 열어요.
"가난한 자, 부유한 자, 상관없이 누구든 품어주세요. 누구든 관객이 될 수 있으며, 공연을 볼 수 있어요. 그들이 원한다면요."
이윽고 그가 뒤라님께서 어떤 신이냐며 묻는 것에 대답했어요. 대답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요.
"사실은 뒤라님께서 어떻고 교단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의미있는 대답이 될 수 없어요. 뒤라님은 뒤라님이세요. 저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없어요. 어릿광대이시기에 그분께선 하고 싶은 걸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분을 위해 관객을 모으고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죠."
말 그대로 대량학살이었다. 그것은 게이트를 넘어와 신 한국을 약탈한 적병들이 치른 응분의 대가였고, 수십수백의 고블린을 효율적으로 제거한 것은 빈센트의 뜨겁게 타오르는 마도였으나, 때묻은 전투의 말로를 더욱 비참케하는 그 마지막 모습만큼은 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고블린의 다리를 잡아 거꾸로 들어 올린 빈센트는, 마치 풀숲에서 개구리를 잡아, 이걸 어떻게 가지고 놀까 하는 순진한 악의로 그득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한쪽 손바닥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은 이다음에 벌어질 일을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지게 만들었다.
말보다 손이 먼저였다. 놀란 눈으로 빈센트의 어깨를 세게 밀치며, 손에 그러쥔 뾰족한 화살촉을 그가 붙잡은 고블린의 머리에 박아 넣으려 하는 라임이었다.
"그냥 곱게 죽이면 되잖아!"
고블린을 동정하거나 무력한 패잔병을 위선하려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꼭 그렇게 고통을 주어서 죽여야 하냔 말이다.
가슴을 태워서 심장을 구우려던 손이, 어깨가 밀쳐지며 배에 닿았다. 지져지는 소리가 먼저 나고, 그 불타는 소리는 고블린의 비명소리에 이내 묻혔다. 고블린은 뜨거움에 발버둥치면서 팔을 휘젓고, 빈센트의 다리를 툭툭 때렸지만 그것뿐이었다. 빈센트는 손을 뗐다. 고블린의 뱃가죽에 빈센트의 손을 닮은 인두 자국이 생겼다. 피부가 끓어서 벗겨졌고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새 지방이 녹아내린 것 같았다. 빈센트는 손에 묻은 고블린 지방을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다 라임에게 말했다.
"우리가 명령받은 임무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다음번에는, 끼어들기 전에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방이 많은 부위를 불태우면 기름이 배어나와서 장갑을 망치거든요."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고, 곱게 죽이면 되잖냐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 고블린들이 우리 세계의 주민들에게 조금만 더 '신사적'이었다면, 라임 씨 말대로 했을 겁니다. 하지만..."
빈센트는 턱짓으로 주변을 가리킨다. 약탈당한 가게의 유리창은 핏물이 잔뜩 배어있었고, 그 누구도 그것을 보고 고블린의 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