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분히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오가 취한 와중에도 그 정도 생각만큼은 맑게 지나갔다. 들려온 대답이 의외였는지 레오는 "화 안내?" 하고 조금은 바보처럼 물었는지도 모른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기운에 비틀비틀거리면서 걸어가던 레오는 그 앞자리에서 균형을 잃고 무너져버렸다. 넘어진 레오는 다시 비틀비틀 거리며 일어서서 언젠가부터 마음이 편해졌던 그 자리로 걸어갔다. 자리를 옮기고 이젠 습관처럼 허벅지를 배고 누운 레오는 어린 아이처럼 작게 훌쩍이며 슬며시 손을 잡아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며 자기 머리위에 잡은 손을 올려놓았다.
" 누구한테 말해. 누가 알아줘. "
결국 이 모든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언제 또 그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 신물이난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 이 상황도 신물이 나고 함께있으면 이렇게나 마음이 편하고 좋은데 함께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화가났다.
" 모르는거잖아. 꿈에 오러가 나와서 날 잡아가는게 꿈이 아닌 날이 올수도 있잖아. 네 주인님이 나는 필요없으니 그냥 두라고하면 넌 나를 그냥 둘거잖아. "
혼자서 그렇게 미쳐버리겠지. 레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작게 훌쩍이고 몸을 떨었다.
" ...날 데려가줘. 아니면 네가 나랑 같이가. "
조금은 파격적인 요구였다. 이것도 술이 들어가서, 그 용기의 물약이 힘을 준 셈이겠지. 레오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고있다는듯 이제야 눈이 조금 맑아졌다. 한 차례 울어서 목이 부은듯했고 이따금씩 급하게 숨을 삼키느라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을진 몰라도 레오는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 너의 주인이랑 너희들이 해야하는 일이 끝나면 나랑 같이가. 이렇게나 헤집어놓고 나몰라라하는건 너무한거잖아.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레오는 유명해졌다.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궁의 투견이라는 이름은 날이 갈수록 유명해졌다. 눈에 흉터가 있는 아이를 조심하라던가, 주궁에 키는 보통에 머리가 새카만 여자아이와 시비가 걸리면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빠지라던가 하는 이야기들. 좋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앞에 누가 있던 신경쓰지않고 걸어가면 알아서 길이 비켜졌으니까.
엇차- 하는 소리와 함께 레오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않았다. 졸업식이라. 레오는 언젠가 자신도 저 자리에 서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서있을지 않을지도 모르지. 자신이 이 학교를 졸업하는 날 따위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킥킥대고 웃던 레오는 잔을 들고 술...은 아니고 음료수를 채웠다.
" 야야, 잔 채워라. "
술이라도 되는 것마냥 음료수 병을 들고 직접 나서서 다른 이들의 잔이 넘치기 전까지 마구마구 부어대던 레오는 제 주변 사람들의 잔이 다 채워진걸 확인하곤 큰 소리로 '마셔라~!!' 하고 소리쳤다. 꺄하하하! 소리치며 원샷을 때리곤 대표는 앞으로 나와서 선서를 하라는 말에 시선을 돌렸다. 아, 저 녀석은.
드디어 졸업식 날이 왔다. 이는 현 6학년들을 위한 졸업식이었지만, 올해로 학원을 그만둘 그녀에게도 얼추 해당되기는 했다. 자퇴하는 거니까 제대로 된 졸업장은 못 받겠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나마 식에 참여하고 나간다는 의미는 둘 수 있는거 아니겠는가.
일단 전체 행사니까 나름대로 잘 차려입고 정전으로 향했다. 아, 여기서 입학식을 하고 개학식을 한 것도 어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마지막으로 떠나갈 사람들을 배웅하고 자신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됐다. 감회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새롭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백궁의 한 자리에 앉았다. 다소곳이 앉은 그녀의 머리엔 석산을 본뜬 은장식이 반짝였다.
단상 앞에선 교장이 선서할 학생을 부르며 물러나는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올해 졸업 선서는 누가 한다고 했더라. 미리 들은게 없는 그녀였기에 나름 기대 반 궁금함 반을 갖고 앞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주궁 쪽에서 소란이 일어나 그쪽을 흘끔 보긴 했다. 아주 잠깐.
입학식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는 그간 여러 모습을 보였다. 비밀 가득한 언더테이커의 자제, 현궁의 검은 고양이, 이후 대표가 되어 청궁킬러와 현궁의 사신이라는 별호에 도달한다. 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기에 그는 변했다. 정전에 모여있는 모습에 그는 결국 끝났구나 생각한다. 오래도 걸렸다. 미래도 없던 나날을 뒤로 어둠에 암약하리라 생각했건만 어느새 빛무리가 그를 비추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지금 누구도 남지 않았으나 누구보다 많은 것을 얻었으며, 한껏 차려입었다.
언더테이커 가문의 가주임을 밝히듯 그는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브로치를 달았고, 어깨에 품이 넓은 코트를 걸쳤다. 그 안의 정장은 긴 다리를 부각시킨다. 검은 머리는 올려 묶었으며, 두 눈은 온전히 드러낸다. 그의 양 어깨에는 여전히 두마리의 짐승이 있다. 앞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에서 그의 눈빛이 결연하다. 많은 것이 그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이후 선서를 읊기 전 심호흡 하던 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돌린 등을 바르르 떨곤 외쳤다.
"..레오파르트 로아나!"
저게 진짜! 그런 의미였다가도 입술을 꾸욱 다문다. 참자. 참아야 한다. 이후 그가 다시 심호흡 하곤 선서를 왼다.
"나, 발렌타인 샬럿 언더테이커와 모든 졸업생들은 나의 생애를 돌아보건대 가장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며 자신의 목표와 비전을 위해 더욱 정진할 것이다. 이후 후배, 더 나아가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될 것이니, 자신의 발자취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 제각기의 명예를 받드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