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복수가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짐승의 모습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각시는 이런 위험요소를 늘 안고 다녔는데 정말 불안함 하나 없었을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뼈 씹는 소리로 미루어 보아 짐승에게 밥을 주는 것이 잘못이 아니지만 그 대가를 몸으로 잘 깨달았을 것 같다. 그는 마법부가 다가와도 가만히 그 자리에서 한 생명이 꺼져 고깃덩이로 전락하는 장면을 바라봤다. 짐승이 제압되는 장면도, 마법부 여럿이 달려들어 신비한 동물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장면도. 그 사이에서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점점 커져 그의 위로 그림자가 진다. 세스트럴 한마리가 우두커니 서 그를 내려다본다. 그는 그럼에도 손 한번 뻗지 않았다. 죽음을 상징하는 신비한 동물은 그를 동정하듯 주둥이를 정수리에 한번 툭 얹고는 다시 뒤돌아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는 밀랍 인형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겨우 움직이는 순간은 당신이 날아들자 팔만 움직여 품에 안을 때 뿐이다. 몸을 부비자 엄지와 검지를 들어 눈가를 가려주려 했고, 다시 밀랍으로 정교하게 빚은 인형이 된다. 수습하는 과정까지 모조리 눈에 담고 나서야 후련할 것 같기 때문이다. 각시였던 육편 몇조각을 수습하던 마법부의 사람 중 입을 꿰맨 남성이 그를 발견하고 엎드려 절했다. 그는 됐다는 양 눈짓한다. 이윽고 미리 준비된 수습용 관에 육편을 담는 모습까지 모두 보고, 선비탈의 광소와 체포 장면까지 보고나서야 뒤를 돌아 교수를 볼 수 있었다.
"제가 이 자를 사랑하기에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당신의 존재를 인정했고, 교수에게 고했다.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그의 미소는 입가부터 시작돼 눈까지 퍼진다. 어두운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평온하며, 웃는 모습은 더이상 쎄하지 않다. 그렇게 순수하게 미소 짓는 그는 변했다. 단 한순간의 우연으로 만난 악연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당신을 만난 뒤로 한번 포기했으나, 살아보고자 발악했기 때문이다. 앙상하다 못해 피골에 상접하던 몸은 점점 살이 붙어 지금은 앙상하여도 적당히 봐줄만한 정도가 되었고, 그와중에 키는 조금 더 컸다. 늘 헝클고 앞으로 쏟아 눈을 보이지 않던 머리는 바람결에 날려 두 눈을 온전히 드러냈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에서 투명한 물이 고여 한줄기 흐른다.
"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교수님께서 아무리 희생한다 하여도, 다른 사람이 희생한다 쳐도, 누군가 죽는다 해도 세상의 순리는 우리를 놔둘 생각이 없었기에 스스로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키고 싶다면 변해야만 했기에.."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차라리 이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편해지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더이상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뒷일이 두렵기에 그럴 수 없다. 그는 여전히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웃고있다. 그가 인생에서 첫 크루시오를 맞고 쓰러지던 날 보았던 백정처럼 순수하게 미소짓고 있으나 흐르는 눈물은 지금까지의 고난을 모두 담아 흐르고 떨어진다. 그가 입속말로 되내인다. "MA여. 당신이 원하던 것은 이것보다 더한 광기입니까." 하고는 한 걸음씩 앞으로 걷는다. 그리하다면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하며. 그는 계속 변할 것이다. 더한 광기를 바란다면 천천히 그 뜻을 이루겠으나 세상이 미쳤을 때 정상으로 남는 것도 진정 광기다. 혜향 교수의 바로 앞에 서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차마 교수님께서 목표로 하시었던, 평범한 삶을 살 학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못난 제자로 남겠으나 제 밑에 있을 자를 못난 제자로 만들진 아니할 터이니 이제 편히 쉬십시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당신을 어르고 달래며 나직히 눈 감는다. "발렌타인 말고. 부디 샬럿이라 불러줘." 하며 그 누구에게도 허락치 않은 미들네임을 알려주며.
우린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살아있으며, 제법 인간을 좋아한다 생각한다.
버니가 등에 타고 자기 털과 가죽을 꽉 쥔 것을 확인한 레오는 달리기 전 고개를 돌려 잠시간 눈을 마주쳤다. 꽉 잡으란 뜻이었다. 그리고나서, 레오는 달렸다. 숲 속을 이리저리 달렸다. '속도'라는 것에는 익숙하다. 퀴디치를 할 때도 빗자루를 쥐고 누구보다 빨리 날았었다. 게다가 이런 짐승의 몸이라면 반응속도는 더더욱 올라가서 빠르게 달려도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달리고 점프하고를 반복하던 레오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게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더욱 속도를 내었다. 인간의 몸으로 달렸다면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렸어도 숨이 찼겠지만 이 짐승의 몸은 코로만 숨을 쉬어도 숨이 차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몸으로 걷는것과 비슷했다고 해야할까.
멈춰보라는 말에 레오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몸을 낮춰 내리기 편하게 해주고 잠시 주변을 서성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어슬렁거리며 적당히 숨을 곳을 찾아 모습을 바꿨다.
" 아까 왜 숨냐고 물어봤지? 그게.. 조금 부끄럽거든. 동물로 변하는거나, 다시 돌아오는거나 마법처럼 한 순간에 얍! 하고 바뀌는게 아니라 변하는 과정이 눈에 보이는데 그게.. 보기 좋지가 않아. 그래서 그래. "
레오는 기지개를 켜곤 총총거리며 버니의 옆자리를 차지하곤 걷는 속도를 맞춰걸었다. 분명한 자신의 적들과 이렇게 쏘다녀도 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레오는 '나는 학교의 교수들에 대한 신뢰를 전부 잃었다'고 답할것이다. 그 위선자는 여전히 학교에 있고 이렇다할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인지부조화는 자기혐오를 부르고 그에 대한 방어기제는 편집증과 과대망상 그리고 피해망상이었다. 어쩌면 백혜향교수는 우리 모두를 속이는게 아닐까, 어쩌면 학교의 모든 사람들은 모르는 척을 할 뿐 전부 알고있는게 아닐까, 어쩌면 교수들은 전부 한 패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전부 한 패라서 모든 진실을 아는 레오의 목을 노리고 있진 않을까
" .... "
레오는 걷다말고 잠깐 멈춰섰다. 그런 편집증과 과대망상, 피해망상을 거치고 나면 어쨌든 나는 죄가 없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옳다.고 판단이 내려져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무조건 자신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겠다는 사람이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 길이 가시밭길이고 달콤할 뿐인 독약이라 하더라도. 레오는 이히히, 하고 웃으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찬바람이 분다 싶더니, 이제는 백궁보다 바깥이 더 추워지는 계절이 왔다. 새 학기를 시작한게 엊그제 같건만 벌써 해의 마무리를 할 시기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기라는 걸 보여주듯 원내는 어딜 가나 소란스러웠다. 하급생들은 하급생들대로, 상급생들은 상급생들대로, 그리고 졸업생들도.
"......"
그녀는 원내의 소란을 피하듯 백궁의 별궁에 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시끄럽진 않을테니 말이다. 낙낙한 넓이의 담요로 몸을 폭 두르고, 별궁 마루에 걸터앉아 멍하니 지면 어딘가를 응시하기를 꽤 한참이었지만 그 자리에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겨우 조금 움직이나 싶으면 앉은 자세를 바꾸거나 담요를 고쳐 덮는게 전부였다.
"...어떡할까.."
한참만에 작은 중얼거림을 한번 흘린 그녀는 이내 늘어뜨린 다리도 끌어올려 담요 속으로 쏙 감추었다. 이제 완전히 담요로 둥글게 몸을 말고서 그대로 잠이라도 자려는 듯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평소라면 인기척 만으로도 금방 눈을 떴을 그녀였지만, 오늘은 윤이 다가와 담요 위에 손을 댈 때까지 눈치채지 못 했다. 그 때문인가. 윤이 손을 대었을 때 희미하게 움찔했다. 그걸 신호로 깬 그녀는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 누가 손을 대었는지를 생각했다. 뭐, 목소리를 들었으니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지만.
"......"
소리없이 담요가 움직여 눈가만 빼꼼 내놓는다. 옅은 잠기운이 묻어나는 금안이 느릿느릿 깜빡이며 윤을 보았다. 그저 확인만 하려 했다는 듯 담요가 다시 올라가 동그란 모양을 유지한다. 그래도 다시 잠들지는 않을건지, 그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선배가 저 혼자 둬서 안 괜찮아요."
내용으로만 보면 심통이 난 것도 같고, 불만스러운 것도 같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진짜 그런지는 보이질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그녀는 쉽게 나가지 않을거라는 것처럼 담요를 더 꽁꽁 둘렀다. 안쪽으로 잡아당겨진 테두리를 꼬옥 잡고 있는 것이 고집스럽기도 하다. 그래봤자 얄팍한 담요 한겹이니 힘으로 걷어내면 그만일텐데.
"여긴 뭐하러 왔어요."
뜻 모를 고집 속에서 그녀의 말이 다시 툭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말만 보자면 마치 윤이 여기 온게 그녀에게 방해였다는 듯한 말투였다.
다시 잠든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담요 밖으로 어렴풋이 윤의 움직임이 볼 수 있었다.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거라던가 뭔가를 치우는 손짓이라던가. 말없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가며 그의 실루엣을 따라가고 담요 때문에 멀게 느껴지는 말들이나마 놓치지 않고 들었다. 어르고 달래주는 말들을 다 들었으니, 이 이상 고집을 부릴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한번이라고 했으니까 진짜 한번만 안아주고 가면, 저 다신 선배 안 볼 거에요."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 담요를 슬금 내리면서 한 말은 그랬다. 기분은 풀렸지만 순순히 풀린 모습은 보여주기 싫은건지, 어쩐건지. 다시금 앉은 자세가 된 그녀는 담요를 내려 어깨에 걸쳤다. 누웠다 일어났다 하고 담요에 쓸린 머리가 엉망이었지만 대충 손으로 슥슥 넘기더니 윤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팔을 잡아 제 옆에 올 때까지 당기곤, 여기다 싶은 곳까지 오면 그제사 품에 안기려 들었겠지.
안겨드는 그녀의 몸은 며칠 사이 마른 느낌이 들었을거다. 원래도 군살이 없어 선이 가는 몸이었는데, 지금은 약간 앙상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그야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을 겪었으니. 그래서인지 윤을 잡는 손이나 기대오는 몸에 그다지 힘이 있는거 같지 않다. 툭 밀치면 쓰러질 것 같은, 인형 같았을지도.
"이번엔 또 뭘 하려고 편지가 그렇게 많이 왔으려나요."
나른한 건지 힘이 없는건지 모를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번엔 또 뭘, 이라는 말에서 조금은 지긋지긋함이 느껴졌을지도 모르고. 담요를 걷어 얼굴을 드러낸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릿하게 가라앉은 금빛 눈이 윤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모든 일이 끝났다. 적어도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곧 졸업이 다가오기 때문이고, 그가 재학하며 급작스레 생겨버린 목표를 모두 이루었기 때문이다. 평화가 다가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이제 보는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일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대신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매구를 직접 막지 않고, 간접적으로 막아낼 것이다. 적어도 이제 매구의 일에 손을 떼는 이상, 그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을지도 두렵다. 졸업식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작은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죽음을 봤다. 그리고 원내에서 기어이 사람을 죽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입었던 정신의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이렇게 또 쌓여버렸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기어이 터진게 분명하다. 눈을 감으면 짐승이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고 눈을 뜨면 각시의 마지막 표정이 눈에 아른거렸다. 짐승이 뼈를 씹는 소리는 눈을 감아도, 떠도 계속 들렸다. 정전에서 먹는 식사는 각시의 살점 같아 한술 뜨고 토했다. 깃펜은 그 날카롭던 손가락 같아 필기를 하다 말고 집어 던졌다. 검게 칠된 지팡이는 아무리 닦아도 피가 묻어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지팡이의 날카로운 부분에 손수건이 찢어져 손바닥까지 헤져 그의 피만 묻어있다. 원래부터 깔끔했던 지팡이기 때문이다. 그는 피가 나는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덮어 가렸다. 어머니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지금 휴가를 내고 아편 중독 치료를 받고 계신다. 단명의 원인도, 두통의 원인도 모두 몸이 약한 가문의 직계가 먹던 진통제기 때문이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약재에 아편이 들어있을 줄 아무도 몰랐으리라. 그와 어머니의 생명을 앗아가는 원인은 생각보다 근처에 있었다. 원인을 알게 된 이상 그는 더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다. 허약하기는 그지 없어도 적어도 죽지는 않으리라. 다만 그만큼 힘들어하고 계실 어머니께 무슨 편지를 보내냔 말이다.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앞선 그의 상황이다. 그는 나름 잘 살고 있다.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듯이 발악한 결과다. 이후 현재. 시끄러울 만큼 뼈 씹는 소리 가득한 머리 속에서 누군가 말했던게 떠오른다. 미친 세상에서 정상으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미친 것이라고. 그는 이 상황을 인내해야 함을 안다. 언젠가 치료될 수는 없어도 무뎌질 수 있음을 안다. 그가 걷기로 한 길이 어둠의 마법사 양성을 막아내는 것으로 굳혀진 이상. 그럼에도 그는 잠깐 무너졌다. 어젯밤엔 잠 설치고 샌지 나흘 지났기에 특단의 조치로 몸을 정결하게 하고 살아있는 죽음의 약을 한방울 적신 장미 꽃잎 하나를 입에 넣었다. 초콜릿으로 이루어진 꽃잎을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시간 지나 이제 막 부스스 일어난 시점이다. 깬지 이제 막 2분 남짓 되었나. 그는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부스스한 모습으로 욕실에 비척거리며 들어간다. 달링이 따라 들어간다. 몇분 지나지 않아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나온다. 달링이 혹여 이 주인 쓰러질까 부리로 조심스럽게 깨물며 앞길을 알려준다. 그는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아 괜히 팔을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당신을 작게 부른다.
"아가..우리 아가 어딨을까."
하고는 또 꾸벅 하고 존다. 입이든 얼굴이든 세안하고 양치하여 물이 닿았으면 당연히 눈이 떠지고 머리가 도는게 정상인데 이것이 약기운인지, 잠기운인지 모르겠다. 그는 또 다시 선 채로 꾸벅 존다. 제법 우스운 장면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이전에 비하면 말랐다는 걸. 그럼에도 그녀는 윤의 손길을 거부하거나 내치지 않고, 조금 더 품 안 깊숙히 안기려 했다. 힘없는 손이 몇번인가 그의 옷을 쥐었다 놓쳤지만, 아주 놓지는 않았다. 끝자락이나마 쥐고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을거다.
편지에 대해 물으니 윤은 선뜻 얘기해주었다. 남은 탈들이 보낸 것과 제갈 가의 편지들,이라. 애원하는 내용을 들으니 그들 역시 어느 정도로 맹목적이며 맹신했는지 알 만 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레 느껴졌다고 할까. 할미탈이 보냈다는 붉은 하울러를 그녀도 힐끔 보았다. 내용이 궁금하지만 열어보는 건 무리겠지. 하울러니까.
"졸업...하긴 하는군요."
윤에게서 졸업이란 단어를 들으니 애써 피해오던 현실이 눈앞에 재차 드리운다. 졸업하면 좋든 싫든 지금의 6학년들은 학원을 떠나야 한다. 제갈 윤도, 발렌타인도. 그녀는 윤의 쓰다듬을 받으며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과연 그 없는 학원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까.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생각해보고, 고개를 들어 윤과 마주본다. 그리고 꺼낸 말은 생각과는 다른 말이었다.
"그래서, 하려고 했던 건 다 한 거에요?"
그녀의 곁으로 내려가주겠노라 말은 했어도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들은게 없었으니. 일단은 그것부터 알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쯤 기분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흘동안 잠 한번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방울 적셔먹은 약이 그렇게 독한 건지. 그는 여전히 꿈과 현실의 경계를 해맸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산더미일 때 당신이 그를 붙잡는다. 단단히 붙잡자 팔을 느릿하게 뻗어 당신의 품에 안기려 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짧게 까치발을 들어 어깨에 턱을 기대는 것도 덤으로. 그가 눌린 목소리로 나직히 웃었다. 샬럿 소리를 들으면 늘 난 양파가 아니야! 하고 외치던 어린 날의 자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정말 싫은 별명인데도 당신이 양파란 말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으응, 여기 있지. 잠들면 안 되는데."
그는 제법 나긋하게 종알거린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려 본 시야가 마냥 밝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그는 잠이 늘었냔 말에 다시 감기려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인다. 천천히 돌아오려는 이성은 아직도 저 멀리 출발선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 같다. 온기를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지금은 마냥 편안하다. 그가 대답을 하던 순간은 잠깐의 침묵 뒤다. 그 와중에 또 졸아버린 게 분명하다.
"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다시 줄여야 하는데."
당신에게 약을 먹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살아있는 죽음의 약에 대해 일절 함구하기로 했다. 가벼운 머리 사이로 시원한 공기가 스며든다. 그는 당신에게 물었다. "우리 아가는 푹 잤을까. 내가 먼저 잠들어 서운하진 않았더니." 하고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 떼며 턱을 떼 당신을 마주보려 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머리가 몇가닥 부스스 떠있고, 눈에 잠이 꽉 찼지만 점점 그마저도 거둬지고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다.
"요즘 서운한 일이 많았지 않나." 하고 말하는 것이, 그간 쌓인 일로 당신이 또 토라졌을까 하고 내심 콕 찌르는 것에 가깝다. 가령 그가 세라피나 영애의 브로치를 차고 다른 학교 학생을 대놓고 환대하는 일이라든지, 달링을 위해 하루를 통으로 써버린 일이라든지, 어머니의 생떼(?)에 또 꾸며놓고 나간 일이라든지..어어 이거 완전 개새ㄲ…….
펠리체에게 물은 윤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습니다. 곧이어, 자신에게 향한 질문을 대답하려는 건지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 거의 다 했어. 그만큼 손실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니..... 말했잖니, 네 곁으로 가겠다고.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파괴를 하는 것 뿐이라고. '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 눈으로만 보이는 것일지는 몰라도 위험 요소인 탈이 여럿이나 돌아다니는 것 보다, 아즈카반에 수용한다는 게 가장 안심되기 좋겠지. 그들의 주인인 매구도 아즈카반에서 디멘터 키스를 받았으니까. 나는 처분할 것들만 다 처분하면 되는 거란다. 이제 남은 건 백정탈, 중탈, 할미탈.. 제갈 가문... 인데, 이것들을 어떻게 한 번에 털어낼 지 조금 고민이란다. 초랭이는 지금 현재 위치에서 조금 더 일을 해야하니까.'
어깨를 으쓱인 그는 제갈 가문 가주가 보내 온 서신을 읽곤 그것을 한 손으로 구겨버렸습니다. 역시, 불쏘시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 뭐, 일단.. 싸우는 걸 좋아하는 성미들도 아니니 얌전히 넘어가야겠지. 나도 너에게 미움 받는 건 원치 않거든. '
윤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듯 가늘게 눈커풀을 내렸다. 희미한 틈새로 보이는 건 여전히 흐린, 어쩌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금빛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곤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녀는 그의 졸업이 서운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단순히 졸업만 놓고 보면 그녀도 언젠가 해야 할 과정이었으니까.
그 눈으로 윤을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들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역시 다 끝난 건 아니구나, 였다. 거의 다 라는 건 어쨌거나 남긴 남았다는 의미다. 무엇이 남았을까. 남은 탈들과 제갈 가의 처분이 그것인걸까. 처분, 처분이라.
"처분한다는 건, 이제 쓸모는 없어졌다는거죠? 그럼 제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처분을 고민하는 지금이라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부터 생각했던 걸 꺼낼 때일지도 모르지. 그녀는 부탁을 말하기에 앞서 그의 손을 찾아 꼬옥 쥐었다. 쥐었다 놓고 다시 쥐기를 반복하고나서야 그 부탁이란 걸 입에 담았다.
"백정탈과 중탈, 할미탈은 그냥 해방시켜줬으면 해요. 선배가 내려와 제 곁으로 오려고 하듯, 그들에게도 이만 자유를 줬으면 하는게 제 부탁이에요."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부탁이었다. 들어줄지 말지는 윤의 기분에 달린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그녀는 보채거나 강요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그의 손을 당겨 손등에 볼을 부비고 그대로 댄 채 살짝 올려뜬 눈으로 윤을 보았다. 이러면 말만 안 했지 해달라고 채근하는거나 마찬가지이지 않나 싶지만, 시침 뚝 떼고 윤을 응시하는 모습이 퍽 잔망스러웠을지도.
할미탈이 팔 하나를 잃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기에 놀람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그 날 할미탈은 오지 않았던 걸로 안다. 그러면 그 전에, 잠든 학생들을 찾으러 갈 때 일이 있었던건가. 대체 누가, 무슨 일이. 동시에 시끄럽게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눌러 가라앉힌다. 그것들을 모두 내색하지 않고, 윤의 대답을 들었다.
"제가 아무리 영특한들 선배만 할까요. 매구님 명성엔 못 따라가죠."
그녀의 부탁대로 그들을 놓아주겠다는 윤을 보고 그제야 옅게 미소를 짓는다. 그 셋만 풀려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간만에 듣는 부네의 이름에 부네도 남아있었구나, 하고 생각만 한다. 생각은 거기까지 하고, 고개를 들어 그에게 입맞춤을 하려 했을 것이다. 일부러 입술을 피해 볼에 한번, 목덜미에 한번.
그게 부탁이냐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머뭇거렸다. 뭔가 고민하듯 말이다. 잡은 손을 조물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슬금 몸을 움직여 윤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으려 했다. 윤을 마주보고 앉아 한결 편하게, 무방비하게 그에게 기대어 중얼거렸다.
"다른게 있긴 한데, 그건 조금 이따 얘기할래요."
그건 부탁이라기보다 강요에 가까울테니까. 그녀는 천천히 얘기하자며 기댄 채로 볼을 살살 부비며 작게 목 굴리는 소리를 흘렸다. 두 팔은 그를 끌어안고, 두 손은 매달리듯 그를 붙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기분이다. 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떤 기분도 감정도 들지 않았는데. 윤으로 인해 흔들리고, 바뀌어가는 저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아, 이제 혼자로는 돌아갈 수 없겠구나.
"음, 있죠. 선배. 졸업하고 나가면 뭐 할 거에요?"
얼마간 말없이 어리광을 부리던 그녀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불안의 기색이나 떨림 없이, 담담하게 묻고 고개를 갸웃-했을거다.
졸았다. 신빙성 없는 말이었다. 당신의 어깨에 기대 졸 날이 올거라 누가 알았을까? 그는 현실의 경계에 이성을 반걸음 걸친다. 눈을 느릿하게 한번 깜빡인다. 감는 시간이 더 많은 눈이 천천히 다시 세상을 마주한다. 이후에는 온전히 눈을 뜨고 있기에, 세상만 보면 당신이 서운해할까 싶어 눈을 마주친다. 긴 속눈썹 밑에 드리운 금빛 눈동자, 그 안의 세로로 죽 찢어진 동공을 마주하며 그가 입술 끝을 미미하게 올린다. 이 탐스러운 눈동자가 언제고 자신을 향하면 좋겠거니 싶다. 아무리 이성을 현실에 두어도 반절은 몽중에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앞으론 따뜻하게 네 곁에서 잘 테니 걱정일랑 말거라. 헌데 그리도 서러웠나?"
고분고분 대답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운지 그가 목가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양 뺨에 손을 얹으려 했다. 이후 엄지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 닦아주려 했다.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엄지를 움직여 눈물 닦아주는 그 사소한 행동도 소름이 끼치고 싫었는데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운다.
"세라피나 영애는 업무 때문에 그렇단다. 네가 원한다면 내 만나는 횟수를 줄ㅇ……."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잠이 모조리 달아난다. 몽중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있지만 노려보기는 또 처음이며, 이리도 소유감을 드러내는 발언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아가." 하며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만족스러운지 눈을 접어 웃는다. 가장 바라던 말을 들었다.
저는 늘 편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본인을 너무 낮추시지도... 그리고 너무 무리하지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편지를 매번 써주시는 것과 스레에서 노시는 모든 분들을 봤을 때, 한 분이라도 빠진다고 편해지지 않는 걸요. 저도 힘든 상황에서 저와 관계된 수 많은 사람들을 끊어본 적 있어서 무어라 깊게 말씀 드리기는 못하지만, 조금 더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편지 보내주시는 분을 포함해서 저는 이 스레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어요:) 그러니, 불상사라고 말해주지 말아주세요. 편지 보내주시는 분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요:)!!!
그럴 계획은 없다, 라고 윤은 말했다. 그 말이 가늘게나마 피어오르던 불안을 조용히 덮어 사라지게 만든다. 이제 같은 불안이 불씨를 틔울 일은 없으리라. 비로소 안심한 그녀는 제게 파고드는 그를 제 담요로 감싸며 끌어안았다. 담요 속에서 톡-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셔츠 단추 하나가 풀렸으니, 그가 얼굴을 파묻는데 방해가 될 것은 없었을 거다.
"선배가 도술을 얻을 수 없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일부러인지, 다행이라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없이 얄밉다. 돌아보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보일테니 일부러구나 하는 걸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쿡쿡. 작게 웃은 그녀가 손끝으로 윤의 등 언저리를 간질간질하게 쓸며 속삭인다.
"제가 그러고 싶다고 하면, 딱히 반대하지는 않을거에요. 한명은 정색할지도 모르지만. 음, 내가 그러겠다는데 어쩔거야.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막내인 걸."
일전에 보낸 편지에 연상의 연인이 생겼다고 했을 때도 잔소리 없이 나중에 집에나 한번 데려오라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 전에 사고치지 말고, 라고 붙어있긴 했지만. 그녀의 부모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잔소리도 아니고, 대뜸 데려가서 같이 살거라고 해도 그러라고 말하고 그 날 저녁에 한사람 몫을 더 놓을 사람들이었다. 그런 부모였기에 그녀가 이렇게 자란 걸지도.
그녀는 혼을 쏙 빼낸다는 그의 말에 다시금 작게 웃었다. 사실 그녀는 윤이 내는 소리가 정말 좋았다.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것도, 목을 울려 내는 소리도, 그것들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그의 욕망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늘 흐리멍텅한 안개 같은 사람이 저로 인해서 명확한 감정을 드러낸다는게 오싹하리만치 좋아서, 그래서 재차 귓가에 읊조렸다.
"에이, 이 정도로 혼이 빠지면 어떡해요. 가벼운 장난일 뿐인데."
가벼운 장난이라 말하며 가는 숨결을 불어넣는다. 애써 참고 있는 그를 부추기듯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입술로 가볍게 살결을 스치며 목덜미까지 고개를 내려, 굳이 옷깃 사이에 파고들어 목덜미 부근을 장난스럽게 물었다 놓으려 한다. 막지 않는다면 아프지 않게 물었을테지. 그리고 그의 어깨에 툭 기대 작게 중얼거렸을거고.
"저, 올해로 학원 그만두고 집에서 지낼거에요. 더는 배우고 싶은 것도 없고, 선배 없는 학원은 더 싫고... 그리고 선배만 내보냈다가 딴데 눈길 줄 지도 모르니까, 옆에서 감시할거에요. 목줄도 잡고 당기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있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들어 윤의 목을 감싼다.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이윽고 조르기라도 할 듯 두 손으로 붙잡는 손길이 진득하기도 하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스륵 풀어 다시 그를 끌어안고선 아이 같은 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였다.
그는 이 변화를 받아들인다. 당신이 어느덧 서럽다는 감정을 배웠다. 천천히 인내하다 보면 긍정적인 이 변화는 계속 될 것이다.
"그래, 이게 서러운 것이야. 서러웠구나."
그리 대답하며 당신을 보듬는다. 이렇게 천천히, 하나하나. 서로 알아가며 당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게 하고 싶다. 응당히 받았어야 할 것을. 그는 당신의 눈을 마주하려 하며 느릿하게 입매를 휘어 올린다.
"네가 그리도 말한다면 앞으로는 가문원을 시켜 용건을 전달해야겠구나."
그리고 당신의 뺨을 엄지로 다시 쓸어내린다. 고개를 기울이자 손목도 비스듬히 꺾인다. 당신의 논리가 어떻게 되었든 그가 이길 일은 없다. 당신을 주웠기에 그의 것이고, 그의 사람이기에 당신의 것이다. 그는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에 졌다는 양 몸을 살풋 기울여 짧게 이마에 입을 맞춰주려 했다. 거절하지 않는다면 콧대, 그 다음으로 볼, 기어이 입술에 짧게.
"네 것이다. 모두 너의 것이야. 그러니 아파하지 말아."
그리고 당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 자신을 모두 주었는데 당신도 그에게 온전히 주었으면 하기에. 그가 나직히 묻는다. "아가. 만일 네게 백정이라는 자리를 포기하라 한다면 넌 어찌 할 것이더니." 하며.
자신이 변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거울앞에 서서 변신해본 적이 있었다. 거짓말로라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 기억난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몸이 변하는 모습은 만들다 실패한 어떤 조각상의 모습이었으니까. 마구 뭉쳐놓은 기괴한 살덩이를 보는 느낌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라는 말로 일축한 레오는 눈에 안 띄는 그 자리로 따라서 걸어들어갔다. 남들에게 들켜서 좋을게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라는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어간 레오는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 뭐든지라~ 오, 돈 많구나? 그래그래. 그러면.. "
레오는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마셔본 것들. 당연히, 좋아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레오는 잠시 메뉴판을 보다가 내려놓고 눈을 돌려 버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면 뭐가 나오기라도 할 것 처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색한 정적이 참지못하게 될만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마는 것이었다.
" ...그러면, 술로할래. 술 마셔보고싶어. "
농담으로 그것이 용기의 물약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판단력이 흐려지면 두려운 것이 없어지고 마치 그것이 용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그야말로 객기의 집합체지만 이거나 그거나 똑같은게 아닐까. 잊고싶은 것이 있어서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도 들어봤고 하고싶지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때도 술을 마신다 들었다. 레오가 술을 원한다고 했던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 너라면 가능할테니까. 그걸로 부탁할게. "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레오는 이히히, 하고 웃었다. 술을 원한다고 굳이 말한 이유는 하고싶은 말이 있지만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스치는 손길을 따라 번지듯 미소가 떠오른다. 곱게 휜 눈과 호선을 그린 입술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내보인다. 진심으로, 그가 도술을 얻지 못 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머- 무서워라- 뭘 하려고 그러나아."
이제 놓치지 않을, 놓아주지 않을 그를 안고서 그녀도 키득거렸다. 굳었다 풀리는 그의 등을 길게 쓸어내려주고, 그녀의 자퇴를 기꺼이 그러라고 해주는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애초부터 마법부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녀의 인생은 그만 있으면 되었다. 무얼 하든 그와 함께라면.
"흐응. 나 파셀텅은 못 알아듣는데."
뱀을 닮은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본다. 알아듣지 못 해도 어쩐지 의미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손을 움직여 천천히 옷 위를 쓸며 그의 목까지 들어올렸다. 손끝으로 그의 턱선을 따라 어루만지고 그대로 목줄로 옮겨가, 가운데 달린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 살짝 당긴다. 투욱, 하고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시선을 맞추고서, 곧 겹쳐질 듯 가까운 입술로 소곤소곤 한다.
"있지, 내 사랑. 우리 졸업 전에 추억 하나 만들지 않을래요? 여기 말구, 방에 가서."
단 둘이서만. 이라며 발칙한 말을 해놓고 후후... 웃는다. 과연 그녀의 제안에 그가 따라주었을까. 대답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웃으며 덧붙인 말에 같은 마음이라는 건 어쩐지 알 것 같기도.
참 팔자 좋은 말이다. 레오는 그냥, 이라는 한 마디로 일축하고 이히히 하고 웃을 뿐이었다. 술을 마셔본 적이 없냐고 묻는다면 없는건 아니다. 부모님이 있는 자리에서 몰래 홀짝여본다던가 하는 것으로 맛은 봤었으니까. 취하면 훅 간다는건 맘에드네. 레오는 '응.' 하고 답하며 가마닣 술잔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일이겠지. 레오는 좋아! 간다! 하고 기합을 넣는가 싶더니 그대로 한 잔을 쭉 들이켰다.
" 윽.. 으으으윽.... 포도맛이 나기는.. 하는데.. 으윽.. 상한 포도주스맛.. "
목이 화끈거려, 라는 말과함께 레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안주는 이런 때를 위해서 있는거였나. 레오는 안주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곤 잠시간 우물거렸다. 아무 말 없이 또 한 잔을 한 번에 넘기고 다시 고통스러운 시간. 안주 하나를 삼키고, 또 다시 한 잔을 들이켠다. 이렇게 마시면 취할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있다. 취하고 난 다음에 뭐가 오는지, 그게 궁금하기도 했고 그 힘이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 .... "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금새 취해버렸다. 레오는 눈이 조금 풀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술기운에 볼이 빨갛게 상기됐고 이따금씩 작게 딸국질을 하기도 했다. 그리곤 뭐가 우스운지 버니를 보고 손가락질을 한 번 하곤 파하하! 하고 웃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나면 또 다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감정의 기복이 엄청나게 심해졌다.
" 취했나. 이게 취한거야? 아하하! 내가 취했대! 이게 취한건가봐! 아하하하! "
엄청난 감정의 기복.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가 어지럽다. 세상이 빙글빙글도는 느낌에 말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구마구 나오는 느낌. 레오는 뭔가 더 하고싶은 말이 있는지 '잠깐잠깐' 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며 다시 한 잔을 넘겼다. 크으으으... 하고 고개를 푹 숙인 레오는 순간 휙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이 여과없이 소유욕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곁에 있을 시간이 적을 지, 아니면 많을 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나 적어도 같이 있을 그 기간동안 당신을 그 빛무리 가득한 곳으로 올리고싶다. 눈을 감자 내리깔린 속눈썹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 없어 눈꺼풀에 입을 맞추려다 겨우내 참아낸다. 혹여나 당신이 부서질까 조심스러운 태도다.
어쩔줄 몰라하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 것은 당신의 질문 때문이다. 드디어 제 주장 펼칠 줄 알기에. 그는 한걸음 다가온다. 조금 더 가까이, 목가를 가볍게 끌어안으려 하며. 이윽고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본 그가 입술을 달싹인다. "물론." 하고는 입을 맞춰오자 눈을 내리감는다. 잠에서 깨 이성이 모두 차지하고 있기에 잠드는 불상사는 없다. 짧은 입맞춤 사이에서 그의 목가는 가르랑 하는 소리 한번 낸다. 낮은 울림을 뒤로 짧은 숨 내쉬며 만족스레 웃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등을 말없이 쓸었을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듯 침묵하며 눈을 굴리는 모습을 가만히 담는다. 더없이 혼란스러울 말일 테다. 일생을 백정으로 살아온 당신을 활자 너머로 알고 있다. 본 것과 겪은 것은 다르기에 쉬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천천히, 당신에게 앉으라 종용한다. 뒤돌아 침대 가장자리에 앉힌다면 팔을 뻗어 당신을 안았을 것이다. 꽉 달라붙어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하렴, 아가. 혹 네가 선택한다면 죄를 씻지 못한다 하여도 좋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 허락하도록 만들어주마."
이미 한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봤으며, 허무와 대화도 하였다. 두번이라 못할까. 영혼인들 바치지 못할까. 그는 당신에게 속삭인다. 숨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아가, 이미 나와 살아가고 있지 않더니. 새로운 삶을 배우자꾸나. 그러니 부디 마노야. 나와 같이 일생을 살아가주지 않으련. 너를 절애하기에 네가 없는 삶을 감히 상상하기 어려워.."
하는 말을 듣는 것인지 듣지 않는 것인지, 레오는 그저 신이 난 것처럼 웃다가 천천히 웃음을 잃었고 목소리도 점차 작아지며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푸- 하고 술냄새가 가득 배어있는 숨을 쉰 레오는 그래? 하고 건성으로 답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은 신기했다. 감정의 통제를 사라지게 만들고 하고 싶은 말이던, 그렇지 않았던 말이던 전부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가지고 있는 감정을 증폭시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 ...하지만 너는 지금도 네 주인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잖아. 그 사람이 먼저인거잖아. "
이 말이 신경을 거슬리게 할 것은 알고있다. 싫어할만한 말이라는 것 또한 알고있다. 그래서 뭐, 레오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잔에 와인을 가득 따르고 더운 날 물을 마시듯 마구 들이켰다. 크하아~ 하고 숨을 쉬곤 입을 닦았다. 눈이 잔뜩 풀리고 얼굴이 빨개진 레오는 가만히 버니를 바라만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그래! 맘에 안든다고! 너! 맘에 안들어! 정작 널 위해서 구른건 난데! 네 그 주인님보다 널 더 생각하는건 난데! 네 주인님이 널 위해서 목숨을 걸었을까? 난 걸었거든! 학교생활이 끝나는 정도가 아니야! 이대로 아즈카반에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고! 알기나해? "
조금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인 레오는 속에 있는 것을 전부 토해냈다는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 말이 어떻게 작용할지, 기분을 어떻게 만들지는 잘 알고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이 들어갔으니 그 힘을 빌려서 하고싶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가만히 노려보던 레오는 쓰러지듯이 털썩 하고 다시 자리에 앉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곤 들리지 않을 모기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감정이 터지는 느낌. 제어가 되지 않는 느낌.
" ...무섭다고. 나도 무서웠다고. 나는 아직도 그 때 그 날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짐승에게 죽은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비를 지날때면 가끔씩 거기 내 이름이 적혀있는걸봐. 학교의 모든 사람이 한 통속이라는 생각도 들어. 진실을 아는 것은 나 뿐이니까 그 사람들이 전부 손을 잡고 내 목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 그 뿐이게? 갑자기 오러들이 내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선 너는 탈과 어울렸고 용서받지 못할 저주를 썼다면서 날 체포하는 꿈을 꾼 적도 있어. "
몸이 옅게 떨렸다. 그만큼 무서웠다. 더 이상 사람들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못했다. 좋아하는데, 정말 좋아하는데 함께 있을 수 조차 없고 만난다는 사실 조차 범죄가 될 수도 있다. 레오는 에이씨, 하고 다시 술을 들이키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망울이 촉촉해졌고 눈에 난 길고 긴 흉터를 따라서 눈물이 흘렀다.
" 그런데!!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나는 매일매일 무서워서 죽을 것 같은데!! 누가 알아줘! 누구한테 말해! 나 무섭다고, 나는 아직도 그 때 그 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누구한테 말해! "
술에 잔뜩 취하면 주정을 부리고 그 모습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있다. 알고있지만, 그게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에야 알았다. 레오는 후- 후- 하고 거칠게 숨을 뱉으며 심호흡을 하는듯 하다가 금새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당신이 오만해지길 바란다. 오로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도 좋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오만함과 이기심을 받아줄 능력이 있다 자부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오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바란다면 그가 이루어주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니 당신이 지금처럼 의견을 더욱 내주길 바랄 뿐이다. 그는 고양이 같단 언급에 과연 그럴까 싶은 눈치다. 생각해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제 사람임을 은근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알고 있단다."
당신의 시선을 따라 내려간 곳엔 백정탈이 있다. 당신의 일생을 함께하던 것이다. 한순간의 비극으로 백정이란 이름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날을 그는 알고있다. 백정을 놓는다는게 무슨 의미인지도 안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는다. 무릎 꿇은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눈물을 흘리며 올려다보는 시선이 마음을 요동케 했으나 그는 인내한다. 그리고 짧게 입술을 뗀다.
"내 언제고 허락할 것이다. 네 주인도 필히 받아줄 것이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그가 시선을 같이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의 미소는 눈에서 시작되어 입가로 퍼져나가고, 더이상 예민하지 않다. 당신에게만 오로지 온화한 미소를 보인다. 숫제 한 사람을 위해 지금껏 준비해온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아무도 죽지 않는 삶이지. 죽이지 않아도 되는 삶. 아가, 마노야. 나는 누군가를 대하는 것에 서투르나 교수가 될 생각이란다. 나 또한 배울 것이 아직 많지. 네가 없으면 온전치 않으니 나와 함께 해주렴. 나와 같이 모르는 것을 배워가지 않으련."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잡아주려 한다. 어느 날 그가 앙상한 손으로 반지를 끼워주었던 날과는 달리, 이번엔 배려있고 상냥한 손길로. 온정어린 손길이 손등을 토닥이며 눈가를 천천히 휘어간다.
"네가 백정이 아니라 마노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길 바라. 나와 함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떠한지, 네가 응당 받아야 할 온정은 무엇인지, 감정이란 무엇인지, 내가 너를 얼마나 절애하는지..모두 알았으면 좋겠고 배워가길 바랄 뿐이야."
모두 당신을 사랑하기에 그렇다. 당신이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고, 백정이 아니라도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조곤거린다. "부디 내 곁에 있어줘." 하고.
길고 긴 여정의 끝이다. 그는 어깨에 날아드는 달링을 쓸어주며 주변을 둘러본다. 분명 1학년이 되어 입학하던 날 언제 졸업하는지, 사람과 계속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이내 끔찍한 나날이라며 몸서리를 쳤던 걸로 기억한다. 타니아는 그에게 아직 5년이나 더 남았다며 장난을 쳤다. 그랬던 것이 5년 전이다.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6학년이 되었다. 타니아는 떠났고, 그는 사람과 계속 있고 싶은 마음에 교수직을 얻기 위해 준비중이다. 어둠의 마법사를 양성하는 과정을 막아내는 것은 교육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1학년의 자신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면 과연 믿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졸업식 당일 찾아올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 지도 의문이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일단 어머니는 아편 중독이 심해 치료중이다. 고통 때문에 올 수 있을지 의문이고, 그렇다고 캐서린은 그가 신나게 굴려먹을 것 같으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머리 새하얀 지팡이 세공가를 떠올린다. 눈 덮인 숲속에서 신비한 동물과 같이 사는 그의 괴팍한 벗 후부키 이로하다. 분명 그놈의 성격대로라면..
— 아빠!!!!
하며 어린 아이의 모습 취하여 달려올 것이 뻔하다. 이로하는 그가 각시를 죽이기 이전 지팡이를 날카롭게 세공할 적 언질도 없이 새벽 4시에 찾았던 것을 아직도 마음에 담기 때문이다. 오해라며 절하고 빌어야 하는 불상사는 피해야 한다.
그는 리 사감의 호출에 상념에서 벗어나고 자리를 뜨려 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알긴 어려우나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낡고 지쳤던 리 사감이 오늘따라 멀끔해보인다. 그나마 멀끔하다는 뜻이지 정상인은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 오늘은 백호님께서 굴리지 않으셨는지, 졸업하고 혹 이 학교로 교수 배정이 된다 했을 때 여전히 계시고 굴려지는 건 아닐지 안타까움 뿐이다.
그는 예행연습 언급에 이전 졸업식을 떠올린다. 그때 어땠더라. 선서 하는 학생, 마법을 준비하던 학생도 있었나? 잘 모르겠다. 졸업식은 관심있게 본 기억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쯤 유심히 볼 걸 그랬다. 그는 리 사감의 지친 목소리에 알겠다 대답하려다 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네가 아니고 내가?"
원내를 습격하도록 지시한 매구에게 선서를 넘긴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현재 제갈 윤이라는 사람으로 살지 않은가. 교내의 제갈 윤은 바른 성품으로 지금껏 타 학생을 통솔하였던 것과 더불어 평판으로 보듯 선서를 읊어도 되겠으나 그는 현궁의 사신이라 불리던 자다. 어린 학생은 선배의 말만 믿고 그가 무자비하게 점수를 깎으려 드는 것을 두려워 하고, 그의 동년배는 그 예민한 성격이 어떠한지 잘 안다. 그런 자신이 해도 괜찮겠냐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괜히 현궁의 사신놈 추천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하며.
어떻게 된 것이 졸업식에서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지. 현혹 되면 돌아올 수 없게 된다는 당신의 말을 들으며 스베타는 손에 들린 부적들을 살핀다. 시한폭탄을 손에 들고 있는듯한 불안을 느끼고, 이내 체념의 한숨을 내쉰다. 고개를 들어 저희를 바라보던 당신을 물끄레 보다가는 불만 없이 그저 알겠다는 뜻으로 가벼이 목례한다.
따라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당신이 저를 불러 세웠을까. 달리 시킬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듣다가, 본능적인 위험이라는 말에 MA님의 장난을 겪었을 때를 떠올린다.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스베타는 주머니 속에 든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속에 담긴 것이 '대역인형'이라는 당신의 설명에 휙 고개를 들며 당신을 올려다본다. 면담 때, 당신이 화를 피할 수 잇께 접어두라던 국화꽃을 아직 품에 지니고 있던가. 아니 기숙사에 두었던 것을 떠올린다. 늘 품에 지니고 다닐 것을 오늘은 왜 두고 온 것인지.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며 기린궁으로 향한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그는 시선을 따라 옮겨 어깨 위의 마노를 가만히 바라본다. 오늘도 그의 양 어깨는 두 조류로 가득 차있다. 둘다 균등하게 사랑하나 인간이기에 조금 더 정을 주는 존재다. 그는 윤의 관심을 경계하지 않는다. 아무리 매구라 해도 제 사람을 품게 된 이상 그가 두려워 할 이유도 없다. 대신 다른 의미로 매구를 공격하게 된 듯 싶다. 그는 제법 인간다워졌고, 교수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 무슨 뜻이겠는가.
"야생의 존재와 맹수를 패밀리어로 길들였으니 말입세.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까. 허나 패밀리어가 진정 패밀리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까? 들어보게, 같이 사회를 살아가며 사회성을 습득한 영특한 녀석들이지 않은가! 주인과 동물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를 적용하며 마법사는 교육을 통해 유년부터 그 중요성을 일깨운다면 더 효율적인 유대감과 정서적 안정을 가지겠지. 잠깐, 이건 맨드레이크를 비롯한 신비한 동식물에도 적용이 되나?"
혜향 교수가 신비한 동물에 집착하듯, 러빗 교수가 맨드레이크에 집착하듯. 그도 어딘가 돌아있다는 뜻이다. 이미 그의 머리에서 패밀리어와 마법사의 유대를 통한 정서적 안정에 대한 주제가 떠오르고 가설까지 몇가지 만들어둔 상태다. 그는 잠시 말이 과했는지 헛기침을 한다. 교수가 되면 학생에게 보일 광기의 일면이었다..
"어머니라..그래. 자네 뜻이 그렇다면."
아무리 싫다고 해도 어머니 언급에서 탈룰라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해야한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감 사감의 인간 사랑은 이길 수 없다. 그는 짐짓 단호했으나 납득이 가는 행위다.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와 비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는 양피지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6학년 학생을 대표해 이 자리에서..쓸 말을 떠올리는 것도 본인 몫이란 말인가? 끔찍하다.
"부탁하지. 그동안 골머리를 좀 앓아야겠군."
아무것도 없는 양피지를 노려보던 그는 윤을 마주본다. 제 사람은 왜 가리키나 싶더니만, 그가 천진한 웃음에 맞추듯 나긋하고 온화하게 운을 뗀다. "가능하지만.." 하고는 천천히 미소가 굳어간다. 더없이 부드럽게, 그 때문에 더 이질감이 들게끔.
"조금이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졸업식 때 피바람이 한번 더 불게 될 테니 유의하게. 이젠 피 보는것도 싫어하지 않은가."
이걸로 끝내면 그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아니다. 그가 한걸음 다가오며 입술을 달싹인다.
"자네 말고, 자네 연인이 말이야. 이번엔 혼나거나 토라지는 걸로 안 끝날 테지. 부디 조심하길 바라."
다분히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오가 취한 와중에도 그 정도 생각만큼은 맑게 지나갔다. 들려온 대답이 의외였는지 레오는 "화 안내?" 하고 조금은 바보처럼 물었는지도 모른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기운에 비틀비틀거리면서 걸어가던 레오는 그 앞자리에서 균형을 잃고 무너져버렸다. 넘어진 레오는 다시 비틀비틀 거리며 일어서서 언젠가부터 마음이 편해졌던 그 자리로 걸어갔다. 자리를 옮기고 이젠 습관처럼 허벅지를 배고 누운 레오는 어린 아이처럼 작게 훌쩍이며 슬며시 손을 잡아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며 자기 머리위에 잡은 손을 올려놓았다.
" 누구한테 말해. 누가 알아줘. "
결국 이 모든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언제 또 그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 신물이난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 이 상황도 신물이 나고 함께있으면 이렇게나 마음이 편하고 좋은데 함께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화가났다.
" 모르는거잖아. 꿈에 오러가 나와서 날 잡아가는게 꿈이 아닌 날이 올수도 있잖아. 네 주인님이 나는 필요없으니 그냥 두라고하면 넌 나를 그냥 둘거잖아. "
혼자서 그렇게 미쳐버리겠지. 레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작게 훌쩍이고 몸을 떨었다.
" ...날 데려가줘. 아니면 네가 나랑 같이가. "
조금은 파격적인 요구였다. 이것도 술이 들어가서, 그 용기의 물약이 힘을 준 셈이겠지. 레오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고있다는듯 이제야 눈이 조금 맑아졌다. 한 차례 울어서 목이 부은듯했고 이따금씩 급하게 숨을 삼키느라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을진 몰라도 레오는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 너의 주인이랑 너희들이 해야하는 일이 끝나면 나랑 같이가. 이렇게나 헤집어놓고 나몰라라하는건 너무한거잖아.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레오는 유명해졌다.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궁의 투견이라는 이름은 날이 갈수록 유명해졌다. 눈에 흉터가 있는 아이를 조심하라던가, 주궁에 키는 보통에 머리가 새카만 여자아이와 시비가 걸리면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빠지라던가 하는 이야기들. 좋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앞에 누가 있던 신경쓰지않고 걸어가면 알아서 길이 비켜졌으니까.
엇차- 하는 소리와 함께 레오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않았다. 졸업식이라. 레오는 언젠가 자신도 저 자리에 서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서있을지 않을지도 모르지. 자신이 이 학교를 졸업하는 날 따위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킥킥대고 웃던 레오는 잔을 들고 술...은 아니고 음료수를 채웠다.
" 야야, 잔 채워라. "
술이라도 되는 것마냥 음료수 병을 들고 직접 나서서 다른 이들의 잔이 넘치기 전까지 마구마구 부어대던 레오는 제 주변 사람들의 잔이 다 채워진걸 확인하곤 큰 소리로 '마셔라~!!' 하고 소리쳤다. 꺄하하하! 소리치며 원샷을 때리곤 대표는 앞으로 나와서 선서를 하라는 말에 시선을 돌렸다. 아, 저 녀석은.
드디어 졸업식 날이 왔다. 이는 현 6학년들을 위한 졸업식이었지만, 올해로 학원을 그만둘 그녀에게도 얼추 해당되기는 했다. 자퇴하는 거니까 제대로 된 졸업장은 못 받겠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나마 식에 참여하고 나간다는 의미는 둘 수 있는거 아니겠는가.
일단 전체 행사니까 나름대로 잘 차려입고 정전으로 향했다. 아, 여기서 입학식을 하고 개학식을 한 것도 어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마지막으로 떠나갈 사람들을 배웅하고 자신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됐다. 감회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새롭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백궁의 한 자리에 앉았다. 다소곳이 앉은 그녀의 머리엔 석산을 본뜬 은장식이 반짝였다.
단상 앞에선 교장이 선서할 학생을 부르며 물러나는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올해 졸업 선서는 누가 한다고 했더라. 미리 들은게 없는 그녀였기에 나름 기대 반 궁금함 반을 갖고 앞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주궁 쪽에서 소란이 일어나 그쪽을 흘끔 보긴 했다. 아주 잠깐.
입학식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는 그간 여러 모습을 보였다. 비밀 가득한 언더테이커의 자제, 현궁의 검은 고양이, 이후 대표가 되어 청궁킬러와 현궁의 사신이라는 별호에 도달한다. 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기에 그는 변했다. 정전에 모여있는 모습에 그는 결국 끝났구나 생각한다. 오래도 걸렸다. 미래도 없던 나날을 뒤로 어둠에 암약하리라 생각했건만 어느새 빛무리가 그를 비추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지금 누구도 남지 않았으나 누구보다 많은 것을 얻었으며, 한껏 차려입었다.
언더테이커 가문의 가주임을 밝히듯 그는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브로치를 달았고, 어깨에 품이 넓은 코트를 걸쳤다. 그 안의 정장은 긴 다리를 부각시킨다. 검은 머리는 올려 묶었으며, 두 눈은 온전히 드러낸다. 그의 양 어깨에는 여전히 두마리의 짐승이 있다. 앞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에서 그의 눈빛이 결연하다. 많은 것이 그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이후 선서를 읊기 전 심호흡 하던 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돌린 등을 바르르 떨곤 외쳤다.
"..레오파르트 로아나!"
저게 진짜! 그런 의미였다가도 입술을 꾸욱 다문다. 참자. 참아야 한다. 이후 그가 다시 심호흡 하곤 선서를 왼다.
"나, 발렌타인 샬럿 언더테이커와 모든 졸업생들은 나의 생애를 돌아보건대 가장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며 자신의 목표와 비전을 위해 더욱 정진할 것이다. 이후 후배, 더 나아가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될 것이니, 자신의 발자취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 제각기의 명예를 받드노라."
레오는 아하하하!! 하고 크게 웃으면서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첫 졸업식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졸업식에는 먹는것에 집중했다. 세 번째 졸업식때는 싸움이 벌어져 거기에 뛰어들었고 이번 졸업식에는 선서를 하려는 사람에게 소리를 쳤다. 다음 졸업식이 있다면 토마토를 던져야지. 주의를 받은 레오는 붸- 하고 혀를 삐죽 내밀어보였다.
" 쟤네는 뭐에 돈을 걸었대? 하여튼 이상한 녀석들이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
분명 술이 아닌 음료수일뿐인데 무언가 취한듯한 기분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분위기에 취한 것이겠지. 자기가 한 말을 들었는지 이 쪽으로 시선이 꽂히자 레오는 이대로 한 판 붙겠다는 생각인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뭐, 어쩔건데' 하고 말했다. 두 세걸음 나아갔을때 제 친구들이 말리고 저 쪽에서도 눈에 흉터가 있는 그 녀석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수그러들자 레오는 '싱겁긴' 하며 또 웃을 뿐이었다.
" 자자, 일어서라신다. "
잔을 들고 일어선 레오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더 높은 자리에 섰다. 한 손엔 음료수 병을 들고 있던 레오는 자기 잔에 흘리던 말던, 넘치던 말던 신경쓰지 않고 콸콸콸 붇고는 잔이 비어있는 사람을 찾아 의자를 밟고, 테이블을 밟으며 다가가 또 그 잔에 음료수를 부었다.
" 자~ 주궁! 잔 들어라! "
이렇게 말하는 레오파르트 로아나는 6학년 학생대표 따위가 아닌 일개 4학년 학생일 뿐이다.
선서를 마쳤다. 머리를 쥐어짜내 쓰고, 어딘가의 위대한 참치신에게 계시를 받아 덧붙여 인용한 것이 제법 잘 먹힌 모양이다. 그는 교감의 인도를 받아 주어진 자리로 향하려 했다. 그간 고개를 돌려 보였던 광경은 많은 인파에서도 그를 향한 내기가 있었다는 것과, 원내는 평화로운 것이다. 그는 예의 굳어진 그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걸로 됐다. 이제 많은 것이 변했으니 지켜야 할 때다. 봄날이 보고 싶고, 내가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했으면 하며, 조금이라도 유해졌으면 하고 중얼거리던 네 얼굴이 그립다.
— 사람들이 도련님을 조금 더 사랑해주면 좋을 텐데요. — 어림도 없는 소리. — 박수라도 받았으면! —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 아, 박수만이라도요! 제발!
그는 작게 실소한다. 네가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넌 알까. 답지않은 생각을 하며 돌아가면 널 화장하여 창공으로 보내주리 다짐한다. 너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이제 네 한을 풀었기 때문이다.
먼저 토를 시작한 것은 레오였다. 한 번더 무지개를 뱉어낸 레오는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생각해보면 작년 졸업식도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레오는 잔을 집어던졌다. 그것을 신호로 레오의 친구들도 잔을 집어던졌다. 잔이 바닥에 나뒹굴고 레오는 음료수 병을 들고 꿀꺽꿀꺽하고 들이키곤 제 친구들에게 병을 넘겼다.
" 이렇게.. 나오시겠다... "
그리곤 물병을 집어들었다. 무언가 대단한 세례라도 하듯 제 머리위에 물을 붓고 제 친구들의 머리에도 주르륵 주르르륵 하고 물을 부었다. 그리곤 쿵, 쿵. 하고 단상위로 올라가듯 테이블 위로 올라섰다.
" 들어라 주궁!!! "
제 가슴을 쾅쾅 친 레오는 주궁의 모든 학생들의 이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지팡이를 뽑고 목에 대고 '소노루스' 하고 주문을 외웠다.
초랭이탈은 여전히 마법부 장관 자리에 앉아있으며, 그에게는 아직도 많은 폴리주스가 존재합니다. 마법부 장관의 머리를 전부 밀어버리고 사형시키라 한 그는 사형 직전에 진짜 마법부 장관을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가뒀습니다.
여전히, 그의 정체를 알아챈 자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비탈은 아즈카반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주인님을 모시려는 건지, 아니면 그가 또 다른 매구가 되려는 건지는 모릅니다.
양반탈은 아즈카반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호크룩스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잠들어있습니다.
백혜향 교수는 교수직에서 내려 와, 자신이 매구의 추종자라 밝혔고 아즈카반에 수감되었습니다. 그의 최종 판결은 디멘터의 키스였고 그는 디멘터의 키스에 당하자마자, 간수의 손에서 지팡이를 빼앗아 아브라케다브라를 스스로에게 겨누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의 끝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모두 미안해요. 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할미탈은 제갈 가에 대해 불문에 부치고 진짜 제갈 윤을 돌보고 있습이다. 불문에 부치는 조건으로 집의 가주가 되기로 했다나요?
손탈이기도 한 제갈 가의 당주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부네탈은 초랭이탈에게 많은 양의 갈레온을 뜯어냈습니다. 그 중 일부는 제 친구의 묘비를 세우는 데 썼습니다.
이번 졸업생들 중 기린궁에 속한 대다수의 학생은 도사가 되는 걸 택했습니다. 무기 사감은 그들에게 안녕을 빌어주고 선계로 보냈습니다.
그는 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는 혜향 교수의 사임 소식에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매구의 추종자이자, 더이상 추종자가 아닌 이상 그 삶을 좌지우지 하기 어려움을 알고 있다. 원하지 않았던 삶임도 알고있다. 그럼에도 동정한다면 예의가 아닐 것이다. 심심한 위로를 속으로 던진 그는 건배하며 먼저 고통받는 학생과 교수를 바라본다. 역시 그가 옳았다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본인을 바라보며 놀란듯한 시선에 손거울을 꺼내 자신을 바라본다.
"아-"
검은 머리는 맞지만 주변에 연한 형광 자주빛이 맴돌아 후광처럼 빛난다. 그는 작은 탄성을 뒤로 입가를 가리고 혼자 잘게 떨더니, 이내 소리높여 웃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직 아이의 것처럼 청명하게 소리내 활짝 웃었다. 청궁의 습격이라며 난장판을 만드는 주궁의 학생도, 비명을 지르는 기린궁의 사람도, 그는 모두 지켜보며 때묻지 않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의 표정이 천천히 사그라든다. 온화한 미소로 표정을 굳힌다. 이 평화가 부디 오래 가기를 기도하듯 차분하고 온화한 눈으로 아수라장을 지켜본다. 많은 것이 변했고, 변할 이 삶을 내 숨으로 조금이나마 지탱할 수 있기를. 이윽고 그는 속삭인다.
"새로이 시작하자꾸나. 모두 새로 시작하는 거야."
어깨 위의 정인에게 속삭이며 수라장의 구석을 바라본다. 늘 그렇듯 물결치듯 새파란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너. 그런 넌 수수하게 미소 짓고는 손을 흔들고 사라진다. 한도 없어 이곳에 남지 않고 가버린 것인지 생각했던 네가 날 피해다녔을 줄 누가 알았을지. 잠시 쓸쓸한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구석을 쳐다보던 그는 이내 지팡이를 든 채 앞으로 나섰다. 짧은 웃음소리를 뒤로 코트를 휘날린다.
사실, 이전 기수 스레를 보면, 제가 확실하게 못 박아뒀었어요. 동화학원은 새롭게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럼에도, 작년 말인가 올 해 초 쯤에.. 잡담스레와 못다말 스레에서 동화학원 스레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여는 걸 결심했어요. 개인적인 이유로 열기 힘든 상황이었음에도요.
그래서 저도 거의 마지막이다 하고 연 거예요. 이번에도 조기엔딩으로 끝내면(어찌보면 도망친 거죠.).. 절대 다인스레를 여는 캡틴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나 했었어요. 진짜 이번에도 조기엔딩으로 우야무야 끝내면 나는 캡틴 자격이 없는 참치다!!!!! 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짐했어요.
당신이 이 스레를 뛰는 동안, 자신과 타인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셨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요. 저에게 모든 걸 맡기세요! 라고 하고 싶지만, 제가 내걸 수 있는 최대한의 방책은 일댈스레가 전부네요.
낯선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담담하게 쓰여졌지만, 보면서 울었어요 진짜ㅋㅋㅋㅋㅋㅋ 사실 편지는 새벽에 출근하면서 읽었었는데 보면서 진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그 동안, 긴 시간 매 주 편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또 동화학원이 열린다면 그때는 무조건 맨 처음 물을 타고 참가하고 말 거에요. 스레 열기 전 투표 받을 때부터 쭉 지켜봐놓고는 시작부터 참가를 못하다니 천추의 한. 처음부터 참여했으면 정말 즐거웠을 게 너무 눈에 보이는... 캐릭터들도 스토리(이야기)도 캡틴도 너무너무 좋은 것들뿐인 스레였어요!
>>575 그치만... 비록 前참가자가 되고 말았지만... 마음만은 영원히 동화학원에...! (졸업하지 못하는 캐릭터) ...갑자기 왜 이럴까요. 왜 저도 슬픈 걸까요. 여... 영원히... 진짜 동화학원 영원했으면 좋겠다... 혹시 대를 이어서 스레를 운영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
1. 후부키 이로하는 전주 이씨에서 피를 보지 않는 방법으로 독립에 성공했어요. 한서를 구슬려 강경파를 죄 몰살하려는 일도 포기했지요. 대신 한서의 후계자직을 밀어주고 갔는데, 그 이유는 한서라면 동화학원에서 추종자의 잔인함을 보았고, 그걸 보고 어둠의 마법은 올바르지 않음을 깨달았을 테니 올바른 길을 이끌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1-1. 피를 보지 않는 방법은 식음의 전폐도 아니고, 자해행위도 아니었어요. 스낼리갭스터와 문카프를 두고 가문 정원에서 원카드를 하고 있으니까 보내줬다고 하는데..🤔
2. 이로하는 정말 졸업식때..아장아장 걸어와서 아빠!!!!! 하고 외쳤답니다. 당연히 벨은 미쳤냐는 눈으로 쳐다봤고, 이내 본모습으로 돌아와서 깔깔 웃었을 거예요. 그리고 버터 케이크를 좋아하기 때문에 용히 뒤로 돌아 "안녕, 겨울이 왔어요." 하고는 수수히 웃지 않았을까요?
처음 마셔보는 술은 생각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레오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지 느리게 숨을 쉬었고 움직임이 점점 잩아들었다. 그리곤 가만히 자기도 데려가라던가, 자기랑 같이 가자던가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도 못해줄까, 라는 그 말이 왜 그리도 편했을까. 레오는 이히히, 하고 기분좋게 웃으면서 얼굴을 부볐다.
" .... "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돌리고 고개를 돌렸다. 레오는 가만히 눈을 뜨고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연민이나 동정따위의 것들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누구도 자신을 연민이나 동정심의 눈빛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선하고 거기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레오는 자세를 바꿔 버니의 허벅지 위에 앉아 가만히 마주보았고, 손을 뻗어 목에 두르고 풀린눈으로 바라보다가 어깨에 머리를 묻고 기댔다.
" 응.. 나랑 같이 있으려고. 계속계속 같이 있어주려고. "
레오는 '좋아' 하고 말하곤 다시 이히히, 하고 웃었다.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레오는 그대로 잠시간 부비적 거리다가 다시 얼굴을떼고 또 멍하니 바라보다 이히히, 하고 웃었다. 감정의 기복이 잦아지는 순간이었다. 술기운을 빌려볼까. 레오는 손을 뻗어 입술을 만지작 거리다가 놀리듯이 가볍에 입술을 맞추곤 또 이히히히, 하고 웃어버릴 뿐이었다.
" 나도 데려가... 무서운건 싫으니까... "
그리곤 다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숨소리를 늦춰갔다. 밤이 깊었다. 술기운에 져서, 레오는 그렇게 잠들었다.
졸업식 마치고 첼이도 짐 다 정리해서 윤이 손 꼭 잡고 집에 갔겠네. 미리 편지를 보내두었으니 필립과 클로에가 둘을 마중 나와있었을거고, 첼이랑 윤이가 도착하면 반갑게 맞아줬을거야. 집 안에선 기다리던 남매들이 시끌벅적하게 반겨주고, 그 날은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가, 첼이의 졸리단 말에 자러가고... 아직 둘의 방은 준비되지 않았을테니 원래 첼이 방에서 새삼 편하게 잠들었으려나.
>>633 그렇다면 얼마간 고민하다가 새 신분으로 바꾸자고 권했겠네. 이름은 본명인 레이먼드를 써서 해달라고. 새 신분을 얻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첼이네 집안에서 기꺼이 도와줬을거야. 첫째가 데릴사위로 들어간 집안에 서류상 양자로 만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윤이의 존재는 편지로 미리 알렸었으니까 첼이가 따로 소개할 것도 없이 남매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이것저것 엄청 질문할 걸 ㅋㅋㅋ 그러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겠지. 첫째는 아직도 윤이의 존재가 못마땅해서 왜 왔냐고 투덜대고, 둘째는 위아래로 스캔 딱 한 다음에 니들 할거 없으면 내 작업실 와서 인간 마네킹이나 하라고 하고, 셋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흐음~ 니가 그 건방진 빨간머리구나~ 하고 놀림 반 장난 반 하고, 넷째는 멀리서 퀭한 눈으로 빤히 보고만 있고... 윤이가 남매들한테 시달릴 동안 첼이는 부모님한테 앵겨서 어리광 피우느라 정신없고. 우당탕탕 스피델리 집안! 일까나 ㅋㅋㅋ
당신이 희미하게 미소 짓자 심장이 요동친다. 웃음이 만개한다면 어찌 될지 두려우면서도 한편 그 모습을 바라게 된다. 당신이 그에게 웃는 것이 잘 어울린다 했지만 과연 당신만할지 하는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당연한 사실일 뿐더러 작은 설렘을 혼자 끌어안고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당신이 건장한 사내임에도 앙상한 손에 혹여 닿아 멍이라도 들까 싶다. 그만큼 당신을 아끼고 사랑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천천히 알게 될 게야. 중과 할미가 이야기 해준 것도, 내가 이야기 한 것도, 나는 모르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것도."
맞잡는 손길에 온기가 느껴졌다. 한 때 몸서리 치도록 싫어하던 것이 이제는 없으면 안 될 것이 되었다. 당신의 온기가 없으면 밤을 지새우게 된다. 각시를 처단하기 이전 새근거리며 자는 숨소리를 한참이고 들어야 잠들 수 있었고, 이제 천천히 극복해가며 당신의 온기를 가만히 느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없는 삶은 이제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말려버렸나 하는 생각도 있지만 나쁜 것이 아니니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잠시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당신의 단어에서 그간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 그 편린이 작게 보인다. 그는 당신을 물건처럼 처분할 사람이 아니기에 안타까움을 속으로 삼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신뢰를 잃어 방황할뻔 했던 그날도, 그 이후의 지금도. 당신은 한결같이 그의 곁에 있다. 세상이 달라지고 격동한다 하여도 당신은 평생 곁에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내리감는다. 칼 교수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맹수를 길들였다 하였음을 기억한다. 길들여졌다 한들 인간으로 같이 살아갈 것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가 맹세할 적 끼워주었던 가주의 반지가 있을 그 손등에 이마를 댔을 것이다. 그의 이마는 체온이 낮기에 서늘하다. 당신의 온기가 서늘한 피부에 흘러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나의 신아, 한 순간도 스러져선 안 될 고귀한 생명아, 시체 쫓는 까마귀가 절애하는 자야. 네 떠나지 않는다 맹세하였으니 나도 맹세하마. 너를 떠나지 않을테니, 너를 연모한다. 사랑하며 더없이 아낀단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듯 하며 눈을 휜다. "하여 너에 대해 좀 알고 싶어지니 이 어찌할까?" 하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아이처럼 순수히 웃을 뿐이다.
>>694 흔히 여우요괴! 하면 떠올리는 게 여우 귀 세로동공 이런 거라.. 탈들에게 여우귀를 달아줄 수는 없어서 세로동공으로 결정했답니다!!
원래 세로동공 설정은 부네탈(=버니)에게만 해당되는 설정이었는데 모두 나눠가졌죠!
>>695 이매탈 레이드 때 이매탈이 내 주인이시여... 하며 윤이의 발밑에 무릎 꿇고 윤이가 그 길로 다른 탈들을 시켜서 광역저주를 날릴 예정이었습니다!:P 그리고 쟀게 놀자면서 저주만 계속 날렸을 거예요. 시트캐들 중에 친매구사상이거나 자신의 표식을 단 캐릭터는 의도적으로 공격 안할 것이고....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혜향교수와 할미탈의 사망을 염두해두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루트에 할미와 중의 사망 전개는 들어 있었어요. 탈들 중에서 가장 무고한 이가 그 둘이니까요.
일댈스레, 음, 생각 안 한건 아니고 내심 하고 싶은 마음도 크긴 한데. 바로 다음 시즌 준비하는 캡틴 보니까 보류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제 연말 코앞이라 더 바쁘면 바빴지 여유로워지진 않을테니까, 지금 일댈을 열면 즐겁다기보다 부담이 더 클 거 같더라구. 개인적으로 캡틴이 준비 겸 휴식기를 가졌으면 하는 것도 있구. 그러니까 캡틴이 괜찮으면 나중에... 아마 다음 시즌 엔딩 난 후에, 그 즈음에도 윤이와 첼이가 생각난다면 그 때 가서 열면 어떨까 싶어.
그렇게 들으니 나도 기쁜 걸. 아 맞다. 첼이가 윤이를 따라가는게 아니라 자기 옆으로 내려오게끔 하고 싶었던 계기 생각났어.
전에 역사서 수업 때, 그레이엄 가문 책에서 윤이가 매구가 된게 자의보단 MA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걸로 보였거든. 그래서 만약 MA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매구가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거야. 동시에 첼이가 연인으로 있는 지금에라도 매구라는 이름을 버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도박하는 기분으로 윤이에게 매구임을 버려주지 않겠느냐고 말해본건데 기꺼이 받아들여줘서 지금의 엔딩을 맞을 수 있었지.
>>959 아 그거...! 그 도박이 거의 정답이었답니다. 가장 낮은 확률에서 그나마 높은 확률의 도박...이엇어요:3
매구가 된 건 집안의 교육+MA가 살짝 간섭한 결과+머글과 혼혈 혐오. 니까요:3 세다리 의자 이론이라고 싸패가 세 가지 요인 중 하나라도 성립되지 않으면 의자가 균형을 잃어서 그것을 수행하지 못 하듯이 한 가지 요인이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그 성향을 벗어나게 되거든요. 매구가 싸패라는 건 아니고 단지 그 이론을 접목시켰답니다;)
참치 어장에서 아주 귀한 엔딩이네요. 지금껏 엔딩을 본 어장은 적었으니까요. 제가 이렇게 엔딩을 보고 마지막 레스를 남기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요.😊 며칠 전부터 천천히 써가던 이 짧은 글을 드디어 완성해가요. 편지라면 편지겠네요, 그렇지만 두서가 없을 지도 모르겠어요. ㅎㅎ..미리 양해 부탁드릴게요.
안녕, 다들 반가워요. 벨주이자 잉주여요. 먼저, 약 반년정도 함께 해주신 여러분(중간에 빠진 여러분께도 정말 감사하답니다.)과, 모 참치의 요청에 선뜻 과거의 뜻을 번복해주신 캡틴께 감사드려요.😊 캡틴은 어장을 진행하며 여러 일이 있으셨을 텐데,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이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가급적이면 처음부터 하는게 좋겠죠?
동화학원은 제가 참치를 시작할 때부터 보였던 어장이라 개인적으로 많은 흥미가 있었을 뿐더러, 임시 어장에서부터 수요조사를 하는 걸 봐왔던지라 정말 기대가 크던 어장중 하나였답니다. 신비로운 동양 판타지와 해리포터의 조합은 신선했고, 제게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이렇게 섞으면 매력적인 것이 생기는구나 하며 여러 영감을 받았답니다. 참가자 여러분도 둥글둥글하고 서로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이 좋아 어장에 있는 동안 편안했어요.
임시 어장에서부터 벨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하게 됐던 것 같아요. 동화학원의 이전 어장도 하나하나 살펴보며 어떤 스타일의 캐릭터가 이 어장에 잘 녹아들 수 있을까 제법 고민했던 기억이 있네요. 정주행을 하며 플레이어와 추종자와의 만남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다면 금지된 마법을 쓰는 마법사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의 넋을 기리는 가문도 있으면 좋겠구나 싶어 벨의 뼈대를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봤던 영화중에 미드소마가 있었던 지라..어쩌면 이게 운명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어요. 넋을 기리면 그만큼 죽음을 많이 봐왔을 거고, 전쟁이라는 키워드와 이후에도 남아있을 앙금을 떠올렸어요. 결국 사람을 위했으나 사람에게 배척되어 척을 지게 되는 현재의 언더테이커가 생겼고요. 또한 언더테이커의 사람들이 너무 폐쇄적이지 않도록 휘하 가문인 블랙번이 생겼고, 점점 가지를 뻗고 무성한 잎 되듯 여러가지 설정이 딸려왔답니다.
사실, 초기의 벨은 걷지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도망치기가 어려워 위험에 제일 많이 노출되어 있고, 스토리 진행 상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캐릭터였지요. 어릴적 가문의 숲에서 놀던 중 앙심을 품은 어둠의 마법사가 고문 저주를 걸었고, 이것 때문에 고통에 몸부림 치다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설정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몇걸음 걷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며, 사람을 완벽하게 불신하고 혐오하는 설정이었지요. 그렇지만 이런 캐릭터로 과연 괜찮을까, 아예 상호작용이 안 되는 건 그렇지 않나, 성장의 토대를 줘야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것저것 뜯어 고치니 현재의 벨이 나타났답니다. 까칠하고, 예민하며, 뺩의 요정인...😊
이제 풀지 못한 현재의 설정을 몇가지 얘기해볼까 해요. 벨이는 사람을 피해 시체를 가까이 했다는 언급이 유달리 많이 나왔지요. 이건 이유가 있답니다.
벨이의 어린 시절은 악습으로 시작 됐어요. 사계절이 어렴풋이 느껴지지만 사람과 닿지 않는 북부의 영지에 언더테이커가 있어요.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했던 조치지만 사람도 오지 못했지요. 가문의 사람들은 유쾌하지만 바깥 일을 물어보면 입을 딱 다문답니다. 그리고 다시 안의 일만 얘기하지요. 마치 게임 속 세계의 사람에게 여기가 게임 속인걸 알아? 라고 말하면 침묵하고 금기를 어긴 사람처럼 쳐다보는 상황처럼요. 그리고 다시 NPC처럼 스크립트에만 나오는 얘기를 반복했을 거예요. 어린 벨의 세상은 언더테이커 영지, 거기로 끝나고 마는 거죠.
그런 삶 속에서 유일하게 바깥을 알려주는 건 어머니의 남매인 엉클 톰이었어요. 벨은 톰을 정말 좋아했어요. 늘 신기한 바깥 세상을 알려줬고, 머글 사회라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도 알려줬으며, 그곳의 물건이나 먹을 것을 보여주고 먹여주며 벨이의 안식처가 되어주었지요. 아버지가 없는 벨에게 엉클 톰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자, 벨이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성격 파탄자가 되지 않을 이정표기도 했어요.
여기서 잠시 블랙번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블랙번은 산하 가문이지만 보수적이고, 전통을 고수하기를 바랐지요. 과거 당연시 되던 비윤리적인 행위를 지금까지 이어가는 걸 현 세대의 사람들이 보면 기함하듯, 블랙번도 과거의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비롯된 가주 계승식을 끝까지 추진했지요. 벨의 거울에 관련된 트라우마와 자주 보이던 기묘한 제스처는 여기서 비롯되었어요. 심리적 불안감을 유발한 뒤, 어두운 방 안에 가둬 동물의 목을 들고 하루동안 소리를 내지 않고 거울과 마주봐 내 자신과 그 안에 담긴 공포를 명확히 알아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계승식의 절차 때문에요.
블랙번의 고집으로 생긴 이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도 엉클 톰이었어요. 톰은 블랙번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요. 고리타분한 녀석 뿐이라며, 네가 이렇게 미워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그렇게 벨이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비스크 돌을 보여주었지요. 엉클 톰은 순혈주의자고 머글우호주의자고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살인 저주를 썼고, 자신의 오두막에 박제해 전시하는 극단주의자였어요.
엉클 톰도 결국 언더테이커의 끔찍한 악습이었던 거죠. 그렇지만 거기서 위안을 얻은 벨도 언더테이커의 악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상처 받은 벨에게 있어 죽은 사람은 새롭게 다가왔어요. 손을 대도 블랙번처럼 다시 지하실에 가두지 않고, 잘린 염소의 목을 똑바로 들고 서있으라며 외치지도 않고, 아무리 물어봐도 반복되는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때로는 침묵이 가장 큰 대답이었고, 벨은 여기서 차라리 죽은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벨이 시체에 의존하고, 집착하며, 때로는 위험한 모습을 보였던 건 전부 이것 때문이었어요.
아무리 좋게 본다 해도 엉클 톰은 범죄자였죠. 결국 체포 됐고, 아즈카반에 종신형을 당하게 됐어요. 오러에게 잡혀 끌려가던 날, 엉클 톰은 벨이 오지 못하게 막았지만 벨은 그 과정을 모조리 봤고, 오두막의 비스크 돌은 전부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히게 됐어요.
그리고 벨은 세상을 한 번 잃었어요. 살아있는 것에게 자신의 안식을 뺏겼으니까요. 그렇게 벨은 처음 두통을 느꼈어요. 스트레스로 생겼던 두통은 도통 낫지 않았지요. 거기서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진통제는 벨을 더 날카롭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소량이지만 아편이 들어있기에 의존성도 심했지요.
그런 벨에게 타니아가 생겼지만, 자유로운 블랙번과 폐쇄적인 언더테이커가 있던 만큼 서로에게 의지가 될 지언정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타니아는 벨에게 이정표가 되었을 거예요. 톰이 아니라 새로운 안식처가 생긴 거죠. 그렇지만 6학년이 되던 날, 서로를 이해하고 결국 타니아를 보내줬어요.
사실 여기에서 벨은 짧게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엉클 톰이라는 세상에서 벗어나 타니아를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 이제 혼자 해내겠다는 생각까지 오는 거니까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여러분이랍니다. 벨이는 여러 상호작용 덕분에 완벽해졌다고 생각해요.
첫 일상 때 첼이를 만나게 되었죠. 거기서 벨이는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후배간의 대화는 어떻게 하는 건지 자연스럽게 배웠다고 생각한답니다. 이후 첫 레이드 때는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주변 흐름을 읽는 법을 배웠어요. 마노의 광역 크루시오에 쓰러졌을 때 첼이와 랸이가 옮겨줬다는 후일담(아무리 유해진 현재의 벨이라도 2분할 나눠들기는 큰 충격과 흑역사로 다가왔겠지만요..)으로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이후의 이벤트로 사람과 대화하며 친해지는 법을 배웠고, 천천히 사회화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랸이와의 대화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쭈 덕분에 학생을 구할 수 있었고, 섹튬셈프라가 날아왔을 때 앙숙 같았던 렝이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그리고 타니아를 잃었지만 벨이는 무너지지 않았어요. 이미 여러 도움을 받았고,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서게 만들 원동력을 여러분이 주었으니까요. 마지막엔 타타의 도움으로 선비탈을 저지해 각시의 최후를 볼 수 있게 될 정도로요.
그리고 결국 모든 과거에서 벗어나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마노의 덕도 아주 크다고 생각해요. 마노를 만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세계가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법을 배웠고, 비어있는 자리는 외롭다는 걸 깨달았고, 온기는 더이상 끔찍한게 아니라 좋다고 생각하게 되며, 죽은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벨이는 성장했어요. 누군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이젠 이정표가 되어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려요. 동화학원 덕분에 발렌타인 샬럿 언더테이커는 완벽한 캐릭터가 되었어요. 그래서 기뻐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만 가슴 한켠에 묻어둘까 해요. 상상하는 즐거움도 있어야 하는 법이고, 끊어야 할 때 끊는 것도 도리니까요.
주절주절..너무 얘기가 길었네요. ㅎㅎ.. 제게 많은 영감을 주고, 함께 성장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러분의 앞날에 늘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바라요.🥰
P.S. 이노리는 늘 그렇듯 행복해요. 버터 케이크를 먹고, 이로하 노래를 부르고, 후부키의 숲에서 사람을 돕고, 지금은 교수를 생각하고 있어요. 벨에게 위기 의식을 느꼈을 지도 몰라요. 쟤가 교수를? 학생이 위험하지 않을까? 내가 감시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요.
캐릭터들이 퀘스트로 바쳤던 흰 국화꽃은... 청룡이 인공적으로 영혼을 종이라는 매개체로 숨을 불어넣고 주작이 임시적으로 생을 부과하고 백호가 사주팔자를 임시적으로 꼬아놓고 스러진 것을 현무가 인공적으로 물 속에 만든 저승에 바친 것으로, 이 국화주(인공적인 영혼들)를 대가로 스러져간 10명의 생명의 영혼에게 다시 허락된 만큼의 새로운 삶과 행복을 부과하게 해달라는 기원이 담겨있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거래예요. 이 깨끗한 영혼을 바칠테니, 먼저 간 영혼들을 달래는... :3
>>977 ((꼬오옥))((꾸아악)) ㅋㅋ 좋은거 배웠네~~ 이제 벨이 보고 마노도 배우면 되겠다~~
첼이랑 나도 벨이와 벨주가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첫 일상을 같이 끊은 것도 그렇고, 뺩이 나온 다이빙 일상은 정말 잊지 못 할거야 ㅋㅋㅋ 잊을만 하면 다시 찾아봐야지 ㅎㅎㅎㅎㅎㅎ 히히 뺩 부분 아카이브 떠놔야지...! ㅋㅋㅋㅋ
여담이지만 첼이가 자퇴하고 떠나는 거 학생 중에 유일하게 벨이한테만 얘기했을거야. 벨이가 본가로 가기 전에 혼자 찾아가서 얘기하고, 선배네 집에 편지 보내도 되냐고 농담 같은 말도 하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봐도 되냐고 물어봤을거야. 엔딩 즈음의 첼이한테 벨이는 남매들 같은 오빠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거든. 벨이가 어떻게 대답했든 첼이는 웃으면서 돌아갔겠지. 다음에 봐요, 벨. 하는 인사를 남기고서.
>>983 규정상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지만 긍주의 멋진 설정 짜는 솜씨라면 분명 다른 매력적인 가문도 만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그렇듯 떠돌면서, 언젠가는 서사 안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마주쳤을 거예요. 다시 와주셔서 감사해요.😊
>>986 세상에! 감동 받았어요.😭 그렇지만 뺩은..뺩..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뺩..! 벨이의 평생 흑역사이자 동화학원 어른 친구의 술안주랍니다..
벨이에게 얘기한다면 본가 위치를 알려줬을 거예요. 편지는 당연히 보내도 되겠지만 안아봐도 되냐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팔을 벌렸을 거예요.누군가를 안아보는 건 거의 없던 일이거든요. 아마 머리도 한번 어색하게 쓸어주고 매구와 다투지 말라고 농담을 던졌을 거예요. 첼이도 벨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었답니다.😊 웃는다면 벨이도 손을 흔들어줬을 거고요. 처음에 만났을 때 어색했던 것과 달리요.
그리고 교수가 됐을 때 "너희의 선배는 이정도는 쉽게 했는데 너희는 뭐냐. 내가 가르친게 어려웠어? 이번에 처음부터 복습하게 시험 범위를 늘려 봐?" 하며..협박용으로 첼이를 자주 쓰지 않았을..까요...🙄
그러고보니 은이는 누군가의 죽음에 함께하지 않고 그 후에도 남지 않았지만 오직 추모만을 하고 떠났네요... 뭔가 신경쓰이는 느낌. 이렇게 세세한 설정과 의미가 다 있다니 정말 신기하고 또 대단하고... 계속 생각하지만 정말 좋은 스레. 이젠 외부인인 제가 얼마 안 남은 레스를 써버리긴 뭐하니 이 말을 마지막으로 정말 갈게요. 오늘은 1시간 20분이나 남았으니까... 다들 즐겁고 덜 힘들고 덜 아픈 삶 되시길...
어둠 속에서 틈 사이로 들어오던 그 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당신과 처음 만난 그 순간은 마음에 담기어, 기약 모를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잊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다시 만날 때까지. 시곗바늘은 무심하게 움직일 것입니다.
내 모든 이야기가 잊힐 거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길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체념하지 않도록. 아무것도 끌어안지 않으려 했습니다. 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니,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위해 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며 후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웃고, 울고, 분노했던 날들이 잊힌다는 것이 나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슬픔이지만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므로 뒤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 이리저리 수정하려다가, 못 올릴 거 같아서.... 올려요. :q
서로의 서사를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예쁘게 맺을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 엔딩을 본게 손에 꼽을 정도지만, 그 와중에 이렇게까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캐는 없었거든. 첼이에겐 남매 같은 오빠로서, 오너인 내겐 내적 친밀감으로 애끼는 캐가 되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벨주도 마지막까지 이렇게 얘기 나눠줘서 정말 고맙구 :)
>>992 비록 본어장에서 함꼐한 시간은 짧았지만 마지막에 이런저런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 은주이자 긍주인 사람아. 당신의 앞길도 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
타타야...😭 타타는 도사가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사실 타타의 결정이 아주 멋지다고 생각해요. 타타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저는 굳게 믿을 거랍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날을 향해 걸어가고, 끝내 쟁취하길 바라요. 행복한 길이 되길 바라요..!!
긍주도 즐겁고,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고, 가끔 힘든 날에 하늘을 올려다 보면 구름이 예쁘고, 땅을 내려다 보면 예쁜 꽃이 피어있는 나날이 되길 바라요. 그동안 아주 감사했어요, 다들.😊
다들, 여기까지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너무 기뻐. 기쁨과 아쉬움이 동시에 사무쳐서 참 복잡한 기분인데 이게 또 나쁘지 않네. 그만큼 내가 이곳을 좋아했다는 반증이니까. 당분간은 아쉬움에 한숨쉬고 눈물짓는 날들일지도 모르지만 추억을 돌아보며 잘 견뎌낼 수 있겠지. 응. 그야 이렇게 멋진 마무리를 맞이했는 걸. 아마 이 다음에 같은 시간은 없을 만큼 좋은 시간들이었는 걸. 그러니까 괜찮아. 헤어져도 기억하고 있으면 되니까.
모두 모두 오래도록 기억할게. 함께한 시간이 길었든 짧았든, 중간에 떠나갔더라도, 오래 오래 기억하고 추억할게. 지난 시간에 어느 부분도 아쉽지 않은 부분 없고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 없었으니. 이토록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다들 정말 좋아해.
그리고 캡틴이자 윤주, 윤이와 더불어서 정말 많이 애끼고 사랑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