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끝났다. 적어도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곧 졸업이 다가오기 때문이고, 그가 재학하며 급작스레 생겨버린 목표를 모두 이루었기 때문이다. 평화가 다가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이제 보는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일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대신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매구를 직접 막지 않고, 간접적으로 막아낼 것이다. 적어도 이제 매구의 일에 손을 떼는 이상, 그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을지도 두렵다. 졸업식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작은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죽음을 봤다. 그리고 원내에서 기어이 사람을 죽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입었던 정신의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이렇게 또 쌓여버렸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기어이 터진게 분명하다. 눈을 감으면 짐승이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고 눈을 뜨면 각시의 마지막 표정이 눈에 아른거렸다. 짐승이 뼈를 씹는 소리는 눈을 감아도, 떠도 계속 들렸다. 정전에서 먹는 식사는 각시의 살점 같아 한술 뜨고 토했다. 깃펜은 그 날카롭던 손가락 같아 필기를 하다 말고 집어 던졌다. 검게 칠된 지팡이는 아무리 닦아도 피가 묻어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지팡이의 날카로운 부분에 손수건이 찢어져 손바닥까지 헤져 그의 피만 묻어있다. 원래부터 깔끔했던 지팡이기 때문이다. 그는 피가 나는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덮어 가렸다. 어머니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지금 휴가를 내고 아편 중독 치료를 받고 계신다. 단명의 원인도, 두통의 원인도 모두 몸이 약한 가문의 직계가 먹던 진통제기 때문이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약재에 아편이 들어있을 줄 아무도 몰랐으리라. 그와 어머니의 생명을 앗아가는 원인은 생각보다 근처에 있었다. 원인을 알게 된 이상 그는 더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다. 허약하기는 그지 없어도 적어도 죽지는 않으리라. 다만 그만큼 힘들어하고 계실 어머니께 무슨 편지를 보내냔 말이다.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앞선 그의 상황이다. 그는 나름 잘 살고 있다.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듯이 발악한 결과다. 이후 현재. 시끄러울 만큼 뼈 씹는 소리 가득한 머리 속에서 누군가 말했던게 떠오른다. 미친 세상에서 정상으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미친 것이라고. 그는 이 상황을 인내해야 함을 안다. 언젠가 치료될 수는 없어도 무뎌질 수 있음을 안다. 그가 걷기로 한 길이 어둠의 마법사 양성을 막아내는 것으로 굳혀진 이상. 그럼에도 그는 잠깐 무너졌다. 어젯밤엔 잠 설치고 샌지 나흘 지났기에 특단의 조치로 몸을 정결하게 하고 살아있는 죽음의 약을 한방울 적신 장미 꽃잎 하나를 입에 넣었다. 초콜릿으로 이루어진 꽃잎을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시간 지나 이제 막 부스스 일어난 시점이다. 깬지 이제 막 2분 남짓 되었나. 그는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부스스한 모습으로 욕실에 비척거리며 들어간다. 달링이 따라 들어간다. 몇분 지나지 않아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나온다. 달링이 혹여 이 주인 쓰러질까 부리로 조심스럽게 깨물며 앞길을 알려준다. 그는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아 괜히 팔을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당신을 작게 부른다.
"아가..우리 아가 어딨을까."
하고는 또 꾸벅 하고 존다. 입이든 얼굴이든 세안하고 양치하여 물이 닿았으면 당연히 눈이 떠지고 머리가 도는게 정상인데 이것이 약기운인지, 잠기운인지 모르겠다. 그는 또 다시 선 채로 꾸벅 존다. 제법 우스운 장면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이전에 비하면 말랐다는 걸. 그럼에도 그녀는 윤의 손길을 거부하거나 내치지 않고, 조금 더 품 안 깊숙히 안기려 했다. 힘없는 손이 몇번인가 그의 옷을 쥐었다 놓쳤지만, 아주 놓지는 않았다. 끝자락이나마 쥐고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을거다.
편지에 대해 물으니 윤은 선뜻 얘기해주었다. 남은 탈들이 보낸 것과 제갈 가의 편지들,이라. 애원하는 내용을 들으니 그들 역시 어느 정도로 맹목적이며 맹신했는지 알 만 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레 느껴졌다고 할까. 할미탈이 보냈다는 붉은 하울러를 그녀도 힐끔 보았다. 내용이 궁금하지만 열어보는 건 무리겠지. 하울러니까.
"졸업...하긴 하는군요."
윤에게서 졸업이란 단어를 들으니 애써 피해오던 현실이 눈앞에 재차 드리운다. 졸업하면 좋든 싫든 지금의 6학년들은 학원을 떠나야 한다. 제갈 윤도, 발렌타인도. 그녀는 윤의 쓰다듬을 받으며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과연 그 없는 학원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까.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생각해보고, 고개를 들어 윤과 마주본다. 그리고 꺼낸 말은 생각과는 다른 말이었다.
"그래서, 하려고 했던 건 다 한 거에요?"
그녀의 곁으로 내려가주겠노라 말은 했어도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들은게 없었으니. 일단은 그것부터 알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쯤 기분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흘동안 잠 한번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방울 적셔먹은 약이 그렇게 독한 건지. 그는 여전히 꿈과 현실의 경계를 해맸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산더미일 때 당신이 그를 붙잡는다. 단단히 붙잡자 팔을 느릿하게 뻗어 당신의 품에 안기려 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짧게 까치발을 들어 어깨에 턱을 기대는 것도 덤으로. 그가 눌린 목소리로 나직히 웃었다. 샬럿 소리를 들으면 늘 난 양파가 아니야! 하고 외치던 어린 날의 자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정말 싫은 별명인데도 당신이 양파란 말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으응, 여기 있지. 잠들면 안 되는데."
그는 제법 나긋하게 종알거린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려 본 시야가 마냥 밝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그는 잠이 늘었냔 말에 다시 감기려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인다. 천천히 돌아오려는 이성은 아직도 저 멀리 출발선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 같다. 온기를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지금은 마냥 편안하다. 그가 대답을 하던 순간은 잠깐의 침묵 뒤다. 그 와중에 또 졸아버린 게 분명하다.
"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다시 줄여야 하는데."
당신에게 약을 먹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살아있는 죽음의 약에 대해 일절 함구하기로 했다. 가벼운 머리 사이로 시원한 공기가 스며든다. 그는 당신에게 물었다. "우리 아가는 푹 잤을까. 내가 먼저 잠들어 서운하진 않았더니." 하고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 떼며 턱을 떼 당신을 마주보려 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머리가 몇가닥 부스스 떠있고, 눈에 잠이 꽉 찼지만 점점 그마저도 거둬지고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다.
"요즘 서운한 일이 많았지 않나." 하고 말하는 것이, 그간 쌓인 일로 당신이 또 토라졌을까 하고 내심 콕 찌르는 것에 가깝다. 가령 그가 세라피나 영애의 브로치를 차고 다른 학교 학생을 대놓고 환대하는 일이라든지, 달링을 위해 하루를 통으로 써버린 일이라든지, 어머니의 생떼(?)에 또 꾸며놓고 나간 일이라든지..어어 이거 완전 개새ㄲ…….
펠리체에게 물은 윤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습니다. 곧이어, 자신에게 향한 질문을 대답하려는 건지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 거의 다 했어. 그만큼 손실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니..... 말했잖니, 네 곁으로 가겠다고.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파괴를 하는 것 뿐이라고. '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 눈으로만 보이는 것일지는 몰라도 위험 요소인 탈이 여럿이나 돌아다니는 것 보다, 아즈카반에 수용한다는 게 가장 안심되기 좋겠지. 그들의 주인인 매구도 아즈카반에서 디멘터 키스를 받았으니까. 나는 처분할 것들만 다 처분하면 되는 거란다. 이제 남은 건 백정탈, 중탈, 할미탈.. 제갈 가문... 인데, 이것들을 어떻게 한 번에 털어낼 지 조금 고민이란다. 초랭이는 지금 현재 위치에서 조금 더 일을 해야하니까.'
어깨를 으쓱인 그는 제갈 가문 가주가 보내 온 서신을 읽곤 그것을 한 손으로 구겨버렸습니다. 역시, 불쏘시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 뭐, 일단.. 싸우는 걸 좋아하는 성미들도 아니니 얌전히 넘어가야겠지. 나도 너에게 미움 받는 건 원치 않거든. '
윤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듯 가늘게 눈커풀을 내렸다. 희미한 틈새로 보이는 건 여전히 흐린, 어쩌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금빛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곤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녀는 그의 졸업이 서운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단순히 졸업만 놓고 보면 그녀도 언젠가 해야 할 과정이었으니까.
그 눈으로 윤을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들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역시 다 끝난 건 아니구나, 였다. 거의 다 라는 건 어쨌거나 남긴 남았다는 의미다. 무엇이 남았을까. 남은 탈들과 제갈 가의 처분이 그것인걸까. 처분, 처분이라.
"처분한다는 건, 이제 쓸모는 없어졌다는거죠? 그럼 제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처분을 고민하는 지금이라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부터 생각했던 걸 꺼낼 때일지도 모르지. 그녀는 부탁을 말하기에 앞서 그의 손을 찾아 꼬옥 쥐었다. 쥐었다 놓고 다시 쥐기를 반복하고나서야 그 부탁이란 걸 입에 담았다.
"백정탈과 중탈, 할미탈은 그냥 해방시켜줬으면 해요. 선배가 내려와 제 곁으로 오려고 하듯, 그들에게도 이만 자유를 줬으면 하는게 제 부탁이에요."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부탁이었다. 들어줄지 말지는 윤의 기분에 달린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그녀는 보채거나 강요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그의 손을 당겨 손등에 볼을 부비고 그대로 댄 채 살짝 올려뜬 눈으로 윤을 보았다. 이러면 말만 안 했지 해달라고 채근하는거나 마찬가지이지 않나 싶지만, 시침 뚝 떼고 윤을 응시하는 모습이 퍽 잔망스러웠을지도.
할미탈이 팔 하나를 잃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기에 놀람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그 날 할미탈은 오지 않았던 걸로 안다. 그러면 그 전에, 잠든 학생들을 찾으러 갈 때 일이 있었던건가. 대체 누가, 무슨 일이. 동시에 시끄럽게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눌러 가라앉힌다. 그것들을 모두 내색하지 않고, 윤의 대답을 들었다.
"제가 아무리 영특한들 선배만 할까요. 매구님 명성엔 못 따라가죠."
그녀의 부탁대로 그들을 놓아주겠다는 윤을 보고 그제야 옅게 미소를 짓는다. 그 셋만 풀려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간만에 듣는 부네의 이름에 부네도 남아있었구나, 하고 생각만 한다. 생각은 거기까지 하고, 고개를 들어 그에게 입맞춤을 하려 했을 것이다. 일부러 입술을 피해 볼에 한번, 목덜미에 한번.
그게 부탁이냐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머뭇거렸다. 뭔가 고민하듯 말이다. 잡은 손을 조물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슬금 몸을 움직여 윤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으려 했다. 윤을 마주보고 앉아 한결 편하게, 무방비하게 그에게 기대어 중얼거렸다.
"다른게 있긴 한데, 그건 조금 이따 얘기할래요."
그건 부탁이라기보다 강요에 가까울테니까. 그녀는 천천히 얘기하자며 기댄 채로 볼을 살살 부비며 작게 목 굴리는 소리를 흘렸다. 두 팔은 그를 끌어안고, 두 손은 매달리듯 그를 붙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기분이다. 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떤 기분도 감정도 들지 않았는데. 윤으로 인해 흔들리고, 바뀌어가는 저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아, 이제 혼자로는 돌아갈 수 없겠구나.
"음, 있죠. 선배. 졸업하고 나가면 뭐 할 거에요?"
얼마간 말없이 어리광을 부리던 그녀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불안의 기색이나 떨림 없이, 담담하게 묻고 고개를 갸웃-했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