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았다. 신빙성 없는 말이었다. 당신의 어깨에 기대 졸 날이 올거라 누가 알았을까? 그는 현실의 경계에 이성을 반걸음 걸친다. 눈을 느릿하게 한번 깜빡인다. 감는 시간이 더 많은 눈이 천천히 다시 세상을 마주한다. 이후에는 온전히 눈을 뜨고 있기에, 세상만 보면 당신이 서운해할까 싶어 눈을 마주친다. 긴 속눈썹 밑에 드리운 금빛 눈동자, 그 안의 세로로 죽 찢어진 동공을 마주하며 그가 입술 끝을 미미하게 올린다. 이 탐스러운 눈동자가 언제고 자신을 향하면 좋겠거니 싶다. 아무리 이성을 현실에 두어도 반절은 몽중에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앞으론 따뜻하게 네 곁에서 잘 테니 걱정일랑 말거라. 헌데 그리도 서러웠나?"
고분고분 대답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운지 그가 목가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양 뺨에 손을 얹으려 했다. 이후 엄지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 닦아주려 했다.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엄지를 움직여 눈물 닦아주는 그 사소한 행동도 소름이 끼치고 싫었는데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운다.
"세라피나 영애는 업무 때문에 그렇단다. 네가 원한다면 내 만나는 횟수를 줄ㅇ……."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잠이 모조리 달아난다. 몽중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있지만 노려보기는 또 처음이며, 이리도 소유감을 드러내는 발언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아가." 하며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만족스러운지 눈을 접어 웃는다. 가장 바라던 말을 들었다.
저는 늘 편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본인을 너무 낮추시지도... 그리고 너무 무리하지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편지를 매번 써주시는 것과 스레에서 노시는 모든 분들을 봤을 때, 한 분이라도 빠진다고 편해지지 않는 걸요. 저도 힘든 상황에서 저와 관계된 수 많은 사람들을 끊어본 적 있어서 무어라 깊게 말씀 드리기는 못하지만, 조금 더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편지 보내주시는 분을 포함해서 저는 이 스레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어요:) 그러니, 불상사라고 말해주지 말아주세요. 편지 보내주시는 분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요:)!!!
그럴 계획은 없다, 라고 윤은 말했다. 그 말이 가늘게나마 피어오르던 불안을 조용히 덮어 사라지게 만든다. 이제 같은 불안이 불씨를 틔울 일은 없으리라. 비로소 안심한 그녀는 제게 파고드는 그를 제 담요로 감싸며 끌어안았다. 담요 속에서 톡-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셔츠 단추 하나가 풀렸으니, 그가 얼굴을 파묻는데 방해가 될 것은 없었을 거다.
"선배가 도술을 얻을 수 없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일부러인지, 다행이라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없이 얄밉다. 돌아보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보일테니 일부러구나 하는 걸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쿡쿡. 작게 웃은 그녀가 손끝으로 윤의 등 언저리를 간질간질하게 쓸며 속삭인다.
"제가 그러고 싶다고 하면, 딱히 반대하지는 않을거에요. 한명은 정색할지도 모르지만. 음, 내가 그러겠다는데 어쩔거야.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막내인 걸."
일전에 보낸 편지에 연상의 연인이 생겼다고 했을 때도 잔소리 없이 나중에 집에나 한번 데려오라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 전에 사고치지 말고, 라고 붙어있긴 했지만. 그녀의 부모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잔소리도 아니고, 대뜸 데려가서 같이 살거라고 해도 그러라고 말하고 그 날 저녁에 한사람 몫을 더 놓을 사람들이었다. 그런 부모였기에 그녀가 이렇게 자란 걸지도.
그녀는 혼을 쏙 빼낸다는 그의 말에 다시금 작게 웃었다. 사실 그녀는 윤이 내는 소리가 정말 좋았다.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것도, 목을 울려 내는 소리도, 그것들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그의 욕망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늘 흐리멍텅한 안개 같은 사람이 저로 인해서 명확한 감정을 드러낸다는게 오싹하리만치 좋아서, 그래서 재차 귓가에 읊조렸다.
"에이, 이 정도로 혼이 빠지면 어떡해요. 가벼운 장난일 뿐인데."
가벼운 장난이라 말하며 가는 숨결을 불어넣는다. 애써 참고 있는 그를 부추기듯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입술로 가볍게 살결을 스치며 목덜미까지 고개를 내려, 굳이 옷깃 사이에 파고들어 목덜미 부근을 장난스럽게 물었다 놓으려 한다. 막지 않는다면 아프지 않게 물었을테지. 그리고 그의 어깨에 툭 기대 작게 중얼거렸을거고.
"저, 올해로 학원 그만두고 집에서 지낼거에요. 더는 배우고 싶은 것도 없고, 선배 없는 학원은 더 싫고... 그리고 선배만 내보냈다가 딴데 눈길 줄 지도 모르니까, 옆에서 감시할거에요. 목줄도 잡고 당기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있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들어 윤의 목을 감싼다.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이윽고 조르기라도 할 듯 두 손으로 붙잡는 손길이 진득하기도 하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스륵 풀어 다시 그를 끌어안고선 아이 같은 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였다.
그는 이 변화를 받아들인다. 당신이 어느덧 서럽다는 감정을 배웠다. 천천히 인내하다 보면 긍정적인 이 변화는 계속 될 것이다.
"그래, 이게 서러운 것이야. 서러웠구나."
그리 대답하며 당신을 보듬는다. 이렇게 천천히, 하나하나. 서로 알아가며 당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게 하고 싶다. 응당히 받았어야 할 것을. 그는 당신의 눈을 마주하려 하며 느릿하게 입매를 휘어 올린다.
"네가 그리도 말한다면 앞으로는 가문원을 시켜 용건을 전달해야겠구나."
그리고 당신의 뺨을 엄지로 다시 쓸어내린다. 고개를 기울이자 손목도 비스듬히 꺾인다. 당신의 논리가 어떻게 되었든 그가 이길 일은 없다. 당신을 주웠기에 그의 것이고, 그의 사람이기에 당신의 것이다. 그는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에 졌다는 양 몸을 살풋 기울여 짧게 이마에 입을 맞춰주려 했다. 거절하지 않는다면 콧대, 그 다음으로 볼, 기어이 입술에 짧게.
"네 것이다. 모두 너의 것이야. 그러니 아파하지 말아."
그리고 당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 자신을 모두 주었는데 당신도 그에게 온전히 주었으면 하기에. 그가 나직히 묻는다. "아가. 만일 네게 백정이라는 자리를 포기하라 한다면 넌 어찌 할 것이더니."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