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수긍했다.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고 불구경이 속담으로 남은 것도 이유가 있었다. 본인이야 어떻든 남들이 보며 하는 판단은 다르지. 그러며 다리를 휘두르다 멈춰서 허수아비의 양 어깨에 발을 대고 섰다. 어쩐다. 고민이네. 지한 누나가 말을 걸어온 건 그 쯤이다.
" 으응. 발판이 불안정해서 말이에요. 익숙하지도 않고. "
땅에 내려선 뒤 허공에 꽃을 피웠다. 허공에 뿌리내린 듯 움직이지 않는 연꽃이었다. 줄기도 없이 덩그러니 떠있던 연꽃은 곧 파스스하고 사라졌다. 내 발은 크지 않았고 발판으로 삼기 충분한 크기였지만 아무래도, 안정감이 없었다.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었고 나 자신도 허공에서 방향을 비트는 건 아직 익숙하지 못했다.
"허공에서도 어느 정도 움직임이 보장되면 편리할 거 같아서 시도하고 있는데 힘드네에 "
가볍지만 높게 뛰어올라 다시 피운 꽃 위에 섰다. 한 발로 균형을 잡고 있다가 꽃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내려섰다. 좀 더 크게 피워볼까?
허허. 노인같은 웃음소리를 내다가 빠르게 몸을 돌려 허수아비를 올려찼다. 쭉 뻗은 다리가 허수아비를 타격하고, 그 중심에서부터 분홍빛 꽃잎이 펑하고 터지듯 주변에 퍼졌다. 이게 무슨 효과가 있냐고? 시야를 가려 이후 행동에 제약을 두는 데에 좋다. 추가적인 데미지도 들어가는 것 같았고. 의념을 둘러 치는거니 그냥 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이런건 익숙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 여러송이를 피워서 하는 것도 좋긴 하겠다. 의견 고마워. "
그러면 안정감이 올라갈 것 같긴 했다. 대신 좀 느리려나? 하나를 피워내는 것과 여러개를 피워내는 건 다르고. 그래도 시도해볼 만한 일이긴 했다.
" 그치? 아 예측은 괜찮아. 기본적으로 아까 했던 것처럼, 꽃이나 꽃잎으로 적의 시야나 감각을 방해하는 거 잘하거든. "
빠른 기동성을 살리는 전투방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에는 교란을 특기로 삼는 경우도 있고, 나는 거기에 살짝 발을 걸쳤다. 간파 당했다면 그것대로 페이크를 줄 수도 있다. 현실은 이론이 아니지만.
원래 스킬 이펙트라는 건 양날의 검이다. 게임하면서 화려한 이펙트 때문에 공격 패턴을 못 보고 죽은 경우는 누구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과거 친구들과 게임할 때 파티원 이펙트를 끄지 않아서 눈갱을 당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건 현실이라 아군 이펙트 해제도 못한다. 심지어 후각까지 영향을 받으니 조심해야 했다.
" 어차피 두곳 다 찾아갈 생각이었으니까. 협업 해주면 나야 고맙지! "
그만큼 두 배로 까일 가능성이 아른거리지만 괜찮다. 꽃이 먼저 펴야 열매가 맺으니, 결과를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게 고통스러워도 말이다! ..하는 생각은 지한 누나가 떨면서 덧붙인 말에 급격하게 기운을 잃었다.
" ..맞아? 폭력? 교육을 받는데? "
어느 정도이길래 헌터 교육생이 몸을 떨 정도인거지. 내 눈도 저절로 떨렸다.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실전위주 교육이라면 정말로 두들겨 패면서 가르칠 수도 있지?
서 윤. 십육세 나이로 교관에게 굴려져서 사망. 이러면 학교 이미지에 좋은 건 없을테니 복수도 하고 가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의뢰나 게이트 사건 같은 게 아니라 교관들이 죽인거면 진짜 큰일이긴 하겠다. 진짜 죽도록 아프게 맞았던 것 같은 누나를 보면서 조금,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다.
" 대체.. 대체? "
그야말로 후드려 맞은 건가. 사람을 샌드백으로 삼는 무서운 교관이 여기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싫었는데. 으으 하고 질린 음성을 내다가 하나 궁금해진 것이 있어서 물음을 던졌다.
"커리큘럼 확인해보면 시험기간엔 죽을 것 같은 구성입니다." 복수를 하고 간다는 것에 옅은 미소를 짓습니다. 꾸준히 공부해두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라고 말하며 지한은 공부할 것들을 생각합니다. 책도 아직 다 못 읽었는데.. 시험이 다가올지도. 인가.
"의뢰도 구해야겠고.." 호박머리도 깨야지.. 라는 생각이 튀는 것은 윤의 질문에 다시 돌아옵니다.얻은 것.. 있었죠. 그렇죠?
"있었습니다." 약점을 보호하는 것이라던가.(약점 보호 F) 맞고 나서 의념 활용학이나 게이트학 수업 덜 들어서 고생 굴러가며 습득했던 것..(의념 공진 F)(MVP=태호 및 다른 레스주들)이라던가요.. 라는 말을 합니다. 얻은 게 있었으니 다행이지 맞고 얻지도 못했으면 매우 슬펐을 것이다...
공부머리가 좋은 게 아닌 미소년은 시험기간 일주일 전부터 교과서에 머리를 박는게 보통이었다. 시험 점수는 나쁘지 않게 나왔지만 시험 뒤에 머리에 남는 게 없었다는 게 문제지.. 수학 문제는 이제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작년에 뭘 배웠더라. 지한 누나가 의뢰를 구해야겠다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얻는 게 있었다고 하자 웃음이 났다.
" 그러면 괜찮겠는 걸.. "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러면 좋다. 괜찮다. 얻는 것 없이 쳐맞기만 하는 건 물론 싫다. 아프고 싶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일단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 하루 종일 얻어 맞는 걸로 확실히 얻는 게 생긴다면, 나쁘지 않아. 응, 꽤 괜찮아! "
아픔 정도는 견디면 된다. 죽지 않는 한 겪고 회복하면 된다. 죽음의 문턱이 내 앞에서 인사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얻는 게 있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강해지고, 훌륭하게 한 사람의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조금 흥분한 듯 하여 숨을 가라앉혔다.
양 손바닥을 마주대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터트려, 벚꽃 봉오리 하나 터지듯 맑고 자그마한 소리가 났다. 나는 영성도 높은 편이 아니니까 힘낼 수 밖에. 복습 열심히 해야겠지..
" 고마워 누나. 누나도 힘내! "
시원한 음료수를 들고 인사했다. 근데 방금 뽑은 것처럼 시원한 것 치고 아까까지 음료수 뽑는 건 보지 못했다. 냉기나, 유지 관련 의념을 지닌걸까?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에 허수아비가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얼마나 걸릴까? 익숙한 꽃내음이 코를 간지른다. 내 눈을 닮은 분홍빛 꽃잎이 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