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대구에 들린 적 있어. 그곳의 게이트는 언데드가 컨셉이었던 모양인데 파티에 위관급 가디언 셋이 포함되어선 생각 이상으로 게이트를 빠르게 공략해나갔지. 그러다가 게이트의 보스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보스가 좀비였던 거 있지? 좀비가 왕관을 쓴 채로 근엄하게 왕좌에 앉아있는 거야. 그 장면을 보곤 웃음이 나와서 경배하듯 손을 들어올리고 말했지.
새벽 4시. 눈을 뜨면, 홀로그램 화면에 청록색 숫자가 떠서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인천 광역시의 마천루들은 하늘로 빛을 쏴댔다. 빈센트는 수평선에서 올라오는 태양의 파랑과 힘을 합쳐, 이 세상의 어둠과 싸우는 것을 감상했다. 때가 되었다. 아직 '작업'을 시작할 시간은 아니었지만, 빈센트가 '준비'를 시작할 시간은 되었다. 허우적대며 일어난 빈센트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얼음물을 마시고 욕실로 들어가 온 몸에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사기를 당했을 때의 분노 때문에, 탄호동의 마약굴을 불태울 때의 희열 때문에, 빈센트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지금은 그것을 식힐 필요가 있었다. 빈센트는 차가운 물을 맞으면서, 눈을 감고 피식 웃었다.
"나도 참 웃긴 인간 군상이란 말이죠."
빈센트는 사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냥 사기꾼을 신고해서, 사기꾼을 잡아 처넣은 다음에 그 중고 거래를 위해 지불한 금액을 돌려받거나, 아니면 합의금 명목으로 새 물건을 그놈 돈으로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마약을 위해서 수습할 수 없는 사기를 친 마약 중독자였고, 그 때문에 빈센트는 화풀이 용도로 탄호동의 건물 하나를 불태워버렸다. 그곳에는 변변한 소방서도 없었고, 그곳에서 난 불이 다른 곳을 덮쳐야 소방차가 출동할 테니 빈센트가 어떻게든 수습했지만. 그리고 지금, 빈센트는, 의념 각성자가 몇이나 있을지, 대 의념 각성자 장비를 얼마나 갖추었을지도 모르는 인신매매 조직으로 혼자 들어가려고 한다.
멍청한 마약 중독자 하나가 일으킨 일치고는 나비효과가 너무 컸다. 어쩌다가 빈센트가 여기까지 왔을까? 빈센트는 식은 몸을 닦아내면서 고민했다.
그 불쌍한 마약 중독자를 위해? 죽음의 계급화를 타파하기 위해? 그들의 마약 때문에, 그들의 악업 때문에 죽어간 수많은 불운한 영혼들을 위해?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세계의 공의를 위해? 정의를 이 땅에 다시 세우기 위해?
아니, 그건 아니었다. 빈센트는 그런 인류의 대의를 위해 봉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을 위해 죽는 건 위인전 속 위인이면 족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것도 괜찮다. 다음 번에는 이렇게도 한번 싸워봐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빈센트는 그것을 위해 인천까지 달려온 것은 아니었다. 빈센트의 동기는, 더 개인적이고, 더 이기적이었다.
사기당한 게 화나서? 범죄자들 생긴 게 좆같아서? 사람을 불태우징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려서? 어쩌다보니 엮여서?
대의보다는 좀 더 그럴싸하고, 빈센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몇 가지는 그런 이유로 저질렀지만, 빈센트는 더 좋은 답을 알고 있었다. 정장을 갖춰 입은 빈센트는, 문을 열면서, 웃으면서 그 답을 내놓았다.
"재미있으니까."
빈센트는 자신이 얻은 모든 정보를 짜맞췄다. 한글 초성과 키릴 두문자어로 구성된 복잡한 인신매매 광고문을 독파하고, 수많은 '판매 품목'들의 원산지와 '생산자'들을 특정했다. 그들 중에서 동아시아에서 노예를 주로 수집하는 이들을 선별했다. 그리고 그들을 현지 수집책과 중간 운반책으로 나눴다. 심문 결과에 따르면... 빈센트가 노리는 이는 "노예 수집"과 "노예 운반", 그리고 "노예 판매"를 모두 겸하는 조직인 것 같았다. 빈센트는 토르 v2. 브라우저를 실행하고, 그들에게 향하는 비밀 암호문을 입력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확인했다. 그들은 참 많은 것을 팔고 있었다. 빈센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찡그렸다.
인종도 백인, 흑인, 이 정도가 아니었다. 백인을 예로 들면 켈트, 게르만, 슬라브...였고 미국, 영국, 러시아, 이란 등등 개체의 "원산지"까지 꼼꼼하게 따졌다. 나이와 복종도 같은 것까지 전부 나와 있었다. 빈센트는 그들을 보다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면서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자주 묻는 질문"란이 나와있었다.
Q: 의념 각성자도 취급하나요? A: 미쳤냐?
"...그렇군요."
빈센트는 상대 조직이, 어렵긴 하겠지만 파훼가 불가능한 조직은 아닐 것이라고 예측했다. 의념 각성자를 팔아먹으려는 조직이면, 상식적으로 의념 각성자를 짓누를 수 있는 보험이 있어야 한다. 의념 각성자가 행패를 부린다면 사람 하나 둘 쯤은 매일 죽어나갈테고, 이판사판이 되어서 아무나 멱살 끌고 지옥으로 들어가자고 한다면... 조직의 존망이 걸린 문제가 될 테니까. 하지만 그 정도 보험을 갖출 수 있는 조직은 아니다. 저 조직은 의념 각성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의념 각성자를 억누를 만큼 강한 조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빈센트는 브라우저를 끄고, 인천광역시 경찰국 사건파일을 보았다. 보도자료 정도였지만, 빈센트는 그 안에서 행간을 읽어냈다. 상대는 (가디언 기준으로) 위험도는 낮아도 군대와 같은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군대의 조직체계라면, 이 피와 살이 넘쳐흐르는 세계에서 군대의 무기를 가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빈센트는 잘못하면 뒤통수에 총알이 꽂힐 수 있음을 상기하고, 그들의 경계를 깨버릴 방법을 생각했다. 다행히도, 개활지가 아니라 항구. 컨테이너와 크레인 같은 엄폐물들이 가득하다. 그렇기에 저들은 빈센트를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군요. 이제는 시작해야겠어요."
택시에서 내린 빈센트는, 인천항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청력을 최대한으로 강화한 빈센트의 귀에 여러 소리가 들렸다. 비통에 찬 울음소리, 끔찍한 비명소리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거래하고 협상하는 목소리였다.
- 그 정도로는 안 돼. 요즘 단속이 얼마나 빡세졌는데. 게다가 이 미친 놈들아. 이번에 뭘 납치했는지 너네가 알기나 해? - 이봐, 그런 말 들은지가 몇번째야. 여태껏 문제 없었잖아. 여기서 더 가져가면 우리 뭐 남는다고. - 여태껏 아무 문제 없었던 게 나 덕분이지 너네 때문이냐?
빈센트는 어둠 속에 숨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펑퍼짐한 재킷을 걸친 여자고, 한 명은 경찰이었다. 단속 현장을 가장하려는 것인지, 길바닥에는 수많은 노숙자들이 뒤로 꿇려서 수갑에 결박당한 채 누워있었다. 빈센트는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적당히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들려오는 소리에, 빈센트는 멈춰야 했다.
- 경찰 나리. 이렇게 하지. 이번에 들어온 애들 중에... 저기 밑바닥 빈민가 거지들 사이에서 사온 애치곤 꽤나 반반한 놈이 있어. 대어야. 대어. - 그래서? 뭐 어쩌라고? - 그 녀석을... "운반 과정 중 유실"된 셈 치고, 댁에게 넘기지. 어때? 자, 봐봐 사진을... - 밥만 축내는 노예 새끼가 얼마나... 뭐야, 이거 좀 괜찮네?
"..."
찾았다.
빈센트는 웃으면서, 어둠 바깥으로 나와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좋아. 딜. 이 녀석으로 해. 대신에 사진 보정빨 먹인거면 너네 각오해."
"알았어. 알았어어어?! 저새끼 뭐야!"
경찰과 여자가 놀라서 빈센트에게 삿대질을 날렸다. 빈센트의 맞잡은 양 주먹이 이글이글 불타는 것을 보면서, 두 사람은 빈센트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최소 의념 각성자, 최대 가디언. 정확히는 그 중간인 헌터였지만. 경찰이 권총을 꺼내 겨누고, 여자도 질 수 없다는 듯 칼을 꺼냈다. 빈센트는 여자가 든 칼에서 알 수 없는 의념의 흐름을 느끼고 눈을 찌푸렸다. 젠장, 의념 각성자였나.
"멈춰, 손 들고 무장 해제해! 경찰이다!"
"그딴 말이 통하겠어?! 야! 그만 쳐 누워있고 저새끼 덮쳐!"
그 말과 함께, 바닥에 누워있는, 또는 누워있는 척하던 이들이 수갑을 힘으로 풀고 빈센트에게 달려들었다. 빈센트는 손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불을 던지고, 불은 바닥에 닿더니 빈센트의 의념을 연료 삼아 타올라서 그들을 덮쳤다. 그 모습은 마치 수천 마리의 붉은색 늑대 같았다. 흐아악! 으악! 빈센트에게 달려들던 잡졸들이, 자신의 몸에 달려드는 불타는 늑대에게 물렸다.
"으악! 살려줘!"
"아아악! 흐끄아아아악!!!!"
의념을 각성하지 않은 악당은, 몇 명이 와도 그저 놀잇감일 뿐이다. 빈센트는 그들에게 흥미를 거두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오, 꽤나 머리 쓰는군. 빈센트는 웃으면서 그 사람을 본다. 빈센트에게 집중한 나머지, 자기의 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군. 빈센트는 지그재그자로 달려오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머리 위에 술식을 그렸다.
클랩!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두 팔이 날아갔다. 여자는 어떻게든 빈센트를 죽이려고 허우적댔지만, 비어버린 양 팔은 애석하게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의 사라진 두 팔을 보고 패닉에 빠졌다. 빈센트는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보면서 혀를 찼다.
"좀 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지그재그자로 오건, 아니면 직선으로 오건, 결국 당신은 날 찌르기 위해 온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고 경찰에게 다가간다. 수십명을 불태우고, 의념 각성자의 양 팔을 날려버린 괴물이 다가오니, 경찰은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 두 눈은 눈 앞에 다가오는 불타는 죽음을 보고 풀렸고, 입도 뭔가 달싹거리면서 말을 만들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 됐다. 협조는 잘 하겠군. 빈센트는 아직 식지 않은 손으로 그의 목을 잡고 물었다.
빈센트는 베로니카와 자신이 어떤 사이였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일단 연인 관계는 아니다. 연인 관계는 상호간의 사랑이 있거나, 식었더라도 한때 진심으로 가득차서 사랑했던 때가 있어야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이게 사랑이면 스토킹 때문에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은 저승으로 사랑의 도피를 한 셈이리라. 그렇다면 스토킹당하는 관계일까? 그것도 100% 맞는 말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이 관계에서, 빈센트는 엄청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베로니카가 죽어도, 빈센트가 죽어도 완벽한 베로니카의 패배였고, 베로니카가 모든 것을 잃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일까? 그것도 아니다. 빈센트는 한때 그녀를 그렇게 취급했던 적이 있다.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베로니카를 죽을 수도 있는 곳에 던져두기도 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니, 깊게 생각하지 맙시다. 표면적으로는 친구입니다. 친구."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더 생각했다가는 빈센트도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빈센트는 그러면서 이야기를 덧붙인다.
빈센트의 말을 들으면서, 태호는 오른손을 가볍게 말아쥐고 입가로 가져가면서 콧소리로 모든 의사표현을 마칩니다.
소설이나 만화책에서나 보일 법한 러브코미디의 왕도적 전개! 베로니카라고 하는 여자애가 지금 깨어있지 않다는게 다행인 상황인지, 아니면 아쉬운 상황인지 가볍게 턱을 쓰다듬던 태호는 엄지와 중지를 맞대 튕기면서 생각을 멈추고 그대로 손을 뻗어 빈센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줍니다.
" 그래, 일단은 친구. 알겠어! "
참고로 태호의 머릿 속에서 이 '일단은 친구'는 친구와 여자친구 사이 그 어딘가인 러브코미디식 용어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는 사실.
러브코미디의 참맛은 이 애매한 거리감이지, 암! 그리고 이제 이 애매한 거리감을 차차 좁혀나가는것이 순리! 옆에서 그걸 은근슬쩍, 간혹 대놓고 도와주는것이 내 포지션에서의 역할! 아아, 나중에 깨어있는 베로니카랑 빨간 친구(아직도 빈센트의 이름을 모른다)를 시내에서 만나거나 할 때가 기대되는구만...
일단은, 이라. 빈센트는 한태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좀 더 제대로 말할 걸 그랬다. 빈센트와 베로니카의 관계는, 빈센트는 베로니카에게 있어 일방적인 사랑의 대상이었고, 베로니카는 빈센트에게 일방적인 악우였다. 빈센트는 베로니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 이 사람 앞에서 할 생각은 아니고, 빈센트는 상대에게 말한다.
"어쨌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베로니카가 잠들었을 칸막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빈센트를 찾는 것 같았다. 빈센트는 베로니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때, 자기가 없으니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아. 열 명 정도.." 여기가 그렇게 맛있다는 집인가.. 서울 대치동의 미리내고의 위치와 가까운 맛집은 언제나 붐빕니다. 그나마 다행히 이른 시간에 와서 웨이팅이 적은 느낌이긴 한데. 한 타임정도만 돌면 먹을 수 있겠네요.
...어쩐지 저 뒤에 있는 이가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색이 돕니다. 태호 씨인데요. 여기에 관심이 있으셨나? 라는 의문이 듭니다.
"일행이 있으신가요?" 라고 앞쪽에서 차례대로 물어보는 점원에게 혼자입니다. 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저 뒤쪽에서 자신을 반짝반짝 보고 있는 태호 씨를 보고는 올 거면 오라는 듯 빤히 보는 중입니다. 염치 불고하고 끼면 자신에게 물으려 오는 점원에게 둘이에요.라고 말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