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대구에 들린 적 있어. 그곳의 게이트는 언데드가 컨셉이었던 모양인데 파티에 위관급 가디언 셋이 포함되어선 생각 이상으로 게이트를 빠르게 공략해나갔지. 그러다가 게이트의 보스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보스가 좀비였던 거 있지? 좀비가 왕관을 쓴 채로 근엄하게 왕좌에 앉아있는 거야. 그 장면을 보곤 웃음이 나와서 경배하듯 손을 들어올리고 말했지.
레벨이 38이란 소리에 달아올랐던 호기심이 갑자기 차분해지는걸 느끼면서 빈센트를 따라간 태호가 커튼 틈으로 본 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금발의 여성분. 피를 보면 미치는 광전사라는 이전의 이야기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모습에 순간 벙쪘던 태호는 정신을 차리곤 곧장 빈센트의 옷깃을 부여잡고 압박수사를.. 아니, 38레벨을 자극해선 안되죠. 잡았던 옷깃을 슬쩍 놓고 이너-피스를 되찾기 위해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태호는 차분한 목소리와 정중한 톤으로 한마디 말을 내뱉습니다.
" 죽어, 이 기만자. "
이런. 포장지는 그럴싸한데 내용물은 영 꽝이네요!
" 일단.. 알았어. 겉보기로는 그렇지 않아도 실상은 위험한 사람이란거지? "
누군가 이 베로니카란 여성분에게 시비를 걸거나 집적거린다면 보다 커다란 재앙이 되기 전에, 자극을 주는 쪽을 제압해라. 빈센트가 알려준 대응법을 머릿 속 한 구석에 저장한 태호는 다시 빈센트를 바라봅니다. 베로니카의 얼굴을 보기 이전과는 다른, 약간 가라앉은 눈으로
영 꽝, 보다는 재앙이 맞지 않을까,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빈센트가 어떻게 베로니카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빈센트가 범죄자에게 내리던 가장 인도적인 조치는 죽음이었으니까. 게다가 베로니카의 범죄 행각이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예를 들어 살해된 피해자가 베로니카의 가족을 죽였다던지, 아니면 베로니카에게 사기를 쳐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던지.)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녀를 죽이려 했지만, 빈센트가 그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빈센트가 망념을 감수하고 불을 쏴도 베로니카는 웃으면서 맞았고, 목을 조르면 마치 어린아이가 철봉을 짜부라뜨리겠다고 붙잡고 낑낑대는 느낌이었다. 결국 포기한 빈센트는, 나중 가면 그녀를 강하지만 위험한 도구 정도로 취급하기 시작했지. 하지만, 무슨 일인지, 어느샌가 빈센트는 그녀를 여전히 신뢰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마음을 열게 되었다. 인간이 어찌나 이리 간사한지. 빈센트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옛날이었다면 그저 다른 이들을 베로니카로부터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은 베로니카를 베로니카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빈센트는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기로 하고, 한태호에게 말한다.
"그래도... 멀리하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제 친구, 뭐 그런 느낌이니까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베로니카만큼 괜찮은 친구가 없으니, 정말로 말이 잘 통할 겁니다. 평소에는."
고요하고 별조차 뜨지 않는 밤보다 짙은 색을 지닌 소년은, 자신의 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은 기이할 정도로 어두워서 가만히 뜬 채 무표정하게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도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은 가능할 것이라는 예전의 농담을 소년은 여즉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별로 상처인 건 아니었습니다만, 타인에게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건 신경쓰이는 일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소년은 잘 몰랐지만 웃음이 많은 성격이었으며 한 번 웃음을 배우기 시작하니 이제와서는 웃지 않는 게 어색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인 표현이긴 합니다. 오늘도 소년은 제 무표정을 보고도 무서워할 사람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특별반의 수업이 끝나고 일어나던 참이었습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멍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기울이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짙은 남색이 밤하늘을 떠오르게 만드는 장신의 마른 사내였습니다. 삼백안이 눈에 띄었고, 그 눈과 가만히 마주치고 있던 소년은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커다랗게 떴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방긋 미소지었습니다. 그 뿐입니다만, 기이하고 공허하던 인상이 단번에 순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잠시 웃는 얼굴로 사내를 보던 소년은 거침없으나 단정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안녕하신가요?"
하는 말은 그저 평범한 인삿말이었습니다. 자세는 바르고 양 손은 곱게 아랫배 쪽에 모아둔 예의있는 자세였습니다.
언제나 태양에 가려져 살아가는 별은 자연스럽게 빛나는 것을 꺼려하기 마련이다. 지금 눈 앞에 나에게 다가와 안녕하신가요 라고 예절 바르게 인사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까칠하게 인사를 받아친 나는 얌전히 그를 지켜보며 그의 행동을 가늠했다. 과격하게 예절이 바르고 적을 만들기 싫어해 보이며, 미움 받기 싫어해 보인다.
"넌 파필리오 라고 했던가? 그래서 나에게 찾아온 이유는 뭐야?"
살짝 으르렁 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매점에서 사온 팩음료에 빨대를 꽂으며 마시기 위해 입가에 가져다 대다가, 문득 그의 시선을 보면서 견주어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소년은 생글 웃었지만, 눈썹은 살짝 쳐졌습니다. 다만 이는 상대의 날 선 반응에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저 조금, 상대가 걱정될 뿐이었습니다. 대체로 까칠한 행동의 기저에는 좋지 않은 기분이 깔려있으며 이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년은 초면인 상대에게 거기까지 관여할 건 못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말입니다.
"방금 눈이 마주친 듯 하였기에. 그리고ㅡ 같은 특별반인 만큼 다소의 친교는 필요할 듯 하여서."
자신의 목적을 말했고, 상대, 준혁이 미리 알려둔 자신의 지뢰 요소에 대해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덧붙여 소년은 준혁의 가족 사항에 대해 짐작하는 게 없었습니다. 지식이 많았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소년의 특성은 그에 관련된 건 없습니다.
"들어본 적은 있네요. 보통 체스는 경험해 본 적 있습니다만, 그것도 별로 잘하진 못했기에 손 댈 엄두도 못내고 있지요."
부끄럽다는 듯 소년은, 자신의 뺨을 긁적였습니다. 소년은 게임을 잘 하는 편은 아닙니다. 애시당초 경험이 드문 것도 있습니다만, 전략안이 특출난 것도 아니니까요. 남들만큼은 하지만 그 이상은 조금 힘듭니다. 지식을 쌓고 지혜를 다듬는다면 더 나아질 것이 분명합니다만 소년은 당장의 배우는 것들 만으로도 벅찹니다. 적어도 소년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글쎄요. 어쩔 수 없는 게 아닐지."
의외로, 쓸모에 대한 이야기에 소년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근처의 빈 자리에 앉고 톡톡, 자신의 손 등을 두드렸죠. 천천히 내뱉은 말에는 소년의 생각보다는, 헌터로써 작동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이야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희는 헌터고 의뢰라는 것은 대부분 목숨의 위험을 동반하니,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하는 건 일정 부분 어쩔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라고 하며 소년은 잠시 말을 끊었습니다.
"게이트의 특징과 의뢰 내용, 사람의 성향과 능력의 조합에 따라, 준혁 씨가 말하는 '쓸모'란 건 매우 달라지기 마련이니 전략전술에 흥미 깊은 사람이라면 이런건 즐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웃는 얼굴로 정말로 기뻐합니다. 칭찬에는 솔직하게 반응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감정에 적당히 솔직합니다. 숨겨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요. 그들은 같은 특별반 소속이며 완벽한 타인이 아닙니다. 언젠가 같은 의뢰에 갈 일도 있을테죠.
소년은 즐거운 일에 대해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습니다.
"누구를 잠깐 재워줬던 것과, 누구와 놀 약속을 잡은 것과, 누구와 차를 마셨던 것. 정도일까요?"
소년은, 상냥하게 웃으며 '어중간하게' 대답했습니다. 이건 고의입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정확히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흘렸습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만 진실을 숨기는 것은 합니다. 경계하지 않습니다. 적이 아니니 굳이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사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보니까 사람 이름은 말하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어느 쪽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