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빌런이죠. 하지만 세상에 빌런도 많지 않습니까. 돈을 좋아하는 빌런, 그냥 사람 죽는게 좋은 빌런, 아니면... 신념형 빌런. 그런 이들이 있죠. 의념의 유무가, 우열을 가린다고 진심으로 믿고,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자위하는 멍청이들 있지 않습니까."
빈센트는 그 때의 이야기를 한다. 다행히도 바닥의 먼지가 흩어지는 것조차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진 시력으로 적의 위치를 알아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빈센트는 목이 잘린 채 인천항으로 가는 택시 정거장에 누워 있다가, 고깃덩이가 되어서 이 땅을 흘렀겠지. 통제를 완전히 잃어서, 목걸이고 뭐고 민간인과 빌런을 구분하지 않고 죽여버리다가 결국 진압당할 베로니카는 덤이었으리라.
"별 일이 없는 것. 사실 그게 제일 좋죠. 음... 100% 좋은 건 아니지만,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이라면, 제일 좋은 것이죠."
"빌런이 많군요.. 그렇죠.." 의념의 유무가 우열을 가린다는 걸 들으니.. 다윈주의자가 생각나는군요. 라고 말하며 그들과 관련이 있었다면 상당히 고전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빈센트를 바라봅니다.
"...맞습니다. 보통은 그렇긴 하지만. 특별반이고, 헌터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면 그건.." 어쩌면 도태에 가깝지 않을까? 라는 것은 말하지 않고 말끝을 얼버무립니다. 로프에 관심을 가져서 화제가 돌아간 것에 집중합시다.
"제작자가 의념을 이용해 제작한 로프라고 합니다." 의념을 통해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하네요. 이렇게요. 라고 말하며 지한은 의념 로프를 짧게 줄여봅니다. 이정도 망념은 허용범위인 것 같습니다. 비교적 비싸지는 않고(500gp였으므로), 구하기 어렵지 않았네요(잡화점에서 구했으므로). 라 말하는 지한입니다.
빈센트는 로프가 줄어들었다가, 늘어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나중에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구할 대, 빠르게 끌어내는 용도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거기에 더해 500gp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잡화점 같이 편히 갈 수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중에 장기간으로 바라봐야 하는 의뢰를 수행할 때 저 로프를 반드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잡화점에서 살 수 있는 용품이 꼭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빈센트는 호기심이 동해서 지한에게 물어본다.
"그러고보니, 잡화점에서 다른 흥미로운 건 안 팔던가요? 아니면, 흥미롭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도움은 될 물건이라던지."
안타깝게도, 의념 로프라는 것보다 빈센트의 마음을 잡아끄는 물건들은 없었다. 블루밍, 힐팩 등등. 다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그런 평범한 물건이고, 그렇다고 해서 의념로프의 신묘함을 이기는 것도 없었다. 빈센트는 그냥 그런 물건들이 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감각을 강화할 수도 있겠다는 말에 턱을 쓰다듬다가 말한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눈을 강화한다면, 저 바닥에 있는 미세한 먼지가 은신한 적의 발걸음이 만드는 진동, 아니면 바람 때문에 휩쓸리는 걸 감지할 수 있죠. 만약 청각을 강화한다면, 어느 방향에서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오히려 감각을 둔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빈센트는 한 가지, 반대로 가는 가능성을 제안한다. 인간이 가진 감각들은 모두 제 나름의 쓸모가 있었지만, 어떤 감각은 때에 따라서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통증, 정말로 좋은 것이다. 통증은 동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경보 체계다. 만약 0과 1로 이루어진 전기와 전자 가닥들의 집합체였다면, 시스템 점검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겠지만, 다세포로 이루어지고, 신경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에게는 고통만큼 좋은 경보가 없었다.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엉덩이에 불이 붙어도 다리가 불타고 온 몸이 불타서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고, 개가 지나가다가 다리를 물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통증이 너무 심하면, 해야 할 일도 못 하게 되니까요. 온 몸이 불에 타는 고통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꿋꿋이 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는요, 빈센트는 손을 딱딱 튕겨 불꽃을 만들며 말한다. 그렇기에 사람이 불타는 게 보기에는 제일 재밌습니다만, 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빈센트는 겨우 삼키고, 나올 뻔한 말을 수습하려는 듯 말했다.
"뭐... 아무튼, 싸워야 하는데, 고통을 무시하고 싸워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의념으로 강화한다, 는 느낌은 익숙하지만, 둔화한다, 는 건 낯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통증을 참는다고 해서 그것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어디서 본 것 같다. 거기서는 뭐라더라? 통증을 참으면 그 통증 말고 더 강한 통증을 주어서 문제해결을 하라고 재촉하는 게 되니 재깍재깍 받아들여라.. 라고 하던 것 같았다. 불타는 고통 속에서도 할 일을 하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도 무서운 게 아닐까. ...음. 열망자라도 일반적으론 못하지 않을까?
"가장 고통을 줄이는 데 좋은 건 치료를 받는 거겠지만. 일시적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일시적으로 감각을 둔화시켜 통증을 줄이고.. 라고 생각하는 지한은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낯설다는 것에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알아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고.. 아니면 부상 상태일 때, 감을 잡을 수도 있겠지요." 치료 쪽 기술을 가진 분에게 물어본다거나요. 같은 여러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며 느긋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치료를 받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이 있으니까, 저는 그 상황에 쓸만한 기술이 없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여러가지 예를 든다. 눈 앞에 있는 보스가, 인간의 정신을 교란하는 종류라서 통증 민감도를 10배로 올렸다면 그 상황에서 그들이 아는 현대 의학이 해줄 것은 별로 없다. 또한, 오크가 당장 우리의 무릎을 부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우리의 두개골을 부수려 할 때, 현대 의학이 3초만에 박살난 무릎을 다시 원상복구시키거나, 고통을 없애줄 방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럴 때는 (의학의 도움을 제외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했고,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는 의지주의적 해결책은, 진짜로 그 의지를 강인하게 만들어주는 처치가 없는 한, 빈센트는 혐오하는 편이었다.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고, 부상 상태라는 말에 수긍한다. 부상이라, 인간의 모든 기술은, 일상생활과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것에서 그 발전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부상을 입어서 요양중일 때, 마취제 없이 고통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면, 그때는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흠... 제 경우는, 통각 신경만 골라서 선별적으로,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순식간에 불태워버려서 고통을 못 느끼게 한다던가, 지한 씨는 통각 신경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정지'시킬 수도 있겠군요."
지한의 경우는 꽤나 합리적으로도 보이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자신에 이르면 차라리 불태워 죽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무식한 방법을 제시하는 빈센트였다.
"치료를 받을 수 없을 때.." 망념의 문제일 뿐이지. 건강을 강화하는 것이 어느 정도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건강이니만큼. 의념으로 강화하면 내구도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무식해 보이는 방법을 빈센트 자신에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듯이 제시하는 것에 지한은 살짝 움찔합니다.
"저야 뭐.. 그렇게 할 수도 있을지도.. 이긴 한데. 빈센트씨의 방법은 조금 무리한 신용대출 같아보이니까요." 무리한 신용대출은 신용불량자의 길이니만큼. 주의해야 합니다. 아니 이게 아닌데.
"수련이나.. 여러 경험을 경험하신 분들의 조언을 들어보고. 안 되면 그런 방법을 시도하기 직전까지 갈 수도 있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이론만 있으니까 말입니다. 적절한 방법으로 유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한은 천천히 일어납니다. 대화는 흥미롭지만. 숙소 정리도 남아있잖아요?
무리한 신용대출이라, 빈센트는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틀린 말은 아니라서 금방 수긍한다. 빈센트의 마도는 인간의 몸에 퍼져있는 수많은 통각신경들, 몇만 개도 우스울 통각신경들의 위치를 정확히 지정하고, 그 곳만 외과수술 수준의 정밀도로 정확하게 튀겨버릴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실력이 없다면, 그냥 아군의 팔다리를 태워버리는 꼴이 되리라.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기술은 나중에 빈센트의 마도가 좀 더 성숙되면 시도해보기로 한다.
"그렇군요... 어쨌든... 시력 훈련을 하다가 어쩌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즐거운 대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