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까지 애매하게 깨어있을 것 같기도 하고, 곧 뻗을 거 같기도 해요.... <:3 (애매) 잠 안 오는 건 제가 던져놓은 레스가 좀... 마무리 각 잡기 애매하게 끝내놔서... (고뇌) 레스를 썼는데도 뭔가 애매한 느낌이 계속 남아있는 거에요... :Q... 생각할 때는 이런 느낌 아니었는데, 글로 쓰니까 애매해졌어요... 8^8....
길었는지, 짧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포식의 순간이 지났다. 만월이 조금씩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해방감과 광기가 식고, 교복과 운동복 차림으로 쿠션 더미 위에 기진맥진하다시피 널부러진 소녀와 소년만이 남았다.
"고마워."
하는 팔을 뻗어 새슬의 머리를 자신의 팔 위에 얹어주었다. 남은 팔은 뒤통수 뒤로 들어서 자기가 벤 베개 아래 가지런히 개어져 있던 담요를 쑥 빼고는, 부시럭거리며 담요를 펼쳐서 새슬의 어깨 위에 감싸 덮어주었다. 그리곤 팔로 새슬의 어깨를- 그러나 새슬의 새끼손가락이 걸려오는 것이 먼저였다. 무엇을 약속하는지 말하지는 않앗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는 기꺼이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새슬의 손에 꼭 걸어주었다. 그는 새슬의 머리를 받아준 팔을 구부려, 새슬의 머리를 조심스레 가다듬듯이 쓰다듬었다.
"잘 자."
차가운 달이 뜬 밤이 외롭지 않았다. 길을 잃고 헤매다 돌바닥 위로 뛰어들어 온 이 가냘픈 양 또한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털 하얀 늑대는 눈을 감고 소망했다. 소망. 오래간만에 떠올려보는 단어라고 하는 생각하고, 속으로 웃었다.
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마치 노을이 지는 태양처럼 뉘엿뉘엿, 조금씩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오는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데, 칙칙한 콘크리트 천장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의 방 천장에 별나게도 은하수가 그려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소년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저번과는 다른 동글동글한 기계. 아까는 경황이 없어 소년의 방을 미처 살펴볼 틈도 없었지만, 플라네타리움이 천장에 그리는 흐릿한 별하늘 아래로 엿보이는 소년의 방에는 저번과는 달라진 것들이 드문드문 존재했다. 붙박이장을 뒤덮은 태피스트리가 밤하늘이 펼쳐진 들판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라던가.
바뀐 것들 중에는, 새슬의 머리에 팔베개를 내어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하의 하얀 얼굴도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 표정은, 어제 저녁의 그 어두운 지하실에서의 모습이 스쳐가는 악몽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히 숨 죽이는 시간, 어느새 우주로 변해버린 방에서 먼저 눈을 뜬 것은 새슬이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 절반 정도는 잠에 빠져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동안 눈을 감고, 아무런 미동도 없이.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다시 새슬이 눈을 떴다.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제 목덜미를 더듬는 것이었다. 잠들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사실 자신의 꿈은 아니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더딘 손 끝이 약간 패이거나 부어올라있을지도, 어쩌면 몇몇은 운 좋게 가라앉았을지도 모를 자국들을 더듬어 가다가, 이내 그 수를 세는 것도 그만두었다. 툭, 내던지듯 제 팔을 무릎에 내려놓고 졸린 눈만 한 번 끔뻑였을 뿐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방이 어딘가.. 바뀌었나. 한 바퀴 빙 둘러보듯 고개가 움직였으나 아직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 듯 멍한 얼굴이다.
다음으로 시선이 향한 곳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이제껏 본 것 중에서 제일 평온해 보이는 그것이, 어쩐지 스스로 빛날 리 없는 플라네타리움 속 별빛을 받아서 하얗게 부서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무거운 나른함이 담긴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슥슥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쓰다듬던 손이 돌연 반복적으로 움직이기를 멈춘다. 새슬의 손은 이제 소년의 옆얼굴로 향하고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기고, 홀린 듯 엄지로 소년의 볼을 부드럽게 쓸다가. 아차, 이러고 있으면 금방 깨려나. 문득 뒷통수를 치는 깨달음에 다시 손을 거두어 제 무릎에 내려놓고는,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았다. 슬슬,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새슬의 손끝에 하의 머리카락이 스친다.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면 근육의 형상이 선명하게 만져질 단련된 팔뚝이며 가슴팍과 별개로, 그 하얀 머리카락은 명주실타래에 손가락을 넣고 뒤적여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흐르듯 한다. 꽤 부드러워서, 쓰다듬는 보람이 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있자면, 잠결에도 그 손길의 온기를 느낀 건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그가 새슬의 손길에 머리를 디밀듯이 기대어오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분명히 자고 있었지만, 잠들어있는 와중에도 새슬의 손길은 틀림없이 그에게 가서 닿고 있는 걸까. 문득, 하의 코가 살짝 벌름거리는 것이 보인다. 자신을 쓰다듬고 있는 손에서 나는 향기를 쫓으려는 듯. 그는 조금 고개를 들었고, 새슬의 손 안에 그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하는 조그만 응석같이 작은 입맞춤을 손바닥에 남기고 고개를 다시 떨궜다. 그러는 바람에 앞머리가 스륵 흘러내렸다. 볼을 살며시 매만지는 손길에 그가 조용히 숨을 내쉬는 게 느껴진다.
새슬이 손을 떨어뜨렸다. 그는 깨지 않았다. 아니... 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눈꺼풀만이 떠졌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처럼 섬뜩하거나 무감정해 보이지 않았다. 플라네타리움이 천장에 비추는 반사광이 흐릿하게 맻혀있는 까만 눈동자는, 깊이 잠들었다가 방금 잠에서 깨어서인지 조금 애처로이 젖어있는 것도 같았다.
"......가지 마."
잠긴 목소리가 나직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잠에 젖어있는 눈으로 그는 새슬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은 아직도 걸려 있는 채였다.
>>816 내일 일어나서 보라고 미리 말해두자면 문하는 새슬이더러 가지 말라고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바래다주겠다고 할 것 같아. 3~4시쯤이면 아직 달도 다 안 떨어졌을 텐데... 문하는 개인적으로 새슬이랑 같이 아침을 맞이해보고 싶다고 해 그렇지만 그건 자고 일어나서 고민할 문제 u"u 잘 자, 새슬주!
왜인진 모르겠어. 라며 마음속으로 자꾸자꾸 자문하는 연호는,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는 답답한 딜레마에 갇혀있었다.
아랑은 침묵했지만, 연호에게 더 기대어왔다. 연호는 직감족으로 그것이 외롭다는 신호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은 것 처럼, 아랑도 아직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늑대의 외로움과 양의 외로움의 차이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 ... "
불가능하고 이기적인 말... 이기적인것은 괜찮았다.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연호 자신에게 이기적이라고 해도 그는 괜찮았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도 너무 이기적으로 굴려도 한다면 제지했겠지. 하지만 아랑이 말하는 것은 그런 느낌은 아닌듯 했다. 아무튼. 이기적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불가능한 것이라면 연호는 말하지 않을테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달콤한 거짓보다는 차라리 냉혹한 진실이 낫다고 생각하니까. 할 수 없는 일을 입에 담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 너는, 나랑 있으면 안심할 수 있어? "
다행이다. 나지막히 속삭이고서 아랑에게 다시금 살며시 기대었다. 아까까지가 무게를 거의 못느낄 만큼 살짝 기대었던 거라면, 이번에는 살짝 더 무게를 실어서 기대었다. 의지하는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랑이 연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 것 처럼, 그도 아랑이 그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랑과 함께 있으면 드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던 그는, 점점 말이 느려지더니 결국 끝맺지 못하고 흐려버렸다. 아랑이 연호의 얼굴을 보았다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를 볼 수 있었을테다. 그는 느릿하게 아랑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멍했던 표정이 조금씩, 조금씩 굳어가는게 보였다.
" 어떡하지.... "
그는 자신을 표현하라고 하면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었다. 힘만 센 멍청이, 바보, 무식한 사람.... 물론 좋은 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말들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민폐 덩어리' 라고 칭할테다. 그것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박혀있던, 자신을 수식하는 말이었다.
" 나, 너를..... "
천천히 굳어가던 표정은 이제 무표정이 되었다. 조금 겁먹은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샘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그의 눈가를 촉촉하게 적신다.
" 좋아하고 있어. "
그것은, 아랑을 향한 마음의 자각. '좋아하는 것 같다' 따위의 애매한 말은 하지 않았다. 떠오르자마자 확신으로 굳어진, 그의 마음.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그는 그녀에게 미안해했고, 또 자책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랑이 기대는 것을 피해 살며시 일어나서 그녀를 등졌다. 망연자실한 그의 등이, 어쩐지 축 처진 것 같았다.
" 너는... 랑.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
"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
이걸, 왜 이제서야 알아차린걸까. 왜 하필이면.... 걷잡을 수 없을만큼 마음이 커졌을 때야 자각한걸까. 그는 자신의 가슴을 꾹 그러쥐었다.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맺혔던 눈물이 또르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러면 안되는데. 알아차린 마음은 계속해서 커져버린다. 그럴 자격 없는데.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그녀를 걱정시켜 결국 울려버리기까지 한 자신이, 아랑에게 이런 마음을 품을 자격따위는 없을텐데. 하지만 그 마음은 자각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더더욱 커져간다.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커져가는 마음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조금 화가 났다. 자신을 자책하면서 이를 꽉 문 채 땅을 내려다보던 그는, 마침내 다시 뒤돌아서 아랑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서, 그녀의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손을 그녀의 볼에 가져다대려 했다. 그녀가 피하지 않았다면, 그 볼을 아주 살살. 조금만 힘을 잘못 주어도 깨져버리는 유리를 만지듯이 아주 살살 쓸었을테다.
" 미안해. 랑. 하필이면 내가..... 너를 좋아해서. "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그는,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이번에는 떨지 않고, 아직 흘러내리는 눈물을 무시한 채로 최대한 밝게 웃어보이면서.
정말... 정말 예상치 못했지만 아랑이가 연호를 '안심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말해준 것 덕분에 연호가 자각을 했습니다.... (널부렁) 처음 답레를 생각할때는 예상 못했는데, 써내려가다보니 연호에게 끌려가듯이.....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이미 답레에 써있긴 하지만, 연호는 자기 자신을 민폐덩어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시무룩해하긴 하지만 '응. 그럴 것 같았어' 라며 어느정도는 무던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은, 그만큼 고마워하지만 내심 미안하게 생각하기도 하죠. 덕분에 열심히 챙겨주는거구요. 그래서 '사람은 좋아하지만, 그 사람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을 자격은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끼치는 민폐를 받아주는 것만 해도 분에 차고 넘치니까... 그래서 자각한 연호는 아랑이에게 미안해하는 겁니다. '나처럼 민폐덩어리인 사람이 너를 좋아하게 돼버렸어' 라고요.... 아무도 없는 새벽에 자각한 고록을 쓰게 된 것이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모르겠어요... (쓰러짐) 실시간으로 본 사람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안부끄러운데.... 묻힐일이 없으니까 또 내일 엄청 부끄러워지겠죠...?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연호주는 도망가보겠습니다...! 주무시러 가신 분들 모두 좋은밤 좋은꿈 되세요!
슬혜의 말에 시아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꾸를 할 뿐이었다. 오히려 혼이 나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건 시아만이 알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여전히 시아는 슬혜의 눈 앞에서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슬혜에게서 눈을 떼고 있지 않았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슬혜가 어디론가 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 뭐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슬혜가 왠지 참기만 할 것 같기도 해서 "
시아는 잠시 먼 곳을 보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입술을 살짝 벌리곤 자그맣게 속삭인다. 슬혜가 자신에게 지난날의 미안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시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한순간에 날려보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기에, 슬혜가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편히 먹고 자신에게 다가오게 돕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자신이 먼저 슬혜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것. 언제까지나 슬혜만 다가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 그치? 내가 생각해도 꽤나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해. 특히나 우리 슬혜에게는 더욱 더 말이야. "
슬혜의 대답에,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아였다. 정말 자신있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슬혜가 자신을 밀어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 듯 했다. 그만큼 시아는 슬혜를 믿고 있었고, 자신을 향한 슬혜의 마음에도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 마음을 먹으면 금방이라더니, 슬혜를 두고 한 말이었으려나. "
열기를 띈 목소리를 던지자마자 자신의 팔을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슬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아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자신의 팔을 장난스럽게 물고 있는 슬혜의 뺨과 머리를, 시아는 그저 사랑스러운 듯 부드럽게 손을 뻗어 그 뺨과 머리카락을 따스하게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조금 더 기울여 슬혜에게 다가가 슬혜의 뺨에 살며시 입술을 새겨넣는다.
" 왠지 질 수 없다는 생각도 들고, 슬혜가 더 사랑스럽다는 마음도 들고.. 일단 계속 여기 서있으면 불편하겠지? "
부드러운 미소와 다르게 천연덕스럽기만한 당신의 말에 푸스스 웃음이 흩어졌을까, 그러면서도 자신을 향한 시선만큼은 떼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네, 그냥 혼내주고 싶은 것도 아니고... 잔뜩 혼내주고 싶어졌는걸요?"
당신의 말을 받아쳐 과장되게 꺼낸 말은 어찌보면 위협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었겠지만 이미 입에 걸려있는 미소가 나쁜 의미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엔 충분했으리라 생각했다.
"평소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참는다는 말이던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말이던 어차피 지금 상황에선 조금도 다를게 없는 내용이었다. 사실 아직도 당신의 속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당신은 이미 최대한으로 피력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럴 리가 없다면서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인지 모호했다. 그렇다기엔 눈에 띄게 변화한 당신이기에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나 자신에 대한 감정에도 솔직하지 못한 상황에 타인의 감정이라고 쉽게 읽을 수 있을까? 그저 부딪혀보고, 아니면 우회해서 생각해보는 방법 말곤 달리 없었다.
"후후후... 이거 완전히 당해버렸네요? 페이스에 말려든다는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자신만만한 당신에게 살짝 기가 눌렸을까, 하지만 부정적이라기보단 '어라?'싶을 정도의 느낌이었다. 이런 오묘한 긴장감을 느낀 것도 오래간만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서서히 터득해나가는 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감각을 일깨워주는 이는 여느때처럼 평온하게, 조금은 불안해보이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죠~? 단지 조심스러울 뿐, 그대야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부드럽게 뻗어진 손이 자신의 뺨에서부터 머리까지 닿아 쓰다듬듯 움직여나가자 그녀 역시 그 행동에 대응하듯 이를 드러내지 않은채 몇번인가 더 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다가도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뺨에 확실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자 바로 굳었을까, 다만 그것은 고양이가 잠깐 고장나버리는 그런 느낌과 비슷했다.
"뭐... 사랑에 관해선 좀 경쟁한대도 나쁠거 없단 이야기가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이렇게나 더 사랑한다.'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한에서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경쟁심리니까요..."
살며시 자신의 방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당신이 다시 이쪽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여오자 그녀는 가느다랗게 휘어진 눈매로 웃어보이곤 조심스럽게 위로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를 끌어안는듯 하면서도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아... 정말 사랑스럽네요... 언제부터 우리 시아가 이정도로 적극적이게 된건지~ 그래도 잠깐만이랍니다? 그래야 저녁식사도 제대로 즐기고, 본게임도 시작할수 있지 않겠나요?"
물론 당신이 금방 힘이 빠져버린다 해도 그녀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요리야 자신이 마저 하면 되는 것이고 여차하면 가만히 보듬어주면 그만이니, 당신이 갑자기 숨겨둔 근육을 드러내며 돌변하는 만화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그 어떤쪽이든 크게 문제될게 없었다.
시아는 슬혜의 장난스러운 겁주기를 듣고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한다. 전혀 무서워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적어도 기대가 된다는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슬혜를 바라보는 시아의 눈빛이 조금 더 강해진 듯 했으니까.
" 뭐, 평소라면 - 이라는거지만. "
지금은 평소가 아닌 듯 하니까, 시아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입꼬리를 좀 더 끌어올린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감각은 참으로 묘했다. 좀 더 가슴이 설레이고, 두근거리고, 호흡이 빨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다 주는 것은 두려움 같은 것이 아니라 설렘이라는 것이 겁을 먹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 더 휘둘리지 않으려면 얼른 주도권을 되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 "
쉽진 않겠지만. 손 끝으로 슬혜의 입술을 살살 어루만져준 시아가 자그맣게 속삭이곤 윙크를 해보인다. 쉽게 주도권을 내어주진 않겠다는 듯, 조금은 도발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지금 둘만의 시간에 시아가 열정을 품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순간마저도 점점 더 몸을 밀착시킨 체, 눈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까.
" 뽀뽀를 해줄 때마다 굳어버리는 슬혜를 보고 있으면 눈도 즐겁고 , 입도 즐겁네. "
자신의 팔을 몇번이나 더 오물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던 시아는 자신이 뺨에 입을 맞추어 주는 순간 멈추는 움직임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곤 다시금 빈 손으로 슬혜의 머리를 어루만져주며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왠지 이런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볼까 싶은 시아였다. 물론 이 기세가 언제까지고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 그게 우리 뜻대로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난 좋아. "
시아는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감싸곤 이마에 입을 맞춰준 슬혜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곤, 더이상 망설이지 않겠다는 듯 슬혜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방으로 나아간다. 1분 1초가 아쉬운 것처럼 그 걸음걸이는 빨랐다. 방안에 손을 잡고 들어선 시아는 천천히 잡고 왔던 슬혜의 손을 놓더니 자연스레 슬혜의 침대 위에 올라가 침대의 등받이에 기대어 앉고는 천천히 슬혜에게 손을 내민다.
물론 장난스럽게 꺼낸 말인지라 무서움을 느끼진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기대가 된다는 당신의 말에는 조금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 그녀는 조금 더 강한 시선으로 마주하는 당신에게 항상 그래왔듯 차분한 눈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오늘만 그대야가 사랑스러워보인다거나 그런건 아니니까요...?"
조금 더 입꼬리가 올라간 당신의 미소 역시 꽤 어울리는 편이지 않나 싶은, 그런 지나가듯 전해지는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의 새로운 점을 알아도, 그저 평범한 모습일뿐이라도 항상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는건 어째서일까? 정말 말로만 듣던 콩깍지에 씌이기라도 한걸까? 하지만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다고, 아얘 당신에게 빠져 살아도 문제될건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사랑이란건 참 재밌는 것이지. 항상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 사람의 매력을 매일같이 새롭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게 바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뜻이겠지만,
"그래야 할텐데... 오늘은 꽤나 난전이 예상되는데요?"
쉽진 않을거라는듯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지는 당신이 작은 속삭임과 함께 윙크를 해보이자 그녀는 당신의 그 도발적 행동이 내포하는 의미를 어렴풋이 알것 같아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만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건 아니라는 확실한 메세지였기 때문일까? 점점 달라붙는 몸은 이러다가 정말 하나로 합쳐지는게 아닐까 하는 바보같은 망상까지 할 정도로 나름대로 진지하게 와닿고 있었다.
"그대야가 그걸 바란다면, 오늘은 비교적 얌전히 있을 수도 있지만요? 아마도...?"
물론 그전에 그녀가 참지 못해서 여느때처럼 달려들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었기에 살살 머리를 쓸어주는 당신에게 좀 더 자극을 주기라도 하려는지 고양이가 그러하듯 머리를 부비려고 했다.
사실 경쟁하는듯한 애정관계든 꾸준히 같은 분위기를 지키는 애정관계든 그녀는 그 어떤 부분이라 해도 당신을 꼭 붙잡고 있는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당신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방으로 자신을 이끄는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빠른걸 직감할수 있었다.
"후후후... 이래선 누가 기다린건지 모르겠네요~"
방 안에 다다르자마자 침대로 올라가 등받이에 기대어앉은 당신을 보고 잠깐 차분하게 웃어보이다가도 내밀어진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서 마주앉아 잠깐동안 당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였다.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근거리는데, 딱히 잘못된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연한 걸까요?"
아직 잡고 있던 당신의 손을 좀 더 끌어와 자신의 가슴 위에 대어보니 스스로 느끼는 것보다도 더 확실한 움직임으로 심장이 빠르게, 강하게 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정말 심장이 뛰고 있는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이 공간에 당신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이만큼 두근거리고 있다는거...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감정이 생겨난다는걸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개념은 받아들인다 해도 내포되어있는 감정을 받아들이는건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거창한 미사여구보다 간결한 단어에 의미를 담아둔 진실의 말처럼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감정들은 지금도 수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대야도 그런가요...?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한가요...?"
소년의 작은 응석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 새슬이 조용히 움찔댔다. 뒤늦게 돌아온 제정신이 비로소 쑥스러움이나, 그와 비슷한 간질거림 따위를 느낄 수 있게 되고야 만 것이다.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면서, 가지 마, 하는 애처로운 중얼거림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복잡한 생각을 하는 듯 녹색 눈동자가 점차 가라앉는다. 한참 뒤에야 다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면서, 새슬이 소년에게로 허리를 굽혔다.
“….혼날 거야.”
쪽, 이번에는 이 쪽에서 소년의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남긴다. 내리깐 눈동자가 소년의 하얀 얼굴을 새기듯 눈에 담았다. 갈등하고 있었다. 너의 애달픈 부탁과, 내가 해야만 하는 것. 사실은, 나도 얽어맨 손가락을 아직 풀고 싶지 않지만.
“있지, 하. 또 배웅해 줘.”
저번에 했던 것처럼. 응? 아마, 오늘 네가 처음 봤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내며. 새슬이 조르듯 속삭였다. 소년의 눈썹을 엄지로 간질이듯 쓸면서.
" 생각해보면 슬혜의 집으로 오겠다고 한 것도, 한걸음에 달려온 것도 나였으니까. 누구 한명만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자신을 보며 차분하게 웃어보이던 슬혜에게 태연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던 시아는 묶고 있던 머리끈을 풀어내린다. 머리가 묶여있는 감각 마저 슬혜와의 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머리카락을 풀어낸 시아는 가볍게 정리를 하곤 손을 내민다. 자신의 손을 잡은 슬혜가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낀 시아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인다.
" 잘못된 것일리가 없잖아. 나도 널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그게 이상한 기분일리 없어. "
시아는 슬혜의 말에 부드럽게 고개를 저어보이곤 두근거리는 슬혜의 심장을 느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차게 두근거림을 전달하고 있는 그 느낌이 손끝을 간지럽힌다. 정말로 선명한 기쁨이었다. 지금 이 모습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 .... 나는 너랑 몇마디를 나눌 때에도 행복했어. 그저 지나가다가 눈이 마주칠 때에도 행복했어. 그러니 함께 있다는건 내 심장을 터트리게 만들 정도로 행복해. "
천천히 슬혜의 손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슬혜를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게 만들려고 하며 시아는 말했다. 몇번이나, 아니 눈을 마주할 때마다, 아니 숨을 쉴 때마다 말해주고 싶었다.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건 다 필요없다 느낄 정도로 행복하다고. 조금은 힘을 주어 끌어당겨 품에 파묻히게 만든 시아는 품 안의 슬혜의 이마에 상냥하게 입을 맞추어 준다.
" 굳이 지금 한마디를 더 추가하자면.. 솔직해진 슬혜를 보고 싶네. 물론 지금도 솔직하지만.. 참지 않아도 좋으니까. 슬혜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두 다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해. "
슬혜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좋을대로 자신에게 행동해달라는 듯 자그맣게 속삭인다. 얌전해진 고양이에게 츄르를 내미는 것처럼, 시아는 부드럽게 입술을 훑었고 아리따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는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 했다. 평온히 잠들었다가 방금 깨어나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 표면 같던 머릿속에 이런저런 말들이 와글와글 파도치며 들끓어오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새슬이 부드럽게 이마에 툭 입맞추자, 끓어오르는 물처럼 요동치던 파도들이 뚝 멈추어, 사라진다. 그리고 밤의 호수 표면처럼 흔들림없이 까만 소년의 눈동자만이 남아 새슬의 고운 미소를 바라본다.
"적어도."
새슬의 엄지가 눈썹을 부드럽게 쓸자, 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새슬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베란다 커튼을 들추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기울어가고, 새까맣던 하늘이 조금씩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날이 어두웠다.
...입 맞추고 싶고, 에서 아랑이 살짝 굳었다. 친구 사이에 오갈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 친구일 수 있을까? 응석을 부린다는 명목으로 눈물길을 따라 그렇게 입맞춤을 받았는데, 정말로? 아랑이 기대어 있고,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연호는 아랑을 바라보았어도 그녀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을 거다. 아랑도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지 몰랐다.
어떡하지.... 나, 너를..... 좋아하고 있어.
젖은듯한 목소리였을까. 그가 말하고 있는 건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고백은 아닐 것이다. 아랑은 망설였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거리감이 애매해진 순간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이 아이의 친구로 있고 싶은 걸까?
너는... 랑.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하지만 일어서서 자신을 등지고 자책하는 것처럼 고백하는 연호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 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너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
그냥 너면 안 돼?
난 네가 좋은데.
관계가 변하는 건 두렵다. 좋아하는 것 같다, 는 돌려 말하는 간접적인 말도 입 밖으로 내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아이는, 연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나랑은 다른 사람이지.
“ 나를 좋아하게 된 게 슬퍼서 우는 거야? ”
아랑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런 의미도 연호의 눈물에 포함되었다면, 아랑 역시 슬퍼질 터였다. 유리를 만지듯 살살 제 뺨을 만지는 손에 뺨을 조금 기울였다.
“ 날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면. 미안하다고 자책하지 말고. ”
“ 날 사랑에 빠지게 해 봐. ”
어찌나 귀엽지 않은 발언이지, 생각한다. 아랑이 푸스스 웃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 쪽은 오히려 나일 것 같은데. 귀찮게 굴고, 신경 써줘야 하고, 귀여운 얼굴과 다르게 내면은 복잡하고, 까다롭고, 사랑을 아주 많이 줘야할 여자 애를 사랑하게 만든 것을... 어쩌면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랑은 지금은 그러지 않기도 했다.
“ 새겨도 되겠지? ”
연호가 어벙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어도, 싫어 라고 빠르게 대답하지 않았다면. 아랑은 뺨에 가까웠던 그의 손을 쥐고, 그의 어깨를 잡고, 빠르게 몸을 내렸을 것이다. 제일 처음 닿은 것은 이마, 그리고 그 다음은 콧등, 그리고 양볼을 차례로 살며시 누르듯이 입맞춤했다. 알 것 같지? 관계가 변한, 첫 번째 만월에 네가 농담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그 것.
“ 너 이제 농담으로 못 넘겨. ”
웃었던 것도 같다. 농담으로 못 넘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울면서 자책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런 마음이 들었고,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관계가 변하는 게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네 손을 놓고 싶지 않다면.
“ 좋아해, 연호야. ”
나도 전해야겠지.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보다, 좀 더 확실한 말을.
왜, 왜? 그런 질문, 대답은 당연했다. 아랑은, 연호에게 과분하니까. 그냥 과분한 것도 아니다. 너무도, 너무나도 과분하다. 저번에 아랑이 그랬었지. 자신은 연호의 시야게 보이는 것 만큼 예쁜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랑이 어떻게든, 얼만큼이든 예쁘지 않은 모습을 보이더라도... 더 이상 아랑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 어떤 모습을 상상하더라도, 아랑은 자신에게 사랑스럽게 보이기만 했다.
좋아하게 된 게 슬퍼서 우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했다. 그건 아니었다. 아랑을 좋아하는것을 알아차려서 슬퍼진 것이 아니다.
" 너를 좋아한게, 하필이면 나라서. 그래서, 미안해서 그래. "
몇 번 이든 말할 수 있었다.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보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
그녀가 연호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연호는 자신없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 연호에겐 너무나 허들이 높았다. 사랑을 받고싶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받았던 기억은 이미 저 멀리에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랑받은 기억조차 없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니.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 ....? "
그녀의 물음에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새긴다' 라는 말의 의미. 그것은 이미 그 자신도 몇 번이나 써먹었던 표현이 아니던가. 게다가 입맞춤을 받은 자리는, 그 순서는 저번 만월때 연호가 아랑에게 입맞춘 자리 그대로였다. 연호는 아랑에게 입맞춤 받은 볼을 손으로 살며시 쓸어내리고, 농담으로 넘기지 못한다는 말에, 좋아한다는 말에 마치 고장난 것 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이제 눈물은 멎었지만, 아직 고여있던 눈물 한 방울이 다시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어....? "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애초에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던 대답을 듣고서 연호는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가 현실을 따라잡기까지 몇 초, 어쩌면 몇 십초가 걸렸을까? 마침내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서야 그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슬픈 감정만을 담고있는것이 아니라...
" 고마워. 나를, 좋아해줘서. "
감사. 기쁨. 미안함.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차오른 복잡한 눈물이었다.
" 그리고 미안해. 나를 좋아하게 해서. "
" 그리고 또 미안한건.... "
다시 한 번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한 번 밝게 웃음지은 그의 얼굴은 정말로 기뻐보였다. 하지만 살짝 일그러져있는 눈썹은, 아직 씻어내지 못한 미안함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것일테지.
" 나는 너를 밀어낼 수 없어. "
말을 마치고서 그의 몸이 그녀에게로 기울어진다. 지금까지 그와 그녀가 안고있는 모습은, 아랑이 연호의 몸에 기대어지는. 아랑이 연호에게 안겨져있는 그림이었을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기에, 기울어진 머리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이번에는 그가 그녀에게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참 포근하다고, 또 편안하다고 느끼면서 아랑에게 얼굴을 묻은 채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이, 사랑하게 된 것이 참을 수 없이 미안하지만, 그는 그녀를 밀어낼 수 없다. 거짓으로라도 돌아설 수가 없었다.
" 그래도 노력할게. 네가 날 좋아하게 된걸 후회하지 않도록. 네가 날 떠올리면 미소지을 수 있도록.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느 때의 만월과는 달리 그녀의 목덜미를 물지 않고, 그곳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그녀의 볼에 입맞춘다. 고개를 떼어내고 아랑을 마주보는 그의 눈빛에, 그리고 입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자리잡고 있었을테다,.
평소엔 단정하게 묶여있는 머리카락이지만 이런 때만큼은 풀어헤치는게 당신에게 있어 하나의 의식이나 마찬가지인듯 보였다. 딱히 그런쪽의 취향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괜히 두근거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물론 이전부터 그녀의 취향은 지극히도 당신 위주로 잡혀있긴 했었지만 그 사이에 모르는 무언가가 리스트에 추가되기라도 한건지, 정말 사람의 관계란건 시시때때로 변하기에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걱정을 좀 덜어낼 수 있겠어요."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사실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직접 듣는 편이 더 안도감이 들었으려나,
"후후후... 정말 과거의 저는 얼마나 바보였을지 상상조차 안가네요~ 이런 즐거움을, 행복함을 모른 채 살고 있었다니..."
끌어당기는 손길에 이끌려 몸을 맡기듯 품에 안기자 묘하다싶을만큼 편한 기분이 들었을까?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을 때가 나았다며 자조하던 삶이었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행복이라는 맛을 한번 알게되면 금방 중독되어버려서, 그것이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갔을 때에는 견딜수 없는 고통이 뒤따른다고 했던가? 하지만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그 편안함 때문에 금방 망각해버린다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종 나태해지는 거고, 가끔은 서로에게 질린다고도 한다. 혹시나 자신도 그런 감정으로 당신을 바라보지 않을까, 단지 그것이 두려울 뿐인 그녀였지만 지금으로선 섣부른 판단일 거라는 생각이 더 컸다. 아무렴, 서로의 마음을 다시금 새긴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한창 즐거울 때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요즘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게 일상이라 떠벌리는 사람이 있어도 가끔은 그런 궤변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둘쯤은 있는 법이었다.
"솔직한 거려나요..."
이마에 잠깐 닿았던 상냥함이 가득 담긴 입맞춤, 그리고 다시금 뺨에 닿은 손의 감촉이 마냥 따뜻하기만 했다. 우리가 보통 타인에게서 느끼는 온기보다도 더 높고 뚜렷하게...
부드럽게 입술을 적시는 혀의 움직임, 그 어느것에도 비할 수가 없는 당신만의 미소가 정말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만 같아서 조용히 입술을 맞대고 장난치듯 깨물다가도 아주 살짝 물러나 여전히 달콤하게 느껴지는 초콜릿 같은 시선을 마주보았다.
"다 알고 싶어요. 전부 다... 이미 다 알게 되었다고 해도 좀 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해도 서로 지켜주어야 할 경계선, 나와 상대방을 구분할수 있는 그 선만큼은 넘으면 안되니까... 그대신 다시 당신의 품에 안기기도 하고, 있는 힘껏 끌어안기도 하다가 결국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마부터 시작해 뺨으로, 그 밑을 지나 목덜미까지 조심스럽게 다가온 입술의 흔적이 멈출즈음에서야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듯 깨물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별다른 맛이 나는 건 아닌데도, 이런 행동에 기이할 정도로 강한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을까. 분명 늑대같은 것이 아님에도 어느새 이런 행동을 즐기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법했다. 그렇다고 양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이 쉽게 사그라드는 것도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