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겨버린 사고가 아무래도 기억에마저 작용해버린 것인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마치 필름 중간중간을 잘라 이어 붙인 것처럼 뚝뚝 끊기는 것만 같다. 눈가를 쓸어 주는 손길, 무언가 내뱉으며 달싹거리는 거친 입술, 어깨를 감싸는 단단한 팔뚝. 깜빡. 눈꺼풀이 힘겹게 움직였다. 소년의 말이 아직 채 이해되지도 않았는데, 기묘한 소름이 끼쳐 오싹거린다. 단순한 공포나 두려움과는 다른 것. 그런 부정적인 감정보다는ㅡ 그래, 간지러우면서도, 좀 더 기분 좋은 전율과 비슷한.
달곰씁슬한 입맞춤 뒤에 날아든 것. 처음은 아니었으나, 생경한 감각인 것은 여전하다. 날카로우면서도 둔탁한 통증. 고통스런 신음을 흘릴 법도 했으나, 그저 이를 악물었다. 새어나간 고통의 표시가 또 다시 소년의 마음을 할퀼 무언가가 될 것만 같아서. 목덜미에 새로운 자국이 새겨질 때마다 급하게 숨을 삼키고, 그대로 멎었다가, 다시 토해내기를 반복한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손이 소년의 옷자락을 꽉 움켜질 뿐이었다.
문하가 목덜미에 남긴 것들은 단순한 이빨자국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서부터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과 고통들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깊숙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지껏 발버둥쳐 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빠르게 외로움이 깎여 나가는 속도가 꽤 만족스러워서. 가만히 그 머리를 끌어안고 소리를 참느라 입술만 꽉 깨물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더, 새겨 줘.
탁하게 갈라진, 쥐어짜낸 듯 한 음성. 그래, 어쩌면 이대로 엉망진창으로 물어 뜯겨서 한동안 아무데도 가지 못 할 정도로 망가진다고 해도, 너와 있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 시험해 볼까. 커다란 불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드는 꼴이 딱 지금같은 심정일까. 마침내 찾아낸 작은 낙원으로, 아니, 사실 낙원의 모습을 한 나락일지도 모르는 곳으로. 눈을 감았다.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어... 새슬이의 자기파괴적인 성향... <:3 문하로서는 그것도 '자신으로 채워넣고 싶은' 독점욕의 대상이 되겠지만 캐릭터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캐주의 입장에서는 씁쓸하기도 하고 아찔한 줄타기 코스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잡아야 할 고삐가 늘어난 기분이기도 하고 그런데 즐겁다(?)
짓궂은 것 아니냐는 슬혜의 말에, 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슬혜의 눈을 응시하며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린다. 분명 자신이 짓궂게 굴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슬혜보다도 자신이 슬혜를 향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 뭐어, 나도 조금은 짓궂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 다 자각을 하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거니까. "
시아는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태연히 슬혜의 말을 수긍한다. 네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슬혜를 바라보며 자그맣게 속삭인 시아는 슬혜의 허리를 감싸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줘서 안아준다.
" 그런 뾰루퉁한 얼굴도 귀여워서 눈이 즐거워. 노력한 보람이 있는걸. "
짓궂기 짝이 없는 노력이지만 잠시나마 지었던 그 표정도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러다 코를 맞대곤 부비다 입을 맞추려 하는 슬혜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인 시아는 조금 더 열정적으로 입을 맞춰나간다. 슬혜의 윗입술을 오물거리기도 하고, 슬혜의 혀를 살짝 맛보기도 하던 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떼어낸다.
" 그래도 상관없어. 그게 슬혜가 바라는거라면. "
그리고 그런 것도 내가 바라는 것이니까. 시아는 그렇게 속삭이곤 입술을 혀 끝으로 훑어낸다. 방금전까지 입을 맞춘 탓에, 입가에 반짝이던 슬혜의 흔적이 시아의 혀가 지나가자 사라져간다. 그 모습이 슬혜의 눈동자에 온전히 모두 비춰졌을 것이다.
" 카레는 조금 제쳐두고 다른 배고픔부터 채우는 것고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슬혜도 나름대로 기다리고 있던 것 같고.. 어때? "
슬혜의 등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대는 시아. 슬혜의 옷 위에서 그 손가락이 춤을 추듯 간질거리게 쓸어내리고 훑어올려진다. 마치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부추기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 떨림마저도 내 품 안에서만 떨라는 듯이 하의 팔이 새슬을 그러쥐었다. 숨이 막히거나 고통스럽거나 갑갑하지 않을 만큼 느슨하게, 하지만 자신이 정해둔 거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튼튼하게. 몇 차례인지 모를 자제심 없는 입질이 잠깐 멈췄다. 새슬의 목과 승모근 쪽에 마구잡이로 찍힌 빨갛고 흉측한 열꽃들을 하는 느릿하게 핥았다. 개가 주인을 한 번 물었다가 깨문 자리를 핥아주는 게 '내가 당장이라도 너를 해칠 수 있으니 까불지 말라' 고 엄포를 놓는 행동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잔뜩 물어놓고 나서 다독이듯이 핥아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진 행동일까. 아니 의미를 따지는 게 의미가 있기는 할까.
빛이 담기는 일 없이 새까맣던 하의 눈동자에 달빛이, 아니 달빛에 비친 새슬의 얼굴이 한가득 담겨서 일렁이고 있었다. 힘겹게 간헐적으로 숨을 비틀거리는 새슬을 바라보며, 하는 나직이 새슬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울어도 돼."
네가 떠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약속했으니까. 그러니까 약속을 잊지 않도록. 새슬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팔을 들어 하는 새슬을 한 번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잔뜩 새겨줄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하고 중얼거리며, 하는 메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살짝 축였다.
"내가 너의 최악이 되어준다면, 네가 나보다 더한 고통을 받지 않을 테니까."
내가 너의 가장 밑의 돌바닥이 되어, 네가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줄게. 하는 다시 입을 벌렸다. 새하얀 이빨들이 가지런히 반짝였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서로에게 메말라 있던 것들을 서로에게 새겨주기 위해 다시 새슬의 하얀 목덜미로 달려들었다.
깨물고, 깨물면서, 하는 조금씩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자신이 정확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 동안 그가 앓아왔던 그 누구도 그렇게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 공복감과 공허함이 아침 햇살에 안개처럼 걷혀가는 것이, 마치 오랜 상처에 앉아있던 딱지가 떨어져나가는 해방감이 그를 휩쓸고 있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제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후회하고 두려워하고 주저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있을 수 있겠다고.
하는 문득 언젠가 교과서에서 읽었던 짧은 소설을 상기했다. 프로방스의 어떤 목동이 말했던가,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노라고. 그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이, 자신의 돌바닥 같은 품에 누군가가 기대러 왔다는 사실이, 자신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왔다는 사실이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필요 없다고 말했다면 무안했을텐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는 말 덕에 무안하지 않아서, 아랑은 조용히 미소했다.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을만큼, 아주 살짝만 머리를 기댄 것도 좋았다. 배려해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응이라고 대답하고 내려준 후에 사이다 캔을 가져가 내용물을 비우고 던진 것까지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고개를 살짝, 정말 아주 살짝 젖히려는 시도를 하자마자 바로 뭔가 닿는다.
“ ...이건 너무 가깝지 않니~? ”
1cm도 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아랑은 두 발짝 정도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연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가 되었을까.
힘든 건 조금 나아졌냐는 말에 애매하게 미소하곤 모자를 눌러 썼다.
“ 잠깐마안. ”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을까, 그 말을 남기고 아랑은 자판기로 가서 이번에는 자기 가방을 열고 지갑을 꺼내 지폐를 넣고서 음료를 뽑는다. 이번에 뽑은 건 밀크티다. 마시려는 용도는 아니고, 눈가에 대고 있으려고.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고 손수건으로 얇게 캔을 감싼 후에 눈가에 댄다. 손수건을 가져오길 잘했지.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을 이미 보여버렸지만, 계속 보여주긴 또 그래.
“ 이러고 있으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
목은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려면, 부기는 좀 제대로 빼고 가는 게 나을 것이다. 가족들이 걱정할테니, 부기가 좀 가라앉았다 싶으면 공원 화장실에서 세수도 해야 할 테다.
너의 말대로 도피했다고한들 내 잘못은 아니다.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하고 잔인하기에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걸 고작 어린 나이의 내가 버티기엔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일들아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정당화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네 말 한마디에 조금은 마음의 안식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말에 대한 재능은 내가 갖고 있는데 어째 너가 나보다 낫다.
" 서로에게 잘못은 없을테니까. "
지금 네 곁에서만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리자고 생각했다. 일부러 현실과 마주하고 고통받는 심신을 뒤로하고 너와 단 둘이 있다는 이런 상황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잠깐의 여유가 생긴다면, 버티다 부러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는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네 얼굴을 잠깐 빤히 바라본다. 너는 어디를 붙잡고 있는거야?
" 조금 누나 같은 분위기는 맞아. "
너의 농담에 나도 똑같이 살짝 웃으면서 농담을 건넨다. 그러다 네가 한 말에 맞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 손을 그대로 너의 허리춤에 두른다. 그리고선 내쪽으로 살짝 끌어당기며 너가 편히 안길 수 있게 하며 말했다.
" 얼마든지. "
네가 내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하면서 작게 웃어보인다. 뭐든 못해줄게 없으니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겠다는 말은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만큼 너에게 해주겠다는 마음은 예전부터 갖고 있었다. 내 소중한 친구, 너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는 마음은 정말 진짜였는데. 안타깝게도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은 정말 동화에만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건 너무 가까운것 같지 않냐고 말하자, 어쩐지 흥쳇핏 거리는 듯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직후에 그녀가 두 걸음 정도 더 멀어져서, 결국에는 세 걸음 정도 떵어진 듯한 거리가 되었다. 연호는 그건 너무 멀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자신이 멀어진 것 만큼 한 걸음 더 다가섰다.
" ? "
그녀가 다시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는걸 보고, 마실게 부족했는지 생각하려는 찰나에... 눈에 가져다대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눈이 부었으니, 차가운걸로 붓기를 빼는건 좋은 방법이다.
" 얼굴이 안보이는건 아쉽지만.... "
아주 작게 속삭이듯이 말한 목소리. 과연 아랑이 들었을까? 들었든 듣지 않았던간에, 그는 아랑이 말한대로 벤치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을테다.
>>742 괜찮아요... (토닥토닥토닥) 답레보다 연호주가 안전하게 귀가하시는 게 더 중요한 걸요! >:D 퀼과 텀은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한대로 느긋하게 주세요! <:3 이번 목표 중에 하나인 연호 응석 받아주기도 이미 했구... 자각하는 건 (이것도 목표이긴 했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 둘까요?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당신에게 그 이상의 추궁도, 질타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을뿐더러 사실 조금은 바라고 있던 전개였으니까, 물론 평소에 생각해왔던 당신과는 제법 차이가 나는 성격이긴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대신 태연하게 자신의 말을 수긍해보이는 모습 또한 싫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쉽게 바뀔수 없다던데 자신이 이렇게 만들어버린건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한켠에 자리잡았을까, 물론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제대로 대답해나가면 될 일이겠지만... 아직은 미미하게나마 그런 죄책감이 남아있었다.
"후후후후...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이상한 부분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재능이 있네요~"
자신을 감싸안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가는게 느껴졌을까, 가벼운 입맞춤 뒤에는 더 적극적으로, 그 잠깐의 온기라도 놓치지 않으려는듯 가볍게 무는 감각 또한 편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더 원하게 되었던 걸까? 그녀가 바라고 있던 것, 그리고 당신이 바라고 있던 것이라 생각하자니 역시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그런 감정을 품는건 서로에게 예의가 아닐거 같았기에 더 마음을 담아 차근차근 나아가기로 했다.
"그것 참...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네요?"
평소라면 어떻게든 잡아떼서 저녁 먼저 해결했겠지만, 벌써 몇번이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버릇으로 남기기엔 꽤 위험한 감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자신의 등쪽에 닿았던 당신의 손가락이 장난스럽게 춤추듯 리듬을 타면서도 감정에 솔직해지도록 부추기듯 쓸어내리자 오늘만큼은 당신이 던진 미끼를 바로 물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렇게나 큰 고양이를 낚았는데, 놀아주지 않으면 역시 섭섭하겠지요?"
잔뜩 가라앉아 열기를 띈 목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전해지면서도 그 말을 당신이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조심스럽게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던 그녀는 자신보다도 더, 마냥 뽀얗게만 보이는 당신의 팔을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당연하게도, 어떤 맛을 바라고 그러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모르게 이런 행동으로도 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