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 그럴거라고 생각은 했어요...ㅋㅋㅋㅋㅋㅋㅋ (눈먼 총에 맞은 연호(주) 기대... 하셔도 그냥 스킨십 강도가 쪼끔(?) 세지는거밖에 없는데요... ㅎㅁㅎ 앗 그러고보니 연호가 아랑이 안내려주려 할텐데... (쪼그려앉아서 음료수 꺼내라고 할것임...) 그치만 주무시러 가셨으니 일단 써보고... 나중이 혹시 마음에 안든다고 하시면 수정 하겠습니다!! 푹 주무시고 좋은 꿈 꿔요 아랑주~!!
일견 고집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당신의 말에, 작게 웃는다. 입매를 뒤튼다. 그래,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하였다. 내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에 곁에 있어 주었던 이는 단 한 명도 존재치 않았다. 아, 해인아, 강해인. 내 사랑스러운 친구. 작았던 웃음소리는 폭소에 가까운 키득거림으로 끝맺어진다. 경아는 웃음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눈가의 물기를 손으로 훑어낸다. 옅은 연민이 묻어나오는 것도 같다.
“그래, 맞아.”
경아는 선선히 인정한다. 자신은 바뀌었다. 어쩌면, 영영 돌이키지 못할 방향으로. 경아는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려 부단히 애써야 했다. 당신이 말하는 말이 오만으로 들린 탓이다. 사람이 한 사람을 온전하게 구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키는 것 역시 매한가지다. 당신이 그 당시에 제 옆에 있었다 해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경아는 눈을 내리뜬다. 어쩌면 이 또한 제가 바뀌었기 때문에 하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믿기가 어려웠다. 지켜주겠다는 말에, 할 수는 있겠냐는 반문이 먼저 떠오른다. 당신의 다정스런 말에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감동받으며 고맙다 말하기가 힘들다.
“있지, 해인아.”
당신의 말들을 고요히 듣던 경아는 마침내 입을 연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물거품처럼 아스라하다. 당신의 앞에 존재함에도 그렇다.
“너무 늦었어.”
정말로, 너무 늦었어.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이제와 지켜주겠다는 것도, 원인을 캐묻는 것도 그러하다. 흔들리는 목소리가 꼭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다. 분명히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경아는 느리게 말을 잇는다. 이제는 숫제 혼잣말에 가깝다.
“네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겠지... 그냥 우리는, 해인아. 지나치게 멀리 돌아온 것뿐이야. 더 이상 무언가를 고치기에 너무 오랫동안 엇갈린 걸 거야.”
불현듯, 그래도 네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조금 더 나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이런저런 가정을 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도 없다지만 잠깐의 상상은 괜찮지 않나.
"난 네가 약하다고 생각치도 않고, 설사 그렇다 한들 약함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그저..."
찰나 머뭇거린다. 알맞은 단어를 찾아 말을 고른다.
"...알맞은 시간에, 서로에게 서로가 없었던 거야."
힘겹게 문장을 끝마친다. 경아는 뺨에 닿은 손에 제 손을 겹치곤, 가볍게 힘을 주어 떼어내려 한다. 기분 탓일까. 경아는 조금 지쳐보였다.
삐걱, 하고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 나오니, 달빛이 비추는 게 고작인 거실도 꽤나 환해 보였다. 하는 새슬을 꼭 안아들고 있었다. 단순히 무언가를 안아들어서 옮기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게 된 무언가를 애틋하게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조금 느렸다. 거실을 가로지르며 그는 말했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이 왠지 조금 잠꼬대 같다.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아직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방랑자가 할 법한 말이었으나, 저번에도 그가 말했다시피 가고자 하는 곳이 없어도 갈 수 있는 곳은 있었다. 그 방을 빠져나와서 그가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저번에도 들러보았던 문하의 방이었다. 우선 거기 들러서, 반창고 좀 붙이고 느긋하게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하는 발을 들어올려서 방문의 문고리를 내리고 문짝을 살짝 밀어 방문을 열었다. 베란다로 쏟아지는 달빛에 하얗게 물들어 있는 방이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두툼한 토퍼와 푹신한 쿠션들이 한가득 무더기로 깔린 푹신한 더미 위에, 문하는 새슬을 가만히 내려놓으려 했다. 그리고 책상 한쪽에 놓여 있는 물티슈 팩을 집어든 다음에, 새슬의 얼굴에 남은 손자국을 조심스레 닦아주기 시작했다.
새슬은 별 저항 없이 문하의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뺨 한 켠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커다란 손자국과 잔뜩 흐트러진 머리칼, 먼지투성이 교복. 거기에 잔뜩 울어 댄 탓에 발갛게 부은 눈까지. 차마 멀쩡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몰골이었겠지. 살결을 문지르고 지나간 물기가 열기를 앗아가는 것을 느끼면서, 얼굴에 남은 붉은 흔적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머진 나중에 해도 돼.”
진정 급한 것은 소년의 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가라앉은 시선이 문하의 손목에 진득하게 들러붙는다. 우선은 들러붙어 굳은 피딱지를 대강이나마 닦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여나 쓰라릴까 미처 손 끝도 대지 못한 채로, 안절부절하는 기색을 보이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문하가 그러했던 것처럼, 새슬도 물티슈를 몇 장 뽑아내어 문하의 상처 주변을 닦아 주려 했다. 최대한 상처에 직접적으로 닿지 않도록, 상처 근처에 얼룩진 피딱지와 붉은 액체가 지나간 자국 같은 것들을.
“....이런 건 싫어.”
잔뜩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플래시를 켰을 때의 광경이 생각나는 것 같아, 다시 코 끝이 찡하게 아파 온다. 눈물이 맺히지는 않았으나, 불규칙적인 훌쩍거림이 샜다.
까지 말이 나왔으나, 새슬의 손이 닿자 하는 더이상 별 반항을 하지 않고 얌전히 양 팔을 내맡겼다. 다행히 무딘 것에 거칠게 쓸린 상처들이라 보기에만 흉측할 뿐 그렇게 대단치는 않은 상처들이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가 묶여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문하는 새슬이 충분히 얼룩과 피딱지들을 닦아내도록 팔을 내밀었다.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상처 주변을 조심스레 스쳐가는 손길에도 별로 신음을 내지 않고 있다가, 그러다 새슬의 입에서 나직이 목소리가 새어나올 때에 문하는 상반신을 낮춰서 새슬과 눈을 맞췄다.
"이런 게 싫어?"
문하는 깨끗이 닦인 손을 들어, 새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그는 눈동자에 달빛을 머금은 채로, 새슬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의 눈 위에서 달은 비로소 새슬을 상냥하게 주시할 수 있게 되었다. 새슬의 머리를 쓸어주며 하는 나직이 간청했다.
닦아낸 상처가 그리 심각할 정도의 부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문하는 온전히 새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온통 붉게 물든 물티슈 조각을 한 손에 그러모아 꽉 쥐어 뭉쳤다. 상냥하게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에 다 끝났나 싶어 마음이 놓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얄미운 기분이 들어 가볍게 흘기는 시선. 괜히 입술을 비죽 내밀어 삐진 체를 한다.
“…또, 이렇게 되면, 싫어.”
내가 같이 있을 때에는. 툴툴거리며 이미 핏자국이 깨끗이 지워진 팔목을 괜히 닦는 시늉을 하다가 놓아 주었다. 그러고 나니 그 때부터는 또 거부할 수 없는 외로움이 다시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아, 잘근대던 입술을 움직여 중얼거렸다.
“안아 줘.”
떨어지기 싫어. 어느새 뾰로통하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품을 온기를 찾는 작은 양 한 마리만이 거기에 남아 있었다.
>>555-556 박스로 덮어 줬더니 조용해졌다는 게 왜 이렇게 귀엽지 u"u..... 얘들아 거기서 조용히 코코낸내하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마라맛 만월일상......(과몰입의 선에서 간당간당하게 죽을 뻔했던 사람) 크흐흑.. 주인장 여기 디저트 주시오 ㅇ(-(.........
새슬이 투정을 부리자, 하는 나직이 대답하면서 새슬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주고는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어넘겼다. 그리곤 새슬을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새슬의 이마에 살짝 입맞추었다. 그리고 새슬의 손에서 물티슈를 받아낸 다음에 책상 아래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향해 툭 던진다. 물티슈 뭉치는 애석하게 모서리를 맞고 튕겨나왔지만, 하는 그것을 딱히 다시 주우러 가거나 하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주울 수 있으니까.
반면에 새슬이 안아달라고 하는 것은 지금이지 않던가. 하는 팔을 뻗어, 새슬의 어깨를 감싸안고는 그녀의 몸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강철을 단조한 조각상처럼 차갑기만 하던 품안은 아직 지하실의 성그런 기운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체온에 빠른 속도로 점점 흐려져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은 여전했다. 그 안에서 흐릿하게 규칙적인 박동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는 새슬을 끌어안은 채로 쿠션 더미 위에 모로 자빠져 누워 버렸다. 그리고 새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곤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이 느끼고 기억하는 모든 것이 바래고 퇴색되어 가는 순간이 오더라도, 냄새만큼은 기억할 수 있도록.
"네가 어디에 있더라도."
새슬의 허락에, 하는 약속으로 대답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침대 머리맡에 핸드폰과 무선이어폰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전원 버튼을 꾹 눌러 핸드폰 전원을 키고, 그는 핸드폰 화면을 몇 번 터치한 뒤에 이어폰케이스를 열어 하나를 새슬의 귀에 툭 꽂아주었다. 나머지 하나는 자기 귀에 꽂았다.
연호는 그녀가 자신의 앞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음료를 뽑는것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라고는 해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의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대화할때는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느라 다른곳을 신경쓱가 힘들었지만, 오늘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덕에 전체적인 그녀의 행동, 몸짓 등을 볼 수 있었다.
" 응. 그거. "
사이다. 사실 어떤 탄산이든 상관 없었지만, 사이다가 눈에 가장 먼저 띄었더랬다. 원래 오늘같이 저텐션인 날은 에너지 드링크가 제일 좋은데. 하지만 그런 고카페인 음료를 아랑이 하락할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이 다친 것을 보고 화내고, 슬퍼하던 아랑이라면 자신이 건강 유지에 위반되는 행동을 한다몈 그걸로도 화내지 않을까?
" ....... "
그는 뭐라 대답하는 대신에, 아랑을 내려주지 않고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그냥 자판기에서 꺼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몸을 낮췄기에 아랑이 조금만 몸을 비튼다면 연호의 품에서 벗어나 땅바닥을 밟을 수 있을테다.
아랑이 음료수들을 꺼내는걸 기다렸다가, 다 꺼내었을 때 다시 다리를 펴고 일어났을테다. 그리고 아랑의 손에 들린 사이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복병'... 그러니까, 자신이 아랑을 안고있느라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잠시 당황했을테다. 그리고는 아직 챙으로 가려져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너의 입가에 작은 미소는 이내 키득거림으로 바뀌어나간다. 낯선 모습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충격을 받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성인이 되는 것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고 늑대와 양이라는 지독한 신분이 주어진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렇게 큰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네가 눈가를 훔치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 나도 알고있어. "
이미 늦었다는 말에 고개를 돌리며 답한다. 나도 내가 하는 말이 오만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더러운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널 아끼고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모르는새 참았던 숨이 거칠게 터져나오고 그것은 큰 한숨처럼 빠져나간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저 조용하게 너의 말을 듣고있다. 그리고 결국 네 말이 맞았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아무의 잘못도 없지. 내가 너무 힘들어서 도피하고 있었을뿐이야. "
아직까지도 족쇄처럼 날 붙잡고 있는 모든 것들이 힘들었기에 애써 고개를 돌려 보지 않고 있었을뿐이다. 사실 어디로 고개를 향하던 눈에 들어올텐데 보이지 않는척, 들리지 않는척, 느껴지지 않는척.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네가 있기 때문에 너에게 시선을 향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네 주변에 보기 싫은 것들이 잔뜩 있어서 내 맘대로 그것들을 떼어내려 해봤다. 결과는?
" ...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보다 어른스럽구나. "
볼에 닿았던 내 손을 네가 떼어낸다. 하지만 그 손을 반대로 꽉 잡은 나는 네 말에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내 욕심으로 네 상처를 벌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잡은 손을 놔주지 않은채로 너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그래도 지금은 알맞은 시간에 서로가 필요하잖아. "
예전과는 다르잖아. 그렇지? 희미한 미소를 네게 보여준다. 어쩌면 어릴때와 최대한 비슷해보일지도 모르는 그 웃음을 네게 보여준채로 거칠어져있던 숨을 가다듬는다.
고른 게 사이다라 다행일까? 탄산 중에서 그나마 제일 첨가물이 적을 것 같으니까. 내려주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했는데, 내려주지 않는 대신에 쪼그려 앉는다. 아랑은 눈을 깜박이다가 소리없이 미소했다. 그리고 연호에게 가깝게 붙어있던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안긴 상태에서 몸을 기울여 음료를 꺼낸다. 사이다도 포카리스웨트도 꺼내서 배 위에 올려두었다면. 그가 다리를 펴고 일어났을까? 포카리 스웨트를 먼저 터서 조금씩 홀짝였다. 목이 아프지만, 한결 나은 것 같다. 한 손으로는 사이다를 들고, 지금에야말로 내려줘야 연호도 사이다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 네가 먹여줘. ”
들리는 천연덕스러운 말에 잠시 행동을 멈춘다. 지금 이 상태로? 피치 못하게 얼굴을 보여야 할까?
“ 잠시만... 실례할게... ”
아랑은 모자의 챙을 올리는 대신, 사이다를 배 위에 내려두고 빈손을 뻗는다. 그의 턱선을 만지는가 싶더니 손끝이 조금씩 입술 위로 올라간다. 이렇게 하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입술이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라지만, 더듬어 올라가는 손끝에 반창고가 걸렸다면, 마음이 아프겠지.
제대로 입술 위치를 확인하고 손가락을 뗀다. 자각하면 아마 부끄러울 행동이다. 아랑은 포카리를 마저 비우고 빈 캔을 자판기 옆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꽤 정확히 들어갔다. 그리고 차분히 사이다를 트고, 모자의 챙을 살짝만 올려 얼굴의 반쯤이 살짝 못 되게 노출한다. 입술과 턱끝은 보이겠지. 아랑에게도 연호의 얼굴 반쯤이 살짝 못 되는 부분만큼 보인다. 아까 손가락에 걸렸던 반창고를 잠깐 보다가 입가에 음료수를 대어준다. 그가 마시기 편하도록 입술가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손을 조금씩 기울여 나가겠지.
그냥, 손가락으로 만지지 말고, 조금만 모자챙을 들어 올릴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은 조금 나중에 들었다.
자신의 손짓에 움찔거리는 슬혜를 보며 시아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 솔직한 반응 하나하나가 시아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해주고 있었으니까. 이런 반응들이 이어진다면 시아의 분위기가 좀 더 들뜨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역시 슬혜는 잘 아는구나. 우리가 먹을 것들이니 깨끗하게 씻어둬야지. ”시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슬혜의 눈동자를 힐끔 바라보곤 작게 웃음을 흘린다. 그리곤 태연하게 슬혜의 말에 대답을 돌려주곤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자세를 유지한 체 손질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작업 자체는 순조로웠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슬혜의 향기는 시아의 외로움마저 잔잔하게 달래어 주고 있었다.
“ 하나부터 열까지 맡겨줘도 좋은걸. 오히려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내가 좋아하는 아이는 내가 챙겨야지, 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냉장고에 간식거리들을 정리해두고 돌아온다. 왠지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는 듯한 슬혜의 모습에 입가를 손으로 가린 체 웃음을 흘린 시아는 이내 다시 아까처럼 슬혜의 뒤로 다가와 몸을 맞댄다.
“ 그나저나 슬혜는 날 별로 안 보고 싶었던걸까? 이렇게 집에 찾아오면 좀 더 눈에 담아줄거라 생각했는데.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아는 능청스레 물음을 던지며 볼을 맞대곤 분주히 움직이는 슬혜의 손을 눈동자를 움직여 바라본다. 그리고 그 손등을 자신의 손끝으로 천천히 손등에서 팔로 훑어올리며 입술을 핥는다.
“ 요리 같은 건, 얼른 만들어두는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지?”우리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지만. 슬그머니 두팔로 슬혜의 허리를 백허그로 감싸안으며 속삭인 시아는 입을 다문 체로 슬혜가 하는 것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마치 슬혜가 먼저 움직여주길 바라는 것처럼.
도저히 이제 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때로는 한순간의 일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리는 법이었고, 경아에게 있어서는 요 몇 년 사이의 일이 그러했다. 동화를 믿을 수 있었던 어린아이는 빠르게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러안고 있던 모든 기대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니 상황이 지금에서 변하리라는 생각조차 놓아버린다. 당신이 내 곁에 있다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으리라 지레짐작하고 만다. 역설적이나, 지금 당신을 대하면서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아는 눈을 내리뜨며 웃는다.
“그리고 도피했다 한들, 역시 네 잘못도 아니고.”
다정히 속삭인다. 양인 경아였지만, 재능이 있다 한다면 말에 진심을 담는 재주일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온화한 친절을 담아 선물하는 재주. 그 근원이 체념이라는 감정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가식적이라 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그러면서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 입을 떼고 만다.
“그런가?”
작게 웃는다. “동생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려나.” 농조로 떠든다. 놓치지 않으려 드는 당신에게 순순히, 기꺼운 기색으로 제 손을 내맡긴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열없이 미소 짓는다. 적어도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해 보였으므로, 그리고 당연히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경아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쉰다. 손 끝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