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쇠사슬이 느슨하게 풀어지자, 쇠사슬의 장력으로 팔목을 옥죄고 있던 쇠고랑도 가볍게 손목을 털어내는 것만으로 바닥에 털그렁 하고 맥없이 떨어졌다. 손목이 온통 빨갛다... 리스트컷 증후군이라기엔 너무 둔탁했고 손목을 빙 둘러가며 나있었던, 언뜻 보면 잘 보이지도 않고 자세히 들여다봐도 살이 튼 자국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흉터들이 어디서 난 것인지 약간의 해답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는 손에도 온통 묻어 있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손 안에 느껴지는 끈적한 감각이 손이 지금 어떤 꼴이 되어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감정의 격랑이 빠져나가 텅 빈 자리에 자리에 두려움이 들어찼다. 자신을 무서워하거나, 꺼림칙해하거나, 싫어하게 되리라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만월 때마다 자신을 쇠스랑에 묶어놓고, 종종 이성을 잃고 날뛰기까지 하는 미치광이를 도저히 좋아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순간, 하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채고야 말았다. 여태껏 아버지와 그 망할 여자, 트레이너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지키고 있었던 비밀이 예기치 못하게 깨어져버린 것이다.
결코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그 중에서도 가장 보여주기 싫었던 사람에게, 보여줘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하가 깨달아버린, 하의 등골을 싸늘하게 만드는 사실은 하나 더 있었다. 유새슬이 양이라는 사실, 그것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가두어두고 있던 감정적 고독의 울타리마저 뛰어넘어온 양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러면 나는 너를 요구하게 될 텐데. 네게 있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 '있어도 되는 곳'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뭔가 잘못됐다.
"...피 묻을 텐데."
목소리가 떨렸다. 핸드폰의 플래시가 던지는 어렴풋한 반사광 속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문하의 눈이 떨고 있었다.
"괜찮, 아?"
괜찮냐는 그 질문에는 너무 많은 것이 매여 있었다. 하의 손목을 옭아매고 있던 쇠고랑보다도 더 많은 것이.
만월이 찾아올 시기가 되면 언제나 외로움이 시아를 감싸곤 한다. 분명 요즘은 슬혜와의 시간을 통해서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체질이란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지 시아는 밀려오는 외로움에 머리를 쓸어넘긴다. 별 수 없다. 정말이지 귀찮기 짝이 없는 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외로움을 달래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뿐이었다.
" 뭐, 이젠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생겼지만.. "
더이상 외로움에 젖어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정처없이 위험한 거리를 걸어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기댈 곳이 있었으니까. 한없이 사랑하고 보듬고 싶은 사람. 눈을 감으면 언제나 떠오르는 그 아이만 있으면 시아는 망설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없던 자신감과 용기마저 생겨날 정도였으니까. 그 아이의 집으로 가기 전에, 마트에 들려 가볍게 즐길 달콤한 비스킷과 음료, 그리고 가벼운 식사를 만들만한 재료를 산 시아는 미리 기억해둔 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간다.
" ... 세상은 평상시랑 별로 다를게 없는데 말이지. "
분명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는 서로를 달래기 위해 만남을 가지고 있을 양과 늑대가 존재하겠지만, 거리는 한산했고, 평화로운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여태까지 그래왔으니 시아는 더이상 머리 속에 그런 생각을 담아두지 않는다. 불필요한 생각은 접어서 던져버리고 머릿속에는 소중한 그 아이만 떠올린다. 자신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는 상상속에서도 아름다웠으니까.
" 아, 다 왔다. 어디 보자.. "
슬혜가 알려준 주소대로 찾아온 시아는 문 앞에 도착해선 천천히 중얼거리더니 가벼운 심호흡을 한다. 딱히 슬혜를 만날 때에 긴장을 할 것이 없음에도 괜스레 심호흡을 하게 되는 것은, 벌써부터 슬혜를 볼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발버둥이 분명했다.
또 그날이구나... 하고 막연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어수선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건 분명 그것 때문이겠지.
그녀에게 있어선 그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확실하게 와닿지 않았다. 즐거운 나날들에 대해서 모두 기억해내며 짜깁기를 해보아도 돌이켜볼땐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는게 가능하기라도 했다면 덜 외로웠을까? 하지만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녀는 감정이 매우 무딘편이라서 직접적으로 와닿는것 외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바라다못해 매달리고 있었다.
평범한 양들이 만월일 때마다 외로움에 시달린다면 그녀는 그것에 공허함까지 더해야 할까. 물론 둘 다 평소에도 느끼는 감각, 감정이었지만 제어되지 않는 상황에선 무엇보다도 깊게 가라앉는 편이라고 하는게 그나마 적당한 표현이겠지.
"......"
차라리 무언가 만든다거나 요리를 하고 있다면 몸을 움직일 일이 많으니 그나마 공허한 기분도 덜 들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마치 제 집사를 기다리는 고양이마냥 현관에 웅크려앉아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집 안을 서성이다가도 저와 같은 처지였을 커다란 털복숭이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문앞에서 기다리다 버릇처럼 엄지 끝을 잘근잘근 깨무는 자신을 인지하자 그녀는 약간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정도면 중증이네요..."
별수 없는 일이라고 넘기려 했다. 어차피 오늘같은 날은 자주 있는게 아니니까, 하지만 자주 있는 날이 아닌만큼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기에 문 너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예민해졌던 그녀는 익숙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보였다. 주변을 살피고, 당신을 바라보고, 그러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걸 인지하고나서야 평소처럼 차분한 미소를 지어보였을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온거 같네요? 사실 마중이라도 나가야 할까 살짝 고민하고 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으려나~? 후후후..."
계절도 계절이지만 마냥 당신을 문앞에 세워놓는 것도 좋은 행동은 아니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넖은 공간의 어딘가에선 잔잔한 음악이 들려오고 있었고, 벽으로 보이지 않는 저쪽 어딘가의 사각에선 새까만 먼지떨이 같은게 살랑살랑 움직이다가 어느새 쏙 들어가선 대신 머리를 내놓고 있었다.
"...오라고 한건 전데, 막상 초대하고나니까 좀 쑥쓰럽네요~ 아무래도 날이 날이다보니까 그런 걸까요? 아, 물론 청소는 잘 해놓았으니까요! 뒹굴어도 된답니다?"
시아는 문을 열고 자신을 반겨주는 슬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크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열린 문과 문 앞에 서있는 슬혜의 모습을 통해 유추해본 시아의 생각은 슬혜가 자신이 오는 것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방 안에 편히 앉아있다 나왔다기엔 문이 열리는데 걸린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물끄러미 재잘거리는 슬혜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을 것이다.
" 슬혜야. "
천천히 장을 봐온 것을 현관 벽에 기대어 세워둔 시아는 나직히 슬혜의 이름을 부르며 신발을 벗는다.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집안에 발을 들인 시아는 슬혜의 앞으로 다가간다. 물끄러미 언제나처럼 빛나고 있는 슬혜의 눈동자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부드러운 슬혜의 머리카락과 뺨을 매만져준다. 그리곤 몸을 조금 숙여 슬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간 시아는 들을 이는 슬혜 뿐임에도 비밀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 문 앞에서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던걸까? 힘들었을텐데. "
귀여워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인 시아는 장난스런 속삭임을 남기고 떨어져선 살며시 슬혜의 손을 매만지곤 놓아준다. 그리곤 내려놓았던 봉투를 도로 집어든 시아는 슬혜보다 먼저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 슬혜가 기다리다 지쳤을 것 같으니까, 얼른 사온 것만 정리하고 달래줘야 할 것 같네. "
슬혜에게 들을라는 듯 웃음기 섞인 말을 던진 시아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한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자신도 슬혜를 만나 몹시 기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슬혜를 끌어안고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은근히 슬혜를 애태우고 싶은 마음도 들었기에 조금씩 시간을 끌어볼까 하는 짖궂은 생각을 하고 마는 시아였다.
" 뭐, 정 급하다면 얼른 어울려줄 수 있지만? "
시아는 걸음을 옮기다 돌아서선 슬혜를 향해 눈을 곱게 접어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장난스레 혀 끝을 내밀어, 옅은 화장을 해 붉은빛을 띈 입술을 훑어보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신이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이자 그때서야 자신이 무언가 서두르는 느낌이 강했단걸 깨달은 그녀는 잠깐 눈을 굴리다가도 당신이 내려놓은 물건으로 눈길을 옮겼다.
이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색하지 않는다 해도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을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서 앞으로 다가온 당신이 계속 시선을 맞추다가도 천천히 손을 뻗어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에서 뺨까지 쓸어오자 살며시 눈을 감고선 고로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별로 기다렸다거나 지쳤다거나 그런건 아니니까요?"
물론 평소였다면 그런 기다림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맞이해주고 경우에 따라선 당신에게 장난을 쳤을 수도 있으려나?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평정심이 없었는지 비밀이야기를 하듯 귓가에 속삭이는 당신에게 대꾸 아닌 대꾸를 하며 살짝 앓는 소리를 내보였다.
살며시 자신의 손을 매만지던 당신이 들고왔던 봉투를 집어들어 먼저 들어가자 옆에 있던 고양이 역시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벌렁 드러누웠고 그런 모습에 가볍게 턱을 긁어주던 그녀는 웃음기 섞인 당신의 말에 괜히 찔리기라도 한 양 샐쭉거리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정도의 인내심도 없는건 아니라구요~"
그게 허풍인지 진심인지, 아니면 잠깐정도는 참을수 있다는 뜻인지 구태여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바로 옆에서 작은 하품소리가 들려오는걸 보아선 평소의 그녀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는것 정도는 확실했다.
걸음을 옮기다가도 샥 돌아서선 매혹적인 눈웃음과 함께 혀끝을 내밀어 부러 강조하듯 훑어보이는 당신에게서 어느정도 신경을 썼다는듯 평소보다도 붉은 빛을 띄고 있는 입술이 보이자 살짝 의식의 끈이 느슨해졌던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선 당신의 어깨를 최대한 가볍게 그러쥐려 노력하고선 꾹 눌러두었던 말을 겨우 뱉어냈다.
시아는 자신의 반쯤은 도발을 하기 위해 던졌던 말을 낚아챈 슬혜를 보며 입술을 한번 더 혀 끝으로 훑어내며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역시 평소의 슬혜와는 다르다는게 이러한 사소한 부분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슬혜의 모습마저 몹시 사랑스러워서 자신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안달이 난 것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오늘 저녁은 가볍게 카레라도 해먹을까 해서 간단하게 사왔거든. "
자연스레 슬혜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안은 시아는 그대로 싱크대로 향한다. 슬혜를 싱크대 바로 앞에 서게 만들곤, 그 뒤에 자리를 잡고 선 시아는 옆에 봉투를 올려두곤 거기서 야채들을 꺼내서 싱크대 안에 담아둔다.
" 자, 카레에 들어갈 야채를 먼저 손질해두자. 일단 깨끗하게 씻어둘 필요가 있으니까.. "
슬그머니 뒤에서 백허그를 하듯 감싸안은 시아가 슬혜의 등에 자신의 몸을 맞댄다. 슬혜의 온기가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면서,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슬혜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선 속삭이며 슬혜의 손을 잡아 야채를 씻기 시작한다.
" 이렇게 감자는 먼저 물에... "
조곤조곤 슬혜의 귓가에 속삭임과 숨결을 불어넣으며 틀어둔 수도꼭지의 잔잔한 물소리를 반주삼아 시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두사람의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시아는 여전히 아무것도 의식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자신이 슬혜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하고 손을 움직여 슬혜의 손을 맞잡아 재료들을 손질해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10분, 20분 시간을 보내던 시아는 흘깃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한순간에 슬혜에게서 떨어진다. 여전히 시아의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마치 슬혜가 아쉬움을 느껴 더욱 갈망하길 바라는 듯 애간장을 태우다 떨어지려는 모양새였다. 평소의 슬혜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슬혜는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 그러면, 나는 잠깐 슬혜에게 손질을 맡겨두고 사온 간식을 냉장고에 정리해둬야 하겠는걸. 후후. "
시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한손으로 입을 가린 체 웃어보이며 말하곤 우아하게 뒤로 돌아선 간식만 남은 봉투를 들곤 냉장고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냐고? 소년의 얼굴을 마주하던 풀린 눈에 아주 약간 초점이 돌아왔다. 천천히 삐걱거리며 도달한 시선 끝, 온통 검붉은 액체로 뒤덮인 투박한 손. 겨우 잦아드나 싶던 울음이 예고도 없이 다시금 밀려나오고. 아, 흐윽ㅡ 어떡, 어떡해. 어떻게, 해? 오열에 섞여 알아듣기 힘든 절규 같은 것이 드문드문 흘러나온다.
소년의 손목에 닿을 듯 가까이 향하던 손 끝이 일순 움찔거리며 그 자리에 굳었다. 무의식 중에 닿으면 쓰라림을 느낄 것을 깨닫기라도 한 것인지. 그래서 새슬은 상처가 그득한 손목을 건드리는 대신, 조심스레 그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언젠가 했던 것처럼 제 뺨이 그 손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코 끝을 적시는 축축하고 비릿한 것. 말 없이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흘리며, 커다란 손바닥에 뺨을 부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누군가를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애절함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뺨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물줄기들이 소년의 피에 번져 붉다. 툭, 투둑.
“ㅡ왜?”
왜 그랬어? 눈물젖어 갈라진 쉰 소리. 싫어. 이런 건 싫어. 혼란스레 흔들리는 초점 가운데 소년을 두고서 중얼거렸다. 손에 들어온 온기가 금방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두려워서, 거기에 분명히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하듯. 소년의 손을 그러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문득 시리도록 추운 기분이 든다. 밖은 여름이 한창이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은 화창하다. 공기는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경아는 가디건을 여민다. 문득, 찬란한 햇빛 사이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온다. 이윽고 깨닫는다.
만월이다.
거뭇한 밤하늘에 달이 차오르는 순간마다 양은 외로움 속에 잠기고 만다. 피할 길이 아예 없지는 않다. 세 알의 약, 그 작은 것을 삼키면 파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경아는 재빠르게 기억을 더듬는다. 기실 더듬을 필요조차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이 만월이란 사실을 잊고 있지 않았나. 경아는 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가방을 뒤졌으나, 상비용으로 들고 다니던 약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 집을 급하게 나오며 잊고 나온 모양이다. 경아는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 노력하며 느리게 숨을 들이쉰다.
집으로 돌아가기는 글렀다. 이미 지나치게 멀리 나왔을뿐더러, 만월에 집에 있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경아는 희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살핀다. 나무를 숨기려 한다면 숲에 숨겨야 한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경아는 달음박질쳤다. 얄팍한 수작으로 양의 페로몬을 완전히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 운수를 시험해보려 한다.
도서관의 가장 안쪽,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없는 코너.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책들이 선택을 기다리는 곳. 경아는 다급한 손길로 책장을 훑는다. 마침내 한 책을 발견한다. 거대한 흰 향유고래가 헤엄치는 표지 위 가득하게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유영하는 고래를 보는 경아의 얼굴에 그제야 옅은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든다. 경아는 책을 품에 안는다. 긴장을 온몸에 두르고, 빠른 발걸음으로 창가를 향한다. 넓은 창틀 위로 익숙하게 올라간 후 커튼을 친다. 단절된 공간 속에서, 창유리를 통해 내리쬐는 햇빛만이 외부의 것이 된다. 그곳에서 경아는 한참을 숨죽여 웅크렸다. 흐트러진 숨소리를 가다듬고, 뒤늦게 책 표지를 펼친다. 경아는 바깥을 잊겠다는 양 이를 악물고 책을 붙든다. 그러는 동안에도 바깥 하늘은 빠르게 변한다.
그렇게 대답하면 싸울 일이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하지만 그 답은 네가 생각나지 않을 일은 없어, 일 것이다. 네가 그런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기에 기대고 싶은 건지. 내가 응석쟁이이기에 기대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 나을 때까지... 제대로 치료해야 해... ”
집에서라도 제대로 치료했다니 다행이지만, 치료한 상태가 이거라니... 말을 이어가지만 역시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 하지만 병원에 가라고 하는 건 간섭일까? 고개를 제대로 들어 얼굴을 바라보고 싶다가도, 바라보고 싶지 않기도 해. 아랑은 모자를 쓰고 나온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무서워, 연호야. 상처가 남은 네 얼굴을 보는 것도, 내 표정으로 인해 네가 상처 받을 것도.
- 가까워지고 싶어.
그러고 보면 연호는 한 번도 멀어지고 싶다고 말한 적도, 표현한 적도 없는 것 같지. 다소 불안정하게 기대어 있었지만, 안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팔이 아랑의 목과 등에 감긴다.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의 힘으로 안아주었지만, 차라리 좀 숨이 막히게 안아주었으면.
너를, 확실히. 내 품에 새기고 싶어.
“ 그렇게 해줘... ”
잠긴 목소리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듯 중얼거린다. 아마 그의 품이 눈물로 젖어 들어가겠지. 아랑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그에게 기대었다. 망설이다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당기진 않고, 조심히 잡고만 있다.
스스로에 대한 제어를 잃어버리는 그 아찔한 감각에 대한 반향이 아직도 문하에게 선명히 남아 있었다. 패치가 어떤 이유로건 만월 발작을 억제하는 데에 실패하면, 폭주하는 고독은 증폭된 시간 속에서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늑대 증상과 부작용이 끔찍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게 문하가 스스로를 두려워하는 이유였고, 다른 사람들을 꺼리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하의 손은 어떤 항거도 하지 못하고 새슬의 뺨에 맥없이 끌려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그게 무서웠어. 문하는 눈을 감았다. 자신을 이 외로움에서 건져줄 누군가를 바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행복한 이야기와, 모든 좋은 일들과, 모든 축복받은 바람은 항상 그를 빗겨가는 것이었다. 한때는 마침내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고, 자신의 고통은 끝났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그 잠깐의 행복은 그에게 냉엄한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일 같은 것은,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분에 넘치는 일이라고.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기에는 이미 자신은 너무 황폐해지고 무너져있기에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은 그 누구와도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이것 봐. 피 묻잖아.
"내가 싫어?"
그렇지만, 그는 마음 한 켠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자신을 붙들어줄 누군가를. 황무지에 언제 내릴지 모를 이슬비를. 행복이 없다고 한다면... 함께 찾아나설 사람을.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희망이 아직도 그의 가슴 속에 쐐기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슬비 한 방울이 손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러면 떠나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려고 했다. 가슴팍 한가운데 박혀있는 이 지긋지긋한 희망을 뽑아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문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은 결코 문하 스스로 뽑아낼 수 없을 만큼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었고, 결국 문하는 눈을 꾹 감은 채로, 남아있던 팔로 새슬의 어깨를 좀더 힘주어 꾹 안았다.
아랑이는 좀 더 세게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 좀 더 세게를 연호 기준으로 잡으면... (...) 어떻게 되냐고 묻고 싶은데... 혹시 계신가요 :3 ... 아랑이 기준으로 좀 더 세게면 약간 세게... 약하게 세게 조금 더 힘을 줌 (...) 입니다... <:D
제대로 치료하라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랑이 알고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아랑이 알아차린다면 얼마나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 자신의 몸을 크게 돌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병이 난 적은 없으나, 다친 상처들에 대해서는 가볍게. 그저 가볍게 여기며 알아서 아물 때 까지 상처를 물에 씻어내거나, 소독약을 바르는 것이 전부였다. 이걸 아랑이 알아차린다면.....
좀 더 세게. 그 말을 듣고서 연호는 잠시 생각했다. 정말 숨이 막히면 어떡해? 네가 힘들어하는건 보고싶지 않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가끔씩이지만, 그냥 안아주는 것 보다는 차라리 꽈악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세게 안아주어서, 상대와 내가 잘 붙어있음을, 너의 온기를 느끼고 싶음을. 연호는 그런 감정을 잘 알고있었다. 아랑이 과연 그런것을 의도했는진 모르겠지만, 연호는 아랑의 바램대로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호도 부족했으니까. 그저 꼭 안아주는 것 만으로는, 아랑을 느끼기에 더없이 부족했으니까.
"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 "
네가 응석을 부리고 싶다면, 어떤 응석인지 말하지 않고 부려도 괜찮다는 말. 덧붙여 말하면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 때, 같이 춤을 추면서 건넸던 말. 아랑의 손을 붙잡고서 함께 춤을 추었던 그 날은 아직도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충실히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랑을 볼 때마다, 입안에 남은 향이 존재감을 어필할 때 마다.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졌었다.
" 그건 그날만을 말하는게 아니니까. "
" 응석, 부리고싶은 만큼 얼마든지 부려도 돼. "
생각해보면 그때 그 말을 하고서, 아랑이 연호 자신에게 응석을 부렸었는지... 연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나가는 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응석을 받아줬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아랑이 안아달라고 하는것도 응석의 범주에 드는걸까? 지금 그가 이런 말을 하는것은, 아랑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기만 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 들어 생각을 지워버리고, 연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씩 꼼지락거리는 몸은, 온 몸이 그녀에게 붙을 수 있도록 움직이려 했다. 그렇게 붙어있으면서도, 그렇게 꼭 안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는 듯이, 조금 더 온 몸으로 그녀의 온기를 느끼려 했다.
>>436 저도.. 저 레스를 쓰고 나서 ㅇ연호기준으로 잡으면 아랑이 숨을 아예 못 쉬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금 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 연호가 아랑이한테는 조절을 너무 잘해줘서... 그게 너무 감동적인데.... 뭐라고 표현할 짤이 없네요....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