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872 이름 없음 (x3KTa4IofA)

2022-10-20 (거의 끝나감) 03:19:10

>>870-871

방금 전 당신의 잔을 비워내던 건 없었던 일인 양 제 몫의 잔에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실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잔에 담긴 것을 쏟아버리고 잔을 던져 산산조각내지 않도록. 어디를 향한 분노인지 알기 전까지는 섣불리 말을 뱉거나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꼴 같잖은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미 충분히 우스운 꼴인데 그깟 자존심 운운하며 비꼬는 말에 흠집 하나 더 생긴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을까. 그러나 당신의 물음에는 하, 하는 날카로운 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 형제를 죽인 사람치곤 꽤 깜찍한 물음이 아닌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잔이 깨졌다. 움츠러들었던 것도 잠시, 처음처럼 꼿꼿하게 선 채 당신을 마주보다 한 발자국 다가선다. 와인인지 피인지 분간이 어려운 것이 떨어지는 당신의 손을 제 양손으로 꽉 쥔다. 깨어진 조각이 제 손에 흠집을 낼 때까지.

“한때는 당신을 사랑했고, 지금은 원망도 사랑도 않는다 말하지 않는 당신이 끔찍합니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목구멍에서 울컥이듯 쏟아지는 목소리가 일순간 멈춘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도 지나치게 넓은 방을 지독한 적막이 가득 메웠다.

“당신이 내가 원했던 걸 전부 가지고 있으니까.”

아까와 같은 웃음에 얼핏 황홀경이 스치는 듯한 눈동자. 그러나 이윽고 시선을 돌려버리고 만다. 황급히 가린 입술에 맺혔던 건 웃음이었던가.

/ 아앗.. 황제폐하 레전드 똥차한테 걸리셨네 ^ㅁㅠ

873 이름 없음 (Gvk0N6dOLY)

2022-10-20 (거의 끝나감) 09:20:31

>>872

아아, 그 눈동자다. 황홀경 안에 담긴 그 강렬한 욕망의 눈빛.

처음부터 그를 사로잡은, 패배자로 만든 그 눈동자였다. 형제도, 자신의 아버지 마저도 한낱 더러운 토사물,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이 젊은 황제에게 있어서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추악하고도 덧없이 아름다운 한떨기 꽃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료한 황제에게 있어서 마약이나 다름 없는 존재 일 것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 이 황제는 하루에도 수십명을 죽여가며 그 삶에 색채를 더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러 올 칼날을 기대하며 피로서 목을 축이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여인은 지금 자신의 가치가 그 무엇보다 드높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무료함에 지쳐버려 언제라도 광기에 물들 수 있는 오만한 천재에게 있어서 지금 그녀는 그 어떤 무언가보다도 그를 옭아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사슬임을 모를것이다. 이미 황제는 알고 있다. 그녀가 그 어떤 것 보다도 지금의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손에 움켜쥐고 싶었다.

"어차피 흙더미와도 같은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런 자리는 전혀 중요치 않지."

오만하였다. 제국의 황좌에 올라서면서,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대가 이것이 중하다고 하다면은, 난 이걸 끝까지 지킬것이다."

그래, 좋은 정치로 백성들의 배를 불려주마. 강력한 병권을 기반으로 정복을 진행하고 제국의 권세를 드높여 주마.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악명보다도 드높은 명예를 세움으로서 2천년이 지나도 쇠하지 않을 제국의 기반을 마련해주겠노라. 그것이 지금 그대가 바라는 황제로서의 권세와 힘을 사랑한다면 말이다. 나에게는 그럴 힘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말이다. 왼손에 깃든 상처에 느껴지는 차가운 온기를 느끼며 그가 천천히 소녀를 응시한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너는 내가 가지지 못한 유일한 것을 가졌으니, 나는 너를 손에 쥔 채 살아갈 것이다."

연기라도 좋았다. 한순간만이라도 좋았다.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좋았다. 지금의 황제에게 있어서, 이런 광기에 사로잡힐 정도로 자신의 삶은 무료했고, 그 무료한 삶을 깬 것은 그녀였으니까. 그 순간 황제의 눈빛이 아무런 색채도 띄지 않은채, 자연스럽고도 부자연스럽게 뒤틀린 미소를 자아내었다. 누군가 본다면 너무나도 순수한 미소겠지만, 누군가 본다면 광기와 욕망에 점철된 미소일 수도 있으리라. 과연 그녀는,

"도망 갈 꺼면 지금뿐이다. 아니, 도망가도 상관없다."

─어떤 모습을 보고 있을까.

"너는 이제 내 것이니까."

그 세상 어떤 것보다도 증오한단다. 아름다운 꽃이여.


/어차피 둘다 쓰레기로는 쓰레기지 않을ㄲ..... 한쪽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남자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한쪽은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의 형제를 쳐죽인 다음 그 수급을 아버지 면전에 던졌으ㄴ....
/여담이지만 선대 황제는 즉위식 전날에 사망했어. 황태자를 죽인 넷째 아들의 행보에 충격을 먹고 심적 타격이 너무 커서 기력이 한순간에 쇠약해진 탓에 그만....

874 이름 없음 (gbuWS/HQxk)

2022-10-20 (거의 끝나감) 23:55:37

ㄱㅅ

875 이름 없음 (mTCHoY1mI6)

2022-10-23 (내일 월요일) 11:16:10

>>873 시간이랑 체력이 없어서 계속 늦어지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이어놓을게 미안 ㅠㅠ!

876 이름 없음 (owVR7LZ0ug)

2022-10-23 (내일 월요일) 18:29:42

'당신의 스타일을 존중하지만, 데드라인은 오늘 저녁까지에요.'

도심의 복잡한 거리 한켠에서, 여인은 벽에 기댄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드물게도 활기가 만연한 뭇 사람들 틈에서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거리며, 사람들이며, 행복이 가득한 날이었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던, 죄악스러운 혼란과 사투의 시대가 겨우 끝난 직후였으니까. 수도 전체를 둘러싼 축제의 열기는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사람들의 기쁨과,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의 반영인 듯이 찬란했다. 그렇지만, 이 젊은 아가씨만은 행복에 겨운 사람들 틈에서도 우울한 표정을 고수하며 떠안은 고민거리를 곱씹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고민 또한 어제까지의 그림자 드리운 고뇌에 비하면 단란하다고 할 만했다. 아니,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행복한 고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평화의 바람과 축제의 열기가 수도를 휩쓸면서, 전란기에는 오랜 시간 잊혀져 있던 문화들 또한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특히나 연극은, 혼란을 종식시키는 데 이바지했다는 여러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수많은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업적에 비해, 그들 각자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점은 오히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였다.

오랜 시간 일을 쉬어야 했던 무수한 극단들이 수도로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벌써 수도의 여러 홀과 극장에서 영웅담을 재해석한 연극들이 상영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에 명성이 대단했던 모 여성가극단도 당연하다시피 기회를 얻었다. 사흘 뒤면 수도의 유서 깊은 극장에서 그녀들의 연극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 연극의 주연 중 하나를 맡게 된 이 젊은 아가씨는, 한숨을 픽 내뱉으며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어, 배역의 성격도, 방향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우울함을 곱씹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쩌지,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없는데..."


/원래는 >>380을 보고 이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써봤던 건데, 너무 시간도 지났고 이제는 없을 것 같아서 한번 구해볼게
/기본적으로 어떤 배역을 맡은 배우와 그 배역의 모티브가 된 세계관 내의 실존인물이 우연히 만난다는 느낌을 생각하고 쓴 건데, 이게 아니더라도 맥커터만 아니면 어떻게 이어주던 괜찮아
/어... 이제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여나 >>380이 아직 있다면, 그 내용으로 이어주더라도 좋아.

877 이름 없음 (z5DMf9RAPQ)

2022-10-24 (모두 수고..) 08:49:35

>>876
쾅! 수심이 어린 한탄을 집어삼키듯, 근처에서 굉음이 들렸다. 나무 테이블을 내려지는 듯한 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짜증이 담긴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배우가 서 있는 곳에서 가까운 주점이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탓인지, 취기가 묻어나면서도 격앙된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말들은 귀를 기울인다면 가게 밖에서라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가라는 말이 말같지가 않아요? 그래요, 다 말할 테니 입 다물고 받아나 적으시죠. 돈 때문이에요, 그 빌어먹을 싸움에 낀 거. 그 싸움 하면 내 가족 생계를 보장해주고, 때려치면 그날로 밥줄을 끊는댔으니까. 우리 가족 배 곪는 게 싫어서 꼈어요. 이유는 그게 다예요. 영웅? 그건 떠들기 좋아하는 작자들이나 하는 소리고, 저 쪽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으면 그 편에 붙었을 걸요?"

비웃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잠시 목소리가 끊겼다가, 조금 지나자 한층 가라앉은 듯하지만, 여전히 격앙되어있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사명이네 의무감이네, 적어도 나한텐 해당사항 없어요. 나 살고 내 가족도 지키기도 뼈빠지겠는데 무슨 놈의 세상을 지켜요? 지킨다 쳐도, 그 대신 내가 죽으면, 내 배우자, 내 새끼가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그냥 개죽음이지. 이 짓거리 다신 안 할겁니다. 돈 줘도 안 해요. 받을 거 다 받았고 모을 만큼 모았으니까. 이제 됐죠? 듣기 좋고 팔릴 만한 영웅담은 딴 데서 알아봐요, 호사가 양반. 나한테서 나올 이야기라곤 이 정도니까."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끊겼고, 이윽고 소리가 났던 주점에서 족히 2미터 이상은 될 듯한 기골이 장대하고 우람한 체형의 여성이 걸어나왔다. 대충 묶어내린 짧은 은발은 머릿결이 억센지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었고, 있는대로 치켜올라간 짙은 눈썹이 미간은 있는대로 구겨져있었으며, 안 그래도 삼백안이라 더욱 사나워보이는 형형한 빛을 띤 벽안을 감싼 눈매는 퍽 날카로워 험악한 인상을 더했다.

"에라이, 술맛 떨어지네. 재수가 없으려니..."

퍽 살벌한 투로 투덜거리며 주점에서 벗어나 터덜터덜 걷던 여성의 형형한 시선이 우연인지 우두커니 서 있던 배우를 향했지만, 이내 여성은 고개를 돌리고, 술이라도 깨보려는 듯 허리에 찬 수통을 풀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878 이름 없음 (dySu8XDb9Q)

2022-10-24 (모두 수고..) 11:58:11

>>876 오. 이걸 이제야 봤네. 일단 한참 옛날것인데 이어주려고 생각해준 것은 고마워!
허나 이미 다른 이가 이었으니 내가 잇긴 힘들 것 같네. 아쉽다. 아무튼 즐상판!

879 이름 없음 (DHKy8oc0ME)

2022-10-24 (모두 수고..) 17:30:06

>>877

요란한 충격음이 들린 순간, 아가씨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고 머리를 숙였다. 학습된 동작이다. 포격음이 들릴 때마다 이러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렇지만, 포격음 치고는 너무 작지 않나 싶은 의심에 고개를 들어보니,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고 다시 원래대로 벽에 등을 기대었다. 남몰래 내뱉은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이 뒤따랐다.

"폭죽 터뜨릴 때도 이러려나, 나..."

아가씨는 입을 삐죽거리며 소리의 진원지를 흘겼다. 문 단속도 되어있지 않은 주점에서 쩌렁쩌렁 흘러나오는 성난 목소리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역행하는 것처럼 홀로 섬뜩했다. 아까의 굉음도 그렇고, 어쩐지 전쟁 중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에 아가씨는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미미하게 어께가 떨렸다. 괜시리 주변을 다시 훑어보고, 여전히 자신이 축제의 한복판에 있음을 확인한 뒤에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여전히 그림자같은 전시의 기억이 남아있음이 새삼 체감되는 것만 같았다.

곧 문에서 걸어나온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전사일까?' 기골이 장대한 인상이나, 아까부터 크게 울렸던 목소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합리적인 추측인 것 같았다. 그대로 아가씨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훔쳐보기 시작했다. 곧 성큼 성큼 걸어온 여전사가 어느 새 자신의 앞까지 걸어와서, 기어코 자신을 바라봐 눈이 마주치는 순간까지.

"아, 죄, 죄송...?"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사과의 말을 건네었지만, 그새 여전사는 자신으로부터 눈을 떼고,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고 있었다. 황망함을 느끼며 그녀를 불만스레 쏘아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새삼 모르는 사람 상대로 뭘 하는 건가 하는 허탈함이 느껴져, 아가씨는 결국 한켠으로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거람, 나도 시간이 없는데."

잊고 있었던 배역에 대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자, 일련의 소동도 순식간에 사소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대로 다시 고민에 잠기려는 찰나, 언젠가 들었던 조언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누구라도 좋으니, 사람을 만나 대화라도 해 봐요. 연기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아가씨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다시 여전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에게?' 많이 격양된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어쩌면 괜히 한 대 얻어맞는 일이 생기지는 않으려나 싶어 망설임이 생기다가도, 그녀는 곧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878 /꽤 옛날 글이라서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구나... 아쉽게 됐지만, 그쪽도 즐거운 상판 하길 바라. 답해줘서 고마워!

880 이름 없음 (z5DMf9RAPQ)

2022-10-24 (모두 수고..) 21:30:20

>>879 큼지막한 수통을 다 비운 덕인지 차차 머리가 맑아졌고, 이내 그는 사람을 하나 담그기라도 할 것 같았던 조금 전보다는 나은 얼굴로 수통을 내렸다. 이윽고, 웬 (당연히 자기보다는) 작은 여성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는 제게 한 말인가 가늠해보려는 듯 의아한 얼굴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아닌 땅바닥을 향해 있는 시선에 혼잣말이었나보다 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조금 전 제 앞에 있었던 여성이 말을 걸어오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괜찮냐라, 너무 술에 취해보였거나, 아니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나? 부끄럽네. 양육자가 돼서 이러고 다니면 안되는데. 배우자와 함께 있을, 옹알이밖에 못하는 제 어린 딸이 생각나 부끄러워지는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차분해진 투로 여성에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주정뱅이나 화가 나 보이는 덩치 큰 자를 보면 괜찮냐고 물어보는 대신 피하라고 말하고픈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머물렀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저 쪽도 액면가는 성인이고, 말해봤자 꼰대질이겠지. 일 때문에 엮인 사람들 중에 저만한 체구인데도 잘만 싸우던 사람도 제법 있었고. 가면서 술 좀 더 깨고 들어갈까. 오늘만은 마시고 풀어도 된다고 해줬지만, 지금 이 몰골로 들어갔다간 분명 속상해할 테니까. 우리 귀염둥이 볼 낯도 안 서고. 그래, 힘든 건 건강하게 풀어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가려던 길을 가려다, 그는 술이 덜깬 중에도, 자신을 노골적으로 훑어보거나 쏘아보던 상대의 시선을 느꼈음을 떠올렸다.

"다른 용무는 없어요? 없으시면 이만 가보게요."

/여전사라는 언급 보고 궁금해진 건데 내가 남캐를 냈으면 남전사라고 지칭했을까?

881 이름 없음 (838pcrpbnA)

2022-10-25 (FIRE!) 01:10:33

>>873

제가 일생동안 바라왔던 것을 전부 쥐고, 모두를 발 아래 두고도 이 모든 게 아무 의미가 없다 하는 당신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 모든 걸 제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말은 꼭 절절한 사랑고백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여전히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는 없다. 갑작스레 방 안에 갇힌 채 며칠을 보내며 내린 판단이었다. 나오자마자 듣게 된 당신과 나의 결혼 소식엔 잠시 착각하기도 했으나——, 당신의 말을 듣고서 작게 조소했다. 결국에는 쓸모였던 게지.황태자가 저를 택한 이유가 있듯이, 당신 역시 필요에 따라 나를 고른 것이다. 하긴, 사랑만큼 지금의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추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저는 모든 걸 손에 쥐고 싶어 지난 날의 당신도 버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욕심이 아주 많아요. 변덕도 아주 심합니다.”

당신의 미소를 보며 함께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듯 온화한 미소, 그러나 시선에 서린 냉기까지 완벽히 감추지는 못했다.

“당신에게 없는 단 하나가 제게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걸 주어야 할 겁니다. 저를 온전히 손에 쥐어야겠다면… 글쎄요, 알아서 잘 해보셔야겠습니다.”

내내 발을 옥죄고 있던 구두를 벗어던지고 서서 당신을 바라본다.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고.

“제게 있는 두 다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고 양 손에 무엇을 쥐고 싶어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머리를 장식하고 있던 것들을 빼내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이따금 섬세하게 세공된 부분들은 떨어져나와 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882 이름 없음 (KWtBKqRYi2)

2022-10-25 (FIRE!) 01:18:21

>>881에 대해 한가지 질문!!

강제로 입맞춰도 됩니카?(....)

는 아마 내일 아침에 답이 올라갈꺼여!!

883 이름 없음 (YnVVeNVtj.)

2022-10-25 (FIRE!) 08:15:10

>>880

수통을 한번에 다 비워버리는 모습에 아가씨는 살짝 감탄했다. 이 덩치 큰 여인의 태도는 투박하면서도 여러모로 호방한 데가 있었다. 신기함을 담아 다시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멍청하니 올려보다가, 곧 숨을 고른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자, 아가씨는 잠깐 텀을 두고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내었다.

"다행이네요, 꽤나 큰... 소리가 나길래."

다시 방금 전까지 여전사가 있었던 주점 쪽을 흘끗거리고서,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떠날 태도로 보였다. 어떤 식으로는 말을 붙일 필요를 느껴 아가씨는 황급히 부연했다.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한테는 언쟁하는 소리로 들렸는데요. 상당히 험악하게."

여기까지 이야기하니, 상대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필 필요가 느껴졌다. 아마도 화나는 일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을 테니까. 괜시리 자극하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사람에게 띄워볼만한 화제는 이것 뿐이었다. '말을 붙인다는 거, 생각보다 어렵구나.'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가씨는 긴장된 태도로 질문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겨우 돌아온 좋은 날에 화를 내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전사, 내지는 사내라고 불렀을 거라 생각하는데...

884 이름 없음 (3Ie6rSNVtE)

2022-10-25 (FIRE!) 08:31:23

>>882 웅 괜찮아 ㅋㅋㅋㅋㅋㅋ 좋은 아침!

885 이름 없음 (qUNt16e6iA)

2022-10-25 (FIRE!) 11:45:25

>>881

결국 용이 되어버린 남자, 패황(覇皇)의 자리에 앉아 만인을 오시하게 되었으나 그 마저도 그에게 흥미를 받지 못하는, 무언가가 결여되어버린 남자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갈망을 가라앉히고자 물을 마셨으나 그 물이 결국 바닷물이었던 것 처럼 그 무엇도 그에게 충족감을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결국 사내에게 있어서 정신을 좀먹어가는 저주나 다름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가질수 있고 그런 위치에 있으며 그러한 힘까지 있음에도 하늘은 단 하나, 그것을 허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바로 그에게 걸린 주박이었으니까.
황태자였던 형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굴었을때가 떠오른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황제가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상처 하나 주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떠나갔을때의 그 분노에 찼던 그 순간이 용이 되기전의 남자에게 남긴 가장 큰 상흔이자, 지금의 역린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순간 왼손이 아주 잠깐 시야에 들어온다. 레드와인으로 범벅이 되어 손에 흐르는 피와 같은 그 자태에─단련된 사내의 손아귀는, 결국 손바닥에 얕은 상흔만을 남겼을 뿐이었다.─자신의 길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그 모습이 연상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본다.

─그 순간이었다. 그 미소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래, 자신이 왜 손에 피를 뭍혀가며 이곳에 왔는지를.

"상관 없다."

무엇이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는 갑자기 타오르는 갈증과 더위를 견뎌내려고 하려는 듯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단단하고도 오밀조밀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갑주, 그 위로 아로새겨진 상흔의 흔적들은 마치 굳건한 용의 자태와도 같았으며 그 모든것이 조화를 이룬 모습은 그 어떤 예술품을 가져다 놔도 그 빛이 바랠 정도였다.
그녀의 발을 묶던 신발이 벗어던져지고, 머리를 장식하던 족쇄와도 같은 장신구가 떨어져나간다. 재정관리자가 봤다면 저게 얼마짜리인데, 라고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겠지만, 사내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눈앞의 소녀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대해 용은, 지금까지 타인들이 봐왔던 어떤 모습보다도 흥분해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인가?

"그리고 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너에겐 족쇄가 되어주지 못하겠지."

─잘 모르겠다. 그럼 증오인가?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너를 붙잡을 것이다."

─그 또한 잘 모르겠다.

미웠던 순간, 같이 있던 순간, 아주 잠시나마 모든 것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란 시절, 그 모든 상념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아, 결국 너가 내 삶을 완성시켰구나, 그렇기에 나는 영원히 너에게 이길 수가 없는 것이구나. 그저 네가 떠나가면 다시 이 손에 움켜쥘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마치는 순간 용은 그 강건한 육체로 여인을 포박하듯 벽으로 밀어붙였고, 오른손으로 우악스럽게 여인을 감싼 옷의 앞섶을 움켜쥔다. 리비도(libido)를 일으키는 강렬한 향기에 용이 목울음을 내뱉으며 조용히 소녀를 바라본다.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 너는, 영원히 내 것이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너는 내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랑과 증오, 소유욕으로 점철된 감정이 입술을 타고 포개어진다.

//저질러 버렸어!(즈큥)
//네, 그래요. 반쯤 맛이 간 상탭니다. 어.... 뺨을 때려도 되고 뭔 짓을 해도 오케이!

886 이름 없음 (CfbiakVYm.)

2022-10-29 (파란날) 08:34:39

갱신

887 이름 없음 (jk53Y7grPM)

2022-10-29 (파란날) 20:12:57

와우, 큰일났다. 진혁이랑 미선이도 물렸나봐. 쟤네 서로 삽질하던거 자기들만 몰랐을텐데, 좀비가 되고나서야 붙어다니네. (매점 문 앞을 막아둔 철제 선반 틈 사이로 복도를 살피며 중얼거린다. 대걸레 자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야, 상태 좀 어때? 창문으로 나가는 건 힘들어보여?

888 이름 없음 (143JeWI5bM)

2022-10-29 (파란날) 20:25:51

>>887 응. (창문을 열고 동전을 휙 던져보며)다른 위치에 소리가 나도 크게 그쪽으로 몰려가지를 않아. 이렇게 낙하지점에 바글거리고 있으면, 땅에 닿기 전에 이빨에 낚아채일 테니 낙상은 안하겠다. 어때, 밥상 위로 떨어지는 제육이 되고 싶은 생각 있어? 없다면 좋겠는데.

/Q. 고등학교? 대학교?

889 이름 없음 (jk53Y7grPM)

2022-10-29 (파란날) 20:29:46

>>888
너무 많이 몰려있다보니 소리가 묻히나보네. (전파가 통하지않는 스마트폰을 잠시 켜보곤 다시 화면을 끈다.) 됐네요. 너때문에 이제 제육 못먹는다. 오, 이렇게 보니까 콘서트장 같기도 한데, 뛰어들면 물결로 옮겨주지 않으려나. 흥 좀 돋궈야하니 노래 한 곡 뽑아봐. (일회용 스푼을 던져준다.)

/A. 생각 안해놨는데......고등학교로 하자! 2층 아니면 3층인가보네!

890 이름 없음 (143JeWI5bM)

2022-10-29 (파란날) 20:38:52

>>889 지금 매대에 남은 음식 빼고는 뭐든 앞으로 먹을 일 없을걸. (창밖에 시선을 고정해둔 채로 스푼을 탁 받고, 아주 자연스럽게)거리에 흐르는 세월에 지는 꽃잎처, 아이 씨, 지금 이럴 때냐.(안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살짝 째릿거린다.) 노래부르면서 발랄하게 끝나고 싶지는 않아. 가수 지망생도 아니고... 그보다 마침 동전이 2개 남았는데, 누가 먼저 할까?

/OK

891 이름 없음 (jk53Y7grPM)

2022-10-29 (파란날) 20:45:04

>>890
아직 모르는 법이야. 경찰, 군대, 뭐 소방관 님들이라도 와주시지 않을까. 아, 제육먹고싶다. (자연스레 당신의 노래에 심취해 고개를 흔들다 푸핫, 웃음을 터뜨린다.) 아냐, 동전은 아껴두자. 나중에 실내로 나가야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문에서 떨어져 앉아 벽에 상체를 기댄다.) ...묭이 보고싶다. 내 침대에 오줌쌌다고 아침에 뭐라하고 나왔는데 후회돼. 부모님은 무사할려나.

892 이름 없음 (143JeWI5bM)

2022-10-29 (파란날) 20:57:30

>>891 뭔지 알고 아껴 두래...(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창을 소리 안 나게 닫고 진절머리를 치며 창가를 등진다.) 묭이는 누구야? 개? 고양이? 설나 하니, 사람은 아닐 거 아냐.(웃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반려동물 같은 거 키워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 보고 싶은 건 그래도 똑같구나. 똑같아, 똑같아서, 그, 엄마랑, 다들 괜찮으려나...(살짝 침묵)

893 이름 없음 (jk53Y7grPM)

2022-10-29 (파란날) 21:03:43

>>892
사람? 실화냐. 사람이면 진심 좀비보다 더 무서워. 내 침대에 오줌 누는 사람이라니. 강아지야. 말티즈. 10살. 우리 생각보다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구나? (힘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괜히 까만 화면의 핸드폰 모서리만 만지작거린다. 대기화면을 보면 더 보고싶어질 것 같아서.) ...그... (침묵에 뒤늦게 조심스레 입을 연다.) ...또다른~ 만남도 알 수 없는 운~명인 것을~ (휴대폰을 마이크 삼아 간드러지게 부른다.)

894 이름 없음 (143JeWI5bM)

2022-10-29 (파란날) 21:17:01

>>893 10살? 개가 10살이면 어르신이지? 노인네가 변 좀 못 가렸다고 화나 내고, 나쁜 주인이네.(헛웃음을 흘린다.) 괜찮잖아, 여기까지 와서... 나랑 발톱 넓이까지 공유할 만큼 친하지 못한 게 서운했어? 생각보다 이것저것 신경쓰는 놈이었구나, 너. (이래 저래 아무 말이나 늘어놓다가, 결국 침묵 속에 멍하니 위만 올려다본다.) ...천장, 그러고보니. (다시 창을 열며)위로 올라갈 수는 없을까?

895 이름 없음 (jk53Y7grPM)

2022-10-29 (파란날) 21:30:38

>>894
맞아, 진짜 나쁜 주인이야. 매번 있는 일이니까 한 번 쯤은 넘어가줘도 되는데. (자책이 진심인지, 아무 말이나 내뱉는 중인지 알 길이 없다.) 어어? 양말 벗어봐. 발톱의 반지름을 구하시오. (키득거리며 밀대 끝으로 당신의 발 끝을 쿡쿡 찌른다. 그러다 창을 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다.) 영화에서 본 거 같은데, 그거. 해볼래? 가위바위보! (기습으로 주먹을 낸다.)

896 이름 없음 (143JeWI5bM)

2022-10-29 (파란날) 21:37:10

>>895 ...매번 있는 거면 진짜 알츠하이머 아닐까? 아, 아, 찌르지 마. 찌를 거면 나보다 맛탱이 간 급우들부터 찌르라고. 그러긴 싫겠지만. (중얼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쳤지만, 잠시 후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말한다.)바보냐? 보통 가만히 있을 때 손을 가위 모양으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활짝 편 손을 흔들어보인다.) 일단 좀 보자고. 말은 했지만 나, 파쿠르 같은 것도 해본 적 없고, 전혀 자신 없단 말야.

897 이름 없음 (lVoPndu3ew)

2022-10-30 (내일 월요일) 22:56:12

>>896
원래 노견들은 다 그래. 하아, 기왕 먹힌다면 차라리 묭이한테 먹힐래. (의미없는 농담을 흘린다.) ...너 머리 똑똑해서 좋겠다. 전교 몇 등이었냐? 참고로 말하자면 난 뒤에서 세는 게 빨랐는데.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며 창문 쪽으로 바싹 붙는다. 그리고 몸을 바깥으로 내밀어 위쪽을 살펴본다.) 그런데 해보자고 한 건 어차피 나 시킬 거였다, 이거지? 그래그래. 근데 생각보다 할 수 있을 거 같기도? 중학생 때 비슷한 걸 해봤는데, 그 때랑 비슷해보여.

898 이름 없음 (gvfvSHbWmA)

2022-10-31 (모두 수고..) 08:12:41

>>897 전교 47등, 좀 치지? 학원에서는 꼴찌였는데, 어쩌면 지금 시험 보면 내가 1등, 네가 2등일지도?(창가에서 비켜준 뒤, 주변을 둘러본다.) 아니 아니, 생각을 해보자는 거지. 내가 그렇게 비겁한 새끼로 보였어? 일단 로프 같은 거라도 좀 찾아보자고. 매점 창고에 있으려나. (매대에서 소시지 하나를 꺼내 던져준다.)육체노동 할 거니까 일단 먹고. 중학교때 벽도 타봤냐? 태릉선수촌이 따로 없군.

899 이름 없음 (eZHR4XX/qA)

2022-11-02 (水) 19:27:26

갱신

900 이름 없음 (OnGv9GlvOU)

2022-11-04 (불탄다..!) 05:22:52

모든 게 엉망이었다. 모처럼 학기말 시험이 끝나 학업으로부터 해방된 날이었는데도. 시험기간이 시작될 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가며 정했던 일정이 시작부터 어그러진 것은 문제조차 아니었다. 조금 전 맞닥뜨린 일에 비하면. 유윤아는 괜찮다던 말이 무색하게 아직도 조금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 친구, 민혜서를 바라보다 이내 곧장 앞을 바라보았다. 속은 복잡했지만, 호들갑을 떨어 혜서를 더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 속에, 둘은 혜서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윤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문 앞까지만 같이 가자.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그 말에 동그래지는 혜서의 눈을 보자, 윤아는 아차싶어 의식적으로 얼굴을 풀었다. 혜서는 제 매서운 인상에도 겁을 먹지 않고 진심을 잘 캐치해 주는 얼마 안되는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제 표정도 평소보다 무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혜서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럼 주스라도 한 잔 하고 가, 윤아야. 나 아쉬워서 그래."

창백한 낯빛에, 안경 너머로 눈밑이 상기된 것이 빤히 보이는 얼굴로 혜서가 그렇게 말하자, 윤아는 걱정으로 찌푸려지려던 미간을 가까스로 폈다. 안색도 안 좋으면서 얘가... 평소라면 농담을 섞어서 잔소리를 떽떽거리며 늘어놓았겠지만, 오늘은 그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쉬어야지. 힘들잖아, 무리하지 마. 다음에 컨디션 좋을 때 놀면 되지."
"그래도..."
"다른 생각 말고 씻고 푹 자. 쉬는게 최우선이니까, 알았지?"

그렇게 실랑이를 하며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니, 어느새 혜서의 집 앞이었다. 알겠다곤 했어도 조금 전보다 더 시무룩해진 게 짠해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문이 열리고 혜서를 들여보내려는데, 집 안에 낯익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혜서의 아버지였다.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거니와, 윤아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얼마 안되는 어른이었기에 낯섦은 덜했다. 되게 일찍 오셨네? 혜서가 매일 아빠 또 야근한다며 건강 상할까봐 걱정된다고 투덜대던게 생각나 약간은 뜻밖이었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멍을 때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윤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옆에서 혜서의 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아빠..."

급히 고개를 돌렸다. 혜서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도 억지로 울음을 참아보려는 듯 숨을 들이켜며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눈에 그득 차오른 눈물이 펑펑 쏟으며 얼굴을 적시더니, 소맷자락으로 두 눈을 훔치다, 그만 그 자리에서 어린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848이랑 850번 레스에서 영감을 받아서 써봤어요

상황은 아이(혜서)가 엄청 충격적인 일을 겪는 바람에 친구(윤아)한테 의지해서 겨우 귀가했다가 마침 집에 있었던 주 양육자인 아빠 보자마자 울어버린 상황입니다.
이어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캐릭터는 자상하되 자녀의 문제에는 적극 개입하는 강단 있는 아빠였으면 해요.

근친 애비, 친구 딸-친구네 아빠 이상의 관계를 기대하는 답글 등 상식 밖이거나 잇기 힘든 답글에는 응답하지 않거나 중단하고 다시 상대분을 구하겠습니다.

901 이름 없음 (Zh/4/OBqzQ)

2022-11-04 (불탄다..!) 17:11:53

>>900 연일 피를 말리던 팀 프로젝트가 무난하게 마무리된 덕에 현규는 지난 몇 달간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무언가처럼 여겨지던 반차를 쓴 뒤 귀가하기 무섭게 유튜브의 요리 영상을 틀고 파베 초콜릿 제작에 착수했다. 오늘이 딸아이의 마지막 시험일이라고 들었기에 그간 애썼다는 의미로 딸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었거니와 설령 시험 결과가 딸아이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더라도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실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메뉴처럼 근사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직장 생활, 가사 노동, 딸아이의 학습 관리 등을 홀로 감당하다 보니 요리는 거의 시도조차 못하고(로봇 청소기, 식기 세척기, 세탁기, 건조기, 스타일러 같은 기계가 없었다면 가사 노동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식과 밀키트에 의존해 온 현규인지라 만들 수 있는 건 파베 초콜릿처럼 간단한 음식이 고작이었다. 물론 파베 초콜릿은 재료 비율만 잘 맞추면 금세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보니 여러 차례 시도해 봤던지라 레시피 비율 따위를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래도 요리는 워낙 자신 없는 분야라 영상을 틀어는 놔야 안심이 되었다.

영상에 소개되는 레시피는 다크 초콜릿 200g과 연유 300g, 이 재료를 중탕할 때 현규는 인스턴트 커피 가루 30g과 치즈 케이크 맛 비스킷 3봉지를 더 넣곤 했다. 이렇게 하면 초콜릿의 풍미가 더 깊어지는 것은 물론 꾸덕하면서도 사르르 녹는 식감에 비스킷 특유의 바삭함이 더해져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렇게 작업을 진행하는데 파베 초콜릿을 굳힐 채비를 마치기는커녕 재료들을 제대로 섞기도 전에 도어락 누르는 소리와 문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당황스러웠다. 시험 공부로 내내 바쁘던 딸아이라 오늘은 친구와 신나게 놀고 올 줄 알았더니?

그러나 딸아이가 일찍 귀가한 것쯤은 그 뒤의 상황에 비하면 문제도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들어온 딸아이는 흡사 뱀파이어에게 피라도 빨린 것처럼 파리하고 맥없는 몰골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딸아이의 친구가 하는 인사에 반응도 못 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잔뜩 잠긴 목소리를 쥐어 짜내 현규를 부르고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얼굴을 훔치다 이내 목 놓아 울어 버린다. 현규는 파베 초콜릿의 재료를 섞던 주걱을 팽개치고 딸아이에게 다가가 딸아이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무릎을 굽히고 바라보았다.

“우리 공주, 무슨 일이야? 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딸아이의 친구가 신경 쓰였다. 상황이 상황이라 해도 딸아이 친구이고 손님인데 이렇게 세워 놓기만 하면 실례가 아닌가. “미안하다. 저, 지금 상황이 이래서. 잠시 거실에 앉아 있으련? 곧 마실 것이라도 준비하마.”


/849, 850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셔서 현규가 혜서를 부르는 호칭은 850을 참고했습니다. 자식이 주 양육자를 부르고서 냅다 우는 상황이면 주 양육자가 안고 토닥거려도 무방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다른 분의 캐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다가가서 묻기만 하게 했습니다. 기대하신 자상한 아빠에 부합할지 모르겠네요. 자식이 친밀감 있는 주 양육자에게 할 법한 행동을 혜서가 할 것 같다면 저는 ok이니 편하게 이어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902 이름 없음 (eHgJ8ENeYA)

2022-11-04 (불탄다..!) 19:36:42

정전(政殿) 한 가운데, 그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옥좌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만인의 우러름을 받들고, 또한 만인의 공포감을 간직한,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가장 강한 남자, 아니 인간이었던 것은 가만히 앉아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동시에 딸려오는 도수 높은 술, 스스로 마기를 모두 받아들이다 못해 그 마기를 하나로 묶어내어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던 술이기에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자신의 존엄도 생각하지 않은채 술병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상관 없었다. 자신을 지키던 기사들은 모두 악에 물들어 그들에게 토벌되어 사그라들었고, 또 자신을 따르던 뜻있는 대신들 또한 자신의 뜻에 동참하여 스스로의 몸을 내던졌다.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악을 만들었으나, 결국은 실패인가."

마기에 물든 육체는 2m의 거구였던 남자를 한참 더 키워 거대한 육체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렀고, 지금에 들어서는 5m에 이르는 거체에 많이 컸던 옥좌마저 작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은 뒤섞여 거대한 불꽃을 연상시키는 빨간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본디 강인했던 육체에는 마기의 영향으로 수많은 마기가 갑옷을 이루듯 촘촘히 그의 육체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기가 움직인다, 그의 뜻에 따르기라도 하듯이 마기는 순식간에 자신이 인간이던 시절의 왕관과도 같은 모습을 취하였고, 사내는 그것을 천천히 자신의 머리에 씌운뒤 가만히 팔을 괸 채 대전을 내려다 보았다.

"기다리고 있도다, 용사여."

어서 나를 죽이러 오거라.

//스스로 인류를 위해 대적자가 된 왕이었고, 그 나라였지만 결국 패퇴하고 본인만 남은 상황!!
//목 자르러 올 용사님 구합니다(?)

903 이름 없음 (QQKZ/ABfZw)

2022-11-06 (내일 월요일) 18:59:28

>>901 창백했던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목을 놓아 울던 혜서는, 제 현규가 다가오자마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와락 매달렸다. 무슨 일이냐는 말에도 답할 정신이 없는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고, 급하게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드는 몸은 경기라도 일으킨 듯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극심한 두려움에 전에없이 무너진 친구의 모습을 차마 바라보기 힘들어 고개를 떨구던 윤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을 텐데도 손님 대접을 하려는 현규의 말에 손을 내저으려다 멈칫했다. 저대로면 혜서는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죄송하긴 하지만 내가 남아서 무슨 일인지 알려드려야겠구나. 어지간한 일이면 조금 늦더라도 혜서가 직접 설명하는 게 맞고, 이 와중에 손님맞이를 하게 하면 실례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비상사태니까.

"네,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정신 없겠지만, 친구인 자신이 보고 있는 것보다는 아빠와 단 둘이 있으면서 응어리를 푸는 게 혜서에게도 더 좋을 것 같아, 윤아는 현규에게 한번 더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고도 혜서의 울음소리는 조금 더 이어지다, 이내 한 풀 꺾이는 듯 하더니, 뚝 끊겼다. 설마, 얘 기절한 거 아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핸드폰으로 119를 누르고 일어나려는데, 곧 이어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와, 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다시 소파에 앉았다. 기절한 게 아니라 잠든 거구나. 다행이다.

/캐조종이라기엔 모호한 부분인데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같은 반차를 딸래미 시험끝났다고 초코 만들어주려고 써버리다니 세상 스윗한 아버지네요. 사실 워낙 요구사항이 많아서 안 달릴 줄도 알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습니다😆 저도 안고 달래주거나 하는 등의 아빠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어느정도 제 캐의 움직임이 제약되어도 ok니 편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첫 글에 쓰는걸 까먹었는데, 제 글에 길이와 상관없이 편하신 길이로 이어주셔도 좋습니다:) 쓰다 보니 길게 나왔기도 하고 단문도 잇는 데 지장 없어서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몰라서 살짝 부연설명하자면 혜서는 말 다운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내내 울다가 반쯤 탈진해서 아빠 품에서 기절잠 잤다... 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좀 일방적으로 상황을 제시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려요😅

904 이름 없음 (XhKgHOVrns)

2022-11-06 (내일 월요일) 21:21:22

야, 나... (흐읍, 숨을 삼켰다.) 너한테 뽀뽀해봐도 돼? (너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맞추고 있기가 버거워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충동적인 말이었다. 간혹 생각해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저지를 줄은 몰랐던 말. 밤에 이불이나 걷어차게 만들던 상상이 현실이 될 지도 모르는 말. 곱게 뻗어내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아는데, 한 번만 부탁하자. 내일부터 모른 척 해도 돼. 학교, 학원, 어디서든. (귀가 점점 짙어졌다. 빨갛게 오르는 열을 보고 있자니 곧 터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래, 꼭 잘 여문 봉숭아처럼.) ...아, 입술에 하겠단 건 아냐...! 뺨, 뺨이면 돼. (어디에 하겠는지 말하지 않아 입술에 하겠다고 오해 받았을까봐 황급히 고개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알겠다. 열이 오르고 있는건 비단 귀 뿐만은 아니었다. 두 뺨도 벌겋지 않나. 무슨 말을 맺으려는지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데, 답지 않게 소심하게 구는 것도 그렇고 무슨 말을 할 지 예상되는 부분이다.) 나, 아마 너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한데... 너무 오래 친구였잖아. 헷갈려서 모르겠다고.

#소꿉친구 한쪽이 사랑인가 우정인가 갈팡질팡하는 느낌이야! ◜◡◝

905 이름 없음 (r7v3GLx0og)

2022-11-06 (내일 월요일) 23:00:42

>>904 아니, 싫어. 하지 마. (수줍어하다 못해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상대방과는 대조적으로, 싸늘하리 만치 단호한 목소리가 딱 잘라내듯 튀어나갔다.) 네가 지금 얼마나 무례한 요구를 했는지 모르나본데, 네 감정은 네가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왜 불쾌감을 감수해가면서 확인을 시켜줘야 해? 모른 척해도 된다고 말하면 다야? 나는 네가 뽀뽀해도 되냐는 소릴 내뱉은 순간 이미 모욕감과 이 관계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 나를 최소한 너랑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런 요구를 받았을 때 내가 어떻게 느낄 지 정도는 생각해 봤어야하는 거 아냐? 내가 널 모른 척하고 말고를 네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인 양 생색 내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어느새 높아진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진정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이런 모멸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기에 좀처럼 흥분이 식지가 않았고, 울고 싶지 않은데도 눈이 뜨거워졌다.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훔치고, 가까스로 낮춘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다고 치자. 해서 네 감정이 연애감정이면 어쩔거고 아니면 어쩔건데? 나를 네 감정 파악의 수단으로 삼는 게 무책임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니? 좋아한다면서 그 상대를 도구 삼을 생각이 들어? (손까지 바르르 떨리는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한 손으로 반대편 손목을 꾹 붙들었다.) 지금 니가 한 말은 니가 날 좋아하기는커녕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는 인증이야. 그러니 확인해 볼 필요 따위 없겠네. 싫어. (흥분을 겨우 누른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뱉으며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한 때 친구라고 생각했던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잘 기억도 안 나던 시절부터 어울렸던 시간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런 녀석인 줄 알았으면 어려서부터 어울리지도 않았을 텐데.)

906 이름 없음 (LyzLArxBRA)

2022-11-06 (내일 월요일) 23:18:49

>>904
(너의 말에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매만진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인다.) 후회 안 하겠어? ( 조심스럽게 꺼낸 말은 널 걱정하는 듯한 어조였다. 자기 자신보다도 오랫동안 봐온 자신의 소꿉친구를 걱정하는 목소리. ) 괜찮아. 네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으면 해봐. (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곤 쓰디 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 이거 진짜 기분 이상한데.. ( 복숭아처럼 물든 귀를 한 체 조심스럽게 널 바라본다. )

907 이름 없음 (l.3QU/n8VY)

2022-11-07 (모두 수고..) 22:16:27

>>903 물음에 대답하기는커녕 숨 한 번 돌리지 못하고 매달리는 딸아이를 붙들면서 현규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시험이었으나 수능처럼 중요한 시험도 아니고 학기마다 치르는 시험 좀 망쳤다고 이렇게까지 오열할 리는 없었다. 학교 선배나 동급생이 집단으로 괴롭히는 혼자서 대응하기 버거운 일이라도 겪은 것인가 생각해 봤으나 다친 데가 없는 듯하고 옷매무새도 말끔한 편이라 물리적 폭력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언어적 폭력일 가능성이 높은데 딸아이가 이럴 정도면 나중에 차근차근 떠올릴 수나 있을지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도록 할 때 힘들어하지나 않을지가 걱정이었다. 위로든 격려든 법적 조치이든 딸아이에게 필요한 건 뭐든 할 테지만 혹시라도 법적 조치가 필요한 문제라면 증거 확보가 특히나 중요하니까. 녹음이라도 해 놓았다면 좋으련만 핸드폰에 녹음 앱 정도는 있을 법도 하다만, 돌발 상황에선 그런 조치까지 해 내기는 어려우니 과연 어떨지?

그렇게 생각이 많아졌으나 당장은 딸아이를 다독이는 것이 급선무라 연신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이며 아빠 여깄다느니 괜찮다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진정하지 못하고 울던 딸아이라 처음 울음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할 때는 탈진하지나 않았나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진이 빠지도록 울어서인지 미열이 오른 것도 같아서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열이 더 오르지는 않았고 훌쩍이는 가운데에도 숨도 고른 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딸아이는 서서히 마음을 놓은 듯 기대 오더니 누가 간질여도 모르게 푹 잠이 들었다.

그제야 현규는 딸아이를 제 방에 데려다 침대에 눕히고 찬 공기가 들지 않도록 이불로 꼼꼼히 감싼 뒤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파베 초콜릿을 만들고자 일을 벌였던 여파로 재료는 섞이다 만 채로 굳은 몰골이고 주걱이며 용기도 엉망진창이었으나 그걸 수습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딸아이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것도 모자라 어색하고 난감할 상황인데도 여태 기다려 준 딸아이의 친구에게 뭐라도 대접하는 게 우선이었다. 별로 안면도 없는 남자 어른과 단둘이 한 자리에 있는 게 기꺼울 리는 없으니 고맙다고 용돈을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의 현규로서는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친구에게라도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제삼자라면 제삼자인 딸아이의 친구에게 물어면 딸아이가 서운해할 수도 있고 친구가 거북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규는 겸연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딸아이의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 시간을 뺏었구나. 마실 건 뭐가 좋겠니? 차? 주스? 커피?”


/혜서가 울다가 아빠 품에서 잠든 상황이라고 알려 주셔서 그에 맞추어 서술하고자 했습니다. 일방적인 상황 제시라고 느끼기보다는 제가 이어 나갈 수 있게끔 정보를 제공해 주신 걸로 보였으니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친밀감 있는 주 양육자에게 할 법한 행동은 ok라고 말씀 드리기도 했고요. 오히려 현규의 대처가 아빠로서나 손님 맞는 아재로서나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걸리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908 이름 없음 (lxfE5F4Kak)

2022-11-08 (FIRE!) 13:08:20

>>907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울다 지쳐 잠이 든 혜서를 안아들고 방으로 향하는 현규의 모습이 윤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완전히 기절했네. 나한테는 괜찮으니 영화 보러 가자던가, 주스라도 마시고 가라던가 그랬으면서. 많이 무리했구나. 괜찮은 척 무리하려고 들던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아 안쓰럽고 착잡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침 집에 혜서의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윤아는 현규가 혜서를 침대에 눕히는 동안 낮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혜서는 알고 지내기 시작했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고 이야기했기에, 이야기해서 소용이 없거나 오히려 혜서가 힘들어질 걱정은 덜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다행히 중간부터나마 녹음을 따놓긴 했다지만, 녹음이 안 된 부분이나 그런 것도 조리있게 설명해야지 혜서한테 도움이 될 텐데, 힘들어하는 혜서의 앞에서는 애써 냉정을 유지했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이 영 가라앉지를 않았다.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평정을 찾고 있자니, 어느새 현규가 다가와 말을 건네자, 손을 멈춘 윤아는 시간을 뺏어 미안하다는 말에 고개를 내젓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도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주스로 부탁드릴게요."

용건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안 그래도 경황이 없을 것이 뻔한 데도 손님맞이를 하도록 한 게 죄송해서 음료는 사양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윤아의 생각을 바꾼 것은, 황망한 와중에도 자신을 손님으로서 신경써서 대접하려는 현규의 태도였다. 사양하는 편이 더 무안할 수도 있을 것 같거니와, 준비하는데 손이 가는 차나 커피에 비해 손이 덜 갈 수도 있다는 계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은 차갑고 단 걸 마셔서라도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급하게 말씀드리면 더 횡설수설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 확실히 그럴 것 같으니까. 최대한 침착해지자. 이런 상황일 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혜서를 위해서라도.

/그건 다행이네요! 저는 현규가 돌발상황에서 혼란스러운 나머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딸래미가 당장 가장 필요한 조치를 해주면서, 머릿속으로는 무슨 일인지 걱정도 하고, 적극적으로 딸을 도와주려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게 지문에서 드러난 게 좋았고, 또 손님 맞는 아재로서는 윤아가 느낄 수 있는 불편이나 부담을 고려하면서 행동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간만에 보는 제대로 된 어른 느낌이 나는 아재캐라 오히려 만족스럽네요😆 현규주님도 혹시 걸리는 부분이나, 윤아나 혜서의 행동에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애들이 탈탈 털린 이유는 곧? 한두턴 내에 나올 것 같습니다😆)

909 이름 없음 (oBxKF.c5L2)

2022-11-08 (FIRE!) 16:27:03

궁녀는 사당에 들기 무섭게 빗자루로 사당의 먼지를 서둘러 쓸어 내고 곳곳에 앉은 더께를 닦아 내고는 황후의 신위 앞에 향을 피웠다. 생전에 회임을 못 했는데도 후궁은 고사하고 승은을 받은 궁녀조차 단 한 명도 없었을 만큼 성총을 한 몸에 받으신 황후이시건만 승하하시기 무섭게 이 자그마한 사당에 놓인 신위 말고는 존재가 아예 잊힌 것마냥 취급되어 왔다. 황제께서 승하한 황후에 대해 거론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참하겠노라 공언하셨던 탓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본인의 친형을 숙청하고서 등극하신 이래 주요 공신들까지 남김없이 토사구팽하며 황권을 공고히 구축하신 황제께서 내리신 명이니 누가 감히 거스를까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황후께 쏟으신 지극한 총애를 생각하면 국상을 대대적으로 치르는 것은 물론 능묘의 규모며 부장품도 전례 없을 수준으로 조성할 법한데 그런 명은 일절 없는 것이 꼭 황후께서 승하하셨다는 사실을 아예 지우려는 것 같았다. 실제로 황후께서 생전에 기거하셨던 곤원궁(坤元宫)은 무엇 하나 정리되지 않았고 그곳에 소속된 궁녀와 태감들도 그대로 소임을 보는 중이다. 황제께서 여전히 어느 여인에게도 눈길 한 번 두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대소신료들이 황후 책봉을 간하고도 남을 것이나 황제의 권력이 워낙 지엄한 데에다 황실에 태후 같은 어른도 아니 계시다 보니 몇 년이 지나도록 다들 쉬쉬하며 눈치만 보는 실정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당을 모른 체하시는 것도 황후께서 승하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셔서렸다? 사당에 향을 피운 궁녀는 입속말로 중얼거린 뒤 황후의 영정에 무릎 꿇고 예를 올렸다. 영정으로 봐도 넋이 나갈 것 같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인이라 그 옛날 서시나 왕소군의 미모가 저랬을까 싶었다. 더구나 생전의 행적도 과거 폐태자와 혼약을 맺었다는 점과 회임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이 완벽하셨다고 들었다. 백성들의 곤궁한 사정을 헤아려 후궁의 지출을 줄이고 검약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몸소 실천하시는 것은 물론, 궁녀와 태감들의 사정도 하나하나 살뜰히 살펴주셨고, 황제께서 대소신료들에게 노하거나 대소신료들이 황제의 뜻과 맞서는 경우가 생기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중재도 하셨단다. 실로 만인에게 귀감이 되었대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지신 국모셨으니 황제께서 승하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몇 년간 잔잔한 듯 뒤숭숭한 분위기가 이어진 여파로 쥐가 퍼트리는지 새가 퍼트리는지 모를 뒷소문도 은연중에 나돌았다. 황제께서 친형인 폐태자를 죽여 없앤 것은 황후가 폐태자와의 혼담을 진전시키기 위해 황제께 이별을 고했기 때문이라느니, 황제께서 황후를 책봉하신 것은 공신들이 전 황태자와의 혼약을 명분으로 들고일어나 반대하면 그걸 구실 삼아 공신들을 숙청하기 위해서였다느니, 황후께서 성총을 한 몸에 받으시면서도 회임은 못하셨던 까닭이 실은 황제께서 매일같이 황후를 압박하면서 소생을 갖지 못하도록 손을 써 오셨던 탓이라느니, 황후께서 꽃다운 보령에 그토록 허무하게 승하하신 연유가 황제의 분노를 풀 길이 없다 보니 마음의 병이 깊어지셔서라느니, 이러한 뒷이야기는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처세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다. 특히나 황제께서 불시에 사당에 걸음하시는 요즘 같은 때에는 더더욱. 황제께서 걸음하시기 전에 제대로 정리해 놓지 않으면 사당 관리에 소홀했다고 진노하실지도 모르니 할 거 다 했으면 부리나케 튀는 게 상책이다.

/황제와 황후의 파란만장 애증점철 러브스토리가 나오길 바래서 올려봐 황제피셜로 풀어줘도 좋고 궁 사정에 빠삭한 선배 궁녀나 태감이 풀어줘도 좋고 꼭 황제 황후 스토리가 아니라도 좋은데 일 잘못했다고 이 궁녀 혼내거나 목을 치지는 말아줘

910 이름 없음 (ssh6Pk45Jo)

2022-11-08 (FIRE!) 21:57:26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당신의 질문에 입을 연다.) 아뇨, 그게…신기해서요. 모험가 님은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흉흉한 던전들을 다녀오시고, 대륙 이곳저곳을 탐험하시고, 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오셔서 이야기해주시는 모습을 보니……동경심이 들었어요. (작은 마을이 한 눈에 들여다보이는 언덕 위, 노을을 향해 고개를 든다.) 저도 언젠가 이 마을을 나설 날이 올까요? 모험가 님처럼 멋진 모험을 해보고 싶어요. (당신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게임 속 태초마을 NPC~ 무슨 NPC인지는 아직 안정했어! 맥커터 사절~

911 이름 없음 (cG1yKaN2Yg)

2022-11-08 (FIRE!) 23:11:38

>>908 딸아이의 친구가 주스를 고르자 현규는 냉장고에서 패션후르츠 착즙 주스를 꺼냈다가 손님 대접을 주스만으로 그치기는 민망하다는 생각에 멈칫했다. 곁들일 만한 음식이 뭐가 있더라? 최근 건강 관리를 하기로 마음먹은지라 과자는 사 둔 게 없고 사과나 감 같은 과일을 깎아 내자니 그렇잖아도 거실에서 어색하게 있었을 딸아이의 친구를 더 기다리게 하는 꼴이라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찬장에 둔 믹스너트 제품이 떠올라 접시에 한가득 담고 패션후르츠 착즙 주스도 두 잔 따른 뒤 각 잔에 얼음을 넣었다. 그러나 막상 준비한 것을 거실로 나르려니 딸아이의 친구에게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알레르기에 생각이 미치고 나니 패션후르츠가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지는 않나 우려되어 핸드폰으로 검색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패션후르츠 알레르기도 있다. 난감하네. 당장 오늘 일부터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손님 대접이 참 쉽지가 않다. 현규는 저도 모르게 끙 하고 침음을 뱉었다가 주스와 견과를 둔 쟁반을 든 채로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무심코 내다가 미처 생각을 못 했구나. 혹시 견과류나 패션후르츠에 알레르기는 없니?”


/혜서랑 윤아가 얼마나 심각한 일을 겪었기에 한쪽은 울다 탈진하고 한쪽은 비상사태라는지 얼른 알고 싶은데 쓰다 보니 자꾸 딜레이가 되네요. 이번에는 분량도 얼마 안 되고; 쓰는 사람이 디게 소심한가 보다고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912 이름 없음 (lVhp0Pt5Tk)

2022-11-09 (水) 00:02:16

>>911 아이고 저는 오히려 지문에서 현규의 건실하고 세심한 면이 드러나서 좋았어요. 그리고 분량에 대해서는 미리 말씀드렸듯 전혀 개의치 않으니까 편히 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쓸 말이 많을 땐 길게 써도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굳이 길게 안 써도 된다는 주의라서요.

아, 그리고 다름이 아니라 저도 이번 턴에 윤아가 이실직고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은데, 제 차례에서 현규를 앉혀도 될까요? 윤아가 알레르기는 없다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현규가 앉고, 윤아가 털어놓는 식으로 가려고 합니다:)

913 이름 없음 (XXQGQ3viFQ)

2022-11-09 (水) 00:28:59

>>912 아아, 그렇게 이을 수도 있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빨리 나온다면 오히려 저는 좋습니다. 윤아가 알레르기는 없다고 하면 현규는 준비한 걸 내놓은 뒤에 데면데면한 어른과 단둘이 마주하기가 편치 않을 거라는 점 안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대접한다 정도로 윤아에게 양해를 구하는 발언을 한 뒤에 혜서에게도 나중에 물을 테지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아는 만큼 얘기해 줄 수 있겠냐고 청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반영해서 이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914 이름 없음 (lVhp0Pt5Tk)

2022-11-09 (水) 00:42:31

>>913 마침 어떻게 연결해야 자연스러울 지 고민중이었는데 알려주시니 더 편해질 것 같네요. 그럼 말씀해주신 내용 반영해서 이어오겠습니다:)!

915 이름 없음 (/B61/8YkKk)

2022-11-09 (水) 16:57:46

>>911 "네, 없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에 하나 있었으면 서로 민망할 뻔 했겠다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혜서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윤아는 현규가 쟁반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자,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라는 인사와 함께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주스를 한 모금 삼키자, 새콤달콤한 맛과 차가운 온도에 머릿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말씀드릴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잔을 내려놓으려니, 현규가 퍽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데면데면한 어른과 단둘이 마주하기가 편치 않을 거라는 점 안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대접하게 됐단다. 혜서에게도 나중에 물을 테지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아는 만큼 얘기해 줄 수 있겠니?"
"네, 저도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서요."

잔을 내려놓고 경청하던 윤아는 현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주스를 한모금 넘기고 입을 열었다.

"혜서랑 영화 보러 가는 길에, 혜서 어머님의 친구분...이시라는 아저씨하고 마주쳤어요. 표정이 안 좋아보여서 좋은 이야기 하시려는 것 같지는 않았기도 하고, 혜서도 불편해보여서 영화시간 핑계 대고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 아저씨가 혜서를 불러세우시더니..... 음..."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조리있게 설명하고자 또박또박 이야기하던 윤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다, "잠시만요."하고 양해를 구하고는 잔을 내려놓고 옆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뮤직 플레이어 앱을 켜고, 녹음파일을 재생하니, 핸드폰의 스피커로 희미하게 울음기가 섞인 듯 떨리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 빛나는 순간이었단다. 네 엄마는...내게 온기를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그걸 내 영혼이 기억하는 한, 네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겠구나. 그러고 싶어도, 내 염치가, 마음이,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는구나. 미안하다, 혜서야...'

말이 끊기고 그 중년남성의 것인 듯한 약간의 훌쩍임이 이어졌다. 몇 초의 공백 뒤,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겠지. 넌 어리니까...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알아주리라 믿는다. 널 사랑할 수는 없어도 나는...'

울먹이며 횡설수설 이어지는 목소리를, 딱딱하게 굳은 앳된 목소리가 딱 잘라냈다. 녹음되면서 톤이 달라졌지만, 윤아의 목소리와 억양이었다.

'늦겠다. 저희 이만 갈게요. 가자, 혜서야.'
'으, 응...'

넋이 나간 듯한 혜서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다급한 발소리에 작은 소리로 혜서를 부르는 소리가 섞여 들리다, 이내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자, 윤아는 어느새 꾹 누르고 있던 미간에서 가까스로 손을 떼고 재생정지 버튼을 눌렀다.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녹음된 것을 들으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껏 친구로 지내면서, 혜서에게서 엄마 친구라는 그 아저씨에게 고백했다거나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은 커녕, 그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별로 없었다. 그 아저씨에 대한 언급은 졸업식 날 밤에 했던 통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 마저도 진로 계획 질문이나 단둘이 식사하자는 제안은 참 난감했다거나, 그래도 바쁘실 텐데 축하해주러 와주신 건 감사하긴 한데, 설명하긴 어렵지만 묘하게 대하기 불편했어서 아빠한테 솔직히 이야기했다는 말 정도였다. 그 아저씨가 한 망상대로라면, 혜서가 단둘이 식사하기를 난감해하고 불편하다고 나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한테까지 이야기를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사람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가 않았다.

/그리고 분량이 또 폭주... ㅋㅋㅋ 적다보니, 현규같은 아버지라면 혜서가 돌아가신 엄마 친구분께 이런 생각이 드는게 내가 나쁜 건가 싶으면서도 솔직히 털어놨을 것 같아서 설정을 추가했는데, 고쳤으면 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916 이름 없음 (h9x7JBQoNE)

2022-11-10 (거의 끝나감) 08:43:11

툭. 건넨다기보다는 당신의 앞 책상에 던져진 빼빼로. 다들 하교한다고 교실을 채우던 소리들이 떠난지 오래라서, 툭 하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물론 던지고 싶어서 던진 것은 아니었다. '어제 열심히 만들었는데! 다 박살난 거 아냐? 떨려 죽겠네 진짜!' 긴장하고 긴장한 탓에 손이 떨려와서 떨어트린 것이었다. 그만큼이나 긴장은 충분히 하고 있었고 머릿속도 충분히 어지럽지만,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지다 못 해 새하얗게 변해버릴 사실은 한 가지 더 남아있었다. 오늘은 빼빼로데이가 아니란 것. 빼빼로데이의 하루 전 날이다. 11월 10일, 빼빼로데이까지는 하루가 모자랐다. 날짜를 헷갈린지도 모르고 어제 열심히 빼빼로를 만들었던 흔적은 빼빼로가 사라진 손 끝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남아있었다.

"먹든가. 아니면 버려."

'아니야! 먹어줘! 맛있었으면 좋겠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말아버리는 자신을 원망했다. 굳어버린 표정까지 더해져 확실하게 오해사기 쉬운 모습이란 걸 알았다면, 직접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함이라던지 책상 서랍 앞에 넣어뒀을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속으로 되뇌였다. 이 고백은 실패다. 빨리 이 곳을 벗어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뒷문 잠궜으니까 앞문으로 가고."

/ 빼빼로데이 전 날의 방과후 교실이에요 :3 상대 쪽에서 이쪽 캐릭터가 좋아하고 있단 사실을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어요~! 너무 긴장해서 주려던 캐가 아니라 다른 캐란 것도 못 알아보고 줬다고 해도 오케이! 맥커터만 사절입니다 :D

917 이름 없음 (N9PrfR4nQ6)

2022-11-10 (거의 끝나감) 11:14:43

>>916
가방을 막 챙기고 일어서려는 때에 책상에 빼빼로가 다소 거칠게 던져지자 연재는 빼빼로와 그것을 놓은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같은 반이긴 해도 연재와 함께 어울린 적은 손에 꼽아서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웬 빼빼로? 빼빼로데이는 내일인데.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이 친구가 역시나 같은 반이자 연재의 일란성 쌍둥이인 연우와 종종 어울린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의문은 가셨다.

“나 연우 아니고 연잰데.”

뻘쭘한 나머지 친구의 눈길을 피하다 보니 그 친구 손이 반창고투성이인게 눈에 띄었다.

“다쳤냐? 아프겠네.”

918 이름 없음 (oBvyULYXqw)

2022-11-10 (거의 끝나감) 11:53:08

>>917

거짓말은 곤란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고자 할 때 제일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지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됐다.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또 거짓말을 하다보면 더 이상 걷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알아! 안다고! 하지만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 차마 좋아하는 아이조차 헷갈렸다는 진실을 스스로 수긍할 수가 없었다. 아니, 스스로는 수긍한다 쳐도 연재에게도 그렇다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이건 실수니까 연우에게는 비밀로 해달라 하지도 못 하겠다. 그러다 모든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뻔뻔하고 어이없는 거짓말이 한 마디 나와버린다.

"너 준 거 맞아."

물 한 컵도 아니고, 한 바가지. 아니다, 한 대야를 거하게 쏟아버렸다. 쏟아버린 물과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그래도 원래부터 빼빼로의 주인이 연재였다고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다. '나만 빼고!'

"별로. 그냥 조금 베인 건데."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마운데…!' 이 와중에 아픈게 신경쓰일 리가 없었다. 손을 뒤로 감추었다. '진짜 쪽팔려~! 학교 어떻게 다니냐고! 미쳤어미쳤어… 연우도 연재도 이제 어떻게 봐! 반 바꿀래… 자퇴할래…' 손 끝 아린 감각이 느껴질 정도라면 긴장에 떨어 빼빼로를 잘못 주지도 않았겠다. 그나마 빼빼로데이가 11월이라서, 한달에서 두달 남짓하는 기간동안 뻔뻔하게 모른 척 하면 방학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와 닿았다.

919 이름 없음 (Sdl3jTlT2k)

2022-11-10 (거의 끝나감) 18:39:23

>>915 별로 안 친한 아저씨가 고백이라도 받았던 것처럼 찾아와서 거절한 거군요. 순전히 저쪽 착각이다 보니 정상으로 안 보이고 둘이라도 성인 남성을 힘으로 당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 무서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848, 850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셨고 혜서를 찾아온 남자의 상황이 848의 캐와 유사해 보이는 점이 걸립니다. 915에 제시된 상황이 848의 캐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 내용을 전개해도 괜찮을까요?

920 이름 없음 (SrxquQB7/6)

2022-11-10 (거의 끝나감) 20:33:59

>>919
848에 자식 쪽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좋았던 옛 시절이 떠올라서 당사자한테 해 주고 싶었던 걸 자식한테 해 주려고 하는 과거에 매인 캐라고 명시되어 있었고, 어색한 사이인 친척처럼 진로 관련 질문을 하고 데면데면한 사이에 둘이서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모습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고 연소자가 느낄 수 있는 불편감을 고려하지 않는 연장자 캐가 떠올라서 제가 구상한 서사에 반영했습니다.

아이의 양육자를 사랑하던 이가 양육자 사망 이후 그를 닮은 아이에게 옛 사랑을 겹쳐 본 끝에 아이와 썸을 타는 것 같은 클리셰도 연상이 되다 보니, 혜서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거절하는 전개를 넣었고요.

848 850에서 영감을 얻긴 했지만 그 캐들을 그대로 차용한 건 아니고 각 레스에 드러난 캐의 속성 일부에 착안해 재창작한 것이라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규주님께서 원전의 캐가 마음에 걸리신다면 더 잇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921 이름 없음 (UPB86dBPSU)

2022-11-11 (불탄다..!) 17:58:17

>>920 말씀대로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어른 캐의 모티브가 될 여지가 있는 요소가 848, 850에 드러나기는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현재까지 전개된 상황상 현규가 915의 남자에게 호의적이거나 동정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서술할 경우 다른 사람이 만든 캐를 디스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아서 이 이상 잇기는 어렵겠네요. 끝까지 이어 가지 못해 유감입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922 이름 없음 (Qsn.TcL2wQ)

2022-11-17 (거의 끝나감) 02:00:19

>>909 그 때, 나지막이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소나기 치고는 퍽 거센 빗발이 매섭게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당 안에도 요란히 들이쳤다. 그런 요란한 빗소리 사이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물에 젖은 듯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봉두난발로 풀어헤쳤지만 물기로 인해 착 가라앉은 청현색의 긴 머리칼, 한 마리의 굳건한 용과 같이 장대한 기골, 풀어헤쳐진 앞섭 사이로 드러난 조밀하게 짜인 근육과 그 위로 새겨진 수많은 상흔, 서방에서 들여온 포도주같기도, 또는 핏빛같기도 한 짙은 적색의 형형한 눈동자. 비록 흐트러지고 비에 젖은 몰골을 하고 있지만, 궁인이라면 누구나 그가 이 나라의 황제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으리라. 황제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황후의 영정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내 그 앞에 털썩 앉았다. 체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흠뻑 젖은 소복을 대충 걸친 몰골의 황제에게서는 비릿한 비 내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독한 주향(酒香)이 풍겼다. 먼저 와 있던 궁녀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듯 일언반구도 없이, 황제는 멍하니 황후의 영정만을 들여다보았다. 살아생전의 미색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지는 못하였더라도, 그 마저도 절실하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핓빛 눈동자에 서린 빛은, 취기보다는 광기에 가까웠다. 그렇게 불상이라도 된 듯 우두커니 앉아있던 황제가 별안간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구나, 우스워... 참으로 우습구나. 그대를 만난 순간부터 짐의 모든 것으로 그대를 옭아매고자 하였고, 그대의 마지막조차 취하였건만... 어찌하여, 그러고도 만족할 수가 없는 겐지. 이래서야, 이래서야 마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죽음까지도 짐의 것인 그대가, 죽어서도 감히 짐을 지배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는 안 되지... 짐은 그대를 지울 것이다. 천자(天子)는 패자(覇者)여야지 패자(敗者)일 수는 없으니..."

웃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기이한 소리는 한동안 이어지더니, 어느순간엔가 뚝 멎었다. 죽은 사람처럼 떨구어져있던 고개는 어느새 들려있었고, 빗물이 채 마르지 못해 용안에 달라붙은 짙은 바다처럼 푸르른 머리칼 사이로 핏빛 눈동자가 조용히, 그러나 섬뜩할 만큼 집요하게 궁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구나. 너는... 황후를 꼭 빼닮았구나. 그이가 내 눈에 처음 들어왔던 것도, 딱 네 나이정도였을 때였지..."

황제의 손이 궁녀의 얼굴로 천천히 뻗어가다, 이내 바닥으로 툭 떨구어졌다. 취기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것인지, 황제는 사당 벽에 눕다시피 기대었다. 그러고는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인듯 헛소리인 듯 중얼거렸다.

"만인이 짐과 황후에 대해 떠벌리고 있지. 마치, 짐의 귀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자신하는 듯이 말이다... 그래, 너는 어떠냐. 황후가 어떻게 죽었는지, 짐이 황후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 내막이 궁금하지 않더냐?"

그렇게 황제가 운을 떼었을 때였다. 궁녀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것을 가로막기라도 하듯, 사당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날붙이가 서로 부딛히고, 사람의 옷과 살을 베는 소리,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어지러이 섞여 들렸다. 그 살기등등한 소란은 한참 이어지다 조금씩 잦아들었고, 궁 안을 수색하는 듯한 여러명의 발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내 사당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장대비가 거칠게 들이치고, 갑옷의 비늘이 부딛히는 소리를 내며 몇명의 사람이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 중 선두에 선 자가 투구를 벗고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격조하였습니다. ...오라버니."

투명한 음색이지만 낮고 힘이 실린 목소리로, 살갑지 못한 인사를 올린 이의 얼굴을,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이 희미하게 비추었다. 깔끔하게 쪽을 진 머리카락은 황제의 것과 닮은 선명한 청현색이었지만, 옆에 있던 궁녀는 아랑곳 않고 서늘한 시선으로 황제를 내려다보는 두 눈동자는 희미한 촛불빛만으로도 맑고 쨍한 빛을 내는 금색이었다. 황제가 즉위한 이후 몇년 간 궁 출입이 뜸하다, 이번 해에야 입궁이 잦아졌기에, 궁 생활이 짧다면 그의 얼굴이 생소할 법 했지만, 황제가 제 누이동생의 시가를 숙청으로 멸하고 부마마저 사사하려던 것을, 5황녀의 눈물 젖은 간청을 가여이 여겨 자비를 배풀었다는 소문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황녀의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던 황제가, 별안간 광소를 터뜨렸다.

"이게 누구인가! 이게 누구야, 나의 귀여운 누이 원민이 아니던가! 그래, 드디어 이 오라비를 즐겁게 해주려고 왔느냐? 보시오, 황후.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가 없구려. 아니 그렇소? 아아, 실로 지루한 나날들이었지. 이제는 원민이 네가 이 지루함을 달래주겠구..."
"여전하시군요. 독야청정 하는 줄 아는 주정뱅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십니다. 곧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황후 폐하와 해후하실 텐데, 그런 몰골이셔서야 되겠습니까."

짐짓 나긋나긋한 투로 황제의 말을 끊은 원민 공주가 슬몃 미소지었다. 멍한 얼굴로 그런 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황제가, 노기가 서린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얀 것. 네 감히 할 수 있겠느냐? 지략으로는 천하를 좌지우지하고 용력으로는 만인지적이며 용의 화신으로도 일컬어지는, 천자인 이 나를 베어 넘기고,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어서 나를 즐겁게 해 보거라. 설마 이제 와 두렵다고 빼진 않겠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파공음과 함께 무언가가 번뜩였고,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던 황제의 입이 멈추며, 머리가 바닥을 구르더니, 이내 주인을 잃은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황제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던 원민 공주가 가장 곁에 있던 장수를 향해 고갯짓을 하였고, 장수는 그 무언의 명을 받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궁녀는 물론, 바르작거리는 목 없는 시신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서, 원민 공주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대소신료들을 멋대로 살해한 죄, 황후만을 분별없이 총애하여 황통을 방치한 죄, 백성의 안위보다 본인의 위세를 우선시한 죄로, 황제는 폐위되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궁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사당을 뒤흔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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