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819 이름 없음 (j7zHct6yDM)

2022-09-01 (거의 끝나감) 22:56:04

>>818
특유의 감정을 감추던 미소가 맘에 들어차는 것을 들은건지 흔쾌한 미소로 변해 얼굴 가득 피어 있었다. 무엇이 즐거운지 몰라도 늘 웃는 상의 그였지만, 지금껏 지었던 미소와 비교되지 않는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소영은 이윽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꼬리를 늘였다. 흥미로운 것을 찾은 듯한 태도로.

"그래? 서희도 많이 피곤할 것 같네. 그런 이상한 태도로 사람을을 대해야 한다는 거, 많이 불편할거라고 생각하거든. 마음 같아서는 즐거운 일을 잔뜩 경험하게 해주고 싶지만."

키득거리는 웃음을 보면 이제 그의 속내가 보일 것이다. 그는 속 알맹이 없는 말에 능숙했으며 그 선해 보이는 얼굴은 그의 특기였다. 어쩌면 생전에 살았던 집단에서는 그런 방법이 꽤 잘 먹혔던 모양이지. 다만 그와 서희가 상극인 탓에 소영 역시 그를 속이는 것은 그만두려는 듯 했다. 그저 습관적으로 걱정을 읊더니 본심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희의 몸을 빌리고 나면 바쁠 테니까. 키가 조금 작다는 걸 빼면 좋다는 거네? 오히려 좋은걸. 작은 사람은 귀여우니까 이건 꽤 장점이라고."

마지막에 칭찬하듯이 단점을 읊는것도 빼먹지 않고 정말 착해 보이게 못되먹은 성격이다. 다만 빙그레 웃는 것도 잠시 뿐, 우현의 말이 나오자 음악실에 드리운 어둠처럼 소영의 낯빛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건 경멸이라고 하기에는 짙었으며, 분노라고 하기에는 가벼웠다. 그 명확히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은 이윽고 소영이 입을 열고 나서야 드러났다.

"그 애가 아직 잘 살고 있는 게 믿겨지지 않네. 아니, 믿고 싶지 않고. 어째서 나는 죽었는데 그 애는 여전히 즐겁게 지내고 있는걸까... 만약 그럴수만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죄목으로 벌을 내리고 싶을 정도인걸."

나즈막히 질투 어린 감정들을 늘어놓던 소영은 서희가 말을 잇고 나서야, 잊고 있던것이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이 진심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능숙해 보이는 어리숙함과 특유의 쉽게 드러나는 표정으로 인해 소영은 제법 솔직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아 걱정하지 마. 무서워서라도 범죄 같은 건 못하는걸. 그리고 나쁜 짓이잖아? 죽어서라도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서희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거야."

그리고 직후 서희의 꼼꼼한 일처리 덕분에 은근 슬쩍 넘어가려 했던지, 정말 잊었던 것 뿐인지 대답을 하지 않던 소영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태연하게 "아참," 하고 말을 얹는 것 또한 어리숙해 보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말이지... 사실 아직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걸 이뤄준다면 적당히 속아줄 수 있겠지 싶은 조건은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나는 피아노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협주곡을 연주해 기억에 남는 것. 두번째는..."

그는 유난히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괜시리 웃을 적에는 숨기려는 감정이 있을 때 뿐이었고, 그 감정은 여실 없이 드러났다. 약간의 긴장과 불안함, 그것이 생경하게 미소 너머로 드리웠다. 그리고 직후 소영이 내뱉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일부러 두 가지 질문을 한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싶게 망자로써 원할법한 소원을 정확히 꺼냈다.

하나는 기억되는 것이고...

"장우현을 직접 만나고 싶어. 아직 우리 사이에는 끝내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거든."

다른 하나는 복수하는 것이다.

820 이름 없음 (5oNqC7iPOI)

2022-09-01 (거의 끝나감) 23:25:41

>>819

"나이 지긋하게 드신 분들은 오히려 그쪽이 편하게 응대가능하니까. 기담이나 민간신앙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아니까 말이지."

피곤한건 오히려 여기까지 오는 경우다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 일에 있어서는 사적인 감정없이 냉정한 이야기로만 유지하는게 좋으니까. 그건 그렇다치고 역시 사람이 유하고 착한척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걸 소영을 통해서도 한번더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이익이 없는 선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 많은 망령을 본 탓에 확고하게 굳은 생각이다.

"원귀가 아니라 망령이라서 검을 안들고 온게 아쉽네. 무슨 검인지는 궁금하면 1대1 교환이야."

딱히 관련은 없는 이야기기에 키로 놀리면 귀신도 어떻게는 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컴플렉스에 대해서는 꽤 감정적으로 대한다.
일에 있어서는 방해니까 거슬리는건 어쩔수 없는 것이다.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애초부터 어린아이 헛소리라고 죽고도 틀에 박힌 생각을 하는 경우니까.

"당신 웃는 얼굴로 꽤 위험하네. 그러다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릴수 있어. 그 상태로 말이지."

일단은 일에 있어서는 해결해야할 상대다. 행여나 그런 생각으로 물든다면 그 때는 조치가 달라진다.
일종의 경고였다. 그 선을 넘어버릴 때는 의뢰여부를 떠나서의 문제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궁금하다면 대답하겠지만.
왜? 라는 궁금증에 대해서는 굳이 알아도 영양가는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현상유지가 최선이니까.

"웃는걸 가면으로 쓰면서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는 여자는 무섭네. 소영으로서의 유명세에 대한 매듭짓기는 이해하겠지만."

연주에 대한 욕구는 처음 만났을 때 부터 확고한 의지였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법한 이야기네. 이야기의 마무리라기보다는 칼로 원고를 재단 하는 느낌이야. 네가 말하는건."

그래도,

"한풀이에 있어서는 그런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법이지만."

821 이름 없음 (KpWuPI9noc)

2022-09-02 (불탄다..!) 18:00:31

>>820 시험이 있어서 내일은 못 이을 것 같아 미안

822 이름 없음 (C.DqzRd4FY)

2022-09-02 (불탄다..!) 19:13:17

>>817

수행평가 등급 업이라고 하면, C를 받으면 B가 되고 B를 받으면 A가 된다는 뜻일테다. 우수한 성적과 공부머리가 있는 학생이 아니라면 누구나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지만, 소녀에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선생님이라는 것 치고는 줄줄이 이어진 거짓말들에 신뢰를 잃은 탓도 있겠지만…

“비리 아니에요…?”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찝찝한 탓에 좋다고 냉큼 답할 수 없었다. 남들은 공부해서 얻는 성적을 자신은 지금 여기서 무얼 했다고 등급 하나를 올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선생님이 거짓말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유치원생도 할 줄 아는 말일테니까, 그런 이유들로 되려 선생님의 호의에 대한 의심만 커져간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러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칭찬도 칭찬으로 듣지 못 했다. 소녀는 작은 새앙쥐고, 저 칭찬들은 치즈가 놓여있는 트랩 같았다. 그럼에도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기는 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

무어가 달라졌다는지 나아졌다는지 설명해주어도 모르겠지만, 칭찬으로 들리기는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몰라도 선생님이 하는 칭찬이니까 감사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았다. 졸지에 도둑에게 사과까지 했는데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못할까. 그러고나서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제 선생님은 자리를 비우지 않을까,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져서 보는 눈치였다. 뒷뜰에 온 이유부터가 혼자 있고 싶어서였는데 차라리 보건실에 갈 걸 그랬다. 또 다치고 왔냐는 보건 선생님 잔소리가 따가워서 뒷뜰로 피했던 것 뿐인데 후회막심이다.

“네?”

이 선생님은 무엇을 하는 선생님이길래 시험지도 답안지도, 보충수업 신청서까지도 다 들고 다니는가. 이렇게 된 이상 소녀는 시간 없다고 거절하고 먼저 자리를 비울 생각이었다. 등교거부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인기피증은, 소녀는 스스로 대인기피증 같은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사람 사이에 있는게 악순환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이라고 여겼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실수로 이능력을 써도 불행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이미 불행을 끌어당겼을 때라도 혼자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이 휘말릴 일은 없다. 그러니 사람 사이에 있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런 이유로 등교를 안 한 적도 있었다.

“호, 혼내시는 거 아니죠………?”

첫인상은 거한 불신으로 남았다.

“유급은 하기 싫지만, 전……… 제 이능력 조언은 못 하실걸요. 안 하시는게 나아요.”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릎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들이 스스로 보기에도 과하고 안쓰러웠다. 자기연민, 바닥으로 처박힌 자신감과 자존감, 불안까지 스며들어있는 문장은 문을 굳게 걸어 잠궈두고 있었다.

# 고마워 🥹 기다렸을까봐 한 말이었어!
# 학생들한테 인기좋은 선생님 생각난다~ 여자애쪽은 생각보다 뾰족하게 생긴 정도? 성격이랑 인상이랑 갭이 큰 느낌인 거 말고 도움줄 말이 없네 🥲

823 이름 없음 (MwTCp/7EPg)

2022-09-02 (불탄다..!) 20:11:10

>>822

"비리는 무슨, 수행평가는 모두 상대평가야. 언제부터 내가 절대평가를 했다고 하는게 어딨냐?"

비리라는 말에 그는 별거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의외로 수행평가 면에서 깐깐하기 그지 없는 그로서는 모든 평가는 상대적인 평가로 이루어진다. 게다가 지난 3년간, 인성면이나 다른 면에서 발달을 보인 학생에게는 무조건 보상을 줘야한다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 판정은 전혀 번복할 생각 없는 확고한 그녀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살짝 숙인채 소녀를 바라보며 아까전의 장난스러운 태도는 어디 갔냐는 듯이 교사의 태도로 소녀를 대하고 있었다.

'확실히 많이 소극적이야. 자기 의사표현은 분명히 할 수 있지만, 본인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고, 추가로 다른 복합적 요소가 확실히 이 아이의 발목에 족쇄를 걸어 잠그고 있어. 자의던 타의던 늦지 않게 발견해서 다행이야.'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 가는 모습에 그의 마음속 한켠이 안쓰러웠다. 지난 3년간, 교생 실습 포함 5년간 많은 학생들을 만났지만 이 아이만큼 상황이 심각한 아이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에 대한 비관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이 공부를 하며 얻어낸 이능력의 특성상 정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고 최소한 못하더라도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그 순간, 뒷 말에 그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혼내? 나도 너 못지 않게 고민 많이 했어, 대학교때는 학사경고도 두번 맞아봤다. 지금은 교사일지 몰라도, 나 학생으로서는 빵점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천천히 자신의 조끼 포켓에서 쇠구슬을 여러개 던졌다. 그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이 쇠구슬은 일사분란하게 수많은 새싹 그림들을 땅바닥에 그려내었고, 그는 쪼그려 앉은채 그 모습 그대로 학생이 된 소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뒤 입을 열었다.

"당연히 못하지, 난 지금 너의 이능력을 모르니까, 하지만 가벼운 조언정도는 지금 가능하니까, 가볍게 이야기 듣는다 생각하고 천천히 들어. 이능력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착화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기실 많은게 달라, 정형화된 사이즈가 없다고 해야할까? 지금 이 새싹들을 전부 이능력이라고 쳤을때, 이능력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장의 방식이 달라져, 어떤 이능력은 꽃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능력은 나무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목표는 결국 그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지. 그렇기에 우리가 교육하는 거고."

그래서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사람들이 말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설명에서는 많은 의미가 녹아 내려져 있었다. 그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아까전의 장난스러움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은채 몸을 일으켜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본인 명의로 되어 있는 외출증과 함께 교사의 이름이 적힌 신용카드,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네 이능력에 대해서의 이야기는 네가 말하고 싶을때, 본격적으로 시작하는걸로 하자. 자 그럼 보충수업의 첫 과제야. 이거 내 카드, 마음껏 써도 된다. 지금부터 학교 바깥으로 나가서, 네가 사오고 싶은 물건 아무거나 3가지만 사와, 가져오는 것은 3가지 이상이 되어도 되지만, 반드시 네가 원하는 것을 사와."

첫번째 스텝, [더 안할래.]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단 한번만 더 해보자고 이야기 해보기.

//나는 언제든지 기다릴수 있다!! 그러니까 천천히 즐기면서 가보자고!!
//좋은 교사라면 어디까지나 학생을 자신의 성과로 보지 말고 하나의 아이로서 대해야 한다고 옛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어서(....) 그 말이 모티브라면 모티브겠지? :)

824 이름 없음 (ppFIoDyIIw)

2022-09-02 (불탄다..!) 20:43:13

>>815
"으으음...."

소피게네이아는 시원하다는 듯 몸을 짐짓 부르르 떨었다. 깃털 몇 개가 떨어졌다. 그녀에게서 두려움은 이미 멀리 떠난 것처럼 보였다. 공작이 꽤나 성질을 부리겠네. 그녀는 중얼거렸다. 소피게네이아를 묶어두기 위해 꽤나 비싼 마법사를 썼을지도 모르지만, 용사처럼 규격외를 끌고오면 아무 의미 없어지는 짓이지! 주문이 풀렸으니 이제 그녀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용사의 옛 동료들에게 다다르는 시간은 더욱 짧아지리라.

"정말 고마워~ 그런데 부탁 하나만 더 하자. 당신의 징표를 줘. 내가 절대 훔칠 수 없을 만한 물건."

"예를 들어서, 성기사 놈들은 날 보자마자 칼부터 뽑을 거 아냐? 네 심부름을 하고 있다는 증거 정도는 필요해보이는데.."

그 대화도 협상도 타협도 불가능한 근육뇌들 말이야. 성기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따라가냐고 말한다면, 소피게네이아에게 할 말이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그 자리서 붙잡혀 그 '공작'의 영지까지 강제 송환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뿐이야? 최대한 조심은 하겠지만.. 병사들의 추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싸워서 피를 봐야 할텐데.. 싸우지 않고 넘어갈 방법이 있다면 말이지.. 응?"

변명거리도 참 많았다.

//짧아서 미안해..흑흑

825 이름 없음 (4Rmpsu5hv.)

2022-09-02 (불탄다..!) 20:59:35

>>824

절대 훔칠 수 없을만한 물건. 자신에게 그런 것이 뭐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이 저편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붉은 루비가 박혀있는 펜던트를 가지고 왔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 펜던트가 무엇인지 대해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그냥 펜던트야. 모두와 헤어지기 전에 기념으로 나눈 물건이기도 하고.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너희들과 산 물건이라고 하면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거야. 네가 제대로만 전달한다면 말이야."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닌 이상, 그 설명과 이 펜던트를 보여준다면 바로 알아들을거라고 사내는 확신했다. 물론 그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는 또 별개였지만. 허나 왕가에게 붙어서 자신과 다른 동료들을 해하려고 하는 이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사내는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생사를 같이 했고 사선을 함께 넘어 마왕을 같이 물리친 사이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이들은 역시 자신과 함께 여정을 한 동료들이었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해. 물론 네가 그 어쩔 수 없이라는 것을 핑계삼아서 살생을 무차별적으로 저지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약속을 깬 행위이고, 그렇게 되는 순간 그녀는 토벌해야 하는 마족으로 규정될테고 자신은 물론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동료들과 싸워야만 할테니까. 그런 리스크를 끌어안고 멋대로 행동을 취하진 않을거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부탁할게. 모든 일을 다 마치면 그땐 어디론가 사라져도 괜찮아. 붙잡지 않을테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마족이었다. 모든 일을 마치게 되면, 자신의 동료들과 접촉해서 여기로 데리고 온 후까지 이 일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후의 일들은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일이었다. 당연히 그 마무리도 인간이 해야만 했다.

/앗! 아니야! 나도 그렇게 긴 것은 아닌걸! 무엇보다 짧은 것도 아니잖아!!

826 이름 없음 (FEmropzKWE)

2022-09-04 (내일 월요일) 19:33:56

>>820
"그래, 그렇구나." 하고 소영은 조금은 서희의 입장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마음 속에서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그 명랑한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특유의 좋게 넘어가려는 성격에서 기인해 그런 말을 한 것이지, 실제로 이해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뒤에 키로 놀림받는 기분이 들자 바로 태세를 바꾸는 것을 보며 소영은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늙은이 같이 굴어도 사람은 결국 어딘가 어린 면이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역시 보이는 만큼 어린 것인지 서희의 그 솔직한 태도가 조금 아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영은 그 특유의 웃는 얼굴로 가볍게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묻는 화법을 써서 본인의 이야기를 했다.

"잊어버릴 수 잊다는 건 서희가 일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인 거지? 아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과 비슷한 거겠지? 그렇다면 서희는 나를 신선놀음에 정신이 팔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거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쉽게 중요한 일을 잊는 성격은 못 되서 말이야. 아마도 그런 건 조금 정신 빠진 사람이 겪게 되는 일 아닐까?"

소영은 이윽고 다시금 웃었다. 이번에는 제법 작위적일 정도로 예쁜 웃음을 짓고는. 아마도 그 웃음이 감추려고 하는 건 좋은 건을 잡았다는 구린 속내인 모양이지만 소영이 늘 그렇듯 그 기분은 웃음 사이로 아주 잘 드러났다. 소영은 거짓말을 잘하면서도 감추는 게 서툴렀다. 그건 마치 사랑을 받았음에도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질적인 두 가지 성격이 합치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지만 분명하게도 소영이라는 존재는 지금 서희의 눈 앞에 있었다. 명백히 무언가를 바라는 채로.

"단순히 유명세라고 결론짓지는 마. 사람이 남기게 되는 게 기억이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 내가 욕심내는 것도 크게 무리하는 건 아닐거라고 생각해. 남겨지는 건, 그것 하나 뿐이잖아. 단지 그 방법이 조금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리고 다음 말을 꺼내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소영은 그 이야기를 할 때 만큼은 밝은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모든 나쁜 기억의 근원이라도 되는 듯이 우현에 대한 이야기를 대했다. 그걸 통해 추측이 가능했던 건, 그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 우현이라는 사실 정도였겠다. 다만 그 사실을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으니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그저 내뱉는 말을 통해서 근접해지길 바라는 정도겠지. 소영은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슬픈듯이 불편해 보이는 웃음을 띄고서.

"그건 그렇지... 한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네. 이건, 꽤 인상적으로 나쁜 이야기니까."

827 이름 없음 (IzviEzofC.)

2022-09-04 (내일 월요일) 21:20:51

>>826

"일에 관한 이야기는 맞지만, 신선놀음 따위가 아니라 망령이 원귀가 되는 경우를 말하는거야. 당신의 욕구가 원한으로 변해 사람을 해하려고 할 무렵에는 당신이 당신으로서의 자아를 상실하니까. 그 경우에는-."

손에 있던 담뱃대를 부채로 바꾼다. 물리적인 법칙으로는 불가능한 행위였음에도 그것은 마치 도술을 쓴 마냥 도구가 다른 도구로 변화했다.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는 부채에는 敬鬼神而遠之라는 말이 적혀있다.

"敬鬼神而遠之귀신인 공경하되 멀리하라. 성불에서 퇴마로 목적을 바꾸겠지. 과연 그건 얼빠진 존재만이 가능할까? 귀신이 사람을 해하는 것에 맛에 들리면 마치 마약처럼 끝이없고 그 끝에는 원귀가 될 뿐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륜적인 측면에서의 복수를 돕는건 허용 범위내라고 해야겠지. 그래서 사람을 해하는 것, 죄를 범하는 것 두가지에 있어서는 불가하다. 라고 말해두는거야."

사람을 해하는 것도 죄를 범하는 것도 아닌 복수. 그것은 단순히 말해 악의적인 감정이 없이 억울하게 묻혀버린 진실을 들춰내 적합한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라면 해한사는 충분한 도움을 줄 기회가 많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이 아닌 복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단정짓는 것도 내 나쁜 버릇이니까. 개개인의 감정 하나하나를 분류해서 분석하는건 효율적이지 못하거든. 기계같다고 말하더라도
일에 있어서의 우선순위로 스위치를 누르는 시점에서 반쯤은 기계가 맞아. 정리하자면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게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기려 한다 라고 정정할게."

여러가지 단서와 요구가 하나둘 머리 속에서는 그물처럼 엮여 연산마냥 처리를 시작한다. 소영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거창하게 말하자면
가장 빛날수 있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 이것이 하나. 그리고 둘 로서 의뢰자에 대해서,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해야겠지. 당신의 복수는 당신의 죽음에 대한 묻혀버린 진실을 들춰내고 흑막에게 응당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나? 단, 이 요구는 이 이상으로 해결해 줄 수 없어."

정직한 복수를 하는 것.

828 이름 없음 (ZL4refZX32)

2022-09-05 (모두 수고..) 19:33:13

>>823

소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행평가가 상대평가이든 절대평가이든 무슨 상관인지, 상대평가라고 해서 비리가 아니게 된다는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중국어 수행평가가 중국어 실력을 평가하지 않으면 그게 다 비리가 아닌가, 지금 바른 말 한 번 했다고 수행평가 등급이 올라가면 비리가 맞지 않는가. 물음표를 그리던 눈빛을 선생님이 시선을 맞춰주면 사라졌다. 이상한 선생님이랑 더 얽히지 않는게 낫다고 느꼈기 때문에,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교사로서는 백점이신 거에요?”

하지 못한 말을 속에 욱여넣었다. 튀어나오지 않게 힘껏 눌렀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지 언정 말할 수 없었다. ‘저는 무엇으로서도 빵점인데.’ 같은 말을 해서 하등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쇠구슬이 던져진 것에 시선을 빼앗긴 척 굴었다. 별로 관심도 없는 쇠구슬들은 바닥에 떨어져서 새싹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능력이 없기라도 했으면, 이곳이 이능력자들만 있는 고등학교가 아니었다면 조금 놀라거나 신기하기라도 했을텐데… 무감하게 바라볼 뿐이다. 선생님이 자리에 쪼그려 앉으면 교복 치마를 눌렀고, 새싹보다는 치마를 누르는 손짓에 더 신경을 썼다. 다리에 붙은 반창고들은 가리고 싶어 손에 힘을 주지만, 교복치마가 덮어봤자 무릎을 덮을락 말락하는 길이에 반창고를 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안 자라는…. 시들었거나, 꺾…인 새싹은 안 자라잖아요.”

천천히 들어보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는 했지만, 소녀는 새싹 그림에 자신의 이능력은 없다고 생각하니 와닿지 않았다. 그도 그런게 그림 속 새싹들은 파릇파릇하기만 하니까. 자신의 새싹이 파릇파릇하다면 독초로 자랄 것이었고, 파릇파릇하지 않다면 그게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위험하기만 한 이능력을 키워서 어디에 쓸 수 있을까. ‘이제 선생님이 일어나시면,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볼게요. 라고 인사하고 가자.’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소녀의 눈 앞에 불쑥 외출증과 신용카드가 나타났다.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뜬 소녀는 이 선생님이 올가미 같다고 느꼈다. 그물 같다고, 거미줄 같다고 생각했다. 도망칠 수가 없다.

“네?”

보충수업을 하겠다고 한 적도 없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이상한 수업과 과제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그거 한다고 한 적도 없고, 사람 많은 곳은… 사람 많은 곳에는 못 가요…….”

저 선생님이 손에다 외출증과 카드를 쥐어줄까, 소녀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인터넷 쇼핑은, 안 돼요…?”

피할 수 없다면 더 나은 선택지로 타협하는 수 밖에.

# 고마워 🥺 재밌게 하도록 노력할게, 너무 답답하면 말해줘~
# 좋은 선생님을 모티브로 해서 좋은 선생님이 된 거구나, 난 초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걸 반대로 생각한게 모티브네! 초능력이 있어서 나쁜 경우.

829 이름 없음 (1icuPMHPTc)

2022-09-05 (모두 수고..) 20:29:30


>>828

'생각보다 더 심각하잖아.'

마음속의 교사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왠지 안타까웠다. 조금 만이라도 일찍 만났다면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가지게 해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교사로서의 안 쪽으로 자그마한 불씨가 타오른다. 그간 많은 학생들을 겪으면서 다가온 자신의 마음속은 그만큼 본인이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긴 빗장은 천천히 열어주자. 스스로 열 마음이 들때까지 천천히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치고 이 아이가 웃을때까지.

"흠, 좋아. 인터넷 쇼핑 오케이."

오히려 걸려들었다는 듯이 그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애시당초 사회로 나가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마주치라는 뜻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지금 아직 자기가 원하는 것 자체가 있다는 것으로 비출 수 있고, 이미 자신이 예상한 타협점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계획의 일환이라 생각 한 그였다.

"안 자라는 새싹은 언젠가 더 큰 새싹이 되어 있고, 꺾여버린 새싹은 다시 한번 힘을 주고 뻗을 날을 기다리는 거다. 그게 나는 잘못된 새싹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이야기 하면, 나 또한 완전한 결함품이니까. 넌 네가 생각 하는 것 이상으로 더 대단한 사람이 될꺼야. 내가 보증하마."

뭐 거짓말을 자꾸 밥먹듯이 해서 믿음을 많이 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큼 교사로서의 안목 만큼은 절대적으로 믿는 그였다. 그렇기에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핀 뒤 소녀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인상과는 반대되는 이 소극적인 모습에 그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조심스레 머리에 손을 얹고 따스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위대한 강철의 거상], 누군가 붙인 그의 이명에 어울리게, 크고 따스한 손이었다.

"교사로서 백점이라고 하면 글쎄다. 나는 항상 내가 결함품이라고 생각했다. 내 능력 바깥의 일들에 대해 눈을 돌리고 평범에 몸을 숨겨 왔으니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군가와 싸우고야 말았으니까. 실제로도 내 학기부 보면 꽤 만만치 않을꺼야.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가고 싶은 길이 있더라고. 그러니까 나는 너 같은 아이를 함부로 둘수는 없겠더라. 올바르게 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넌 너의 길을 갔으면 좋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전 그가먹던 대추야자만큼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어려운건 알아. 하지만 네가 할 의사가 있다면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어. 기간을 늘려주마, 네가 하고 싶다고 싶을때 하고 오렴, 그 카드는, 알아서 하려무나."

//아니야! 전혀 답답하지 않아!! 오히려 갱생욕이 생긴다!!(?)
//그래도 솔직히 좀 글러먹은 교사인데....!! 잘 받아줘서 고마워!! 는 생각해보니 거의 띠동갑일세(.....) 나름 20대 후반~30대 초반을 가정한거랔ㅋㅋㅋㅋㅋ
//오히려 교사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바로 말해줘!!

830 이름 없음 (IUt2ZauVoE)

2022-09-05 (모두 수고..) 22:20:42

>>827 아이고 오가는 길에 이을랬는데 비도 오고 사람도 많아서 못 이었다 미안해 내일은 꼭 이을게

831 이름 없음 (qNF.JO4phI)

2022-09-06 (FIRE!) 08:46:03

>>827
소영은 지금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감으로써 추측해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 나름대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소영은 서희의 말이 나름대로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설령 자신을 향한것은 아니라 해도, 자신의 일이 앞날아라든가 하다못해 자신의 편리라든가 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서희는 걱정이 많구나? 결국 내가 문제를 일으킬까봐 걱정되는 거잖아. 그렇지만 나도 서희가 경고하는 일은 일으키지 않을 생각이야. 손해보는 삶은 안 살거든."

빙그레 웃는 얼굴에는 소영 특유의 거짓말을 못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살짝 경직되고 긴장된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뭔가를 저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은 습관처럼 거짓말을 했다.

"그야, 나도 그 이상 요구하는 게 아닌걸. 잘 해결되면 오히려 내가 기쁘지! 그래서 내 소원은 어떻게 이뤄주는 거야?"

소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렇게 흑심이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거짓말에 서툴면서 이렇게 능숙한 사람도 드물다. 그의 인생사도 그의 행동처럼 드물었기에 원한이 남았지만 아이처럼 깨끗한 상태로 남아있었는지도 모르겠다.

832 이름 없음 (CjVzcd79Do)

2022-09-06 (FIRE!) 22:30:20

>>831

"걱정이 아니라 귀찮은 일은 사양일 뿐이야."

아무리 이미 죽은 영혼이라는 한들 그것을 소멸시키는 입장은 서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건 사람이 사람이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허튼짓 할 생각이 얼굴에 다 써져있어. 내 몸을 빌릴때에는 내가 빙의를 끊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알고있으면 좋겠네."

범위 내에서 예외 행동은 넘어갈 생각이지만 계율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생각된다면 가차없이 나는 소영을 제지할 생각이 충분했다.
거짓말을 하면서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쪽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연주는 그렇다치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당신은 죽을 시점의 기억이 없나?"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그 부분이 비중이 컸다. 없다면 증거를 찾는 것 부터가 시작이니까.

"당신이 죽은 시점을 다시봐야할 거같아. 기억하든 아니든."

833 이름 없음 (FDlBsVaKgU)

2022-09-06 (FIRE!) 22:31:44

>>829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넷 쇼핑이라는 타협안을 선생님도 별 다를 말 없이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남의 돈으로 사고 싶은 물건을 3개나 사야한다는 것은 여전히 큰 골칫덩이였지만, 적어도 사람과 사람을 만나 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큰 다행이었다. ‘………완전 휘말렸잖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고개를 세차게 저은 이유였다. 걸려들었단 듯한 선생님의 미소만 아니었다면 휘말렸단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잘못됐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그리고 전 대단한 사람 안 할 거에요.”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될 것 같지도 않았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이가서, 이 선생님에게 계속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유급은 하기 싫었지만, 지금 받은 과제 하나를 해결하면 분명 더 어렵고 까탈스러운 과제를 내줄게 빤하지 않은가. 사람을 피해다니는데는 도가 텄으니, 유달리 더 꼼꼼하게 피해다녀야할 한 사람이 생기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순간, 이 타이밍에 쓰다듬을 받았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마주보는 걸 익숙히 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텐데, 손이 머리 위에 내려앉아 온기가 느껴지면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저, 저 강아지 아니에요…!”

낯선 행동에 더듬더듬 입을 열어보았지만 바보같은 소리만 나왔다. 선생님의 손이 떠나고 나면 이상한 기분에 쓰다듬당한 부분에 손을 올렸다. 머리 위에 두 손을 모두 올리고 멈춰있으니 기계가 오작동이라도 일으켜 멈춘 모양새와 꼭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손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머리 위에 고스란히 남은 것 같아서 배멀미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낯섦 위에 익숙함을 덮기 위해 우습더라도…

“…중국어 선생님 맞아요?”

아무래도 다른 과목 선생님 같았다. 윤리라던지, 진로라던지 과목은 많지 않나. 상냥한 미소에는 두드러기가 돋을 것 만큼이나 낯섦을 느낀다.

"저… 주문, 바로 할 수 있는데요…."

선생님의 카드를 지니고 싶지도 않았고, 사고 싶은 물건이라고 해도 남의 돈이니 가격을 높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반창고랑 연고로 두 개를 채우고, 마지막 하나는 대추야자로 하면 세개를 채울 수 있다. 사고 싶은 물건이라고 했지, 남에게 주지 말라고는 안 했지 않나. 남에게 주기 위하여 사고 싶을 수도 있는 것이다.

# 갱생욕ㅋㅋㅋㅋㅋㅋㅋ 소녀가 졸업하게 되면 스승의 날에 선생님한테 카네이션 매년마다 보낼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 교사관은 좋다고 생각하는걸! 장난기가 심하신 거 같긴 하지만? 소녀 나이 안 정했는데 고3이어도 띠동갑은 거뜬하겠다

834 이름 없음 (/AP1nfTmlg)

2022-09-06 (FIRE!) 22:58:09

>>833

/질문!! 여기서 잠깐 내가 생각한 초능력에 대한 이론이 나올거 같은데 그냥 내 식대로 언급해봐도 괜찮을까?

835 이름 없음 (zdRcBzrsjc)

2022-09-06 (FIRE!) 23:33:13

>>834 # 응 괜찮아! 평범한(?) 초능력 세계관이니까~!

836 이름 없음 (ygRoTu1rEs)

2022-09-06 (FIRE!) 23:36:30

>>835

//10분 안으로 가져오겠읍니다....
//사실 저런 과제가 나온것도 이 설명을 위한 복선이었다 카더라(?)

837 이름 없음 (ygRoTu1rEs)

2022-09-06 (FIRE!) 23:44:42

>>833

"真的, 我是汉语先生. 你信不信我的专业, 我是你们的汉语先生.(진짠데, 나 중국어 선생님이야. 니가 내 전공을 믿건 안믿건, 난 너희 중국어 선생님이다.)"

그의 입에서 유창하게 중국어가 튀어나온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려 보인뒤 가만히 그녀의 투정을 받았다. 강아지라기 보다는 상처 입은 고양이 같다고 하면, 분명히 볼을 부풀리지 않을까 라는 가벼운 생각을 떠올리며 그는 잠시간 까슬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재차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런 단순한 쓰다듬에도 당황스러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 순간, 그의 입으로 의문이 하나 던져졌다.

"대단하다는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니?"

순간 멍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화두가 그의 입에서 던져진다.

"대단하다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란다. 내가 봤을때 모든 이들이 대단하거든, 매 순간순간마다 모든것에 힘쓰고, 모든 것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채 살아 가는 것도 대단한 것이고,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나아 올라갔을때도 그것은 대단하다고 할수 있어. 내가 아까 중국어 수행평가 점수를 한단계 더 높여준다고 한건, 그만큼 네가 스스로의 벽을 무의식중에나마 올라섰다는 반증이란다."

그는 그렇게 답하면서 그녀가 내민 물건의 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렇게 보면서 천천히 그녀가 고른 리스트들을 바라보았다.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반창고와 연고, 그리고 지금 자신을 생각했다는 듯이 골라져있는 대추야자까지. 어쩌면 마음속 상처를 봉합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현에 더불어 아직 가지고 있는 마음속 상냥함이 이러한 선택을 유도해낸 것이 아닐까.

"인간의 감각에는 오감과 의식이라고 생각 되어지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지. 옛날 불교에서는 제 7의 감각, 말나식(末那識)이 있다고 했고, 이 말나식은 처음 언급되어진 오감과 육감을 제어하는 기능을 수행한단다. 하지만 이 말나식보다도 더 심층부에 존재하는 제 8의 감각이 있지, 그걸 우리는 아뢰야식(阿頼耶識)이라 부른단다. 아뢰야식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심층기록보관소라 볼수 있겠지, 7감각인 말나식부터 모든 오감, 육감을 무의식중에 전부 담아내는, 그런 감각인 셈이지."

대학원생 박사 논문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는 것일까? 그러고서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정수리에 가만히 올려두고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까 지금 네가 수행한 과제와도 연관성이 깊단다. 이능력이 크게 발달한 사람들의 형태를 보자면 이 말나식이 크게 발달 되어 있음을 알수 있어. 실제로 히어로들 중에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이 많은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하지만 이능력의 발달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네 무의식 속에 있는 네 스스로의 내재된 가능성이라 볼수 있단다."

그렇게 그가 다시 한번더 손바닥을 소녀의 머리에 얹고 가볍게 쓰다듬어 주면서 소녀를 마주한다. 자신감 없고, 이 움츠러든 소녀의 이능력이 지금 자신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여지껏 봐온 이능력들은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의 의지대로 변화를 시키고 또 성장시킬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넌 대단한 사람이 될꺼란다. 아니 이미 되었을지도 모르지. 교사로서 내가, 우리가, 이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모두가 너의 편이라는 것을 떠올리렴."

//사실 거의 다 써두고 >>834 답변에서 반려 되었을때 예비 답나메도 적느라 시간이 더 걸린건 유머(...)
//?? : 어떻게 중국어 교사가 저런걸 알고 있는거죠?
소랑 : 아카데미 교사는 뭐 꽁으로 되는줄 아냐.... 그리고 이능력 교육 담당 교사가 외부 업무가 많아서 펑크 낸거 내가 대신 하느라 관련 논문 다 외웠다고

아앗.... 아....

838 이름 없음 (U2M5FXbWPY)

2022-09-07 (水) 21:21:24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그렇다면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해서 이번에야말로 전력으로 상대해주마. 자. 덤벼라."

독수리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매서운 인상. 검은색 마스크가 부착되어있는 진한 검은색 갑옷. 그리고 보라색 번개가 튀고 있는 검까지. 그 사내는 온 몸으로 악한 전사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전사 네 명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내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러 기술을 사용하고 불꽃이 튀기며, 피가 튀고. 그야말로 그 모든 것이 사투 그 자체였다. 얼마나 싸움이 이어졌을까? 그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는지 숨을 헐떡이다 털썩 자리에 쓰러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힘을 길렀을 줄이야. 내 패배다. 허나 이미 늦었어. 지금쯤 나의 주인은 모든 것을 끝내셨을테니까. 하하하하하!!"

그야말로 광기 어린 목소리를 내며 사내는 마침내 완전히 쓰러졌고 그 몸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돈과 회복약, 그리고 강렬하게 빛나는 검은색 갑옷이 나타났다. 이내 전사들은 그것을 줍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나왔다!! 갑옷 아바타 ! 대박!
-오. 축하.
-그거 낄거임?
-진짜 운 좋네. 난 한 번만 더 돌래. 다음번엔 나올 것 같음
-나오겠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사들의 머리 위에 대화창이 떠오르긴 했으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이내 전사들의 모습이 사라졌고 방금 전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던 사내가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그곳에 등장했다.

-잠시 후, 다음 플레이어들의 입장이 있을 예정입니다. 준비해주세요.

"대체 이 갑옷이 뭐가 좋다고 이거 본딴 아바타를 얻겠다고 이 난리들인지 원."


온라인 게임 트리니티. 방대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화려한 스킬 등으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그 게임에 나오는 NPC 캐릭터들은 오늘도 열심히 플레이어들이 활동하는 시간동안 계속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플레이어를 맞이하고 일했다. 어떤 이는 상점 NPC로, 어떤 이는 보스 캐릭터로, 어떤 이는 레이드 보스로. 또 어떤 이는 조력자로.

시간이 흘러 그 게임 속의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휴식타임이 돌아왔다. 현실세계는 인지하지 못하는 이 시간대가 되면 이 게임에서 일하고 있는 NPC 캐릭터들은 모두 퇴근하고 휴식을 취했다. 인간들의 시간 기준으로 만 하루의 시간 동안 그들은 NPC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근무하는 이들로서 생활했다. 쇼핑도 하고, 술집에서 술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진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한숨을 내쉬면서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자리 잘못 잡은 것 같아. ...왜 인상 조금 매섭다고 마족의 수석기사 역할을 배정받냐고. 좋은 역할 해보고 싶었는데."

그런 한탄을 하면서 사내는 다시 술을 천천히 마셨다. 누군가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사내는 이내 안주를 먹으면서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라인 게임의 NPC 캐릭터들이 알고 보니 게임에 취업한 그 세계의 사람들이라는 설정이야. 지금은 다들 퇴근해서 자유시간 보내는 중! 어떤 캐릭터로 이어줘도 괜찮아!

839 이름 없음 (47xdKYFBSc)

2022-09-08 (거의 끝나감) 00:02:40

>>832인데
답레텀 나도 길어질거같아서 여기서 스탑할까?
마무리 못짓는거 아쉽긴한데 진행하면 엄청 내가 늘어뜨릴거 같아서

840 이름 없음 (/fOJG2h8Bs)

2022-09-08 (거의 끝나감) 08:24:22

>>839 아 나야말로 늦어져서 미안해 그럼 그렇게 하자

841 이름 없음 (IZPzxkFVdY)

2022-09-14 (水) 22:58:06

로덴버그 공작저의 연회장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루미에르 교단 성인들의 모습을 양각으로 조각한 천장의 샹들리에는 촛불은 물론 보석으로도 빛나고 있었고, 벽에도 월계수 관의 형태를 본뜬 황동 촛대가 일정 간격마다 달려 있어 거기 얹힌 촛불이 연회장을 대낮처럼 밝혀 주었다.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은 위쪽에 아칸서스 잎이 정교한 솜씨로 새겨져 있었으며, 아이보리색 벽지의 무늬는 로덴버그 가의 상징인 수레국화 문양이었다. 한편 갖가지 음식과 술이 즐비한 테이블도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아색 테이블보의 가장자리에는 진주 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식기는 하나같이 은제였으며, 중간중간 놓인 은제 촛대는 크리스탈 바람막이로 장식되어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러한 연회장의 한쪽 구석에서는 악단이 한창 흥겨운 곡조의 음악을 연주했고, 테이블 사이의 널찍한 공간에서 내로라 하는 귀족들이 음악에 맞추어 한창 춤에 몰입해 있었다. 한껏 펼쳐졌다 휘돌다를 되풀이하는 귀부인들의 비단 드레스들은 활짝 만개한 꽃의 물결 같았고, 경쾌하면서도 일사불란한 신사들의 구둣발 소리는 또 다른 타악기의 연주를 연상시킬 지경이었다.

그 현란한 연회장에 로덴버그 공작의 양녀, 정확히는 먼 친척이었으나 부모를 여읜 뒤 로덴버그 공작의 슬하에 들게 된 마리안느도 있었다. 춤을 추거나 다른 이와 말을 섞지는 않았으나 자태만은 돋보이는 데가 있었다. 한 데 모아 뒤로 틀어올린 푸르스름한 은발은 그 수수한 모양이 삼색 제비꽃 묶음을 단 머리장식과 어우러져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고, 뒷머리나 관자놀이에서는 돌돌 말린 고수머리 가닥이 달랑거려 발랄한 인상을 더했다. 라일락으로 물들인 듯한 청보랏빛 드레스는 가슴이 파인 형태라 일견 과감해 보이기도 했으나, 윗부분에 새하얀 레이스 소매가 달려 있어 백옥을 깎아 다듬은 듯한 그의 어깨와 팔이 드러난 듯 가려진 듯 은근한 맵시가 났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쌍꺼풀이 엷게 진 고운 눈매와 맑은 가을 하늘의 가장 짙은 한 자락을 담은 것처럼 선연하게 파란 눈망울과 매끈하다 못해 윤기가 감도는 새하얀 피부였다.

하지만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차림새와 달리 마리안느의 심경은 착잡했다. 이 자리에 선 것이며 앞으로의 사교계 활동이 모두 귀족들에게 신부감으로 선보이기 위함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시골 귀족가의 일원에 불과했던 자신이 무려 공작가의 영애가 되어 호사를 누린 것은 순전히 로덴버그 공작이 혼사를 통해 유력 가문과 유대를 맺고자 한 덕이니 그에 불만을 품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소설에나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소위 낭만적 사랑에 젖은 결혼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귀족과 결혼할 가능성이 생긴 것은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입지는 무릇 결혼에 좌우되는 법인데 과거의 자기였다면 이 연회에 참석할 만한 귀족과는 일면식을 갖기도 어려웠을 테니까. 다만 귀부인에게 필요한 교양과 화술이 부족하고 춤도 젬병인 것이나 역사책이나 소설책에 파묻혀 지냈던 부모님 슬하에서의 세월을 생각하면 자신을 결혼 상대로 여겨 줄 귀족이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겉모습만이라면, 그리고 당분간이라면 오늘처럼 그럭저럭 꾸며 댈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그래도 입 다물고 얌전히 있는 게 최대한 나은 처신이라 묵묵히 있으려니 마리안느와 마찬가지로 춤을 추지 않는 귀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사실 음악과 구둣발 소리에 묻히고도 남을 소리였지만 최근 가장 유명한 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로수스 대전에서 적국의 포로가 될 뻔한 국왕 폐하를 필기단마로 구출해 내 국왕 폐하께 니르부르크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은 후작의 얘기를 하는 모양이라 귀가 절로 솔깃했다.

“세상에! 그럼 전황을 뒤바꿔 버린 맹활약이 실은...?”

“그러합니다, 부인. 악마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죠!”

마리안느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의식하고도 표정을 가다듬지 못했다. 악마의 힘이라니, 다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게 아닐까? 하기야 그 후작의 무용담이 소설의 일부래도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나기는 하다만, 그래도 그렇지. 악마의 힘씩이나 되는 걸 손에 넣었다면 일개 후작, 대귀족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 정도의 작위에 만족했을까? 나라면 아예 나라를 하나 통째로 얻고 제국도 세우겠는데?

그런데 이의를 제기하자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니, 할 말은 많은데 어떻게 해야 그 말을 귀족답게 고상하게 전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고 어쩐지 혀까지 꼬인 것 같다. 그 바람에 마리안느는 한동안 버벅거린 끝에야 목소리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듣기에 따라서는 모기 소리처럼 애매하게 거슬릴 듯한 수준이었다.

“...저...저어..., 지금 하신 말씀, ...그러니까...진짠가요? 어, 어느 분이 보셨...어요?”

활기 있게 대화하던 귀족들이 대번에 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안느 스스로도 제 목소리가 어벙하게 느껴지고 말투며 표현도 귀족다운 화술과는 동떨어졌다 싶어 민망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공작 영애라는 지위 덕분인지 귀족들은 달갑잖은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마리안느에게 아는 체를 해 보였다. 특히 악마의 힘 운운했던 신사는 두 팔을 펼치고 다리를 꼬더니 가볍게 목례하는 식으로 예를 표했다.

“이거 로덴버그 공작 영애 아니십니까?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파다한 소문입니다.”

파다한 소문, 그 말이 마리안느의 반발심을 자극했다. 부모님의 장례식 때도 그 소문이란 건 파다했었다. 아들 하나 없으니 리멜트 가문은 이제 문을 닫겠다느니 내외가 갑작스레 사망했는데 영애는 건강한 게 이상하다느니, 머리가 빙빙 돌고 귀가 먹먹한데도 그런 말들은 놀라우리만치 똑똑하게 들렸었다. 모르는 일에는 침묵해 주면 좋을 텐데, 간혹 사람들은 자기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혼동해서 모르는 일도 아는 양 떠들곤 한다, 넌덜머리나게도. 그때의 질척한 기분을 되씹는 듯한 불쾌감에 마리안느는 품위 있는 처신을 궁리하던 것도 잊고 말았다.

“어머! 믿을 뻔했는데, 그냥 소문이었나요? 그렇다면 이런 자리에서는 발설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네요.” 마리안느는 짐짓 과장된 동작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고는 덧붙였다. “참말이 아니면 두 말 할 것도 없지만 만에 하나 참말이면 악마가 비밀을 발설한 귀공을 해코지할지도 모르니까요!”

신사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썩어 가는 것이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혼사길에 스스로 대못을 박아 버린 것 같다는 불안이 커졌다. 이 신사 역시 이 연회에 참석할 정도의 귀족인 만큼 공작에게 마리안느의 결혼 상대로 저울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이를 대놓고 모욕한 이상 어떻게 해도 고상한 영애로 보이긴 어렵게 됐다. 공작가에 들 때도 양녀로 삼기엔 가문의 격이 안 맞는다느니 액운을 부를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뒷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 일로 혼사가 막히면 어떻게 될까? 공작께서 필요 없다고 시골로 돌아가라 하실까? 이젠 아무도 남지 않은 그곳으로? 속이 점점 시끄러워졌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자약한 얼굴을 가장하며 서 있을 밖에.

842 이름 없음 (NFESzw4eEU)

2022-09-15 (거의 끝나감) 21:02:33

(사랑이 무어더라. 사랑이란 감정은 글로 읽어 배울 수 없으면서 많은 글이 지어지고, 노래가 되었으며 극이 되었다. 한 마디로 똑 부러져라 정의할 수 없는 그것이 사랑이라는데, 사랑의 모습은 너무 다양해 나의 사랑은 또 어떨지 해봐야만 알 것이란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고.) 벌써 은행 떨어진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던가, 어딜 가는 중이었던가. 아무튼 간에 길가를 거닐고 있었다. 옆에 네가 있다는 것만 빼고는 별 다를 것 없는 평소와 같은 거리였다. 사랑을 하는게 대수인가, 고백할 용기도 없는데. 가을 타면 외롭다더니, 가을이 오긴 온 모양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봄이라더만 나는 지금 봄인가, 가을인가. 고민하던 차 길을 걷다가 스치는 손끝에 나는 그만 단풍물이 들고 오뉴월 장미가 필 것 같아 손을 움츠렸다.) 내일 비 온다던데. 은행 더 떨어지겠다. (나는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시시콜콜한 말을 부질없이 건네었다.)

/ 나이는 딱히 안 정했는데 혹시라도 이어줄 참치가 필요할 것 같으면 마음대로 설정해도 오케이에요! 나이 차가 나도 되고, 이쪽의 감정을 눈치챘어도 되고 맞삽질이어도 되고 다 좋아요.

843 이름 없음 (CyETfksUFg)

2022-09-17 (파란날) 15:51:37

>>842
아, 그러게. 조심해야겠다. (은행은 가을에 보면 끝내 주고 열매도 맛난데 그 열매에서 나는 지독하게 썩은 변 같은 냄새만은 참아 주기 힘들다. 특히나 걸어가다가 무심결에 떨어진 걸 밟기라도 했다간 신발 밑창이 며칠은 구리구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쾌했다. 당분간 가로수 근처를 지날 때는 바닥을 유심히 보고 다녀야겠다. 그래야 은행 열매를 안 밟지.) 비? 아, 귀찮네. (우산 챙기기도 귀찮고, 길은 질척해질 테고, 네 말대로 은행이 더 떨어진다면 피해 가느라 더 신경 써야겠지. 내일은 스터디도 있고 저녁 약속도 있어서 한참 걸어야 하는데 곤란하게 됐네. 일상이 성가셔질 걸 생각하니 떨떠름한 와중에 한마디 덧붙였다.) 내일은 외투 챙겨. 비 오면 추워진다.

844 이름 없음 (sDBRi8xjsU)

2022-09-18 (내일 월요일) 08:16:43

ㄱㅅ

845 이름 없음 (Unl07vMeA2)

2022-09-18 (내일 월요일) 09:02:36

>>843
(분명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말을 건네고 건네었고, 네가 답을 주면 평범하게 대화하는 체 하면 됐는데 그게 어렵다. 내 목소리가 다른 말을 소리내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떨리는 것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감정을 품기 전처럼 너를 바라다보고 나서 웃는다.) 벚꽃나무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텐데. (벚꽃, 예쁘잖아. 바닥에 떨어진 꽃잎도 예쁘고, 열매에서 냄새도 안 나고. 이런저런 이유를 덧붙이려다 말았다. 내 세상이 봄빛이라 분홍빛 꽃나무를 떠올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응, 점심 때부터 내린다던데. (이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고르지 못하고 있다가 덧붙여온 한 마디에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누구한테나 할 수 있는, 나에게도 베풀어진 작은 상냥함 때문이다. 비 오면 추워지니 외투 챙기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 무엇이 설렌다고 나는 이러는가. 그러니 숨기기 위해 개구지게 웃으면서 장난같은 말을 건넨다.) 뭐야, 내가 세살짜리 애도 아니고. 내일 복장 검사하는 거야?

846 이름 없음 (vHnaTsjOiM)

2022-09-18 (내일 월요일) 09:33:01

그것이 눈을 떴을때는 태초의 대지만이 있었다.

거석의 몸체는 천천히 대지위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것은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거대한 팔을 들어올려 땅을 단단하게 다졌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하여금 그 단단한 대지위에 많은 생명들이 뿌리를 내리게끔 하였으며, 황폐했던 땅으로는 생명이 다시금 녹빛으로 흘러넘치게 되었다. 죽음의 비─강산성의 비─가 더 이상 생명들을 해할수 없게끔 그는 스스로 대지에 자리잡은 죽음의 기운을 거석의 육체에 받아들여 생명이 번성케 하였고, 거석은 이 별 위에 다시금 생명이 태동하게끔 하였다.
그렇게 행동하기를 태양이 지고 내림을 30번째 반복하는 날, 마침내 거석은 수많은 생명들이 땅위에서 살아감을 느꼈다. 저 멀리 물의 육체를 가진 이 또한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기와 같은 행동을 했다는 걸 느낌으로 안 것일까, 하지만 그─혹은 그녀─가 이미 일을 마치고 잠에 들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그는 천천히 머릿속으로 수많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다시 태양이 지고 달이 뜨는 것을 7번째 반복하고 나서야, 거석은 드디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이들에게 나란 존재는 필요 없다.]
[허나, 언젠가는....]

그렇게 결론이 내려지는 순간, 거석은 땅을 팠다. 거대한 몸뚱이를 숨기기 위해 몸을 웅크렸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능을 이용해 그 누구도 찾을수 없게, 운명의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대지를 열었던 위대한 거신은 거대한 산 아래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는 대지 저 아래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흘러, 거신이 묻혔다는 전설이 깃든 산에, 아주 자그마한 동굴이 열렸다.

847 이름 없음 (J8LNL1bXok)

2022-09-19 (모두 수고..) 14:05:00

>>846
거신이 묻혔다는 전설로 유명해진 그 산에 생긴 작은 동굴은,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명소로 거듭났다. 인근 마을에서 그 동굴에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제물을 올리고 간절히 기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온갖 음식이 담긴 바구니와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도 힘든 내색 없이 산을 오르는,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각진 턱에는 수염이 까끌까끌하게 난 사내 또한 그 소문을 듣고 동굴로 향하고 있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제 부인의 순산을 빌기 위해서였다. 마을에서 떨어진 숲에 사는 사냥꾼도 이 동굴에 직접 잡은 사냥감을 바쳤더니 얼마 후 멧돼지를 잡았다 하고, 얼마 전 마을에 정착한 신혼부부도 정성껏 만든 파이를 바쳐 지금의 부인과 맺어졌다고 했다. 부인도 아이를 배고 있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런 생각에, 사내는 가쁜 숨을 골라 가며 쉼 없이 산을 올랐다.

동굴에 다다르자, 그는 동굴 앞에 마련된 석제 제단 옆에 조심스럽게 짐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지만 험준한 산길을 많은 짐을 지고 오르는 건 조금 벅찼는지, 구릿빛 피부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휴식도 잠시, 사내는 털고 일어나 부지런히 제단 위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싱싱하고 잘 익은 제철 과일과 채소, 갓 구워낸 빵, 그리고 오늘 아침 잡아, 신선한 핏빛이 가시지 않은 송아지 고기, 마지막으로 부인의 순산을 기원하며 직접 담근 과실주까지. 여러 종류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들이 제단에 가득 차려졌다. 준비를 마치고, 남자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나지막이 기도 하기 시작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거신이시여, 부족하나마 정성껏 준비한 제물이오니 어여삐 보아주시고, 부디 우리 부부에게, 우리 집안을 대를 이을 씩씩하고 총명한 딸아이를 보내주소서. 우리 부인 많이 아프지 않게 순산하고, 해산하고도 무사히 털고 일어나도록 보우해주소서."

사내가 조금은 무리해서, 많은 제물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 것은, 단 하나도 양보키 힘든 여러 소원 때문이었다. 가문을 이어가려면 건강하고 총명한 딸아이가 태어나야 했지만,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중한 것은 부인이었다. 만에 하나 난산이라도 겪어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고통을 겪고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부인을 보노라면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제물들이 부족함이 없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원하고, 부인의 곁으로 돌아가 수발을 드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중천에 올랐던 해가 저물어가도록, 꿇은 두 다리가 어느새 저릿하도록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쉼 없이 기도했다.

848 이름 없음 (PzoHb1vf9E)

2022-09-29 (거의 끝나감) 18:28:55

-어여쁜 나의 아이.... 이 아이좀 봐 나를 꼭 닮았어.
그날의 밖의 차가운 온도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건조한 공기 병원 소독약 냄새 기쁨에 찬 너의 목소리 모든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선명해진다 다만 내가 그날 무슨 얼굴을 하였는지 오직 그것만 제외하고



"졸업 축하한다"

무뚝뚝한 목소리 앞으로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이 건내진다. 과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파스텔톤의 꽃다발
졸업시즌의 학교앞 간판대에서 팔리는 알록달록한 색감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평소 추위를 싫어함에도 일부로 개인 꽃집까지 새벽걸음으로 달려나갔을 그의 모습이 작은 꽃들 사이에 언뜻 비쳐보이는것같았다

"...그래... 앞으로 뭘 할지는 정했니?"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이런 날까지 말이 없는것이 그 답다고 해야할까 괜히 친척 어른이나 할법한 낡아빠진 질문을 하며 서로의 시간을 죽인다.
이렇게 어색하게 굴꺼면 오지나말지 싶지만 어쩌면 이게 그가 표현할수있는 가장 큰 다정의 표현인것이다.

"아 친구들이랑 약속있니? 없으면 저녁이라도 하러갈까하는데"

/죽은 친구의 자식과 그 친구를 좋아하던 나 라는 관계야
딱히 자식쪽을 사랑하는건 아닌데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았던 옛시절도 떠오르고 친구한테 감정적으로 빚진것도 있는데 그만큼 못해준것같아 자식한테라도 잘해주고싶고 여러모로 과거에 매여있는 사람이 보고싶었어

849 이름 없음 (C1znFMSvUc)

2022-10-02 (내일 월요일) 14:30:29

눈을 떴을때의 세계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사내는, '육신(肉身)'이었던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철제로 이루어진 몸뚱아리와 더불어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막대한 힘은 그에게 인지부조화를 주기 딱 적당했다. 오감이라 부르던 여러가지 인지들은 전부 하나로 뒤섞여 데이터라는 이름의 무언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곳이 자신이 생활하던 시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이 철제 몸뚱아리에 남아 있던 '데이터'라는 정보에 모두 깃들어 있었고, 그 모든것을 받아들이는데는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사내에게 있어 육신은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마음, 그리고 또 아직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한 그 정신. 그 뿐이었다. 어차피 그 두가지만 있다면 살아 있다는 흔적은 남길 수 있었으니까. 그 순간 사내의 시선─메인 카메라─로 밤하늘의 풍경이 들어왔다. 더이상 별빛이 살아 숨쉬지 못하는, 형형색색의 네온 싸인이 가득한 풍경에 사내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자신의 육체조차도, 결국에는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이 담긴 것이 아닐까,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자 질량 홀로그램 프로젝트가 전개되며 한순간에 표창이 쥐어진다.

[......]

나쁘지 않다.

[재밌구나.]

사내가 천천히 허리춤에서 막대기를 하나 꺼내든다. 그와 동시에 서슬퍼런 빛이 뿜어져 나오며 검신을 이루어 내었고, 그는 그 빛나는 칼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를 응시한다. 이정도의 힘이라면 예전의 몸뚱아리 그 이상의 힘을 낼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에 힘을 준다. 실린더가 압축되며 거력을 담아내었고, 남자는 숨을 고른다는 감각으로 가슴의 에너지를 응축한뒤 그대로 폭발시키듯 밤 하늘의 옥상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과거 천하제일 살수(殺手)였던 남자가, 현세에서의 실패작 몸뚱아리로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아마 천지신명이 재차 천명을 내걸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저 멀리 비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내키는대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이버펑크 살수입니다!!
/살수라고는 하지만 일본 닌자 성분도 다량 포함되어 있어요!
/그냥 맥커터만 아니면 됩니다! 어지간한 상황은 다 생각해뒀으니 아무나 부탁드려요!

850 이름 없음 (qvkcWcNFN6)

2022-10-04 (FIRE!) 10:40:39

>>848 "감사합니다."

꽃다발을 공손히 받아서 들고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저분은 돌아가신 우리 엄마의 친구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엄마 빈소에도 찾아와주셨었으니까. 우리 아빠가 주말에도 바쁘신 것처럼 저분도 생업이 있고 바쁘실 텐데, 내 졸업식까지 와주신 걸 보면, 엄마하고 막역한 사이셨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시간도 많이 흘렀고, 아빠랑 속을 터놓으면서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아직도 우리 말고도 엄마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실감하니 가슴이 찡하기도 했다. 그거랑은 별개로, 이분과는 특별히 교류라고 할 만한 것도 못 했고 한참 어른이시라서 사실 대하기 어렵긴 하다. 그리고, 그런 건 저분도 마찬가지이신 모양이다. 보통 저런 진로에 대한 질문은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할 때나 친척 어른이 할 말은 없는데 친근감 있다는 티는 내고 싶을 때 하는 것 같던데. 그 심경을 짐작하다 보니 저분도 어색하겠다 싶어 웃어넘기기로 했다.

"아하하, 네. 원서 넣었으니까 기다려보는 동안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고마운 분이지만, 장래 계획까지 공유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으니까. 이 정도면 예의 바른 대답이었을까 생각하는데, 저녁을 같이 먹자고 권해오셨다. 이건 진로 계획보다 좀 더 난감한데. 어쩌지? 아빤 못 오실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은데, 둘러대기엔 부러 시간 내서 축하해주러 오셨는데 죄송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교문 쪽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힐끔 돌아보니, 익숙한 청회색 경차가 교문을 통해 들어와 주차장에 주차하더니, 차 문이 열리고 낯익은 사람이 내렸다. 아빠다! 오늘 못 오실 줄 알았는데. 깜짝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막 나왔는지, 정장을 입고 큼직한 프리지어 꽃다발을 손에 든 아빠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딸, 졸업 축하한다! 아빠 안 늦었지?"
"아빠! 오늘 못 올 줄 알았는데."

아빠가 들려준 꽃다발까지 손에 들고 나니 양팔이 꽉 차버려서 안기지는 못해도 신나서 싱글거리려니, 아빠의 큰 손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듯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우리 공주 졸업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오늘만을 위해 아빠가 반차 아껴두고 있었지요."
"아유 진짜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깐!"

나이가 몇인데 무슨 어린이집 다니는 애기 부르듯 부른다니까. 그러다 문득, 저녁을 같이 먹자는 권유에 제대로 대답을 안 한 게 생각났다. 이런, 아빠 왔다고 신나서 정말 어린애처럼 굴었잖아.

"저녁은 아빠랑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빠는 그제야 엄마 친구분이 계셨다는 걸 눈치채셨는지, 내 머리를 까치집으로 만들던 것을 멈추고 엄마 친구분께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바쁘셨을 텐데 일부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처럼인데,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빠가 그렇게 권유하는 걸 보니, 일부러 와주셨는데 답례할 생각을 못 했던 게 좀 부끄러워졌다. 뭐, 먼저 권유하신 건 저 분이시고 나로서는 아빠와의 식사를 더 우선할 수밖에 없었으니 아빠가 적절하게 대처해주신 셈이지만. 나도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저렇게 능숙한 어른이 되려면 더 오래 걸리겠지. 준비 없이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보고 배울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851 이름 없음 (OR/OydioOI)

2022-10-05 (水) 01:01:29

기사의 길을 걷는 것은 상당히 길고 험했다. 체력 단련은 기본이요.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했으며, 이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깊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여러 전략도 공부를 해야만 했다. 입학하는 수는 많으나, 졸업하는 이는 상당히 적은 편이라고 했던가. 그 과정 속에서 수석으로 졸업을 한 은빛 머리 사내가 있었다. 지방 자작가의 차남인 그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당당하게 수석을 차지했다. 키도 크고 근력도 높았으며 검놀림은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움직임도 상당히 빨랐기에 아카데미 내에서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이는 그다지 없었다.

그런 그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앞에는 어린 시절, 자신이 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기사가 되면 만나기로 했던 이가 서 있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서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약속대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당당하게 기사의 자격을 가지고 당신의 앞에 이렇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기대를 했을진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으니까. 허나 자신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기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그 마음을 알아주고 응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당하게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은 약속의 반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이제 상대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이미 어린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다면 사내는 약간의 미련을 보일지도 모르나 그래도 딱히 더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후에 돌아나섰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어린 시절엔 반말이었던가. 허나 지금 그가 사용하는 말은 존대였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기사로서 있는 것이었고, 적어도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이임은 사실이었기에. 어쨌건 자신은 자작가의 아들이었으니까. 아무튼 지금은 그것보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먼저였다.

무슨 말이 나왔어도 그는 수긍했을 것이다. 어이없는 트집을 잡아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냥 잡담스레에서 보고 약간 로판 분위기로 해서 기사 남캐가 어떤 장소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어린 시절의 약속을 이야기하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장면이야. 어떻게 이어도 상관없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별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 비슷한 나이의 귀족 캐릭터. 적어도 자작보다는 높은 계급의 누군가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다.
약속을 기억해도 좋고, 기억 못해도 좋고, 그냥 보내도 좋고 아무튼 그건 자유롭게 해줘. 다만 맥커터는 사절이야.

852 이름 없음 (CMiyz.jMaM)

2022-10-05 (水) 08:50:53

>>851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로슐라는 생각에 잠겼다. 약속이라, 누군가에게 기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헤집은 끝에 사교계에 입문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귀족 자제지만 부모님의 눈을 피해 대련하듯 칼싸움하며 놀던 남자아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함께 왕립 기사단에 들어가서 만나자는 약속을 나눴던 것도 떠올려내자, 퍽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눈앞의 기사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을 꾸고 결심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오랜 시간 꾸준히 노력하는 것은 힘든 일인 것을, 같은 길을 조금 더 먼저 걸어온 그로슐라로서는 잘 알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그것을 해냈으니까.

"왕립 기사단에 입단해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죠. 격조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저 역시 반갑군요. 이렇게 서로 꿈을 이룬 걸 확인하게 된 것도요."

말은 쾌활하게 했고, 반가운 마음도 진심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혼사나 성별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승승장구할 그를 보니, 어쩔 수 없이 부럽기도, 입맛이 쓰기도 했다. 혼사에 관해 이야기하러 상대 가문의 저택까지 걸음 한 날, 무슨 생각인지 본인은 정략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며 자신이 어린 시절을 빌미 삼아 매달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언사로 그로슐라는 물론 그의 가문까지 모욕한 영식과의 혼담은 무산되었지만, 상대 가문에서 사죄의 뜻을 표하며 동생과의 혼담을 제안해 왔고,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상태였으니까. 그 동생 또한 형처럼 몰상식하지는 않더라도, 그로슐라의 기사단 활동을 가문의 이익보다 우선해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요즈음에야 여성도 맏이라면 가문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지만, 다른 가문의 안주인이 된 여인들에게는 후계 양육이나 다른 부인들과의 사교활동과 같이 전통적인 역할이 기대되곤 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나와 달리 혼사를 치르게 되더라도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 끊길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부럽네. 이내 고개를 터는 대신 눈을 깜빡여 상념을 털어냈다. 됐다, 그만두자. 이런다고 홀란트 공작가 측에서 내가 바라는 대로 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귀족으로 태어나서 특권을 누려온 이상, 의무를 져야지. 사람 앞에 두고 우울한 생각이나 하는 것도 흉한 노릇이고. 그로슐라는 상념을 갈무리하고, 입단식에서 작년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로서 한 말과 비슷하여 새삼스러웠지만, 웃어 보이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함께 이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잘해봅시다. 다시 한번 왕립 기사단에 입단한 걸 축하합니다."

853 이름 없음 (aA4H6o/uBA)

2022-10-05 (水) 09:07:01

>>852 음. 미안해! 일단 선레는 누군가의 기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한 상태에서 기사가 되어 찾아간 것읕 생각하면서 쓴건데 잘못 해석될 여지도 있겠구나.
아무튼 왕립기사단은 생각도 못했고 내가 어색하게 이을 것 같아서 이 전개는 스루할수밖에 없을 것 같다. 쏘리!

854 이름 없음 (CMiyz.jMaM)

2022-10-05 (水) 09:25:12

>>853 아... 그랬구나. 어떻게 잇든 상대가 누구든 별 상관 없다기에 좀더 높은 가문 출신에 연배가 비슷하고 소속이 같은 기사라면 잘 어울릴 거 같았는데 유감이네. 알겠어. 좋은 하루 되길 바래:)

855 이름 없음 (B7H0lPxlu.)

2022-10-06 (거의 끝나감) 01:13:56

>>851에 이을 이들은 얼마든지 이어도 괜찮아! 다만 그.. 어릴 때 내가 기사가 되면 너의 기사가 될게! 식으로 약속을 해서 찾아갔다는 느낌이기 때문에 그것만 지켜주면 매우 고마울 것 같다..

856 이름 없음 (Z.K4kjl1Ho)

2022-10-08 (파란날) 23:06:49

>>851

그녀가 푸른 눈으로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들려오는 이름을 무시하려 애썼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기대는 실망을 불러오는 법이니까. 그는 자작의 차남이었고 그녀는 다룬드 공작의 금지옥엽,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임에도 의자에 앉아있는 자신과 엇비슷한 키. 몸놀림이 날렵해 늑대와도 같아 레이디들 사이에서 은빛 늑대라 불린다지. 그 때도 여우처럼 재빠르긴 했는데. 희고 싸늘한 인상의 얼굴에 남들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온기가 감돌았다.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시기에 짧게 스쳐지나간 인연이었다.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던 그녀가 고모와 함께 따뜻한 남쪽 자작가의 영지에서 요양하던 때에. 평화로운 햇볕 아래에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그 시절.
은빛 머리칼을 보자 소설책에 나온 장면을 그와 따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 대신 나뭇가지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했던 맹세를, 사랑스러운 과거들을…….

“왕도까지 경의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의 실력이라면 황실 기사단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젊고 뛰어나니 황태자의 직속 기사가 될 수도 있을테지. 그러니 고작 애들 장난같은 과거의 약속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내뱉은 말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것은 허망히 흩어지는 영원의 맹세들 속에서 돌아온 단 하나의 약속이었기에.

“경, 내게 명예를 바칠 준비는 되었나요?”

857 이름 없음 (JwoVNg2VaM)

2022-10-08 (파란날) 23:27:03

어라. 이게 이어졌다고? 생각도 못했네. 일단 이어줘서 고맙고!
어어. 하나만 질문해도 괜찮을까? 그러니까 혹시 공녀가 있는 곳의 위치 배경이 어떤 곳인지만 물어도 될까? 정원에 있는 개인 공간일수도 있고, 혹은 저택 안일수도 있고 그런 거니까! 다른 건 아니고 이을 때 나름 배경의 분위기를 살려볼까 싶어서!

858 이름 없음 (Z.K4kjl1Ho)

2022-10-08 (파란날) 23:30:38

>>857 일단은 외부 공간... 나무도 있고 꽃도 있고 하는 정원 같은 느낌으로 생각하고 이었지만 딱히 상관은 없어!!

859 이름 없음 (JwoVNg2VaM)

2022-10-08 (파란날) 23:36:47

>>858 오케이! 알았어! 그럼 천천히 이어볼게!

860 이름 없음 (xLu0I1sApw)

2022-10-09 (내일 월요일) 00:05:30

>>856

아름다운 나무와 꽅이 있는 정원은 그야말로 고요했다. 자신의 본가에는 이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은 없었기에 사내는 더더욱 공녀와의 신분적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같은 귀족이라고는 하나 자작가와 공작가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귀족에서도 서열은 있었고 자작은 가장 아래에 가까우며 공작은 가장 윗층이었으니까. 그래도 같은 귀족이라고 대놓고 무시하거나 차별을 하진 않으나 어느 정도 격은 따지는 것이 바로 귀족가의 암묵적인 분위기였다. 허나 이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높은 공작가의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녀의 말은 차갑거나 자신을 무시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을 바랬습니다. 어릴 적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약속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실력을 키우는 것만으로 그런 것을 유추할 순 없었다. 허나 적어도 기사가 되려고 하고 있다 정도의 소문은 들을 수 있지 않겠는가. 최대한 많이 알려지면 자연히 이 공녀에게도 알려지지 않을까 싶어 특히나 더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바람은 이뤄진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의 모습을 그는 고개를 숙인 상태였기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은 제 형님 혹은 누님이 잘 이어갈테니, 저는 기사로서 저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명예도, 그리고 이 검도."

차남이었기에 오히려 행동은 자유로웠다. 기사가 되겠다는 것도 말리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가문에 있어서도 공작가의 기사가 되었다고 한다면 참으로 큰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손해가 되지 않고 해가 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근처에서 불어오는 따스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스쳐 지나갔다.

"오히려 공녀님이 그 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기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온 것이 컸기 때문에."

861 이름 없음 (UEo.ajpL6w)

2022-10-09 (내일 월요일) 00:41:04

>>860

번잡한 사교계에서 숨을 돌리고 싶을 때 피해올 수 있는 곳. 조금은 구석진 곳에 있는 이 정원은 한 군데 한 군데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녀만의 정원.
만남의 장소를 이 곳으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때는 가장 몸이 아프고 힘든 시기였으나, 그럼에도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이었다. 고열로 앓고 난 다음 날이면 머리맡에 놓여있던 은방울꽃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했다.
그가 만남을 청해 왔다는 기별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기대로 간밤에는 잠을 조금 설치기도 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기대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더 이상 어린 날의 그녀가 아니었고, 그 역시 아닐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그러나 그는 그저 정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이야기하는 자.
여전히 솔직하고 곧은 사내였다. 어찌 보면 누구보다도 귀족답지 않았다. 정원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불현듯, 그녀는 숨통이 트인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는 그토록 맹목적으로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을까.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 태도는 앞으로 버리세요. 경이 내게 무언가를 바친다면 나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것을 줄테니."

공작가의 기사란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공작의 가신이 아니라 그녀만의 기사가 되길 바랐다. 나만의 것. 오로지 나만을 위해 담금질 된 검……. 몸에 단 피가 돌았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짐짓 싸늘한 어투로 말하며 그녀가 두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검을 내게.”

/ 잠와서 다음 답레는 잇지 못하고 자러 갈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천천히 줘!! 글구 기사 서임식(??)은 잘 몰라서ㅜㅜ 좀 모자라도 이해부탁해ㅎㅎ

862 이름 없음 (xLu0I1sApw)

2022-10-09 (내일 월요일) 01:20:54

>>861

말투가 조금 싸늘하긴 했으나 말하는 내용을 읽어보면 정당하게 대우를 해주려고 하는 말이었다. 성장하면서 조금 다른 느낌이 된 것은 있었으나 어떻게 보면 알맹이는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나 그녀에 대해서 많은 것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는 침묵을 지켰다. 허나 상대가 말하는데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예절적으로 그리 좋지 않은 것이었다. 자작가라고는 하나 자신 역시 귀족의 피를 이은 이였다.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를 지키기 위해 그는 조용히 입을 열어 방금 말에 대답했다.

"그 큰 마음. 감사히 생각하겠습니다."

정당한 대우. 그것은 쉽사리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귀족들 중에선 기사를 하대하는 이도 있으며, 무시하는 존재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당하게 대우를 하는 이도 있으며, 그 명예를 존중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한편, 그녀가 두 손을 내밀고 검을 요구하자 사내는 아직 검을 내밀지 않았다. 그 대신 자세를 그 상태에서 유지하며 그녀에게 말을 올렸다.

"그 전에 공녀님에게 여쭙겠습니다. 저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순수하게 당신의 기사가 되고자 여기로 왔습니다. 당신은, 공녀님은 저를 당신의 기사로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제가 찾아왔기에,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기에 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무례를 무릎쓰고 묻고자 합니다."

억지로, 강제로, 책임감으로. 그런 것을 그녀에게 부여하고 싶진 않았다.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을 탐내서건, 약속을 이행하고 싶어서건, 어쨌든 이 공녀가 자신을 강제로,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원해서 받아들이는 것을 그는 원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있어 부담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답레는 일단 이어둘게! 편할 때 이어줘도 괜찮아! 그리고 잘 자!! 그리고 나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편한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863 이름 없음 (AkxxiLruuY)

2022-10-09 (내일 월요일) 13:18:24

>>862

무서우리만치 올곧은 사내였다. 단 하나를 위해 달려왔음에도 그녀가 싫다고 얘기하면 돌아서리라는 것이 빤히 보였다. 스스로의 마음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듯.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나는 경이 찾아와 원한다고 해서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가 다시 공작가로 떠나오고 그가 아카데미로 갔을 때. 가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 왜 굳이 떨어져야만 하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지. 한미한 자작가의 차남과 그녀가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한낱 평민이었다면 시종으로 둘 수 있었을테고, 고귀한 신분이었다면 혼약을 맺었을 텐데.
지금껏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가져본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이 몸도, 고귀한 신분도, 그에 당연히 따르는 권력도. 그런 그녀도 가지고 싶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가지고 싶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검이 아니라 화살이었나. 속내를 꿰뚫어 오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뜻대로. 그리 되게 하는 것이 경의 역할입니다."

사실은 당신을 기다렸다는 말은 차가운 얼굴 아래로 감추며 그녀가 오만한 얼굴로 턱을 들어올렸다. 명검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주인이 되어야 했다.

/ 안녕~~ 오늘 내일 어디 놀러가게돼서!! 답레는 내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올 수 있으면 오겠지만 기다리지는 말아줘!!

864 이름 없음 (xLu0I1sApw)

2022-10-09 (내일 월요일) 14:41:28

>>863

"그도 그렇겠지요. 허나 그럼에도 공녀님의 뜻은 어떠한지 알고 싶었습니다."

경과의 약속은 어릴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혹은 경이 누군지 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 기타 등등의 말이 나온다면 차라리 깔끔하게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기사로서 다른 길을 찾아나설 각오도 하고 그는 그녀를 찾아온만큼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은 그녀가 공작가의 공녀이기에 여기로 온 것이 아니라, 그녀이기에 여기에 온 것이었으니까. 반대로 그녀 역시 자신을 자신이었기에 기사로서 삼고 싶어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욕심일지도 모르나 그 욕심을 그는 차마 포기하고 버릴 수 없었다. 그런 속내는 감춰버리며 그는 곧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왔고 지금껏 노력한겁니다. 공녀님."

그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들어올린 후 그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릴 때 장난처럼 하는 약속이 아니라 진지하게 누군가의 아래로 들어가 그 기사로서 함께 하려고 하는 일종의 약속을 치를 준비를 마치며 그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저는 당신의 것이요. 당신의 검입니다. 당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따르는 충의를 약속합니다."

어릴 때 나눴던 약속의 마지막 반을 수행할 준비를 마쳤다는 듯, 그는 그 자세에서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앗. 잘 놀다 와! 연휴도 잘 보내길 바라고!!

865 이름 없음 (rIts5dPaKk)

2022-10-11 (FIRE!) 11:27:53

>>864

그의 손 위에서 검을 받아든 그녀가 검을 뽑아들었다. 이게 그 무투 대회에서 승리해 받은 보검일까. 간단한 호신술 외에는 배우지 않은 그녀조차 잘 만들어진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릎 꿇은 그의 위로 어린 날의 기억이 겹쳐 보였다. 이제 나뭇가지 대신 진짜 검이라는 게, 그가 실제로 검을 바친다는 게 달라졌을 뿐.
차릉-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잘 관리되어 반짝거리는 검신을 한 번 비춰본 그녀가 오른손으로 쥔 검으로 그의 왼쪽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그대의 방황하던 생은 나 딜라이나 다룬드가 지금 거두었으며, 그대는 지금 이 순간 내 것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대는 나의 기사. 경은 내 영광을 위해 싸울 것이며, 나 역시 주인으로서 경의 명예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경은 오직 이 검으로만 죽을 수 있다.”

엄숙한 목소리로 내 손으로 네 생명을 거두기 전까지는 죽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나니 갑자기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생명의 무게. 충의의 무게.
공녀로서 날때부터 지고 있던 무게들 보다 이것이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의 기사. 오직 나만의 것이 되기 위해 키워진 이 아름다운 것을…….

“일어나세요, 나의 기사.”


/ 안녕~~ 어제는 잠들어가지구ㅜㅜ 늦어서 미안해! 좋은 하루 보내~~

866 이름 없음 (FurIAGMYaI)

2022-10-11 (FIRE!) 18:12:12

>>865

어린 시절에도 이런 느낌의 선언이 있었던가. 물론 그땐 검이 아니라 그저 장난검 검처럼 사용할 수 있는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제 어깨를 치는 것이 그런 나뭇가지가 아니라 검이라는 것에 상당한 무게감을 느끼며 사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선언은 한 사람을 그대로 취하겠다는 의미. 그리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이는 제 목숨을 다해 충성을 하겠다는 맹세의 표시였다. 누군가가 굳이 어린 시절의 약속을 왜 지키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사내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명확하게 모두를 납득시킬 대답따윈 없었으니까. 그냥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냥 이 공녀의 기사가 되어 일생을 살아가고 싶다. 단지 그 뿐이었다. 사소한 이유야, 거기에 도다르게 된 원인은 있었으나 그것을 굳이 입에 담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명하신대로."

부드러운 정원의 바람이 불 무렵, 사내는 천천히 자리를 일으키고 고개를 제대로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니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마냥 연약하고 무디지 않은 성격이 얼굴에서 묻어나는 것 같아 역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허나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때의 그녀도, 지금의 그녀도 결국 똑같은 존재였기에. 그 본질이 달라지진 않았을테니까.

"그럼 공작 각하에게도 보고를 드리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공작 각하는 어디에 계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공녀님의 기사라고는 하나,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자면 다룬드 가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누군가의 기사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애초에 사내가 여기에 들어와있다는 것은 이미 공작과의 이야기도 다 끝이 난 것이긴 하나 그럼에도 정식으로 보고를 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기사로서의, 그리고 귀족으로서의 예의였다. 자작가의 차남이라고는 하나 귀족이었으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정식으로 제국에서 그 직위를 인정한 기사였으니.

/미안할 것이 뭐가 있어! 아무튼 이어둘게! 라고는 해도 사실상 거의 끝자락 같긴 하지만 말이야.

867 이름 없음 (aNFBNWtHKw)

2022-10-18 (FIRE!) 17:34:41

“…이리 꿈이 크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약지에 반지를 끼우는 걸 내려다보며 나지막히 뱉었다. 천천히 제 눈높이에 맞춰 내려오는 시선이 닿기 전에 고개를 돌린다. 아주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빛이 닿는 모든 게 반짝이고, 약하게 이는 바람에도 꽃향기가 실려올 만큼. 다만 당신과 나, 둘 중 그 누구도 웃음짓지 않았을 뿐이다. 오직 우리만이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듯 표정없이 서 있었다.

막바지에 이른 축하 연회와 함께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로를 핑계로 먼저 올라온 방은 아늑하고 향기롭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새 것 같다. 지금까지 원하던 게 이런 것 아닌가. 막상 손에 쥐고 나니 허탈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들고 스스로를 긁어대다, 견딜 수 없을 때쯤엔 당신에게로 화살을 돌린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씀하셨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텐데. 몰라보아 미안하다 해야 합니까?”

막 문을 열고 들어선 당신을 마주본다. 그 두 눈동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읽을 수 없다.

/ 꼬인 사랑.. 애증.. 같은 걸로 굴리고 싶다 ㅎㅁㅎ 처음에는 황족인 A(참치캐)랑 B(내캐)랑 연인이었는데 B 야망이 커서 황태자랑 약혼함.. 그러다 황태자랑 황제 죽고 A가 황위 오르게 되면서 AB가 결혼하게 됨... 같은 상황이야~~ 황제랑 황태자 죽인 게 진짜 A인지는 참치 맘대로 해주면 될 듯 ~.~ 텀 많이 느릴 수 있어서 미리 양해 부탁해 ㅠ

868 이름 없음 (WI0rkJ1vg2)

2022-10-19 (水) 00:31:07

>>867

소년은 패자(敗者)였다.

황제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아온 소년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머나먼 무언가였으며, 형제들간의 알력이라는 것은 시시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애시당초부터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무료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으니까. 천부적으로 타고난 싸움꾼이었으나 항상 그는 무력하게 패배를 하였고, 몇가지 재주─세력을 형성하거나, 온갖 학문에 대해 뛰어난 식견 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무료함을 채우는데에 치중할 뿐, 외부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렇게 패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있어서, 한순간이나마 색채를 더해주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눈에 깃들어 있는 색채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색채가 광채로 변해갈 때 쯤에야 그는 그 소녀에게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와 연인이 되었고, 그 광채가 자신의 것이 되었음에 만족하며 지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광채의 의미는, 그가 짐작하지 못한 그녀의 마음속 갈망임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왜?

광채가 변절해 자신을 떠나가고, 그렇게 떠나간 광채에 대해 분노를 토하던, 소년이었던 남자는 방에 모든것을 부수고 나서야 상황을 냉철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그래, 그녀가 원하는 것은 결국 나와 같이, 그저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주마, 네가 그렇게 돌아올 수 있다면, 기꺼이 내가 그리해주마. 그는 천천히, 방안에 있던 가장 온전한 물건인, 핏빛의 액체가 담긴 와인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축인뒤 새벽녘의 하늘을 잔을 통해 비추어 보았다. 피로 물든 하늘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가볍게 힘을 주자 와인잔이 깨져 나가며 핏빛 하늘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내린다.

──그 뒤로는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황위 계승전에 이어서 그는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군부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고, 역으로 각종 정보들을 수집하며 형제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치하는데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는 그들의 행태를 보며 그는 결국 이들도 한낱 더러운 토사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렸을때, 그는 황태자를 넘어선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결국 황태자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혔고, 마침내 황성을 지나는 큰 문─당시 소녀는 그에게 매수 당한 친가에 의해 집에 돌아가 있었다.─의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단 한번에 그의 머리통을 깨부숴버렸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장년인에게 다가가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저 밖에 안남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고, 그로 부터 2달 뒤, 그는 황위를 계승하며 만백성의 환호 아래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은 스스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빛내고자 할지라도, 결국 자신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으니까,
공허하기 그지 없는 광대의 장막이 닫히고, 그는 조용히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가 그렇게 시선을 돌리자 소녀였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책망인가, 아니면 증오인가.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인지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가 떠났을때와 같은 똑같은 잔에 똑같은 핏빛 액체를 한모금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무럿이 솔직한것인지 나는 모르겠소. 나는 아직도 변함이 없는 존재라고 밖에 할 말이 없겠지."

여인은 알까, 아직도 그는 소년인 상태 그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아마 이제 그 유약하던 소년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할까? 아니면 그 소년이 아직까지 미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순간 소년의 입이 떨어지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패자(敗者)로서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단 한가지를 가지지 못하여 스스로 패자(覇者)가 되었고 하늘을 불살라 생명(황가)을 취하니 그 목을 축이는 것은 결국, 패자(敗者)인 것을 말이지."

//원하는 대로 제대로 뽑혔는지 모르겠네, 씁
//일단 모티브는 던파의 폭룡왕 바칼 + 당 태종 이세민이야!

869 이름 없음 (Q6UrlCxNHI)

2022-10-19 (水) 22:28:17

>>868

“폐하께서 변함 없으시다면 제가 틀린 게지요. 사람 보는 눈은 조금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나봅니다.”

건조한 목소리에 아예 몸을 돌리고 섰다. 자조하듯 터지는 웃음에 양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눈. 하늘은 어둠에 잠기고 유리창에 비친 불빛만이 일렁인다. 어린 시절부터 욕심이 많았다. 양손에 인형과 새 옷을 쥐고도 저쪽의 풀꽃 하나를 더 갖지 못하면 그게 못내 억울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 더 많은 것을. 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몸을 낮출 필요 없는 곳까지.
당신과의 단란한 한때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으나———. 찰나의 호시절(好時節)이었다. 당신에게서 발견했던 빛이 사라졌다 여기지는 않았다. 그게 제가 찾는 것이 아니었을 뿐. 그러나 그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랑의이유가 끝내 저버리고 마는 이유와 같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렇게 된 게 제 탓이라 책망하실 일은 없을 테니.”

혼잣말 중얼거리듯 내뱉고선 일순간 당신을 향해 선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비틀대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서 당신이 쥔 잔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얄팍한 유리잔이 손가락에 닿으면, 그대로 감싸쥐고 남은 것을 들이켰다. 교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행동이었다.

“…내게 남은 사랑도, 원망도 없다고 말해요.”

빈 잔을 다시 당신 손에 쥐여주며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약하게 굴게 되는 건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 그냥 편하게 이어주면 돼~~! 잘 부탁해 ㅎㅎ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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