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3 여기, 여기 샌다. 어어. (아까 당했던 그대로 귀에서 당신의 이야기가 쏟아지는 시늉을 해보인다. 열연에 가깝다.) 저 때 기억나? 사람들 벚꽃 보러 몰려서 앉을 자리 찾아서 1시간 정도 돌아다닌거. (폰을 집어넣으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기억이 생각보다 선명해서 내심 놀란다.) 귀신님이 꽤 편파적이시네. 염라대왕 앞에서는 안되지만. (되도 않는 허세.) 그건 내 마음이지. 하나만 세려던거 양보해준거야. 매너있지? (당신이 손에서 힘을 풀자, 뿌듯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새끼손가락을 건다.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 오케이, 그럼 아이스크림은 이제 내... (라고 하자마자, 수업종이 울린다. 그대로 말도 채 잇지 못하고 굳어버린다.) ...타이밍 끝내준다, 너.
>>768 너 완전 짜증나. (이번에는 맞장구 쳐주며 따라하지는 않고, 약올라 어쩌지도 못하는 표정이다. 아이스크림 삥 뜯는데 실패해서일까.) 으, 그 때 까졌던 거 아직도 아파. (발목 뒷쪽이 따끔거리는 기분에 몸서리치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귀신님은 나 좋아하거든. 곧 염라대왕님도 나랑 짱친할걸? (허세도 지지 않는다.) 매너는 무슨, 손 아파 죽겠는데. (엄살이다. 새끼손가락 걸려서 흔들거리는 모습과 뿌듯한 네 표정을 영 마뜩찮게 바라보다, 이내 푸스스 웃는다. 아이스크림 하나 때문에 지금 둘 다 뭐하던 거람, 새삼 그렇게 생각해버려서.) 와, 행운의 여신도 타이밍의 신도 다 나 짱친. 어떡하냐, 뷔페 잘 먹을게? (걸려있는 새끼손가락을 네 새끼손가락에 일부러 더 꼬옥 감는다.)
>>769 그래도 싫진 않잖아. (여기서 더 놀리다간 일정 선을 넘을거라 예상했는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고는 더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예뻤잖아. 괜찮았어. (사진은 잘 찍지 않지만, 꽤 많은 사진을 건졌었다.) 그래그래, 내 이야기도 좀 잘해줘. 나 천국 가고싶으니까. (허세에 당해주기로 한다. 푸스스 웃는 모습에 마찬가지로 바보 같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어보이다, 다른 손으로 미간을 짚는다.) 왜 세상은 나만 미워하냐. 서러워서 못살겠다 진짜로. 이따 저녁에 시간이나 비워놔. (잔뜩 축 처진 어깨. 벗어날 수 없는 새끼 손가락을 바라보며 긴장감 어린 미소를 지어보인다.) 못이기겠네. 돌아가자. (당신이 놓아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교실로 향한다. 조금 시원해졌다 싶었는데, 다시금 더워진다.)
#청춘향 5000% 너무 즐거웠어!!!!! 짧은 호흡 티키타카 최고야ㅜㅜㅜㅜㅜ 딱히 정해둔 것도 없는데 얘들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재밌었어 இ௰இ
>>761 헤헤, 사람을 뭘로 보고. 진작 그럴 것이지! (무를 생각 따윈 없다. 그 생각에 변함은 없는지, 더 생각 할 것도 없다고 하는 것처럼 창백한 손 위에 들려있는 덩어리를 겁도 없이 덥썩 집어온다.) 그러니까 그냥 이걸 먹으면 된다는 거잖아? 맞지? (인간은 덩어리를 대번에 삼키려한다. 그리고 입가에 넣기 전, 인간은 잠시 망설였다. 출처모를 고기를 한 데에 뭉친듯한, 미심쩍은 덩어리. 모습만으로 평하자면 사람이 먹을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짐승의 먹이나 미끼와도 같은 모양새다.) ...으으음. (아무리 여기까지 와서 큰소리 치는 인간이라도 막상 그걸 먹으려하니 주저하게 되는 걸까. 그러나 인간은, 마침내 제 입 안으로 덩어리를 털어넣었다. 그냥 삼키는 것도 아니고, 우적우적 씹는다. 새로운 음식을 음미라도 하듯이) ...음~ (그 시식이 조금 더 이어지다가.) 의외로... 먹을만한데? (꿀꺽. 고깃덩어리는 목 안으로 넘어간다. 인간은 부주의하게도 소매 끝으로 입가를 한 번 스윽 닦아낸다.) 그래서 이건 뭐였는데? 용기있는 자에게 하사하는 상같은 거?
>>771 (관리자는 그가 덩어리를 가져가자 손을 다시 망토 안으로 감추었다. 모자 속 감춰진 얼굴의 낮게 뜬 눈이 그의 행동을 응시한다. 그걸 먹으면 되냐는 물음에 말 대신 모자만 가볍게 끄덕였다. 이 순간 관리자의 신경은 그가 먹을 것인지 아닌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잘도 먹는구나.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은 그가 덩어리를 입에 털어넣고, 야무지게 씹기까지 하자 그제서야 관리자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인간의 입에는 분명 맞지 않는 '고기' 였을 텐데 참 잘도 먹는다. 그가 완전히 삼키고 입가를 닦는 것까지 하자 관리자는 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 숲에서 먹고 자란 것의 고기다. 또한 너를 이 숲에서 절대 내보내지 않을 쐐기이기도 하다. 이제 넌 살고 싶어도 이 숲에서만 살아야 하며, 죽으려 해도 이 숲에서만 죽음이 허락될 것이다. 허나 어느 것도 쉽지는 않겠지. 여기는 그런 곳이니. (담담히 말을 마친 관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혼자 가지 않고 그를 향해 말했다.) 거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와라. 오늘부터 당분간 자질이 있는지 내가 직접 가르치며 확인할 것이다. 그러니 잘 시간도 없이 매달려야 할 거다. 더이상 가르칠 가치가 없다 여겨지면 당장 마물에게 던져버릴테니. (관리자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깐깐해진 것 같다면 기분 탓일까. 어쨌거나 그렇게 할 말을 마친 관리자는 그가 겨우 따라갈 수 있을 걸음걸이로 숲을 걸어간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처럼 컴컴한 숲 안 쪽, 더 깊은 곳으로.)
>>770 어, 아주 좋아 죽겠다. (가늘게 뜬 눈이 흘기다가 만다. 나도 널 바짝 약 올리고 싶은데 이번에도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예쁘긴 엄청 예뻤지. 내가 너 인생샷 삼백장은 건져줬잖아. (벚꽃이 피었던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하긴 발 까진 것도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나서 집 갈 때서야 아파서 확인해보니 발견했었다.) 어렵대. 수고. (고민의 흔적도 없는 답변. 천국은 무슨.) 못되게 살아서 그래, 밥팅아. 착하게 살아. (축 처진 어깨를 토닥토닥 쓸어주려고 하며.) 앗싸, 오늘 뷔페~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에 돌아간다.)
#나도 즐거웠어! 낭랑한 청춘도 너무 좋고 짧게 티키타카한 것도 좋았어! 재밌었어, 고마워~
그래. 눈이 마주치는건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나는 골동품 점에나 볼법한 곰방대의 연기를 머금고는 그대로 음악실의 문을 세게 열어젖히고는 그 연기가 폐 속을 지독히도 더럽힐 무렵에, 마주쳤던 망령에게 다가가 독한 연기를 입 밖으로 내뱉고는 말했다.
"이리 오너라."
분명 그 말은 다가오라는 의미는 아니였다. 사극에서 양반이 하인에게 문을 열라 시키는 그런 부류의 말투. 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무척이나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하고는 했다. 하기사 저승사자나 입을 법한 검은 두루마기를 한복 위에 걸치고 곰방대를 푹푹 피워대는 모습을 보자면 이게 현대 사람이 맞냐 라던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왔냐는 말을 자주 듣기는 했다.
"네 한(恨)은 무엇이냐. 무엇이기에 죽었음에도 구천을 떠도느냐."
귀신을 보고 마주쳐도 놀라지 않고 되려 말까지 나누는게 이상하지 않은 나는 소위말하는 영매, 무당 혹은 퇴마사. 그런 부류에 속했다. 세간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것으로 돈을 벌어먹는 사기꾼 여자 라는 소리도 종종 듣기도 했지만 나 유서희는죽었음에도 현세를 떠돌고 있는 망령들의 한을 풀고 성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777 전소영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제가 잘못 본 것인가 싶었으니까. 대뜸 눈이 마주친 사람, 그것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자신에게 '오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발음 그대로의 의미는 아님은 소영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황당한 기분은 매한가지여서 소영은 두 번 더 눈을 깜박이다가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나... 나? 내가 보여? 근데..."
안 무서워? 그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내뱉지는 못했다. 다음 순간, 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으니까.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근데 내 소원은... 그거, 이룰 수 있겠냐고. 순간 소영은 울컥해져서 울상을 지었다. 당최 협주곡 연주가 가능한 귀신이 어디에 떼거지로 있겠냐고. 사람이면 더 불가능하지 않냐며, 생각을 거듭한 끝에 소영은 슬픈 얼굴로 답했다.
>>779 만약 살아있는 전소영이었다면 분명 일련의 말들에 황당함이라도 비칠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리고 황당하지만 바로 그 지푸라기가 눈 앞에 두루마기 입은 기인(奇人)인 것이다. 때문에 소영은 머뭇거리긴 했으나, 나서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말 없이 긍정하고는 긴장한 기색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 말해두겠지만, 나는 분명히 어려울 거라고 얘기했어."
소영은 양 옆으로 묶은 머리끝을 메만지며 엄포를 놓았다. 만약 기분만 떠보고 가버린다면 귀신으로써 저주라도 해 주리라 생각했다. 피아노 연주를, 그것도 수 많은 사람이 함께해야 하는 이 소원을 어떻게 이뤄줄 수 있는 지 두고 보자며, 소영은 검은 눈을 번뜩였다.
"나는... 협주곡이 연주하고 싶어. 아주 큰 무대에서 수 많은 연주자가 함께하는 그런 협주곡."
그 직후 소영은 긴장한 나머지 침을 삼켰다. 아무리 뭐라고 해봐야, 저는 죽은 사람이라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협박 따위 될 리 없었다. 그랬기에 간절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눈 앞의 살아서라면 말도 걸지 않았을 괴짜를 바라봤다.
하기사 다짜고짜 찾아온 괴짜의 능력을 못믿는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였다. 못마땅한 인간이 얼마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역량 자체가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다. 세상이 자신을 사기꾼이라 부르기도 한다지만, 그건 믿지않는 부류에서의 비난이고, 수많은 영을 명부로 돌려보내는 일을 처리한 나에게 있어서 어지간한 일은,
"의뢰 금액의 두 배는 받아야 하겠군.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장소를 정하는 것은 인맥의 일이니."
의뢰한 자들 이라는 인맥을 끌어모으면 불가능 하지 않았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기꾼이라 불리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의뢰금은 딱 먹고 살정도로. 그 정도로만 받는다. 지금과 같이 인맥을 끌어다 쓰는 일이 아니라면. 반대로 인맥을 끌어다 쓰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두 배를 받는다. 영적인 현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것에서 풀려남에 따라서, 해결한 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입장이 된다. 설사 의뢰금을 이미 받았더라도 그 액수는 적었고, 두 배가 늘어난다고 해도 한달 아르바이트 값의 두 배정도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인맥을 끌어다가 쓰는 행위가 항간에 보이기에는 의뢰했던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사기꾼이라 보여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3년전 사망자인 피아니스트가 맞았군. 미리 맞을 경우와 아닌 경우에 대한 의뢰금을 이야기해놓길 잘했어. 그래서 이름은?"
이 의뢰에 대한 내력정도는 조사해보았기에, 눈 앞의 망령에 대하여 이름까지도 알고 있지만서도 예의차 묻는다. 제 아무리 망령이라고 하더라도 사고하는 존재에 대해 인륜적이지 않은 조치는 무례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나는 해한사(解恨士, 한을 풀어주는 사람). 유서희라고 하네."
한쪽 눈은 초점을 가지고 응시하지만 현세외의 것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눈앞에 망령이 있음에도. 한쪽 눈은 초점이 없는 채로 현세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오직 영체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게 내가 해한사가 된 증거이며, 살아서 삼도천을 건너본 자의 대가였다.
>>782 소영의 머릿속에서 셈해지던 암산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눈 앞의 기인의 말이 머릿속을 멤돌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 괴짜는 마치 아주 손쉬운 일이라는 듯이 무리한 요구를 일축했으니까.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뇌가 과부하로 부작용을 일으켰다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소영은 그 대답이 황당해서인지 잠시간 말을 멈추고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겨우 말문을 뗄 수 있었다.
"인맥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내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거니? 그렇지만,"
왜? 라는 의문이 머리속을 몽글몽글 떠돌아 다녔다. 귀신인 자신을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이 돕겠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때문에 소영은 대답 대신 입술을 씹으면서 답을 망설였는데, 순간 그의 질문에 경직된 기색이 얼굴을 스쳤다.
"내가 피아니스트 였다는 걸 어떻게... 너는 대체 누구야?"
경직된 얼굴이 얼핏 귀신보다 섬짓한 눈을 마주 보았다. 소영은 그 눈동자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이 상황 때문인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직후 떠오른 것은 그에 대한 궁금증이나 두려움 보다도,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소원을 해소하러 사람을 보냈을 지 모른다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에 대한 희망. 전소영은 죽을 당시를 떠올려 보면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한창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시간의 무게가 달랐다. 비록 이 학교의 고등학생들이 곧 성인이 될 시점의 나잇대라 해도, 그 나이에 삶이 끝난다고 하면 무척 짧게 느껴지는 시기인 것 처럼 말이다. 그런 소영이었기에 이런 순간 품는 생각은 너무도 철이 없었다. 순진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혹시 나를... 알려 준 사람이 따로 있니? 아직, 누군가 나를 기억해?"
3년, 지극히 길고도 짧은 기간. 한 사람이 성인이 되기까지 남은 기간임과 동시에, 잊혀지기엔 너무도 쉬운 시간이다. 소영도 무의식적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계기가 찾아오니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 전직 최연소 피아니스트, 17세에 꽃 피운 음악계의 전설. 모두에게 기억될 뻔 했으나, 너무 쉽게 져버린 한 송이 꽃. 아쉬울 법도 했다. 다만 그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자신의 죽음이 아픔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음직 하나, 소영은 아직 잊혀지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간단한 이야기라네. 자네같은 망령은 꽤 이 세상에 존재하니까. 내 입에 풀칠할 정도로만 금액을 받고 빚을 세우는거지. 그렇게 쌓은 인맥의 망이 내 일을 또 돕는 일을 하게하지. 의뢰자는 적은 돈에 확실한 효과를 보았기에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게끔 하는게 내 능력이고. 악단과 악단이 활동할 무대. 두 가지가 필요하군. 그렇지 않나?"
그래서 인맥으로는 가능하다. 지금 바라고자하는 소원은 대규모의 인맥을 동원하기는 하지만 힘든 부분은 적은 편이다. 오히려 법적으로 오고가야 하는 일에 원한이 들린 원귀를 상대하고자 한다면 그쪽이 가장 까다롭다. 그 부분에 있어선 유사 탐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일을 받으면 거기에 얽힌 내력을 조사하는건 내 특기일세. 곧바로 만나서 위험한 망령인지는 판단할 필요가 있으니까. 물론 이 경우에 있어서는 그대가 나에게 질문하는 대로, 의뢰자가 그대를 기억하는 쪽에 속하니 많은 정보를 내 발품없이도 꽤 알아냈지만 말이네."
요는 이 의뢰의 내용은 '음악실의 귀신을 성불해달라'가 아니라 '음악실의 유령이 만약 전소영이라면 그 한을 풀어달라' 였다. 그러니까 의뢰자는 눈 앞의 망령인 소영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다. 아직까지도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이야기를 꺼낼때 슬퍼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까.
>>784 청산유수 흘러나오는 서희의 대답에 소영은 오히려 어물거리며 말하는 것을 망설였다. 살아서도 겪지 않았던 귀신에 관한 일들에 이렇게 까지 자연스럽게 다가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의사를 밝히는 사람이라니 솔직한 심정으로 적응이 안됐다. 소영은 그렇게 서희의 말에 어물쩍 휘둘리는 듯 하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지만, 날 돕고 싶다는 이야기네? 근데 돈도 많이 안 받고..."
소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근 3년 간을 음악실의 귀신으로 공포의 대상 취급 받으며 지내온 시간을 떠올려 보면 이건 분명 기쁜 일이었는데도, 소영은 그리 흔쾌히 기뻐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3년 간 귀신이었음에도 소영은 여전히 살아 있던 시절의 기억과 상식으로 세상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전히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귀신 보는 사람은 비정상에 속했고, 정상 삶에 포함되었던 과거의 지식으로 볼 때, 이런 이상한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영은 망설임 어린 태도로 우물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그건... 네게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나는 죽었지만, 그렇다고 남을 고생시키면서 까지 소원을 이루고 싶지는 않아. 서희라고 했지? 서희 네가 나를 돕고 싶다고 해도 너무 적은 돈을 받고서 일을 한다는 건 아닌 것 같아."
소영은 이윽고 작게 웃었다. 마치 햇살이 내려앉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서희의 어쩐지 두려움을 갖게 하는 눈을 마주 보았다. 소영에게 친절이란, 살아 있을적에 가졌던 상식과 품위 만큼이나 당연한 결을 지녔다. 잃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소영은 사람으로써 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 믿을 정도로 그 마음 씀씀이를 가진것으로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반증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서희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한 것들을 내뱉었다. 설령 그 손 너머에서 온기도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러니까 서희야, 네게 부탁한 사람한테 가서 다시 말해보자. 이런 힘들고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밖에 못한다니, 너무 슬픈 일인 것 같아. 네가 하는 일은 좀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소영은 자신의 소원은 안중에 없는듯이 그 사소한 일에 자꾸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소영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죽은 사람이 연주하고 싶다는 소원 따위 보다는, 산 사람이 남 부럽지 않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터였다. 때문에 소영은 조금은 감사하고 조금은 동정하는 기색을 가림없이 드러내며 서희를 바라봤다.
"서희는 나를 돕고 싶은 좋은 사람인거지? 나는 그런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
그러다 곧 서희의 아리송한 답에도 금세 알아차렸는지, 소영의 표정이 조금은 굳혀졌다. 아마 누가 서희를 보낸 것인지 짐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소영은 그 곤란하다는 시선으로 서희를 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의뢰했다는 사람... 이름, 내가 맞다면 장우현이 맞지?"
그는 오래 전 자신의 첫사랑이며, 라이벌이었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가장 보고 싶은 친구였으며 누구보다 궁금했던 그 사람은 소영을 죽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비단 그것이 사고였다 하더라도, 모든 사건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생활에 있어서는 편의를 봐주는 사람도 있고 더군다나 성불할 대상인 소영이 그걸 신경쓸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본디 태어날 때 죽을 명부가 잘못 씌어진 보상책과도 같다. 달리 말하면 이 일을 하지않고서는 나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죽은 자가 현세의 미련을 끊고 명부로 돌아가는 대가로 살아갈 내일의 시간을 버는게 내가 해야하는 일이고 동시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내 일은 내가 살아가는 시간을 벌기 위한 일이라네."
그건 동정할 필요도 없고 동정받아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불행한 것은 아니였다. 비록 삶과 죽음을 확실하게 할 수있는 인간들이 부럽기는 했으나, 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그만한 대가와 사명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고 한다면 그대가 한을 풀고 성불하는 일 뿐이네."
살아있는 운명도 죽어있는 운명도 어딘가 적혀있다고 한다면, 나는 살아있는 운명이 적힌 순간에 죽어있는 운명도 동시에 적혀있었다. 해한사로서 지금의 사명을 얻지 못했다면 그대로 없어질 운명이었다. 지금의 삶이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했다.
"의뢰자를 잘 알고있군. 어찌되었건 일을 받은 이상 일을 행하고 그대는 한을 푼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786 사명, 그 단어를 말하는 서희가 소영은 기계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느끼던 친애와 공감을 표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서희는 너무도 무감정함에 가까웠다. 그 사실이 기이하게 다가왔던지, 우습게도 귀신인 소영은 사람다움을 찾고 있었다. 때문에 서희의 답에 괜시리 어색해진 소영이 서희의 손을 잡은 채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희야, 서희는... 그런 식으로 사는 삶이 즐거워? 나는 귀신으로 남아있던 3년간, 너무 괴로웠거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던 시절이 내겐 행복했으니까. 그런데... 너는, 정말 그걸로 괜찮아?"
서희의 삶을 그가 보기에는 목숨만 붙어 있는 삶이라고 여겨졌다. 꿈도 없고, 이렇다 할 즐거움도 없이 산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삶. 마치 근 3년 간의 귀신으로써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소영은 잠시 고민하듯 바닥을 보더니, 억지 웃음을 지었다. 죽은 주제에, 서희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소원 안 이뤄도 돼. 고작 피아노 치는 게 대수라고. 그보다는 네가 더 행복한 일을 했으면 좋겠어. 하나뿐인 삶이잖아..."
하나뿐인 삶, 그것이 소영과 서희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올까? 분명 둘은 누구보다 생의 무게를 잘 아는 입장이었지만 가치관은 달랐다. 서희와 소영은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다정함을 사랑하고 쉽게 즐거워하며 그것이 가까운 행복이었던 소영은... 어쩌면 영원히 서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 않던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추측하고 이해하려 들 뿐이다. 서로간의 간극을 가늠하며 비로소 이 사람과는 다르다고 깨닫는 과정일 뿐이다. 다만 그런 의미에서 소영은 어렸다. 아직 상대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시기에 죽어버렸다. 그는 영원히 열일곱이다.
소영은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 아이 같은 태도로 애써 동정을 감췄다. 복잡한 심경과 함께 자신의 소원도 미뤄두고는 아닌 척 애써 웃었다.
"한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죽은 나보다도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을래? 내가 서희에게 좋아했던 걸 알려주면 어떨까? 너도 즐거워 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혀를 쯧하고 차며 곰방대를 한참동안 뻑뻑 피워댔다. 이런 부류의 동정 혹은 연민을 죽은 자에게서 듣는 것은 정말로 스트레스가 받는 일이었다. 삶의 즐거움을 어째서 죽은 자가 논하고 있는가. 살지도 죽지도 않은 애매한 경계를 자기의 감정에 이입해 보고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로 필요없는 감정이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길이네. 태어나면서 동시에 죽었어야 할 운명을 빗겨난 대가니까. 자네가 이입할 이유도 동정할 이유도 연민할 이유도 없네. 심하게 말하자면 죽은 자가 산 자의 삶을 해결하고자 하는가? 그야말로 헛짓거리다."
물론 나는 산 자의 삶을 살지만 성불을 통해 살아갈 시간을 벌지 못하면 소멸한다. 다시 돌아갈 육도윤회의 환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속세의 삶에 있어서 달관한듯 한 이 태도 인간으로서의 삶으로서는 이미 어긋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상대는 나를 비슷한 또래의 사람처럼 보아 말을 놓고 있는 거겠지만, 난쟁이 똥자루같은 체격에서 자라나지 못한 것 뿐이고. 기이하게 나이를 먹지않고 있다. 인간으로서는 확실히 나는 어긋나 있었다.
"삶에 있어서 미련이 남으면 죽은 영이 현세를 떠돈다. 작금에 상황에 현세의 인간을 연민하여 그저 필요없다고 미뤄두려는 속셈이 아닌가. 그건 죽은 3년전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대가인가."
"미련이라, 나는 잘 모르겠어.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건 살았을 때도 변함 없었는걸. 그건 그냥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의 공통점 같은 거라고 생각해. 과거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
소영은 웃음 지으며 말했다. 서희의 질책에 민망해진 것도 있겠으나, 거절하려 에두르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소영은 서희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서희의 방식과 삶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 받으면서까지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소영은 서희의 말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길 바라는 것 만큼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현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죽기 전의 케케묵은 감정이 그의 마음을 거리끼게 만들던 것이다.
"네 삶이 네가 선택한 것이듯 이건 내 선택이야. 죽어서 이렇게 남아있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 적어도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해결할 문제는 아냐."
죽은 사람은 결국 산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건 서희 역시도 같지 않을까. 한 번 죽었기에 산자와 죽은자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지민, 반대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죽음 이후의 그는 잠시 말이 없이 웃음 짓다가 말을 꺼냈다.
"미련이라는 말로 전부 정리될 수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아. 그건 내 삶이 가벼웠다는 뜻이잖아. 너는 생각한 적 없어?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 지.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워."
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슬퍼하고 있었다. 삶에 있어 한 가지 염원을 남기고 떠나지 못한 영혼을 미련이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영이 떠날 각오를 만들어주는 일종의 한풀이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소영에게는 미련이 없었다. 그건 방황하는 마음처럼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었으며 구체적인 방향성이 없는 마음이었다. 소영은 아직 떠날 생각이 없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말이다.
"그래, 나는 네가 너무 불쌍해. 하지만 그게 도망치는 이유라는 건 심한 억지야. 나는, 내가 이루고 싶은 건 그냥 소원 하나가 아니야. 진짜 이룰 수 있겠어?"
드디어 용사는 이 세계를 어둠으로 뒤덮으려고 하는 사악한 마왕을 무찌르고 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보통은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날 것이다. 허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의 삶은 계속 이어졌고 그건 용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세상을 구한 이니 수많은 이들의 찬양을 받고 왕가에선 사위를 삼으려고도 하고 부와 명예를 약속했으나 용사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동료들에게 가벼운 작별인사만 하고 원래 살던 작은 시골 마을로 돌아왔다. 용사는 원래 이곳에서 매섭고 위험한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살아가던 사냥꾼이었다. 한 손에는 검 한 자루, 그리고 등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에게 발사하는 활과 화살을 차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어느 날, 그가 살던 마을이 본격적으로 마족의 침략을 받은 것을 계기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사냥꾼은 마을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다.
그 사이의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그것을 다 설명할 순 없었다. 아무튼 마을이 침략받았을 때 자신을 도와준 마법사와 기사를 따라 여행길에 올랐던 사내는 용사가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이전의 삶을 살고 있었다. 마족과의 전쟁이 끝이 났다고 해서 몬스터가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처럼 그런 몬스터를 사냥해서 돈을 벌거나, 혹은 위험한 몬스터를 퇴치해주고 그 보상을 받거나 하는 등으로 용사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소소한 삶을 사는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행복해보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사내는 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파란 지붕에 하얀색 벽돌로 쌓은 집 안은 제법 넓이가 있었다. 원래라면 가족이 같이 살고 있었으나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 자신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하나뿐인 남동생마저도 목숨을 잃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집 뒤에 만든 묘지는 아직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사내는 창가로 그 무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한편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이 온 것일까. 누군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사내는 자신이 안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네. 누구신가요?"
뒤이어 사내는 아마 천천히 닫혀있던 문을 열고 문을 노크한 이를 대면하려고 했을 것이다.
/엔딩 이후의 이야기라는 느낌으로 용사가 왕가에서 제안하는 사위 자리라던가 부와 명예라던가 그런 것들을 다 거절하고 동료들과는 작별인사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누가 집으로 찾아와서 막 문을 여는 상황이야. 맥커터는 사절할게. 뜬금없이 사내를 푹 찔러서 죽였다라는 전개만 아니면 누가 왔건 어떤 상황이건 뭐든 오케이!
수없이 입술을 짓씹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주저하고 주저했지만 결국 이 문을 두드려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한탄스러웠다. 난세에 태어난 것이 그녀의 유일한 죄였다. 손목에 족쇄도 없는데 들어올리는 팔이 무거웠다.
"반가워 용사.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지?"
똑똑. 문 뒤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사신의 것처럼 들렸다. 두꺼운 후드 로브에 짓눌린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그의 발걸음은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것만 보아도 충분했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강철 지팡이를 자신도 모르게 더 꼭 끌어안았다.
그것은 그녀보다 크고 용사와 높이가 비슷했다. 위쪽은 횃대처럼 수평으로 되어있었으며 아래쪽은 송곳처럼 뾰족했다. 어쩌면 용사가 알아볼지도 모를 유형의 물건이었다. 대전쟁의 한 부분이었던 조인들의 송곳 횃대. 그러니까, 마족의 무기. 거기에 새겨진 문양이나 묶여 있는 장신구까지 알아본다면 그 사실까지도 어렵잖게 알 것이다.
"당신을 찾느라 많이 힘들었어. 이젠 마음대로 돌아다닐 처지도 못 되거든."
저주받은 마왕의 군세를 불러모으는 갈색 깃털의 길잡이. 한밤 속에 스며드는 악마의 전령조. 부엉이 하피 소피게네이아의 지팡이임을. 그러나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그녀의 눈에서는 예전의 비수같은 날카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귀깃은 축 쳐진데다 로브 아래 깃털에도 윤기가 없는 것이 명백히 보였으니까.
용사에 의해 마왕 및 핵심 수뇌부들이 몰살당한 마족들은 그대로 사분오열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왕국군이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진공하였다. 어떤 마족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항전하다 아예 멸절되었다. 어떤 마족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알 수 없는 먼 땅으로 도망하였다. 죽을수도 도망칠수도 없던 마족들에게 남은 길은 인간들에게 무릎을 꿇고 복속되는 것 뿐이었으니. 소피게네이아는 세 번째 유형이었다. 강자를 따르는 것이 마족의 미덕. 더 강한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일지. 생존을 위해 피눈물을 삼키며 내린 결단이었을지. 그건 당사자들의 머리를 열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왕국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를 자축할 전리품들이었다.
"나를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조금만 시간을 써주겠어? 어찌됐건 당신이 승리했고, 당신이 더 강하잖아."
"승자와 강자의 아량을 베풀어서라도 제발.....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
>>795 문 뒤에 있는 이의 얼굴은 바로 보이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 자가 누구인지 사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저 자가 끌어안고 있는 강철 지팡이의 형태와 문양. 그리고 묶여있는 장신구. 모두 마족의 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마족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테니 살아있는 이가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땅에 마족이 다시 발을 들이밀었고 그것도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사내의 시선이 차갑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넌..."
당연히 그 목소리도 마냥 고울 순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 마을은 한 번 마족의 침공에 의해 불탔고 자신은 그 마족들에게 가족을 잃었다. 물론 눈앞의 이 마족이 자신의 가족을 죽이거나 마을을 불태운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사내가 미처 몰랐을 뿐이지. 이 마족도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조금만 시간을 쓰고 자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에 사내는 잠시 생각을 하다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전쟁은 이미 끝났어. 이 마을을 불태우고 침공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피를 튀길 이유도 없어. 그래서 여기엔 왜 온 거지? 내가 알야아 할 사실이 뭐지?"
여기까지 온 이유가 필시 있을테고 어떻게 할지는 그 이유를 듣고 결정해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시간을 쓰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지, 정확히는 자신이 용사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니까. 그 이유 정도는 들어서 나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일단 안으로 들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과거 마족에 의해서 마을이 불타고 가족이 죽은 것들 때문에 마족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널 죽이겠다고 달려들 이도 적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야기는 안에서 시작하자."
이어 그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그녀가 들어왔다면 아마 문을 바로 닫았고 그녀를 바라보며 용건을 이야기하라는 듯, 조금은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자기 전에 이어준 것이 보여서 잇고 바로 자러 가볼게! 이어주면 내일 시간 되면 바로 이을게!
>>796 소피게네이아는 신발을 신지 않는다. 낫처럼 푸른 맹금의 발톱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빗방울이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나간 바닥에는 긁힌 자국, 파인 자국이 없었다. 그녀는 단신으로 이 마을의 모두를 죽이고도 더 죽일 수 있다. 여기서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하나. 용사뿐이다.
전쟁 후 인간들에겐 그런 소피게네이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녀의 목에는 예속의 주문이 감겨 따라다닌다. 하지만 주문이 불규칙적으로 점멸하는 것이 척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주문을 무력화한 것이리라. 시간 제한이 있겠지. 하루에 허락된 시간 얼마. 그 시간이 끝나면 주문이 돌아오고, 펑. 그녀는 목이 답답한지 표정을 찡그리며 발톱으로 벅벅 긁었다.
"시간이 없어. 짧게 할게."
"두 번째 전쟁이야. 이번에는 인간과 인간. 너랑 왕국."
부와 명예 그리고 사위. 받아들여야 했어. 마족이 와해되었으니 그 다음가는 왕실의 위협은 바로 용사 당신이야. 소피게네이아는 말했다. 그의 무력, 인망, 카리스마.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력하게 유린당하기만 하던 왕실, 실추된 권위. 왕실이 뭘 했냐고 수군대는 사람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던 셈이었다.
"그들이 곧장 군대를 보내지는 않아. 그렇지만 이미 왕실은 내부적으로 숙청을 결의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굳이 물어보진 마. 소위 높으신 분들께서 애완동물로 들인 마족이 한둘이 아니거든?"
나까지 포함해서...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나마 명성이 있던 마족들이 애완동물 취급이라도 받지. 그것도 못한 하급 마족들은 한낱 자원이 되고 말았다. 노동력, 재료 등등.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벌벌 떨면서도 끊임없이 말했다. 어쩌면 예전의 그 만월같던 눈빛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을지도.
"당신도 알아야겠지, 이 사실을. 궁금한 게 있으면 아는 선에서는 말해줄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자신도 모르게 지팡이를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큰 전투 같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곤 했다. 그래, 큰 일을 앞두고 있긴 하지. 소피게네이아는 매캐한 미소를 지었다.
아예 생각을 하지 않은 사안은 아니었다. 허나 자신은 부도 명예도 필요없었다. 그저 다시 이전처럼 평화롭게, 정말로 평화롭게 자신의 고향에서 사냥을 하면서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한낱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왕의 사위가 되면 무엇할 것이며 많은 부와 명예를 얻어봐야 무엇하겠는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왕실의 공주라면 당연히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아니겠는가. 자신은 평민 출신의 사냥꾼일 뿐이었다.
허나 왕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부적으로 숙청을 하겠다고 한다면 아마 마지막으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할테고, 그것이 실패한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겠지. 여행을 떠나고 동료들과 이것저것 많은 것을 체험하면서 사내 역시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했을 때지만.
상당히 벌벌 떨기도 하고 목을 답답해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일단 이 마족이 상당히 겁을 먹거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까지 여기에 와서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린단 말인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다. 자신이 마왕을 무찔렀고 마족을 사실상 파멸시켰기에 지금 그녀는 저런 꼴이 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왜 그녀는...
"너는 내가 밉지 않아? 왜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거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너를 그 꼴로 만든거나 마찬가지인 내가 죽는 것을 알 수 있었을텐데. 설사 날 구해도 너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
물론 모든 마족이 나쁘고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때로는 인간이 더욱 사악하고 나쁜 면이 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런 좋은 마족인지는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을 제일 알고 싶었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는지.
"아무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동료들을 다시 만날 수밖에 없겠어. 내가 위험하다는 것은 다른 동료들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니까. 부와 명예를 받아들인 이도 있지만 나처럼 모든 것을 거절하고 갈 길을 간 이도 있었으니까."
초능력이라는 단어는 이능력이 되었다. 초현실적인 능력이라는 단어는 평범한 일반인과 그렇지 않는 자들의 격차를 벌린다는 사회적 시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다를 뿐인 능력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능력자들은 조금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쁜 세상. 이능력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어린 나이에는 평범한 사회 속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이능력으로 발생한 사고는 평범한 사고와는 견줄 수 없다는 이유로 다녀야할 학교마저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나는………’
이능력이라지만 거창하고 좋은 것만 있지는 않다. 하늘을 난다던지, 배도 번쩍 들어올릴 만큼 힘이 세진다던지 그런 것만 있지는 않다.
‘네잎클로버에서 떨어진 한 잎.’
능력을 다루는게 서툴러서 시도때도 없이 능력을 써버리는 실수는, 이능력자들이라면야 당연히 겪는다. 소녀도 그랬다. 그러니 이능력자들만이 다니는 학교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불행한 사고에 휘말릴 타인을 위한 것인데, 소녀가 의도치 않게 능력을 써버린다면 그건…
“아야야….”
주변의 타인이 겪을 불행을 자신에게 가져오는 이능력. 몸조심을 하며 혼자 다니고 다니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능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능력을 사용하며 연습하고 훈련해야 하는데 그러기 쉽지도 않다. 조절치 못하고 새어나오는 능력은 오늘도 어림없이 찾아왔다. 이미 반창고투성이인데 또 상처가 늘었다. 황급히 자리를 피해 사람을 피해 학교 뒷뜰로 향한다. 점심 시간이 너무 길다.
“아무도… 없죠…?”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학교 건물 벽에 조심히 손을 디뎌 빼꼼 고개를 내밀며 확인한다. 왠지 뒷뜰에 누가 있는 것 같았다. 뒤에 누가 있는 것도 같았고, 옆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소녀는 걱정이 많았다.
>>798 "용사... 압도적인 무력이 있으니 무엇이든 칼로 내리치면 그만이요, 자잘한 것은 신경쓰지 않는건가? 동요조차 하지 않아. 당신답군 그래."
"하지만 내가 당신을 돕는다고 해서, 인간의 덕을 받아들여 개심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만 알아둬."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무엇이든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 숲의 현자,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는 어디까지를 생각하고 있을까.
"왕실이 계속 지배하면 우리는 노예, 당신이 왕실을 엎는 걸 도우면 우리는 공신이 되는 거야. 단순명료하지?"
동기는 단순하되 수단은 파격적이다. 마족이 용사를 돕는다. 누가 들으면 웃겨서든 화나서든 팔짝 뛰면서 공중제비를 돌 일이다. 강한 자를 따른다. 그것이 바로 마족의 도덕이다. 왕실이 제 발을 저리는 것과 같이, 용사 이전까지 무력함의 끝을 보이던 왕실은 강하지 않았다. 적어도 마족보다는 말이다.
단발 머리에 듬성듬성난 수염, 검은색 셔츠에 사막색 조끼를 걸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추야자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글레이즈드가 아주 완벽할 정도로 반짝이는 그 대추야자를 한 입 집어 넣는 순간 강렬한 단 맛이 그의 뇌중추를 강타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평온하게, 또 별 대수롭지 않게 대추야자를 입안에 집어넣고 재차 그것을 목구멍 너머로 넘길 뿐이었다. 사내는 '결함품'이었었다. 그의 능력은 처음 나왔을때 큰 주목을 받았다. 수많은 철들을 조종하여 액화 시키고 새로운 형상으로 담금질시킨다, 하지만 남자는 그 능력을 어릴때 이후로는—정확히 7살 이후로— 크게 내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이상도 가능했겠지만, 애시당초 결함품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무감각한 남자에게 있어선, 그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능력보다는 더 중요한 것,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것 그런 남자에게 있어 이 교사라는 것은 천직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부터 머리가 좋았다, 기 보다는 교사하는 직업에 끌려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데에는 그만큼의 지식이 요구되고, 또 그만큼의 대응도 요구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첫 부임한 교탁에 서서 보낸 첫날은 '그저 그랬다.'였다
"음?"
그렇게 부임한지 3년차, 배울거 다 배우고, 정식 교편을 잡게 되었다. 달라진건 없었지만, 그의 일과 중 추가 된 것이 있었다. 바로 '숙직', 이 귀찮은 숙직이라는 것을 행하다 보면, 의외로 재밌는 상황을 많이 보게 된다. 기껏해봐야 퇴근하고 나면 맥주 한캔에 치킨 한마리 뜯는 재미가 고작이겠으나, 숙직을 서며 만나는 학생들은 전부 어딘가 재밌는 구석이 많았기에, 그는 이 숙직이라는 당번제를 즐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애시당초 숙직실에 자신의 이불을 가져다 놓았으니 말 다하지 않았을까. 오늘도 그랬다. 이른 시각이지만 꽤나 재밌는 상황이 아니던가. 대추야자를 다시 지퍼백에서 꺼내 한입 뇸, 하고 집어 넣은 남자는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천천히 움직였다. 왠지 재밌는 장난감을 만났다는 듯이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여자애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른 뒤, 자신의 지퍼백에거 글레이즈드가 잘 형성된 대추야자를 하나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자신도 여행을 떠나고 여러가지를 배우고 익힌 몸이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날줄이야. 그녀의 눈에는 비치지 않을지도 모르나 사내는 애써 태연함을 연기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할테지만 내가 그들을 처단해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인간 사이의 내전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들 중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될 테고, 결국엔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멸하게 되지 않겠는가.
"마족과 손을 잡고 왕국을 치자고? 그리고 내가 새로운 왕이 되고 너희를 공신으로 삼으라고?"
그건 마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니. 그것을 노리는 것일까. 자신을 새로운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해방되기 위해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제 목숨이 위협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왕가와 싸울지는 아직 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왕가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최소한의 충성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널 어떻게 믿지? 방금 이야기했지? 인간의 덕을 받아들이고 개심한 것은 아니라고. 설사 너와 손을 잡고 왕국을 치고 엎는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너희들이 또 다시 이 마을을, 그리고 이 세상을 다시 불바다로 만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개심한 것이 아니라면 너희는 또 다시 이 마을을,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많은 피를 흘리게 하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을텐데?"
그렇다. 사내는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의 위기는 어떻게 모면한다고 치더라도 그 이후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인간이고, 인간 그 자체를 멸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소녀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느냐고 물어본 안부 인사는 뒷뜰에 먼저 자리잡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지, 뒤에서 눈치채지 못한 채 다가온 누군가를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르르 떨고 한 발자국 물러난 것을 보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고양이를 마주친 쥐새끼마냥 경계심이 높았고 방어적이었다. 다행히 어깨를 콕콕 찔러대던 손가락의 주인이 교칙과 사회에 반항하는 학생으로 보이진 않았기에 긴장은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완전히 풀지 못하는 이유는 소녀의 이능력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질 못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좋았을텐데,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런 와중에도 모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봐 남들은 이능력을 쓰고 싶어서, 뽐내고 싶어서 안달인데 실수로 써버릴까 아등바등하자니 긴장을 풀 때가 없었다.
“…아니요.”
고민하지도 않은 거절은 말하는 목소리나 맞추지 못하는 시선과는 다르게 단호했다. 유유자적하게 대추를 씹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누구인지 알고서 음식을 건네받아 먹는단 말인가. 학교 생활을 좀 더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지냈다면 선생님이라는 것쯤은 알았을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는게 아니랬어요. 죄송합니다.”
예의는 발라서 남자에게 공수 인사를 건네며 허리를 숙인다. 불행을 자석처럼 답싹답싹 붙이고 다녀 남들에게 불행을 미칠지 언정, 그건 이능력 탓이지 남을 불행 구렁텅이에 굴러 넣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불행 구렁텅이에서 제일 허덕이는 건 소녀 본인이다. 성격은 모나기는 커녕 둥글었고 되려 소심하기까지 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의심하면서도 사과를 건네는 것이다.
교사가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간 빙글빙글 웃는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이번 학생도 만만치 않게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교복을 보면 자신 학교의 학생인거 같은데, 그렇다고 이 학교 최대의 글러먹은 교사(?)인 자신을 못 알아보다니,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다. 보통 자신을 보면 미친 숙직맨, 아니면 단거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러대는데 말이다. 게다가 맞지 않게 교수법은 또 유명해서 중타 이상은 친다는게 자신의 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학교에 있다면 분명히 이능력자인것 같긴 한데 도무지 무슨 유형인지 알수가 없다는 듯이 그는 잠시간 소녀를 응시 하며 말했다.
"나? 이 학교에 도둑질 하러 왔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구라를 치는 남자였다. 숙직을 서는 남자가 왜 여기를 도둑질 한단 말인가, 오히려 이곳을 지키는 번견이 자신이었으니까. 다시 재차 글레이즈드 된 대추야자를 먹으면서 그는 재밌다는 듯 소녀를 바라보았다. 연신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도, 또 움츠러든 모습도, 왠지 모르게 조그마한 소동물을 보는 느낌이었던 것일까, 남자는 천천히 다리를 구부려 소녀와 시선을 맞추려 한 뒤 입을 열었다.
"도둑질 하기 전에, 도둑한테 사과를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니?"
아주 입만 열면 구라가 튀어나온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목에 걸린 교원증이 보이지 않게 살짝 손으로 조끼 안쪽으로 집어 넣으며, 소녀의 반응을 지켜본다. 이런 학생의 경우는 본래 소심한 성격에 더불어, 주변 영향이 커서 다른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을까봐 무서워 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무리하게 손을 뻗는다기 보다는 천천히 저 돋아있는 가시를 스스로 걷어내고 몸을 일으킬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 이라고 남자는 생각하며 턱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미 이렇게 보고 있는 것도 알게 된거 아닐까. 독 안들었어. 좀 많이 달 뿐이야. 단 거 먹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혹시 아니, 단거 먹으면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니까, 너도 갑자기 퍼뜩!! 떠오르지 않을지 말이야."
남자가 빙글빙글 웃는다. 어차피 믿지 않을 것, 이대로 구라로 밀고 나가자고 결심한 남자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 가라앉으면, 놀라서 요런스럽게 뛰던 심장은 부끄러워서 요란스레 뛰었다. 사실 남자가 한 마디 얹지만 않았어도 태연하게 굴어보기라도 했을텐데, 반응 죽인다며 빙글빙글 웃는 낯에 어떻게 민망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녀의 낯짝은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오히려 얇디 얇아 투명하기 저 안쪽 속내까지 다 비추어보이는 편이었다. 얼굴에 어린 붉은 열기도 민망하기 때문임이 확실했다.
“학, 학교에 도둑질이요…?”
훔칠게 무엇이 있다고 학교에 도둑질을 하러온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 끔뻑거리는 두 눈이 남자를 담는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들면 안 된다지만,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대추야자를 보니 궁핍한 생활에 대추야자로 끼니를 연명하는 생계형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그렇다면 학교에 훔치러 온 것은 필시 매점에 있는 간식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에 도둑질하러 온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둑질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자를 막아야할텐데, 소녀의 이능력은 이런 상황에 썩 유리하질 못했다. 이 남자도 이능력을 갖고 있을지, 말로 설득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상황을 재보는 표정이 너무나 고민스러웠다.
“도둑인 줄 몰랐으니까요…. 그것도 훔친 거에요?”
도둑이라는 남자가 하는 지적에 입술을 오물 씹었다. 잘근 씹지도 못하고 오물거리듯이. 도둑에게 받은 지적이 분하다는 표현 치고는 작았다. 그나마 대추야자도 훔친 거냐는 의문인지 지적일지 모르는 말 한 마디라도 해서 다행이다.
“범죄자랑 아는 사이 하기 싫은데요…….”
소심한 태도치고는 그래도 할 말은 다 한다. 단 거고 뭐고 도둑이라는 자가 내미는 걸 받아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마도 아까 잘못 사용한 이능력이 가져온 불행은, 무릎에 새로운 상처가 늘어난 것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도둑을 만나는 것까지 포함인 것 같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여기 학교, 이능력자만 있는 건 아세요? 그,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걸요. 가는 길에 자수도 하시고…….”
지극히 상냥한 발언이다.
# 재밌게 이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글러먹기는 무슨 훌륭한 교사시다~!!! 대추야자를 급식으로(?) ☺️
야는 지금 내 얼굴을 모른다! 내 과목이 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이 퍼뜩 든 그는 순식간에 도둑질에 성공한 물건을 지어내었다. 그도 그럴게 이미 도둑질에 성공했을수 밖에 없는게 지금 현재 본인 담당과목이 중국어였으니까, 어차피 이능력 시험이야 자기 관심 밖이고 자기도 문제 출제에 참여했으나 순수 100퍼센트, 본인이 낸 과목은 중국어뿐이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마치 모 퍼렁고양이 로봇 주머니 뒤지는 것 마냥 그는 조끼 안쪽에서 자기가 출제해낸 답안지와 시험지를 흔들어 보이면서 히죽 웃어보였다. 뭐, 왜, 뭐, 내가 낸 시험지고 내 답안지야, 그거 좀 들고 있는다고 대수냐?!
"대추야자는 중국어 교사 뒤통수 후려 치고 훔쳤는데?"
이젠 자기 뒤통수를 자기가 쳤다고 구라치는 교사였다. 그러면서 이제 다음번에 어떻게 골려먹을까 고민읋 하면서 그는 대추야자를 다시 입안에 집어 넣었다. 능력의 특성상 에너지 소비가 많은 그로서는 당연히 주식에 가까운 주전부리였기에 항상 들고다니면서 고칼로리, 고열량 음식을 입에 집어 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보면서 어떤 여교사는 사기야!! 라고 외쳤지만, 그가 능력을 쓸때마다 빠져나가는 살, 나중에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며 결국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 대추야자는 자신의 능력용 대비 식품이었던 거다. 그렇게 다음 구라를 이어나가려는 순간,
[아, 아. 방송반에서 알립니다. 지금 교정 뒷편에 계신 강 소랑 중쌤, 학생주임님이 순진한 얘 그만 골려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상 전달 끝.] "......"
그러고보니 까먹고 있었다. 학생주임의 능력, 천리안. 백에 백 자신이 농땡이 피우고 있는거 알고 지금 어린애 골려 먹는 장면 보면서 팝콘 뜯다가 시험지 가지고 장난치는거 보고 지금 뭐라 그런거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아닌거 마냥 다시 자신의 학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도 이능력자니까... 어...."
젠장, 다된 밥에 코풀기라니.....
"이제 도둑 아니라고 해야하나?"
그걸 말이라고 하냐!!
"끄응..... 정식 소개하마, 뭐 오리엔테이션에서 안들었겠지만, 지금 현재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중국어 과정을 총괄하는 강 소랑이다. 뭐.... 도둑은 부업이야."
죽어서 현세에 남는 것이 순리에 있어서는 이례적인 일인 이유가 이런 법이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죽게된다면 전세의 기억은 잃게된다. 다만 이렇게 망령으로 남는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기피할 수 밖에 없다. 망령으로서 존재하는 자아는 아직도 죽은 것이 아닌 죽기 전의 전세의 기억을 가진채로 남아있기에, 성불한다는 것은 다시말해 스스로의 소멸과도 다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이 하고자하는 존재의 소멸을 막고자하는 것과 틀리지는 않은 것인가.
"죽기 전에 이루지 못한것이 한이고 원념이지 않은가. 죽고도 망령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것이 원인이다. 그 외에 현세에 영이 떠도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건가? 삶에 가볍고 무겁고의 차이는 없다. 그저 삶에 있어서 이루지 못한 것이 현세를 떠도는 원인이니까."
자신은 어떠한가 소영의 질문에 한마디로 생각할 이유조차 없다라 단정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삶조차 부여받지 못한 내가 생각할 이유가 있겠나?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사라진다. 존재해선 안되었으니까."
해한사는 저승차사가 해야할 일의 일부인 망령의 처리를 위해 대행직으로 부여된 임시직에 불과했다. 그만큼의 편의를 제공받았지만.
"남겨진 것들을 하나하나 끝내서 성불시키는게 내 일이니 내가 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할 도리다."
나라는 이레귤러이기에 이레귤러로서 해야할 일은 실패하지 않고 모두 끝냈다. 그게 내 일이다.
>>803 "싸우기 싫으면 영원히 도망치면 돼. 우리가 싫으면 혼자 하면 돼.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지만 정말 그걸 원해? 소피게네이아는 물었다. 부와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삶을 내버리고 영원히 도망치는 것. 단신의 가공할 무력으로 왕국의 군대를 깨부실지언정, 반역에 필수적인 거점들을 점령하고 유지하지 못하여 결국 파괴만을 반복하는...그래. 정말 마족처럼 될지. 당신이 바라는게 그것인가.
"그냥 당신이 마족들을 붙들고 뜻대로 휘두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상호 계약을 하자구."
그쪽은 머릿수가 필요하다. 이쪽은 더 나은 처우를 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남은 것은 악마와의 거래다.
"이 자리에서 바로 정하라곤 하지 않을게. 하지만 서두르는게 좋아. 내가 왕실의 참모라면 당신에게 씌워진 영웅의 이미지부터 벗겨내려고 할 테고, 그건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지."
민중들은 우매한 것이 그 성질이라 진실을 좆지 않고 자신이 좆는 것을 진실로 탈바꿈시킨다. 왕국의 지배계층은 그것을 다루는 것에 이골이 난 존재들이다. 무력에서 밀리니 그들이라도 휘어잡아 용사를 고립시키려 하겠지. 그러면 밀리는 무력을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용사와 같은 편에서 싸우다보니 힘에 대한 감각이 마비가 되었나. 멍청한 종자들. 덕분에 기회가 생겼지만 보면 볼 수록 웃음만 나와.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어."
그녀는 목에 채워진 주문을 과시하듯 내보였다. 여전히 불안정하게 깜박였다. 시간이 촉박한건 양 쪽이 피차일반이었다.
꽤나 간교하게 악마의 속삭임을 읊고 있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자신이 마족들을 붙들고 뜻대로 휘두르는 것이 낫지 않냐고 이야기를 하나 정말로 그렇게 하면 자신이 마왕과 다를 것이 뭔가. 마족을 이끌고 인류를 멸하려고 하고 공포에 떨게 한 그 존재와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그 선택을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선을 넘어버리는 무언가가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사내는 쉽사리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말만 들으면 나에게 다음 마왕이라도 되라고 말하는 것 같은 거 알아?"
시간은 상당히 촉박할지도 모르고 그 속에서 선택을 반드시 하나를 해야만 했다. 이대로 죽는가. 아니면 영원히 쫓기는가.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저 이전의 삶일 뿐인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사내는 결심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조용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저 마족의 말 그대로를 따를 생각도 없었다.
"움직이겠어. 허나 네 뜻대로 하진 않아. 너에게 걸려있는 주문을 해체하는 대신에 내 옛 동료들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줘. 그리고 만약 위험하다고 한다면, 이쪽으로 데리고 와 줘. 그 정도의 시간은 당연히 있겠지? 바로 왕가의 사람들이 움직이진 않을테니까."
마족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옛 동료들과 다시 뭉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고 필요하다면 싸운다. 허나 싸우지 않고 빠져나갈 길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이 마족의 주문을 해체해주고 역으로 그녀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마족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과 똑같이. 설사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수고했으니 해방시켜주는 것 정도는 대가로 치룰 수 있지 않겠는가.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일단 너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자유가 제공되니까.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난 마족들을 부릴 생각이 없어. 마왕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기에 마지막까지도 난 내 동료들과 함께 행동할거야."
설사 그러다가 죽는다고 한다면 조금 분할지도 모르지만, 그만큼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용사라고 하더라도 죽음이 피해가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807 소영은 대답 대신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서희에게 기대 따위 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운 가벼운 형태의 태도로 소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을 가볍게 던졌다. 마치 그것이 농담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렇겠지. 이해 못할거라고 생각했어. 어차피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쩌다 날 보게 되었든...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걸. 서희는 귀신에 대한 철학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그런 건 모르겠어서."
자신이었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소영은 떠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은 한 가지 해답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상이 1과 0으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면 서희의 말도 얼추 맞기는 했다. 그 막연한 두려움이 소영의 미련이기도 했고 그것이 일찍 죽은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한 일 수도 있었다. 다만 뭇 삶이 그러하듯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사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없었다. 하물며 일찍 죽게 된 사람이라면 그 삶의 이유와 죽지 않고자 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을까. 그런 의미에서 소영의 한은 사실 삶을 향한 미련에 가까웠고, 그 광범위한 주소를 가늠해 추측하는건 생판 모르는 남으로써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편으로는 갑작스레 거만한 자세로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한을 달랜다는 것은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인데, 시대가 흐르고 대상이 달라진다면 그에 대한 언행도 달라져야만 했던 법이다. 어리다는 것이 나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면, 서희의 서투름도 어떤 의미로는 어리다 봄 직 했다.
그러다 문득 서희가 늘어놓는 말에 소영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진다. 통 속내를 알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서 이유를 듣는 것이 신기했던가.
"그렇구나. 그럼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이겠네. 나는 다음 생이나 천국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이 다음에 전소영이라는 사람은 없는 거잖아. 나는 내가 되어서 살아왔던 시간과 감정들, 그리고 기억이 소중한거지 다음 생이니 사후 세계니 하는 곳에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든지 중요하지 않아."
애써 밝은 체 하던 소영의 낯빛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밝고 상냥해 보이던 인상에 그늘이 지니 이질적인 감이 유난히 느껴졌고 어느새 어스름이 낀 창 밖의 어둠에 의해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서희를 보면서 소영은 나즈막히 말을 꺼냈다.
"그러니 서희도 알거야. 사라진다는 게 얼마나 막연하고 두려운 일인지. 내 한이라, 그건 아마 일찍 사라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미련이 아닐까?"
미련, 그 미련함과도 닮은 단어는 어쩌면 사자(死者)가 소원을 가지는 것이 미련한 짓이었기 때문에 기인된 단어였는지도 몰랐다. 산 자에게 말할수도 신에게 한탄하기에도 멀고 사사로운 것들을 그나마도 이루고 싶다며 '미련'을 가지는 것. 그럼에도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다면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죽음 이후에도 남아버린 자잘한 미련함을 들어주고 위로해 줄 사람.
그렇지만 소영에게 서희는 그런 사람은 못 되었다. 어렸던 그에게 몇 백살이나 먹은 별종은 별달리 의지가 되지도 공감이 가지도 않는 존재였으니까. 첫 단추부터 어긋난 셈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소영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건 서희가 감추는 것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811 어둠을 밝히던 담뱃대의 불꽃이 일순 꺼지자, 소영의 눈은 되려 둥글게 뜨였다. 이윽고 겨눠지는 담뱃대의 끝을 눈끝으로 쫓으며 동그란 눈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제법 건방진 말투로 늘어놓는 조금 전 과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에 눈을 유하게 누그러뜨렸다. 아무래도 관심이 생겨 호기심을 끌었다고 봐야겠지. 그러나 관심을 빛내는 것과 별개로 소영은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고 소희의 말이 끝나서야 말을 내뱉었다.
"그게 네 진짜 마음이야? 이상한 코스프레 같은 게 아니고 진짜 서희의 마음."
그러다 다시금 말을 셈하는지 입을 가리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특유의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상냥하기에 굳이 들여다 볼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웃음. 하지만 그 상냥함 안에는 분명 속내가 있었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영역이었겠지만, 상냥한 사람에게도 나쁜 마음 정도는 있었으며... 지금 소영은 조금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기심.
"네 몸에 들어가도 좋다고 했지? 피아노를 치려면 네 몸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렇다는 건 네 몸에 들어가면 살아있는 사람처럼 지낼 수 있다는 뜻이지?"
이후의 말은 짐작할 법 했다. 여느 귀신처럼 네 몸을 내놔라 할 수도 있었다. 다만 소영의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불안해 보이는 얼굴은 온갖 잡생각을 피어올리고 남을 쯤에야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장우현이 왜 그런 의뢰를 했는지도 알고 있어? 그 애는... 내가 죽는 모습을 본 첫 목격자거든. 죽은 뒤의 내가 뭘 하고 있을 지, 궁금해 할 이유도 없고. 장우현과는... 인생에서 유일한 실수였다고 할 관계였어."
고작 고등학교 재학 후 3년이 지난 시기의 사회 초년생이 인생에서 유일한 실수였다고 불릴법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확실한 건 협주곡을 연주하고 싶다던 바램과 장우현은 아주 먼 관계가 아니라는 거였다.
지금 주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눈앞의 마족을 바라보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저 주문을 가지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을테니까. 지금 그녀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것처럼. 저 정도 주문을 풀어버리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마왕의 성에서 싸울 때도 얼마나 많은 주문을 파괴하고 풀었던가. 물론 정말로 전문적으로 마법을 해체하는 제 동료 중 마법사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실력이었으나 그래도 이 정도 주문이라면 자신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마법의 핵. 그것을 파괴하는 주문은 상당히 정신을 집중해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에 한해서. 이게 바로 자신이 아직 실력이 떨어진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그 마법사는 아주 가볍게 여러 주문을 손쉽게 파괴했었으니까. 이내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던 사내는 영창을 마쳤고 이내 기합을 주었다. 쨍그랑. 가볍게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는 마족에게 걸려있는 주문은 해체되었다.
물론 그녀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허나 배신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크게 타격이 갈 것은 없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은 아직 현역 사냥꾼이었다. 힘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쉽게 목숨을 잃을 이가 아니었기에 별 일이 없을 거라고 사내는 판단했다.
"약속은 지켰어. 그럼 이젠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알고 있겠지?"
물론 여기서 그녀가 자유로워졌으니 바로 도망치지 말란 법은 없었다. 허나 도망친다고 한다면 도망치는대로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루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동료와 합류해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 수단 중 하나가 사라진다고 한들, 딱히 그에게 타격이 오거나 할 일은 없었다.
"병사를 보내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용사라는 타이틀이 설사 벗겨진다고 해도... 애초에 그런 것을 원해서 여행을 한 것도 아닐 뿐더러 당장 위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제대로만 시행해줘. 알았지?"
이 순간까지도 그는 끝까지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무런 위해도 없이 평화롭게, 조용히 사냥만 하고 살고 싶었을 뿐.
이미 훔쳤다니, 소녀의 눈동자가 이보다 더 커질 수 있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동그랗게 뜨였다. 심지어 훔친 것이 매점에서 파는 빵도 아니고 이번 중간고사에서 쓰일 중국어 과목 시험지와 답안지라고 한다. 보란듯이 조끼 안쪽에서 꺼내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능력자만 다니는 학교에 선생님들이 이능력자인 것도 당연했고, 이능력자들을 피해 시험지를 훔쳐낸 저 도둑도 분명 이능력자일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니 이번에는 표정이 심각해진다. 도둑을 붙잡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동귀어진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행을 끌어당기고 끌어당겨서, 바로 앞에 있는 이 도둑도 휘말리게 하면 어떤 불행이 올 지는 몰라도 붙잡을 수는 있지 않을까.
“뒤, 뒷통수를요…?”
이제는 놀라지 못하고 겁에 질렸다. 중요한 문서를 훔치는 것도 모잘라 사람을 해하다니 도둑이 아니라 강도 아닌가. 뒷통수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쓰러져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을 떠올렸다. 사람의 뒷통수를 후려치고 훔쳤다는 대추야자를 먹고 있는 것도, 그 대추야자를 먹으라고 권했던 것도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을 감았다 뜨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의 불행을 가져와서 악몽을 꿔버린 것이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지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주… 죽인 건 아니죠……?”
웬만해서야 사람을 죽였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살인자는 없겠지만, 지금 그런 올바른 논리적 사고를 하기에는 영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떄 교내 방송이 울렸다. 방송반에서 알린다며, 교정 뒷편에 있는…
“서, 선생님…?”
중쌤이라면, 중국어 선생님을 뜻할 것이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도난당하고, 대추야자를 빼앗기고 뒷통수를 후려맞았을 선생님이 눈 앞에 있다. 방송에 의문을 가득 품고 강도, 아니,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꿈뻑꿈뻑 바라보면 선생님이라는 자기소개가 나왔다. 부업이 도둑이라는 부연설명도 있었지만 신뢰는 이미 바닥났다.
“선생님이 거짓말 하면 안 돼요.”
소심한 구석은 여전했지만 시선이 조금 불량해졌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핀잔주고 타박주고 싶은 마음이 시선에 조금 담겼다.
"오, 의외의 정답지. 상으로 너네 반에 가산점 +2... 는 그 권한은 없으니 중국어 수행평가 등급업이라도 시켜주마."
참 잘했어요, 교사의 표정으로 장난기 반, 대단함 반이 섞인 감정을 목소리에 담아내며 도장을 찍는 시늉을 한다. 교사 답지 않으면서 교사 다운 모습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지만 어째서 그런 단순한 답문에 대하여 교사는 왜 그런 후하디 후한 수행평가 등급 상승을 제시한 것일까란 의문이 남는다. 그 질문에 대해 교사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답변을 던진다.
"첫째, 아까의 의사 표현, 방금 전까지 겁에 질린 그런 표정보다도 좀 더 심지가 굳어진 듯한 표정이 첫번째고,"
지퍼백 가득 담겨있는 대추야자를 하나 더 꺼내 손가락으로 튕겨 하늘 높이 던진뒤 입안으로 골인, 하지만 자세히 보면 궤도가 살짝 엇나가 이마에 맞을뻔 한 것을 새끼 손톱만한 강철 구슬이 살짝 쳐서 궤도를 뒤틀었다는 점을 눈치 빠른 사람은 알수 있을것이다. 별거 없다는 듯 씨앗까지 다 부숴먹은 교사는 재차 말을 이었다.
"두번째, 눈빛이 좋아졌어. 겁에 질린 쥐에서 조금 나아져서 그래도 날 선 고양이 같다는 느낌이지."
아주 잠깐의 대화동안에 그는 마치 소녀를 관찰했다는 듯이 재밌는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장난스럽게 교원증을 꺼내 허공으로 빙빙 돌리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교사의 말이 그랬다. 분명 그녀를 자극하였으나, 오히려 그것이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아주 잠깐이나마 변화된 모습에 교사는 가산점을 부여한 것이리라.
"그래도 만점은 아니니까, 그럼 시작해볼까. 어차피 이제 이 이후로 시간 많지?"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충수업 신청서. 마치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교사는 재차 입을 열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면 대인기피증에 여러가지 복합적 요소가 가미된 등교거부도 있었을거 같은데, 어때. 지금부터 나랑 보충수업 좀 하고 출석점수 채울래? 아니면 유급할래? 대신, 수업은 되게 짧게 이루어질꺼고, 추가로 이능력 조언도 해주마."
선택지는 많았다. 다만 교사가 해줄수 있는 것은 선택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것 뿐.
//놀러온데에서 의무감을 느끼는 순간, 그건 놀이가 아니야! 그러니까 늦게 온데에 대해 너무 그럴 필요 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덤으로 선생님의 모습은 20~30대 기무라 타쿠야를 연상하면 매우 편한데스, 거기에 살짝 가꾸지 않은 야성미를 더하먄 완벽함!!
"어떤 쪽이냐 묻는다면 아까까지는 공무원이고. 지금은 당신이 계율의 제약을 풀었으니까 이쪽이 본연이라고 해야하나. 좋을대로 생각해. 아 이건 질문으로는 안쳐도 상관없어. 보통은 여기까지는 안오거든."
사람의 속내는 사람이 어찌알겠냐만 죽은 사람이지만서도, 직감적으로 느끼기에 이건 아까와는 다른의미의 이끌림을 불러오는데에는 성공했나보다. 이윽고 짓는 웃음은 상냥한 사람이 가면을 쓴 미소라고 생각했다. 이건 꽤 욕망이 감도는 부류다.
"체격 차를 제외하고는 생전에 움직이던 것과 별차이는 없겠지. '체격'만 제외하고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서영이 막상 반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면 역시 내 체격이 문제일것이다. 기껏해야 중학생정도에 성장이 멈춘듯한 체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격을 한번더 강조하는 신경질 부분을 드러냈다.
"의뢰자랑 당신의 관계는 내가 알고있는 거랑은 꽤 다르네. 뭐 의뢰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짐작은 가지만. 궁금해할 이유가 없다라는 당신의 단서가 있다면 답은 그거겠네. 죽은 사람을 봤다는 그 두려움을 지우려고 마치 더럽혀진걸 깨끗하게 하고 싶다 라고 해야하나. 하나 더 있다면 이 장소에 유령이 있다는 소문. 그걸 없애는데 강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지금은 졸업한 인간이 아니던가? 그런 인간이 이미 거의 관계가 없어진 장소의 유령 소문을 없애려고 한다는건 꽤 의아해 할 만한 소재였다.그게 내 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으니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안들었지만서도. 여기까지 짚고 넘어간다면 조금은 파볼만한 이야기가 된다.
"행여나 내 몸을 빌려서 사람을 해하던가, 범죄로 이용하려 한다면 바로 몸에서 쫒아낼거야. 계율위반이니까."